제 7장 천오백 년 만에 흘리는 눈물
" 무슨 소리냐?"
나적리는 놀란 얼굴로 나천후를 보았다.
적이 쳐들어왔다는 보고를 한참 전에 받았고, 백여 명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데 아직 제압하지 못했다는 보고가 다시 올라온 것이다. 아니 죽은 자들을 헤아릴 수 없다는 보고였다.
" 놈들이 생각보다 강한 모양입니다."
" 생각보다 강하면 어느 정도냐?"
" 도검이 불침하는 자들이랍니다."
" 전부가 금강불괴지신이란 말이냐?"
" 무공은 강기 경지 정도라고 합니다."
" 완전한 금강불괴가 아니라면 외공을 익힌 자들이란 말이구나."
"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 우리 측 피해는 어느 정도냐?"
" 풍밀가 정예 오십 명이 당했고, 만양평에 모였던 무인들의 수는 헤아리기가 힘듭니다."
" 놈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 밀천을 향해 다가오는 중입니다."
" 그럼 목표는 우리라는 말이구나.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 대야벌이 가장 유력합니다."
" 그렇겠지. 놈들의 목을 가져오는 무인들은 최우선적으로 중용하겠다고 하거라."
" 우선은 벌판에 모인자들로 막자는 말씀이십니까?"
" 그들이 선발대인지도 모르는데 우리 정예를 투입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나적리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벌판에 있는 수많은 무인들을 이용해서 최대한 막고 대야벌의 정예가 쳐들어왔을 때 밀천 무인들을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 알겠습니다"
" 그리고 잠룡대 대원들이 있는 곳을 통제해라."
" 그건 이미 지시를 내려두었습니다."
" 도망치려고 하면 목을 쳐도 상관없다."
" 다시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 서둘러라."
" 알겠습니다. 조부님."
나천후는 급하게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사유성이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나천후는 조부와 나눴던 이야기를 빠르게 전했다.
" 알겠습니다. 천주님."
고개를 끄덕인 사유성은 대기하고 있던 자들을 향해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 우리도 가보세."
나천후와 사유성은 남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로부터 한 식경 후.
" 놈들의 신체 중 아무거나 가져온 무인은 최고 대우를 받고 밀천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 놈들의 신체 중 아무거나......."
벌판 곳곳에서 외침이 터녀 나왔다.
그 외침은 효과가 있었다. 강시들이 워낙 강하게 밀고 들어왔고, 수백 명이 죽임을 당하자 많은 무인들이 떠났거나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침입자들의 신체 중 아무거나 가져오면 중용한다는 말이 들려오자 무인들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들은 여전히 살겁을 자행하는 자들이 강시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천오백 년 전 천마와 함께 전설로 묻힌 일백마라는 사실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을 사람으로 간주했고, 사람이라면 지칠 수박에 없다고 생각했다. 무인들이 몸을 돌린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들의 그런 결정이 더 많은 혈겁을 불러올 거라고는 그때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 놈의 팔을 잘라냈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그들의 용기를 더욱 북돋웠다.
무인들은 꾸역꾸역 강시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 크아아아!"
" 캬캬캬!"
" 키키키!"
무인들이 몰려들수록 강시들은 더욱 광분하여 살겁을 자행했다. 팔이 잘리고 옷이 찢겨나고도 상관없었다. 그들은 괴소를 날리며 달려드는 무인들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 으음!"
대문 위쪽에 마련된 공간에서 벌판을 내려다보던 나천후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얼마나 많은 무인들이 죽어갔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놈들은 지친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새 대문에서 삼십여 장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바로 그때 강기가 어린 검이 검은 옷 사내의 목을 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천후는 눈에 내공을 보았다.
" 젠장!"
하지만 무인의 검은 사내의 목을 잘라내지 못했다. 삼분의 일 정도 들어가 다음 멈춰 서고 만 것이다.
그 다음 상황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 크악!"
검이 빠지지 않아 안간힘을 쓰고 있는 무인의 목을 향해 검은 옷 사내의 검이 휩쓸고 지나갔다.
카앙!
또 다른 검 하나가 검은 옷 사내의 목으로 박혀 들어갔다. 이번에도 역시 검강이 어린 검이었다.
" 크아아!"
사내는 비명도 그렇다고 함성도 아닌 특이한 외침을 토해내며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강기를 펼치던 무인은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두 조각으로 잘려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무인들은 집요했다.
그들은 도끼로 나무를 찍듯 쉬지 않고 검은 옷 사내의 목을 향해 검을 후려쳤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했던가, 그렇게 질겨 보였던 사내의 목이 결국엔 뚝 떨어졌다.
" 잘라냈다! 놈의 목을 잘라냈다!"
마지막으로 목을 잘라낸 무인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 크아악!"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새 다가왔는지 시커먼 손 하나가 사내의 심장으로 파고들어 갔다.
" 잡았다! 내가 놈을 잡았다. 아아악!"
" 잡았다. 내가 놈을 잡았다."
이곳저곳에서 목을 잘라냈다는 외침이 들려왔다.
하지만 나천후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단 한 명의 목을 잘라내는 데 너무 많은 무인들이 죽어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아직은 밀천 무인이 아니지만 장차 밀천의 전력이 될 자들이 아닌가.
그런데 검강을 펼치지 못한 자는 접근이 불가능하고 검강을 펼치는 자는 십여 명이 죽어야 간신히 한 명의 목을 잘라내고 있다.
" 정녕 넘을 수 없는 벽인가?"
나천후는 하늘을 보았다.
황궐을 비롯한 네 문파와 만마림 생사림은 지리멸렬하고 패천림, 봉황림, 만독림이 떨어져나가고 생사림은 멸문했다. 오할 이상의 전력이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아니 엄밀하게 따지면 벌내쟁투를 획책했던 자들 또한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니 육 할로 늘려 잡아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엄청난 고수들을 보유하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강한 곳인지.
대야벌이 주는 압력은 숨쉬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 크아아!"
" 캬야아!"
" 하지만......"
나천후는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아무리 큰 나무도 도끼질에 넘어가고, 집채만 한 바위도 세월 속에 모래가 된다. 그게 세상 이치인 것이다.
" 저들이 죽는 것처럼 너희들도 언젠가는.... 응?"
다시 평원을 향해 시선을 내리던 나천후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멀리 산중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발견한 것이었다.
" 혹시?"
적의 후발대가 이곳을 향해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너무 걱정 마십시오. 천주님. 우린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옆에 있던 사유성이 위로의 말을 했다.
" 저 곳을 보게. 부천주."
나천후는 조금 전 불빛이 나타났던 곳을 가리켰다.
" 불빛이군요."
사유성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북쪽 산중턱에서 불빛이 깜빡거렸다. 어떻게 보면 모닥불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등불 같아 보이는 불빛은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 난 일단 조부님께 알리겠네."
나천후는 급하게 몸을 날렸다.
" 적이 벌판에 진입했을 때 알려도 되는데."
사유성은 불빛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자신들은 현기환사죽영진을 펼칠 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상태고 요소요소에 밀천 무인들을 배치했다. 적이 만양평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현기환사죽영진은 발동할 테고 진짜 전투는 그때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았다.
" 크아아!"
" 캬아아아아!"
" 크아아아!"
" 크어어어!"
" 둘?"
불빛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사유성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네 명의 비명이 동시에 들려오는 순간 불빛이 확 커지며 산중턱 상황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명의 그림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 대야벌 후발대가 아니란 말인가?"
그는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사유성의 예상대로였다.
만양평이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에서 불을 피우고 있는 두 사람은 천마 제석강과 무불 백강이었다.
" 이제 만족하는가?"
제석강은 종이 하나를 태우며 중얼거렸다.
그가 태우는 종이에는 제구십칠 마 사령마왕 아강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 주공은 만족하십니까?"
묵직한 목소릭다 제석강의 귓전으로 흘러들었다.
제석강은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보았다. 그는 다름 아닌 백강이었다. 흐릿했던 백강의 눈동자에서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정신이 든 겐가?"
제석강은 물었다.
" 저 녀석들의 비명이 제 정신을 깨운 모양입니다."
백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도 저 친구들은 좋은 일은 하고 가는 구먼."
제석강은 이번엔 지전을 태우며 말했다.
" 저 녀석들은 방법이 없었습니까?"
" 저 친구들과 자네와는 상태가 달랐네. 자넨 피부가 보통 사람보다 약간 검었지만 저들은 아주 검었네. 마치 회혼마인처럼."
" 완전한 천년마인이 되지 못했다는 말이군요."
" 잠마가 없는 상태에서 자네와 내가 깨어난 것만 해도 기적이었으니까."
" 얼마나 지났습니까?"
" 천오백 년이 흘렀네."
" 천오백 년...."
백강은 말끝을 흐렸다.
" 자네와 내가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린 누군가에게 이용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네. 글리고 현 강호에서 회혼마인을 제강해낸 자가 있다고 하더구먼."
제석강이 일백마를 재워줄 결심을 한 건 풍천마인과 회혼마인을 없앤 적이 있다는 연우강의 말 때문이다.
회혼마인.
천년마인의 바탕이 됐던 강시들이다.
그걸 제강해 냈다면 천년마인을 제강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자신과 백강은 대법이 성공하여 천오백 만에 천년마인 상태로 깨어났다고 하지만 완전한 신체인지 알 길이 없다.
지금 상태가 계속 유지될 지. 아니면 내일이라도 몸이 굳고 부서질지. 그 어떤 것도 자신할 수가 없다.
만일 내일이라도 자신과 백강이 죽는다면, 일백마는 의식이 없는 강시 상태로 남게 된다.
그렇게 되면 누군가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여 강호를 헤매고 다닐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그래서 몸에 이상이 생기기 전에 일백마를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들이 가장 좋아했떤 방식으로.
" 그래서 녀석들이 가장 좋아했던 전장으로 보낸 겁니까?"
백강은 벌판으로 시선을 주었다.
자신을 비롯한 일백마의 꿈.
그것은 피가 흐르고 혈향이 가득한 전장에서 싸우다 죽는 것이었다. 주공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 꿈을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총으로 들어가면서 그 꿈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천오백 년이 지난 지금 주공은 녀석들을 전장으로 들여보낸 것이다.
" 우리 둘이 저들을 보내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 저들이 부럽습니다."
백강은 물끄러미 벌판을 쳐다보았다.
마치 꿈도 기억해 내지 못하는 단잠을 자고 난 기분이다. 그런데 천오백 년이 흘렀단다. 마치 지난 천오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꾸지 못했던 꿈을 이제야 꾸는 것 같았다.
“ 난 하늘에 감사하네.”
“ 녀석들의 임종을 지킬 시간을 얻었다는 말입니까?”
“ 그렇지.”
“ 저도 태우겠습니다. 주공.”
백강은 제석강 앞으로 다가앉았다.
“ 자넨 녀석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태우게. 난 지전을 태우겠네.”
“ 그렇게 하겠습니다.”
“ 그런데 새롭게 태어난 기분은 어떤가?”
“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 허허허! 나도 처음엔 그랬다네. 그런데 말이네 얼마 전에 재미있는 녀석을 만났네.”
“ 어떤 녀석인데 관심을 가지십니까?”
“ 마총에 틀어박혀 있던 나를 강호로 끌어낸 녀석일세.”
“ 크아아!”
“ 캬아아!”
“ 크아아!”
그때 벌판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 누군지 알겠는가?”
“ 당연히 알지요.”
백강은 종이를 잠시 뒤적이다가 세 장을 집어 들었다.
그 종이에는 지옥마사 육도, 마검귀왕 채종인, 유령무영마 설검천이란 글이 적혀 있었다. 그는 세 장의 종이를 가만히 내려보다가 불을 붙였다.
“ 그 녀석이 주공께서 천마 제석강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단 말입니까?”
백강은 불타는 종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 풍천마인과 회혼마인을 만났다는 녀석이었네. 녀석은 내가 정말로 살아났는지 그걸 확인하기 위해 천등십관에 도전을 했다네.”
“ 천등십관에 도전할 정도면 상당히 강하겠군요.”
“ 나보다 더 빨리 천등십관을 통과했다네.”
“ 정말입니까?”
“ 지금껏 내가 봐온 무인들 중에서 가장 강자였네. 그런데 그 녀석이 대뜸 날 형님이라고 불렀다네.”
“ 정말 그렇게 불렀단 말입니까?”
“ 그것뿐만이 아니네. 늙으면 뭐니뭐니 해도 돈이 최고라고 하면서 십만 냥을 줬다네. 그 돈으로 친구를 만들어보라고 말이네.”
“ 강호 무림에 신경 쓰지 말고 조용히 쉬라는 말이군요.”
“ 그런 뜻이었겠지.”
“ 큭큭큭! 그놈 물건이군요.”
“ 크아아아!”
“ 캬아아!”
“ 크아아아!”
또다시 비명이 들려오자 백강은 종이를 뒤적거리다가 세 장을 뽑았다. 그러고는 불을 붙였다.
“ 아마 그 녀석이 무림에 뜻을 두었다면 저 친구들의 마지막을 그 녀석에게 맡겼을 거네.”
제석강은 지전을 태우며 말했다.
“ 무음마소를 그 녀석에게 준 게 아니란 말입니까?”
“ 무음마소는 다른 녀석에게 줬네.”
“ 누구에게 줬습니까?”
“ 천오백 년 동안 우리를 기다린 녀석들이 있더구먼.”
“ 천등십관을 관장하던 장로들의 후예들인 모양이군요.”
“ 맞네. 그런데 그놈들은 맹랑하게도 날 이용해서 강호를 제패할 생각을 하고 있더구먼. 그 중 한 놈의 이름이 제천강이라네.”
“ 제천강이라고요?”
백강의 눈초리가 슬쩍 치켜 올라갔다.
주공인 천마의 이름은 제석강이다. 천오백 년 동안 마총을 지켜왔다면 주공의 이름이 제석강이란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천강이란 이름을 사용했다면 어떤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것도 좋지 않은 쪽으로.
“ 내 이름과 비슷하지?”
“ 그놈들을 그냥 두었습니까?”
“ 부모님은 성씨가 제씨고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려니 해야지.”
이세 천마에 대한 소문을 낸 자가 무무 제천강이란 사실을 제석강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둔 건, 제천강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든 간에 지난 천오백 년 동안 천등십관을 지켜온 성의가 기특해서였다.
“ 무공은 어떻습니까?”
“ 무공도 꽤 쓸 만했네. 그런데 그 녀석들 중에 저주악마지심을 타고난 녀석이 있었네.”
“ 무음마소를 그 녀석에게 주었습니까?”
“ 그 녀석이라면 일백마에 어울리는 죽음을 선사해줄 것 같았네.”
“ 잘하셨습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실 참입니까?”
“ 자넨 어떻게 하고 싶나?”
“ 모르겠습니다.”
“ 그러면 일단 두고 보도록 하세.”
“ 그런데 저긴 어딥니까?”
백강은 벌판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저렇게 많은 무인들이 모이는 건 천오백 년 전에도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 밀천이 개파대전을 하는 곳이라고 하더구먼.”
“ 영세오천의 그 밀천 말입니까?”
백강은 깜짝 놀라 물었다.
“ 그때와 거의 다르지 않네. 무림을 지배하는 대야벌이란 세력이 있는데 그곳 벌주는 담대 씨였네.”
“ 담대 씨라고요?”
“ 지천 오대세가를 기억하는가?”
“ 담대세가, 하후세가, 혁련세가, 독고세가, 모용세가가 있지 않았습니까. 혹시.....”
“ 자네 예상이 맞네. 다섯 세가 중 담대세가의 후예라네. 그런데 지금은 범천담대세가라고 불리고 있더구먼.”
“ 큭! 비열한 놈들.”
백강은 피식 웃었다.
천등십관을 전부 통과한 무인에게 내리기로 하였던 범천의 지위. 범천은 지천의 통치자고 천주가 된다고 하였던 맹약을 깨트린 놈들이 지금은 제 가문 앞에 범천이란 칭호를 쓰고 있다.
“ 세월이 그만큼 흘렀으니까. 그리고 내게 돈을 줬던 연우강 그 녀석은 흑천의 천주였네.”
“ 흑천도 살아남은 모양이군요.”
“ 지천처럼 그런 상태가 아니라 천주이면서 문도라고 하였네.”
“ 녀석 혼자란 말입니까?”
“ 그렇네. 그리고 황천의 후예는 팔황새란 이름으로 변황에서 살고 있다네.”
“ 상천만 빼고 다 있다는 말이군요.”
백강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감돌았다.
세월이 흘렀고, 사람만 달라졌을 뿐 무림 조직은 그 당시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었따. 천오백 년 세월이 한층 짧아진 듯했다.
“ 그런 셈이네. 과거완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들의 후예는 전부 살아남아 있는 것 같네.”
“ 심심하진 않겠군요.”
“ 그렇지.”
두 사람은 강시들의 비명이 들려올 때마다 이름이 적힌 종이를 태우고 지전을 태웠다. 그러면서 그들은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눴다.
천오백 년 전 이야기. 현 무림에 대한 이야기.
현 무림에 대한 지식은 그다지 깊진 않았지만 이제 막 정신을 차린 백강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다.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종이와 지전은 계속해서 불에 탔다.
그리고 아침이 뿌옇게 밝아왔을 때 두 사람 앞에는 오십 장의 종이만 남아 있었다.
“ 가, 강시다! 검은 피다!”
“ 가, 강시다!”
벌판에서 겁에 질린 듯한 외침이 들려왔다.
“ 큭큭큭! 우리보다 더 모자란 녀석들 같습니다. 주공.”
백강은 키들키들 웃었다.
금강불괴지신이면서 검강밖에 펼치지 못한 자들.
그런 자들을 보면 당연히 강시를 떠올려야 한다. 그런데 저 아래쪽에 있는 녀석들은 검은 피를 확인하고서야 강시라고 외친 것이다.
“ 그런 모양이네.”
제석강은 벌판을 보았다.
밤새도록 미친 듯이 공격을 했던 무인들이 강시라는 말 한 마디에 썰물처럼 물러나고 있었다. 몰랐을 때는 무작정 공격을 했지만 상대가 강시라는 사실을 알고 나자 급격하게 자신감을 잃은 모양이었다. 막연한 공포가 실체화 되면서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이었다.
무인들이 물러나자 살아남은 일백마 오십 명은 밀천 정문을 향해 돌진해 들어가고 있었다.
콰앙!
둔탁한 소성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말없이 아래를 보았다.
“ 놈들을 막아라!”
“ 강기를 다루는 자들만 나서라! 나머지 문도들은 놈들의 진로만 막아라!”
고함을 내지르면서도 나천후의 시선은 연신 담 위로 향해 있었다. 그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안으로 들어온 강시가 아니라 그 뒤로 들이닥칠 적이었다.
“ 벌판은 텅 비었습니다. 천주님.”
벌판을 살피던 사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 캬캬캬!”
“ 크크크!”
“ 키키키!”
오십 구의 강시들은 거북살스러운 괴소를 날리며 밀천 무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차앙!
“ 크아악!”
“ 아악!”
“ 으아악!”
사방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저럴 수가!”
나천후의 입이 쩍 벌어졌다. 멀리 떨어져서 볼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벌판에 있던 무인들이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은 무쇠처럼 단단한 육체 때문이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서 보니 단단한 육체뿐만 아니라 움직임 또한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어떻게 강시가 저럴 수가 있는지.
하지만 그의 놀라움은 이 사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삼 층 건물 지붕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공손정우는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 처, 천년마인이라니......”
그는 넋을 잃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움직임은 일반 무인과 전혀 다르지 않고, 반면에 금강불괴지신에 가까운 신체를 지닌 강시. 그런 강시는 한 가지밖에 없다. 천마삼강의 하나인 천년마인.
제강해낼 수만 있다면 천하를 제패하는 건 일도 아니라고 하였던 그 전설의 강시를 직접 보고 있는 것이다.
문득 자신이 제강해냈던 회혼마인이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 도대체 누가?”
누가 천년마인을 제강해냈는지 그게 더 의문이었다. 아니 저런 엄청난 전력을 두고 그동안 침묵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이상했다.
“ 그란 말인가?”
결국 공손정우가 생각하기엔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대야벌의 벌주인 담대만승.
“ 하지만 그가 이렇듯 바보 같은 짓을 할 리가 없다.”
고민이 꼬리를 무는 이유였다.
대야벌에 대한 인식은 역대 어느 때보다 나쁘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담대만승이 천년마인 같은 마물을 보냈을 리가 만무하다. 아니 밀천을 직접 공격하는 건 있을 수 있다지만 천년마인들은 밀천이 아니라 만양평의 무인들을 공격했다.
대야벌을 무림 공적으로 만들려는 생각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돌아버리겠군.”
공손정우는 다시 시선을 돌려 아래를 보았다.
“ 형님. 저들을 막아야 합니다.”
적환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공손정우는 고개를 돌렸다.
“ 무슨 소린가?”
“ 설사 그가 보내지 않았다고 해도 저 괴물을 보낸 자는 담대만승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 대야벌 전체 의견이 아니라 담대만승 그놈 혼자 결정했다는 걸 보여주자는 말인가?”
공손정우는 담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곳에는 강시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뿔뿔이 흩어졌던 무인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있었다.
“ 그렇습니다. 그럼 담대만승은 사면초가에 몰리게 됩니다.”
“ 좋네, 그렇게 하세.”
공손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고함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 나 공손정우도 돕겠소. 천주.”
“ 나도 돕겠소.”
공손정우에 이어 적환규, 육사이, 설야가 무기를 뽑아들고 몸을 날렸다. 담 근처에 모여 있던 군웅들은 의아한 얼굴로 네 사람을 보았다. 그들은 강시를 보낸 측을 대야벌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야벌 소속 무인들이 강시를 없애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 저 강시들은 우리 무궐이나, 구중련, 녹사련, 낭인림과는 상관없소이다. 우리 네 문파는 밀천과 공정한 경쟁을 원했을 뿐이오. 그래서 개파대전을 축하하기 위해 우리가 직접 이곳으로 온 거외다.”
공손정우는 다시 한 번 고함을 내지르며 강시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제야 중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 타앗!”
바로 그때 우렁찬 함성과 함께 나천후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의 허리춤에 있던 겸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신이 온통 백색으로 돼 있는 그것은 다름아닌 파천육기의 하나인 백령이었다.
“ 우주일만검결!”
나천후는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가 이렇듯 무공 명을 외친 이유는 담 근처에서 이편을 쳐다보는 군웅들 때문이었ㄷ.
휘이익!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하더니, 백령에서 새하얀 광채가 솟아 나와 강시 한 구를 향해 쏘아져갔다.
“ 오! 저것이 바로 우주일만검결? 대야벌 벌주를 패배시켰다는 그 무공이야!”
나천후가 기대했던 말들이었다.
나천후 입가에 어린 미소는 더욱 진해지고 백령에서 흘러나온 새하얀 광채가 강시의 몸으로 틀어박혔다.
퍽! 퍽퍽퍽! 퍽퍽!
밀천 무인을 격살하던 강시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파앗!
강시의 전신에서 검은 액체가 분수처럼 솟아 나왔다. 그리고 강시의 머리가 툭 떨어져 내렸다.
“ 와아!”
“ 우와아!”
“ 차앗!”
군웅들의 환성에 이어 우렁찬 함성이 주변을 강타했다. 그리고 뇌전 기운을 간직한 푸른 강기가 강시의 목을 향해 쏘아져갔다. 그것은 공손정우의 검에서 쏘아진 검탄강기였다.
“ 태청풍뢰검법이다!”
군웅들은 다시 소리쳤다.
태청풍뢰검법. 그것은 검법으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무당파 최고 무공이었다.
퍼억!
“ 크아아아!”
단 일검에 강시의 머리가 둥실 떠올랐다.
“ 와아!”
“ 와아아!”
군웅들은 다시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의 얼굴엔 역시 공손정우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공손정우는 당황했다. 일반적으로 검탄강기를 이용해서 뭔가를 자르게 되면 물을 향해 검을 휘두른 것처럼 거침없이 진행한다. 그런데 조금 전에는 마치 물이 아니라 늪을 가르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문제는 그 느낌이 아니라 전 내공을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 타앗!”
바로 그때 나천후의 외침이 들려왔다.
“ 나도 질 수는 없지.”
공손정우는 전 내공을 끌어올려 검에 집중했다. 그러고는 밀천 무인들을 공격하고 있는 강시를 향해 몸을 날렸다.
나천후, 공손정우, 적환규, 육사이, 설야가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효과는 미미했다.
반드시 목을 잘라내야 강시를 없앨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목을 노리고 무공을 펼쳤는데, 팔이나 몸통을 잘라내게 되면 강시들은 더욱 흉포해진다.
하지만 강시들은 하나둘 목이 잘려 쓰러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자들이 있었다.
영빈관 중 가장 높은 건물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자들. 그들은 연우강을 비롯한 잠룡대 대원들이었다.
“ 왜 그랬을까요?”
아래를 내려다보던 수여설은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친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저들을 저렇게 죽도록 내버려두는 이유 말입니까?”
“ 네.”
수여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 만일 내 부하들이 실혼인 상태고, 돌볼 처지가 못 된다면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 돌볼 처지가 못 된다는 건 무슨 말이죠?”
“ 천년 마인은 그와 백강이란 사람이 처음이잖아요.”
“ 그러니까 자신들이 보통사람들처럼 계속 살 수 있을지 자신을 못 한다는 건가요?”
“ 그럴 겁니다. 수십 년을 살 수도 있고, 아니면 내일 당장 몸에 이상이 생겨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가 죽고 나면 저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 누군가에게 이용될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 맞아요. 그렇다고 그의 손으로 저들의 목을 칠 수도 없었을 테니까요.”
“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죽게 버려둔다는 건......”
“ 저들은 진짜 전사이기 때문입니다.”
“ 진짜 전사?”
“ 무인에게 가장 행복한 죽음은 상대방의 검에 죽는 거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 그건 뭔가 있어 보이려고 하는 말 아닌가요?”
“ 하지만 세상에는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 어떤 사람들이죠?”
“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전쟁터가 아니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런 녀석들에게는 수만 금의 돈이나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려진 산해진미,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미녀도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합니다. 그들은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어야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합니다.”
“ 저들이 그렇다는 건가요?”
“ 그가 저들을 전장으로 밀어 넣어 죽게 만드는 걸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 연 공자는 어때요?”
수여설은 연우강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 전 아주 세속적인 놈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돈이고 그 다음이 여잡니다. 아마 저처럼 세속적인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 그럼 다행이고요.”
“ 저는 짧고 굵게 사는 것보다 길고 오래 살고 싶어요. 최소한 저것들보다는 오래 살 겁니다.”
연우강은 멀리 보이는 영빈관 건물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곳 삼 층에도 세 명이 나와 강시들과 밀천 무인들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 저들은 누구죠?”
“ 얼굴 기억 안 나요?”
“ 글쎄요. 너무 물어서....”
수여설은 눈에 내공을 집중했다. 그러자 시야가 밝아지며 노인들의 얼굴이 약간 선명하게 잡혔다.
“ 어?”
그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비고에 있던 마유와 사유였다.
“ 원래 패천림과 한 패였습니다.”
“ 그랬군요. 그런데 살기를 흘리고 있는 것 같은데요?”
수여설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에 강시를 투입한 자들이 저들이다. 그런데 죽어가는 강시를 보며 살기를 흘린다는 사실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 강시들 때문이 아닙니다.”
“ 그럼 왜 저러는 거죠?”
“ 나천후 저놈이 들고 있는 백령 때문일 겁니다.”
“ 그러고 보니.....”
나천후의 손에 들린 검을 확인한 그녀는 이번엔 연우강을 보았다.
“ 제가 전에 저 백령을 들고 가서 패천림을 뒤집어 놓았거든요.”
“ 그런 다음에 백령을 나천후에게 줬다는 건가요?”
“ 저 녀석은 제가 선물로 줬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나천후의 손에 들어가게 했다는 거죠?”
“ 그렇습니다. 녀석은 기연을 얻었다며 아주 좋아했을 겁니다.”
“ 풋!”
수여설은 피식 웃었다.
역시 그는 대단한 사람이다.
파천육기의 하나인 백령은 천고신병이 아닌가. 아니 백령뿐만이 아닐 테다.
백령과 함께 발견된 비급도 줬을 게 분명하다. 아무리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런 엄청난 보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 어?”
그녀의 눈이 번뜩 커졌다. 문득 연우강이 패천십관에 도전한 사실을 천마 제석강이 알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 왜 그러세요?”
“ 제석강 그 사람은 연 공자를 알고 있잖아요.”
“ 사실 저도 그 양반이 쫀쫀한 성격이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습니다.”
“ 쫀쫀한 성격?”
“ 별것 아닌 걸 가지고 고자질하는 자를 쫀쫀하다고 하잖아요.”
“ 그건 고자질이 아니잖아요.”
“ 아무튼 저 요괴들을 보니까 고자질을 하진 않은 모양입니다.”
연우강의 말대로였다.
마유나 사유 그리고 장육철은 제석강으로부터 패천십관에 들어온 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다. 당연 백령을 들고 있는 나천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나천후는 연우강이 패천십관에서 펼쳤던 우주일만검결을 자랑스럽게 펼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 죽일놈!”
장육철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왜 그러느냐?”
마유는 장육철을 보며 물었다.
“ 검치옹을 해친 놈이 저 놈입니다. 어르신.”
“ 패천십관에 난입하여 문도들을 해쳤다는 그놈이 나천후란 말이냐?”
“ 그렇습니다. 그날도 우주일만검결을 펼쳤습니다.”
“ 그럼 천년마인을 제대로 푼 셈이구나.”
마유는 나천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직은 세기가 부족한 감이 없진 않지만 우주일만검결은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일초 일초가 살인미학이고 거악의 기운을 내포하고 있다. 천 년 전에 대야벌 벌주를 패배시킨 무공이라고 하더니,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 차앗!”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오고 나천후의 검에서 쏟아진 새하얀 광채가 강시의 몸으로 파고들어 갔다.
바로 마지막 강시였다.
“ 크아아아!”
강시의 입에서 비명도, 괴소도 아닌 특이한 소성이 비어져 나왔다. 그리고 목이 잘린 강시는 천천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 우와!”
“ 우와아!”
“ 강시를 잡았다.”
“ 우리가 이겼다.”
군웅들을 비롯한 밀천 무인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 흥!”
장육철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만양평에서 수천 명이 죽었고, 밀천 내부에서도 오백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적은 구십구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승리했다고 함성을 지르다니.
웃긴 놈들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 전투의 승자는 밀천이 아니라 죽임을 당한 강시들이었다.
“ 이로써 밀천의 개파대전은 엉망으로 변했고, 대야벌은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빠졌다.”
장육철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 마지막입니다. 주공.”
백강은 ‘환우신마 공성필’이란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어 올렸다.
그는 한참동안 종이에 적힌 이름을 내려다보다가 불씨만 남은 모닥불로 가져갔다. 잠시 종이가 오그라지는 듯하더니 불이 붙었다.
공성필이라는 이름이 적힌 종이가 다 타 들어갈 무렵 제석강은 남은 지전에 불을 붙였다.
“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이 준 돈으로 저 친구들의 장례를 치르는 셈이구만.”
“ 늦었지만 좋은 곳으로 갈 겁니다. 주공.”
“ 그래야지. 그랬으면 정말 좋을 텐데....”
밤새도록 앉아 있으면서 태연했던 제석강의 눈에 비로소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백강은 제석강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마총으로 들어가기 전에도 팔십 년을 넘게 살았다. 하지만 주공인 제석강이 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니 그는 울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 우십니까?”
백강은 울먹이며 물었다.
“ 자네도 우는군.”
“ 천오백 년 만에 처음으로 떠나보내는 녀석들 아닙니까. 주공과 저를 알고 있는 마지막 녀석들이기도 하고요. 녀석들도 우릴 보며 웃진 않을 겁니다.”
가까스로 매달려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백강은 들썩이며 울었다.
“ 차라리 내 손으로 보내줄 걸 잘못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제석강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남은 지전을 태우면서 서럽게 울었다.
어깨가 들썩이고 가슴이 울렁거리며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 아닙니다. 주공. 제가 저 녀석들 입장이었다고 해도 저렇게 죽는 걸 바랐을 겁니다. 미친 듯이 싸우다가 누구의 무기에 당했는지도 모르는. 그 상태에서 죽는 게 저희들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주공 때문에 그렇게 죽지를 못했습니다. 이제라도 그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됐으니까 당연히 기뻐할 겁니다. 잘하신 겁니다. 아주 잘하신 겁니다. 지금까지 주공이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입니다.”
“ 그렇게 생각하는가?”
“ 그렇습니다. 주공.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가 찾아가면 녀석들은 그동안 아껴두었던 술을 내놓을 겁니다. 저라도 분명 그럴 겁니다.”
백강은 닭똥같은 눈물을 떨구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이 난다는 말이 있네.”
“ 그건 주공도 마찬가집니다.”
두 사람은 울면서 웃고, 웃으면서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