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45화 (145/232)

제 8장 사람을 다루는 법

수만 명의 환호로 시작할 거라고 생각했던 개파대전은 장례식장으로 변했다. 벌판에서 죽어간 무인들의 수는 팔천에 가까웠고, 시체를 모으는 것만 해도 반나절이 걸렸다. 연우강 일행 또한 구금에서 풀려나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 교랑!”

벌판을 둘러보던 연우강은 이철상을 불렀다.

“ 하명하십시오. 총대주님.”

“ 시체를 모아.”

“ 어떤 싱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 강시들 시체들 말이야.”

“ 아직은......”

이철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우강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무인들의 시체를 치우고 있는 군웅들은 잔뜩 흥분한 상태고, 잠룡대 대원들이 강시의 시체를 모으는 모습을 보게 되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자칫 불상사로 이어질까 걱정스러웠다.

“ 이미 죽은 자들이잖아. 시간이 없다면 그냥 가겠지만 시간이 펑펑 남아도는데 묻어줘야지. 그리고 잡랑 넌 가서 지전하고 향, 술 좀 사가지고 와.”

“ 알겠습니다. 총대주님.”

장사덕은 남쪽으로 몸을 날렸다.

“ 뭐 해?”

“ 아, 알겠습니다. ”

연우강이 소리치자 이철상은 마지못해 잠룡대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시를 받은 잠룡대 대원들은 주변을 돌며 강시들의 시체를 챙겼다.

“ 북쪽으로 가지고 와!”

연우강은 그렇게 말하고 벌판 북쪽으로 향했다. 북쪽 끝에 멈춰 선 그는 허리춤에 걸고 있던 손괭이를 꺼내 땅을 파기 시작했다.

“ 그걸로 언제 파요. 비켜 보세요.”

남궁운화가 나서더니 바닥을 향해 장력을 쏟아 부었다. 그녀의 양손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커다란 폭음과 함께 구덩이가 생겨났다. 그녀에 이어 수여설까지 가세하자 구덩이가 파여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 얼마나 파죠?”

“ 구십구 명이 나란히 누울 수 있게 파야 해요. 깊이는 반장 가량이면 될 것 같고요.”

“ 알았어요.”

수여설과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구덩이를 파 나갔다.

“ 너희 새끼들 뭐 하는 짓이야?”

바로 그때 평원 중간 지점에서 살기가 잔뜩 실린 외침이 들려왔다. 연우강은 고개를 돌렸다. 수백 명의 무인들이 일단의 무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 비켜라!”

곧이어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차남승이었다.

“ 연 공자.”

수여설이 걱정스런 얼굴로 연우강을 불렀다.

“ 계속하세요.”

연우강은 가볍게 웃으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언니, 우리도 따라가요.”

“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요.”

남궁운화와 수여설은 연우강을 따라 나섰다.

“ 그놈들을 들고 가는 이유를 말하기 전에는 비켜줄 수 없다.”

“ 이들과 우린 아무런 상관 없다. 아무도 묻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우리가 나섰을 뿐이다.”

“ 그걸 믿으란 말이냐?”

“ 믿어달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공연한 오해를 피하고 싶을 뿐이다.”

“ 그놈을 놓고 가라! 대야벌의 개!”

차남승이 약한 모습을 보였다고 판단한 탓일까. 무인들은 살기등등한 얼굴로 소리쳤다.

“ 지금 나보고 대야벌의 개라고 한 거냐?”

차남승은 들고 있던 강시의 시체를 내려놓으며 사내를 쏘아보았다.

“ 그랬다 놈! 너도 그 강시들처럼 우릴 죽일 거냐?”

“ 이왕 좆 됐는데 못 죽일 것도 없지.”

우악스런 손길이 차남승을 노려보는 무인의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 누, 누구냐?”

“ 잠룡대 대주고 방금 네 녀석이 대야벌의 개라고 한 저 녀석의 상관이야.”

연우강은 사내의 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 놔라!”

사내는 질질 끌려가면서 버럭 소리쳤다.

“ 숨어서 지랄하지 말고 할 말 있으면 나와서 당당하게 해. 자식아.”

사내를 안쪽으로 끌고 들어간 연우강은 거칠게 내팽개쳤다. 그러고는 허리춤에서 낫을 뽑아 사내 앞으로 던졌다.

“ 무슨 뜻이냐?”

사내는 얼떨떨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이 시체에 감정이 많은 것 같아서 기회를 주려는 거야.”

연우강은 강시를 발로 툭 찼다.

“ 무, 무슨 기회를......”

“ 네가 미워하는 사람은 여기 마 군장이 아니라 이 강시잖아. 그러니까 그 낫으로 살을 발라내든지, 눈을 파내든지, 갈가리 찢든지, 네 마음이 풀릴 때까지 알아서 하라고.”

“ 나, 난!”

사내는 주춤주춤 물러났다.

“ 네가 끝나면 여기 서 있는 자식들도 전부 해야 하니까 빨리 하라고, 아니면 내가 할까?”

연우강은 사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조금 전 던져 놓았던 낫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강시의 시체 앞에 앉았다.

“ 어디부터 할까?”

연우강은 사내를 돌아보며 물었다.

“ 난......”

“ 무기를 휘둘렀던 팔이라고? 알았어.”

연우강은 사내를 바로 볼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강시의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 우선은 쉽게 잘리는 관절을 먼저 잘라내자고.”

연우강은 사내를 빤히 쳐다보며 낫으로 강시의 팔꿈치를 향해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카앙!

하지만 날카로운 소리만 흘러나왔을 뿐 강시의 팔은 잘리지 않았다.

“ 이게 생각보다 강한 모양이야.”

연우강은 씨익 웃으며 또다시 후려쳤다. 그러나 검강으로 쉽게 잘라내지 못했던 강시의 팔이 내공조차 끌어올리지 않은 상태에서 잘릴 리가 없었다. 낫으로 내리찍은 자리에는 작은 흠집만 날 뿐이었다.

“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고.”

연우강은 미친 듯이 낫을 휘둘렀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무인 사내의 눈에 고정돼 있었다.

낫질이 계속 될수록 강시의 팔에 난 흠집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껍질이 벗겨져 나가고, 안쪽 살이 드러나면서 마치 고기를 다질 때처럼 약간씩 튀기도 했다.

연우강은 지켜보던 무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이놈 너무 질긴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낫의 날이 나가자 연우강은 사내 앞으로 휙 던졌다.

“ 헉!”

사내는 질겁한 얼굴로 펄쩍 뛰었다.

“ 그래서 이걸로 해보려고. 이건 파천육기의 하나인 묵사라는 검인데 말이야. 신병이니까 강시 팔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라낼 거야.”

연우강은 엉덩이 쪽에 가로로 걸어두었던 묵사를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조금 전 낫으로 찍던 부분을 향해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퍽!

신검이 분명하긴 했다.

지금껏 살갗만 너저분하게 파헤쳤던 것과는 달리 묵사는 검면의 절반 정도를 파고들어 갔다.

“ 된다, 되네.”

연우강은 활짝 웃으며 묵사를 뽑았다. 하지만 뼈에 박힌 듯 묵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아무래도 뼈에 박힌 모양이야.”

연우강은 강시의 팔을 바닥에 내리고는 두 발로 밟았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묵사를 잡고 위쪽으로 당겼다.

“ 야! 와서 도와줘.”

그래도 묵사가 뽑히지 않자 연우강은 사내를 보며 소리쳤다.

“ 아, 아니오, 됐소. 난 가겠소.”

사내는 벌떡 일어나 군웅들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그럼 넌!”

이번엔 가까이 있는 무인을 손가락으로 지목했다.

“ 됐소. 이미 죽었는데.....”

무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 사내마저 도망치듯 떠나자 행여 연우강이 자신을 지목할까 봐 주변에 있던 무인들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 뭐 해, 인마.”

연우강은 차남승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 정말 안 뽑히는 겁니까?”

“ 그럼 뽑히는 걸 안 뽑힌다고 했겠냐.”

연우강은 허리를 세웠다. 금방 일어난 일 때문인 듯 더 이상 잠룡대 대원들이 저지를 받는 곳은 없었다.

“ 여기 있습니다.”

차남승은 묵사를 뽑아 연우강에게 건넸다.

“ 들고 따라와.”

연우강은 구덩이 파던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남궁운화와 수여설은 멈췄던 작업을 다시 시작했고, 잠룡들은 강시들의 시체를 가지고 속속 모여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평원을 오가는 무인들의 눈빛에는 적의가 어려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말을 들은 듯 공손정우 일행과 나천후가 연우강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려왔다.

“ 무슨 짓이냐?”

공손정우는 버럭 소리쳤다.

“ 왜?”

연우강은 공손정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 그놈들에게 당한 무인이 몇 명인줄 아느냐?”

“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 칠천 명이 넘는다, 놈!”

“ 그럼 넌 어떻게 처리할 건데?”

“ 지, 지금 ‘너’라고 했느냐?”

“ 네가 먼저 ‘놈’이라고 했잖아. 자식아.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는 건 애들 사회에서도 상식이야.”

“ 이런 개자식이.”

공손정우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흘러나왔다.

“ 그러게 새꺄, 왜 개자식 근처에서 알짱거려. 네가 여길 오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없잖아.”

“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연우강.”

“ 내게 그런 말을 했다가 뒈진 놈들이 한둘이 아냐. 그리고 죽인다는 말은 상대방의 목에 무기를 반쯤 찔러 넣고 하는 거야.”

“ 오내. 이 자리에서 죽여주마.”

공손정우는 검 손잡이를 잡았다.

“ 그만하시오. 공손 궐주.”

나천후가 그를 말리고 나섰다.

“ 나 천주!”

“ 오늘은 밀천의 개파대전 날이오. 피는 그만큼 봤으면 됏소. 내 체면을 봐서라도 멈춰주시오.”

“ 알았소이다. 천주.”

공손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 고맙소.”

공손정우가 물러나자 나천후는 고개를 돌려 연우강을 보았다.

“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지?”

“ 나도 공손 궐주와 같은 생각이다. 그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는 이유를 알고 싶다.”

“ 너 개 키워봤어?”

“ 그럴 정도로 한가한 삶을 살지 않았다.”

“ 개는 말이야, 밥을 주고 사랑을 쏟게 되면 주인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동물이야. 그래서 누군가를 물라고 하면 인정사정없이 물어뜯어. 그 누군가가 죽는다고 해도 주인이 그만 하라고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는 절대 멈추지 않아. 그러다 결국 사람이 죽었어. 그럼 개 잘못이냐, 아니면 물라고 명령을 내린 사람 잘못이냐?”

“ 강시들은 죄가 없단 말이냐?”

“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천주가 되고, 궐주가 되고, 련주가 되고, 림주가 되려면 도박을 아주 잘해야겠다고 말이야.”

“ 도박을 해서 그 자리에 올랐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냐?”

“ 넌 빼도 되겠다. 하지만 대야벌에 있는 새끼들은 대부분 그런 것 같아.”

“ 저런 개자식!”

물러났던 공손정우가 살기를 뿌리며 다시 앞으로 나갔다.

“ 적어도 검을 든 무인이라면 말이다. 수만 명을 향해 몸을 던진 이들에게 박수를 쳐줄 정도의 아량은 있어야 하는 거야. 비록 그들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오직 자신들의 실력만으로 수만 명과 싸웠어. 싸울 때 독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사술을 사용하지도 않았잖아. 순수하게 자신들의 실력으로만 싸웠지. 그러다가 전부 죽었어. 그런 그들에게 무덤 좀 만들어주는 게 그렇게 못마땅해?”

“ 그건.......”

“ 아군이나 적군이냐를 떠나 멋진 놈에게는 멋지다고 칭찬할 줄 알아야 발전이 있는 거다. 아무리 적이라도 잘난 놈은 잘난 거야. 그걸 인정하지 못하면 넌 절대 네 조부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어.”

퍼억!

나천후는 뭐에 얻어맞은 듯한 둔탁한 소리를 머릿속으로 들었다. 타인을 인정하지 못하면 절대 최고가 될 수 없다는 말. 연우강과 자신의 차이였다.

연우강은 강시들을 무인의 혼을 가진 자들로 보았고, 자신은 개파대전을 망친 원흉으로 보았다. 녀석은 강시들에게 무덤을 만들어 주지만 자신은 강시들을 들판에 버리려고 하였다.

연우강은 잠룡 십 조 대원들을 완전하게 자기 사람으로 만든 반면 자신은 단 한명도 건지지 못했다.

그 차이가 가져온 결과였다.

“ 충고 고맙네.”

나천후는 연우강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 알아들었으면 됐고, 이들의 무덤을 만들어주는 거에 대해서는 불만 없지?”

“ 난 불만 없네. 하지만 벌판에 있는 무인들까지 막아줄 생각은 없네.”

“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연우강은 다시 몸을 돌려 대원들에게 눈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잠룡대 대원들은 장력을 난사하여 구덩이를 넓혀갔다.

“ 갑시다. 궐주.”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천후는 공손정우와 함께 멀어졌다. 그렇게 나천후가 몸을 돌리자 무인들의 적의 어린 시선도 잦아들었다.

약 반 시진 정도가 흐르자 시체 백여 구를 넣을 수 있는 널따란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둥둥둥! 둥둥둥! 둥둥둥!

바로 그때 밀천에서부터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비로소 개파대전을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 시체 똑바로 맞춰.”

“ 알겠습니다.”

잠룡대 대원들은 구덩이 안으로 뛰어 들어가 강시들의 머리와 몸통 맞추는 작업을 했다. 아흔아홉 구의 시체가 전부 머리가 잘려 있어 맞추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 정말 오해하기 딱 좋은 상태네요.”

구덩이 안에서 작업하는 대원들을 보며 수여설이 말했다.

“ 다 우리 잘 되라고 하는 겁니다.”

“ 우리 잘되라고 하는 거라고요?”

“ 객사한 사람을 정중하게 장사지내 주면 복을 받는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저들을 산에 버리면 그땐 정말 큰일이 납니다.”

“ 그가 화를 낼 거란 말인가요?”

“ 수 소저 같으면 화나지 않겠습니까?”

“ 저들을 이곳에 밀어넣은 사람은 그예요.”

“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정중하게 장사지내기를 원하게 되는 겁니다.”

“ 그럼 장사를 지내는 건 순전히 그 때문에?”

“ 아버지 말씀이 비가 올 것 같으면 반드시 우산을 준비하라고 했거든요.”

“ 우산이라고요?”

“ 끝났습니다. 총대주님!”

구덩이 안에 들어가 있던 이철상이 몸을 날려 밖으로 나오며 소리쳤다.

“ 흙을 덮어!”

“ 알겠습니다.”

시체를 맞추는 작업에 비해 흙을 덮는 작업은 금세 끝이 났다. 부족한 흙은 주변에서 파와 일 장 높이의 무덤을 만들었다.

“ 비석 가져와!”

“ 알겠습니다.”

연우강의 말이 떨어지자 잠룡대 대원들은 숲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집채만 한 바위가 무덤 앞에 놓였다.

“ 시선을 차단해!”

연우강은 사망마비 한 자루를 허공에 띄우며 이철상에게 말했다.

“ 비문을 새길 참입니까?”

“ 이름 정도는 밝혀 줘야지.”

“ 우리 뒤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총대주님.”

“ 그래도 가려.”

“ 알겠습니다.”

이철상이 지시를 내리자 잠룡대 대원들은 뒤편으로 늘어섰다. 늘어선 대원들이 자리를 잡는 순간 사망마비가 바위를 향해 날아갔다. 바위가 깎여 나가고 글씨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원들 중 그 글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우강이 쓴 글씨체는 천오백 년 전에 유행했던 전서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을 위대한 무인이었다.

과연 누가.

십만 명의 무인이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을 향해 돌진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여기 묻힌 구십구 명의 무인들.

그들은 그렇게 했다.

비록 세상은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내 눈으로 분명히 보았노라.

장렬하게 죽어가는 그들의 최후를.

일백마

나는 그들에게 그 이름을 줄 것이다.

세인들이여. 그들을 경배할지어다.

“ 뭐라고 쓴 거죠?”

연우강이 사망마비를 갈무리하자 수여설이 물었다.

연우강은 위에서부터 차례로 읽어주었다.

“ 아부의 극치네요.”

수여설은 피식 웃었다.

“ 이런 경우에는 아부가 아니라 우산이라고 하는 겁니다.”

“ 우산?”

“ 천마 제석강이라는 비를 피할 우산 말입니다.”

“ 아무튼 연 공자는 철저해요.”

“ 굳이 싸움 거리를 만들어서 싸울 이유가 없잖아요.”

“ 그렇긴 해요.”

“ 다녀왔습니다. 총대주님.”

그때 장례 물품을 사러갔던 장사덕이 돌아왔다.

“ 향 피우고 지전 태워.”

“ 알겠습니다.”

장사덕은 무덤 앞으로 다가가 향을 피우고 지전을 불살랐다. 연우강은 마라천력을 끌어오렬 연기로 무덤을 감쌌다. 한동안 무덤 주변을 머물던 연기는 천천히, 마치 영혼처럼 하늘러 날아올라갔다.

“ 그만 가자.”

지전을 태운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천 정문 앞 공터에서는 한창 개파대전이 진행 중이었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개파대전에는 혈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 오륙천 명은 들어가겠지?”

연우강은 이철상을 보며 물었다.

“ 최소한으로 잡아도 그 정도는 들어갈 겁니다.”

“ 계속 막다른 곳으로 달려가고 있네.”

연우강은 빙그레 웃었다. 담대만승도 밀천 개파대전에 이렇듯 많은 무인이 몰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 슬슬 막판으로 가고 있군.’

연우강은 차갑게 웃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밀천의 개파대전 첫날은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은 무난한 상태로 끝이 났다. 그리고 명복을 비는 첫날이 끝나고 두 번째 날부터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됐다. 개파대전 행사는 나흘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오 일째 되는 날.

연우강 일행은 떠날 준비를 했다.

이른 아침부터 준비를 했지만 저녁 무렵이 돼서야 밀천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나천후와 나적리가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된 것이다.

나천후가 의도적으로 그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연우강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저녁 무렵. 드디어 나천후의 손에서 벗어난 연우강은 밀천 정문에 섰다.

“ 잘 가게.”

“ 열심해 해.”

연우강은 손을 흔들며 몸을 돌렸다.

“ 말하지 않았네.”

나천후는 연우강의 등에 대고 말했다.

“ 뭘 말하지 않았다는 거지?”

[ 자네가 엄청난 실력자란 사실을 담대만승이나 공손정우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거네.]

[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들이 몰라야 네가 더 유리하니까 그런 거겠지.]

[ 하하하! 그것도 알고 있었는가?]

[ 그 정도는 기본이야. 넌 끝까지 담대만승에게 그 말을 할 기회가 없을 거야.]

[ 내일이라고 말할 수 있네.]

[ 담대만승을 견제할 세력이 나밖에 없는데 말할 수 있을까?]

[ 공손정우가 있다.]

[ 그거 알아?]

[ 뭘 말이냐?]

[ 이번 강시 사건으로 인해 공손정우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했다는 사실 말이야.]

[ 그가 담대만승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이냐?]

[ 그놈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벌주가 될 재목이 아니라는 건 너도 알잖아.]

[ 그럼?]

[ 그놈에게 가장 어울리는 일은 사면초가에 몰린 담대만승을 낭떠러지로 미는 거야.]

[ 낭떠러지로 민다고?]

[ 담대만승 그놈도 공손정우의 호감도가 급상승해서 장차 자신을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거야.]

[ 담대만승도 안다는.........]

나천후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연우강이 말한 낭떠러지의 의미를 비로소 알아차린 것이다.

이번 개파대전을 통해 담대만승과 공손정우의 처지는 극명하게 갈렸다. 담대만승은 밀천의 개파대전에 강시를 투입하여 수천 명의 강호 무림을 없앤 사람이 됐고, 공손정우는 그 강시를 막아낸 사람이 됐다.

만일 지금 상황에서 차기 벌주를 뽑는다면 당연 공손정우가 될 수밖에 없다. 그건 이곳에 모인 수많은 무인들이 전부 인정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공손정우가 죽는다면?

누가 그를 없애든 공손정우를 죽인 자는 담대만승이 되고 만다. 연우강이 말한 낭떠러지는 바로 그것이었다.

" 으음!"

나천후는 멀어지는 연우강의 등을 보았다.

보면 볼수록 소름 끼치는 놈이다. 어쩌면 담대만승보다 연우강이 더 큰 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 하지만......"

나천후의 눈빛이 깊어졌다.

담대만승은 완벽하게 갖춰진 자고, 천상천과 야궐을 비롯한 네 문파가 있으며 여차하면 담대천호도 그의 편을 들 수가 있다. 반면에 연우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가진 세력이라고는 잠룡대가 전무다. 게다가 연우강이 대야벌을 장악한다고 해도 기득권층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를 벌여야 한다. 둘 중 한 사람을 상대로 택해야 한다면 담대만승보다는 연우강이 훨씬 편하다.

" 빌어먹을!"

나천후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연우강을 최종 상대로 선택하려면 그의 실력을 끝까지 숨길 수밖에 없다. 바로 연우강이 한 말이었다.

" 머릿속을 해부해보고 싶네."

나천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돌렸다.

" 응?"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다시 몸을 돌려 만양평 북쪽을 보았다. 그곳은 연우강이 강시들의 무덤을 만들었던 곳이다.

" 웬 사람이?"

석양 속에 두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 어슴푸레 보였다. 잠시 그들을 쳐다보던 나천후는 이내 몸을 돌렸다.

무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해서 가본 사람이거니 생각했다. 사실 그도 연우강이 강시들의 무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강시들의 무덤보다는 어떻게 하면 공손정우를 없앨 수 있을지 그 작전을 짜야 할 때였다.

이내 두 사람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빠르게 몸을 날렸다.

나천후가 본 두 사람은 제석강과 백강이었다.

무덤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내려와 본 것은 밀천의 개파대전이 끝나지 않아서였다. 공연히 그들과 드잡이를 벌이면 복잡해질 것 같아서 차분하게 명복을 빌기 위해 이제야 내려온 것이었다.

" 그 녀석 마음에 쏙 듭니다. 주공."

백강은 집채만 한 바위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 그러게 말이네. 우리가 옛날 사람이라고 비문마저 그때 쓰던 글로 남겼구먼."

연우강이 현재 글보다는 고대 전서체를 더 능숙하게 쓴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제석강은 전서체로 씌어진 비문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 그런데 아부가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수여설이 했던 말을 백강도 했다.

" 그래서 그 녀석이 대단하다는 거네. 보통 강한 쇠는 부러졌으면 부러졌지 절대 구부러지지 않는 법인데, 그 녀석은 필요하면 구부러지는 정도가 아니라 절반으로 접어버린단 말이네."

" 그럼 이 무덤도 주공이 볼 거라는 예상을 하고 만들었단 말이군요."

" 아마 그럴 거네."

" 주공이 감탄할 정도의 무공에 허리를 반으로 접을 정도의 유연성을 갖췄다면, 대단한 정도가 아니라 무서운 겁니다."

" 하지만 고개를 들어야 하는 경우엔 조금도 양보를 하지 않는다네."

" 물건이 맞군요."

" 그렇지 물건 중의 물건이네."

"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 따라가면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아서 그런가?"

" 그렇습니다."

" 그럼 따라가 보게."

" 주공은......."

" 내가 좋다고 고개를 숙이는 녀석들의 비위도 조금은 맞춰줘야 할 거 아닌가."

"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백강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몸을 날렸다.

" 그렇게 하게."

제석강은 멀어지는 백강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백강의 모습이 완전하게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다가 다시 무덤으로 시선을 돌렸다.

" 이 친구들아 천오백 살이나 먹은 영물 두 마리가 함께 청승을 떠는 꼴이 보기 좋을 것 같은가. 아마 며칠도 지나지 않아 자살하자고 난리를 칠거네. 저렇게 싸돌아다니는 게 나나 백강을 위해서 좋은 일이라네."

제석강이 말없이 백강을 보내준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이제 막 정신을 차린 백강에게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백강 또한 그런 사실을 알고 연우강 핑계를 대고 떠난 것이다. 돌아올 때는 천오백 년 전 무불 백강이 아니라 지금 시대의 백강이 돼 있을 것이다.

" 어쩌면 그 녀석이 배강을 사람으로 만들어 보낼지도 모르겠네."

제석강은 빙그레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 모시겠습니다. 천주님."

산자락으로 접어들자 숲에서 장육철이 나오며 고개를 숙였다.

" 앞장서거라."

" 네!"

장육철은 몸을 돌려 지면을 찼다.

그의 신형이 쭉 나아가고 제석강은 뒷짐을 진 채 장육철을 따랐다.

' 젠장!'

몸을 날려 가는 장육철은 내심 욕설을 뱉어냈다.

평생 동안 무공에 정진했고, 이제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뒤에서 제석강이 따라오고 있는데도 기척을 감지할 수가 없다.

혹시 따라오지 않나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 허억!"

바로 뒤, 반 장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제석강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 몸이 좋지 않은 게냐?"

" 아, 아닙니다."

" 그런데 왜 식은땀을 그렇게 흘리는 게냐."

" 나, 날씨가 더워서, 아, 아니 나이 때문에....."

" 고얀 놈! 얼마 있으면 천육백 살이 되는 사람 앞에서 나이 때문이란 말을 하고 싶으냐?"

" 죄, 죄송합니다. 천주님.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장육철은 시뻘게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 서둘러라!"

" 아,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신형은 곧 산봉우리를 넘어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 오랜만이외다. 태상총전주."

"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태상총천주님."

북청강과 탈라하는 연우강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세 사람은 잠룡대 대원들과 한참 떨어진 으슥한 곳에 있었다.

" 그동안 잘 살았... 산 것 같구먼."

잘 살았냐고 질문을 하려다가 두 사람의 얼굴을 보며 말을 바꿨다. 전보다 얼굴이 꽤나 좋아 보였던 것이다.

" 통일이 됐고, 대야벌의 공격을 받을 걱정이 사라지니까 배에 기름만 끼고 있소이다. 태상총천주."

북청강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어렸다.

연우강이 어떤 의도로 그랬던 간에 서로를 견제하고 감시하던 팔황새는 하나로 통일이 됐고, 더는 싸울 이유가 없어졌다. 당연 마음이 편할 수밖에 없었다.

" 난 이곳에서 쌍방울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열심히 뛰고 있는데 부하라는 것들은 배 두들기며 놀고, 잘하는 짓이다."

" 그래서 찾아온 것 아니오."

" 아들은 만나봤어?"

북청강의 아들은 낭혼 북리태우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북태우의 이름을 북리태우로 개명하여 대야벌로 들여보낸 것이었다.

" 만났습니다."

북청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어때?"

" 나는 녀석이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었는데, 대부분 태상총천주에 대한 말만 하더이다."

" 뭐라고 하던데?"

" 무공은 그다지 높지 않은데 부하를 장악하는 장악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하더군요. 최고의 지휘관을 모시는 것 같다고도 했고요."

" 그거 좋은 말이라고 해석해도 되는 거야?"

" 내 아들이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면 최고의 극찬이외다."

" 내가 인사권자라고 아부하는 건 아니겠지?"

" 장차 혈마천을 이어받을 아이외다. 태상총천주."

" 아부할 필요가 없다는 말?"

" 필요 이상의 아부는 필요 없다는 말이오. 그런데 어떻게 속이셨소?"

북청강이 생각하는 가장 큰 불가사의였다.

연우강의 무공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탈라하는 신검을 넘어섰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연우강의 무공을 별것 아닌 걸로 말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 매일 매일 나쁜 일만 하던 놈이 한 번 선행을 베풀게 되면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 다른 사람이 한 일인데 그자가 한 걸로 잘못 알려졌다고 하겠지요."

" 선행을 두 번 베풀면?"

" 미쳤다고 할 거요."

" 세 번 베풀면?"

" 죽을 때가 된 모양이라고 하겠지요."

" 바로 그거야.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그 녀석이 개과천선했다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 태상총천주도 그런 경우란 말이오?"

" 그걸 일컬어 선입견증후군이라고 해."

" 선입견증후군?"

" 자신보다 못 하다고 확신하고 있던 자가 갑자기 강한 무공을 펼치면 사술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은 경우야."

" 그렇다고 해도 그런 일이 잦으면 실력이라고 인정하게 되지요."

" 전부 다를 속이려고 하면 그렇게 되겠지."

" 그럼?"

" 아는 녀석들은 알도록 내버려두고 모르는 녀석은 모른 채 두는 거야."

" 내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오."

" 나천후는 내가 실력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공손정우나 담대무궁은 모른다는 거지."

" 나천후가 말을 할 수도 있다고는 생각지 않으시오?"

" 담대무궁이나 공손정우가 나천후의 말을 믿을까?"

" 믿진 않더라도 의심은 할 거요."

" 그것도 맞아. 하지만 공손정우나 담대무궁 신분 정도 되는 자들에게는 의심이 믿음으로 바뀌려면 자기 눈으로 직접 봐야 해."

" 그들 앞에서는 단 한 번도 무공을 펼치지 않았다는 말이구려."

" 그렇지. 아는 자들은 알고, 모르는 자들은 모르고, 그런 상태로 가야 남들을 속일 수 있는 거야. 거기다 정보를 다루는 누군가가 측면에에서 지원해주면 더욱 좋고."

" 그건 무슨 말이오?"

" 대야벌은 보통 문파와는 차원이 다른 곳이잖아."

" 그러니까 태상총천주의 말은 대야벌의 정보를 담당하는 누군가가 태상총천주에 대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막고 있다는 거요?"

" 요즘 들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 누구라고 보시오?"

" 지천 오대세가를 알아?"

" 담대, 하후, 혁련, 독고, 모용세가의 연합체로 알고 있소이다."

" 그런데 지금 활동하고 있는 세가는 천상천의 담대세가와 야궐의 혁련세가밖에 없잖아."

" 그럼 다른 세가는....."

" 담대만승의 담대세가에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야."

" 그럼 그 가문들 중 한 곳의 후예가 담대만승 근처에 있다는 말이오?"

" 그건 차차 알게 되겠지. 그보다 그 녀석에게 이거 전해 줘."

" 이건...?"

" 현기환사죽영진이라는 진식을 그린 거야. 철저하게 파악해서...."

" 파훼 방법을 찾아놓으라는 겁니까?"

" 그건 하수나 하는 짓이지. 진짜 고수는 그대로 두고 역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거야."

" 그렇군요."

북청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연우강과 자신들의 다른 점이었다.

" 그런데 현기환사죽영진은 어디에 설치돼 있는 겁니까?"

" 군산에 있는 밀천 총단에도 설치돼 있고, 우리가 머물렀던 곳에도 설치돼 있어."

" 밀천이군요."

북청강은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언제 이런 준비를 해두었는지. 참으로 놀라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 밀천은 팔황천이 맡아야 하니까 확실하게 준비를 해둬야 해."

"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태상총천주."

" 그리고 이것도 가져가."

연우강은 품속에서 책자를 꺼내 내밀었다.

" 뭐요?"

북청강은 시큰둥한 얼굴로 물었다.

" 북 천주 무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주는 거야."

" 무공 비급이란 말이군......."

첫 장을 펼쳤던 북청강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곳에는 '구유잔백일천도'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던 거였다.

" 저, 정말 그 무공입니까?"

북청강은 저도 모르게 말을 올렸다.

" 마음먹고 준비한 건데 좀 .... 보잘 것 없지?"

" 아, 아닙니다. 제 평생 이런 행운을 잡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태상총천주님. 정말......"

북청강은 말을 잇지 못했다.

구유잔백일천도라니.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혼자만 주는 게 아냐. 내 시종인 귀노도 그 도법을 익히고 있고, 군대에 있을 때 부하였던 마장승이란 녀석도 그 도법을 익히고 있어. 북천주가 가장 늦게 시작하는 거야. 하지만 난 믿어. 진정한 구유잔백일천도가 어떤 무공인지 북 천주를 통해 볼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 걱정 마십시오. 태상총천주님. 최단기간에 구유잔백일천도를 완성해 보이겠습니다."

" 아무튼 앞으로 잘해 보자구. 북 천주."

연우강은 북청강의 어깨를 툭 쳤다.

" 감사합니다. 태상총천주님."

북청강은 고개를 숙였다.

" 그만 가봐."

"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북청강과 탈라하는 고개를 숙이고는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괜찮겠어요?"

뒤편 어둠에서 수여설이 걸어 나오며 물었다.

북청강이 어머니와 손을 잡고 팔황천 내에 또 다른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유잔백일천도가 적힌 비급을 주는 건 모험처럼 보였다.

" 북청강을 이곳으로 보낸 사람은 사은 그 녀석입니다."

" 북청강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는 걸 감지했다는 뜻인가요?"

" 그렇지 않다면 북청강을 보낼 이유가 없겠지요."

" 그럼 연 공자는 변하고 있는 그의 심경에 쐐기를 박은 셈이군요."

" 권위의식이 강한 친구들 앞에서는 강하게 나가면 안 됩니다. 수 소저. 적당히 대우를 해주는 것처럼 하면서 상대의 약점을 조금씩 파고들어 가야 합니다."

" 그가 어떤 약점이 있다는 거죠?"

" 첫째는 막북혈마성의 차기 후계자인 북리태우가 내 밑에 있고, 둘째는 무공에 대한 광적인 집착입니다."

" 그래서 북리태우를......"

" 그는 충분히 능력이 있는 친굽니다."

" 아무튼요."

수여설은 빙그레 웃었다.

" 아직 멀었어요. 그자가 충분히 만족할 정도가 되면 그땐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충성할 겁니다."

" 제가 보기엔 벌써 충성을 맹세한 것 같은데요."

수여설은 입술을 축이며 연우강에게 다가갔다.

"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데요?"

" 처음엔 '태상총천주'라고 불렀는데 방금은 '태상총천주님.'이라고 했잖아요."

수여설은 연우강의 멱살을 잡아 자신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 당장 마라천력을 끌어올려요. 연 공자."

" 우린 도망쳐야 합니다. 수 소저."

" 그럼 서둘러요." 연우강이 마라천력을 끌어올릴 생각을 하지 않자 그녀는 거칠게 연우강의 옷을 벗겼다.

" 여기서?"

" 장소가 무슨 상관이에요?"

" 알았습니다. 수 소저."

연우강은 마라천력을 동원하여 순식간에 자신과 그녀의 옷을 벗겨버렸다.

" 난 이래서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수여설은 배시시 웃으며 연우강의 얼굴을 거칠게 끌어당기더니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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