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내가 원하는 건 신뢰다
공손정우를 비롯한 네 명의 얼굴이 검게 죽었다.
밀천 무인에 이어 계곡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자들의 선두에는 잠룡대로 폐기 처분했던 적수 척자빈 일행이 있었다.
“ 분명 확인했는데......”
공손정우는 멍한 얼구롤 중얼거렸다.
이번 작전을 짜면서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이 대야벌에 남아 있던 잠룡대 대원들이었다.
그들이 연우강 편에 선다면 적은 순식간에 천여 명으로 늘어날 뿐 아니라, 한솥밥을 먹던 자들과 싸워야 한다는 부담감에 제대로 전투를 치를 수 없게 된다. 그 때문에 밀천을 출발할 때도 저들이 대야벌에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런데 대야벌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고 하였던 그들이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 놈이 척자빈 일행에게 기초 훈련만 시킨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형님.”
적환규가 신음처럼 말했다.
척자빈을 비롯하여 각 문파에서 잠룡대로 보낸 자들은 다루기 힘들어서 그렇지 무공 실력은 월등하다. 그런 자들을 데려다 놓고, 기초 체력 훈련을 시킨다고 했을 때 얼마나 비웃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이유가 바로 이번 작전을 위해서였다.
강기를 펼치는 무인들에게 기초 훈련을 시킨다는 사실은 대야벌 무인들에게 웃음거리가 됐고, 척자빈 일행이 얼마나 버틸지 관심거리였다.
그 관심이 바로 함정이었다.
일류 무인에게 어울리는 훈련을 시켰더라면 사람이 바뀌면 금세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척자빈 일행은 일반 양민들도 견딜 수 있는 그런 훈련을 받았다. 바로 옆에서 얼굴을 확인하지 않으면 설사 사람이 바뀐다고 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 우린 완벽하게 당했습니다. 형님.”
완패.
네 명이 한 명의 머리를 당하지 못한 것이다.
“ 우리가 아직 살아있으니까 완패는 아니네, 적 아우.”
공손정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계곡 입구는 완전하게 막혔고, 좌우 측 절벽은 경공을 펼치면 넘어갈 수는 있겠지만 너무 드러나 있다.
만일 그곳을 통해 도망치는 모습이 잠룡대나 또는 무궐 무인들에게 발각되면, 죽어가는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친 최악의 지휘관으로 낙인찍히고 만다.
그럼 이곳 전투의 패배가 문제가 아니라, 벌주의 자리를 포기해야 함은 물론이고, 심하면 무궐 궐주 자리에서 밀려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탈출로는 한 곳밖에 없다.
공손정우는 시선을 돌려 계곡 안쪽을 보았다.
호수 뒤편으로는 수림이 울창하게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절벽이 보였다.
그곳을 통해 빠져나가면 들키지 않을 듯했다.
“ 싸울 수 있겠는가?”
공손정우는 적환규 일행을 돌아보며 물었다.
“ 불가능합니다.”
적환규는 고개를 저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한 달 동안 잠을 자지 못해 사물이 흐릿하게 보일 지경이다. 부하들이 살아 있는 경우라면 그들과 함께 싸우보겠지만 그들마저도 전멸 직전까지 몰렸다. 아니 가장 믿었던 회혼마인이 전멸함으로써 마지막 희망 마저 사라졌다.
지금 전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 가세.”
공손정우는 곧바로 뒤편으로 몸을 날렸다.
계곡 오른편 가장자리에 내려선 그는 곧바로 방향을 틀어 안쪽으로 향했다.
“ 이곳을 빠져나가자마자 바로 연락을 해야겠습니다.”
뒤따르던 구천검제 설야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 물론이네. 설 아우. 바로 궐에 연락해 부하들을 부를 참이네. 놈들이 대야벌로 들어오기 전에 처리해야겠지.”
공손정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폭이 십여 장가량 되는 공터가 있고 그 뒤쪽에 절벽이 있었다. 빠져나가려고 했던 곳이었다.
“ 그건 네 생각이고.”
공터로 진입하는데 느닷없이 절벽 아래쪽 그늘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사람은 동시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 누구냐?”
공손정우는 긴장한 얼굴로 소리쳤다.
“ 나다.”
그늘 속에서 세 사람이 걸어 나왔다.
“ 너희들은.....”
공손정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왼편에 있는 자는 회혼마인을 장난감 다루듯 없앴던 노인이고, 가운데 있는 자 역시 회혼마인을 고기 썰듯 썰었던 자다. 그리고 오른편의 검은 철립을 쓰고 궤짝을 둘러멘 자는 연우강이었다.
“ 오랜만이구나. 공손정우.”
염자생은 나직하게 말했다.
“ 나를 아는 모양이군.”
오랜만이란 말을 하는 건 안면이 있다는 것과 같다. 공손정우는 염자생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 네게 무궐 궐주 자리를 주고, 대야벌 벌주의 꿈을 꿀 수 있게 해준 사람인데, 기억조차 못하다니 아쉽군.”
염자생은 피식 웃었다.
“ 넌.....”
공손정우의 눈이 점점 커졌다.
사십 년이 넘었고, 주름살 하나 없던 팽팽한 얼굴엔 잔주름이 가득했지만, 젊은 시절 얼굴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 맞다. 난 염자생이다.”
염자생은 광인을 편안하게 늘어뜨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구나. 이제야 얼굴이 기억나는구나. 대야벌로 들어가기 전에 만났던 그 촌놈.”
공손정우는 암암리에 공력을 모았다.
상대는 회혼마인을 장난감 다루듯 없앤 자들.
몸이 정상적인 상태라고 해도 쉽지 않은 상대인데 하물며 지금은 내공을 절반 정도밖에 운용하지 못한다.
기회를 봐서 몸을 빼내는 수밖에 없었다.
“ 지난 세월 동안 난 오늘이 오기를 기다렸다. 공손정우. 위선으로 가득한 그 얼굴을 짓이길 날을 말이다.”
“ 복수라.....”
[ 설 아우.]
공손정우는 말을 하면서 설야에게 전음을 보냈다.
[ 말씀하십시오.]
“ 만일 네게 잠룡쟁패가 있었고 대야벌의 제자가 됐다면 무궐 궐주가 됐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 기회를 봐서 육 아우와 함께 연우강 놈을 공격하게.]
[ 알았습니다. 형님.]
설야는 전음을 보내며 연우강을 살폈다. 우연인 듯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설야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 꿈 깨, 인마.”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자리를 옮겼다.
그가 옮겨간 곳은 공터 오른편 가장자리였다. 그곳에 사망궤를 내려놓고는 그 위에 걸터앉았다.
연우강이 자리를 옮기자, 백강 또한 왼편 가장자리로 이동했다.
“ 개자식!”
파앗!
백강이 자리를 뜨자마자 설야와 육사이가 동시에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들보다 한 발 늦게 공손정우와 적환규가 염자생을 향해 쏘아져갔다.
적을 없애려고 공격하는 게 아니라 빠져나가기 위한 공격이었기 때문에 가장 강한 무인이라고 여긴 백강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 차앗!”
연우강 근처에 내려선 설야는 기합을 내지르며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번쩍 들어 올린 그의 검 끝에서 반투명한 강기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종남파의 최강 무공이자, 설야의 최고 무공인 무형검이었다.
무형검은 이름처럼 펼치게 되면 형체도 없고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한 강기의 검이 나타난다.
그런데 지금 설야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반투명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불완전한 몸 상태에서 무형검을 펼치게 되면 몸에 무리가 간다는 사실은 설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우강을 물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강한 무공인 무형검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물러나면 곧바로 육사이가 공격을 이어받고, 자신은 절벽을 향해 솟구쳐 오를 작정이었다.
스윽!
사망궤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던 연우강이 앉은 자세 그대로 설야를 향해 몸을 날렸다.
“ 타앗!”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일 장까지 가까워졌을 때 설야는 검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검 끄에 생성돼 있던 무형검이 연우강의 미간을 향해 쏘아져갔다.
놀랍게도 검강처럼 보였던 그것은 검탄강기였던 것이다.
“ 끝이다, 놈!”
설야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맺혔다.
피하길 바라고 펼친 공격이었는데 뜻밖에도 놈이 무형검을 향해 달려든 것이다. 이미 무형검은 놈의 얼굴 근처에 있었고, 설사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고 해도 피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설야는 연우강 미간에 뚫릴 깔끔한 구멍을 상상하며 결과를 기다렸다.
“ 헉!”
설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우강의 미간을 향해 쏘아져가던 무형검이, 마치 바위에 막힌 물살처럼 자연스럽게 연우강의 얼굴을 지나쳐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연우강의 손이 빠르게 가슴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젠장!’
설야는 내심 욕설을 뱉어내며 몸을 최대한 옆으로 틀었다. 그 순간 육사이의 검에서 발출한 검탄강기가 연우강의 목을 향해 쏘아져갔다.
하지만 연우강은 뻗어내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잔뜩 독이 오른 사망낭조가 설야의 가슴팍을 훑고 지나갔다.
찌익!
옷이 길게 찢겨나가며 피가 튀었다.
설야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그는 급하게 검을 횡으로 쓸었다. 무형검을 펼칠 경황이 없어 그냥 휘두른 검이었지만, 그의 검에는 뿌연 광채가 흐르고 있었다. 낭인림의 림주 자리를 거저 얻지 않았다는 방증이었다.
스윽!
연우강의 몸이 교묘한 각도로 이동하고, 육사이가 펼친 검탄강기와 설야의 검을 피했다.
“ 운이 좋구나. 놈!”
육사이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분명 검탄강기가 연우강의 목을 향해 쏘아져 들어갔다. 그 정도면 설사 목을 잘라내지는 못할지라도, 부상 정도는 입힐 줄 알았다. 그런데 검탄강기는 연우강의 목에서 한 치 정도 떨어진 채 비켜가고 만 것이다.
“ 난 태어날 때부터 운을 타고났다고 했잖아.”
“ 하지만 그 운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육사이는 검으로 내기를 밀어 넣으며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 갔다. 육사이가 펼치는 무공은 매 초식을 펼칠 때마다 열여덟 번의 변화를 보인다는 분광십팔검이었다.
그는 연우강을 향해 달려가면서 검을 쭉 내밀었다. 순식간에 열여덟 개의 검 형태가 생겨나 연우강의 전신을 노리고 쏘아져갔다.
“ 차앗!”
육사이의 공격으로 약간의 여유를 얻은 설야는 다시 무형검을 펼치며 연우강을 압박해 들어갔다.
하지만 연우강은 간발의 차이로 그들의 공격을 피하며 반격을 가했다.
[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설야는 공격을 하면서 육사이에게 전음을 보냈다.
연우강을 공격했던 원래 목적은 이곳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지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런데 가까스로 피하는 연우강을 보자 문득 욕심이 생겼다.
[ 삼 초만 더 공격하고 떠납시다.]
육사이는 전 내공을 검에 주입하며 대답했다.
[ 떠나는 걸 잠시 미루잔 말인가?]
[ 우리만 지친 게 아니었습니다. 놈도 지쳤습니다. 앞으로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오겠습니까. 지금 없애지 못하면 영원히 놈을 없애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 좋네. 그럼 삼 초만 더 공격하세.]
설야는 경공을 펼칠 내공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전부 검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거칠게 연우강을 향해 검을 휘덜렀다. 육사이의 검은 십여 개의 환영을 만들며 연우강을 공격했고, 설야의 검 끝에서는 무형검이 쉬지 않고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연우강을 잡지 못했다.
이번에도 역시 두 사람의 공격은 연우강의 옷깃을 스치는 것처럼 지나친 것이었다.
[ 삼 초만 더!]
설야는 전음을 보내며 재차 공격을 감행했다.
콰아앙!
공터 중앙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연우강에게 집중하고 있던 두 사람은 듣지 못했다.
“ 크윽!”
비명을 지르며 물러난 사람은 공손정우였다.
공손정우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놈을 일방적으로 몰아쳤다. 그래서 놈을 물러나게 한 다음 바로 빠져나가려던 생각도 바꿨다. 옆에서 노인과 싸우고 있는 적환규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설야와 육사이는 연우강을 몰아치고 있어 곧 끝날 것처럼 보였다.
연우강이 죽으면 그때 빠져나갈 생각으로 시간을 끌고 있는데 느닷없이 염자생의 공격이 강력해진 것이다.
“ 그동안 기연이라도 얻은 모양이구나. 병신.”
공손정우는 목까지 솟구친 비릿한 냄새를 꿀꺽 삼키며 말했다.
“ 사십 년 동안 네놈을 없앨 생각으로 무공을 익혔으니까.”
“ 하지만 병신은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약점이 있기 마련이지.”
“ 그럴까?”
염자생은 광인을 들어 올리며 강하게 발을 디뎠다.
그의 발치에서 뿌연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신형은 비호처럼 공손정우를 향해 쏘아져갔다.
쓰스쓰쓰! 쓰쓰쓰쓰!
들어올린 광인에서 거북살스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 헉!”
공손정우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느닷없이 들려온 소리에 머릿속이 텅 빈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공손정우는 급하게 내기를 끌어올렸다.
“ 차앗!”
스아악!
바로 그때 염자생의 입에서 우렁찬 기합이 흘러나오고, 들어올렸던 광인을 힘차게 내리찍었다.
쓰쓰쓰! 쓰쓰쓰! 쓰쓰쓰!
낙엽을 해치는 바람처럼 스산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광인으로부터 검은 고리가 쏟아져 나와 공손정우를 향해 쏘아져 갔다.
공손정우는 뒤편으로 몸을 튕기며 검을 휘둘렀다.
까앙!
“ 헉!”
공손정우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손목에서 찌르르 울릴 정도로 강한 힘이 검은 고리에 내포돼 있었다.
“ 설마!”
공손정우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깡! 깡깡깡! 깡깡깡!
둔탁한 소리가 공손정우 옆에서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그럴 때마다 공손정우는 뒤로 물러나야 했다.
간신히 억눌렀던 내상이 도지며 피가 벌컥벌컥 넘어오기 시작했다.
“ 말도 안 돼.”
공손정우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놈을 강호 공적으로 만들 때 무공까지 전부 조사했다. 그때 놈의 무공은 기껏해야 무궐 소속 대주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 모습은 다 뭐란 말인가?
“ 하지만! 너도 편치만은 않을 터.”
공손정우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남은 고리는 백여 개. 그걸 막아내지 못하면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할 터였다. 공손정우는 전 내공을 끌어올려 검은 고리를 막아나갔다.
얼추 절반 정도를 막아냈을까.
내력이 급속하게 소진되며 검에 어렸던 가이가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 안 돼!”
공손정우는 단전을 바닥까지 긁어 내공을 검에 주입했다. 하지만 내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 이럴 수가.....”
그의 얼굴이 검게 죽었다.
십여 일 동안 제대로 운기행공을 하지 못했던 부작용이 하필이면 지금 나타난 것이다.
더 이상은 방어가 불가능하여 포기하려고 하는데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오던 검은 고리들이 눈앞에서 픽 꺼졌다.
공손정우는 염자생을 보았다.
염자생의 상태도 자신보다 낫다고 할 수 없었다. 입 주위를 비롯하여 가슴팍까지 피로 범벅이었다.
“ 마지막이다. 공손정우.”
염자생은 광인을 머리 위쪽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공손정우를 향해 내달렸다.
공손정우는 굳은 얼굴로 좌우 측을 보았다.
그쪽도 다르지 않았다. 연우강을 공격하던 설야와 육사이, 그리고 노인을 공격했던 적환규 또한 모든 내공이 바닥난 듯 그 자리에 서서 상대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 잔인한 놈!”
공손정우는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신은 십여 일 동안 운기행공뿐 아니라 잠을 자지 못한 상태고 적환규 일행은 무려 한 달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반면에 놈들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충분한 휴식을 취한 상태다. 만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무작정 덤벼들어 끝장을 냈을 것이다.
그런데 놈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을 끌면서 내기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도록 유도했다.
“ 장주님이 아무리 잔인하다고 해도 너보다 덜해.”
바로 앞에서 염자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손정우는 고개를 들어 염자생을 보았다.
바로 그때 광인이 스산한 소리를 내며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 개자식!”
스악!
“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공손정우의 몸이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일직선으로 잘렸다.
“ 아악!”
“ 으악!”
“ 크아악!”
연이어 세 번의 비명이 들려왔다.
염자생은 고개를 돌려 좌우 측을 보았다. 세 개의 머리가 동시에 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 머리는 황궐에 가져다 주기로 했는데.”
연우강은 장작처럼 쪼개진 공손정우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 전 사십 년 만에 복수를 했습니다. 장주님.”
“ 김빠지는 소리 한다고?”
“ 네.”
염자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 김은 이미 빠진 것 같은데, 아냐?”
연우강은 염자생 근처로 걸어가며 물었다.
“ 글쎄 그게...”
염자생은 머리를 긁적였다.
무려 사십 년 동안 버려왔던 복수를 방금 했다. 그런데 기쁘거나 감정이 북받친다거나 하는 느낌이 전혀 없다. 마치 소금을 치지 않은 국물처럼 밍밍하다.
“ 그래서 복수도 혈기왕성할 때 해야 하는 거야. 나이를 먹으면 모든 게 심드렁해져. 아무튼 그 녀석 머리는 예쁘게 잘라서 저것들과 함께 가져와.”
연우강은 설야와 육사이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가서는 궤짝을 매고 백강에게로 갔다.
“ 가시죠.”
“ 그러자꾸나.”
백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우강은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곧 싸움터를 벗어났다.
“ 일부러 혼자 두는 거냐?”
“ 나이를 먹으면 우는 것도 쉽지 않잖아요.”
“ 혼자 있을 때가 아니면 울지 못한단 말이냐?”
“ 함께 울어줄 친구도 없을 땐 혼자 울여야지요.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다가 나올 겁니다.”
“ 녀석.”
백강은 피식 웃었다.
서른도 되지 않는 녀석인데, 머릿속에는 노인이 들어앉아 있는 것 같았다.
“ 이제 어떻게 할 거냐?”
“ 옷을 벗겨야지요.”
“ 옷을 벗겨?”
“ 네.”
“ 끄응!”
백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연우강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 될 겁니다.”
“ 그만하자.”
백강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강호 정세에 대해 아는 것도 없어 연우강이 한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곧 호수 근처에 도착했다. 싸움은 이미 끝나고 잠룡대 대원들은 주변 정리를 하고 있었다. 연우강이 호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자 군무옥이 다가왔다.
“ 녀석들이 입고 있는 옷 중 쓸 만한 건 벗겨내.”
“ 몇 벌이나 필요하십니까?”
“ 최소한 백 벌씩은 있어야 할 거야.”
“ 알겠습니다. 총대주님.”
군무옥은 고개를 숙이고는 잠룡대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려갔다.
군우목은 척자빈 일행을 돌아보았다.
“ 무슨 말입니까?”
천리지청술을 펼쳐 군무옥과 연우강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척자빈이 물었다.
“ 이놈들 옷이 필요하다는 말이야.”
군무옥은 시체를 가리켰다.
“ 옷은 왜?”
“ 옷의 용도가 뭐냐?”
“ 추위를 막고 몸을 가리기 위해 입는 거 아닙니까?”
“ 더불어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지.”
“ 신분이라고요?”
“ 척자빈 네가 그 옷을 입으면 백의정검군이 된다는 뜻이야.”
“ 그러니까......”
“ 무궐에서 쫓겨난 녀석들은 백의정검군 대원들의 옷을 벗기고, 구중련에서 쫓겨난 녀석들은 중천추살군의 옷을 벗겨 입으라는 뜻이지 뭐겠냐.”
“ 알겠습니다. 총군장.”
대원들은 우렁차게 소리치며 시체들의 옷을 벗겨냈다.
“ 옷을 챙긴 녀석들은 이쪽으로 와.”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척자빈 일행은 호수 쪽으로 몸을 날려갔다.
“ 저쪽부터 백의정검군, 중천추살군, 녹림파풍군, 혈랑구유군 순으로 서.”
연우강의 말에 옷을 가지고 있던 자들은 각각 네 줄씩 늘어섰다.
“ 인원 파악해.”
“ 하나!”
“ 둘!”
인원 파악하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줄을 맞추고 있던 자들이 앉은 번호를 복창했다.
“ 백이십 명입니다.”
가장 먼저 백의정검군 옷을 가지고 있던 척자빈이 소리쳤다.
“ 백네 명입니다.”
“ 백다섯 명입니다.”
“ 구십 명입니다.”
이어 나머지 네 명이 인원을 보고했다.
“ 지금부터 너희들은 백의정검군이고, 중천추살군이고, 녹림파풍군이고, 혈랑구유군이야.”
“ 맙소사!”
척자빈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 벌써 이해한 거야?”
연우강은 척자빈을 보며 물었다.
“ 잠룡대를 잠룡림으로 만들려고 그러시는 거 아닙니까?”
“ 그럼 굳이 이번 작전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네.”
“ 물론입니다. 총대주님.”
“ 좋아. 그럼 당장 갈아입고 출발해.”
“ 알겠습니다.”
척자빈은 일행에게 눈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일행은 곧바로 가지고 있던 옷을 걸쳤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식경 후, 각 문파 무인들의 특징을 한 잠룡대 대원들이 군무옥과 함께 계곡을 나갔다.
“ 잡랑!”
군무옥 일행이 떠나자 연우강은 장사덕을 불렀다.
“ 말씀하십시오. 총대주님.”
“ 여기서 며칠 쉬었다 갈 테니까 시체는 전부 묻어. 그리고 음식 준비해 오고.”
“ 알겠습니다.”
장사덕은 대원들을 데리고 빠르게 움직였다.
계곡 안쪽에 수십 개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으로 시체를 묻고 흙을 덮었다.
“ 그들이 속을 거라고 보십니까?”
이철상은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무슨 말이야?”
“ 척자빈 일행에게 무궐을 비롯한 네 문파 무인들의 옷을 입혀 보낸 게, 담대만승에게 우리가 패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 그건 맞아.”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 교랑, 너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
“ 믿지 않을 겁니다.”
“ 왜?”
“ 저번에 한 번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만큼 바보는 아닙니다.”
“ 하지만 공손정우가 동원한 무인의 수는 이천삼백 명이고, 네 문파의 최정예잖아. 우리보다 열 배나 많고.”
“ 그들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총대줍니다. 저번처럼 당하지 않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할 겁니다. 그리더 결국 알아내게 될 테고요.”
“ 그래서 척자빈에게 잘하라고 한 거야.”
“ 그렇다고 잠룡대를 잠룡림으로 승겨시켜 주진 않을 겁니다.”
“ 그렇게 생각해?”
“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 무궐을 비롯한 네 문파가 패했다는 사실을 담대만승이 알아내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 글쎄요. 그건.....”
이철상은 말끝을 흐렸다.
군무옥은 물론이고 척자빈이나 마귀괴옹 지을덕 등은 산전수전 겪은 자들이다. 백의정검군이나 중추추살군 등은 복장이 워낙 특이하여 굳이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도 알아볼 수 있다. 처음엔 무궐을 비롯한 네 문파가 잠룡대 대원들응ㄹ 몰살시킨 것 같다는 보고가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담대만승은 전에 당한 것도 있고 하여 재조사를 지시할 테고, 그때부터는 군무옥 일행과 대야벌 정보조직의 싸움이 된다.
하지만 하오밀문과 전쟁으로 인해 대야벌의 정보 수집 능력은 현저하게 떨어진 상태다. 군무옥 일행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총대주님이 원하는 건 뭡니까?”
문득 든 생각이다. 담대만승이 잠룡대를 잠룡림으로 승격시켜 주지 않을 거라는 건 누구보다 연우강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번 작전을 펼치는 건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듯했다.
“ 그건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될거야. 그건 그렇고 몇 명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연우강은 각 문파에서 파견 나온 자들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 사검천사 나박, 사자검 운악, 만묘신수 봉추를 비롯한 삼십여 명은 교전 중에 전사했습니다.”
“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 그렇습니다. 총대주님.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 어이!”
파견자들을 보고 있던 연우강은 조양마검 단고웅을 불렀다.
“ 부르셨습니까?”
단고웅이 연우강 앞에 섰다.
“ 나박 그 친구들하고 친했어?”
“ 서로 안부를 묻는 정도이긴 하지만 내심을 털어 놓을 정도로 친하진 않았습니다.”
단고웅은 등줄기가 축축해짐을 느꼈다.
그가 나박 일행이 사라진 걸 알게 된 건 조금 전 시체를 치우면서다. 사검천자 나박을 비롯한 삼십여 명은 담대무궁을 잠룡대 대주로 앉히기 위해 파견된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 전부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 저기 남아 있는 녀석들 지휘할 수 있겠어?”
연우강은 한편에 모여 있는 파견자들을 가리켰다.
“ 지휘라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 흑호군을 창설할 생각이야!”
“ 흑호군이라고요?”
“ 흑호군은 저기 앉아 있는 녀석들이 주축이거든.”
“ 저보고 저들을 맡으라는 겁니까?”
단고웅은 당황했다.
야궐을 비롯한 네 문파 무인들의 수는 육백여 명가량으로 잠룡대 총원의 절반 정도다. 연우강 입장에서 보면 가장 껄끄러운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그런 자들이 조직 내에 있으면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여 함께 모이질 못하게 한다. 그런데 연우강은 그에게 반기를 들지도 모르는 육백여 명을 한데 묶어 조직을 만든다니. 그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 내가 바보 같아?”
“ .......!”
단고웅은 말없이 연우강을 보았다.
“ 솔직히 말해도 돼.”
“ 그렇습니다.”
단고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 지금부터 단고웅 자넨 흑호군 총군장이야. 지위는 흑랑군 총군장과 같아.”
“ 권한은 어떻게 됩니까?”
“ 흑호군 소속 무인들의 생사여탈권이 총군장에게 있어.”
“ 보고는 어떤 방식입니까?”
“ 사후보고야.”
“ 처리 후 보고란 말입니까?”
“ 맞아. 다만 한 가지만 명심하면 돼.”
“ 어떤 겁니까?”
“ 흑호군에 한해서만 생사여탈권을 갖는다는 거야.”
“ 흑랑군의 총군장도 그렇습니까?”
“ 물론이야. 자기 부대원은 죽이고 나서 보고를 해도 상관없지만 다른 부대 대원은 죽이기 전에 보고를 먼저 해야 해. 할 수 있겠어?”
“ 그건 저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 그럼 지금부터 상의해.”
연우강은 손을 저었다.
단고웅은 잠시 연우강을 보다가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지금 뭐하고 있는 겁니까?]
연우강과 단고웅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철상이 전음으로 물었다.
[ 지금까지 봤으면서 뭘 물어?]
[ 정말 흑호군을 창설할 생각이십니까?]
[ 이미 명령은 하달됐어. 교랑.]
[ 그러다가 저들이 단체로 반기를 들고 담대무궁을 따르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 지금 아니면 저놈들을 끌어들일 기회가 없다는 것도 몰라?]
[ 기회라고요?]
[ 공손정우 일행이 우리 잠룡대보다 몇 배 많았지?]
[ 열다섯 배 이상 많았습니다.]
[ 잠룡대 대원들이 승리할 가능성은?]
[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 그런데 이겼지?]
[ 네.]
[ 그럼 저들은 우릴 어떻게 생각할 것 같냐?]
연우강은 한 곳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단고웅 일행을 턱으로 가리켰다.
[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겁니다.]
[ 기적이 일어난 게 아니고 우리가 일으킨 거야.]
[ 아무튼요.]
[ 아무튼 저 녀석들은 경이로운 눈빛으로 우릴 보게 될 거야. 그치?]
[ 그렇겠죠]
[ 그런데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 삼십여 명이 죽임을 당했어. 그런데 죽은 자들은 전부 담대무궁을 따르던 자들이었단 말이야. 그럼 저 녀석들 기분은 어떨까?]
[ 자기네들 또한 언젠가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겠죠.]
[ 맞아. 한편으로는 경외감을 가지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극도로 두려워해.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세 가지 반응을 보이게 되는데, 알아?]
[ 도망치거나, 그 자리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 난 세 가지라고 했잖아.]
[ 마지막 한 가지는 모르겠습니다.]
[ 무리들 중 믿을 만한 자를 구심점으로 뭉치게 돼.]
[ 단고웅이 구심점이란 말입니까? ]
[ 맞아. 저 녀석들 입장에서는 도망칠 수도 없어. 그렇다고 무릎을 꿇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그럼 녀석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단고웅밖에 없어.]
[ 그럼 단고웅만 감시하면 되겠군요.]
[ 아냐. 굳이 감시할 필요 없어.]
[ 그럼?]
[ 녀석에게 꿈만 심어주면 돼.]
[ 꿈이라고요?]
[ 지금은 흑호군 총원이 육백 명에 불과하지만 열심히 하면 육천 명이 될 수도 있다는 그런 꿈 말이야. 그런 꿈을 꾸게 되면 우리가 아무리 나가라고 떠밀어도 절대 나가지 않아.]
[ 우선 흑호군 총군장으로 깍듯하게 대우를 해야겠군요.]
[ 물론이지.]
연우강은 고개를 돌려 단고웅 일행을 보았다. 논의를 끝낸 단고웅이 이편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 어떻게 하기로 했지?”
연우강은 앞에 선 단고웅을 보며 물었다.
“ 총대주님 말쑴대로 하겠습니다.”
단고웅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흑호군 총군장을 맡겠냐는 연우강의 제안은 단순히 직책을 내리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단고웅도 잘 알고 있었다. 연우강이 원하는 건 충성일 터였다.
“ 난 자네에게 총군장 자리를 주었네. 단 총군장. 자넨 내게 뭘 주겠는가?”
“ 충성입니다. 총대주님.”
단고웅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 실망이군.”
연우강은 단고웅을 빤히 쳐다보았다.
“ 충성도 부족합니까? 그럼 목숨을.......”
“ 단고웅. 내가 원하는 건 충성이나 목숨이 아니다.”
“ 그럼.....”
단고웅은 곤혹스런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충성도 아니고 목숨도 아니라면 연우강이 원하는 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 내가 원하는 건 신뢰다.”
쿠웅!
단고웅은 뭔가가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치는 충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