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나이 칠십에.
무궐을 비롯한 구중련의 전신은 구파일방이고, 녹사련은 녹림, 낭인림은 낭인들이 그 시작이었다.
네 문파를 가만히 살피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단일 세력이 아니라 여러 세력의 연합체라는 사실이다. 무궐과 구중련은 열 개 문파의 연합 세력이고, 녹사련은 중원 전역에 산재해 있던 녹림들의 연합. 그리고 낭인림 또한 중소 낭인 단체들이 모여 만든 조직이었다.
여러 세력의 연합이다 보니 네 문파의 성립 초기에는 불협화음이 많았다. 좀더 많은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곳곳에서 의견 충돌이 일어났던 것이다.
많은 부분에서 의견 충돌이 일어난다고 해도 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가면 상관없는데, 오히려 더 나쁜 방향으로 나아갔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연합 세력을 구성하기도 전에 와해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지자 각 세력은 특단의 조치를 내리게 된다.
그 특단의 조치가 바로 각 문파의 최고 원로들이 참여한 원로원이었다. 구파일방은 백록원을 만들고, 족림은 녹죽원을 낭인들은 낭묘라는 조직을 만들어 중재를 했다.
그 결과 각 문파는 타협과 양보를 통해 무궐, 구중련, 녹사련, 낭인림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문제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하나의 문파로 탄생하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그럴 때마다 원로원의 원로들은 조언과 중재를 했다. 의사결정을 하는데 의사를 피력하게 되면 자연 권력은 모이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 각 원로원은 문파 내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조직이 됐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각 문파가 점점 안정을 되찾아가자 원로원의 역할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원로원의 원로들 또한 외부의 일에는 나서지 않고 암중의 중재자로 남기를 바랐다.
그랬던 각 문파의 원로원이 모습을 드러낸 건 삼십여 년 전 팔황정벌 때였다.
낭인림에서 벌주를 배출한 건 처음이었기에 그들의 기쁨이 남달랐는지도 몰랐다. 원로원의 원로들은 쌍수를 들고 장만보 벌주를 환영했고, 심지어 노구를 이끌고 팔황정벌에 따라나선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떠난 자들 중 돌아온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당시 가장 큰 타격을 받았던 원로원이 무궐의 백록원과 낭인림의 낭묘였다. 백록원은 오 할 이상의 원로들을 잃었고, 낭묘는 거의 팔 할 이상의 원로들을 잃고 만 것이다.
검천제 공손정우가 궐주가 될 때도, 그와 호형호제하던 적환규, 설야, 육사이가 각 림과 련의 수뇌가 될 때도 그들은 입을 닫았다. 굳이 나설 이유도 없었고, 나서는 걸 바라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한 건 몇 년 전부터다.
별도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백록원, 녹죽원, 낭묘의 원로들이 수시로 회합을 가진 것이었다.
아담한 실내.
백발의 노인 네 명이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신광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는 이들은 태을검제 자운, 을목마제 악선유, 풍운신제 장문우, 종남도제 상자인으로 원로사제로 불리는 백록원, 녹죽원, 낭묘의 최고령 원로들이었다.
딱!
백색 도포를 입은 노인이 바둑판 위 한 지점에 바둑돌을 놓았다. 그는 태을검제 자운이었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을목마제 악선유가 나직이 말했다.
“ 이 점이 무리수란 말인가?”
태을검제 자운은 조금 전에 놓았던 바둑알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 내가 그쪽에 집을 만든 건 자네를 유인하기 위해서였네. 그런데 자넨 바보처럼 계속 그쪽만 집착하고 있네. 작은 것에 집착하게 되면 큰 걸 잃게 되지.”
“ 나소산맥에서 백의정검군을 비롯한 네 문파 무인들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올라왔네.”
“ 하지만 공손궐주로부터 소식이 들어온 건 없지.”
“ 그들이 아닐 수도 있단 말인가?”
“ 공손 궐주는 공명심이 강한 사람이네. 만일 승리했다면 진작에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녔을 거네.”
“ 자랑하고 떠벌리기엔 살아남은 대원들의 수가 너무 적네.”
“ 설사 승리했다고 해도 연락을 하지 못했을 거란 말인가?”
“ 내 생각은 그렇네.”
태을검제 자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럴수도 있겠군.”
을목마제 악선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밖에서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 쯧! 더위나 한풀 꺾이면 할 것이지.”
화장실 쪽으로 시선을 주었던 을목마제 악선유는 혀를 찼다.
화장실 뒤편에서 두 명이 작업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이었다.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노인들이 힘든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자 공연히 측은했다.
“ 누군데 그러나?”
태을검제 자운이 창가로 다가가며 물었다.
“ 야장 일꾼들이네.”
“ 야장 일꾼들?”
“ 날씨가 더운데도 작업을 하고 있어서 말이네.”
“ 그렇군. 그런데 그 친구들은 찾아오지도 않네 그려.”
“ 누구 말인가?”
“ 지옥에서 탈출했다는 그 친구들 말이지 누구겠는가?”
야장인들을 보자 문득 두작군 일행이 떠올라 하는 말이었다.
“ 삼십 년 동안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는데, 자네 같으면 얼굴을 보고 싶겠는가?”
“ 그렇긴 하지.”
악선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두 사람 곁으로 보자기를 든 노인이 다가가고 있었다.
“ 저자는?”
자운은 의아한 얼굴로 방금 모습을 드러낸 노인을 보았다. 웃으며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가는 자는 다름 아닌 야장의 이인자라고 불리는 창노였다.
“ 허허허! 그렇게 놀고 있다가 하루 만에 끝내지 못할 수도 있어, 이 친구들아. 그랬다가 우강이 그 녀석에게 치도곤을 당할지도 몰라.”
“ 설마 궐주께서 우릴 감시하러 오신 겁니까?”
“ 예끼, 이 사람들아. 궐주는 무슨.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하는가?”
“ 누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궐주님이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제게 궐주는 한 분밖에 없습니다.”
“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도록 하세.”
세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자운 일행은 고개를 갸웃했다. 야장의 이인자인 창노를 부르는 호칭은 절대 궐주가 아니다. 그런데 작업을 하고 있던 자들 중 한 명이 창노를 향해 궐주라고 부른 것이다.
더구나 마지막에 했던 말은?
자운은 고개를 돌려 악선유를 보았다.
[ 들었는가?]
자운은 전음으로 물었다.
[ 분명 궐주라고 하는 말을 들었네.]
고개를 끄덕이는 악선유의 얼굴도 잔뜩 굳어 있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풍운신제 장문우와 종남도제 상자인 또한 굳은 얼굴로 밖을 보았다.
[ 저기서 우리가 있는 이곳이 보이는가?]
지운은 다시 전음으로 물었다.
[ 저기서는 여기가 잘 보이지 않네. 게다가 우리가 이곳에서 모인 건 보름만이네.]
[ 그럼 저들은 우리가 이곳에 있는 걸 모르고 한 말이란 말인가?]
[ 그럴 수도 있네.]
“ 허허허! 그래 보관이 그 녀석은 잘 지내는가?”
두 사람이 전음을 나누는 사이에 또다시 창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사람은 숨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 우강이 그놈이 일거리를 많이 주는 바람에 꼼짝도 못하고 있답니다. 소식 들어온 거 있습니까?”
“ 그놈이 언제 시시콜콜 알리고 다니는 녀석인가?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 말라는 연락만 왔네.”
“ 그랬군요. 그런데 혼수 준비는 잘 되어갑니까?”
“ 그 녀석에게 진 빚이 많아서 혼수를 준비하는 것도 쉽지 않아.”
“ 전부 줘버리십시오.”
“ 줄 게 있어야주지.”
“ 궐주님이 가진 거라고 해 봐야 남궁세가밖에 더 있습니까?”
‘ 헉!’
자운 일행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궐주 그리고 남궁세가.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창노의 정체는 짐작이 갔다.
“ 남궁세가를 줘 버리란 말인가?”
“ 운화와 혼인을 해서 자식을 낳으면 남궁 성씨를 물려줘야 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아들의 재산이 될 건데 미리 당겨 준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잖습니까. 아예 남궁세가를 혼수로 줘버리십시오.”
“ 허허허! 그것도 방법이군. 아무튼 자네들이 신경 좀 써주게. 워낙 쟁쟁한 아이들이 많아서 말이네.”
“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궐주님. 그 녀석은 마음이 여려서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면 거절하지 못합니다.”
콰앙!
자운 일행은 문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밖으로 나간 네 사람은 마치 설사가 난 사람들처럼 전력을 다해 화장실로 내달렸다.
곧 네 사람은 창노 일행 앞에 당도했다.
“ 이거 손님이 오셨구먼. 난 그만 가보겠네.”
창노는 벌떡 일어났다.
“ 누구시오?”
자운은 굳은 얼굴로 소리쳐 물었다.
창노의 얼굴은, 쳐다보면 실례가 될 정도로 많이 훼손돼 있었다.
“ 무슨 말씀을 하는 거요?”
창노는 차분하게 물었다.
“ 방금 이분들과......”
고개를 돌렸던 자운은 멍해졌다.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하지만 그 얼굴을 어찌 잊을까. 말없이 밥을 입 안으로 밀어 넣고 있는 사람은 두작군과 허일삼이었다.
자운은 두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엔 광대뼈가 도드라져 있다. 입고 있는 옷도 얼굴처럼 검었는데, 곳곳에 푸던 오물이 묻어 축축하게 젖은 채다. 그런 상태로 두 사람은 밥을 꾸역꾸역 입 안으로 밀어넣는다.
“ 자네들 말을 들을 걸 그랬어.”
두작군은 한숨처럼 말했다.
“ 무슨 말인가?”
“ 자네들 말을 듣고 현실과 타협했더라면 그곳에 들어가지 않아도 됐을 거라는 거지. 그랬더라면 자식을 버린 아비가 될지 않았을 테고, 지금 똥을 푸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네.”
“ 작군.”
자운은 안타까운 얼굴로 두작군의 이름을 불렀다.
“ 현실과 타협했더라면 나도 자네들처럼 비단 옷을 입고 백녹원 원로가 됐을 것 아닌가. 그래서 하는 말이네.”
두작군은 밥그릇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난 아직 안 먹었어. 인마.”
옆에 있던 허일삼이 버럭 소리쳤다.
“ 넌 성공한 친구들 앞에서 창피하지도 않냐? 빨리 처먹어. 자식아.”
“ 그러게 자식아. 관두자고 했잖아!”
“ 지랄하고 자빠졌네. 개자식. 그때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나?”
“ 내가 뭐라고 했는데?”
“ 사타구니에 물건을 달고, 허리에 검을 찬 놈이라면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했잖아. 잘못이라는 걸 알고 넘어가면 평생 후회하면 살 거라고 했잖아. 자식아. 그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했잖아. 그런데 봐라, 후회는 우리가 하고 있잖아!”
“ 넌 후회해?”
허일삼은 그릇을 내려놓고 두작군을 빤히 보았다.
“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자식아. 넌 장가도 못갔고, 난 마누라 임종도 못 지켰잖아. 우린 도대체 지난 삼십 년 동안 뭐한 거냐고!”
“ 그래도 난 내자신에게는 당당해!”
허일삼은 똥지게를 걸머졌다.
“ 우리에게만 당당하면 그걸로 끝이냐?”
두작군 역시 똥지게를 졌다.
“ 똥지게를 지고도 전혀 부끄럽지 않고, 똥 냄새 나는 밥을 먹어도 소화가 잘되는 튼튼한 위장도 얻었잖아. 하지만 저 친구들은 절대로 이런 똥지게는 지지 못할 거야.”
“ 그래도 우리가 저 친구들보다 잘하는 게 있다는 말이구나.”
“ 그렇지. 그리고....”
“ 그리고 뭐.”
“ 난 너보다 세 살이나 많아 자식아.”
“ 지랄하고 자빠졌네. 낼 모래면 관에 들어갈 놈이 나이 타령을 하고 싶냐?”
“ 낄낄낄! 그래도 난 네 형님이야. 자식아.”
“ 형님이니까 관에도 빨리 들어가라. 난 앞으로 태어날 손자들의 재롱을 여한 없이 보다가 죽을 테니까.”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며 자리를 떴다.
자운 일행은 멍한 얼굴로 두작군 허일삼을 보았다.
그렇게 서 있는데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작군아.”
“ 왜?”
“ 만일 말이다. 또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할 거냐?”
“ 글쎄 그건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
“ 왜?”
“ 우강이 그놈에게 하도 호되게 당해서 그래.”
“ 어떻게 당했는데.”
“ 꿈을 쫓는 것도 좋고, 신념을 따르는 것도 좋은데 새끼들은 어떻게 할 거냐고 하더라. 그것들은 무슨 죄가 있어 아비도 모르고 할아버지가 있는지도 모르고 커야 하냐고. 이제 와서 내가 네 아비다 하고 나타나면 눈물 흘리며 반가워할 줄 알았냐고 혼을 내더라.”
“ 그럼 이젠 안 하겠네?”
“ 글쎄 그게 문제야.”
“ 무슨 문제?”
“ 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 같거든.”
“ 넌 바보구나.”
“ 마누라에게 미안하고 자식에게 미안하지만, 두작군이란 인간이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겠냐. 그런 넌 어떻게 할 건데.”
“ 난 어차피 장가도 못 가고 혼자일 텐데 뭘.”
“ 미안해 할 부인이나 자식이 없을 거라고?”
“ 응!”
“ 하하하!”
“ 프! 하하하!”
자운 일행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두 사람의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돼 가슴을 헤집었다.
이상과 현실. 신뢰와 타협.
그것들을 놓고 얼마나 고민했던가. 결국 자신을 비롯한 일부는 현실과 타협을 더했고, 저들은 이상과 신뢰를 택했다.
과연......
누가 더 성공적인 삶을 살았을까.
자운은 고개를 돌려 창노를 보았다. 그는 두 사람이 남기고 간 그릇을 챙기고 있었다.
“ 저기....”
“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
창노는 그릇을 담은 보자를 싸며 자운을 보았다.
“ 그게......”
자운은 할 말이 없었다.
목숨 바쳐 충성하겠다고 맹세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벌주를 비롯한 궐주가 의문의 실종을 당했을 때 외면하고 말았다. 담대만승 일행이 대야벌을 장악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침묵했다. 아니 공손정우라는 신진을 무궐 궐주로 앉히고, 그가 가져다 준 달콤함에 취해 현실을 외면했다.
“ 그럼 수고들 하시게.”
짐을 챙긴 창노는 휘적휘적 자리를 떴다.
털썩!
창노가 멀어지자 네 사람은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들은 말없이 두작군이 방금까지 오물을 푸던 오물 바가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작군은 성공한 친구들 앞에서 창피하지 않느냐고 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다. 삼십 년 동안 지옥에 갇혔고, 한때 친구였던 자들이 가끔 놀러오는 곳의 화장실을 푸고 있으면서도 당당했다.
“ 우린 지난 삼십 년 동안 뭘 했을까?”
악선유 일행에게 묻는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묻는 말이었다. 비단 옷에 끼니를 걱정할 필요 없고, 처소를 나서면 수백 명이 고개를 숙이는 지위도 얻었다.
그런데 허일삼과 두작군을 보자 문득 자신이 초라해졌다. 비단 옷은 가식처럼 보이고, 통통하게 살찐 손은 위선처럼 느껴졌다.
“ 우린 최선을 다했네. 태을!”
자운을 보며 말하는 악선유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 역시 자운과 같은 심정이기 때문이었다.
“ 그들이 우연히 나타났다고 생각하는가?”
풍운신제 장문우가 일행을 보며 말했다.
“ 우리가 바본줄 아는가?”
종남도제 상자인이 장문우의 말을 받았다.
“ 그렇겠지.”
장문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들은 우리에게 많은 말을 하고 갔네.”
“ 공손정우를 비롯한 네 문파 수장들과 그들을 따라갔던 무인들이 전멸했다고 보면 되는 건가?”
장문우는 일행을 보며 물었다.
“ 지금까지 연우강의 행적을 봤을 때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거네.”
자운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 그럼 나소산맥에서 발견됐다는 백의정검군이나 중천추살군은 잠룡대 대원들이겠군.”
이번엔 악선유가 말했다.
“ 무궐을 비롯한 네 문파는 선장을 잃은 배가 됐네.”
자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조금 전 허일삼이 두작군에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 만일 말이다. 또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할 거냐?’
그 질문은 두작군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네 사람, 자신들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현 수뇌들인 공손정우, 적환규, 설야, 육사이가 죽고, 전대 궐주가 돌아왔는데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이었다.
“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악선유가 일행을 보며 물었다.
“ 글쎄, 어떤 일을 하기엔 우린 너무 늙었다는.....”
[ 아직 늙지 않았다. 자운.]
말을 자르며 두작군의 전음이 들려왔다.
자운은 시선을 들어 조금 전 두작군과 허일삼이 간 곳을 보았다.
[ 칠십 평생을 살면서 난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진실을 밝히고자 했던 그 사건의 당사자들인 벌주와 궐주도 난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면 장 벌주나 남궁 궐주는 마음이 너무 여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따랐던 건 신뢰 때문이고, 신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한 사람은 인정한다.]
[ 그 사람이 연우강이란 말이냐?]
두작군의 위치를 파악한 자운은 전음을 보냈다.
[ 그렇다. 그 녀석은 평소엔 아주 호인처럼 보이지만 누군가를 표적으로 삼기 시작하면 악마로 돌변한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용납하지 않고, 죽은 놈도 또 죽여 확인 사살을 한다. 절대 그의 표적이 되지 마라.]
[ 지금 날 협박하는 거냐?]
[ 협박이 아니라 충고다. 아울러 난 그 녀석이 널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면 기꺼이 검을 뽑을 거다. 네 자식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려도 그렇게 할 테고, 네 손녀를 없애라고 명령을 내려도 따를 거다. 아니 꼭 그래야 한다면 녀석의 명령이 없어도 손을 쓸 거다.]
[ 그 친구가 엄청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대수롭잖게 말은 하고 있지만 자운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다.
세월이 흘렀다고 하지만 두작군의 성정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두작군은 부인과 자식보다는 무인의 본분에 더 충실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비록 세월이 흘렀다고 하지만 친구의 자식을 기꺼이 죽이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은 연우강을 그만큼 따른다는 의미다.
[ 그 녀석에게 무덤 자리를 부탁해 두었다. 그럼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마.]
더 이상 두작군의 전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자운은 멍한 얼굴로 두작군이 있는 곳을 보았다.
“ 무슨 말을 하던가?”
악선유는 눈치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자운이 두작군이나 허일삼과 전음으로 대화를 나눴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 연우강이 명령하면 내 가족의 목을 기꺼이 베겠다고 하더군.”
“ 기꺼이?”
“ 그렇다네.”
“ 억하심정 때문이 아니고 연우강의 명령 때문이라고?”
악선유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 그것뿐만 아니네. 작군 그 친구는 연우강을 그 녀석이라고 했네. 그 말은 곧 연우강을 주공으로 모시면서도 아들처럼 또는 손자처럼 생각한다는 말이네.”
“ 자네 가족을 베겠다는 것이 장난말이 아니라는 거군.”
“ 가족을 없애겠다는 말을 장난말로 할 사람은 없네. 을목. 그리고 그 친구는 연우강의 명령이 없어도 검을 뽑을 상황이면 주저하지 않을 거라고도 했네.”
“ 완전 협박이군.”
악선유는 얼굴을 찌푸렸다.
“ 문제는 그 협박이 통한다는 거네.”
자운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눈빛으로 장문우와 상자인을 보았다.
자운의 눈빛을 받은 상자인이 입을 열었다.
“ 우리에겐 두 가지 길이 있네. 하나는 담대만승 편에 서는 거고, 다른 한 가지는 전대 궐주님을 모시는 거네.”
“ 전자는 토사구팽 당하고, 후자는 멸망할 가능성이 높겠군.”
자운이 말을 받았다.
“ 난 후자를 택하겠네.”
풍운신제 장문우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 너무 성급한 결정 아닌가?”
자운을 비롯한 일행은 의아한 얼굴로 장문우를 보았다. 네 사람 중 가장 신중한 사람이 바로 장문우였다. 그런 그가 곧바로 전대 궐주를 따르겠다고 했으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사실 그때 난 작군 그 친구들과 함께하고 싶었네.”
“ 그런데?”
“ 겁이 났네.”
“ 겁?”
“ 그렇네. 난 신중한 게 아니고 겁이 많네. 그때도 그랬지. 만일 그 일을 하다가 잘못되면 어떻게 될까? 그럼 내 미래는? 남은 내 가족은? 신뢰나 신념이니 하는 건 남들 이야기였지. 내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숨기지도 않으면서 주어진 환경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았네. 그런데 이젠 그만 하고 싶네.”
“ 지금은 겁이 나지 않는단 말인가?”
“ 겁은 나네.”
“ 하면?”
“ 문득 한 번 정도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나이 칠십 아닌가?”
“ 클클클! 나이 칠십에 철든 모양이구먼.”
자운은 나직이 웃었다.
“ 자네도 나와 같은 생각인가보구먼.”
“ 어쩔 수 있는가. 따르지 않으면 작군 그 친구가 내 자식은 물론이고 손자들까지 전부 없앴다는데.”
자운은 문득 가슴속이 시원해짐을 느꼈다.
늘 뭔가 가로막고 있는 듯 답답함을 안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느낌이 씻은 듯 사라졌다.
‘ 그것 때문이었나 보군.’
그는 피식 웃엇다.
“ 그런데 작군 그 친구가 이렇게 머리가 좋았던가?”
악선유 또한 두 사람과 함께하기로 한 듯 웃으며 물었다.
“ 그건 무슨 소린가?”
장문우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 작군 그 친군 네 문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네. 그런데 우린 알아서 기고 있지 않은가?”
“ 그러니까 을목 자네 말은 비단 옷 어쩌고 한 것도 이런 상황을 유도하기 위한 거란 말인가?”
장문우는 다시 물었다.
“ 내가 아는 작군은 잔머리를 굴리는 위인은 아니었거든. 전대 궐주 또한 검 쓰는 것 빼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고.”
“ 그럼 지금 상황도 연우강 그 친구 작품이란 말이군.”
“ 그런 것 같네.”
악선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 수천 리 밖에 있는 녀석이 이곳에 있는 우릴 조종하는 셈이 되는건가.”
“ 그런 것 같네. 그만 일어나세. 풍운 저 친구의 말처럼 죽기 전에 우리 뜻대로 한번 살아보세.”
네 사람은 서로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리고 늦었지만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정식인사는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자운을 비롯한 네 사람은 조금 전 창노가 갔던 곳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처소로 향했다.
네 사람이 떠나자 십여 장 떨어진 나무 그늘 아래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보자기를 들고 있는 그는 창노였다. 한동안 자운 일행을 쳐다보던 창노는 몸을 돌렸다.
반 시진 후 창노는 야장 장주 처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 다녀왔는가?”
무원은 정리하던 서류를 내려놓고 차를 따라 건넸다.
“ 녀석의 말대로 됐습니다.”
창노는 자리에 앉았다.
“ 그들이 그렇게 결정을 내렸단 말인가?”
무원은 반색하며 물었다.
그가 창노를 보낸 모험을 감행한 건 무궐을 비롯한 네 문파를 장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수장을 잃은 무궐 일파가 담대만승 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번 일을 계획했다. 그런데 그들의 발을 묶는 정도가 아니라 끌어들인 것이다.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큰 성과를 얻은 셈이었다.
“ 가슴이 시키는 걸 한 번은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 같더군요.”
“ 허허허! 그랬군. 아무튼 운도 따라주는 것 같구먼.”
“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 뭐 하고 있는 겁니까?”
“ 그 녀석이 각 문파 지부에 대해 정보를 달라고 하지 않겠는가? 하오밀문에서 정보가 도착해서 정리 중이네.”
“ 지부라고요?”
“ 상당히 많더구먼.”
“ 어느 정돕니까?”
“ 야궐은 무쌍검문, 장천창문, 적호문이 있었네.”
“ 무쌍검문은 전에 우강에 녀석에게 당해 멸문하지 않았습니까?”
“ 그랬지. 아무튼 야궐은 두 개의 지부가 있고, 묵야련은 철검방, 전마방, 혈인방, 사자림은 사자방, 맹호방, 풍운방, 사해림은 동해방, 서해방, 남해방의 각각 세곳이 있었네.”
“ 군마련은 어떻습니까?”
창노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무원이 언급한 문파는 대단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한 번 정도는 들어왔던 이름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전부가 대야벌 각 문파에 예속돼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 군마련은 군웅보와 마룡보, 마웅보가 있었는데 군웅보는 잠룡 십 조와 싸우다가 멸문했고, 두 곳만 남았네. 그리고 철무련의 지부는 귀원산장, 낙영산장, 녹류산장, 세 곳이었네.”
“ 상상을 초월하네요.”
“ 대야벌이 강호 무림이란 말이 공연히 나오지 않았겠지.”
“ 그렇겠지. 그보다 그걸로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 낸들 알겠는가. 녀석이 달라면 줘야지.”
“ 그 녀석은 알려나 줄 일잊. 그건 그렇고 따로 들어온 소식은 없습니까?”
“ 담대천호와 악붕, 해천일이 은밀하게 회동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네.”
“ 그게 무슨 말입니까?”
창노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철사자왕 악붕은 사자림의 림주고, 광해용왕 해천일은 사해림의 림주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두 사람은 야궐, 묵야련과 더불어 벌주 지지파였다. 그런 그들이 벌주의 친동생이라고 하지만 벌주 자리를 노리고 있는 담대천호와 회동을 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 그것뿐만이 아니네. 잠룡궁의 궁주 천기만리통 혁세군도 그 자리에 있었다네.”
“ 그들이 나눈 이야기도 들었답니까?”
“ 그것까지는 듣지 못한 모양이네.”
“ 견원지간까지는 아니더라도 함께 모일 정도의 사이는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그놈들도 무영 아닐까요?”
“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 그게 아니라면 이 시기에 놈들이 모일 이유가 없잖습니까?”
“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네만........아무튼 조사를 해보면 뭔가 나오겠지.”
무원은 지필묵을 준비하여 각 문파의 지부와, 지부가 위치한 장소를 적어나갔다.
남궁우문은 그런 무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사림에서 시작된 전쟁은 점점 끝을 향해 치달리고 있다. 쉽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군의 피해 역시 거의 없었다. 하지만 권력의 핵심으로 다가갈수록 일은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처리할 수 있을는지 그게 걱정스러웠다.
‘ 잘될 거야. 아니 당연히 잘돼야 해.’
그는 주먹을 불끈 틀어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