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나천후 줄을 잡다
천상천 벌주 집무실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담대만승, 범일승, 혁세군이었다.
뭔가를 기다리는 듯 문을 흘끔거리는 그들의 얼굴에는 초조한 빛이 어려 있었다.
그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벌내쟁투의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벌컥!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세 사람은 일제히 손에서 찻잔을 내려놓고는 출입문 쪽을 보았다. 약간은 굳은 듯한 얼굴을 한 만우량이 들어왔다.
" 어떻게 됐는가?"
담대만승은 만우량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물었다.
" 야장 벌주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 벌주의 정체?"
담대만승은 의아한 얼굴로 만우량을 보았다.
" 뜻밖의 인물이었습니다."
" 누군가?"
" 팔황정벌에서 실종됐던 장만보였습니다."
" 자, 장만보였다고?"
" 장만보란 말이오?"
" 자, 장만보!"
담대만승을 비롯한 세 사람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 그렇습니다."
" 정말인가?"
" 그 세 명이 펼친 검법은 낙일마검법, 창궁대연검법, 일검무적검법이었다고 합니다."
" 그럼?"
" 무원은 낙일마검 장만보였고, 창노는 창궁무제 남궁우문, 향노는 장만보의 심복이었던 일검유향 양장문이라는 말이 됩니다. 물론 창궁대연검법은 남궁운화라는 계집이 익히고 있기는 하지만 낙일마검법과 일검무정검법은 팔황정벌 이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 그들이 확실하단 말이군."
" 설사 장만보 본인이 아니라고 해도 낙일마검법을 익히고 있다면 관련이 있는 자로 봐야 합니다."
" 그래서 어떻게 됐는가?"
" 야장 대부분은 멸문했고, 철장전, 장인전, 복장전, 취몽전, 천농전의 전주들을 비롯한 야장 무인들 대부분을 없앴다고 합니다."
" 장만보는 잡지 못했단 말인가?"
" 그는 창노, 향노와 함께 연우강에게로 간 모양입니다."
" 호굴로 들어갔군."
담대만승은 피식 웃었다. 잠룡대를 맡고 있는 자는 혁련무극으로 대야벌 최강자다. 고거 비무에서 자신이 이기긴 했지만 그땐 실력 차이로 이긴 게 아니었다.
사실 그날 펼쳤던 마지막 초식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만일 혁련무극이 받아쳤더라면 패자는 자신이 됐을 것이다. 그가 받아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동귀어진을 선택했는데 예상대로 혁련무극은 물러났던 것이다. 실력이 앞서 이긴 게 아니라 심리 싸움에서 이겼을 뿐이다. 그래서 혁련무극의 충성을 얻어내고 벌주가 됐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당시 혁련무극은 일 초 이상 펼칠 여력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분명히 혁련무극의 무공이 더 뛰어났었다.
그런 그가 공격하는 곳이 바로 잠룡대다.
" 호굴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만우량은 고개를 저었다.
벌내쟁투의 대상이 야장이라 찜찜함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그 느낌은 낙일마검 장만보의 등장으로 싹 사라졌다. 굳이 장만보 본인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장만보 또는 장만보 사주를 받은 자가 야장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야장을 칠 명분은 충분했으니까.
그래서 장만보가 잠룡대로 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걱정하지 않았다. 그곳엔 대야벌의 일인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혁련무극이 있기 때문이다. 방금 벌주의 말처럼 호랑이 굴로 걸어 들어간 거라며 웃었다.
" 무슨 소린가?"
" 그놈들이 탈출했답니다."
" 놓쳤단 말인가?"
잠시 담대만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연우강 때문이었답니다."
만우량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 연우강이 왜?"
" 놈의 무공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답니다."
" 그게 무슨 소린가?"
그동안 연우강의 무공에 대해 꾸준히 의문을 제기했고, 올초에 녀석의 가슴까지 확인했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 놈에게 죽은 대라검문 무인들의 수가 수십 명이 넘는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놈의 무공에 의해 포위망이 뚫리면서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 놈의 가슴에 나 있던 흔적은 분명 대범천....."
담대만승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문득 대범천뇌정도법에 당한 흔적을 보여준 사람이 연우강이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 탓이다.
지금 생각하니 벌주에게 흉터를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행동이다. 더구나 연우강은 잠룡 신분이 아니었던가?
만일 다른 사람이 그랬더라면 어떤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의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놈의 무공을 확인하려는 조급함에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 쥐새끼 같은 놈!"
담대만승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흘러나왔다.
혼자 씩씩대며 화를 삭이던 담대만승은 만우량을 보았다.
" 야궐 소속 무인들이 놈들 추격에 나섰습니다."
" 자존심이 극도로 상한 모양이군."
야궐 소속 모든 무인들이 대야벌을 나갔다는 말에 비로소 담대만승의 입가에 미소가 물렸다. 그 말은 곧 혁련무극 또한 극도로 자존심이 상했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었다.
" 그가 직접 나섰으니까 연우강과 장만보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 나도 자네와 같은 생각이네. 지금부터는 연우강이나 장만보가 아니라 대야벌의 내실을 생각해야 하네. 약속은 잡았는가?"
" 무궐과 황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그렇네."
" 잡아두었습니다."
" 그들을 만나고 난 다음에 대야벌 총회를 개최할 참이네. 그사이에 자네들은 율법을 개정하도록 하게."
" 문파 이름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 대야벌이란 이름 대신 대야천으로 하고 그 아래는 궁으로 그리고 궁 아래는 전으로 하게."
" 알겠습니다. 천주님."
만우량은 바로 천주라고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 혁련 궐주가 돌아오기 전까지 마무리 지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준비하게."
" 혁련 궐주가 가만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범일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그 방안에 대해서도 이미 생각해 두었네."
담대만승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어떤......"
" 그건 뇌천에게 듣도록 하게."
" 알겠습니다. 천주님."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상천을 나서자마자 범일승은 만우량을 향해 입을 열었다.
" 어떤 방안인지 그걸 알고 싶은 게요?"
" 그렇소. 만 군사."
" 전력이 줄어들면 입지가 좁아지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소."
" 연우강 일행이 혁련무극의 전력을 줄여줄 거라고 보시오?"
" 연우강 일행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혁련무극의 전력을 줄이는 건 무리지요."
" 그럼?"
" 밀천이 있지 않소."
" 아!"
범일승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 일종의 차도살인이군요."
" 그렇소. 범 궁주. 그리고 묵야련의 련주에게는 규동에 있는 밀천 총단을 쳐달라고 할 참이오. 설사 혁련무극이 살아서 이곳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하게 될 거요. 걱정할 필요 없소이다."
" 그렇군요."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들의 웃음은 야망을 성취한 자들이 짓는 흡족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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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야벌에서 벌어진 벌내쟁투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강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소문을 받아들이는 강호 무인들의 행태는 과거와는 달랐다.
전엔 대야벌에 큰일이 생기면 강호 무림에 큰 일이 생긴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는데 이번엔 비교적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그러한 사실에 가장 고무된 곳은 개파대전을 마치고 조직 정비에 나선 밀천 수뇌들이었다.
동정호 밀천 총단으로 모여든 수뇌들의 얼굴엔 화색이 만연했다. 특히 밀천 최고 어른인 나적리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회의실로 모여든 수뇌들을 보는 그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맺혀 있었다.
" 그동안 정말 수고했네. 이 모든 게 자네들 덕분이네."
그는 치하의 말을 했다.
" 아닙니다. 태상천주님. 이 모든 게 태상천주님과 천주님 덕분입니다."
환밀가의 가주 전마 사유성이 웃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 아무튼 강호인들의 인식이 변했다는 건 우리에게 호재임이 분명하오. 그리고 난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소."
이번엔 나적리 옆, 천주 자리에 앉아 있던 나천후가 말했다.
" 저희도 마찬가집니다. 천주님."
수뇌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 군사."
나천후는 죽혼검 성군을 보았다.
"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성군은 한쪽 벽면 지도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지도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을 이었다.
" 대야벌을 떠난 연우강 일행이 향하는 곳은 이곳 화산입니다."
" 야궐의 규모는 어느 정돈가?"
" 야랑대, 혈라마문, 대라검문, 비도사문, 흑마괴문을 비롯해 멸문한 단철도문의 잔여 인원까지 모든 무인이 총 출동해 있습니다."
" 너무 많은 거 아닌가?"
나천후는 고개를 갸웃했다. 야궐의 전 무인이 동원됐다면 삼천 명에 육박한다. 여섯 명을 잡기 위한 출병으로는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 혈람마문 문주인 혈마광자 도철을 비롯해 상당수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게다가 그들 일행 속에는 연우강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끼어 있습니다."
" 낙일마검 장만보를 말하는 건가?"
" 장만보뿐만 아니라 창궁무제 남궁우문과 일검유향 양장문이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 설사 그들이 있다고 해도 너무 많다는 생각인데, 태상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천후는 고개를 돌려 나적리를 보았다.
' 태상!'
나적리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손자인 나천후가 그를 태상이란 칭호로 부른 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 공적인 자리라서 그렇습니다. 조부님.]
나천후의 전음이 들려오자 나적리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그는 시선을 돌려 수뇌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 야궐 전 무인이 강호로 나온 것은 일종의 시위라고 보네, 천주."
" 시위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
" 우리의 개파대전이 성공리에 끝났고, 대야벌은 과거에 비해 입지가 현격하게 좁아지지 않았는가?"
" 대야벌은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을 강호 무림에 알리기 위해 전 무인을 출병시켰단 말이군요."
" 내 생각은 그렇네."
"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소?"
" 저도 태상천주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 저도 그렇습니다."
수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가만있으면 안 되겠구려."
" 그렇습니다. 천주님."
수뇌들 중 누군가가 말했다.
" 하지만 야궐 무인의 수는 삼천 명에 육박하고 적장은, 어쩌면 담대만승보다 강할지도 모르는 혁련무극이네."
" 저를 보내주십시오. 천주님."
풍밀가의 가주 일섬무영참 원세군이 벌떡 일어났다.
" 말은 고맙지만, 이번 일은 중원인이 해야 하네."
" 제가 동영인이라고 안 된다는 말씀입니까?"
원세군의 얼굴에서는 불쾌하다는 기색이 여실히 드러났다.
" 동영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대표성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네."
" 대표성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 원 가주가 혁련무극을 없애게 되면, 원 가주 개인적인 위명은 높아지겠지만 밀천의 위명은 깎아먹기 때문이네."
" 전 밀천 소속입니다. 천주님."
자존심이 상한 듯 원세군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 그건 나도 아네. 원 가주와 혁련무극의 싸움을 지켜보는 자들은 전부 중원인들이네."
" 제가 승리한다고 해도 인정해 주지 않을 거라는 말이군요."
" 그래서 이번 출정의 책임자는 중원인이 돼야 하고, 밀천 내에서도 상당한 지위에 있는 분이라야 하네."
나천후는 나적리를 보았다.
나천후의 시선을 받은 나적리의 얼굴이 슬쩍 굳었다. 나적리는 내심 당혹스러웠다.
느닷없이 출병해 달라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나적리가 당황한 이유는 이번 일에 대해 솑인 나천후로부터 사전에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호칭을 바꾸더니 이제는 사전 조율도 없이 일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 홀로 서기를 하고 싶다는 말이구나.'
그는 나천후를 가만히 보았다.
녀석이 홀로 서기를 할 정도로 컸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기쁨보다는 씁쓸함이 앞섰다.
그렇다고 수뇌들 앞에서 내식을 할 수도 없다.
" 나 정도는 돼야 한다는 말이냐?"
나적리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을 열었다.
" 사실 혁련무극은 저도 장담할 수 없는 잡니다. 그를 없앨 수 있는 사람은 태상밖에 없습니다."
" 좋다. 그 일은 내가 처리하마."
나적리는 흔쾌히 고기를 끄덕였다.
" 출병할 무인은 태상께서 뽑아주십시오."
" 알았다. 그럼 회의는 끝난 거냐?"
공연히 앉은 자리가 불편해 물리고 싶었다.
" 아닙니다. 태상. 한 가지 안건이 더 있습니다."
" 어떤 안건이냐?"
" 군사."
나천후는 다시 성군을 보았다.
시선을 받은 성군은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 최근에 대야벌 각 문파의 지부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 중요한 걸 입수했구나."
나적리는 탁자 위로 시선을 내렸다.
다른 때 같았으면 가장 먼저 종이를 잡아 내용을 훑었겠지만 방금 일을 겪고 나자 손이 ㄴ아가지를 않았다.
나적리가 망설이는 사이 나천후가 종이를 집어 들었다.
" 계속하게."
나천후는 성군을 흘끔 보다가 다시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 먼저 야궐의 지부는 장천창문과 적호문이 있고, 묵야련은 철검방, 전마방, 혈인방, 사자림은 사자방, 맹호방, 풍운방, 사해림은 동해방, 서해방, 남해방, 군마련은 마웅보, 마룡보, 철무련은 귀원산장, 낙영산장, 녹류산장이 있습니다."
" 그것들이 다 대야벌의 지부란 말이냐?"
나적리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문파 대부분이 한 지역의 패자들이었다. 설마 그들 모두가 대야벌의 지부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 그렇습니다. 태상천주님. 태상천주님의 출병과 더불어 대야벌의 지부 또한 이번에 전부 없애야 합니다."
" 그래야겠지."
나적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천후를 보았다.
" 대야벌의 각 지부를 없애는 임무는 사 가주가 맡아 주시오."
" 알겠습니다. 천주님."
벌떡 일어난 사유성은 고개를 숙였다.
" 이제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우리 밀천은 대야벌을 누르고 강호 최강 세력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비록 대야벌에 많은 무인들이 남아 있다고 하지만 그들은 산서성 패자로 남을 뿐이오. 우리 강호 무림은 우리 밀천 거라고 할 수 있소. 아무쪼록 최선을 다해 주길 바라오." " 알겠습니다. 천주님."
자리에서 일어난 수뇌들은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회의실 안에는 나천후와 나적리만 남았다.
" 넌 어떻게 할 참이냐?"
" 금의위 진무사 남철진과 만날 약속을 잡았습니다."
" 그가 만나준다고 하더냐?"
" 오늘 동정호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 황실도 드디어 우릴 인정하는 모양이구나."
나적리는 흡족하게 웃었다.
" 개파대전을 통해 영입한 무인이 오천 명입니다. 조부님. 그들도 이젠 우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 잘됐구나. 아무튼 기분 상하지 않도록 잘 접대해 보내도록 해라."
"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지금 나가봐야 시간을 맞출 수 있습니다."
" 그만 일어나자."
나적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나천후는 천주 호위대인 밀천금의대를 대동하고 밀천을 나섰다. 그가 약속 장소인 화선에 도착한 것은 저녁때였다.
도원이란 이름이 적힌 화선은 밀천을 개파히면서 동정호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 배였다.
" 어서 오십시오. 천주님."
안으로 들어서자 후덕한 중년 여인이 고개를 숙이며 맞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과거 백설의 루주였던 육난설이었다.
" 준비는?"
" 조사를 해보았는데 채 성숙하지 않은 애들을 좋아한다고 해서 손이 타지 않은 애들로 셋을 준비했습니다."
" 수고했네. 아무튼 소홀함이 없어야 할 거네."
" 접대에 대해서는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천주님."
" 자네만 믿겠네."
나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남철진이 도원으로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 후였다.
" 어서 오십시오. 대인."
나천후는 활짝 웃으며 남철진을 맞았다.
" 성공적인 개파대전을 축하하네. 나 천주."
남철진은 웃으며 상석으로 자리를 잡았다.
' 이자가?'
나천후의 눈에 슬쩍 힘이 들어갔다.
남철진은 오늘 처음 본 자다. 그런데 보자마자 반공대를 한 것이다.
' 주도권을 잡아보겠단 말인구나. 남철진.'
나천후는 내심 중얼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 고맙습니다. 대인."
나천후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천후는 탁자에 놓인 술병을 들었다.
" 한잔하시지요."
" 고맙네."
남철진은 술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 건방진 놈!'
남철진이 한 손으로 술잔을 내밀자 나천후는 내심으로는 욕을 하면서도 두 손으로 술을 따랐다.
술잔을 내려놓은 남철진은 술병을 들고 나천후의 잔을 채워주었다.
이번에도 역시 남철진은 한 손이고 나천후는 두 손이었다.
" 들세."
남철진은 만족스런 얼굴로 술잔을 들었다.
" 초대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강호 동도인데 서로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 하하하! 대인께서 그렇게 생각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주 좋은 자리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예쁜 아이들을 몇 준비했는데 지금 어떻습니까?"
" 일을 먼저 하고 난 다음에 즐기자는 게 내 신조네. 나 천주."
" 일거리를 가져오셨단 말입니까?"
" 일거리라기보다는 부탁이네."
" 부탁이라면?"
" 대야벌에 큰일이 일어난 걸 알고 있는가?"
" 나도 며칠 전에 보고를 받았습니다."
" 그럼 이야기하기가 편하겠군."
남철진은 술잔을 비웠다.
나천후는 재빨리 술잔을 채워주었다.
술잔을 잠시 응시하던 남철진이 입을 열었다.
" 연우강을 비롯한 장만보 일행은 서쪽으로 도망을 쳤고, 잠룡대 대원들은 남쪽으로 그리고 연금석 일행은 동쪽으로 도망을 쳤네."
" 지금 연금석이라고 하였습니까?"
나천후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연금석은 연우강의 아버지 이름이고 금릉 연씨 세가가 공격당할 때 죽임을 당한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연금서이라니.
" 몰랐는가?"
" 설마 연금석이 대야벌에 있었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 연금석뿐만 아니라 조부인 연운상, 어미인 이숙경, 동생인 연우진 부부까지 전부 대야벌의 야장에 머물고 있었네."
" 세상에......"
나천후의 입이 쩍 벌어졌다.
등잔 밑이 어둠다고 그들이 그곳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하하하! 금의위 정보력은 천하제일이네, 천주."
" 그런 것 같습니다. 대인. 우린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천후는 등줄기가 축축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동창의 정보력이 중원 최강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금의위도 그렇게 대단한 정보력을 보유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대단한 자들이 아닐 수 없었다.
"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천주와 나 둘만 알고 있어야 하네."
" 강기막을 치겠습니다. 대인."
나천후는 내공을 끌어올려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막을 쳤다.
" 대단한 무공이구먼."
남철진은 빙그레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 이제 긴한 이야기를 해도 새어나가지 않을 겁니다."
" 먼저 내 말을 이해하려면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네. 그러니까......"
남철진은 연우강과 얽힌 이야기를 나천후가 알아도 상관없는 부분만 추려서 간략하게 말했다.
" 그러니까 연우강 그놈이 남경왕 전하의 외아들인 군왕세자를 살해했단 말씀이십니까?"
나천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국천위장군의 시호를 받은 주무상의 활약은 그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주무상이 시호를 받은 이면에 그런 사연이 숨어 잇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 문제는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는 거네,"
" 양성일과 공모해 증거를 없앤 모양이군요."
" 그것도 역시 심증뿐 물증은 없네."
" 그럼 남는 건 범인의 자백인데.."
" 맞네. 사건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네. 그런데 우린 놈을 체포할 수가 없네."
" 황명을 받아 체포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나천후는 고개를 갸웃했다.
남경왕 주진무는 과거의 권력을 되찾았고, 금의위는 그의 신임을 받는다고 했다. 그 정도면 황명을 받아내는 건 일도 아닐 테다.
그런데 체포할 수 없다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 나도 백번 그렇게 하고 싶네. 그런데 그놈을 감싸고 있는 자들이 동창의 유설연과 도독동지인 양성일이네. 자칫 잘못하다가는 역공을 당할 염려가 있다는 거네. 특히 남경왕 저하께서는 이제 막 힘을 되찾은 상황 아닌가. 아직 완벽하지 않네."
" 직접 체포는 못한다는 말이군요."
"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네."
남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긴 했지만 금의위에서 간접 체포로 작전을 바꾼 이유는 최근 돌아가는 황실 상황 때문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동창이 연우강을 감싸고 돌았을 뿐 아니라, 비록 사석이었다고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도 연우강에 대해 질문을 한 것이다.
황제가 관심을 가졌다는 건 곧 조그만 허점을 남기게 되면 역습을 당한다는 말이 된다.
연금석 가족을 잡아들이는데 금의위가 관련됐다는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은밀하고 조용히 처리하면서도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떠넘길 수 있는 자.
그런 자로 밀천의 천주인 나천후가 제격이었다.
" 그래서 연우강 대신 그의 가족을 체포해서 자백을 받아낼 생각이십니까?"
" 유기견의 특성이 뭔지 아는가?"
남철진은 느닷없이 떠돌이 개 이야기를 꺼냈다.
" 갑자기 유기견은 왜?"
나천후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버림받은 유기견의 특징은 자기를 받아준 주인에게 엄청난 충성심을 보인다는 거네."
" 연우강도 그럴 거란 말입니까?"
" 연우강 그놈도 유기견 같은 성정을 가졌다는 말이네."
" 그래서 그놈 부모를 잡아달라는 말입니까?"
나천후의 얼굴이 슬쩍 굳었다.
사실 연금석과 이숙경을 잡는 것은 연우강을 없애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결코 그들이 무공이 강해서가 아니다. 만일 그 일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면 금릉 연씨 상단 휘하에 있는 상인들이 밀천과 거래를 끊을 것이다.
덥석 잡아 챌 일이 아니다.
" 다행히 연금석은 연우강의 부하들이라고 할 수 있는 무인들과 함께 탈출 중이네. 무인끼리 싸우는 걸로 하면 크게 문제가 없을 거네. 더구나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연우강은 연금석의 친자식도 아니고 업둥이 아닌가. 연우강에게 범죄에 대한 자백만 받아내면 연금석 가족은 다시 풀어줄 참이네."
" 정말입니까?"
나천후는 여전히 굳은 얼굴을 풀지 않으며 물었다.
" 난 금의위 북진무사 남철진이네. 진무사 정도 되면 한번 뱉은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 하네. 그래야 북경에서 살아남는다네."
" 좋습니다. 대인. 대인을 믿겠습니다. 하지만...."
" 대가가 필요하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 일로 내가 얻을 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대인과의 만남을 지속하고 싶고, 앞으로 부탁드릴 일도 있을 것 같아서 수락했습니다."
" 나만으로는 부족하단 말이군."
" 굳이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 좋네. 그럼 이번 일이 끝나면 남경왕 저하와의 만남을 주선하겠네."
" 그래 주시겠습니까?"
" 물론이네. 나 천주. 대신......"
남철진은 자세를 바로 했다.
" 말씀하십시오."
" 지금 만남은 자네와 나 둘만 알고 있어야 하네. 자네 조부께도 말하면 안 되네. 그렇게 해주겠는가?"
" 물론입니다. 대인. 혼자만 간직하고 있겠습니다."
" 연금석 일행을 보호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 아는가?"
" 지옥에서 탈출한 죄수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금의위 위사들은 연금석 가족이 은신해 있던 가옥으로 침입해 들어가지 못했네."
" 밀천에는 뛰어난 무인들이 많습니다. 대인. 믿고 맡겨 주십시오. 대신 한 가지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 어떤 일을 해달라는 말인가?"
" 대인께서도 아시겠지만 연우강 그자는 하오밀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 하오밀문의 눈과 귀를 우리 금의위 쪽으로 돌려달라는 말인가?"
" 그렇게 해주시면 일하는데 훨씬 편할 것 같습니다."
" 알겠네. 그렇게 해주겠네."
" 감사합니다. 대인"
" 고맙다는 말은 오히려 내가 해야지. 자! 이제 일 이야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세."
" 그렇게 하지요."
내공을 푼 나천후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기녀 세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 하향이옵니다."
" 나월이옵니다."
" 수린이옵니다."
기녀들은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 하하하! 어서들 오너라. 너희 둘은 이쪽으로 오고 수린 넌 천주 곁으로 가거라."
남철진은 호탕하게 웃으며 기녀를 손짓으로 가리켰다.
"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하향과 나월은 남철진 곁으로 가서는 좌우 측에 앉았다.
" 하하하! 한잔 따르거라."
남철진은 두 기녀의 가슴으로 손을 쓱 밀어 넣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 오오!"
남철진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천후를 보았다.
" 마음에 드십니까?"
나천후는 웃으며 물었다.
" 물론이네. 천주. 아주 마음에 드네."
' 담대만승, 보았느냐? 난 줄을 잡았다. 남경왕이라는 아주 튼튼한 줄 말이다.'
나천후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