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물고 물리고, 물리고 물고
섬서성 동쪽 진령산맥 동단에 위치한 화산은 중원 오악 중 서악에 해당하는 명산이다.
조양봉, 낙안봉, 연화봉, 운대봉, 옥녀봉의 다섯 봉우리가 선인의 손바닥처럼 늘어서 있고, 기암괴석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계곡으로 이루어진 화산은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시인묵객들이 자주 찾는 장소며, 무림 문파인 화산파가 자리해 있어 무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연우강 일행이 화산에 들어선 것은 단풍이 짙게 물든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 죽이네."
연우강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빨강 물감을 뿌려놓은 듯 화산 전체가 붉다. 그 빛이 얼마나 짙은지 떠다니는 대기마저도 붉어 보인다. 숨을 깊게 몰아쉬면 금세 온몸이 붉게 물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 만사태평이구나."
창노는 어이없는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지금 반나절 거리 뒤에는 혁련무극을 비롯한 야궐 무인 삼천여 명이 쫓아오고 있다. 그런데 녀석은 단풍 타령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 장기전을 치를 땐 긴장을 최대한 풀어놔야 합니다. 하루종일 긴장상태를 유지하게 되면 피로가 누적돼 진짜 싸움이 벌어졌을 땐 힘을 쓰지 못하는 겁니다."
" 그래서 유람 나온 것처럼 하란 말이냐?"
" 유람 나온 것처럼 하라는 게 아니라 상황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 이제 나도 어른 대접 해주기로 한 모양이구나."
창노는 피식 웃었다.
연우강의 말투가 전과 달랐다.
" 전처럼 반말을 찍찍 해대면 남궁 가주 얼굴이 뭐가 됩니까?"
" 그러니까 나 때문이 아니고 순전히 운화 때문이란 거냐?"
창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나도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는 걸 보며 화가 나거든요."
" 아무튼 언젠가 그놈의 주둥일 꿰매버리고 말 거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창노는 연우강을 쏘아보며 으르렁댔다.
" 죽었다가 깨어나도 그럴 일은 없을걸요?"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방향을 틀었다.
" 그쪽은 왜?"
창노는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지금 그들이 걷고 있는 곳은 화산 북쪽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오리관이다. 서쪽은 천길 낭떠러지고 오른쪽은 깊은 계곡인데, 연우강이 계곡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 화산에 대해서 아세요?"
" 그쪽은 모르지만 다섯 봉우리가 있는 곳은 비교적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창노가 화산을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는 이유는 과거 검을 연구하면서 이곳에 들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 영감님이 알 정도면 야궐 무인들은 환히 꿰고 있을 거잖아요."
" 그러니까 야궐 무인들이 잘 모르는 장소로 유인해 가겠다는 거냐?"
" 난 이것만 있으면 찾아가지 못할 곳이 없거든요."
연우강은 지도를 꺼내 흔들었다.
" 지도만 믿고 길도 없는 산중으로 들어가겠다고?"
" 그래서 군대를 가야 하는 겁니다. 영감님."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 같이 갑시다."
그때 뒤편에서 군무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일찍 왔네?"
연우강은 군무옥을 돌아보았다.
" 일찍 온 게 아니라 놈들이 코앞까지 들이닥쳤소."
" 어디 있는데?"
" 저기요."
군무옥은 뒤편을 가리켰다.
파앗! 파앗!
펄럭! 펄럭!
바닥을 찍는 소리와 옷자락 휘날리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무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은 아무리 적게 잡는다고 해도 수백 명은 넘는다는 의미였다.
" 그동안 너무 노닥거렸나 보네. 가자."
연우강의 신형이 전방으로 쏘아졌다. 곧 일행은 연우강을 쫓아 몸을 날렸다.
" 염소 수염 영감은 만났어?"
" 네."
" 뭐래?"
" 밀천에서도 출병했답니다."
" 얼마나?"
" 수밀가 무인 일천 명, 풍밀가 무인 이천오백 명, 그리고 은원이라고 부르는 원로 무인 삼백 명도 나왔답니다."
" 노인네들까지 나왔다고?"
" 네."
" 노인네들까지 나왔다면 지휘관의 신분이 상당하겠네."
" 천붕대야 나적리가 그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 나적리가 나왔단 말이지?"
연우강은 활짝 웃으며 물었다.
" 그렇습니다. 그런데...."
군무옥은 연우강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 내 얼굴에 뭐 묻었냐?"
" 전에도 던진 미끼에 대어가 걸려들었을 때 그 표정을 짓지 않았소. 무슨 미끼를 던진 거요?"
" 표시가 나?"
" 대장과 함께 생활한 게 오 년이잖소."
" 더럽게 오래 살았네."
" 대장!"
" 전에 나천후 그놈에게 한마디 해 줬거든."
" 나천후를 최근에 만난 건 개파대전 때 아니었소?"
" 아!"
문득 옆에서 나직한 탄성이 들려왔다.
탄성을 내뱉은 사람은 남궁운화였다.
군무옥은 남궁운화를 돌아보았다.
" 작은 형수님은 아시오?"
" 그때 연 공자가 나천후에게 진짜 밀천의 천주가 되고 싶으면 할아버지 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거든요."
- 아군이냐 적군이냐를 떠나 멋진 놈에게는 멋지다고 칭찬할 줄 알아야 발전이 있는 거다. 나천후. 아무리 적이라도 잘 난 놈은 잘난 거야. 그걸 인정하지 못하면 넌 절대 네 조부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날 연우강이 일백마의 무덤을 만들어주기 전 나천후에게 했던 말이다. 워낙 마음에 와 닿는 말이어서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 그랬소?"
군무옥은 연우강을 돌아보며 물었다.
" 그냥 충고였을 뿐이야."
연우강의 나아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 대장이 남는 것도 없는데 충고를 해줄 사람이 아니라는 건 흑랑대 대원 전부가 알고 있소."
" 그것 때문에 내 충고를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은 거냐?"
" 충고가 개떡 같으니까 받아들이지 않았던 거요."
" 충고만 받아들이지 않은 게 아니라 명령도 듣지 않았지."
" 솔직히 말하면 난 그날 가고 싶지 않았소."
" 그런데 왜 나간 거냐?"
" 녀석들이 전부 가겠다고 하잖소."
" 내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그 녀석들은 아직 살아 있을 거다."
" 아직 살아 잇는 게 아니라 죽음이 조금 늦춰졌겠지요."
" 아무튼 그날 너희들은 내 충고, 아니 명령을 들었어야 했어. 나천후 그놈을 봐. 내 충고를 들으니까 목숨을 건지잖아."
" 하지만 그놈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죽겠죠."
" 나적리가 죽을지, 혁련무극이 죽을지 그건 이번 일이 끝나봐야 알아."
" 잠깐만!"
연우강과 군무옥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던 창노가 버럭 소리치며 그 자리에 멈췄다.
" 움직여야 합니다. 영감님. 지금 한가하게 노닥거릴 때가 아닙니다."
연우강은 마라천력으로 앞으로 가로막는 나무를 쳐내며 말했다.
" 지금 한 말이 다 뭐냐?"
창노는 다시 몸을 날리며 물었다.
" 다 들었으면서 다시 묻는 건 머리가 나빠서 그런 겁......이건 또 정천호 말투가 됐네. 남궁 소저. 방금 제 말 못 들은 걸로 하세요."
연우강은 고개를 돌려 남궁운화를 보며 말했다.
"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그리고 저도 설명이 필요해요."
" 그러니까 영감님뿐만 아니라 남궁 소저도 이해를 못했다는 거예요?"
" 네."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 간단하게 생각하면 돼요."
" 어떻게요?"
" 꼭 어떤 고기를 잡아야겠다고 하면서 낚시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미끼를 끼우고 던져 놓으면 배고픈 고기들이 알아서 물죠."
" 그러니까 나천후 소협에게 충고하는 척 하면서 자존심을 잔뜩 긁어놓은 거군요."
" 똑똑하고 잘난 녀석과 약간은 어수룩하고 귀가 얇은 사람 중 다른 사람의 충고를 누가 더 쉽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죠?"
" 비교 대상을 보니까 똑똑하고 잘난 사람인가보죠?"
" 그렇습니다. 똑똑한 녀석은 당장은 귀에 거슬린다고 해도 그 충고가 옳다면 흘려듣지 않아요."
" 하지만 자존심은 배로 상한다는 뜻이죠?"
" 그렇습니다. 충고를 받아들이되, 충고했던 자에게 결과를 반드시 보여주려고 하죠."
" 그 결과가 나적리의 출병이란 말인가요?"
" 제가 바랐던 건 아니고 결과가 그렇게 나왔을 뿐이에요."
" 허허!"
듣고 있던 창노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녀석이 하는 일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진다. 기가 막힌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 운이 좋아서 그런 거니까 그렇게 감탄할 필요 없습니다."
" 그게 다 운이란 말이냐?"
" 금릉 연씨 세가의 업둥이로 들어간 것부터가 운이라고 했잖아요."
어느새 일행 앞에 좌우측이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협곡이 나타났다.
" 염소수염 영감은 어떻게 한 대?"
" 종남산에서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 환영축골공은 익혔냐?"
" 완벽하게 익혔소."
" 영감님들은 어떻습니까?"
이번엔 무원 일행을 보았다.
" 우리도 익혔다. 그런데 왜 그러느냐?"
" 필요할지도 몰라서 그래요."
연우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른편으로 우뚝 솟은 산이 눈에 들어왔다.
" 대장이 보는 산은 봉황산이고 왼쪽은 백척협이오. 이곳을 따라가면 정상으로 올라가는 절벽이 있소."
" 절벽의 높이는?"
" 이번에 올라갈 때 재볼 참이오."
" 높다는 말이지?"
" 그럴 거요."
" 일단 그곳까지 가서 쉬자."
" 따라오시오."
군무옥의 신형이 둥실 떠오르더니 나무 위로 올라갔다. 곧 일행은 원숭이처럼 나무를 건너뛰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 내가 말한 건 전했어?"
연우강은 군무옥을 따르며 물었다.
" 며칠 있으면 우리가 화산을 떠나 종남산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문이 날 거요."
" 좋아. 그럼 그건 됐고, 다른 소식은?"
" 진무사 남철진과 나천후가 만났다고 하오."
" 먼저 만나자고 한 놈은 누구지?"
" 나천후라고 합디다."
" 개파도 했으니까 이젠 관에 연줄을 만들겠다는 모양이구나."
" 그노 ㅁ대가리가 제법 도는 놈이군요."
" 그놈은 머리 굴려봐야 거기서 거기야. 그놈보다는 남철진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면 큰일 나."
" 최대한 금의위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다고 하오. 그보다 그분들도 세가로 모시는 게 낫지 않소?"
" 나도 그러고 싶은데 너무 드러나 있어. 교라잉 진식을 완성하면 그때 모실 생각이야. 그건 그렇고 우릴 따르고 있는 자들은 어느 정도야?"
" 흑마괴문 무인 오백 명, 야랑대 삼백 명, 야노원 노인데들 오십 명이라고 하오."
" 나머진?"
" 은밀하게 빠져나갔다고 하오."
" 각 지부로 갔겠지?"
" 그것까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합디다."
" 무슨 소리냐?"
뒤에서 따르고 있던 무원이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 혁련무극이 홀로 서기를 결심했다는 말이고 드디어 대야벌이 무림세력으로 전락했다는 말입니다."
" 우강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무원이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 저절로 알게 될 겁니다. 아무튼 하룻밤이라도 편히 쉬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영감님."
연우강이 속도를 냈다. 그가 빠르게 나아가자 나머지 일행도 내공을 끌어올리며 연우강을 따라나섰다.
연우강 일행이 동쪽으로 몸을 날리는 그 시각, 오리관 근처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은 지금껏 연우강을 쫓아 왔던 혁련무극 일행이었다.
" 저쪽으로 가면 검애인데....."
혁련무극이 중얼거렸다.
" 검애를 아십니까?"
유악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혁련무극의 말투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탓이었다.
"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질렀던 곳인데 잘 알지. 낭떠러지인데 낭떠러지 면에 검을 꽂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네. 하지만 검애라는 본래 지명보다는 검림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네."
" 창룡령 길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창룡령은 동쪽, 서쪽, 남쪽 봉우리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이었다.
" 창룡령으로 가는 길이 가장 빠르고 쉽네. 반나절 정도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네."
" 그럼 나 문주를 창룡령으로 보내야겠군요."
" 그렇게 하도록 하게."
" 나 문주!"
유악재는 뒤편을 향해 나직이 소리쳤다.
" 부르셨소?"
그러자 온몸에 쇠사슬을 친친 감고 있는 중년인이 몸을 날려 왔다. 그는 야궐 다섯 문파의 한 곳인 흑마괴문의 문주 흑괴 나아추였다.
" 검림을 아시오?"
" 알고 있소이다. 군사."
" 문도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가 주시게."
" 알겠소이다."
꾸벅 고개를 숙인 나아추는 뒤편으로 몸을 날렸다.
곧 철삭으로 온몸을 감싼 흑마괴문 무인 오백 명이 창룡령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때까지도 혁련무극은 오리관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운명이 그를 이끌고 있는 건가, 아니면 부정이 그를 이끄는 건가. 두고 보면 알겠지.'
혁련무극은 고개를 저어 밀려오는 상념을 흘려보냈다.
" 속도를 늦추라고 하게."
" 알겠습니다. 궐주님."
고개를 숙인 유악재는 계곡으로 몸을 날려가는 무인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잠시 후 야궐 무인들이 나아가는 속도가 느려졌다.
" 우리도 가지."
혁련무극은 동쪽의 계곡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출발하라!"
곧 출발명령이 떨어지고 남은 무인들이 서쪽 계곡으로 쏘아져 갔다.
연우강 일행이 검애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 저녁 무렵이었다. 전날 밤 동굴을 택해 잠을 푹 잔 상태라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 멋진 곳이네."
연우강은 위쪽을 올려다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돌기둥이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서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꽂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이곳이 검애라는 원래 이름보다 검림으로 더 많이 불리는 이유를 비로소 알 듯했다.
돌기둥 주변으로는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 살기로 들어찬 곳을 멋지다고 한 녀석은 너밖에 없을 것이다."
위을 올려다보던 창노는 툭 쏘아붙였다.
이십여 장 위쪽부터는 살기가 안개처럼 퍼져 있다. 살기가 대기를 장악할 정도면 수백 명이 은신해 있다고 봐야 한다.
창노의 예상대로였다.
검림 곳곳에 숨어 있는 자들은 야궐 소속 흑마괴문 무인 오백 명이었다.
흑마괴문은 연우강 일행에게 멸문한 잔살단과 더불어 대야벌에서 가장 특이한 문파였다. 문파 이름에 괴 자가 들어간 것은 문도들의 무기 때문이다.
검, 도, 창 등 일반 무기를 사용하는 무인들과 달리 흑마괴문 문도의 무기는 괴삭이라 부르는 삼 장 길이의 쇠사슬이었다.
" 놈!"
아래를 내려다보는 나아추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먼저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하지 않는 이유는 부하들의 몸상태 때문이었다.
삼 장 길이의 쇠사슬을 무기로 사용하기 때문에 일반 무기를 사용하는 자들보다 내공 소모가 극심하다.
그래서 공격 전 최적의 몸 상태를 만들기 위해 운기행공을 비롯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아추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운기행공을 끝낸 조들이 하나둘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 조금만 기다려라, 연우강.'
나아추는 쇠사슬을 지그시 말아 쥐었다.
" 멋진 전쟁터란 뜻입니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절벽 아래쪽은 돌과 잡풀로 이루어진 공터다.
동쪽과 서쪽은 검애 정도는 아니지만 급경사를 이루고, 소나무와 잣나무 단풍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폭은 이백 장가량이었다.
전체적으로 입구인 북쪽이 낮고 남쪽은 높다.
공터 중앙에는,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그 시작점을 알 수 없는 물이 모여들어 작은 연못을 이루고 있다. 폭이 반 장가량 되는 곳에 모인 물은 다시 계곡 중앙을 관통하며 북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이제 어떻게 할 참이냐?"
창노는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애초에 이곳으로 택했던 건 적이 화산 지리를 잘 모를 거라는 가정에서였다. 그런데 야궐 무인들이 먼저 도착해 있다. 이곳을 환하게 꿰뚫고 있다는 의미였다.
" 씻어야지요."
대답은 군무옥이 했다.
군무옥은 피식 웃으며 연못으로 걸어갔다.
" 그래야지."
고개를 끄덕인 연우강은 사망궤를 내려놓고 군무옥 옆으로 갔다. 두 사람은 천천히 옷을 벗었다.
뒤편에 창노 일행은 물론이고 여자인 남궁운화가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 속옷까지 벗고 완전한 알몸이 됐다.
" 뭐 하는 짓이냐?'
창노가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말없이 연못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머리를 감고, 얼굴을 씻고, 몸을 씻었다.
" 사막에 온 것 같소."
군무옥은 연우강 앞으로 등을 들이대며 말했다.
" 이렇게 씻어본 게 몇 년 만이지?"
연우강은 군무옥 등에 물을 끼얹으며 물었다.
" 기억도 안 나오."
군무옥의 눈이 아득해졌다.
왜 기억을 못할까. 지금도 여전히 사막의 꿈을 꾸고, 그 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문득 어디선가 삭막한 사막의 냄새가 풍겨오는 듯하다. 사막엔 신분의 격차가 없고, 잘난 놈 못난 놈도 없다.
다만 삶과, 삶 이후의 긴 여백만 있을 뿐이다. 그 여백 속에서 미친 듯이 발악을 했다.
" 맞아. 이젠 꿈속에서만 갈 수 있는 곳이지."
군무옥의 등을 씻겨준 연우강은 몸을 돌렸다.
그의 정면으로는 창노 일행이 서 있었다. 아래가 고스란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연우강은 몸을 돌리지 않았다.
" 운기행공을 해두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군무옥에게 등을 맡기며 나직이 말했다.
하지만 창노 일행은 연우강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때 군무옥이 양손으로 물을 받아 연우강의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대부분의 물이 쏟아지고 연우강의 머리 위쪽에 다다랐을 때는 빈손이나 다름없었다.
" 내일 태양을 다시 보기를."
군무옥은 손바닥을 좌우로 천천히 펼치며 기도하듯 말했다.
부르르!
창노는 몸을 격하게 떨었다.
연우강과 군무옥의 단순히 먼지에 찌든 몸을 씻는 것이 아니었다. 저들은 전투 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이었다.
" 내일 태양을 다시 보기를."
이번엔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할아버지."
남궁운화가 가만히 창노를 불렀다.
" 왜?"
" 운기행공 하세요."
남궁운화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하고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그러자 나머지 세 사람도 자리에 앉아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네 사람이 운기행공을 하는 사이에 연우강과 군무옥은 밖으로 나와 몸을 닦고 옷을 입었다. 그러고는 군무옥은 운기행공을 하고, 연우강은 내려두었던 사망궤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일행이 운기행공을 마치고 일어난 건 반 시진 후였다. 연우강은 궤짝을 열고 먹을 걸 꺼내 일행에게 주었다.
" 일부러 이곳을 택한 것 같은데 이유를 알 수 있느냐?"
무원은 육포와 건포를 받아들며 물었다.
" 우리가 종남산으로 간다고 소문을 냈거든요."
" 나적리가 무인을 이끌고 그곳으로 온다는 말이렷다."
" 그렇죠. 하지만 혁련무극이 도중에 마음이 바뀌어 대야벌로 돌아가 버리면 힘들게 유인해 온 의미가 없잖아요."
" 하면?"
" 적극적으로 추격에 가담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 줘야지요."
" 어떻게 동기를 부여한단 말이냐?"
" 죽은 동료의 복수 정도면 아주 훌륭한 동기가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종남산에 도착하고 나면 몸을 빼고 싶어도 뺄 수가 없고요."
" 그건 왜 그런 거냐?"
" 밀천 무인이 종남산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철수를 한다면 그는 야궐의 궐주가 아니라 겁쟁이로 낙인이 찍히게 되잖아요."
" 그렇구나. 무인으로서 생명은 끝나겠지."
" 무슨 수를 쓰든 종남산까지는 끌고 가야 해요."
" 하지만 이곳에서 우리를 잡게 되면 혁련무극은 철수할 명분을 얻게 되겠지."
" 검애 위쪽은 무인들이 떼거지로 숨어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없어요."
" 치고 나가면 된다는 말이냐?"
" 치고 나갈 때는 등을 맡아줄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요."
연우강은 무원과 창노를 보았다.
" 우리 둘이 조를 이루란 말이구나."
" 전 남궁 소저와 조를 이루고, 전랑과 향노가 한 조가 돼야 할 것 같아요. 절대 십 장 이상은 떨어지지 않도록 하세요."
" 알았다. 절벽을 넘은 다음 어디로 가면 되느냐?"
혹시 헤어지더라도 만날 장소를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 그건 전랑이 말해 줄 겁니다."
연우강은 육포를 잘게 찢어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무원 일행은 군무옥을 보았다.
" 남봉을 통해 화산을 빠져나간 다음 곧바로 종남산으로 가면 되오. 혹시라도 중간에 헤어지게 되면 첫 번째 접선 장소는 종남산 북쪽에 있는 회회촌이오. 그곳으로 가면 하오밀문 문도가 기다리고 있소. 하오밀문 문도를 만나지 못하면 이런 표식을 찾으시오."
군무옥은 바닥에 태양 모습을 그렸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지도 한 장을 꺼내 무원에게 주었다.
" 알았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
무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촤르르! 철컥! 촤르르!
위쪽에서 쇠사슬을 풀어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적이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였다.
" 시작해 볼까요?"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궤짝을 둘러맸다.
자리에서 일어난 일행은 연우강 좌우로 늘어섰다. 왼편에는 육참낭아곤을 틀어쥔 군무옥과 향노가 섰고, 오른편에는 무원과 창노가 섰다.
" 준비됐어요?"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보았다.
" 예."
남궁운화는 검을 지그시 그러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 운화야, 조심하거라."
" 할아버지도 조심하세요."
[ 부탁한다.]
이번엔 연우강에게 전음을 보냈다.
" 먼저 갑니다."
연우강의 신형이 허공을 솟구쳐 올랐다.
순식간에 십 장 높이로 솟구친 그는 기둥 위로 날아 내렸다. 남궁운화가 날아 내린 곳은 연우강과 삼 장 떨어진 기둥 위쪽이었다.
" 죽여라!"
순간 위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촤르르!
곧이어 사방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리더니 서너 개의 쇠사슬이 연우강과 남궁운화를 향해 쏘아져왔다.
파앗!
연우강과 남궁운화는 동시에 기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콰앙! 콰앙!
둔탁한 소리와 더불어 연우강과 남궁운화가 서 있던 기둥이 박살나며 돌가루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연우강과 남궁운화를 공격했던 흑마괴문 무인들은 모습을 드러내며 파리를 잡는 것처럼 손을 빠르게 끌어들였다. 그러자 꼿꼿하게 퍼져 있던 쇠사슬 끝이 둥글게 말렸다. 마치 갈고리가 달린 기다란 무기를 끌어당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쐐액!
바로 그 순간 연우강의 허리춤에서 뇌섬이 쏘아져 나갔다. 가공할 속도로 공간을 단축한 뇌섬은 남궁운화를 공격하는 자의 이마로 파고들어 갔다.
" 커억!"
나직한 비명과 함께 꼿꼿하게 퍼져 있던 쇠사슬이 힘을 잃고 떨어졌다.
" 차앗!"
우렁찬 외침과 함께 푸른 기운으로 둘러싸인 남궁운화의 신형이 공간을 단축했다. 그것은 절정에 달한 창궁무영신이었다.
순식간에 흑마괴문 무인 앞으로 내려선 남궁운화는 창궁검을 휘둘렀다.
번쩍!
그녀의 검에서 푸른 광채가 솟구쳐 나오고, 그 광채는 사내의 목을 통과했다.
"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사내의 머리가 둥실 떠올랐다.
남궁운화는 추락하는 사내의 가슴을 차며 다시 원래의 위치로 몸을 날렸다.
쐐액!
뒤편으로 물러나는 그녀를 향해 쇠사슬이 화살처럼 쏘아져갔다.
턱!
순식간에 자리를 이동한 연우강은 남궁운화의 허리춤을 잡고 몸을 피했다.
" 타앗!"
연우강에게 몸을 맡긴 상태에서 남궁운화는 그녀를 향해 쇠사슬을 쏘아낸 사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것은 창궁대연검법의 사 초인 창궁만파였다. 창궁검 끝에서 쏘아져 나온 푸른색 검탄강기가 부챗살처럼 퍼져 나갔다.
" 피하라!"
남궁운화를 공격했던 자들은 질겁한 얼굴로 소리쳤다. 설마 동료의 품에 안겨 몸을 피하면서 공격할 줄은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흑마괴문 무인들은 급하게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보다 검탄강기가 더 빨랐다.
퍽! 퍽퍽!
푸른색 검탄 강기 몇 개는 흑마괴문 무인들의 몸을 뚫고 들어가고 나머지는 주변 기둥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콰쾅! 쾅쾅!
처절한 비명에 이어 기둥들이 무너져 내렸다.
" 강해졌네요."
연우강은 멀쩡한 기둥으로 몸을 날리며 속삭였다.
"아직은 멀었는걸요."
남궁운화는 방금 부슨 기둥을 살피며 말했다. 오 장 높이의 기둥 다섯 개가 절반 가량 사라지고 없다. 창궁만파가 좀더 완벽했더라면 절반이 아니라 전부가 가루로 흩어졌을 것이다.
" 조급하면 오히려 퇴보합니다."
촤르르!
휙!
전방에서 쇠사슬이 빠르게 다가오자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위쪽으로 던져 올렸다. 그러고는 허공을 박차 날아오는 쇠사슬을 향해 쏘아져갔다.
쇠사슬 앞으로 가서는 왼손을 뻗었다.
카앙!
사망낭조에 부딪친 쇠사슬이 방향을 틀었다.
바로 그 순간 연우강의 오른손이 허공을 갈랐다.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사망낭조 한 개가 허공을 건너자 사내의 목에서 피가 벌컥벌컥 쏟아져 나왔다.
사내의 목 뒤로 뚫고 나온 사망낭조는 둥글게 원을 그리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연우강은 힘을 잃고 떨어지는 쇠사슬을 차 내며 조금 전 남궁운화를 던져 올렸던 곳으로 날아 올라갔다.
남궁운화는 다른 자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창궁무영신을 펼치는 그녀의 움직임은 빨랐다.
한 곳에 머무르는 시간은 일 초도 되지 않는다. 발을 디뎠다 싶으면 어느새 위쪽으로 가 있고, 그쪽으로 쇠사슬이 다가온다 싶으면 어느새 아래쪽으로 이동해 있다.
창궁대연신공과 창궁무영신이 완벽하게 하나가 된 상태였다.
' 창노 영감보다 더 강하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폈다.
싸우면서 올라온 거리는 오십여 장가량이다. 군무옥과 향노는 왼편에서 적과 싸우며 올라오는 중이고, 무원과 창노는 오른편에서 올라오는 중이다. 양쪽이 공히 오 장가량 떨어져 있다.
척!
적을 공격하고 난 남궁운화가 연우강이 메고 있는 사망궤 위쪽으로 날아 내렸다.
" 허공답보는 아직 안 돼요?"
" 해보질 않아서 모르겠어요."
남궁운화는 주변을 살피며 대답했다.
이십여 명의 무인이 당한 여파인 듯 흑마괴문 무인들도 신중해져 처음처럼 막무가내로 공객해 오지 않았다.
" 내 생각엔 될 것 같은데."
" 나중에 해볼 게요. 그런데 암기는 사망혈삭하고 사망낭조만 사용하는 거예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연우강의 옷에는 정확하게 백육십한 개의 암기가 있다. 그런데 이곳까지 올라오는 동안 연우강이 사용한 암기는 뇌섬과 사망낭조뿐이다. 사망낭조 또한 아홉 개를 전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만 사용했다.
" 이런 곳에서 암기를 사용하면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아요."
" 잃어버린다고요?"
" 바위를 뚫고 깊숙이 들어가면 아무리 마라천력을 동원한다고 해도 빼내는 게 쉽지 않거든요. 더구나 우린 빠르게 이동해야 하잖아요. 지금과 같은 경우엔 가급적이면 큰 암기나 사망혈삭처럼 잃어버릴 염려가 없는 암기 위주로 사용해야 해요."
" 아!"
그제야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쇄액!
슈욱!
기다리가다 지친 듯 흑마괴문 무인들의 두 번째 공격이 시작됐다.
퓩! 퓩퓩퓩! 퓩퓩!
수십 개의 철삭이 기둥에 박혀들었다. 흑마괴인 무인들은 철삭이 기둥에 박히자마자 힘차게 끌어당기며 몸을 날렸다. 원래의 경공술에 철삭을 당기는 힘이 더해지자 그들의 움직임은 번개처럼 빨라졌다.
" 빨리 움직이면 난 더 좋지."
연우강은 오른편 허리춤에서 사망혈궁을 꺼냈다. 그러고는 흑마괴문 무인들을 향해 나아가며 시위를 당겼다. 활이 한껏 굽어지는 순간 시위에 세 대의 화살이 생겨났다. 그것은 진기와 대기로 이루어진 풍뢰였다.
연우강은 흑마괴문 무인들을 쳐다보며 당긴 시위를 놓았다.
쿠쿠쿠! 쿠쿠쿠! 쿠쿠쿠!
절벽이 부르르 떨 정도로 가공할 소리가 터져 나오고, 풍뢰 세 대가 전방으로 쏘아져갔다.
퓩! 퓩! 퓩!
" 피, 피해......"
희미한 소리가 흑마괴문 무인들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들의 몸에는 이미 풍뢰가 박혀 들어간 후였다.
풍뢰에 당한 세 명의 몸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 맙소사!"
남궁운화는 경악한 얼굴로 연우강의 손을 보았다.
한 자 갈이의 활이 저런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풍뢰라는 놈이에요."
" 지뢰와 비, 비슷한 모양이죠?"
문득 얼굴이 붉어졌다. 전에 연우강이 지뢰를 시험하고 있을 때 그 앞에 발가벗고 섰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위쪽 아래쪽 할 것 없이 전부 보여주고 말았다.
" 맞아요.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래요?"
연우강은 다시 시위를 당기며 물었다.
" 제 목소리가 어때서요?"
" 도둑질하다가 들킨 사람 목소리 같은데요?"
" 서, 설마요."
" 혹시 그때를 떠올린 거 아니에요?"
연우강은 짓궂게 말하며 시위를 놓았다.
또다시 광포한 소리가 사망혈궁에서 흘러나오고, 풍뢰는 공간을 단축하며 흑마괴문 몸속으로 박혀 들어갔다.
" 한꺼번에 쳐라!"
위쪽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오고, 지금껏 거리르 유지하고 있던 흑마괴문 무인들이 일제히 연우강과 남궁운화를 향해 몸을 날렸다.
" 그때라면 언제를 말하는 거죠?"
남궁운화는 전면을 보며 물었다.
왼편에서 다섯 명, 위쪽에서 다섯 명 그리고 오른편의 다섯 명까지 총 열다섯 명이 몸을 날려오고 있었다.
" 내 눈이 호강한 그날 말이에요."
" 연 공자 눈이 호강한 날이라면....."
" 사막에서 기막히게 아름다운 광경을 봤잖아요. 설마 남궁 소저 몸매가 그렇게 아름다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수 소저보다 더 가슴이 클...."
" 한마디만 더하면 죽을 줄 아세요."
파앗!
남궁운화는 사망궤를 박차고 몸을 날렸다. 그녀가 몸을 날려 가는 곳은 오른쪽이었다.
" 차앗!"
그녀의 입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그녀의 창궁검에서 푸른 용이 튀어나와 흑마괴문 무인들을 향해 쏘아져갔다.
" 위에서 오면 난 좋지."
왼편으로 폭사돼 가는 연우강의 머리에서 사망철립이 훌러덩 벗겨졌다. 날아가는 속도가 너무 빨라 철립이 저절로 벗겨진 듯한 모습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쏘아져 오던 흑마괴문 무인들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은 철립을 무시하고 기둥을 바롤 차며 연우강을 쫓아 몸을 날렸다.
철컥! 철컥! 철컥!
바로 그 순간 철립이 여덟 개로 분리되어 다섯 명을 햐애 쏘아져갔다.
" 헉!"
" 억!"
신음을 내뱉고, 손을 뻗어보았지만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여덟 개로 분리된 사망철립은 흑마괴문 무인들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바로 그 순간 연우강의 허리춤에서 쏘아져 나간 뇌섬 또한 왼편에서 몸을 날려오던 자들의 몸을 뚫고 들어갔다. 한 명의 몸을 관통한 뇌섬은 뱀처럼 고개를 틀더니 바로 옆 사내의 목을 뚫고 들어가고, 나머지 네 명 또한 꼬치 꿰듯 뚫었다.
" 크아악!"
" 아악!"
"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남궁운화와 연우강은 추락하는 시체를 차 그 반발력을 이용하여 서로에게 몸을 날렸다.
척!
마치 제자리를 찾아가는 암기처럼 남궁운화는 사망궤 위로 날아 내렸다.
[ 먼저 가오, 대장.]
[ 먼저 간다.]
좌우 측에서 군무옥과 무원의 전음이 들려왔다.
흑마괴문 무인들이 연우강과 남궁운화 쪽에 집중되는 바람에 좌우 측이 느슨해진 모양이었다.
[ 제자가 위험에 처했는데 도와주지 않을 겁니까?]
연우강은 무원을 보며 전음을 보냈다.
[ 오히려 방해만 될 것 같아서 먼저 가는 거다. 녀석아. 아무튼 약속 장소에서 보도록 하자.]
무원과 창노는 빠르게 몸을 날려 절벽 위쪽으로 올라갔다.
[ 알았어요.]
챙! 창창창! 창창!
" 악!"
" 으악!"
" 아악!"
좌우 측에서 비명이 들려오며 흑마괴문 무인들이 절벽 아래쪽으로 추락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우린 아래로 가볼까요?"
연우강은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내려가자 위쪽에 있던 흑마괴문 무인 수십 명이 빠른 속도로 따라 내려왔다. 이십여 장가량 몸을 날린 연우강은 이번엔 왼편으로 이동했다.
" 놈이 왼편으로 이동한다!"
뒤따르던 자들이 고함을 내질렀다.
어수선한 소리에 이어 서늘한 기운이 머리 위에서 감지됐다. 연우강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는 듯하더니 뒤로 튕겨졌다.
콰앙! 콰앙!
그가 몸을 피한 순간 오 장 앞에 있던 기둥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수십 조각으로 분리된 돌덩이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연우강의 시선이 빠르게 돌덩어리들을 훑었다.
주먹 크기의 돌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마라천력을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슈아악!
그의 시선을 받은 돌덩어리들이 암기처럼 위쪽으로 쏘아져 갔다.
" 커억!"
" 크윽!"
" 으윽!"
나직한 비명이 연이어 들려오고 흑마괴문 무인들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연우강의 암기에 당한 자들과는 달리 돌덩이에 당한 자들은 대부분 살아 있었다.
파앗!
위쪽이 빈 듯하자 연우강은 기둥을 박차고 솟구쳐 올랐다.
[ 방금 동굴을 본 것 같아요. ]
연우강의 목을 잡고 있던 남궁운화가 전음을 보냈다.
[ 동굴로 들어가자고요?]
[ 우리가 시간을 끌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 그렇긴 하죠. 그런데 동굴이 확실해요?]
[ 정확하게는 모르겠어요.]
[ 일단 그곳으로 가보도록 하죠.]
연우강은 다시 왼편으로 몸을 날렸다. 빠르게 이동한 그는 왼편 숲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하면서 조금 전 남궁운화가 동굴을 보았다는 곳으로 갔다.
그녀의 말처럼 비스듬히 솟구친 기둥 아래쪽에 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틈새가 있었다.
기둥 그림자가 가리고 있어 여간해서는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연우강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입구와는 달리 안쪽은 폭이 반 장에 달할 정도로 넓엇다. 연우강은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퐁! 퐁! 퐁!
안으로 들어가자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왔다.
연우강은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계속 걸어갔다.
동굴은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거의 오십여 장을 걸었을까. 갑자기 동굴이 확 트이며 넓은 공간이 나왔다.
휙!
위쪽에 있던 남궁운화가 아래로 내려왔다.
연우강은 사망궤를 내리고 안쪽에서 야명주를 꺼내 비췄다. 주변이 환해지면서 동굴 전경이 드러났다.
가장 먼저 두 사람의 시선을 잡은 건 동굴 가운데 있는 연못이었다. 동굴 입구에서 들었던 물 떨어지는 소리의 근원이 바로 저 연못이었다.
" 시, 시체가 있어요. 연공자."
연못 안족을 쳐다보던 남궁운화가 연우강의 팔을 덥석 잡았다.
" 그렇네요. 무슨 사연이 있어 여기서 죽었는지...."
연우강은 혀를 차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두 다리와 두 팔이 없는 시체가 동굴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상당히 오래된 것 같은데 시체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했다.
" 팔과 다리가 잘려나갔어요."
연우강 뒤에서 고개만 내놓고 시체를 살피던 남궁운화가 나직이 말했다.
찌르르! 두 사람은 비고에 있던 마유와 사유였다.
" 욱!"
연우강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마치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강한 통증이 머릿속에서 느껴진 것이었다.
" 왜 그러세요?"
남궁운화는 깜짝 놀라 연우강을 잡았다.
"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 저기 글이 있어요. 연 공자. 저분이 남긴 것 같은데....... 팔도 없는 분이 어떻게 글을 남겼는지 모르겠어요."
툭!
시체가 남긴 걸로 추정되는 글을 쳐다보던 연우강의 손에서 야명주가 떨어졌다. 연우강의 눈은 찢어질 듯 커져 있었다. 한동안 글을 쳐다보던 연우강은 오한이 든 것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털썩!
연우강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