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55화 (155/232)

제 9장 애가 그리고 심뢰

" 당신이었군요."

연우강은 홀린 듯 중얼거렸다.

' 어?'

남궁운화는 제 귀를 의심했다.

연우강은 분명 당신이라고 하였다. 그 말은 곧 연우강이 아는 사람이란 말이었다. 손이 없는 상태에서도 글을 쓸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유전되는 마라천력.

남궁운화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녀는 얼른 시선을 돌려 시체 발치에 쓰여진 글을 보았다.

- 아들아, 내 아들, 우강아.

' 어멋!'

남궁운화는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급하게 심호흡을 해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글을 읽었다.

그날은 비가 왔단다.

그런데 유독 북두칠성만 눈에 띄더구나.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찬연하게 빛나는 북두칠성. 나는 그 북두칠성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런데 꿈이었더구나.

그 꿈을 꾸고 난 다음날 난 은설로부터 수태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너무 기뻐도 할 말을 잊는다고 하였던 누군가의 말이 맞더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은설의 손만 잡고 있었단다.

정말 바보 같은 처사였지.

고맙다는 말이라도 할걸.

수고했다는 말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바보처럼 나는 허허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마 대야벌 무영들이 봤더라면 틀림없이 크게 웃었을 게야. 무성의 성주라는 묵사가 바보처럼 웃고만 있었으니 얼마나 우스웠겠냐.

그렇지만 난 상관없었다.

자식 앞에서는 황족이 무슨 소용이고, 묵사가 무슨 상관이겠느냐.

하지만 난 은설이 없는 곳에서 천지신명께 감사의 절을 수백 번도 넘게 올렸다.

그리고 이름도 지었다.

꿈에 보였던 비와 구름의 기세에도 사라지지 않았던 북두칠성, 그 두 가지를 합쳐 '우강'이라 지었다.

네가 딸이라면 정말 미안하구나.

딸의 이름치곤 너무 강해서 말이야.

하지만 그날 밤 꿈속에서 보았던 전경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 하고 난 대야벌 무성으로 들어갔다.

왜 그렇게 시간이 가지 않든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출산 일이 점점 가까워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준비를 했다.

너를 낳고 힘들어 할 은설에게 먹이기 위해 구엽음양과를 구했다. 태어날 너를 위해서는 옷을 준비했다. 모자도 사고 신발도 준비했다.

손바닥보다 더 작은 신발이 얼마나 귀엽던지.

난 그만 신발을 품에 안고 바보처럼 울고 말았다.

그런데.........

꿈이 되고 말았구나.

이제 두 달.

육십 일만 지나면 내 자식이 태어나는데, 종남산이 바로 지척인데 난 이곳에 발이 묶이고 말았구나.

아들아, 내 아들 우강아!

난 후회하지 않는다.

황자로 태어난 운명도, 황족에서 제명당한 운명도, 숙명으로 여기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한 가지 후회가 남는다.

너를 위해 준비했던 이 옷을, 이 모자를, 앙증맞은 신발을 미리 전해주지 못했던 것을 정말로 후회한다.

미안하오. 은설.

정말로 미안하오.

만일 영혼이 있다면 반드시 당신 곁으로 가겠소.

신이시여!

은설과 우강 곁으로 가게 해 주십시오.

나 주선엽 당신께 빌고 또 비옵니다.

아닙니다. 신이시여,

제 영혼을 그들 곁으로 보내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은설과 우강이 무사하도록 돌봐 주십시오.

신이시여!

연우강은 시선을 돌려 아버지 시신 옆을 보았다.

그곳에는 옷가지가 펼쳐져 있었다. 맨 위에 모자가 잇고, 그 아래쪽에는 배냇저고리가 그리고 맨 밑에는 아주 작은 신발이 놓여 있다.

오랜 세월 방치돼 새카맣게 변했지만, 처음 상태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목곽 하나가 뒹굴고 있었다.

아마도 구엽음양과를 담았던 목곽인 듯했다.

어머니를 위해 준비한 구엽음양과를 복용하고 마라천력으로 마지막 글을 남긴 모양이었다.

" 참! 이상해요, 아버지. 태어나 처음 보는 건데 어색하지 않네요. 그냥 아주 오랜만에 만난 그런 느낌 같아요."

연우강은 혼잣말을 했다.

" 당신의 아들 우강인 이렇게 잘 자랐어요. 어머닌.... 아! 지금 아버지와 함께 계시겠네요. 잘 계시죠?"

자리에서 일어난 연우강은 아버지 옆에 있는 신발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썩어서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신발은 멀쩡했다.

신발을 만든 재질이 가죽이었던 것이다.

" 선물 고맙습니다. 아버지."

연우강은 신발을 가슴에 꼭 안았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던 그는 그 신발을 사망궤 안으로 집어넣었다.

" 저건 썩었겠죠?"

연우강은 신발 위에 있는 옷을 가리켰다.

" 들어 올리면 곧 부스러지고 말 거예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겠군요."

연우강은 묵사를 뽑아 바닥에 대고 찔러 넣었다. 한 자가량 뚫고 들어가자 둥글게 원을 그렸다. 검날이 처음 시작했던 곳에 도달하자 묵사를 뽑은 다음 마라천력을 펼쳤다.

퍼억!

미약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잘라놓은 돌이 떠올랐다. 연우강은 그 돌을 잡아 안쪽에 구멍을 뚫고 외부는 단지 형태로 다듬었다.

깔끔하게 다듬은 단지를 내려놓은 그는 아버지 시체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마라천력을 펼쳐 시체를 눕혔다.

툭!

시체가 똑바로 눕는 순간 가슴 어림에서 헤진 옷을 뚫고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양피지로 만든 책자였다.

" 선물이 또 있나 보네요."

연우강은 마라천력으로 양피지 책자를 끌어당겨 옆으로 놓았다. 그러고는 아버지의 시신에 손을 얹었다.

" 나중에 찾아뵐게요."

짧게 인사를 하고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화르륵!

그의 손길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순식간에 시체는 가루로 변했다.

연우강은 마라천력으로 가루를 끌어 모아 단지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사망궤 안에서 기름종이를 꺼내 입구를 봉해 안으로 집어넣었다.

" 뭐 해요?"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돌아보았다.

" 괜찮아요?"

남궁운화는 안쓰러운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괜찮지 않으면 어쩌게요. 통곡한다고 죽은 양반이 살아 오거나, 지난 이십육 년이 달라지지도 않을 건데요."

" 그래도......."

남궁운화는 조금 전 시체가 있던 자리를 슬쩍 보았다.

그것은 태어날 자식과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적어 놓은 애가였다.

" 여기요."

연우강은 사망궤 안에서 옷가지와 세안제를 꺼내 남궁운화에게 건넸다.

" 씻으라고요?"

" 그동안 제대로 씻은 적도 없잖아요. 연못에 가서 목욕도 하고 옷도 갈아입으세요."

연우강은 야명주 주머니와 양피지 책자를 들고 조금 전 아버지가 앉아 있던 자리로 가 앉았다.

" 알았어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옷가지를 챙겨들고 연못으로 갔다.

그녀는 연못에 손을 살짝 담갔다. 물은 뼈가 시릴 정도로 찼다.

" 삼매진화를 펼쳐서 물을 데우세요."

" 헹! 그 정돈 나도 알아요."

남궁운화는 혀를 쑥 내밀고는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곧 연못 위로 뿌옇게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물이 데워지자 그녀는 옷을 벗었다.

삼 장 떨어진 곳에 연우강이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떨리거나 부끄럽지가 않았다.

" 별일이네."

남궁운화는 고개를 갸웃하며 속옷까지 벗었다.

희미한 야명주 불빛 아래 남궁운화의 알몸이 드러났다. 야명주 불빛이 절로 숨을 죽일 정도로 그녀의 몸매는 아름다웠다.

제 몸을 내려다보며 싱긋 미소를 지은 남궁운화는 안으로 들어갔다.

" 아! 좋다."

뜨거운 물이 온몸을 감싸자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얼마 만에 하는 목욕인지.

남궁운화는 흡족한 얼굴로 몸을 씻었다. 머리를 물ㅇ레 적시고 조두를 풀어 천천히 문지렀다. 거품이 일며 장미향이 은은하게 풍겨 나왔다.

머리를 감고 나서 다시 조두를 덜어 얼굴을 씻었다. 장미향은 더욱 진해지며 심신이 편안해지는 듯했다. 얼굴에 이어 목을 씻던 남궁운화는 시선을 들어 연우강을 살폈다. 목 아래 부분을 씻기 위해서는 몸을 일으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연우강의 그의 아버지 몸에서 나온 책을 보는 중이었다.

남궁운화는 입을 쭉 내밀었다. 알몸으로 목욕을 하고 있는데도 관심조차 보이지 않자 공연히 심통이 났다.

' 헹!'

그녀는 혀를 쑥 내밀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연우강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상태로 태연하게 조두에 거품을 내 몸을 문질렀다.

그때 연우강은 아버지가 남기신 책에 빠져 있었다. 제목은 마라천력경이라고 돼 있었다.

- 우강에게 남긴다.

첫 장에 씌어진 글이었다.

전반부에는 마라천력에 대한 기본 상식을 적어두엇고, 중반부에는 이용방법이 적혀 있었다.

그러한 것들은 연우강도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아니 책에 적힌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다.

연우강을 집중하게 만든 부분은 후반부, 마라천력의 응용편이었다. 그중에서도 맨 마지막에 나와 있는 글귀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 연 공자."

그때 연못에서 남궁운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연우강은 고개를 들어 남궁운화를 보았다.

' 억!'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목욕을 끝내고 부른 거라고 생각하고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이편을 향해 등을 보이고 있는 남궁운화는 아직 알몸이었던 것이다.

" 등 밀어줘요?"

이내 놀란 얼굴을 감춘 연우강은 태연하게 물었다.

" 네."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는 허리춤에서 낫을 뽑아 사내 앞으로 던졌다.

" 알았습니다."

책을 내려놓은 연우강은 연못으로 걸어갔다.

남궁운화 뒤에 자리잡은 그는 한편에 있는 조두를 손바닥에 부은 다음 물과 섞어 비볐다. 잠시 후 손바닥에 거품이 잔뜩 일었다.

" 이쪽으로 오세요."

연우강은 연못 가장자리에 편하게 걸터앉으며 말했다.

" 아, 알았어요."

남궁운화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얼굴은 물론이고 귓불에서 열이 올랐다.

사실 등을 밀어달라는 말을 하기 전에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언제까지 지금과 같은 어정쩡한 관계로 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거절하면 깨끗이 포기하자는 마음에 용기를 냈던 것이다.

그녀는 연우강이 있는 곳으로 뒷걸음질쳐 갔다.

" 전에 비하면 마른 것 같네요."

연우강은 남궁운화의 등을 문지르며 말했다.

" 빠, 빠진 것처럼 보여요?"

연우강의 손이 닿자 남궁운화는 움찔하며 물었다.

" 그런 것 같아요."

" 에이! 잘못 봤을 거예요. 빠지기는커녕 전보다 더 커지고...."

남궁운화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그녀가 살이 찌고 빠지는 걸 판단하는 기준은 가슴과 엉덩이였다. 그런데 대야벌 숙소에서 목욕할 때 보니 전보다 더 커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식사량을 조금씩 줄이고 잇는 살이 빠졌다니.

" 어깨도 굳고."

다시 조두 거품을 낸 연우강은 남궁운화의 어깨에 비누칠을 하며 지압하듯 천천히 주물렀다. 그러면서 발로 내기를 보내 삼매진화를 일으켜 물을 데웠다.

" 시원해요."

남궁운화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물에 온기가 돌자 긴장으로 경직됐던 몸이 노곤하게 풀렸다. 그녀는 문득 기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 앞으로 조금만 숙여보세요."

" 네."

남궁운화는 상체를 약간 숙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등 곳곳에서 연우강의 손길이 느껴졌다. 거품을 칠하며 문지르고, 근육에 진기를 가해 굳은 혈을 풀어준다.

가벼운 추궁과혈이었다.

' 헥!'

남궁운화는 내심 신음을 흘렸다.

갑자기 그의 손길이 머무르고 있는 겨드랑이에서 야릇한 느낌이 감지된 것이다. 손바닥은 등에 댄 채지만 기다란 손가락은 가슴 바깥쪽에 조금 걸쳐 있다.

그녀는 그 느낌을 외면하며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야릇한 그 느낌은 잊어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어떤 광경처럼 점점 커졌다.

빙글빙글 돌리는 손바닥 촉감이, 간호 겨드랑이 안으로 파고들어 와 가슴을 슬쩍 건드리고 사라지는 손가락의 느낌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가장 강한 느낌을 받은 곳은 허리였다.

그의 손길이 허리에 추궁과혈을 할 때 겨드랑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손가락이 골반 근처까지 오곤 한다. 그때마다 강한 느낌이 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 추워요?"

연우강은 손을 멈추며 물었다.

" 야, 약간."

남궁운화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아무래도 물이...."

연우강은 말끝을 흐렸다. 물은 이미 따뜻하게 데워진 상태고 뿌옇게 수증기가 오르고 있다.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 춥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황금백수 짓도 안하다 보니 많이 녹슬었네.'

연우강은 피식 웃었다.

" 돼, 됐어요. 이제....."

남궁운화는 상체를 세웠다.

바로 그 순간, 겨드랑이 사이로 연우강의 손이 쑥 밀고 들어왔다.

" 헉!"

남궁운화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거품을 잔뜩 머금은 손이 양쪽 가슴을 떡하니 그러쥐고 있었다. 그녀는 잘못 봤나 싶어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가슴을 감싸 쥔 손은 그대로였다. 아니 그대로가 아니라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었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조금 전 느꼈던 그 느낌이 더 강렬하게 밀려왔다. 남궁운화는 멍하니 연우강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몸이 뒤로 당겨진 듯하더니 차가운 금속 감촉이 등에 느껴졌다. 연우강의 사망묵의였다.

뜨거운 입김이 귓전으로 쏟아지는 듯했다.

남궁운화는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자 그의 손길이 더 선명하게 각인되며 숨이 차올랐다. 그리고 가슴에 머물던 손 하나가 배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감지됐다.

" 여, 연...."

그녀는 고개를 돌려 연우강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그녀는 눈을 감았다.

조금 전 귓불에서 감지됐던 뜨거운 숨결이 이번엔 입 안으로 밀고 들어왔던 것이다.

머릿속이 하애지며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두 사람이 격정적으로 입맞춤을 하고 있는 그 시각. 검애 아래쪽에서는 혁련무극을 비롯한 야궐 무인들이 다가서고 있었다.

" 희생은 얼마나 났는가?"

혁련무극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연우강 일행이 강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흑마괴문 또한 약한 문파가 아니다. 그런데 그들이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돌파당하고 만 것이다.

" 칠십 명이 당했습니다."

나아추의 몸에서는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대야벌의 당호 근처에서도 잠룡대와 접전을 치렀고, 서른 명을 잃었다. 하지만 그 당시 잠룡대 대원들은 이백 명에 육박했다.

그런데 이곳에 있던 자들은 단지 여섯 명.

그들에게 칠십 명이나 당한 것이다.

" 추격하는 중인가?"

" 그렇습니다."

" 무원과 창노는 절벽 동편으로 올라갔고, 연우강의 부하처럼 보이는 녀석과 향노는 왼편 절벽으로 올라갔습니다."

" 연우강은?"

" 저기 숲으로 도망쳤든지 아니면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겁니다."

" 그랬군."

혁련무극은 검애 위쪽을 흘낏 쳐다보았다.

' 아비보다 못하단 말인가?'

혁련무극은 고개를 갸웃했다.

과거 주선엽은 무영 수십 명을 몰살시킬 정도로 초강자였다. 만일 연우강이 주선엽 정도의 실력자였더라면 칠십 명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 만일 그렇다면 내 손에 죽는다. 연우강.'

내심 중얼거리고 있는 데 노인 한 명이 다가왔다.

" 마제!"

혁련무극은 오른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곳에는 마의를 걸친 노인 오십 명이 절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겉모습으로는 전혀 무인들처럼 보이지 않는 그들이 야궐 무인들 중 가장 강자라고 알려진 야노원 원로들이었다.

" 부르셨소?"

그들 중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이 혁련무극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야노원의 원주 구천검마제 노욱이었다.

" 절벽 동쪽을 수색해 주시오."

" 알았소, 천주."

고개를 끄덕인 노욱은 야노원 원로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원로들은 검애 동쪽으로 몸을 날렸다.

" 양후!"

야노원 원로들을 지켜보던 혁련무극은 이번엔 야랑대 대주 복양후를 불렀다.

" 하명하십시오, 천주님."

" 자넨 대원들과 함께 서쪽을 수색하도록 하게."

"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복양후는 야랑대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잠시 후 야랑대 대원 삼백 명이 서쪽 절벽으로 몸을 날려갔다.

" 이곳에 남아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유악재는 혁련무극을 보며 물었다.

" 영리한 토끼는 굴을 많이 파둔다고 하더구먼."

" 만일 이곳에 있으면 어떻게 하실 참입니까?"

" 그건 그 녀석을 잡은 다음에 생각할 참이네."

혁련무극은 야랑대 대원들이 달라붙은 서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야랑대 대원들은 아래쪽부터 훑으며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 저렇게 시끄러워서야."

야랑대 대원들을 쳐다보던 혁련무극은 얼굴을 찌푸렸다. 천리지청술을 약간만 끌어올려도 야랑대 무인들의 움지임이 확연히 감지된다. 만일 절벽 어딘가에 연우강이 숨어 있다면  벌서 알아차렸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혁련무극의 예상대로였다.

두 사람은 입을 맞춘 채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알몸 상태였다.

[ 수색을 시작한 모양이에요.]

남궁운화는 혜광심어를 보냈다.

[ 지금부터 소리를 내면 큰일 납니다.]

연우강 역시 혜광심어를 보내며 서서히 움직였다.

' 학!'

남궁운화는 자기도 모르게 연우강의 등을 틀어쥐었다.

[ 그, 그럼 안 되잖아요.]

남궁운화는 자꾸만 비어져 나오려는 신음을 꿀꺽 삼켰다.

[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들이 누군지 아세요?]

[ 글쎄요?]

[ 타인의 사랑을 방해하는 놈들입니다. 아주 치사한 놈들이죠.]

[ 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남궁운화는 연우강을 흘겨보았다.

깊숙한 동굴이고 웬만해서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 일은 없다. 하지만 검애를 수색하는 자들은 무인들. 자칫 목소리라도 새어나가면 들키고 말 터인데, 연우강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격정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제발 가만 좀 있어요, 연 공자.]

남궁운화는 울 듯한 얼굴로 애원했다.

[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 왜요?]

[ 아까부터 강기막을 쳐두었거든요. 고함을 질러도 소리는 새어나가지 않으니까 걱정 마세요.]

[ 정말?]

[ 그렇다니까요.]

" 에이! 나빠요."

남궁운화는 연우강 등 위로 양손 깎지를 꼈다. 그러고는 사정없이 옆으로 돌리며 위로 올라갔다.

"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그녀는 연우강을 흘겨보며 소리쳤다.

" 덕분에 긴장이 많이 풀렸잖아요."

" 언제 긴장했따고 그래욧!"

" 긴장 안 했어요?"

" 소원 성취하는 중인데 긴장할 이유가 없잖아요."

" 소원이 있어요?"

" 네."

남궁운화는 연우강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와의 관계를 부끄러워한다면 그건 사랑하지 않는 게 되니까.

남궁운화는 고개를 숙였다.

" 강기막을 더 세게 쳐야 할 거예요."

그녀는 활짝 웃으며 연우강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 도망친 모양이오. 궐주."

주변을 훑고 돌아온 노욱이 혁련무극을 향해 말했다. 무려 반 시진 동안 절벽을 샅샅이 뒤졌지만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 그럴 거라 생각했소. 마제."

혁련무극은 고개를 돌려 복양후를 보았다.

" 서쪽도 마찬가집니다."

복양후는 고개를 저었다.

" 벌써 빠져나갔단 말이군."

" 쥐새끼 같은 놈입니다. 궐주님."

야랑대 대원들과 함께 절벽을 수색하고 돌아온 나아추는 절벽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다른 누구보다 열심히 수색했다. 하지만 연우강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 곧 따라잡게 될 테니까 진정하게."

" 전 먼저 가겠습니다."

나아추는 곧바로 절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잠시 후 그의 몸에서 철삭이 풀려 나오더니 위쪽으로 쭉 쏘아져 갔다.

푸욱!

철삭이 바위에 박히자 나아추는 사정없이 끌어당기며 몸을 날렸다.

콰앙!

나아추의 신형이 지나간 기둥이 커다란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나아추는 기둥을 부수는 것으로 들끓는 노화를 삭이며 올라갔다.

" 우리도 가세."

혁련무극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이어 그는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천천히 위쪽으로 올라갔다.

" 출발한다!"

" 궐주를 따르게."

복양후와 노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야랑대 대원과 야노원 원로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곧 검애 절벽 아래쪽은 정적에 휩싸였다.

살기를 뿌려대던 인간들이 떠나자 어디선가 날아온 산새들이 나직이 울어댔다.

정적은 외부에만 찾아온 게 아니었다.

열풍이 몰아치던 동굴 안쪽도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려올 뿐 조용했다. 두 사람은 사망궤 안에서 꺼낸 얇은 이불을 덮고 누운 채였다.

왼팔을 남궁운화에게 내준 연우강은 마라천력으로 책을 허공에 띄운 채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었다.

- 아직은 마라천력으로 심검을 펼칠 능력도 없고, 개념도 제대로 정립돼 있지 않다. 다만 문득 떠오른 게 있어 이 글을 남긴다.

마라천력이 됐든 무공이 됐든 가장 큰 제약은 거리다. 소림사의 백보신권은 유효 거리가 가장 먼 무공 중의 하나인데 그 거리는 이십삼 장(약 70미터) 가량이다. 백보신권을 검술에 대입하면 검탄강기라고 할 수 있다.

검탄강기보다 한 단계 위인 이기어검술의 유효 거리는 삼십 장이었다. 삼십 장을 벗어나게 되면 설사 이기어검술로 던진 무기라고 해도 피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럼 심검을 펼쳤을 때 상대방을 없앨 수 있는 유효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강호 무림엔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고 있다.

시선이 미치는 곳에 있는 자는 전부 죽는다는 설도 있고, 진기가 미치는 자리에 있는 자들을 없앨 수 있다는 설도 있다. 심지어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없앨 수 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전부 과장된, 그야말로 설이었다. 내가 확인한 바로는 심검이 미치는 거리는 오십 장 내외였다.

" 오십 장?"

연우강은 고개를 돌려 조금 전 관계를 갖기 전 벗어 내팽개친 사망묵의를 보았다. 사망묵의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 사망혈삭의 길이가 오십 장이었다.

문득 그 오십 장이 아버지가 말한 심검과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우강은 다시 책에 눈을 맞췄다.

- 그럼 심검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마음의 검이라는 뜻이다. 어떤 자는 마음이 미치는 곳에 죽음이 있다는 말로 심검의 가공함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럴까.

그것 역시 설에 불과하다.

아무리 상대를 없애겠다는 마음이 강렬하다고 해도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 심검을 성취한 무인도 어떻게 해서 심검을 성취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달음이란 말로 포장해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심검이란 무엇일까?

심검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공이란 추상적인 개념이었던 기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형태로 바꾼 어떤 것을 말한다.

따라서 어느 정도 내공을 축기한 무인은 상대의 맥문을 쥐거나 혈도를 통해 내기를 주입하여 심맥을 끊는 무공을 사용하기도 한다. 거기서 조금 더 발전하게 되면 일정 거리를 두고 단시 살기만으로 상대를 격살하게 되는데 우리는 그러한 무공을 일컬어 의형살인강이라고 부른다. 그 의형살인강은 내기에 살기를 실어 상대방의 몸속에 집어넣는 무공을 말하고, 심검은 마음에 의형살인강을 실어 보내는 무공이다.

내공이 추상적인 개념의 기를 구체적인 유형의 힘으로 바꾸는 것을 말하는 거라면, 심검은 추상적인 개념인 마음을 구체적인 힘으로 바꾸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라천력인은 어떻게 심검을 펼칠까?

사실 마라천력인은 추상저인 개념인 마음을 구체적인 힘으로 바꾸는 능력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검을 펼치는 건 불가능하다.

그 이유가 뭘까?

아니 마라천력인에게 구체화한다는 건 무엇일까?

그걸 찾아내야만 심검을 펼칠 수 있다.

책 내용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아버지는 심검에 대고 고민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 생각을 구체화한다는 건 어떤 걸 말하는 거지?"

연우강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만두는 빚는 것과 같아요."

왼편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우강은 고개를 돌려 남궁운화를 보았다.

" 읽어 봤어요?"

" 엄청난 내용이네요. 아마 심검을 저렇듯 자세하게 표현해 놓은 무인은 연 공자 아버지가 처음인 것 같아요."

" 아버지 이론이 맞다는 말인가요?"

" 심검을 성취한 사람이 아니면 이론이 맞는지 틀리는지 모를 거예요. 어쩌면 심검을 성취한 무인도 모를 수도 있고요. 하지만 분명 일리는 있어요."

" 좋아요. 그렇다 치고요. 조금 전 구체화란 말을 했을 때 만두라고 한 말은 뭐죠?"

" 만두를 빚을 때 어떤 모양으로 할 건지 생각하거든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가 모양이 결정되면 그때부터 빚기 시작하잖아요."

" 그러니까 빚어진 만두는 생각이 구체화된 형상이라 이거죠?"

" 아닌가요?"

"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남궁운화의 말이 맞다. 하지만 마라천력인에게 구체화된 실질적인 물건을 만들어내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게다가 만두를 빚는 일은 가변적이다. 즉 중간에 마음이 달라지거나, 실수를 하게 되면 다른 모양이 나올 수도 있다.

" 하지만 만두를 빚다가 생각이 바뀌면 모양이 달라질 수도 있잖아요."

" 똑같은 모양을 만들어 내고 싶으면 그림을 그리면 되잖아요."

" 그럼?"

" 그림을 보고 만들면 거의 같은 모양을 만들어 낼 수가 있어요."

" 그림을 그리되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면?"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보며 마라천력을 펼쳤다. 그러자 그녀의 동체가 둥실 떠오랄 연우강 머리 위쪽에 섰다.

" 연 공자!"

남궁운화는 깜짝 놀라 손으로 엉덩이를 가렸다. 지금껏 그녀는 알몸이었던 것이다.

" 슬쩍 스쳐보는 것만으로 머릿속에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

연우강은 남궁운화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며 물었다.

" 특징을 잡아내는 건 몰라도 완벽하게 똑같이 그려낸다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 그러니까 남궁 소저의 뒷모습에서는 엉덩이만 그릴 수 있고, 앞에서는......."

연우강은 다시 마라천력을 발휘햇다. 그러자 위쪽의 이불은 그대로 있고 몸만 뒤집어져 아래를 내려다보는 형태가 됐다.

" 예쁜 얼굴과 풍만한 가슴만 기억하면 된다는 말이네요."

" 그만해요. 연공자."

남궁운화는 필사적으로 가슴을 가리며 소리쳤다.

" 하하하! 이제야 알았습니다."

연우강은 활짝 웃으며 마라천력을 풀고 남궁운화를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 뭘 풀었다는 거죠?"

" 심뢰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겁니다."

" 정말요?"

남궁운화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뢰, 풍뢰, 화뢰, 지뢰.

지금껏 연우강이 마라천력을 바탕으로 창안한 무공이다. 그런데 이번엔 마라천력인이 펼치는 심검의 경지인 심뢰를 익혔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심뢰는 그야말로 꿈의 경지가 아니었던가.

" 심뢰의 비밀은 어뢰처럼 만두에 있었습니다."

" 만두라고요?"

" 남궁소저 덕분이라는 말입니다."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힘껏 껴안았다.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남궁운화의 단순함. 그 단순함이 바로 심뢰의 열쇠였다. 아니 무공의 열쇠였다. 남궁운화가 다른 사람에 비해 머리가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무공이 가장 빨리 성장한 이면에는 바로 그 단순함이 있었던 것이다.

" 그러니까 무인들이 심검이라고 부르는 그걸 익혔다는 말이죠?"

" 익힌 게 아니라 발만 들여놓았을 뿐이에요."

" 그게 익힌 거잖아요. 정말 잘 됐어요."

남궁운화는 자기가 심검을 성취한 것처럼 좋아했다.

" 고마워요."

연우강은 고개를 돌려 사망궤를 보았다.

' 죄송해요. 아버지.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남궁 소저가 너무 불쌍해서요. 이해하시죠?"    연우강 사망궤 안에 있는 유골함을 보고 내심 중얼거리는 그 순간 남궁운화 또한 사망궤를 바라보고 있었다.

' 죄송해요, 아버님. 전 다만 이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걱정하지 마시고 이젠 편히 쉬세요."

' 예끼 녀석아. 그래도 그건 예의가 아니야.'

문득 머릿속으로 그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 혹시 아세요. 오늘 수태를 하게 될지. 그럼 손자를 낳게 되는데 그래도 싫으세요?'

' 험! 아니다. 잘했다. 아주 잘했어.'

" 고맙습니다."

남궁운화는 사망궤를 향해 목례를 했다.

" 지금 뭐 하는 거죠?"

"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남궁운화는 배시시 웃으며 연우강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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