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장 잠입
종남산은 섬서성 남쪽에 있는 산으로, 섬서성 남부를 동서로 관통하는 진령산맥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연우강과 남궁운화가 종남산 입구의 회회촌에 도착한 것은 화산을 떠난 지 나흘 만이었다.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는데 연우강이 그림 그리는 도구를 산다면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늦어지게 된 것이다.
군무옥 일행은 이미 떠난 듯 마을에 없었다.
객잔에 들러 저녁을 먹은 두 사람은 산에서 먹을 음식을 준비하여 종남산으로 길을 잡았다.
두 사람이 종남산에 들어선 것은 어둠에 종남산을 삼킨 후였다.
" 너무 어둡지 않나요?"
남궁운화는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종남산에 들어오면 하오밀문 표식을 찾아내야 하는데 주변이 너무 어두웠다.
" 눈을 부릅뜨고 표식을 찾아내야죠. 주로 바위 위를 살피면 보일 거예요."
"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남궁운화는 연우강이 시키는 대로 바위 위를 살폈다.
" 저거 아닌가요."
어느 정도 걸었을까. 바닥을 살피며 걷던 남궁운화가 편편한 돌을 가리켰다. 그 돌 위에는 태양 모습을 형상화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마치 어린아이 낙서처럼 조잡했다.
전에 군무옥이 그려주었던 그림과 비슷했다.
" 애들 낙서 같죠?"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물었다.
" 네."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 하지만 애들이 이런 곳까지 올라와서 낙서를 할 리는 없겠죠?"
" 그것도 그렇네요."
남궁운화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깊은 산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놀러 올 만한 장소도 아니었다.
" 그래서 하오밀문 표식이라는 겁니다."
" 그렇긴 한데....."
남궁운화는 말끝을 흐렸다. 가운데 원이 있고 원 가장가리에서 방사형으로 몇 개의 직선이 그려져 있다. 저 그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 어떻게 해석하는지 궁금하다는 거죠?"
" 네."
" 간단해요. 가운데 동그라미는 태양이고, 가장자리에 방사형으로 뻗은 직선은 빛을 나타내요. 아무렇게나 그려진 것 같지만 직선 중 가장 긴 게 있을 거예요."
" 긴 직선이라면....아!"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섯 개의 선이 그려져 있었는데, 산으로 들어가는 쪽의 직선이 가장 길었다.
" 우린 저 선을 따라가면 됩니다."
연우강은 남궁운화의 손을 잡고 선을 따라 몸을 날렸다. 방향을 틀어야 할 경우를 제외하면 그림은 대략 이십 장 간격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려진 장소도 다양했다. 바위 위쪽에 있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엔 바위 측면이나 나무에 새겨진 것도 있었다.
그 표식을 따라 산을 오르기를 반 시진.
어느덧 두 사람은 이름 모를 산봉우리 정상에 발을 딛고 있었다. 두 사람 앞에는 거대한 바위가 버티고 있었다.
바위를 따라 이동하던 연우강이 중간에서 멈췄다.
그곳에도 태양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긴 직선이 가리키는 곳은 왼편이었다. 다시 왼편으로 삼 장가량 가자 바위 측면에 동굴이 나탔다. 동굴 입구에도 태양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두 사람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삼 장 정도 직선으로 이어지던 오른편으로 꺾이고 다시 이 장가량 직진하다가 왼편으로 꺾자 폭이 삼 장가량 되는 공동이 나왔다.
그곳에 먼저 갔던 군무옥 일행과 하오밀문 문주 허일구가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앉아 있었다.
" 어서 오너라."
연우강과 남궁운화가 들어가자 일행은 웃으며 맞았다. 두 사람은 일행 곁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 오랜만이네."
허일구는 연우강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 얼굴이 많이 좋아졌네?"
" 살맛나는 세상이 왔으니까."
정보에 있어서는 더 이상 하오밀문을 따를 문파가 없고, 난다 긴다 하는 자들이 전부 하올밀문에 정보를 얻으러 온다. 하오밀문이 개파하고 이렇듯 주목을 받았던 적이 있었는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고, 하오밀문의 역사를 훑어봐도 없다. 지금 하오밀문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 건 쫓아가는 것보다 배는 힘들어. 지금부터가 중요해. 정보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해."
연우강은 사망궤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 그렇게 하고 있네."
허일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궁운화를 보았다.
" 잘 지내셨어요?"
" 나야 잘 지내고 있지. 너도 좋아 보이는구나."
허일구의 얼굴엔 훈훈한 미소가 감돌았다.
남궁운화를 보면, 사랑에 목말라 하면서도 그 사랑을 잡지 못했던 젊은 시절이 떠오르곤 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본 그녀의 얼굴에서는 생기가 넘친다. 원했던 무언가를 성취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연우강일 테다.
" 저야 늘 같죠, 뭐."
연우강과 잤다는 사실을 들킨 것 같아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남궁운화는 저도 모르ㅜ게 허일구의 시선을 피했다.
' 저 아이가?'
남궁운화를 보고 있던 창노의 눈이 커졌다.
아닌게아니라 허일구의 말처럼 운화가 달라져 있었다. 어두웠던 얼굴은 활짝 핀 꽃처럼 환해졌고, 몸 주변으로 흐르는 기운에는 생동감이 넘친다.
[ 형님!]
창노는 전음으로 무원을 불렀다.
[ 왜?]
[ 운화가 달라진 것 같지 않소?]
[ 만개한 꽃처럼 예뻐졌구먼.]
[ 저 녀석이 운화를 받아준 걸까요?]
[ 저 녀석은 받아줄 수밖에 없네. ]
[ 하하하! 세상을 뒤져봐도 우리 운화만 한 처자가 없으니까 당연히 그랬겠지요.]
창노는 가슴을 활짝 폈다.
[ 운화가 예쁘다는 거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그것 때문에 받아준 건 아니라네.]
[ 무슨 소리요?]
[ 우강이 저 녀석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절대 거절 못하는 성격이거든.]
[ 운화보다 훨씬 못나고 보잘것없다고 해도 좋아한다고 하면서 쫓아오면 무조건 받아준단 말입니까?]
[ 그럴 거네.]
[ 제 녀석이 얼마나 냉정한데 그런 말을 하십니까? 저 녀석은 운화를 좋아하니까 받아들인 겁니다.]
[ 물론 운화는 그럴 거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앞으로도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날 거란 말이네.]
[ 그건 무슨 말입니까?]
[ 방금 말하지 않았는가. 우강이 저 녀석이 설사 지가 싫어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좋다고 하면 거절하지 못한다고.]
[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 업둥이의 한계네. 아니 숙명이라고 해야겠지.]
[ 숙명?]
[ 연금석과 이숙경을 친부모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지만, 업둥이란 사실도 잊지 않는다는 말이네. 가족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이면에는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더불어 업둥이를 받아준 그들에 대해 은혜를 갚는다는 측면도 있다네.]
[ 업둥이란 사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산다는 말이군요.]
[ 그렇지. 그러면서 만일 양부모가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저도 모르게 하게 되지. 그러다 보니 누군가가 다가오면 뿌리치지 못하네. 특히 그 누군가가 평범한 가정 출신이 아니거나 뭔가가 결여된 자라면 더욱 그렇지. 그런 경우에는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상대를 받아들여 버리게 되지.]
[ 싫어도 받아들인다는 겁니까?]
[ 처음엔 싫어했다가 어느 순간 그 사람은 자기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스스로를 합리화시켜 버린다네.]
[ 그런데 결여된 자라면 어떤 자를 말하는 겁니까?]
[ 녀석이 받아들인 아이들을 생각해 보게. 몽요는 가문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한 아이고, 이지약은 부모의 야망에 희생된 아이고, 수여설은 북해빙궁의 상속자임에도 불구하고 계모에게 모든 걸 빼앗긴 아이 아닌가. 그리고 운화는 가문에서 버림받은 아이였고. ]
[ 그렇군요.]
창노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한 명이나 두 명이라면 우연이라고 하겠지만 녀석과 관계를 맺고 있는 아이들 전부가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아니었다.
[ 우강이 저 녀석은 뭔가 부족함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남녀 불문하고 마음을 열어버리네. 우리도 그런 사람들이고.]
[ 그러면서도 제 스스로는 그걸 모른다는 거군요.]
[ 그렇지. 아마 저 녀석은 자기처럼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할 거네.]
[ 그렇군요.]
창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우강을 보았다. 연우강은 지도를 놓고 군무옥과 허일구와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작전을 상의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기를 얼마쯤, 회의가 끝난 듯 연우강은 몸을 돌려 무원과 창노를 보았다.
" 어떻게 하기로 했느냐?"
무원이 물었다.
" 야궐 무인들은 종남산 동쪽인 동뢰곡과 자모곡에 있고, 밀천 무인들은 서남쪽인 남뢰곡과 아미곡 주변에 숨어 있다고 하네요."
" 우리 위치는 어디냐?"
" 우리가 있는 이곳은 북쪽 오뢰봉입니다."
연우강은 종남산 지도에서 최북단에 위치한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무원은 지도에 시선을 주며 물었다.
야궐 무인을 유인해 이곳까지 왔고, 밀천 무인들 또한 좀 떨어져 있지만 종남산에 잇다. 연우강이 원하는 그림이 그려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문제다.
" 나와 창노 영감님은 야궐로 스며 들어가고, 전랑과 영감님은 밀천 무인들 속으로 스며들어가야지요."
" 환영축골공을 완벽하게 익혔는지 물었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느냐?"
검애에서 환영축골공을 익혔느냐고 물었던 연우강의 말이 떠올라 물었다.
" 네."
" 만일 혁련무극이 싸울 생각이 없다면 그땐 어떻게 할 거냐?"
" 그럴 경우에 대비해서 안으로 들어가는 거잖아요."
" 그러니까 어떻게 한다고?"
" 그건 대장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영감님은 싸움이 시작됐을 때 열심히 쳐죽이면 됩니다."
군무옥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 우린 뭐 하죠?"
남궁운화가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아마 거점은 이곳 말고도 두 곳은 더 있을 겁니다."
연우강은 허일구를 보았다.
" 동쪽 마봉 정상과 서쪽의 장안봉 정상에 이런 거점이 마련돼 있네. 특이한 사항이 발견되면 그곳으로 연락을 해 둘 거네. 적진으로 들어가기 전에 위치를 확인하고 가게."
" 들었죠?"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보았다.
"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각 거점으로 수합된 정보를 정리해서 연공자나 군 공자에게 알려주면 되는 거네요?"
" 놈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굳이 오래 있을 필요 없고, 표식을 그린 그림 아래쪽에 첩지만 남겨두면 됩니다. 그리고 이것도 지켜야 하고요."
연우강은 사망철립을 벗어 사망궤 안쪽에 집어넣고, 묵사는 옆으로 놓았다.
연우강을 따라 무원과 창노도 그들의 검을 풀어 묵사 옆에 놓았다.
" 알았어요. 사망궤는 제가 매고 다닐게요."
남궁운화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자, 이제 시작합니다."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전랑 넌 무원 영감님과 함께 밀천 진영으로 가."
" 알았소."
" 그럼 싸울 때 봅시다."
" 신호는?"
" 전에 하던 대로 합시다."
" 그렇게 하자. 수고해. 영감님도 수고하시고요."
" 너도 수고해라."
먼저 군무옥과 무원이 밖으로 나갔다.
" 전 마봉이 보이는 곳에 있을 게요."
연우강이 바라보자 남궁운화가 먼저 말했다.
" 알았어요. 그럼 그쪽으로 올라가도록 할게요. 그럼 다음에 봐요."
" 조심하세요."
" 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 할아버지도요."
" 그래, 너도 조심해라."
인사를 마친 연우강과 창노는 동굴을 나왔다. 그러고는 동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좋냐?"
허일구는 남궁운화를 보며 물었다.
" 뭐가요?"
" 우강이 그 녀석이 좋냐고?"
" 피이! 별걸 다 물어요."
남궁운화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 싫단 말은 안하는구나. 아무튼 우리도 가자."
허일구는 빙긋 웃으며 사망궤 앞으로 걸어갔다.
" 이게 뭐라고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지....."
아무 생각 없이 사망궤의 끈을 잡고 들어 올리려던 허일구는 의아한 얼굴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사망궤가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 만년오금철이라서 그래요."
" 이, 이게 만년오금철이라고?"
허일구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 연 공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암기가 전부 만년오금철로 돼 있어요."
" 정말?"
" 네, 제가 멜게요."
남궁운화는 사망궤 앞으로 다가섰다. " 그런 소리 말거라. 이 녀석아. 내가 아무리 늙었다고 해도 네게 맡길 것 같으냐?"
허일구는 손을 저었다.
" 서방님 물건은 부인이 챙기는 게 당연한 거예요. 할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보다 제가 더 강해요."
" 이건 강하고 강하지 않고 문제가 아냐. 넌 여자고, 우강이 그 녀석 부인이란 사실이 중요한 거야."
" 그게 왜 중요한데요?"
" 남자가 둘이나 있으면서 이걸 네게 맡겼다가는 우강이 녀석에게 내가 맞아죽는다는 거지."
허일구는 싱긋 웃으며 사망궤를 들쳐 메고는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궁운화는 묵사와 검을 주어들고 따랐다.
" 어디로 갈 거죠?"
" 우선은 마봉 아래쪽에 널 안내한 다음 한 바퀴 둘러볼 참이다."
" 하오밀문 문도는 얼마나 들어와 있어요?"
" 종남산을 포위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 그렇게 많이 온 거예요?"
" 우리 하오밀문은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는 문파야. 녀석아."
" 위험하지 않겠어요?"
"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안전한 길로만 다니니까."
" 그렇다고 해도 종남산에 들어와 있는 무인이 삼천 명이 넘는데....."
남궁운화는 공연히 걱정스러웠다.
" 최고의 은신술을 가진 문도들만 산을 오르내리고 나머지는 전부 산기슭 주변에 있다. 그리고 연락은 대부분은 설산신조와 비응마조를 통해서 하고 있다."
" 철응방의 생존자들이 합류한 거예요?"
철응방은 전관수의 가문으로 하오밀문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율령궁의 잔살단에 의해 멸문한 문파였다.
" 전관수 그 친구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우리와 함께 있기로 했다."
" 큰 우군을 얻은 거네요?"
" 그런 셈이지. 일단 산 아래로 내려갔다가 서쪽으로 이동한 다음 마봉으로 올라가야 한다."
" 그렇게 해요, 가요. 향노 할아버지."
" 그렇게 하자꾸나."
동굴을 나선 세 사람은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
찻잔을 들어 올리는 혁련무극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물려 있었다. 야궐 무인을 이끌고 이곳까지 온 이유는 순전히 연우강 때문이었다. 그런데 종남산에는 연우강뿐만 아니라 밀천의 정예도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 재미있군."
그는 찻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밀천 무인들이 종남산에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담대만승이었다.
율령궁이 멸문하여 과거에 비해 정보력이 현격하게 떨어졌다고 해도 밀천 무인들의 움직임을 대야벌에서 감지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는 밀천 무인이 출병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조차 보내오지 않았다.
그 말은 곧 야궐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토사구팽을 남발하면 오히려 역공을 당한다는 걸 알아야 한다, 담대만승."
그는 남은 차를 훌쩍 들이켰다.
그때 천막 문이 열리고 유악재, 노욱, 나아추, 복양후가 안으로 들어와 혁련무극의 앞쪽으로 앉았다.
" 밀천의 상황은 어떤가?"
혁련무극은 먼저 복양후를 보았다. 밀천 무인의 정찰을 맡은 사람은 그였기 때문이다.
" 우리 전력의 두 배가량이고, 그들을 이끌고 있는 자는 천붕대야 나적립니다."
복양후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 날 잡으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군."
혁련무극은 시선을 돌려 유악재를 보았다.
" 대라검문과 비도사문에 사람을 보내야겠습니다."
" 그들이 빠져나오면 지부가 위험해지네."
" 어차피 희생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의 희생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이곳에서 나적리를 비롯해 밀천을 부수면 무림의 각 세력은 비슷해집니다."
" 비슷해진다는 건 무슨 뜻이지?"
" 담대만승 또한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유악재는 벌주라는 호칭을 빼고 담대만승이라고 하였다.
" 담대만승이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라는 말은?"
" 대야벌에 남아 있는 문파 중 한 곳을 시켜 규동의 밀천 총단을 공격할 겁니다. 두 세력이 양패구상한다고 했을 때 강호 무림은 담대만승의 대야벌, 야궐, 밀천, 그리고 대야벌을 떠났던 패천림이 남게 됩니다."
" 그럼 이곳에서 나적리는 무조건 없애야 한다는 말이군."
" 그렇습니다."
" 좋네. 대라검문과 비도사문에 연락해서 이곳으로 오라고 하게."
" 알겠습니다. 궐주님."
유악재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보급은 어떻게 됐소?"
혁련무극은 시선을 돌려 노욱을 보았다.
" 우선 오 일 치를 수령했고, 오 일 후에 추가로 가져오기로 했소이다."
" 아직 우리 운이 다하지 않은 모양이군."
혁련무극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연우강을 추격하면서 가장 우려했던 부분이 바로 보급이었다.
연금석이 살아났다는 소문이 돌면 과거 금릉 연씨 세가에 예속돼 있던 상단들이 다시 움직일 게 분명하다.
그런 그들에게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다.
자칫 잘못하면 보급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며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 일 치라고 하지만 식량을 구했다고 하니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 이치상이란 자가 상단주로 있는 치상 상단이외다. 물건을 가져온 자들은 하북팽가에서 운영하는 대운표국이었고, 그런데....."
" 왜 그러시오?"
" 물건 값을 세 배로 달라고 하였소."
" 세 배란 말이오?"
" 전쟁터로 들어오는 물건은 최소 세 배는 받아야 한다고 하더이다."
" 끄응! 장사꾼 놈들!"
혁련무극은 얼굴을 찌푸렸다.
상인의 말도 일리는 있다. 아무리 장사도 좋지만 자칫 잘못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곳이 전쟁터다. 그렇다고 해도 세 배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번엔 세 배지만 다음에 올 때는 더 비싸질지도 모른다고 하였소."
" 빌어먹을!"
" 어떻게 할 거요?"
" 이 전투가 얼마나 이어질지 모르는데, 달라는 대로 줘야지 별수 없잖소."
" 알았소이다. 궐주."
" 그리고....."
혁련무극은 맨 끝에 앉아 있는 나아추를 보았다.
" 종남산을 빠져나간 것 같지는 않은데 어디 있는지는......"
나아추는 고개를 저었다.
연우강에 대한 말이다. 사실 밀천 무인이 종남산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자들은 연우강 일행을 쫓던 흑마괴문 무인들이었다.
" 기가 막힐 노릇이군."
혁련무극은 어이없는 얼굴로 유악재를 보았다.
이번 일은 발단은 연우강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담대만승이 야장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엄밀하게 따지면 연우강은 기습을 당한 상황이고 도망자 입장이다. 그런데 전쟁은 강호 전역으로 확대될 조짐이 일고 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왜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상황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놈입니다."
" 가장 무서운 적이라는 말이군."
" 그렇습니다."
유악재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놈을 만나면 죽이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지금은 밀천에 집중하도록 하게."
" 알겠습니다. 궐주님."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연락을 취하러 갔던 유악재가 다시 들어왔다. 혁련무극은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으로 가서는 찻잔에 물을 따랐다. 그러고는 손바닥으로 감싸고 삼매진화를 펼쳤다. 곧 찻잔에서 뿌연 수증기가 솟아올랐다.
" 밀천에서 공격해 오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그는 자리로 돌아가며 물었다.
밀천 또한 이곳에 있는 야궐의 전력을 파악했을 테고 이편이 두 배 이상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곧바로 공격해 왔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제가 생각하는 건 두 가집니다. 첫째는 나적리가 우리 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거고, 둘째는 기다리는 겁니다."
" 뭘 기다린단 말인가?"
" 밀천이 대야벌 각 문파 지부를 공격하는 시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 정신없이 몰아치겠다는 거군."
"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 그럼 우린 시간을 번 셈이군."
" 그런 셈입니다."
유악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말은 거의 맞아떨어졌다.
***********
" 연락이 끊겼단 말인가?"
원세군을 바라보는 나적리의 얼굴이 편치 않았다.
그가 이렇듯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적에 대한 정보 때문이다. 아미곡에 진영을 구축하고 야궐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지만 적에 대해 얻어낸 거라고는 천여 명이란 사실 한가지뿐이었다.
적에 대한 정보를 거의 얻지 못한 이유가 바로 전서구 때문이다. 지금껏 밀천 총단과의 연락은 전서구가 담당했다. 전서구가 도착하는 곳은 섬서성에 구축한 밀천 지부였다. 개파대전 이후에 구축하여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전서구 훈련은 꾸준히 시켰다.
그런데 대사를 앞두고 전서구가 말썽을 부린 것이다.
" 그런 모양입니다."
원세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야궐의 동태를 파악하는 건?"
" 종남산에 들어온 자들 외에는 파악이 불가능합니다."
" 천여 명이라고 했는가?"
" 그렇습니다. 태상천주님."
" 자네 생각은 어떤가?"
" 제게 일천만 주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혁련무극의 머리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 만일 그들을 공격하고 있는데 야궐의 나머지가 우리 뒤를 치면 그땐 어떻게 할 건가?"
나적리가 망설이는 이유였다.
대야벌을 나선 야궐 무인의 수는 총 삼천여 명이었다. 그런데 종남산에 도착한 무인은 천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천여 명이 속임수이고 나머지 이천여 명이 주변 어딘가에 은신해 있다면 아군은 전멸하고 만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지 못한 상황에서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 그럼 계속 이렇게 대치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 그럴 순 없지."
" 하면?"
" 이천 명이나 되는 자들이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다면 발각될 수밖에 없네. 며칠만 기다리면 어떤 결과가 나올 거네."
" 답답합니다. 태상천주님!"
" 기다리게, 가주. 초조한 건 우리만이 아닐 거네."
나적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초조한 건 오히려 그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대야벌 최강의 무인은 담대만승이 아니라 혁련무극이라고 하였다. 그런 자가 이끄는 자들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 하지만....... 응?"
하늘을 올려다보던 나적리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하늘에서 배회하고 있는 커다란 새를 본 탓이었다.
" 저건?"
나적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멀리 떨어져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매라고 하기엔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적리는 원세군을 보았다.
" 혹시 새에 대해 아는가?"
" 전서구 말고는 거의 아는 게 없습니다."
" 새에 대해 아는 자를 찾아보게."
" 왜 그러십니까?"
" 저기.."
나적리는 조금 전 새가 있던 허공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가 보았던 새는 이미 작은 점으로 변해 있었다.
" 뭘 보셨는데 그러십니까?"
" 큰 새를 본 것 같은데...... 아무튼 새에 대해 잘 아는 자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게."
" 알겠습니다. 태상천주님."
원세군은 고개를 숙이고는 그의 처소로 향했다.
" 비조 때문에 철응방이 멸문했다고 들었는데....."
문득 손자인 천후로부터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율령궁의 멸망 원인은 전서구를 잃은 것이라고 하면서, 율령궁의 전서구를 공격하여 정보를 차단한 새가 바로 철응방이란 삼류 문파에서 기르던 신조라고 했었다.
" 설산신조와 비응마조라고 했던 것 같은데...... 끄응!"
그 말을 들을 때 설산신조와 비응마조에 대해 좀더 알아두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적리는 고래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돌렸다.
*********
흑마괴문 문도들은 대부분 괴팍한 성정을 가졌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있는 걸 즐기고, 시끄럽게 떠드는 일도 없다. 필요한 말 외에는 거의 하지 않는다. 살인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철삭을 창처럼 꼿꼿이 세워 적의 심장을 향해 찔러 넣으면 간단하게 끝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삭으로 상대의 목을 감아 천천히 당기면서 질식해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더 즐긴다.
철삭이라는 괴상한 무기를 다뤄서 그런 성정으로 변했는지, 아니면 그러한 성정을 타고 난 철삭만 허락된 흑마괴문을 선택했는지 모르지만 흑마괴문 문도들의 성정이 잔인하고 괴팍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철삭을 온몸에 두른 자가 천천히 걷고 있었다.
가다 멈추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걸어가고, 또다시 멈추는 동작을 반복하는 걸 보면 뭔가 찾는 듯한데 사내의 얼굴엔 어떤 표정도 나타나 있지 않다.
냉막한 얼굴을 한 이 사람은 흑마괴문 오 조 소속인 천인삭 유패였다.
유패가 이렇듯 진영에서 멀리 나온 이유는 유일한 친구인 관천행 때문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볼일을 본다고 나간 관천행이 한 시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은 것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기루에서 계집질을 하고 있겠거니 했겠지만 지금 있는 이곳은 종남산. 아무리 계집이 생각난다고 해도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 느꼈던 서늘한 기운.
마치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무시했다. 흑마괴문에서는 누군가를 노려보는 건 일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관천행이 돌아오지 않자 자꾸만 그 느낌이 마음에 걸렸다.
부스럭!
삼 장 떨어진 곳에서 낙엽 밟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자 유패는 우뚝 멈췄다.
" 누구냐?"
유패는 낮게 소리치며 전방을 쏘아보았다.
[ 이름 유패. 나이는 사십 오 세. 고향은 항주. 기녀의 몸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름. 열 살까지 기루에서 하인으로 살다가 그곳을 찾은 흑마괴문 수뇌를 따라 관천행과 함께 대야벌로 들어왔어, 맞아?]
느닷없이 귓전으로 전음이 들려왔다.
' 젊은 놈.'
" 맞다."
흠칫 놀랐던 것도 잠시 유패는 철삭에 내기를 주입했다.
[ 인시에 기상해, 아침을 먹고 볼일을 보고, 점심때까지는 무감삭이라 부르는 철삭을 정비하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저녁때까지 수련을 한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운기행공을 하고, 철삭에 기름칠을 한 다음 해시 말에 취침한다. 빠진 게 있으면 말해 봐.]
" 관천행은 술을 즐기지만 난 술은 입에 대지 않는다."
유패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내공을 쥐어짰다.
놈이 말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관천행이 유일했다. 그런데 어둠 속 사내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왔다. 그건 곧 관천행이 당했다는 의미였다.
모르겠다.’
' 모습을 드러내라, 놈!'
유패는 내심 중얼거렸다.
관천행을 제압하여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 낼 정도면 보통 강자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본인의 실력에 자신하는 자는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놈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철삭은 공간을 단축하게 될 것이다.
[ 내가 알아야 할 건 그것밖에 없어?]
또다시 전음이 들려왔다.
" 그런 것들을 안다고 해서 흑마괴문에 잠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 그건 아냐. 문도들 간에 술을 마시는 경우도 없지. 알은체도 하지 않지. 꼭 필요한 말 아니면 하질 않지. 내 생각에는 낯선 사람이 생활하는 덴 흑마괴문만큼 좋은 곳은 없는 것 같아. 역시 난 운을 타고 난 것 같아.]
" 하지만 네가 이곳에서 죽으면, 지금껏 했던 조사는 물거품으로 변하겠지."
[ 그럴까?]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검은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연우강이었다.
" 타앗!"
유패는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사정없이 돌았다. 그가 회전하는 순간, 몸에 감겨 있던 철삭이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갔다.
" 그 정도론........"
쇄액!
연우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리춤에서 푸른 광채가 번쩍 빛났다.
" 컥!"
그리고 유패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는 멍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목 앞으로 거무튀튀한 줄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 연우강."
유패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 또 내가 알아야 할 게 있어?"
연우강은 유패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그가 유패 앞으로 다가갈수록 사망혈삭의 길이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 관천행은?"
" 먼저 갔지 뭐. 아무튼 네 얼굴 잘 쓸게."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환영축골공을 펼쳤다. 얼굴이 밀가루반죽처럼 이지러지는 듯하더니 곧 냉막한 인상의 중년인의 얼굴로 변했다. 그는 바로 앞에 있는 유패였다.
" 그리고 옷도 빌려 입어야 하는데 괜찮지?"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뇌섬을 거둬들였다.
" 커억!"
유패의 입에서 재차 비명이 터져 나왔다. 뇌섬이 빠져나온 목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하지만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뇌섬에 화뢰의 기운을 심었기 때문이었다. ㅣ
" 넌...."
" 그랬잖아. 난 운 좋은 업둥이라고."
연우강은 쓰러지는 유패를 마라천력으로 잡아서는 옷을 벗겼다. 그러고는 그의 시체를 들고 방금 나왔던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있고 구둥이 옆에는 창노가 서 있었다. 창노 역시 관천행으로 변해 있었다.
유패의 시체를 구덩이 안으로 던져 넣은 그는 마라천력을 이용하여 흙을 덮으며 사망묵의 위로 유패의 옷을 입었다.
" 어때요?"
유패의 옷을 걸친 그는 양손을 들어올리며 창노를 보았다.
"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겠구나."
" 영감님도 멋집니다."
흙을 다 덮은 연우강은 이번엔 주변의 낙엽을 긁어모았다. 그러고는 방금 덮은 흙 위로 올려 마무리 작업을 했다.
" 아무튼."
마라천력.
대하면 대할수록 가공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손으로는 옷을 걸치고, 입으로는 말을 하고, 그리고 머리로는 무덤을 만든다. 게다가 무덤 또한 완벽하다. 아니 방금 흙을 덮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원래 상태로 변해 있다. 손으로 했더라면 결코 저런 모습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 넣으면 그 그림은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거든요."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철삭으로 시선을 주었다.
휙! 소리와 함께 날아온 철삭은 허리춤에서부터 뱀처럼 감아돌더니 가슴 앞에 있는 고리에 걸렸다.
" 가실까요?"
연우강은 가슴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 형님은 성공했는지 모르겠구나."
" 전랑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 돼?"
갑작스런 반말에 창노는 고개를 홱 돌려 연우강을 보았다.
" 지금 우린 남궁 소저의 할아버지인 창노와 금릉 연씨 세가 장자인 연우강이 아니고 관천행과 유패야. 기분 나쁘더라도 참아."
" 야, 자식아 그래도 그렇지! 미리 양해를 구하면 좋잖아."
" 양해는 무슨. 못 할 것 같으면 마봉으로 돌아가. 가서 남궁소저가 왜 일찍 왔냐고 물으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반말을 찍찍 해대는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왔다고 해. 그러면 남궁 소저는 그 위험한 곳에 연공자를 혼자 두고 왔다면서 섭섭해할 거야. 아니구나. 워낙 착하니까 그랬군요.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거야. 그런 다음 한쪽 구석에 가서 울겠지. 전엔 자기 명예를 위해 가족을 버리더니 이번엔, 그까짓 반말 때문에 손녀가 좋아하는 사내를 버리고 왔다고 생각하겠지. 물론 대놓고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거야. 워낙 착하니까."
" 됐다. 됐어, 자식아. 이 빌어먹을 자식아. 그래 해라, 해."
창노는 씩씩대며 걸었다.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녀석의 말을 듣고 있자니 정말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오랜만에 제대로 된 얼굴도 찾고 좋은데 뭘 그러십니까?"
다시 말을 올리며 연우강은 창노를 따랐다.
" 뒈진 놈 얼굴을 하고 있으면 재수 없어, 인마."
기분이 누그러진 듯 창노는 가볍게 쏘아붙였다.
" 그래도 전 얼굴보다 낫습니다. 그런데 얼굴을 고치려면 풍천영수, 만년지극화령실이 있어야 하는 겁니까?"
" 왜, 구해주려고?"
" 어디에 있는지 그것만 알면 구해오는 거야 어렵겠습니까."
" 황실의 구룡보고에 가면 영약이 넘쳐난다고 하더라. 됐냐?"
" 그곳에 가면 정말로 있어요?"
" 됐어. 인마. 뭐 잘한 게 있다고 얼굴을 고치냐. 지금처럼 살다 죽게 내버려둬."
" 하긴 구룡보고까지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겠네요. 아마 도독동지인 양성일 장군도 어려울 것 같네요."
" 콱 그냥, 저놈의 주둥일."
창노는 연우강을 노려보았다.
"지금부터 말조심해야 합니다."
멀리 불빛이 보이자 연우강은 나직이 말했다.
" 그래야겠지. 그런데 적진에 있는 무옥이 녀석을 알아볼 방법은 있느냐?"
" 신호를 한다고 했잖아요."
" 어떻게 신호를 보낸다는 거냐?"
군무옥이나 무원 형님 또한 얼굴을 바꾼 상태일 터인데 어떻게 알아본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적군 속에 잠입해 들어갔을 때 사용하는 우리만의 방법이 있어요."
" 그게 뭔데?"
" 주먹 감자요."
" 주먹 감자?"
" 잔뜩 긴장한 상태로 노려보고 있는데, 느닷없이 주먹 감자를 한 방 먹으면 대가리가 확 돌아버리거든요."
" ......!"
창노는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정말로 빡 돌아버린다니까요."
" 그러니까 검강을 쑥쑥 뽑아내는 무인들 앞에서 주먹 감자를 먹인다고?"
" 군인들에게 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클 거예요. 그건 내 재산을 전부 걸고 내기해도 좋아요."
연우강은 싱긋 웃었다. < 제 16권 끝 >
황금 백수 17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