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범하면 죽는다
북쪽, 동쪽, 남쪽 모두 깎아지른 듯한 수직 절벽으로 돼 있는 동뢰곡은 천혜의 요새였다. 절벽의 높이는 어림잡아도 백장은 돼 보였다.
절벽 아래쪽 공터는 폭이 이백 장에 달했고, 서쪽 입구에서 동쪽의 절벽이 있는 곳까지는 삼백 장이나 됐다.
높은 절벽 때문에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아서인 듯 계곡 안 공터에는 음지에서 자라는 잡풀로 들어차 있다.
공터 중앙을 관통하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수십 개의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오십여 개의 천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한 이곳은 야궐의 흑마괴문 진영이었다.
흑마괴문으로 잠입한 연우강과 창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분위기 파악이었다.
문도의 수는 전부 삼백구십칠 명이었다.
다섯 개의 천막은 수뇌들이 사용하고 나머지 마흔 다섯 개는 부하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연우강과 창노가 들어간 천막은 남쪽 절벽 아래쪽에 위치해 있었다.
천막을 함께 쓰는 자는 연우강과 창노를 포함하여 여덟 명이었다. 내부 분위기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 사흘 동안 파악했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대원들은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일절 하질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철삭을 점검한다거나, 운기행공과 연공으로 보내곤 했다.
그러한 분위기 때문에 크게 드러나는 게 없어 여간해서는 들키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 젠장!’
연우강은 주변 천막을 흘끔거리며 내심 투덜댔다.
‘ 조장이라니.’
연우강이 투덜대는 이유였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놀랍게도 유패는 천막의 조장이었던 것이다. 조장이라고 해서 특별한 임무가 있는 것은 아니고,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전달하는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나아추로부터 집합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지금 연우강은 잠능패혈대법을 펼쳐 내공을 유패와 비슷하게 사십 년 정도로 맞춘 상태였다.
중앙 천막에 당도한 연우강은 천리지청술을 펼쳐 안쪽 동향을 살폈다. 여러 명의 기척이 감지됐다.
연우강은 말없이 천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는 나아추를 비롯한 여덟 명이 탁자를 가운데 두고 앉아 있었다. 나아추는 상석이라고 할 수 있는 안쪽에 앉아 이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제기랄!’
연우강은 내심 욕설을 내뱉었다.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하는 중이라면 대충 끼어앉으면 되지만 지금처럼 빤히 쳐다보면 인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창노와 함께 유패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연습을 많이 하긴 했지만 잘될는지 걱정스러웠다.
그렇다고 말없이 자리로 가 앉는 건 더 이상하다.
“ 부르셨습니까?”
연우강은 목소리를 최대한 깔고 인사를 했다.
“ 몸이 좋지 않은 게냐?”
나아추는 살피듯 연우강을 보았다.
그가 이렇듯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연우강 일행이 야궐 안으로 잠입해 들어왔을지도 모르니까 부하들을 꼼꼼히 살피라는 명령이 하달됐기 때문이다.
나아추가 흑마괴문 문주를 맡은 건 벌써 십 년째다.
부하들에 대해 속속들이 꿰고 있지는 못하지만 대충은 알고 있다. 게다가 방금 들어온 유패는 서너 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온 유패를 보자 순간적으로 전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 이 자식 봐라?’
연우강은 찔끔했다.
문주 자리를 거저 얻은 건 아닌 듯 나아추는 대번에 유패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유패의 과거에 대해 알아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무래도 항주 기방으로 돌아갈 때가 된 모양입니다. 문주님.”
지나가는 투로 유패의 고향을 들먹였다.
“ 혼자 갈 참이냐?”
나아추는 여전히 의혹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 역시.’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혼자 갈 참이냐는 말은 관천행과의 관계를 알아보려는 우회적인 질문이었던 것이다.
“ 함께 왔는데 함께 가야지요.”
연우강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 그렇군. 몸 상태가 어떻기에 은퇴를 운운하는 거냐?”
의혹 어린 얼굴로 연우강을 쳐다보던 나아추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물렸다.
연우강의 짐작처럼 나아추는 전과 달라진 기운 때문에 연우강을 시험해 본 것이었다.
“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하기 힘듭니다.”
“ 말해 보거라.”
“ 머릿속에서 무공 구결이 떠돌아다니는 듯하고, 가끔 환청이 들리고 환영이 보이는 게 영... 아무래도 이놈이 잘못돼 가고 있는 모양입니다.”
연우강은 제 머리를 툭 쳤다.
“ 정말 그런 증상이 일어나고 있느냐?”
나아추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 아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 축하한다. 천인삭!”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 그건 기가 허해서 그런 게 아니고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한 성장통의 일종이다.”
“ 서, 성장통이란 말입니까?”
연우강은 놀란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 천인삭 네 무공이 오십 년가량이지.”
‘ 조심해야 할 놈이네.’
연우강은 내심 긴장했다.
나아추는 의심을 거둔 것처럼 하다가 또 다시 확인을 하고 있다.
유패의 내공은 사십 년가량이다. 그런데 나아추는 오십 년이지 않느냐고 떠본다.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는 의미였다.
“ 사십 년 정도입니다.”
“ 그럼 이번 성장통이 끝나면 천인삭 넌 최소한 일갑자가 넘는 공력을 가지게 되겠구나. 그런데 관천행과 같은 상황이더냐?”
조금 전 관천행과 함께 돌아갈 거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 그렇습니다.”
“ 하하하! 그럼 난 일류 고수 두 명을 더 얻은 셈이구나. 아무튼 만인삭에게도 축한다고 전해라.”
나아추는 크게 웃었다.
“ 감사합니다. 문주님.”
연우강은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 강한 부하를 얻은 내가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지.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널 의심했지 뭐냐?”
“ 의심이라면 무슨...”
“ 연우강 놈이 우리 야궐에 잠입해 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말이다.”
나아추는 웃으면서도 연우강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 저도 동료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구나.”
그때 문이 열리고 두 명이 더 들어왔다.
두 사람이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나아추는 소집한 이유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 제군들을 모이라고 한 것은 새로운 작전이 하달됐기 때문이다.”
“ .....”
그들은 말없이 나아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제군들은 부문주를 따라 장안봉으로 가야 한다.”
나아추는 옆에 앉아 있는 비천삭 탁일강을 가리켰다.
이미 이야기가 된 듯 탁일강은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그리곤 일행에게 작전을 설명했다.
“ 지금 적이 주둔해 있는 곳은 여기 남뢰곡과, 아미곡이다. 우린 아미곡에서 이십 리 떨어진 장안봉 아래쪽에 은신해 교란 작전을 펼치게 될 거다.”
“ 교란 작전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합니까?”
눈이 작고 입술이 얇은 사내가 물었다. 그는 흑마괴문 조장 중의 한 명이 마혈삭 조철남이었다.
“ 대라검문과 비도사문 문도들이 이곳으로 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뜻이다.”
“ 제삼의 세력이 은신해 있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말이군요.”
“ 그렇다. 조 조장. 우리 손에 야궐의 운명이 달렸다고 보면 된다.”
“ 그럼 철삭은 두고 가야겠군요.”
“ 검을 따로 준비해 두었다.”
“ 언제 출발합니까?”
“ 지금 당장 출발한다. 각 조별로 이동하되 최대한 은밀하게 가야 한다. 만날 장소는...”
탁일강은 지도를 짚어가며 장안봉까지 가는 길은 물론이고 모일 장소까지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로부터 한 식경 후 연우강은 여덟 자루의 검을 들고 천막으로 돌아왔다.
“ 그건 뭐냐?”
키 작은 사내가 연우강이 가져온 검을 보며 물었다.
연우강은 시선을 들어 사내를 보았다.
오 척 단구에 역삼각형의 얼굴을 가진 이자는 추삭 모곤필이란 자다. 이제 서른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열 살이나 많은 유패에게 반말을 해대고 있었다.
“ 검!”
연우강은 검을 내려놓았다.
“ 그걸 누가 몰라? 왜 검을 가져왔는지 그걸 묻는 거잖아.”
모곤필은 연우강을 빤히 보았다. 어떻게 보면 깔보는 듯한 눈빛이고 또 어떻게 보면 도전적인 눈빛이었다.
“ 철삭은 풀어놓고 검을 차고 간다.”
연우강은 모곤필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는 말이 맞았다.
동료임에도 불구하고 친하게 지내지도 않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흑마괴문 문도들에게도 야망이 있고, 출세를 위해 은연중에 서로를 견제하곤 했다. 방금 반말을 찍찍해 댔던 모곤필도 출세를 하고 싶어하는 놈들 중 한 명이다. 녀석은 이번 전쟁을 야망을 펼칠 기회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 모곤필, 넌 가서 식량을 준비해 와라.”
연우강은 뒤따라 나온 모곤필을 보며 말했다.
“ 왜 내가 가야 하지?”
모곤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가지 않으면 너 혼자 천막을 지키고 있어야 하니까.”
“ 날 안 데리고 가겠다고?”
“ 대원을 데리고 가는 건 내 마음이거든.”
연우강은 싱긋 웃었다.
“ 넌 우리 천막 심부름꾼에 불과할 뿐이다. 내가 네 명령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구나.”
모곤필은 연우강을 쏘아보았다.
“ 잔소리 말고 다녀와.”
연우강은 명령조로 말하고는 계곡 입구로 걸어갔다.
“ 유패!”
모곤필은 연우강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연우강은 못 들은 척 일행과 함께 계곡으로 향했다.
“ 개자식!”
모곤필은 욕설을 뱉어내며 식량을 수령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 당장은 녀석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식량을 넣어두는 천막 앞에 당도했다.
“ 어?”
모곤필은 고개를 갸웃했다.
천막 앞에 문주인 나아추가 서 있는 것이었다.
“ 문주님을 뵙습니다.”
모곤필은 고개를 숙였다.
“ 오랜만이구나. 잘 지내고 있느냐?”
나아추는 인사를 받으며 물었다.
나아추가 평 문도인 모곤필을 잘 알고 있는 이유는 모곤필이 비도사문의 문주 환사잔영비 추도익의 외조카이기 때문이었다.
“ 잘 지내고 있습니다.”
“ 네가 유패와 함께 지낸 게 보름이더냐?”
“ 그렇습니다.”
“ 어떻더냐?”
“ 무슨 말씀이신지...”
모곤필은 영문을 모를 얼굴로 나아추를 보았다. 질문의 요지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유패와 같이 생활한 건 이번이 처음이더냐?”
“ 네.”
“ 첫날 인사를 했겠구나.”
“ 마이 없고 과묵한 친구였습니다.”
“ 지금은?”
“ 지금은.....”
모곤필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 달라졌다는 말이구나.”
“ 그렇습니다. 문주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모곤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곤필이 유패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알고 있는 건 조장 자리 때문이었다. 자신이 아닌 유패에게 조장 자리가 돌아가자 자존심이 상해 유패를 자세히 살폈던 것이다.
“ 관천행은 어떻더냐?”
“ 그도 마찬가집니다.”
[ 네게 임무를 주마.]
나아추의 말이 전음으로 바뀌었다.
[ 말씀하십시오. 문주님.]
모곤필 역시 전음으로 대답했다.
[ 지금부터 넌 유패와 관천행을 은밀하게 살피도록 해라.]
[ 알겠습니다. 문주님.]
모곤필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맺혔다. 관찰하라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전음으로 지시를 내린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 된다.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 식량을 챙겨 따라가도록 해라.”
나아추는 걸음을 옮겼다.
식량을 쌓아놓은 천막을 떠난 나아추는 곧바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한 식경 후 그가 내려선 곳은 자모곡의 혁련무극 처소였다.
혁련무극과 유악재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 무슨 일인가?”
혁련무극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아추를 보았다.
“ 이상한 일이 있어서 자문을 구하려고 왔습니다.
“ 이상한 일?”
“ 그러니까.....”
나아추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다.
“ 그러니까 유패라는 자의 분위기가 느닷없이 바뀌었다는 말인가?”
“ 그렇습니다. 궐주님. 과거엔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듯한 분위기였는데....”
“ 지금은 태양 아래 있는 것과 같단 말이군.”
혁련무극은 고개를 돌려 유악재를 보았다.
“ 식량을 타는 곳에서 모곤필이란 녀석을 만나봤는데 그녀석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이었소이다. 군사.”
“ 모곤필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이름이었다.
“ 추 문주의 외조카이외다.”
“ 아!”
유악재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추도익이 외조카라며 데려와 소개시켜 준 기억이 떠올랐다.
“ 유패가 모곤필에게 식량을 타 오라고 한 모양이외다.”
“ 식량을 타 오라고 했단 말이오?”
“ 그렇소이다. 군사.”
“ 모곤필의 성격은 어떻소?”
“ 동료들은 안중에 두지 않고 반말ㅇ르 해대면서도, 상관은 깍듯하게 모시는 전형적인 아첨꾼이외다.”
“ 그런 녀석이라면 신중한 성격은 아니겠군.”
혁련무극이 끼어들었다.
“ 그렇습니다. 궐주님. 조금만 신중한 성격이었다면 자문을 구할 필요도 없이 유패와 관천행이 연우강 일행이라고 확신했을 겁니다.”
나아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 연우강 일행 맞습니다.”
유악재가 단언하듯 말했다.
“ 어떤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가?”
“ 모곤필의 신분 때문입니다.”
“ 신분?”
“ 모곤필이 추 문주의 외조카라는 사실을 흑마괴문 문도들은 대부분 알고 있을 겁니다.”
“ 그러니까 자네 말은 모곤필의 신분을 아는 자라면 식량을 타오라는 것 같은 잔심부름을 보내지 못한다는 말인가?”
“ 아무리 지위가 낮다고 해도 친척 중의 한 명이 수뇌부에 있다는 건 커다란 힘이 되니까요.”
“ 그런 유패로 변장하고 있는 그놈은 연우강이겠군.”
혁련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가 연우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모곤필에게 심부름을 보낸 걸로 인해 유패가 연우강 일행 중 한 명일 거라고 확신은 했지만 정확히 누군지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혁련무극은 연우강이라고 단정지은 것이다.
“ 원래 지휘관을 했던 자들은 누군가에게 반말을 듣는 걸 싫어 한다네.”
“ 모곤필의 반말이 듣기 싫어서 보복하는 심정으로 심부름을 보냈다는 말이군요.”
“ 꼭 보복하는 심정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분 나쁜 녀석에게 잡일을 맡겨버리는 거라네.”
“ 그렇군요.”
유악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 응?’
혁련무극의 물음에 나아추는 의아했다.
연우강이 잠입해 들어온 사실을 알았다면 당장 놈들을 잡아 없애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묻다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 연우강이나 무원 정도의 무인이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 그렇게 생각하는가?”
“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 자네 생각은 어떤가?” 혁련무극은 나아추를 보았다.
“ 저는 지금 궐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 연우강 일행이 잠입해 들어온 이유는 밀천과 전쟁을 유도하기 위함이네.”
“ 우리에게 큰 피해가 없다면 녀석을 그대로 둬도 상관없다는 말입니까?”
비로소 궐주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연우강을 이용할 생각인 것이다.
“ 누가 연우강인지 모른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확실하게 알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만일 놈이 숨게 되면 우린 더 힘들어지네. 차라리 눈앞에 있는 게 훨씬 낫네. 대신 밀천과 전쟁이 끝나면 연우강에 대한 처리는 자네에게 일임하겠네.”
“ 하지만 놈의 무공으로 봤을 때 감시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나아추가 걱정하는 건 그 점이었다.
보통 무인 같으면 멀리 떨어진 상황에서도 감시가 되겠지만, 연우강, 무원, 창노, 향노 그리고 부하로 보이는 젊은 녀석은 초극 고수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는 자들이다. 감시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 별동대를 창설할 작정이네.”
“ 별동대라면?”
“ 흑마괴문에서 오십 명, 야노원 이십 명, 야랑대에서 삼십 명을 뽑아 연우강에게 맡길 생각이네.”
“ 놈에게 병력을 맡길 생각이십니까?”
나아추는 황당한 얼굴로 혁련무극을 보았다.
지금 야궐이 이 지경이 된 건 연우강 때문이다.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을 지휘관으로 앉히겠단다. 아무리 생각해도 궐주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 흑마괴문에서 뽑을 오십 명 중 연우강의 정체를 알아도 태연하게 행동할 수 있는 그런 자들에게는 사실을 알려도 되네.”
“ 그러니까 궐주님 말씀은?”
나아추의 얼굴이 비로소 풀렸다. 별동대의 조장으로 임명하겠다는 건 백 명을 맡긴다는 뜻이 아니라 백 명의 감시를 붙인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 해줄 수 있겠는가?”
“ 물론입니다. 궐주님.”
“ 그럼 바로 무인 선출 작업에 들어가도록 하게.”
“ 알겠습니다.”
나아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 거참!”
혁련무극은 내려놓았던 찻잔을 다시 손에 쥐었다.
“ 감탄이십니까?”
유악재는 혁련무극을 보았다.
“ 자네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 그만큼 무공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 그런 셈이지. 아무튼 물건은 분명한 것 같네.”
혁련무국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누구를 옆에 붙이실 겁니까?”
“ 가서 노욱과 복양후를 불러오게.”
“ 궐주님.”
유악재는 깜짝 놀랐다.
혁련무극이 언급한 구천검마제 노욱은 야노원의 원주고 청랑왕 복양후는 야랑대의 대주이기 때문이다.
연우강을 감시할 목적 이상의 뭔가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아니, 그들이 별도대로 들어가면 별동대 대주로 임명될 연우강은 물론이고 다른 문도들 또한 의아한 눈초리를 거두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의도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 혹시?’
유악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 궁금하더라도 지금은 시키는 대로 해주게.”
“ 알겠습니다. 궐주님.”
유악재는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혁련무극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 이곳 종남산이 어떤 곳인지 아느냐?”
혼자 남은 혁련무극은 혼잣말로 물었다.
“ 바로 대야벌의 시작점이었다.”
혁련무극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영세오천의 비사.
힘을 합쳐 천마를 상대했던 다섯 하늘은 천마가 마총으로 영원히 사라지자 다시 분열됐다.
하지만 이번 분열은 과거의 분열과 양상이 달랐다.
과거엔 영세오천 다섯 곳이 서로 반목하고 전쟁을 치렀다면 이번에는 천 내부의 싸움이었다.
싸움의 주체는 천주를 따르는 자와 이인자들, 즉 기득권층과 개혁세력 간의 싸움이었다.
각 천의 천주들은 천마가 나타나기 이전 상태. 각 천의 이인자들은 천마를 상대했을 때처럼 영세오천을 합친 하나의 단체를 원했다.
천주를 비롯한 기득권층과 이인자 사이의 충돌은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각 천의 이인자들 또한, 현재 대야벌의 벌주인 담대만승과 그의 동생 담대천호처럼, 천주의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친족끼리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 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곳이 바로 이곳 종남산이었고, 이인자들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 음양뢰라고 했지.’
마지막 장소에 대한 사항은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 격전지는 음양뢰였고, 이천 명이 들어가서 백 명만 살아 나왔다고 하였다.
“ 그때 살아 나온 자들이 바로 무성의 무영들이었다. 연우강. 네 아버지가 성주로 있던 그 무성 말이다.”
혁련무극은 서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과 창노의 정체가 발각됐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연우강은 함께 천막을 사용하던 조원들과 함께 몸을 날리는 중이었다. 그들 맨 뒤에는 커다란 자루를 든 모곤필이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따르고 있었다.
[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창노는 연우강을 따라붙으며 혜광심어로 물었다.
[ 장안봉으로 가는 거예요.]
[ 장안봉이라면?]
[ 장안봉은 밀천 무인들이 주둔해 있는 아미곡에서 이십 리 가량 떨어진 곳이에요.]
[ 그곳으로 왜 간다는 거냐?]
[ 시간 때문에 그래요.]
[ 시간?]
[ 야궐은 무인의 수가 천여 명에 불과하잖아요.]
[ 그래서?]
[ 그러니까 우리가 장안봉으로 가는 이유가 밀천과의 전쟁을 늦추기 위해서란 말이구나.]
[ 그런 셈이에요.]
[ 우리가 가면 전쟁이 늦춰지는 거냐?]
[ 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떻게?]
창노는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밀천이 왜 공격을 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본 적 있어요?]
[ 글쎄다. 그건.....]
창노는 말끝을 흐렸다.
그동안 그 부분에 대해 생각을 하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적리가 공격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 나적리는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에요.]
[ 신중한 성격 때문에 공격을 미루고 있다는 거냐?]
[ 성격 때문이 아니고 동뢰곡과 자모곡에 있는 야궐 무인의 수가 천여 명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공격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 적의 수가 더 적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공격을 못한다고?]
창노는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적의 수가 적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면 당장 공격해야 한다.
그런데 그 사실 때문에 공격을 못하다니.
[ 야궐 무인의 수가 총 몇 명이죠?]
[ 삼천여 명 정도 아니냐.]
[ 그런데 이곳에 천명밖에 없잖아요.]
[ 나머지 이천 명 때문에 공격을 못한단 말이냐?]
[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나적리는 모르고 있어요.]
[ 모른다고?]
[ 네.]
[ 그들이 모른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 야궐에서 대라검문, 비도사문, 혈라마문 무인들은 하오밀문도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은밀하게 빠져나갔거든요.]
[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 정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건?]
[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 또 있는냐?]
[ 하늘을 보세요.]
창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야조 몇 마리가 천천히 날아가고 있었다.
[ 뭘 보라는 거냐?]
[ 방금 영감님이 본 그 새는 설산신조에요.]
[ 설산신조라면 철응방이 키우던 그 새를 말하는 거냐?]
[ 네, 밀천이 이곳에 주둔하는 순간부터 종남산 하늘엔 설산신조와 비응마조가 진을 치고 있었어요.]
[ 전서구를 없앴단 말이구나.]
창노는 놀란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밀천은 개파대전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직력에 허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전서구가 끊기면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중한 성격의 나적리 입장에서 보면 야궐의 나머지 이천 명이 종남산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가 섣불리 공격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 하지만 섬서성에 밀천 지부가 있는데 이미 인편으로....]
전서구를 없앨 생각을 했다면 지부로 가는 자들에 대한 조치도 취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나적리는 지부와 연락 자체가 끊겼어요.]
[ 하지만 계속 수색 작업을 하다 보면 대라검문을 비롯한 세 문파 무인들이 이곳 종남산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겠지.]
[ 우리가 그 대라검문 역할을 하게 되는 거예요.]
풀숲을 헤치며 나아가던 연우강이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감지되었다.
연우강과 창노가 멈춰 서자, 나머지 여섯 명도 일제히 그 자리에 멈추며 풀숲으로 몸을 숨겼다.
[ 모곤필!]
연우강은 맨 뒤에 있는 모곤필을 전음으로 불렀다.
[ 부르셨소]
모곤필은 짐을 내려놓고 연우강 곁으로 다가갔다.
[ 잔삭과 함께 오른편을 정찰하고 와.]
[ 알았소.]
고개를 끄덕인 모곤필은 전음으로 운철을 불렀다.
[ 괴삭은 마삭과 중앙을 정찰해 주시오.
모곤필과 운철이 바로 뒤편의 육십대 노인 둘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조원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아, 영감님으로 불리는 차석인과 우인남이었다.
[ 알았네.]
차석인과 우인남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방으로 나아갔다.
[ 우린 왼편을 정찰하면 되는 거요?]
광삭 초소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전음을 보냈다.
[ 암삭과 함께 다녀오도록.]
[ 알았소.]
초소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암삭 강무우와 함께 자리를 떴다.
[ 별일이구나.]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조원들을 지켜보던 창노가 말했다.
[ 뭐가요?]
[ 모곤필 저놈은 군말 없이 정찰 나갈 놈이 아니질 않느냐.]
[ 그렇게 생각하세요?]
[ 식량을 들고 오면서도 불평을 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고.]
[ 자세히 관찰햇네요.]
[ 관찰하지 않을 수가 없잖느냐.]
[ 조만간 죽을지도 모르겠네요.]
[ 죽어?]
[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잖아요.]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 죽일 생각이냐?]
[ 녀석을 죽일 이유가 없잖아요.]
[ 그런데 그건 무슨 소리냐?]
[ 죽을병이 걸린 것도 아닌데 녀석이 변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 끄응!'
창노는 얼굴을 찌푸렸다.
매번 대화를 하면서 느낀 점이지만 연우강의 머릿속은 따라갈 수가 없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녀석은 모곤필이 변했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른척 할 뿐만 아니라 걱정조차 하지 않는다.
뭔가 노리는 게 있는 듯한데 그게 무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 조만간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 그만 하자.]
창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오른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정찰을 나갔던 차석인과 우인남이 돟ㄹ아온 건 한 식경 후였다.
연우강은 두 사람을 빤히 보았다. 두 사람 다 나이는 육십 정도고 머리는 흰머리가 절반가량 섞인 반백이다. 차석인응ㄴ 키가 크고 우인남은 작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두 사람의 무공이 다른 문도들보다 훨씬 높다는 점이었다. 내공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일 갑자는 넘을 듯했다. 그 정도면 최고한 조장 정도는 돼야 하는데, 일반 문도로 지내고 있었다.
저런 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있는 곳이 바로 야궐이었다.
[ 없네.]
키가 작은 차석인이 고개를 저었다.
[ 얼마나 살핀 거요?]
연우강이 물었다.
[ 반경 오백 장은 살핃고 왔네.]
[ 대기 하시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이들을 기다렸다.
그로부터 일각 후 맨 나중에 출발했던 초소칠과 강무우과 먼저 돌아왔다.
[ 반경 오백 장 내에는 아무도 없소.]
초소칠이 보고했다.
[ 따라오시오.]
연우강은 네 사람에게 동시에 전음을 보내며 차석인 일행이 간 곳으로 이동해 갔다.
' 으음!'
연우강을 따라나선 차석인은 내심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우인남을 보았다.
[ 자네도 들었는가?]
시선이 마주치자 우인남이 전음으로 물었다.
[ 그렇네.]
우인남은 눈짓으로 초소칠과 강무우를 가리켰다. 그들도 말없이 따라나서고 있었다.
[ 그런 것 같네.]
차석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 유패의 무공이 어느 정도였는지 아는가?]
우인남은 유패와 관천행을 처음 봤을 때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가 기억하는 유패와 관천행은 조용하고 말이 없는 친구였고, 무공은 사십년 내외였다.
[ 사십 년 정도로 알고 있네.]
차석인 또한 유패의 무공 정도를 사십 년 내외로 파악하고 있었다.
[ 사십 년 공력을 가진 자가 다심전음을 펼칠 수 있다고 보는가?]
다심전음은 한 사람이 여러 사람에게 전음을 보내는 무공으로 최소한 이 갑자의 공력을 지녀야 펼칠 수 있는 고절한 수법이었다.
[ 절대로 불가능하지.]
차석인은 고개를 저었다.
[ 그럼 저자는 유패가 아니겠군.]
우인남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지난 보름 동안 한 천막을 사용했다. 굳이 감시를 하지 않더라도 하루에 수십 번씩 시선이 마주치곤 한다.
그런데 유패가 모곤필에게 심부름을 보내기 전까지는 이상한 낌새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놀라운 자가 아닐 수 없었다.
[ 그가 유패였다면 모곤필에게 식량을 타 오라는 명령은 내리지 못했겠지.]
차석인도 우인남과 같은 생각이었다.
모곤필이 추도익의 외조카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문도들은 모곤필이 반말을 해대도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모곤필에게 부탁이나 심부름 같은 건 시키지 않았다. 시킨다고 들을 녀석도 아니거니와, 공연히 시비를 일으키곤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패는 모곤필에게 식량을 타오라고 시킨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깜짝 놀라 유패를 살폈다.
처음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유패와 관천행의 분위기가 전에 비해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만 바뀌었을 뿐 얼굴이나 행동은 전과 별반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 오늘 유패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 누구라고 보는가?]
우인남은 차석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 우리가 찾는 그자일 거네.]
차석인은 단언하듯 말했다.
[ 연우강?]
우인남은 앞서 가는 연우강을 지그시 보았다.
[ 놀라지도 않는군.]
놀란 기색도 없는 우인남의 얼굴에 차석인은 실망한 투로 말했다.
[ 모곤필이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공대할 때 알아봤으니까.]
우인남은 어깨를 으쓱했다.
[ 모곤필이 보고를 했을 거라고 보는 건가?]
[ 모곤필 그놈이 눈치 하나는 최고 아닌가. 그리고 추도익의 위세를 등에 업고 천방지축 날뛰던 놈이 갑자기 얌전해진 이면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 감시하라는 지시도 받았을 거란 말이군.]
[ 그래서 제 딴에는 은밀하게 감시를 한다고 공대를 하는 거라네.]
[ 모곤필 그놈은 절대 성공하지 못할 거야. ]
[ 왜?]
[ 이게 나쁘니까 그렇지.]
차석인은 자기 머리를 툭 쳤다.
[ 그럼 저놈도 알고 있겠네?]
우인남은 연우강을 턱으로 가리켰다.
[ 유패와 관천행을 없애고 잠입해 들어온 친군데 모를 리가 없겠지.]
차석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우인남은 여전히 연우강의 등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 그걸 모르겠단 말이네. 조금 전 다심전음을 보낸 걸 보면 본인도 알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차석인은 말끝을 흐렸다.
용담호혈이라고 할 수 있는 야궐 진중에 버젓이 들어와 있는 걸 보면 대담한 건지 바보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 동료와 함께 들어왔으니 결코 바보는 아닐 것이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알고 있는 게 맞네.]
[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차석인은 우인남을 보았다.
[ 다심전음을 보낸 건 일종의 경고네.]
[ 경고?]
[ 허튼 짓 하면 죽인다는 뜻이겠지.]
[ 그럼 가만있어야 한다는 건가?]
[ 가만있지 않으면?]
[ 저놈 일행에게 당한 동료가 칠십 명이었네.]
[ 칠십 명 중 절반은 연우강 저놈에게 죽었을걸?]
[ 그런데도 가만있자고?]
[ 나이 육십에 출세할 것도 아니고, 저 녀석을 없앨 생각이었으면 나 문주가 진작 처리했을 거 아닌가. 그리고 우릴 죽이러 온 것 같지도 않은데 굳이 나설 이유가 없지. 걱정 말고 지켜보기나 하세.]
스윽!
바로 그때 앞서 가던 연우강이 손을 들어올렸다.
오 장 떨어진 곳에 검은 그림자 둘이 납작 엎드려 있었던 것이다.
[ 괴삭과 마삭은 오른편으로 우회해서 가시오.]
[ 몇 명이오?]
차석인이 물었다.
[ 전부 여섯 명이오. 두 놈을 없애긴 하되 바닥에 피를 흘리면 안 된다는 거 명심하시오.]
[ 최대한 근접해야겠군.]
[ 근접해서 입을 막고 목을 꺾으면 되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광삭과 암삭에게도 전음을 보냈다.
지시를 받은 네 사람은 조용히 좌우측으로 사라졌다. 그러고 연우강과 창노는 중앙으로 전진해 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모곤필과 잔삭 옆에 섰다.
[ 어때?]
연우강은 모곤필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 전부 여섯 명으로 매복 여부를 조사하고 다니고 있소.]
[ 가서 식량 가져 와. ]
연우강과 창노는 소리 없이 나아갔다.
곧 두 사람은 적이 있는 곳에서 십여 장 떨어진 장소에 당도했다.
모곤필의 말처럼 적은 여섯 명이었다. 나란히 서 있는 세 그루 나무에 두 명씩 등을 기대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 오늘이 마지막 수색이지?"
" 그런 셈이지. 오늘도 발견되지 않으면 내일은 공격을 개시한다고 하더구먼."
장한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연우강과 창노는 나무 위로 몸을 날려갔다.
" 좀더 수색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어느 장한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나무 위에 있던 연우강과 창노는 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그와 동시에 연우강은 마라천력을 펼쳤다.
어느새 두 사람은 장한들 머리 위쪽까지 내려와 있었다.
" 읍!"
이야기를 나누던 사내가 제 입을 만져보았다. 갑자기 입이 마비된 듯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대화를 나누는 사내의 어깨를 툭 쳤다.
" .......!"
사내 또한 말이 나오지 않는 듯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 순간.
우드득! 우둑!
나무 위에서 네 개의 손이 나타나 장한의 목을 단숨에 꺾었다.
벌떡!
동료 두 명이 죽임을 당하자 옆에 있던 네 명이 벌떡 일어나 경악한 얼굴로 연우강과 창노를 보았다. 네 명은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목소리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네 명은 당황한 가운데 무기를 잡아갔다.
막 무기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뒤에서 손이 튀어나와 목을 사정없이 꺾었다.
우두둑! 우둑!
네 명의 목에서 동시에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거참!"
힘없이 늘어진 장한을 보며 차석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전 분명 녀석들은 고함을 지르려고 했다. 그런데 놈들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런 상황을 만든 사람이 연우강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차석인은 연우강을 보았다.
" 시체는 흑우평에 버리고 갈 거니까 그렇게 알도록."
흑우평은 종남산 정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평원을 일컫는 말이었다.
" 들고 가야 한단 말이군."
우인남은 시체를 흘끔 쳐다보았다.
" 그래야 각 지부로 떠났던 무인들이 돌아올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
" 그럼 우리가 출병한 이유가 시간을 벌기 위한 거였는가?"
이번엔 차석인이 물었다.
" 그렇소. 괴삭. 우리 임무는 적을 최대한 교란해 대라검문, 비도사문, 혈라마문 무인들이 돌아올 시간을 버는 거요."
" 그들이 돌아오면 곧바로 전쟁이 시작되겠군."
" 내 곁에서 십 장 이상만 떨어지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삼십 년 이상은 거뜬히 살 수 있을거요. 물론 변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지만."
" 변하지 않는다는 조건이라는 건 무슨 뜻인가?"
차석인은 방금 죽인 사내를 어깨에 걸머메며 물었다.
"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 말 아시오?"
" 오래 살고 싶으면 평소대로 행동하라는 말이군."
차석인은 연우강을 빤히 보았다.
" 물론이오. 눈치가 빠르니까 돌아가는 상황은 대충 파악했을 거요. 이제 한 가지만 명심하면 되오. 문주님은 물론이고 궐주님까지도 평소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차석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 지금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말은?"
" 차도살인!"
차석인은 저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 차도살인은 너무 과격한 말이오. 지금과 같은 경우엔 '마당 쓸고 돈 줍고' 라는 말이 더 어울리오."
"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가?"
" 어떤 다음을 말하는 거요?"
" 궐주가 돈을 줍고 난 다음 말이네."
" 궐주가 줍게 될지 나적리가 줍게 될지는 모르잖소."
" 나적리가 돈을 주을 수도 있단 말인가?"
" 세상일을 어찌 알겠소. 그건 돈이 발견된 다음에 생각할 문제 아니겠소."
연우강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때 식량을 가지러 갔던 모곤필과 운철이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엔 식량 자루를 모곤필이 아닌 잔삭 운철이 들고 있었다.
" 넌 빈손이네?"
연우강은 모곤필을 보며 물었다.
" 잔삭이 들겠다고 했소."
" 넌 역시 복이 없는 놈이 맞는 것 같다."
연우강은 쓰러진 시체를 보았다.
" 그걸 들고 가라고?"
" 빈손은 너밖에 없잖아. 그리고 강한 무공이 있으니까 두 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거야. 그치?"
연우강은 흑우평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넌 손이 없냐?"
모곤필은 멀어지는 연우강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 억울하면 출세를 하란 말은 어떤 미친 놈이 할 일이 없어서 지어낸 말이 아냐. 그건 진리다. 모곤필."
" 개자식!"
모곤필은 욕설을 뱉어내며 시체 두 구를 걸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