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59화 (159/232)

제 3장 마인과 악인의 차이

무곡이 사시사철 안개로 들어차게 된 이유는 두 가지이다. 계곡이 분지처럼 움푹 들어간 장소에 형성돼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는 바람을 막아주는 봉우리였다. 남쪽에는 감로봉이, 동쪽에는 미로봉이, 서쪽에는 광천봉이, 북쪽에는 황학봉이 있어, 바람이 빠져나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물론 무곡 북쪽과 황학봉 사이의 포룡곡과 난투곡이라는 계곡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나 산을 넘어온 바람은 무곡 위쪽으로 흐를 뿐 아래까지는 내려가지 못했다. 오히려 무곡의 안개는 위쪽으로 흐르는 바람을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미로봉까지 안개 지대로 만들어놓곤 했다.

이덕무 일행이 무곡 북쪽 황학봉에 도착한 것은 새벽 무렵이었다.

황학봉은 그렇게 높은 봉우리가 아니었다.

정상에 있는 바위에 올라서자 남쪽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밀천삼사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무곡과 포룡곡, 난투곡이 만나는 장소였다.

지도상에는 삼합정이라 표시돼 있었다.

아마도 세 개의 계곡이 만나는 장소라는 의미리라.

삼합정은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우물을 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우물부터 남쪽으로 구불구불 이어져 내려가면 안개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 저곳 어딘가에 놈들이 숨어 있다는 말이군.”

이덕무는 안개에 눈을 맞추며 말했다.

직선 거리는 삼십 리 가량이다. 하지만 강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있어, 실제 거리는 그보다 네 배 이상은 될 것이다.

“ 가세.”

이덕무는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로부터 반 시진 후 은원 무인 삼백 명은 삼합정에 당도했다.

위에서 보았던 것과 달리 삼합정은 엄청났다.

지름은 오십 장 정도고, 아래쪽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어 깊이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덕무는 감탄한 얼굴로 공동을 보았다. 임무만 아니라면 한번 탐험해 보고 싶을 정도로 멋진 곳이었다.

삼합정을 바라보던 이덕무는 귀사 오창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난 열명을 데리고 서쪽 절벽을 수색하겠네.”

“ 그럼 난 동쪽을 수색해야겠군.”

오창선에 이어 사사 적일광이 말했다.

“ 그렇게 해주게.”

이덕무는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가세.”

“ 가세.”

곧 오창선과 적일광은 무인 열 명과 함께 좌우측으로 몸을 날렸다.

이덕무는 멀어지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무곡 좌우측을 형성하는 절벽은 삼합정에서 시작하여 완만한 경사를 이루다가 중간 지점에서는 급경사로 변한다.

삼합정을 떠난 오창선 일행은 빠르게 급경사를 올라가는 중이었다. 곧 좌우측으로 올라갔던 은원 무인들이 곧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쉴 곳을 찾아보게.”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이덕무는 뒤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했다.

노인들은 빠르게 주변을 훑고 다녔다. 그리고 잠시 후 일행은 삼합정에서 오 리가량 떨어진 북쪽 계곡에 진영을 구축했다.

한편,

동쪽 절벽을 타고 정찰을 나갔던 오창선 일행은 무곡 중간 지점에 도착해 있었다.

안개는 오창선 일행이 나아가고 있는 무곡 위쪽까지 자욱하게 끼어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면 시야가 트이고, 다시 바람이 자면 시야가 가로막히는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위쪽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라 무곡 아래쪽을 확인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오창선 일행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천리지청술이었다.

그들은 십 장 간격을 두고 전진하면서 감각을 최대한 끌어 올려 절벽 아래쪽을 살폈다.

열 명 중 제일 막내인 은영사사무 곽천상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전 내공을 끌어올려 천리지청술을 펼치며 은밀하게 걸음을 옮겼다.

부스럭!

나아가던 곽천상의 검미가 슬쩍 치켜올라 갔다. 낙엽 밟는 듯한 소리가 천리지청술을 펼치고 있는 귓전으로 잡혀든 것이었다.

그런데 소리가 들려온 곳은 무곡 아래쪽이 아니었다. 그가 가고 있는 곳의 왼편, 연우강 일행이 아니고 다람쥐나 들쥐 같은 짐승이라면 공연히 꼴만 우습게 된다는 것이었다. 아니, 다람주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다고 확인하지 않고 그냥 갈수는 없었다.

바삭!

또다시 낙엽 밟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자 곽천상은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십여 장 정도를 나아갔지만 귓전에는 아무것도 잡혀들지 않았다.

“ 공연히....”

부스럭!

막 몸을 돌리려고 하는데 또다시 나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휙!

곽천상은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빠르게 몸을 날렸다. 그가 나아간 거리는 이십여 장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 젠장!”

또다시 허탕을 치고 나자 곽천상의 입에서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헛걸음했다는 생각에 공연히 짜증이 났다.

[ 헛걸음 한 게 아니라네.]

막 몸을 돌리려고 하는데 귓전으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헉!’

곽천상은 내심 신음을 내뱉었다.

전음이 들려오는 순간 내기를 끌어올렸다. 그런데 날카로운 예기를 간직한 기운이 온몸 구석구석을 노리고 있었다.

선수를 빼앗기고 만 것이다. 만일 지금 순간에 무작정 몸을 돌리게 되면 온몸이 난자당하고 말 것이다.

“ 누구냐?”

곽천상은 애써 태연한 척 말을 걸었다.

“ 난 등을 보인 자를 공격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몸을 돌려도 되네.”

조금 전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곽천상은 갈등했다. 지금은 싸늘한 예기를 대부분 파악하고 있는 상태다. 지금 상태로 심장을 보호하면서 피하면 팔이나 다리 하나만 잃어도 된다. 하지만 몸을 돌리는 순간 뒤에 있는 놈이 공격해 온다면 피하는 것보다 더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나 같으면 몸을 돌려도 공격을 받지 않는다는 쪽에 걸겠네.”

‘ 놈!’

비아냥대는 말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곽천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 오냐.”

곽천상은 이를 부드득 갈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단순히 반대편으로 도는 것뿐인데도 곽천상의 동작은 느렸다.

몸을 절반가량 튼 상태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오 장 건너편에 서 있는 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회의를 걸치고 있는 검사였는데, 빛바랜 옷처럼 나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늙은 노인이었다.

‘ 맙소사!’

곽천상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노인은 검을 가슴에 품고 있을 뿐 뽑은 상태도 아니었다. 그런데 수백 자루의 검이 바로 앞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누, 누구요?”

곽천상은 저도 모르게 말을 올렸다.

많은 무인을 만나보았고 비무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 앞에서 이렇듯 위축돼 보기는 처음이었다.

“ 평생 동안 검을 버리려고 노력했는데, 여전히 검을 쥐어야 안심이 되는 촌부라네.”

“ 검을 버리려고 노력했다는 건 무검의 경지.... 설마 무검 한사?”

곽천상은 경악했다.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다. 천지이노, 비쌍비노, 금강이노, 쌍절이노, 무쌍이노로 불리는 패천림의 장로들. 그들 중 무검 한사는 무무 제천강과 더불어 무쌍이노라 불리며, 패천림 최강 고수로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강하면 얼마나 강할까 했다.

그런데 실제로 마주한 한사는 거악이었다.

“ 패천림에 박혀서 강호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던 나를 알아보는 걸 보면 밀천의 정보력도 대단하구먼.”

한사의 얼굴에 슬쩍 놀란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밀천에서 자신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 우리 밀천은 천오백 년 동안 준비를 했다.”

이내 평정을 되찾은 곽천상은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태연한 얼굴과는 달리 그는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한사의 허점을 찾고 있었다. 그가 허점을 찾는 건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느 방향으로 몸을 피해야 한사의 공격권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그걸 찾기 위함이었다.

“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곽천상의 내심을 알아차린 듯 한사는 빙그레 웃었다.

“ 패천림이 왜 이곳에 있는 거냐?”

곽천상은 질문으로 자신이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겼다.

“ 이곳은 우리 집인데 그것까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한 모양이군.”

“ 집이라고?”

“ 그렇다네.”

“ 그래서...”

곽천상은 황당했다. 그동안 그렇게 찾으려고 해도 보이지 않던 패천림이 이곳에 숨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허허.....”

“ 차앗!”

한사가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곽천상은 양손을 비쾌하게 뿌렸다. 그와 동시에 뒤편으로 몸을 날렸다. 처음부터 도망칠 생각이었기에 그가 물러나는 속도는 가공했다.

“ 그러고 보니 밀천 무인들은 형편없구먼.”

슈캉!

가슴에 품고 있던 검이 불쑥 솟구쳐 올랐다.

“ 잘 가게.”

슈아악!

한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검은 곽천상을 쫓아 공간을 단축했다.

“ 헉!”

느닷없이 뒤편에서 차가운 기운이 감지되자 곽천상은 더욱 내공을 끌어올렸다.

푸욱!

하지만 내공을 채 끌어올리기도 전에 검은 그의 목을 통과했다.

“ 이기어검....”

곽천상은 그의 목을 관통하고 멀어지는 검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력으로 달렸으니 최소한 삼십 장 이상은 벗어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했다는 건 검술의 끝이라 불리는 이기어검술밖에 없을 터였다.

“ 자네가 도망치지 않고 덤볐더라면 최소한 십 초는 견뎠을 것을.... 그럼 앞서 간 친구들도 알아차렸을 테고.”

‘ 그랬군.’

곽천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한사가 이기어검술을 익혔다고 해도 일 초 만에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싸웠더라면....

“ 아무튼 잘 가게.”

푸스스!

곽천상의 머리가 가루로 흩어졌다.

한사는 되돌아온 검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슈악!

그의 시선을 받은 검은 빠르게 뒤편으로 날아갔다.

공간을 단축한 한사의 검은 거대한 나무를 파고들었다. 검이 파고드는 소리가 들려오고, 곧 가루가 사방으로 휘날렸다.

철컥!

되돌아온 검이 제 집을 찾아가는 새처럼 검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한사는 고개를 도려 조금 전 가루로 만들었던 나무를 보았다.

“ 내가 잘못 들었나?”

한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가 멈춰 선 곳은 절벽 가장자리였다.

그는 그곳에서 안개로 자욱한 무곡을 보았다.

“ 난 네가 있는 곳을 알고 있다. 연우강. 그날 나와 대결을 벌였던 사람이 너라는 사실도. 하지만 난 말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날 대결로 인해 난 어검을 얻었기 때문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다르다. 그들은 승리를 얻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네가 강하면 이 전쟁의 승자가 될 것이고, 약하면 죽을 것이다. 물론 나 또한 널 공격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테고.”

한사는 나직이 중얼거리고는 몸을 돌려 조금 전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십여 장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바위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바위 오른편 가장자리로 오른발을 쑥 밀어넣었다.

그러자 한사의 신형은 꺼지듯 사라졌다.

“ 휴우!”

한사가 사라지자마자 방금 한사가 가루로 만들었던 나무 아래쪽에서 짧은 한숨과 함께 노인이 나타났다.

그는 독고철웅이었다.

“ 한사가 저렇게 강할 줄이야....”

독고철웅은 간담이 서늘했다.

한사가 검을 쳐다보는 순간 머리가 쭈뼛 서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아무 생각 없이 아래로 몸을 날렸따.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순간 조금 전까지 몸을 숨긴 나무로 검이 박혀들고 곧 가루가 휘날렸다.

놀랍게도 검이 통과한 위쪽이 전부 가루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패천림의 장로 무검 한사가 이기어검술을 펼치는 극강 고수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기어검술을 펼칠 정도면 연우강 말고는 상대할 무인이 없을 듯했다.

“ 그나저나 그자가 연우강을 알고 있는 것 같던데.”

독고철웅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사는 분명 연우강과 전에 대결한 것처럼 말했다.

“ 혹시.....”

문득 연우강이 얼굴을 숨기고 패천십관에 도전했다는 사실이 떠올랏다.

“ 물어보면 알겠지.”

독고철웅은 천마환환신공을 펼쳤다. 그러자 그의 동체가 천천히 허공으로 녹아들어갔다.

그는 절벽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연우강 일행이 숨어 있는 곳은 무곡의 남쪽 입구에서 삼분의 일 지점이다. 밀천 무인들이 수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연우강 일행은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 나네.]

독고철웅은 연우강을 보며 전음을 보냈다.

[ 누가 온 거요?]

[ 밀천의 노인네들이네.]

[ 은원 무인들이군요.]

[ 그런 모야이네. 그런데......]

독고철웅은 조금 전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했다.

[ 그러니까 이곳을 패천림의 집이라고 했단 말이오?]

[ 그랬네.]

[ 집 본 적 있소?]

[ 없네.]

[ 집이 없는데 이곳을 집이라고 했다면.....]

연우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 지하네.’

연우강은 피식 웃었다.

사실 그가 도주로를 이곳으로 잡은 이유는 패천림 때문이기도 했다. 밀천 개파대전이 끝나고 하오밀문은 마유와 사유 그리고 장육철을 은밀하게 쫓았다. 그런데 이곳 종남산까지 와서 그들의 흔적을 놓쳤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이유가 바로 지하에 총단이 있기 때문이었다.

‘ 진작부터 준비를 했거나 아니면 동정호 지하에 있던 밀천 총단처럼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공간이란 말인데.....’

연우강은 코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고민하는 건 그곳을 먼저 탐험하느냐 아니면 밀천과 야궐을 끌어들인 다음 진흙탕을 만드느냐 하는 것이었다.

‘ 공연히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할 필요는 없지.’

연우강이 다시 드러눕자 독고철웅은 물었다.

[ 그들을 없애줄 자들이 넘쳐나는데 굳이 우리까지 나설 필욘 없잖소. 영감은 마봉으로 가서 허일구 영감을 만나 이곳에 패천림 무인들이 있으니까 조심하라는 말을 전해 주고 오시오. 하오밀문 문도들을 알아보는 방법은......]

연우강은 하오밀문 문도들이 남기는 표식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 끄응! 알았네.]

독고철웅은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서 마봉까지는 수백 리 길이다. 도와주기로 했는데 먼 곳이라고 해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독고철웅은 동굴 입구에서 벗어나 위쪽으로 몸을 날렸다.

“ 적이다!”

“ 적이 나타났다.”

차앙! 창창!

“ 크아악!”

막 절벽을 벗어나려는 데 멀리서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더불어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드디어 은원 무인들이 은밀하게 다가오는 패천림 장로들의 흔적을 잡아낸 모양이었다.

“ 열심히 싸우거라.”

독고철웅은 싱긋 웃으며 몸을 날렸다. 곧 그의 신형이 안개를 뚫고 동쪽으로 향했다.

********

하오밀문 문도들이 그들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야궐과 밀천에서 흘러나오는 정보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 은밀하게 움직이는 자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야궐이나 밀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새로운 세력이 종남산에 들어왔다고 판단하고 감시를 하던 중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놀랍게도 그들은 밀천 개파대전 이후 추적하다가 종남산 어귀에서 놓친 패천림 무인들이었던 것이다.

“ 어디로 가고 있는가?”

허일구는 하오밀문 호북 지부장을 맡고 있는 마장 유불리를 보며 물었다.

“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 서쪽이라고?”

“ 그렇습니다. 문주님.”

“ 인원은?”

“ 다섯 명입니다.”

“ 다섯 명이라.....”

허일삼은 향노를 돌아보앗다.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이 담긴 눈빛이었다.

“ 다섯 명 정도면 우리가 처리할 수 있을 거네.”

향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패천림 무인들을 쫓을 결심을 한 것은 강호무림의 상황 때문이다. 대야벌의 야장에 있을 때에도 가장 주시했던 곳이 패천림이었다.

그들은 무려 일천 년 동안 야심을 숨겨왔던 것은 물론이고 승천비고와 천무비고를 관리했던 만기팔유와도 한패였다. 게다가 그들이 가져간 무공 비급은 무림의 판도를 완전하게 뒤엎을 정도로 엄청난 것들이다.

만일 그 무공 비급으로 강호 무인들을 끌어들인다면, 패천림은 당장 강호 제일 세력으로 올라설 게 분명하다.

아니, 장차 연우강의 가장 큰 적이 될 것이다.

없앨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본거지가 어딘지 정도는 알아 놔야 할 터였다.

“ 밀문수호대를 동원하겠습니다.”

허일구는 오른편을 보았다. 그곳에는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청년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전에 남궁세가 창궁대와 함께 무공을 익힌 하오밀문 영재들이었다.

“ 하명하십시오, 문주님.”

그들 중 가운데 있는 청년이 한 걸음 앞ㅇ르ㅗ 나오며 말했다. 그는 밀문수호대 대주인 당랑귀 철호였다.

“ 발이 빠른 녀석들로 스무 명만 뽑아라.”

“ 알겠습니다. 문주님.”

철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짓으로 대원들을 지목했다. 지목된 대원들이 앞으로 나왔다.

“ 앞장서게. 불리.”

허일구는 유불리를 보며 말했다.

“ 알겠습니다.”

유불리는 전방으로 몸을 날렸다.

“ 우리도 가자.”

“ 알았어요, 할아버지.”

뒤이어 향노와 사망궤를 맨 남궁운화가 몸을 날리고 허일삼과 밀문수호대 이십 명이 그 뒤를 따랐다. 어둠을 뚫고 몸을 날린 그들이 속도를 늦춘 곳은 종남산 북봉인 외뢰봉 북편 산기슭이었다.

패천림 무인을 감시하던 자는 하오밀문 하남 지부장 우장 장일선과 감숙 지부장 투귀 유정일이었다. 향노 일행이 앞에 서자 두 사람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 어디 있는가?]

향노는 장일선을 향해 물었다.

장일선은 말없이 어둠 속을 가리켰다. 그는 무공이 일천하여 전음을 펼칠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행은 장일선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그곳은 좌우측이 높은 절벽으로 이루어진 계곡이었다. 계곡 안쪽은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 자네들은 이곳에서 대기하게.]

향노는 장일선과 유정일에게 전음을 보내고는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곧 남궁운화와 허일구 그리고 밀문수호대 스무 명은 향노를 따라 몸을 날렸다.

계곡은 좁고 길었다. 폭은 이 장에 불과했으며 안으로 들어갈수록 좌우측 절벽은 높아졌다. 십여 장을 달려가자 멀리 검은 그림자들이 보였다.

다섯 명은 태연하게 걷고 있었다.

향노는 다섯 명 앞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좁은 계곡은 길처럼 이어져 있었다.

일행은 최대한 은밀하게 몸을 날렸다.

그렇게 백여 장 정도를 갔을까.

‘ 응?’

향노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앞서 가던 자들이 꺼지듯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일행은 급하게 패천림 무인들이 사라졌던 곳으로 몸을 날려갔다.

[ 저기 동굴이 있습니다. 어르신.]

허일구가 왼편을 가리켰다.

향노는 고개를 돌렸다. 허일구의 말처럼 그곳엔 일 장 높이의 동굴 입구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일행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계곡보다 더 어두웠다. 일행은 천리지청술을 펼쳐 주변을 경계하며 전진했다. 동굴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조금씩 넓어졌다. 일 장에 달했던 폭이 어느새 이 장 너비로 넓어져 있었다.

[ 할아버지, 동굴이 너무 깊어요.]

주변을 둘러보는 남궁운화의 얼굴에 약간 불안한 빛이 어렸다. 인공이 가미된 흔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동굴이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게다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어둠처럼 슬금슬금 밀려왔다.

[ 불안한 모양이구나.]

[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여기서 멈.....]

“ 조심해요!”

남궁운화는 오른손을 뿌리며 소리쳤다.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예기가 날아온 것이었다.

퍼억!

앞쪽에서 둔탁한 소성이 들려왔다.

남궁운화는 빠르게 검을 뽑아 전방을 향해 뿌리듯 휘둘렀다. 그녀의 검 끝에서 푸른색 검탄 강기가 쏘아져 어둠을 뚫었다.

“ 커억!”

나직한 비명이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 조심해요!”

남궁운화는 재차 검을 뿌리며 소리쳤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 이런!”

남궁운화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밀문수호대 대원들의 비명이었던 것이다.

“ 여긴 할아버지가 맡으세요.”

남궁운화는 뒤편으로 몸을 날렸다.

파앗!

바로 그 순간, 앞과 뒤에서 횃불이 밝혀지며 동굴 안이 환해졌다.

“ 으음!”

남궁운화는 신음을 흘렸다. 동굴 앞과 뒤쪽이 패천림 무인들로 들어차 있었다.

“ 우린 너희들은 죽이고 싶지 않구나.”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패천림 무인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학창의를 걸친 노인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 당신은?”

남궁운화의 눈이 커졌다. 놀랍게도 앞으로 걸어나온 사람은 승천비고에 있었던 천유였다.

“ 허허허!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많은 발전이 있었구나.”

남궁운화를 보는 천유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승천비고로 들어왔을 때만 해도 다른 잠룡들에 비해 한참 부족했다. 그런데 지금의 남궁운화는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자가 돼 있었다.

“ 좋은 스승님들을 많이 만났어요.”

“ 연우강도 스승의 한 명이더냐?”

“ 가장 많은 걸 배운 사람이 그예요.”

“ 그랬구나.”

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승천비고에서 처음 보았을 때 범상치 않은 녀석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하지만 녀석이 강호무림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인물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연우강의 그림자는 대야벌의 벌주인 담대만승보다 더 크다. 문득 자신들은 힘겨운 자를 적으로 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우릴 잡아가실 건가요?”

남궁운화는 창궁검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때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할 때도 있단다. 지금이 그런 경우 같구나.”

“ 그렇게 해서 잡은 권력이 오래갈 거라고 보세요?”

“ 권력은 지키기 나름이란다.”

“ 아니에요. 할아버지.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조건에는 실력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명분이에요. 누군가를 잡아서 협박하거나, 비겁한 수단을 사용해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오래 가지 못해요.”

“ 우리도 그럴 거란 말이냐?”

“ 그건 두고 봐야겠죠.”

남궁운화는 벽을 향해 창궁검을 던졌다. 그녀의 손을 떠난 창궁검이 벽 깊숙이 파고들어 갔다.

“ 운화야!”

옆에 있던 창노가 남궁운화를 불렀다.

“ 지금은 검을 버려야 할 때에요. 할아버지.”

물론 창룡을 얻었으니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허일구는 물론이고 밀문수호대 대원 전부는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혼자 도망칠 수는 없었다.

“ 저들이 우리를 잡으려고 하는 목적을 모르느냐?”

“ 연 공자를 잡기 위해서란 말이에요?”

“ 물론이다.”

대답은 천유가 했다.

“ 그래서 검을 버린 거예요. 천유 할아버지.”

“ 그래서 검을 버렸다고?”

“ 만일 연 공자가 아니고 제 할아버지나, 남궁세가를 노리고 우릴 잡으려고 했다면 난 여기서 목숨을 걸었을 거예요. 그럼 천유 할아버지 정도는 저승으로 데려갈 수 있겠죠. 하지만 천유 할아버지가 노리는 상대가 연공자라면 달라져요.”

“ 어떻게 달라진단 말이냐?”

“ 기다리면 데리러 올 텐데 굳이 모험할 이유가 없죠.”

“ 넌 여자다.”

“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 그렇다.”

“ 난 여자이기 전에 남궁세가 가주예요. 지금 패천림에서는 남궁세가 가주를 핍박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 남궁세가는 은과 원은 확실하게 구분하는 가문이고요.”

“ 그렇구나.”

천유는 감탄한 얼굴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그녀는 더 이상 나약한 여자가 아니었다. 남궁세가의 당당한 가주엿다. 공연히 남궁세가를 끌어들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그렇다고 해도 난 너를 놓아줄 수가 없구나. 우선 제압부터 해야겠구나.”

“ 그래야겠죠.”

남궁운화는 일행에게 눈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향노 일행은 일제히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포위하고 있던 패천림 무인들이 지풍을 쏘아 남궁운화 일행의 내공에 금제를 가햇다.

“ 윽!”

내공을 끌어올릴 수 없게 된 남궁운화는 비틀댔다. 지고 있던 사망궤가 엄청난 무게로 짓누른 것이었다.

“ 그게 묵사인 모양이구나.”

천유는 사망궤 아래쪽에 걸려 있는 검은 색 검을 지그시 보았다.

“ 네.”

남궁운화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사망궤를 내려놓고 묵사를 들어올렸다.

“ 궤짝은 제가 들겠습니다.”

밀문수호대 대주 철호는 사망궤를 걸머졌다. 그를 지켜보던 남궁운화는 다시 천유를 보았다.

“ 묵사는 가져가야겠죠?”

그녀는 천유를 향해 묵사를 던졌다.

“ 보물을 너무 쉽게 버리는 것 같구나.”

“ 잠시 맡겨두는 거예요. 그보다 계속 이렇게 있을 거예요?”

“ 잠시만 기다리거라.”

천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굴 입구에서 패천림 무인 두 명이 들어왔다. 그들의 어깨 위에는 계곡 입구에서 감시하고 있던 장일선과 유정일이 늘어져 있었다.

“ 우리가 패천림 무인을 추격해 온 사실을 알고 있는 하오밀문 무인은 수백 명이 넘어요.”

“ 완전하게 숨기고 싶은 생각은 없다.”

“ 우리를 잡아가는 걸 숨기려는 게 아니라 동굴 입구를 숨길 셈이군요.”

“ 바로 맞혔다. 그만 가자꾸나.”

천유는 일행 앞으로 나갓다. 그런데 그가 걸어가는 곳은 동굴 입구가 아니라 안쪽이었다.

“ 과거에 만들어진 곳인가 보죠?”

좌우를 둘러보던 남궁운화는 천유에게 말을 걸었다.

동굴 입구 쪽과는 달리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인공이 가미된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하지만 그 흔적들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들이 아니었다. 족히 수백 년은 돼 보였다.

“ 눈썰미가 예리하구나.”

“ 전에 저런 것들을 본 적이 있거든요.”

“ 어디서 봤단 말이냐?”

“ 과거 밀천 총단이었던 동정호 지하에서 봤어요. 동굴을 만든 기술이 비슷하네요. 저건 배수로일 거예요.”

남궁운화가 주목한 곳은 동굴 아래쪽 가장자리였다.

좌우측 가장자리에는 폭과 깊이가 두 치 남짓한 홈이 파여 있었다. 동정호 지하 동굴에도 저런 홈이 있었다. 연우강은 벽을 타고 흐르는 물을 배출하기 위한 배수로라고 하였다. 그 홈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 허허허! 네가 나보다 낫구나. 난 의미없이 봤는데.”

천유는 놀란 눈으로 동굴 가장자리에 나 있는 홈을 보았다. 설마 그 홈이 배수로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이곳을 만든 사람은 누구죠?”

“ 천오백 년이 넘은 곳인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 그럼 영세오천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말이군요.”

“ 그런 셈이란다.”

“ 탈출하려면 자세히 살펴야겠네요.”

남궁운화는 꼼꼼히 동굴을 살피며 천유를 따랐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녀는 포기하고 말았다. 동굴을 나서서 숲을 걷다가 또다시 동굴로 들어가는, 그런 과정을 쉴 새 없이 겪고 나자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그것조차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나이 밝았을 때는 태양을 모며 방향을 가늠하곤 했는데, 어두워지자 그것마저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게 천유를 따라 이동하던 남궁운화 일행은 널따란 광장과 맞닥뜨렸다. 광장은 엄청나게 넓었다. 천장에 촘촘하게 박힌 야명주는 이곳이 지하라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마치 보름달이 뜬 밤 같았다. 광장을 중심으로 십 자 형태로 동굴 길이 나 있었다.

“ 수고하셨습니다.”

광장 앞쪽 석문이 열리고 중년인 한 명이 걸어나왔다.

‘ 유.’

남궁운화는 내심 중얼거렸다.

백색의 학창의를 걸치고 있는 그는 승천비고 수장이었던 신유의 제자 유였다.

“ 수고는 무슨. 다른 쪽은 어떻게 됐는가?”

“ 별다른 일 없이 마쳤습니다.”

‘ 응?’

남궁운화의 눈에 반짝 이채가 서렸다.

천유의 말투 때문이었다. 전에 승천비고에 있을 때 천유는 유에게 말을 내렸다. 그런데 지금은 반공대를 하고 있다. 과거에 사부였던 자가 제자에게 반공대를 하는 경우는, 제자가 상전이 됐을 때 한 가지밖에 없다.

‘ 두고 보면 알겠지.’

남궁운화는 깊은 눈으로 유를 보았다.

우연이었을까. 유의 시선과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 천단모용세가에 오신 걸 환영하오. 남궁가주.”

유는 빙그레 웃으며 남궁운화 일행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 모용세가라고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모용이란 성씨를 들어보았지만 그들이 무림세가를 이뤘다는 말은 금시초문이기 때문이었다.

“ 수백 년 전에 멸문한 가문이니까 굳이 기억하려고 애쓸 필요 없소. 아무튼 협조해 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이다.”

일행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짓는 유는 고개를 돌려 방금 그가 나왔던 석문을 보았다. 그러고는 나직이 소리쳤다.

“ 장 노!”

유의 외침에 안에서 검은 옷을 걸친 노인이 몸을 날려왔다.

그는 패천십관 중 패천오관을 담당했던 금강역사 장육철이었다.

“ 하명하시게, 천주.”

“ 이들을 금옥에 투옥하도록 하시오.”

“ 알았소이다.”

장육철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부하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 가자.”

주변에 있던 패천림 무인들이 살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질문해도 돼요?”

남궁운화는 유를 보며 물었다.

휙!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장육철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짝!

“ 아악!”

남궁운화는 비명과 함께 옆으로 넘어갔다.

만일 바로 옆에 향노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바닥으로 처박혔을 것이다. 그 정도로 장육철의 손길은 매서웠다.

“ 무슨 짓이오?”

남궁운화를 부축한 향노는 장육철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 저분은 패천의 천주님이다.”

“ 그가 천주라면 난 남궁세가의 가주에요. 장 노인.”

향노의 품에서 벗어난 남궁운화는 장육철을 빤히 쳐다보며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 건방진 계집!”

장육철은 오른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 상대를 점혈한 다음에 공격하는 그런 치사한 짓으 하는 자들이 천하를 노린다면 세상 사람들이 비웃어요!”

“ 네가 우리 손에 잡힌 걸 세상 사람들이 알 거라고 생각하느냐?”

장육철은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 이번엔 좀더 내공을 실은 듯 그의 손에서 투명한 기운이 일렁였다.

“ 그 세상 사람들 속엔 장 노인도 포함된다는 걸 모르는군요. 자신에게 당당하지 못한 자는 절대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없어요. 그걸 모른다면 당신은 오가는 상인을 터는 산적이나 다름없고요.”

남궁운화는 장육철을 빤히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 계집!”

장육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하지만 그는 손을 휘두르지 못했다.

“ 하하하! 프! 하하하! 으! 하하하!”

느닷없이 유의 입에서 앙천광소가 터져 나왔다. 처음엔 단순한 웃음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그의 웃음에 점차 내력이 실리기 시작하더니 지하 광장 전체가 지진이 난 것처럼 우르르 떨렸다. 사방에 금이 쩍쩍 가고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 커억!”

“ 크윽!”

“ 아악!”

남궁운화, 향노 그리고 허일구는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급기야 세 사람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꾸역꾸역 피를 토해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퍼억! 퍽! 퍽!

“ 아악!”

“ 크아악!”

세 사람 뒤편에 있던 밀문수호대 대원들의 머리가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뚝!

웃음을 그친 유는 여전히 피를 토하고 있는 남궁운화 일행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유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피, 그리고 붉은색.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방으로 흩어진 뇌수와 피를, 마치 음식의 맛을 판별하려는 미식가처럼 음미했다. 한동안 그렇게 있다가 시선을 돌려 남궁운화를 보았다.

남궁운화는 멍한 얼굴로 밀문수호대 대원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해혈을 제압당해 내공을 끌어올릴 수 없다고 하지만 저들은 무인이다. 그런데 단지 웃음소리에 일곱 명의 머리가 폭죽처럼 터져 버린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와 유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 난 누군가가 내 앞에서 주제넘는 짓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남궁 가주. 몸조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활짝 미소를 지은 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몸을 돌렸다.

‘ 아 악마!’

남궁운화는 내심 중얼거렸다.

무인은 살인에 익숙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적을 죽인 다음에 웃는 자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기쁨의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적을 죽인 사실보다는 삶의 환희로 가득한 웃음.

그런데 유는 달랐다.

그는 수개월 동안 그림을 완성한 화가가 제 작품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는 그런 웃음을 짓고 있다. 살인 자체를 즐기지 않으면 그런 웃음을 지을 수는 없다.

살인 자체를 즐기는 자들은 적의 생사여부보다는, 죽음 직전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직접적인 사인이 뭐였는지 하는 것들에 더 집착한다. 즉 결과보다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을 일컬어 마인이 아닌 악인이라 부른다.

그런데 유의 행태가 그랬다.

“ 일어나라!”

장육철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남궁운화와 향노를 비롯한 하오밀문 무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장육철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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