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작은 선물.
유는 흡족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밖으로 나가기 전 그는 오늘 패천으로 들어온 손님으로 인해 약간 흥분한 상태였다.
그래서 웃음소리에 내기를 실어 하오밀문 문도들을 살해 했다. 물론 최고의 인질인 남궁운화와 향노, 그리고 허일구는 영향을 적게 받도록 내기를 조절했다.
“ 좋군.”
유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그를 기쁘게 하는 건 살인이 아니라 붉은 피였다. 시체에서 콸콸 쏟아지는 붉은 피를 보노라면 들뜬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복잡하게 뒤엉킨 실타래를 풀어낸 듯 시원해진다.
어린 시절에도 그랬다.
무공을 익히다가 막힌 부분이 있으면 고양이를 데리고 나갔다. 가죽을 벗겨내고, 그 안에 감춰진 근육을 살피고, 근육 안에 숨겨진 장기를 보노라면 복잡했던 머릿속이 명경지수처럼 맑아지곤 했다.
“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
거처에 당도하자 경계를 서고 있던 자가 고개를 숙이며 석문을 열어주었다.
“ 손님은?”
유는 사내를 보며 물었다.
“ 신유 어르신과 차를 마시고 계십니다.”
“ 알았다.”
유는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에 있지만 석실 안쪽은 여느 가정집과 다르지 않았다. 회의 장소로 이용하는 널따란 대전이 있고, 그 안쪽엔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이 있다.
석벽과 천장에는 나무판을 대 딱딱한 느낌을 없앴고, 바닥엔 양탄자를 깔았다. 대전 중앙에는 커다란 탁자가 놓였고, 벽면엔 서가와 벽난로가 있다.
물도 풍족하다. 식수는 지상에서 끌어오고, 목욕은 온천수를 이용한다. 오십 장 아래 지하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부족함이 없다.
“ 정말 대단해!”
유는 감탄한 얼굴로 대전을 가로질렀다.
천오백 년 전에 이런 엄청난 구조물을 만들어낸 그녀는 천수귀장이라고 불렸던 혁미월이었다.
물론 그녀가 전적으로 건설한 것은 아니다.
천수귀장 혁미월이 공사를 맡은 부분은 이곳 전체의 사 할 가량이다. 나머지 육 할은 모영세가인들이 건설했다. 하지만 그녀의 설계가 아니었다면 이런 엄청난 규모의 지하 세계를 건설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전 끝에는 석문이 아닌 나무문이 달려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다향이 끼쳐왔다.
응접실 중앙에는 둥근 탁자를 사이에 두고 신유와 여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 큭!’
유는 내심 웃음을 터뜨렸다.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난 옷을 걸친 여자 두 명은 북해빙궁의 궁주 수나인과 그의 딸 수정이었다.
“ 호호호! 바쁘신 모양이네요. 천주.”
수나인은 활짝 웃어 보였다.
“ 잠깐 여흥을 즐기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갸니는 잘 되고 있습니까?”
유는 빈자리로 앉으며 신유를 보았다.
“ 강남을 달라고 하였네.”
“ 호호호! 꼭 강남이 아니라도 상관은 없어요. 다만 그에 준하는 지역을 달라는 거지요.”
수나인이 말을 받았다.
“ 강남, 강북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궁주의 말을 믿을 수 있냐는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궁주 생각은 어떻습니까?”
유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 그래서 이걸 가져왔어요. 천주.”
수나인은 품속에서 둘둘 말린 천을 꺼내 내밀었다. 붉은색 비단으로 돼 있는 그것은 한 배를 타겠다는 맹세를 적은 연판장이었다.
유는 연판장을 펼쳤다.
연판장에는 북해빙궁, 대막의 새외귀막, 남만독존궁, 서장의 포달랍궁, 청해천종림의 다섯 문파 지존의 이름이 적혀있고, 이름 옆에는 장인이 찍혀 있었다.
“ 그럼 남은 세력은 북천지옥부, 막북혈마성, 해남남십자성 세 곳이군요.”
“ 해남남십자성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북천지옥부나 막북혈마성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지요.”
“ 그렇게 따지면 북천지옥부와 막북혈마성만 남는다는 말이군요.”
“ 그래요. 천주. 천주가 마음만 먹으면 변황을 손아귀에 넣을 수가 있어요.”
“ 변황을 손아귀에 넣는 사람은 내가 아니고 궁주겠지요.”
“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신유 저분과 이야기를 끝냈어요.”
유는 고개를 돌려 신유를 보았다.
[ 딸을 이곳에 두고 가겠다고 하였네.]
신유의 혜광심어가 들려오자 유는 수나인의 딸 수정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머리카락은 검었지만 얼굴이며 몸매는 중원 여인과 한참 달랐다. 마치 벽안미녀가 검은 머리를 하고 있는 듯 묘한 매력을 지닌 여자였다.
[ 수나인은 큰딸인 수여설은 병적으로 싫어하지만 수정은 지극 정성으로 키웠네. 지금 수정 신분은 북해빙궁의 차기 궁주네.]
[ 그럼 믿어도 되겠군요.]
고개를 끄덕인 유는 다시 수나인을 보았다.
“ 원하는 거라도 있습니까?”
“ 북천지옥부와 막북혈마성을 칠 무인이 필요해요.”
“ 이 연판장에 보면 다섯 문파가 연합한 걸로 나와 있는데 내가 잘못 본 겁니까?”
“ 우리가 힘이 부족해서 무인을 지원해 달라고 하는 걸로 보는 모양이네요?”
“ 아닙니까?”
“ 그건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건 선봉에 설 무인이에요.” 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생각해 “ 선봉에 선다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 변황에서 북천지옥부는 단순한 무림 세력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에요.” 의 공기와 같 “ 변황인들은 북천지옥부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있다는 말이군요.”
“ 그렇죠. 공격 명령이 떨어진다고 해도 쉽게 북천지옥부를 향해 달려가지 못해요. 하지만 누군가 먼저 시작하면 달라지죠. 앞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비명이 들러오기 시작하면 변황 무인들도 북천지옥부를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어요.”
“ 그 시작을 우리가 해달라는 말이군요.”
“ 가능하겠어요?”
“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 삼백 정도면 될 것 같아요.”
“ 알았습니다. 궁주 지원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유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을 붙이는 역할이라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 우린 앞으로 좋은 동료가 될 것 같네요. 이왕이면 전에 만난 적이 있는 분을 보내주셨으면 좋겠군요.”
“ 제 노야를 보내달라는 말입니까?”
전에 수나인을 만난 사람은 제천강이었던 것이다.
“ 아무래도 안면이 있는 분이 일하기 편할 테니까요.”
“ 알았습니다. 제 노야께 말은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 알았어요.”
활짝 웃는 수나인의 눈동자에 열기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그것은 누군가와 뜨거웠던 관계를 떠올릴 때 나타나는 욕정의 눈빛이었다.
“ 나도 여기에 서명을 해야겠군요.”
유는 조금 전 받았던 연판장을 가리켰다.
“ 맨 위쪽은 비워두었어요. 천주.”
“ 철저하시군요.”
유는 빙그레 미소를 지엇따.
“ 좀 쉬고 싶네요. 천주.”
“ 알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유는 손바닥을 가볍게 쳤다. 그러자 안쪽 문이 열리고 시비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 두 분을 객실로 모시도록 해라.”
“ 알겠습니다. 천주님.”
두 시비는 유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수나인과 수정 옆으로 가 섰다. 그러자 수나인과 수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나중에 뵙지요.”
수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시비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 묘하군.’
유는 기묘한 율동을 보이는 수정의 엉덩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여자의 몸을 보며 어떤 느낌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꽉 조인 옷을 입어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난 수정의 엉덩이를 보자 공연히 답답증이 생겼다. 저 옷을 찢어 엉덩이를 해방시켜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미인이구먼.”
수나인과 수정이 문 안쪽으로 모습을 감추자 신유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 누구말입니까?”
“ 수정이라는 처자 말이네. 올해 스물여섯 살이라고 하더구먼.”
“ 젊군요.”
“ 천주도 아직 젊네.”
“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유는 정색한 얼굴로 신유를 보았다.
“ 그냥 그렇다는 말이네.”
신유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노망나셨군요.”
“ 허허허! 노망이라도 났으면 좋겠구먼. 그럼 홀아비로 늙어 죽는 제자 꼴은 보지 않아도 될 거 아닌가?”
“ 그러다 정말 노망드십니다. 그보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뭘 말인가?”
“ 팔황새를 말하는 거지 뭐겠습니까?”
“ 다섯 문파를 완전히 장악하진 못했겠지만 적어도 수뇌들은 손을 잡기로 한 것 같네.”
“ 믿어도 된다는 말이군요.”
“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수정은 수나인이 가장 총애하는 딸이네.”
“ 좋습니다. 믿겠습니다.”
“ 정 아니다 싶으면 버리면 되니까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네.”
“ 그런데.....”
유의 얼굴이 슬쩍 찌푸려졌다.
“ 왜 그러는가?”
“ 그녀의 요구가 마음에 걸립니다.”
“ 제천강을 보내달라고 한 걸 말하는 건가?”
함께 대야벌을 나왔고, 천마 제석강을 모시고 있지만 비고를 담당했던 이들과 패천림 무인들과의 사이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미묘한 반목이 존재한다.
그 반목의 빌미를 제공한 사람은 다름 아닌 천마 사조였다. 만일 천마 사조께서 천등십관을 지켜왔던 제천강을 후계자로 지목했다면 반목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천마 사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유에게 일백마의 지휘권을 준 것이다. 비록 임종을 지키는 임무이긴 했지만 일백마는 천마 사조의 지인이라고 할 수 있다. 지인의 임종을 지키라는 임무를 줬다는 것은 곧 후계자로 지목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한 배경 때문에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는 천마 사조의 후계자가 돼, 새롭게 탄생한 패천의 천주 자리에 올랐다.
제천강으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천강이 말없이 따른 것은 패천의 주인은 여전히 천마 사조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유는 그 점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 그렇습니다. 제 노야는 겉으론 우릴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심까진 아닐 겁니다.”
“ 기회가 나면 천주 자리를 넘볼 거란 말인가?”
“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 우리가 중원의 주인이 될 때까지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네.”
“ 그럴 거라고 보십니까?”
“ 제천강이 원하는 건 중원의 천주이지 패천의 천주가 아니질 않은가. 크게 걱정할 필욘 없을 것 같네.”
“ 그렇군요.”
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아무튼 이번에 우린 큰일을 하나 처리한 셈이 됐네.”
“ 신유는 빙그레 웃으며 차를 들이켰다.
“ 전 가끔 그런 생각이 듭니다.”
“ 내가 연우강을 너무 높게 평가한다는 생각 말인가?”
“ 그렇습니다.”
사실 팔황새와 연합을 시도하고 남궁운화를 비롯한 하오밀문 일행을 생포해 온 것은 신유 때문이었다.
신유는 연우강의 약점을 틀어쥐지 못하면 설사 중원의 주인이 된다고 해도 반쪽에 불과할 거라고 하였다. 과연 연우강이 이중 삼중으로 경계할 만한 그런 자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 나이를 먹게 되면 상대방의 얼굴만 봐도 어떤 사람인지 대충 파악이 된다는 걸 아는가?”
“ 저도 나이가 오십입니다. 사부.”
“ 그럼 연우강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는가?”
“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습니다.”
“ 바로 그 점 때문이네. 녀석은 그날 처음 보는데도 나와 천유에게 반말을 했네. 누군가 내게 반말을 하게 되면 건방지다거나 오만하게 보여야 하는데, 나는 물론이고 천유조차도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네. 아니, 녀석이 그렇게 말하는 걸 당연하다고 느꼈다는 게 더 정확할 거네.”
“ 정말이십니까?”
유는 깜짝 놀랐다.
사부가 연우강을 극찬하기에 대야벌 각 문파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 때문에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사부가 연우강을 경계 대상 일호로 지목한 것은 바로 첫 만남 때 받았던 느낌 때문이었던 것이다.
“ 그렇네. 천주. 백여 년 이상을 살아왔지만 내게 그런 느낌을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네. 아직도 그때 녀석과 나눴던 대화가 생생하게 기억나네. 우리가 최종적으로 상대해야 할 적은 담대만승이나 나천후가 아니라 연우강이네.”
신유가 대야벌을 나오고 난 후 가장 먼저 팔황새를 분열시키기로 한 것은 연우강 때문이었다.
“ 이제 연우강은 팔황새라는 날개를 잃은 셈이 됐네. 날지 못하는 새를 원하는 장소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모이만 있으면 되는데 우린 남궁운화라는 멋진 모이를 준비해 두었네.”
“ 그 모이로 연우강을 조정하면 된다는 말이군요.”
“ 물론이네.”
“ 통할 거라고 보십니까?”
“ 글쎄 그건 두고 봐야겠지.”
신유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물렸다.
“ 그건 그렇고 사조는 뭐 하십니까?”
“ 가볼 곳이 있다면서 나갔다고 하더구먼.”
신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신유가 천마 제석강의 근황을 알게 된 건 하루 전이었다. 며칠 동안 그가 보이지 않아 처소를 찾아갔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천마 사조는 보이지 않았다.
천마 사조의 수발을 드는 시녀를 찾아 행선지를 물었다. 하지만 그녀도 천마 사조의 행선지를 알지 못했다. 대신 놀라운 말을 해주었다.
한 달 전 다급한 얼굴로 신발도 신지 않고 뛰쳐나갔다는 것이다. 물론 행선지도 밝히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상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보통 사람도 아니고 그는 천오백 년 전 인물이고 무의 끝을 본 사람이 아닌가. 그런 그가 다급한 얼굴을 했다는 것도 이상할뿐더러, 신발도 신지 않고 뛰쳐나갔다는 건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시비를 다그쳤는데 천마 사조가 뛰쳐나가기 직전 유를 만났다고 하였다.
아니, 유와 대화 중에 밖으로 뛰쳐나왔다고 했다. 그 말은 결국 천마 사조가 급하게 나가야 할 빌미를 제공한 사람이 유란 말이 된다. 그런데 유는 전혀 모른 척 천마 사조의 행선지를 묻고 있다.
“ 아직 돌아오지 않았답니까?”
“ 천주는 그분의 행선지를 알고 있는 것 같구려.”
신유는 섭섭한 얼굴로 말했다.
“ 그분이 그곳으로 갈 줄은 나도 몰랐습니다.”
“ 그곳이라면 어디를 말하는가?”
“ 옛 연인을 만나러 갔습니다. 아무튼 별일 없을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유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옛 연인?”
“ 저도 좀 쉬어야겠습니다.”
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말해 주지 않을 참인가?”
신유는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 내가 함부로 발설할 수 있는 그런 사안이 아닙니다.”
“ 그분의 사적인 일이란 말인가?”
“ 그렇습니다. 사부. 하지만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린 고금제일인보다 더 강한 우군을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유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 고금제일인보다 더 강한 우군이라면?”
여전히 모를 말이었다.
유가 말한 고금제일인은 천마 제석강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강한 무인이라니. 신유는 의아한 얼굴로 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사부게만 말한 겁니다. 당분간 비밀로 해주십시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유는 몸을 돌렸다.
“ 작전은 어떻게 할 건가?”
신유는 밖으로 나가는 유를 보며 물었다.
고금제일인보다 더 강한 무인이란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는 야궐과 밀천 무인들에 대한 처리가 우선이었다.
“ 계속 이어가야지요.”
“ 연우강은 어디 있을 거라고 보는가?”
“ 야궐 아니면 밀천에 숨어들어 있겠지요. 아무튼 그 친구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일정대로 진행해 주십시오.”
“ 알았네.”
신유는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문득 연우강을 처음 보던 날 그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 버릇없는 말투가 거슬린다는 거요?
- 잘 아는구나.
- 군에 있을 때 정천호였는데 그때 말투가 아직 남아 있어 그런 거니까 이해해 주시오. 나도 고치고 싶은데 쉽지가 않소이다.
- 고치려고 노력은 해보았느냐?
- 말투 때문에 아직 불편함을 겪은 적은 없소이다.
- 듣는 나는 불편하구나.
- 정천호는 천이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오. 영감. 그 부하들 중에는 환갑이 다 된 노인네들도 있었소. 그들이 내 앞에서는 어땠는지 아시오?
- 고개도 못 들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냐?
- 고개를 못드는 건 고사하고 내 그림자도 밟지 못했소.
- 넌 지금 정천호가 아니다. 연우강.
- 그래서 영감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대등한 위치로 대화를 할 수 있는 거 아니오.
“ 내가 준비한 작은 선물이다. 연우강.”
내심 중얼거리는 신유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바로 그 시각.
작은 선물이 된 남궁운화 일행은 서로를 부축한 채 장육철을 따라 동굴 길을 걷고 있었다.
동굴 길은 엄청났다.
남궁운화는 마치 개미집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동굴 같은 직선으로 나 있는 곳이라고 해도 삼십 장을 넘지 않았다. 그리고 꺾인 부분과 맞닥뜨리면 어김없이 석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장육철이 석문을 여는 방법은 간단했다.
석문 앞에 바짝 붙어서면 자동으로 문이 열려 일행을 석문 안쪽으로 이동시켜 주었다.
남궁운화는 그런 석문을 이미 겪어보았다. 과거 동정호 지하에서 석문을 통과할 때 이와 같은 방법을 썼던 것이다.
거의가 비슷비슷하여 기억한다고 해도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남궁운화는 주변 전경을 머릿속에 담아두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반 시진 정도를 걷고 나자 비로소 장유걸이 걸음을 멈췄다. 그가 멈춰 선 곳 앞에는 거대한 석문이 버티고 있었다. 앞을 가로막은 석문은 지금껏 보았던 석문의 두 배 크기였다.
장육철은 석문 바로 앞에 가 섰다.
그르릉!
육중한 소리와 함께 석문이 천천히 돌아갔다.
남궁운화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석문 또한 여는 방식은 지금까지 거쳐왔던 곳과 같았던 것이다.
“ 들어가라!”
장육철의 말이 떨어지자 일행은 안으로 들어갔다.
살아남은 인원은 열 두 명이다.
호북 지부장 유불리를 비롯하여 열세 명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일행이 안쪽으로 들어가자 석문은 천천히 닫혔다.
남궁운화는 전면을 보았다.
안쪽은 구름이 잔뜩 낀 날 밤처럼 전체적으로 어슴푸레했다. 상당히 넓은 곳인 듯 반대편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시선을 끌어당겼다. 일행이 서 있는 공간 앞쪽에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 있었다.
남궁운화는 그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계단의 수를 세어보았다. 계단은 전부 백팔 개였다.
“ 괜찮으냐?”
향노가 계단 아래쪽에 선 남궁운화를 보며 물었다. 그의 얼굴엔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차라리 천유와 싸워볼걸 그랬나봐요.”
남궁운화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 그래도 절반은 살아남지 않았느냐. 네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향노는 위로의 말을 했다.
“ 어르신 말이 맞다. 운화야. 난 오히려 네게 미안하구나. 내가 밀문수호대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 그건 아니에요. 할아버지. 비록 제가 강해졌다고 하지만 아직은 천유 그자의 상대는 아니에요. 저 혼자였다고 해도 빠져나갈 순 없었을 거예요.”
“ 그자가 그렇게 강하단 말이냐?”
허일구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천유가 강하다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궁운화가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 그래요, 할아버지. 만기팔유 중 신유 다음으로 강한 자가 천유에요. 그는 최소한 이기어검술을 펼치는 강자에요.”
“ 이기어검술이 최소한이란 말이냐?”
더욱 놀라운 말이었다. 이기어검술을 최소한의 무공이라면 심검을 익히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 그런데 더 무서운 자는 천유가 아니라 유, 그자였어요.”
“ 유가 천유보다 더 강하단 말이냐?”
“ 그는 웃음으로 우릴 다 죽일 수도 있었어요.”
“ 우리 중 일부만 골라서 살수를 썼다 말이구나.”
“ 목소리에 살기를 실어 누군가를 없애는 건 이기어검술 경지에 오른 고수라면 가능해요. 하지만 누군가를 골라서 해친다는 건 불가능해요.”
“ 그럼?”
“ 그는 지금껏 제가 본 자들 중 가장 강자였어요. 게다가 ....”
남궁운화는 말끝을 흐렸다.
“ 게다가?”
“ 살인을 즐기는 자이고요.”
유의 성격을 표현하는 가장 적당한 말이었다.
“ 살인을 즐기는 자라고?”
“ 네.”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패천림은?”
“ 원래부터 패천림에는 강자가 많았잖아요. 아무튼 그것보다 여기가 어딘지 그것부터 알아야겠어요.”
남궁운화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변은 너무 어두워서 사물을 구분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철호 앞으로 걸어갔다.
“ 내려 놓을까요?”
“ 네.”
남궁운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철호는 사망궤를 내려놓았다. 남궁운화는 뚜꺼응ㄹ 열고 안에서 야명주를 꺼냈다. 그러자 주변이 약간 더 환해졌다.
“ 일단 주변을 살피도록 하세요. 두 명이 한 조를 이루고 다시 모이는 장소는 이곳으로 하기로 해요.”
그녀는 뚜껑을 닫고 그 위에 야명주를 놓았다.
“ 알았습니다.”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남궁운화는 향노와 함께 몸을 날렸다.
그녀와 향노가 처음 간 곳은 광장 가장자리였다.
광장 가장자리는 지금껏 지나왔던 동굴과는 달랐다. 이끼가 잔뜩 낀 벽에서는 인공이 가미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래쪽에 배수로로 보이는 작은 홈만 다른 동굴과 같았다.
“ 어딜까요?”
남궁운화는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며 물었다.
십여 장 상공은 온통 안개로 휩싸여 있어, 이곳이 지하인지 아니면 수직 동굴인지 알 수가 없었다.
“ 낸들 알겠느냐.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 종남산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거요?”
“ 그렇지.”
향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응?”
걸음을 옮기던 남궁운화가 우뚝 멈췄다.
문득 따뜻한 기운이 흘러들어 온다는 기분이 들엇다. 그녀는 조심스레 벽면의 이끼를 걷어냈다. 그러자 그녀 앞에 직사각형으로 그어진 선이 나타났다.
“ 석문이네요.”
남궁운화는 직사각형 가장자리를 손으로 밀며 말했다.
“ 지금 뭐하는 거냐?”
“ 한번 밀어봤어요.”
남궁운화는 손을 탁탁 털며 자리를 옮겼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몇 개의 석문을 더 발견했다. 하지만 공동 가장자리에 나 있는 석문 말고는 특별한 구조물은 없었다.
두 사람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 여기 글이 있습니다.”
그때 중앙으로 갔던 철호가 소리쳤다.
남궁운화와 향노는 철호가 있는 중앙으로 걸어갔다.
“ 무슨 글이죠?”
철호 곁으로 다가간 남궁운화가 물었다.
“ 바닥에 쓰여 있습니다.”
철호의 말에 남궁운화는 바닥을 보았다. 그곳에는 글자 하나 크기가 반 장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의 글이 씌어 있었다.
“ 이건 전서첸데......”
바닥에 쓰인 거대한 글은 연우강이 인장에 쓰면 딱 좋다고 하였던 고대어였다.
“ 읽을 줄 아느냐?”
향노가 물었다.
“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저었다.
“ 제가 압니다.”
뒤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궁운화는 고개를 돌렸다. 글자를 안다고 한 사람은 밀문수호대 부대주 호악귀 군인걸이었다.
“ 전에 인장 파는 일을 좀 했습니다.”
“ 그랬군요. 이건 뭐라고 읽는 거죠?”
“ 이 글자는 음 잡니다.”
“ 그럼 중간에 있는 글자는요?”
남궁운화는 자리를 옮기며 글자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 그건 양 잡니다.”
“ 맨 끝에 있는 건.......”
“ 뇌 라고 합니다.”
“ 그럼 전부 합치면 음양뢰가 되는 건가요?”
“ 네.”
군인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 무인이 쓴 글 맞죠?”
남궁운화는 향노를 보며 물었다. 글자의 깊이는 무려 한 자에 달했다.
“ 그런 것 같구나. 이 정도를 쓰려면 심검의 경지에 올라야 하는데.....”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고 보면 과거의 무인들이 훨씬 강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 세월이 흐를수록 무공이 강해진다는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는 말이구나.”
“ 네.”
“ 절반만 맞는 말이다.”
“ 절반만 맞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 결국 무공이라는 것도 인간이 펼친다는 뜻이다.”
“ 그러니까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능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단 말인가요?”
“ 그렇지. 무공을 익히는 방법은 다양해지고, 강한 무공이 많이 창안되긴 했지만 무공의 끝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 기술이 발달하는 것과는 다르단 말이군요.”
“ 그렇지.”
향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겠네요. 이쪽으로 모여보세요.”
남궁운화는 하오밀문 무인들을 불렀다. 허일구를 비롯한 하오밀문 문도들은 남궁운화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이에요. 궤짝 안에 육포가 잔뜩 들어 있긴 하지만 이곳에 언제까지 갇혀 있을지 알 수가 없어요. 주변을 살피며 최대한 먹을 게 있는지 확인하세요.”
“ 알겠습니다. 가주님.”
하오밀문 무인들은 우렁차게 소리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오밀문 문도들이 멀어지자 남궁운화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했다.
“ 혈도를 풀어볼 참이냐?”
“ 풀지 못하면 남궁세가의 가주가 아니죠.”
그녀는 싱긋 웃으며 눈을 감았다.
‘ 녀석!’
향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지금 자신들의 입장은 최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현 상황을 직시하면서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다. 어느새 그녀는 나약한 소녀가 아니라 수백 식솔의 목숨을 책임진 남궁세가의 가주가 돼 있었다.
‘ 나도 풀어야지.’
남궁운화를 지켜보던 향노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