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62화 (162/232)

제 6장 인연

“ 허를 찔렸군요.”

유는 침음성을 흘렸다.

패천의 비밀 통로는 종남산 곳곳에 퍼져 있지만 누군가가 들어가는 걸 보지 못하면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다. 그래서 패천이 먼저 연우강을 찾아 남궁운화 일행의 납치 사실을 알리려고 했는데 선수를 당하고 만 것이다.

아니, 연우강이 먼저 들어온 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연우강을 막다가 무인 백여 명이 죽임을 당했고, 대창익 장로가 인질로 잡혀 있다는 게 문제다.

“ 혼자랍니까?”

유는 고개를 들어 신유를 보았다.

“ 그렇네.”

“ 대장로의 상태는 어떻답니까?”

“ 연우강을 만난 자는 전부 죽었고, 지금도 죽어나가고 있네.”

“ 막으라고 지시를 내렸습니까?”

“ 일단은 막아야 할 것 아닌가?”

“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 남쪽에서 이곳을 향해 오는 중이네.”

“ 그 친구가 길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 대창익이 길 안내를 하는지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정확하게 이곳으로 오는 중이네.”

“ 지금부터는 놈을 풀어주도록 하십시오.”

“ 그는 대창익을 인질로 잡고 있네. 대면하게 되면 우리가 불리하네.”

“ 그를 만나기 위해서 남궁운화 일행을 납치한 겁니다. 길을 트도록 하십시오.”

“ 알았네.”

신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리고 출입구 바로 앞에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 놓고 차도 준비해 주십시오. 의자와 의자 사이의 거리는 오십 장을 유지해야 합니다.”

신유는 잠시 유를 바라보았다.

대창익이 잡힌 상태고 백여 명이 넘는 문도가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접대를 하겠다니, 유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 그에 대해 한마디만 해도 되겠는가?”

“ 말씀하십시오.”

“ 연우강의 최대 장점은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게 하는 머리와 철저한 계산하에 이루어지는 독불장군 같은 행동이네. 하지만 단점은 있네. 그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가족에 대한 사랑이 너무 지나치다는 점인데, 연금석 일행을 보호하고 있는 자들 또한 만만치가 않네. 그 점을 명심해 주었으면 하네.”

신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 노파심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사부.”

유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물렸다.

물론 그 정도는 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가 연우강을 크게 보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 녀석은 적이 너무 많소. 적이 많은 자는 절대 최고가 될 수 없소이다.”

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석문을 나선 유의 얼굴이 슬쩍 찌푸려졌다. 벽면을 따라 수백 명의 패천 무인들이 늘어서 있었던 것이다.

이건 그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 천주님.”

유가 나오자 늘어서 있던 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 수고들 많네.”

그들의 인사를 받은 유는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신유를 보았다. 유의 얼굴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 자발적으로 나왔습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반공대를 하지만 지금처럼 수백 명이 지켜보는 자리에서는 공대를 했다.

“ 어떻게 처리하는지 지켜보겠다는 건가?”

유는 북쪽 막사 주변에 서 있는 장로들을 보았다. 그곳에는 변황으로 떠난 제천강과 패천팔노 검산일을 제외한 여섯 명이 서 있었다.

“ 놈에게 당한 무인이 백오십 명입니다.”

“ 그렇게 많소.”

유는 의자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쪽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가 자리에 앉자, 신유를 비롯한 만기팔유 좌우측으로 세 명씩 늘어섰다.

‘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유는 빙그레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비가 차를 가져와 탁자에 놓았다.

유는 차를 마시면서 연우강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거의 한 식경 정도를 기다렸을까. 육중한 소리와 함께 남쪽 석문이 열렸다.

대창익과 연우강 두 사람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연우강이 들어오자 패천림 무인들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패천 무인들이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대창익의 몸 상태였다. 장로의 한 명이고, 패천십경의 하나인 지옥마환지를 익힌 최강 고수 중의 한 명이다.

그런 그가 연우강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패천 무인들은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 저건?”

대창익을 살피던 무인들은 다들 의아하다는 얼굴이다.

대창익의 단전에서 특이한 물체를 발견한 것이다. 패천 무인들은 일제히 눈에 내력을 집중했다.

“ 죽일 놈!”

패천 무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차가운 기운은 이내 진득한 살기로 변했다. 대창익의 단전에 있는 그것은 농부들이 풀을 벨 때 사용하는 낫이었다.

그런데 낫의 날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날은 대창익의 단전에 꽂혀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실력의 고하를 떠나 상대의 단전을 망가뜨리는 건 지독한 모욕이다. 무공을 잃은 것보다는 죽음을 택하는 자들이 무인 아닌가.

“ 환영식이 거창하네. 오랜만이야.”

연우강은 손을 흔들며 빙긋 웃었다. 왔다.

“ 개자식!”

장육철의 입에서 싸늘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는 곧이라도 연우강을 향해 달려갈 기세였다.

“ 참으시오. 장 장로.”

유가 장육철을 말렸다.

“ 저 모습을 보고도 그런 소릴 하시오?”

장육철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난 지금 연우강과 이야기 중이외다.”

유는 차갑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푸욱!

장육철의 두 발이 바닥을 파고들어 갔다.

“ 시작은 너희들이 먼저 했잖아. 그리고 나는 하나를 받으면 열을 돌려주는 사람이야.”

연우강은 장육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 우리가 남궁운화를 납치했기 때문에 대노야를 그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유는 차분하게 응대했다.

“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런 개미굴로 들어올 이유가 없고, 백사십구 명을 없앨 이유가 없잖아.”

“ 썅노무새끼!”

급기야 장육철은 참지 못하고 몸을 날렸다.

“ 멈추는 게 좋을걸!”

연우강은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왼손에는 피가 말라붙은 손괭이가 들려 있었다.

연우강은 몸을 날려오는 장육철을 빤히 바라보며 손괭이를 힘껏 내리찍었다.

“ 머, 멈춰라!”  . 허공에 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엔 바닥을 차고 몸을 날렸기 때문에 그의  장육철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추며 소리쳤다.

“ 늦었어, 장육철.”

푸욱!

손괭이는 대창익의 어깨로 파고 들어갔다.

대창익은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벌렸다. 하지만 아혈을 점혈당한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 계속 다가오면 이번엔 왼쪽 어깨가 될거야.”

연우강은 차갑게 말했다.

“ 돌아오게. 장 장로. 이건 명령이네.”

“ 언젠가는 네놈을 반드시 죽이겠다. 연우강.”

유의 목소리가 엄격하게 변하자, 장육철은 짓씹듯 말하며 몸을 돌렸다.

“ 이런 경우를 들어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하는 거 맞지?”

연우강은 유를 보았다.

“ 앉지.”

유는 연우강 옆 의자를 가리켰다.

“ 내 자리야?”

“ 그렇다네.”

“ 마침 목이 말랐는데 차까지 준비해 주고, 고마워.”

연우강은 찻잔에 차를 따라 입으로 가져갔다.

“ 의심도 안하고 그냥 마시는 건가?”

“ 여기에 독을 탔을지도 모른다는 말?”

연우강은 찻잔을 앞으로 내밀며 씩 웃어 보였다.

“ 전에 천등육관을 담당했던 노 장로는 독공의 고수라네.”

“ 날 죽이려고 했다면 굳이 납치 같은 비열한 방법을 동원 하지 않았을 거 아냐. 그러니까 이 차 안에는 독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지.”

연우강은 주저없이 차를 마셨다.

“ 역시 내 예상대로 행동하는군. 그보다 자네 옆에 있는 두 사람을 소개시켜 주는 건 어떤가?”

유는 연우강 좌우측을 턱으로 가리켰다.

우뚝!

연우강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독고철웅과 창노가 바로 옆에 있는 건 맞다. 하지만 유가 앉아 있는 곳과 이곳까지의 거리는 오십이다. 그런데 그 거리를 격하고, 중원 최고의 은신술이라 불리는 천마환환신공과 만화은신사영을 펼친 채 숨어 있는 두 사람을 알아본 것이다.

유의 무공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유가 담대만승보다 더한 강가자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놀란 표정을 지은 사람은 비단 연우강뿐만 아니었다. 유 좌우측에 모여 있는 승천비고 무인들은 물론이고 패천림 장로들도 깜짝 놀랐다.

그들 중 누구도 연우강 근처에 누군가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예리한 눈을 가졌군.”

연우강은 순순히 시인했다.

“ 내가 아는 자들인가?”

“ 물론, 이쪽에 숨어 있는 양반은 유령신마존 독고철웅이고, 이쪽에 숨어 있는 분은 창궁무제 남궁우문이야.”

“ 맙소사!”

패천 무인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유령신마존 독고철웅.

그는 대야벌의 잠룡으로 들어갔다가 천마환환신공을 발견하고도 보고를 하지 않은 죄로 인해 강호 공적으로 몰렸지만. 쫓기는 와중에 천하제일인이라는 칭호를 얻은 놀라운 인물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창노로 불린 창궁무제 남궁우문은 구파일방 출신이 아닌 자가 궐주가 된 최초의 인물이 아닌가.

창노의 존재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령신마존 독고철웅의 존재는 그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 정말 유령신마존 선밴가?”

유는 확인하듯 물었다.

“ 그렇다고 해두자고.”

“ 무슨 소린가?”

“ 인간이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족속이잖아.”

“ 내가 믿지 않을 거란 말이군.”

“ 상관없다는 뜻이야. 그건 그렇게 이제 그만 내 지인들을 데려와야 하지 않아?”

연우강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 그들을 보려면 내가 원하는 일 한가지를 해주어야 하네.”

“ 이 영감은 상관없나 보지?”

연우강은 옆에 서 있는 대창익을 가볍게 쳤다.

툭 친 것처럼 보였지만 상당한 내력이 실린 듯 대창익은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입을 쩍 벌렸다.

“ 아, 아혈까지 점혈했구나, 놈!”

장육철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조금 전 손괭이에 당했을 때는 대창익이 일부러 비명을 지르지 않은 걸로 여겼다. 그런데 이번에도 입만 벌렸을 뿐 비명이 흘러나오지 앉자 비로소 대창익이 점혈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같은 조건을 만들었을 뿐이야.”

연우강은 차를 마시며 말했다.

“ 같은 조건이라는 건 무슨 소린가?”

“ 남궁 소저, 향노, 허일구 등은 이 안에 있지만 난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잖아.”

“ 그러니까 우리도 대장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해놓았다는 건가?”

“ 그래야 공평하잖아.”

“ 연우강! 나 장육철의 목을 걸고 맹세하겠다. 네놈을 반드시 죽이겠다.”

장육철은 연우강을 노려보며 성난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 난 지금 너희들 상관과 이야기 중이야. 어른들 이야기하는 데 끼어드는 건 좋은 습관이 아냐.”

“ 저런 죽일 놈!”

“ 개자식!”

또다시 패천 무인들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 으음!’

유는 내심 신음을 뱉었다.

역시 연우강은 다루기 쉬운 자가 아니었다. 그는 교묘한 언변으로 패천 무인들을 자극하고 있다. ‘너희들 상관’이란 말과 ‘어른 이야기’라는 말은 패천 무인들에게 지독한 모멸감을 심어주고 있다.

말로 상대방을 분열시키는 고도의 전술이었다.

“ 우릴 너무 자극하는 것 같구먼. 그러다가 평생 남궁운화를 보지 못할 수도 있네.”

유의 몸에서도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 기운은 곧 전율적인 살기로 변해 패천 무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을 잠식해 들어갔다.

‘ 맙소사!’

연우강의 옆에 있는 창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유 주변에 있는 패천 무인은 적게 잡아도 이백여 명이다. 그런데 유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패천 무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을 눌러버리고 있다.

엄청난 무공이 아닐 수 없었다.

“ 그런 생각은 꿈에서라도 하지 않는 게 좋아, 유.”

“ 내가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할 참인가?”

“ 그럼 가장 먼저 너희들이 가족이 죽을 테고, 그 다음에는 하류 무인들, 그 다음엔 조금  한다는 무인들, 그 다음엔 패천십관을 맡았던 노인들. 그 다음에는 승천비고와 천무비고를 담당했던 늙은 요괴들, 그 다음엔 바로 너야.”

연우강은 손가락으로 유를 가리켰다.

한동안 유를 쳐다보던 연우강은 다시 말을 이었다.

“ 애, 어른, 여자 할 것 없이 전부 죽일 거야. 너희들이 기르던 개까지.”

“ 프! 하하하! 으! 하하하!”

우르르! 쩍!

유의 웃음이 점점 커지자 광장이 흔들리고 곳곳에 금이 쩍쩍 갔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 크윽!”

“ 으윽!”

패천 무인들은 귀를 틀어막으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놀란 눈으로 유를 보았다.

사실 패천 무인들 중 유를 진정한 천주라고 여긴 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위에서 결정된 사항을 따르고는 있지만 패천 무인들이 생각하는 천주는 여전히 무무 제천강이다.

그런데 오늘 비로소 유가 천주에 오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단지 웃음만으로 이백 명이 넘는 무인을 제압해 버리는 엄청난 무공.

바로 그것 때문이었던 것이다.

뚝!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을 그쳤다.

[ 대장로!]

유는 혜광심어로 연우강 앞에 있는 대창익을 불렀다.

[ 대답을 못하는 건 알고 있소.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거요?]

대창익은 시선을 들어 유를 보았다.

계속 그렇게 서 있겠냐는 질문은, 곧 아혈만 제압당했을 뿐 걷는 건 지장 없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 살고 싶소!]

또다시 유의 혜광심어가 들려왔다.

대창익은 고개를 끄덕였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공연히 나온 것은 아니다. 설사 단전이 파훼디고, 무공을 잃었다고 해도 대창익은 살고 싶었다.

아니 무공을 잃고 나자 살고 싶다는 욕망은 더욱 강렬해졌다.

‘ 협상을 해주시오. 남궁운화와 나를 바꿔주시오. 난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소.’

내심 소리치는 대창익의 얼굴엔 간절함이 가득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패천 무인 전부가 보았다.

그들은 대창익과 천주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알았소. 대노야. 원하는 대로 해주겠소. 그리고 우리 패천은 지노 대창익을 영원히 기억하겠소.”

유의 신형이 둥실 떠올랐단 싶은 순간, 그는 어느새 허공을 격하여 오 장 가량을 날아가고 있었다.

‘ 아니오, 천주. 난 살고 싶소. 살고 싶단 말이오.’

대창익은 부정의 뜻으로 고개를 좌우로 저으려고 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대창익의 신형은 머리부터 가루로 흩어졌다.

대창익이 가루로 흩어지자 어깨와 단전에 꽂혔던 손괭이와 낫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시, 심검!”

허공에 숨어 있던 독고철웅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약 사십 장의 거리를 격하여 상대방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무공. 그가 알기론 그런 무공은 심검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로 같은 편에게 사용했다고 하지만 유가 펼친 심검은 패천 무인들을 침묵 속으로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멍한 얼굴로 유를 바라보는 그들의 귓전으로 유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 대장로는 명예로운 죽음을 원했다.”

유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 장 장로.”

“ 하, 하명하십시오. 천주님.”

장육철은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내심은 지금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는 유가 천마 조사의 눈에 들어 천주가 됐다고 여겼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유는 천주 자리에 어울릴 정도로 충분히 강했다.

“ 문도들을 물리도록 하게.”

“ 알겠습니다.”

장육철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는 문도들에게 눈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장육철의 지시를 받은 패천 무인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기팔유와 장로들이 자리를 떴다. 심검의 경지를 눈으로 확인한 이상 유를 보호하겠다고 남을 이유가 없었다.

잠시 후 지하 광장에는 유와 연우강만 남았다.

“ 네가 쥔 패가 사라졌구나, 연우강.”

유는 차가운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 아쉽네! 그 자식은 내가 죽일 참이었는데.”

연우강은 바닥에 떨어진 손괭이와 낫을 허공섭물로 끌어당기며 입맛을 다셨다.

마라천력에 대해서는 들킬 때까지 비밀로 할 참이었다.

손괭이와 낫을 수거한 연우강은 빈 찻잔에 물을 따랐다.

“ 여유가 넘치는구나.”

“ 불안해 한다고 해서 좋아질 상황이 아니니까.”

연우강은 간담이 서늘했다.

자신은 이제 심뢰의 개념을 잡았을 뿐이다.

그런데 유는 심검을 자유자재로 펼치고 있다. 만일 지금 그와 싸운다면 백이면 백 패하고 말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유가 잘못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가 잘못 판단했다고 결론을 내린 이유는 의자가 놓인 거리 때문이었다. 의자와 의자 사이의 거리는 오십 장가량이다. 정확하게 심검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지점에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고 할 수 있다.

‘ 넌 내가 심검을 얻었는지 그걸 알고 싶어서 일부러 오십 장 거리를 두었겠지.’

연우강은 내심 중얼거렸다.

무공 정도를 알아보기 위한 유의 술수였다.

만일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게 되면 주도권을 빼앗기게 될 테고, 남궁운화 일행을 구하기가 힘들어진다.

“ 일부러 오십 장 거리를 유지한 거야?”

연우강은 거리를 가늠한 척하면서 물었다.

유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연우강의 짐작처럼 유가 의자와 의자 사이를 오십 장 거리로 유지한 것은 연우강의 무공 경지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오십 장의 의미를 알고 있다면 심검을 얻은 게 되고, 모른다면 아직 심검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게 된다. 그런데 연우강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건 곧 연우강도 심검을 얻었다는 뜻이 된다.

“ 이제 내 요구 사항을 말하겠다.”

유는 화제를 돌렸다.

“ 일단 들어보자고.”

“ 내가 원하는 건 혁련무극이다.”

“ 혁련무극 때문에 남궁 소저를 납치했다는 거야?”

연우강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 그것까지는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리고 혁련무극은 첫 번째 요구 조건일 뿐이다.”

“ 그럼 이번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요구를 하겠다는 말야?”

“ 네가 남궁운화를 구해 가지 않는 이상 요구는 계속되겠지.”

유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그럼 난 남궁소저 일행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야겠구나.”

“ 그들을 굶겨 죽이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할 거야.”

“ 음식을 주지 않겠다는 말이냐?”

“ 네가 식량을 보내주면 우리가 먹고 남는 걸 넣어줄 수도 있을 거다.”

“ 두 번째 요구는 식량인 모양이지?”

“ 대책 없는 노인네들이 대야벌을 나올 때 가지고 나온 게 별로 없더라고. 이번 건은 부탁이라고 해두지.”

“ 좋아. 식량도 주도록 하지. 그런데 혁련무극을 죽이면 큰일난다는 건 알고 있겠지?”

“ 내 생각엔 큰일날 일이 전혀 없을 것 같은데?”

“ 내가 지금 숨어 들어가 있는 곳이 야궐이야.”

“ 그래서?”

유의 눈동자엔 언뜻 놀람의 빛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그는 연우강이 종남산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들어온 줄 알았다. 그런데 야궐 무인들 틈바구니 속에 잠입해 있었단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방식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자였다.

“ 상식에도 어긋나고 말이 되지 않는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이 따른다는 건 뭘 말하는지 알아? 아니, 넌 모르겠구나.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연우강은 잠시 말을 끊고는 유를 빤히 보았다. 하지만 유의 얼굴엔 어떤 표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 이럴 땐 화를 내줘야 이야기를 계속할 마음이 생기는데.”

“ 단지 외부로 표현이 되지 않아서일 뿐 난 충분히 화나 있다.”

그랬다. 유의 얼굴은 얼음 막을 씌운 것처럼 차갑게 변해 있었다. 방금 연우강이 한 말은 문도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빗댄 것이기 때문이었다.

“ 그럼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줘야 다음 말을 이어가잖아.”

“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 아냐, 혁련무극에 대한 야궐 무인들의 생각은 신뢰 이상이야.”

“ 신뢰 이상이라면 신앙이란 말이냐?”

“ 바로 그거야. 패천 무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넌 모르겠지만, 야궐의 혁련무극은 문도들이게 신앙의 대상이야. 그럼 여기서 질문. 신앙이었던 자가 죽으면 어떻게 되지?”

“ 순교자가 되겠지.”

“ 맞아. 혁련무극은 죽는 순간 순교자가 되고 그 부하들은 복수에 목숨을 걸게 되지. 그런데 그 복수가 문제란 말이야.”

“ 너는 이곳으로 들어오면서도 백오십 명의 패천 무인을 없앴다.”

“야궐 무인 삼천 명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 지금 내 생각은 그렇다.”

“ 물론 네 말이 맞아. 설사 삼천 명이라고 해도 시간만 주어지면 전부 없앨 수 있어. 난 그럴 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 내가 바라는 것도 그거다. 연우강.”

“ 그러니까 내 손을 빌려서 야궐 무인 삼천 명을 없앨 셈이구나.”

“ 그사이에 나적리도 없애줄 거라고 믿는다.”

“ 그런 상황을 바랐다면 남궁 소저를 납치할 명분은 충분하네.”

“ 연우강, 지금도 시간은 쉬지 않고 흐르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남궁운화 일행은 점점 배가 고파질 거다.”

서두르라는 말이었다.

“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 인마.”

꿈틀!

유의 눈썹이 사정없이 치켜 올랐다.

얼굴은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오십이다. 그런데 말끝마다 반말로 일관하고 있는 연우강의 말투를 용납하는 건 쉽지 않았다.

“ ‘인마’라는 말은 기분 나뿐 모양이지?”

“ 무척.”

“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이야. 그러니까 화 풀어.”

연우강은 찻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환하게 웃었다.

스스스!

급기야 유 앞에 있던 탁자가 가루로 흩어졌다.

“ 으음!”

유 뒤편, 약간 열린 석문 안쪽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신음을 내뱉은 사람은 신유였다. 연우강을 바라보는 신유의 얼굴은 침중하게 굳어 있었다.

연우강을 처음 보았을 때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사실은 간파했다. 하지만 유는 저주악마지심을 타고난 천재다. 그런데 심리 싸움에서 연우강에게 밀리고 있다.

‘ 역시 책은 경험을 이길 수 없다는 건가?’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유는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책을 읽으며 간접 경험을 쌓았고 나이도 두 배나 많다. 반면에 연우강은 철저하게 실전을 쌓은 자다. 그런데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일단 첫 대면은 유의 패배였다.

“ 남궁운화가 갇혀 있는 그곳에는 들쥐 한 마리도 없다. 연우강.”

평정을 되찾은 듯 유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 알았다니까 그러네. 그런데 내가 식량을 넣어주면 남궁소저 일행에게도 나눠줄 거지?”

“ 그녀가 살아 있어야 널 부려먹을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 강호 주인이 되고 싶은 자라면 한번 뱉어낸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 한다는 것도 알았으면 좋겠구나.”

“ 누가 강호 주인이 되고 싶다고 하더냐?”

“ 아냐?”

“ 클!”

유는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 난 처음부터 강호 주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 없었다.”

“ 그럼 패천을 세운 이유가 뭐지?”

“ 그건 숙제로 남겨두도록 하마.”

유는 뒷걸음을 치며 석문 앞에 섰다.

그르릉!

그러자 석문이 열리고 신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 저 친구를 밖으로 안내해주도록 하시오.”

“ 알겠습니다. 천주.”

신유는 고개를 숙이고는 연우강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 절강성 오가피주는 아직도 가지고 있느냐?”

연우강 앞에 선 신유는 말을 건넸다.

전에 연우강이 승천비고를 들어왔을 때 뇌물이라며 오가피주를 꺼내놓은 것이 떠올랐다.

“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구해줄 수 있소. 하지만 공짜론 안 되겠소.”

그르릉!

신유가 문 앞으로 서자 육중한 소리와 함께 석문이 열렸다.

“ 알고 싶은 거라고 있느냐?”

신유는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 관에 들어갈 날도 머지 않았는데 굳이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뭐요?”

“ 꿈이라고 해두지.”

“ 꿈?”

“ 아니면 삶의 의미나, 목적이라고 해도 괜찮고.”

“ 그럼 말릴 방법이 없겠구려.”

연우강은 동굴 천장을 보았다.

천장의 야명주가 희미하게 어둠을 밝히고 있다.

무림 정복이 삶의 의미이자 목적이라는데 무슨 말을 할 것인가.

“ 아니, 이 전쟁이 자네 때문에 일어났으니까, 질문이 잘못 됐구먼. 왜 이 전쟁을 시작한 건가?”

“ 시작은 담대만승이 했지 내가 한 게 아니오.”

“ 담대만승이 아니었다면 전쟁도 없었을 거란 말인가?”

“ 그렇소.”

“ 그럼 담대만승을 죽이는 걸로 끝날 수 있었을 텐데.....”

신유는 연우강을 보았다.

방금 확인한 연우강의 무공은 유에 비해서 결코 아래가 아니었다. 둘이 싸운다면 누가 이길지는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강자다. 그 정도 실력이면 담대만승을 없앨 수 있을 듯했다.

“ 전엔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소.”

“ 대야벌로 들어온 후에 강해졌다는 말인가?”

“ 강호무림에서 가장 많은 비급을 보유한 곳이 대야벌 아니오. 그리고 낙일마검과 창궁무제가 사부 아니오. 그 두 분이 힘을 합쳤는데 나 정도 무인을 길러내는 게 뭐 대단하다고 그러시오.”

“ 나는 평생에 걸쳐 유를 길렀네.”

“ 그런데 잘못 기른 것 같소이다그려.”

“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 지휘관의 덕목은 부하를 지키는 거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소. 오히려 살고 싶어하는 대창익을 죽여버렸지. 그건 아주 치명적인 실수라고 할 수 있소.”

“ 대창익은 명예를 위해 죽음을 택했네.”

“ 그건 대창익의 말이 아니라 유의 말이었소.”

“ 대창익은 원하지 않았단 말인가?”

“ 그곳까지 가는 동안 대창익은 자살할 기회가 많았소. 머리를 들이밀고 벽을 향해 돌진하기만 해도 죽을 수 있었소. 그런데 그는 단전에 낫을 꽂은 채 그 광장까지 간 거요. 그게 뭘 말하는지 모르겠소?”

“ 대창익을 붙잡고 있는 사람은 자네였네. 그를 모욕했고.”

“ 설사 그렇다고 해도, 살릴 방법이 있다면 살려야 하는 게 지휘관이오.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인질을 내주고 대창익을 구했을 거요. 그리고 난 내가 천주가 됐다고 해서 사부를 부하 취급은 하지 않소. 부하들이 없는 곳에서는 편하게 말을 할지라도 부하들 앞에서는 더욱 예의를 지키고 깎듯하게 대할 거요.”

“ 세심하게 관찰을 한 것 같구먼.”

“ 싸울 준비를 하려면 적을 알아야 하니까.”

“ 그럼 우린 패한 거나 다름없구만.”

“ 당신네들의 가장 큰 실수, 조직은 강자가 다스리는 게 아니라는 걸 몰랐다는 거요?”

“ 조직의 수장이 되는 조건에 무공의 강약은 상관없단 말인가?”

“ 황제가 무공을 익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소?”

“ 여긴 황실이 아니고 무림이네.”

“ 물론 그렇소. 하지만 둘 중 한가지를 택해야 한다면 무공이 아니라 경험을 선택해야 하오. 아무튼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을 지 모르지만 오늘 대창익을 죽인 유의 행동은 나중에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거요.”

“ 문도들의 마음을 돌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 내가 군에 있을 땐 마음이 돌아선 여자와 부하는 잡는 게 아니라고 했소.”

“ 하지만 난 유를 믿네. 그는 잘해낼 거네.”

“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겠소.”

“ 지금이라도 담대만승을 없애서 이번 전쟁을 끝낼 생각은 없는가?”

신유는 화제를 돌렸다.

“ 이미 늦었다는 건 영감도 알잖소.”

“ 그렇지 이미 늦었지. 만일 말일세. 삼 년 전에 지금과 같은 능력을 보유했다면...”

“ 담대만승을 없앴을 거냐는 질문이오?”

“ 그렇네.”

“ 없애지 않았을 거요.”

“ 그 이유를 알고 싶네.”

“ 담대만승을 없애면 차기 벌주가 날 없애려 들 테고 그를 죽이면 또 그 다음 벌주가 날 없애려 들 거 아니오.”

“ 하면?”

“ 그런 생각을 못 갖게 하려면 철저하게 밟아버려야 하니까.....아마도 지금과 같은 결과가 나왔을 거요.”

“ 애초에 자넬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이군.”

“ 그랬더라면 난 황금백수 짓으로 시간을 죽이고, 담대만승은 편안한 노후를 즐기고 있었을 거요.”

“ 다 왔네.”

신유는 전면을 가리켰다.

어느새 아침이 온 듯 주변이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 식량은 종남산 북쪽 회회촌의 객잔에 가져다 두면 되네.”

“ 아무튼 행운을 빌겠소. 혹시 내 손속이 잔혹하더라도 이해해주길 바라겠소.”

“ 시체를 조각 내는 습관이 있는 것 같더군.”

“ 그걸 확인사살이라고 하는데, 군대에서 생긴 버릇이외다. 습관을 버리는 게 쉽지가 않아서 말이오.”

“ 나도 그렇게 죽이겠다는 말인가?”

“ 영감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 다른 녀석을 없앨 때보다 부담이 적을 것 같소.”

“ 자네도 행운을 빌겠네. 아울러 나도 내 꿈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네.”

“ 그럼 다음에 봅시다.”

연우강은 손을 흔들며 숲으로 들어갔다.

신유는 멀어지는 연우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너무 강한 녀석을 적으로 두었군.”

신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빈틈도 없고 허점도 없다.

지인이 인질로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을 협박하는 배포를 지녔다. 경험은 풍부하고, 세파에 닳고 닳았다. 거기에다 무공은 극상이고, 부하들은 신앙처럼 따른다.

최강의 적을 만난 셈이었다.

“ 하지만 자네 같은 적을 만나게 된 것도 행운이라고 보네.”

신유는 빙그레 웃으며 몸을 돌렸다.

“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연우강을 따르던 창노가 느닷없이 물었다.

“ 무슨 말입니까?”

“ 형님과 나를 사부로 생각하냐고.”

“ 어쨌든 절 받아줬잖아요. 영약도 줬고, 이 약사 목숨도 줬고요.”

“ 그럴 빚이라고 여기는 게냐?”

“ 빚이라고 여기진 않아요.”

“ 그럼?”

“ 인연이라고 여기지요.”

“ 인연이라고?”

“ 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절 받아준 거나, 영감님이 무원 영감님과 관계를 이어가는 것처럼, 빚은 갚아버리면 끝나지만 인연은 돈으로 환산하거나 갚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어느 한쪽이 죽는다고 해도 계속 이어지는 게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 그렇구나.”

창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강의 말이 맞다. 어쩌면 인연이 혈연보다 더 강하게 이어져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업둥이라서 그런 생각을 했을 거예요. 그만 가요.”

연우강의 걸음이 빨라졌다.

“ 그런데 혁련무극을 죽일 수 없다는 건 무슨 소리냐?”

창노는 화제를 돌렸다.

“ 간단해요. 혁련무극이 죽으면 야궐 무인들은 복수를 해야 하잖아요.”

“ 그렇겠지.”

“ 하지만 전 강하잖아요. 절 죽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럼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밖에 없어요.”

“ 어떤 선택 말이냐?”

“ 이곳에서 복수가 여의치 않으면 그들은 대야벌로 들어가 버리고 말 거예요. 그럼 전 재주를 부린 곰이 되는 셈이잖아요.”

“ 돈은 담대만승이 챙긴다는 말이구나.”

“ 그래서 혁련무극을 살려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 하지만 유는 혁련무극의 머리를 원한다고 했다.”

“ 말을 정확하게 들어야죠. 그 녀석은 혁련무극을 원한다고 했지. 머리를 가져오라고 한 적은 없어요.”

“ 그게 그 말 아니냐?”

“ 전혀 다르죠.”

“ 그나저나 운화가 걱정이구나.”

창노는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 아직 남궁 소저를 모르세요?”

“ 뭘 모른단 말이냐?”

“ 남궁 소저가 무공이 약해서 잡혔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에요.”

“ 그럼 아니란 말이냐?”

“ 영감님도 알는지 모르겠지만 남궁 소저는 이미 창룡을 뽑아내는 경지에 이르렀어요.”

“ 정말로 창룡을 뽑아낸단 말이냐?”

창노는 깜짝 놀랐다. 그동안 운화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창룡을 생성했다는 말은 듣지 못한 탓이었다.

“ 한참 됐어요.”

“ 난 오십 다 돼서 창룡을 생성했는데.....”

창노는 망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운화 나이 이제 스무 살. 그 나이에 창룡을 생성했다면 역대 남궁세가 가주 중 가장 빠르다. 천재는 자신이 아니라 운화였던 것이다.

“ 흐흐흐!”

공연히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 아무튼 남궁 소저는 도망치려고 마음먹었으면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 그럼 하오밀문 무인들 때문에 일부러 잡혔단 말이구나.”

“ 그런 셈이죠. 어쩌면 그 속에서 새로운 경지를 이룰지도 몰라요.”

“ 새로운 경지?”

“ 이기어검술 다음에 있는 경지가 뭐겠어요.”

“ 설마......”

“ 설마가 아니에요. 이미 심검에 대한 개념은 잡았어요. 조만간 영감님은 남궁세가 최초로 이십대 심검 고수를 보게 될 거예요.”

“ 정말 그럴 거라고 보느냐?”

“ 절 믿으세요.”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몸을 날렸다. 남쪽으로 빠르게 내달린 그들은 지하로 들어갔던 장소에 당도해서는 벗어두었던 옷을 갈아입고 모곤필 일행이 은신해 있는 곳으로 갔다. 모곤필 일행은 같은 동굴에서 은둔자처럼 생활하고 있었다.

“ 지금부터 남쪽의 감로봉 주변을 철저하게 탐문한다.”

“ 감로봉 주변 지도라도 만들 셈입니까?”

모곤필은 연우강을 보며 말했다.

“ 말 잘했다. 오늘부터 우리는 감로봉과 이곳 무고 주변의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조그마한 것도 놓치지 말고 샅샅이 훑어서 지형에 변화가 생기면 즉각 알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알겠느냐?”

“ 알겠습니다.”

일행은 동시에 소리쳤다.

“ 좋다. 그럼 바로 시작한다.”

연우강의 명령이 떨어지자 일행은 일제히 일어나 보급품을 쌓아둔 곳에서 지필묵을 챙겨 동굴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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