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벼락 출세
지난 며칠 동안 남궁우노하 일행은 음양뢰를 샅샅이 훑었다.
음양뢰의 형태는 원형이었다. 지금은 이백 장 가량이고, 형태는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진다. 언뜻 보기엔 입구가 좋은 항아리 형태 같지만 운무로 휩싸인 위쪽은 지금의 몸 상태로 확인할 길이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점혈된 혈도를 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공이 운용되지 않았다.
마치 공기 중에 내공을 흐트러뜨리는 군자산이 퍼져 있는 것처럼, 내기를 끌어올리면 사방으로 흩어져 버리고 만다.
일행 중 가장 강자인 남궁운화도 다르지 않았다. 삼 갑자가 넘는 내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공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 상태에서 절벽을 타고 위로 올라간다는 건 불가능했다. 일행이 바닥 탐험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아낸 것도 적지 않았다.
“ 여긴 천연 동굴에 인공이 가미된 구조물이다.”
향노는 남궁운화를 보며 말했다.
지난 며칠간 음양뢰를 조사하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 가장 자리에 있는 문 때문인가요?”
남궁운화는 물었다.
“ 가장자리뿐만이 아니다. 바닥에도 바둑판처럼 선이 그어져 있더구나.”
향노는 안쪽 바닥을 가리켰다.
남궁운화는 향노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이끼를 걷어낸 자리는 가로세로로 선이 죽죽 그어져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것들은 선이 아니라 깊게 패인 홈이었다.
“ 저 사각형은 가로세로 세 자씩이다.”
“ 뭐라고 생각하세요?”
“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구나.”
향노는 고개를 저었다.
“ 이곳 기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남궁운화는 손바닥으로 허공을 저으며 물었다.
“ 여기는 음양이 상충하는 장소 같구나.”
“ 음양이 상충하는 장소라는 건 무슨 뜻이죠?”
“ 우주는 음과 양으로 이루어졌다는 건 알고 있을 게다.”
“ 네.”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음과 양은 항상 조화를 이루어 이 세상을 유지시켜 나간다. 양이 강하면 음이 쇠하고, 음이 강하면 양이 쇠하고, 또는 음과 양이 비슷한 힘으로 서로를 보완하며 균형을 이루는 걸 말한다. 하지만 그 조화가 깨지면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재앙이 벌어지곤 하지. 즉, 음과 양의 상생 작용으로 이 세상이 유지된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상생 작용이 아니라 상충 작용을 통해 균형을 유지하는 장소가 있는데 그곳을 음양지라고 부른다.”
“ 음양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죠?”
“ 우리 상식으로 예측불가능한 일이 일어난다.”
“ 이를테면 어떤 거죠?‘
“ 지금 우리가 겪는 현상도 그 중 하나일 게다.”
“ 그러니까 몸은 지극히 정상인데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이유가 이곳이 음양지이기 때문이란 말인가요?”
“ 음양지이기 때문이 아니라 음양지를 만든 기운 때문에 내공을 운용하기 힘든 거란다.”
“ 음양의 기운이 충돌하고 있어서 그렇다는 말이군요.”
“ 그런 셈이다.”
“ 그럼 이곳에서는 무공을 펼칠 방법이 전혀 없는 건가요?”
“ 그렇다고 알고 있다.”
“ 선천지기를 내공으로 사용하는 무인도 불가능한가요?”
연우강이 떠올라 묻는 말이었다.
연우강의 내공은 순수한 선천지기로 이루어져 있고, 극양의 무공인 혈잔수와 극음의 무공인 백옥수를 펼칠 수 있다. 혹시 그라면 이곳에서 내공을 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가 알기론 음양지에서 무공을 펼칠 수 있는 무인은 음양인 밖에 없다.”
“ 음양인이라면 천마삼경의 주인인 잠마 희수연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거군요.”
“ 그럴 게다.”
“ 하지만 여긴 전설의 음양지가 아닐 수도 있어요.”
“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 정상적인 음양지에 굳이 저런 흔저을 남길 이유가 없잖아요.”
남궁운화는 바닥에 그려진 바둑판 문양을 가리켰다.
“ 그럼 저 홈들은 뭔가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냐?”
“ 진식의 일부분일지도 모릅니다.”
대답은 허일구가 했다.
“ 진식?”
향노는 허일구를 보았다.
“ 음양지란 말을 듣자 전에 보았던 책의 내용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중원의 괴이한 지형에 대해 적어놓은 책이었는데......”
허일구는 젊은 시절 보았던 책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음양지에 대한 설명은 향노가 말한 것과 비슷햇다. 그런데 그 책에서는 음양지에서 펼칠 수 있는 진식 한 가지가 언급돼 있었다.
“ 혼돈음양반천진이란 진식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 어떤 진식이죠?”
이번엔 남궁운화가 물었다.
“ 어떻게 펼치는지, 어떤 효과가 있는지 그런 것들은 나오지 않았는데 다만 한 가지 진식의 효능에 대해서만 나와 있더구나. 하늘을 가두는 진식이라고 적혀 있었다.”
“ 금옥이란 말이네요.”
“ 그런 것 같구나.”
“ 그럼 패천림 무인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 되겠군요.”
남궁운화의 얼굴이 굳어졌다.
감옥치고는 너무 넓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감시하는 자도 없다. 이곳으로 들어오면 나가지 못한다는 자신감이 없다면 이렇듯 편하게 놔둘 리가 없을 터였다.
“ 식량은 어때요?”
남궁운화는 철호를 보며 물었다.
“ 식사량을 줄이면 최소한 십 일 정도는 버틸 수 있습니다.”
“ 이끼는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나쁘지 않습니다.”
“ 그럼 식량 걱정은 할 필요 없겠네요. 좋아요. 특별히 할 일도 없는데 이곳에서 무공이나 익히도록 해요.”
남궁운화는 빙긋 웃으며 사망궤를 지고 일어났다.
“ 무거운데 내가 메마. 내려놓거라.”
“ 아니에요. 할아버지. 운용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제 단전엔 삼 갑자나 되는 내공이 있어요. 이 정도는 충분히 질 수 있어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저었다.
운용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무공이 전혀 없는 양민과 같은 상태는 아닌 듯했다. 그녀는 사망궤를 지고도 비교적 편하게 걸음을 옮겼다.
“ 자리를 옮길 참이냐?”
향노가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 가급적이면 인적이 닿지 않았던 장소를 찾아봐야겠어요.”
“ 인적이 닿지 않는 곳?”
“ 연 공자가 그러는데 그런 곳에 기연이 있을 가능성이 높데요.”
“ 어떤 기연을 말하는 거냐?”
기연이란 말에 허일구가 반색하며 물었다.
“ 이곳이 전설의 음양지니까 음양석균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녀는 싱긋 웃었다.
‘ 녀석!’
허일구는 대견하다는 얼굴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인질로 잡혔고, 빠져나갈 수 없는 금옥에 갇혔을지도 모르는 최악의 상황이다. 남궁운화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은 밝다. 불안해하고 있는 하오밀문 무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저러고 있는 것이다.
문득 남궁운화가 다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좋다. 그럼 지금부터 기연을 찾으로 가보자.”
허일구는 웃으며 말했다.
“ 바로 그거에요. 할아버지.”
남궁운화는 손뼉을 치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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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궐 진영은 오랜만에 활기가 넘쳤다. 각 지부로 떠났던 무인들이 드디어 자모곡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먼저 자모곡으로 들어온 자들은 백마검 온자추를 비롯한 대라검문 무인 오백 명이었다. 그 다음엔 환사잔영비 추도익을 비롯한 비도사문 오백 명이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혈라마문 무인이 종남산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들어오면서 혁련무극은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전쟁 준비의 첫 번째는 그동안, 수합된 정보를 분석하는 일이었다.
“ 이걸 만든 자가 유패란 말인가?”
혁련무극은 나아추를 보며 물었다. 그의 손에는 종남산 남쪽 감로봉 주변에 대한 세부 지도가 들려 있었다.
“ 그렇습니다. 궐주님.”
나아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이 지도 한 장만 있으면 길을 잃을 염려는 전혀 없겠군.”
혁련무극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어렸다.
지도는 감로봉 주변 지형 중 특별히 눈에 띄는 것들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고, 계곡으로 들어갔을 때 빠져나오는 길. 역으로 돌아가는 길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감로봉 주변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지도였다.
“ 별동대는 어디 모였는가?”
“ 진영 바깥쪽에 대기 중입니다.”
“ 그는?”
“ 밖에 있습니다.”
“ 들어오라고 하게.”
“ 알겠습니다. 궐주님.”
자리에서 일어난 나아추는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유패의 얼굴을 한 연우강이 기다리고 있었다.
“ 궐주님이 찾으시네.”
나아추는 연우강을 빤히 보며 말했다.
야궐 무인의 수는 삼천 명가량이고, 그들 중 궐주의 얼굴을 대면할 수 있는 자들은 일부 수뇌에 불과하다. 유패 정도 되는 무인은 궐주의 얼굴을 볼 일이 거의 없을뿐더러 독대는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런데 궐주가 불렀다는 말을 듣고도 녀석의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대담혼 놈이라는 생각을 지을 수가 없었다.
“ 절 왜 찾으시는지 아십니까?”
연우강은 물었다.
“ 자네의 능력을 높이 산 모양이네.”
“ 제가 뭐 한 게 있다고. 밥값을 했을 뿐인데.......”
“ 밥값 이상 한 모양이네. 들어가게.”
“ 알았습니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혁련무극은 천막 중앙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 별호는 천인삭이고 이름은 유팹니다.”
연우강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최근에 성장통을 겪었다고 들었다.”
혁련무극은 연우강을 빤히 보았다.
“ 나 문주께서 말해서 알았을 뿐입니다.”
“ 내공은 어느 정도더냐?‘
“ 일 갑자를 약간 상회하는 정돕니다.”
“ 그렇구나. 앉거라.”
혁련무극은 건너편 의자를 가리켰다.
연우강이 혁련무극이 가리킨 의자로 앉았다.
“ 이 지도를 네가 만들었더냐?”
혁련무극은 종이 몇 장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 전 지시만 내렸고, 그림은 대원들이 그렸습니다.”
“ 유능한 지휘관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은 강한 무공이 아니라 정확한 판단력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너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을 했다.”
“ 감사합니다. 궐주님.”
“ 어떻게 생각하느냐?”
“ 정확하게 어떤 질문이신지....”
“ 종남산이 상황에 대한 질문이다.”
“ 감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 그 말을 듣기 위해 널 불렀다.”
“ 지금 종남산에는 야궐, 밀천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제삼의 세력이 있습니다.”
“ 제삼의 세력이라는 건 무슨 소리냐?”
밀천과 야궐 말고 다른 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혁련무극은 모른 척 물었다. 그들이 연우강을 따르는 자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 저희들이 무곡에 은신해 있을 때 절벽 위쪽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싸움이 끝나고 그곳으로 올라가 봤는데, 늙은이들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 그들이 누구라고 보느냐?”
“ 밀천의 은원 무인들로 봤습니다.”
“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느냐?”
“ 발자국이 없었다고?”
“ 그렇습니다. 일반 무인이라면 이동을 하는데 발자국이 남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곳은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수증기가 인해 항상 바닥에 축축하게 젖어 있습니다.”
“ 노인들이 초상비 경공을 펼치고 있었다는 말이더냐?”
“ 그렇습니다. 초상비 경공을 펼칠 정도면 최소한 강기를 펼치는 수준에 올라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을 없앨 정도의 고수이면서 밀천 무인이고 나이를 먹은 노인이라면 은원 무인들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 그들을 공격한 자들은 누구라고 보느냐?”
“ 그건......”
“ 혹시 연우강 일행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느냐?”
혁련무극은 슬퍼 떠보았다.
물론 무곡의 절벽 위쪽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연우강과 창노는 동료들과 함께 동굴 안에 있었다는 보고를 받긴 했다. 하지만 연우강 일행은 다섯 명이었고, 나머지 세 사람의 행방은 묘연하다. 현재로서는 그들이 가장 유력했다.
“ 그들일 가능성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 좋다. 제삼의 세력을 그들이라고 했을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 그 전에 연우강 일행의 행동에 대해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 밀천 무인을 공격한 이면엔 어떤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는 거냐?”
“ 먼저 무곡으로 숨어들어 간 쪽은 우리였습니다. 밀천 무인들은 나중에 수색을 나왔고요. 그런데 제삼의 세력은 우리는 제쳐놓고 밀천 무인만 공격했습니다. 그 말은 곧....”
“ 연우강 일행은 우리가 아니라 밀천 무인을 목표로 잡았다는 말이구나.”
“ 밀천 무인을 목표로 잡은 게 아니라 야궐의 진형이 갖춰질 때까지 시간을 벌어준 거라고 생각합니다.”
“ 연우강 그 친구가 우리 야궐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말이더냐?”
“ 혹시 하늘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 거의 보지 않았다.”
“ 지금 종남산 하늘을 장악하고 있는 것들은 설산신조와 비응마좁니다. 그 두 신조는 하오밀문과 대야벌 율령궁이 호남에서 전쟁을 치를 때 율령궁의 정보를 차단했던 새입니다.”
“ 그러니까 네 말은.........”
“ 종남산에는 밀천, 야궐, 제삼의 세력, 그리고 연우강과 손을 잡은 하오밀문이 있다는 말입니다.”
“ 가장 많은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측은 하오밀문이겠구나.”
혁련무극의 얼굴에 곤혹스럽다는 빛이 어렸다.
연우강이 유패로 변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만 알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연우강 또한 자신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아니, 모른다면 하오밀문에 대한 이야기를 저렇듯 할 수가 없다. 유패가 아무리 세상사에 관심이 많다고 해도 설산신조나 비응마조에 대해 저렇듯 자세하게 알 리가 없다. 문제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는 이유다.
“ 그렇습니다.”
“ 좋다. 그럼 한가지만 묻겠다. 연우강이 원하는 건 뭐라고 생각하느냐?”
“ 밀천과 야궐의 양패구상입니다.”
“ 으음!”
급기야 혁련무극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 하지만 연우강은 두 세력 중 한 곳을 살려야 한다면 야궐을 택할 겁니다.”
“ 왜 그런 생각을 한 거냐?”
“ 밀천에서 나적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천주인 나천후 이상입니다. 게다가 나적리는 경험도 풍부하고 신중합니다. 그를 없애지 않고는 밀천을 멸문시킬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반면에 우리 야궐은 담대만승과 척을 진 상황입니다. 우리가 강해질수록 담대만승의 입지는 좁아지게 되니까, 담대만승과 결전을 준비하고 있는 연우강으로서는 야궐을 살려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 대단한 놈!’
혁련무극은 어이가 없었다.
녀석은 유패의 입을 빌려 자기가 이곳에서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것들을 전부 까발렸다.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더 황당한 노릇은 녀석을 없앨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 적의 적은 아군이란 말이냐?”
“ 아군이 아니라 목적을 이룰 때가지는 아군인 척하는 겁니다.”
“ 목적을 이루고 난 다음엔 연우강이 어떻게 나올 거라고 보느냐?”
“ 그건 궐주님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렸다고 봅니다. 연우강은 야궐을 대야벌에서 끌고 나옴으로써 담대만승에게 영구 집권의 기틀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건 곧 이제부터 대야벌은 벌주를 뽑을 때 백인위원회의 동의가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누가 됐든 무공이 강하고, 대야벌 소속 무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자는 벌주가 될 수 있게 된 거죠.”
“ 허!”
혁련무극은 입을 쩍 벌렸다.
담대만승이 일인 체재를 구축했다는 생각만 했을 뿐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넘어간 것이다.
백인위원회의 동의가 필요없다는 사실은 곧 연우강이 말한 조건만 갖추면 누구나 벌주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앞에 있는 연우강은 물론이고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 만일 내가 연우강을 없앨 생각을 하고 있다는 그는 어떻게 나올 거라고 보느냐?”
“ 일단은 도망칠 겁니다.”
“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보느냐?”
“ 야궐의 세 문파가 가로막고 있는 상황에서도 탈출을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그땐 내가 수비진형이 아니라 공격진형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 연우강을 핑계삼아 대야벌을 나올 셈이었단 말이군요.”
“ 물론이다. 유패.”
“ 그렇다고 해도 연우강이 빠져나가는 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단 그냥 가지는 않겠지요.”
“ 어느 정도를 예상하느냐?”
“ 최소한 일천 정도는 저승으로 보낸 다음에 떠날 겁니다.”
“ 그럼 윌 야궐 전력은 절반 정도밖에 남지 않겠구나.”
“ 절반이 아니라 지금의 삼분의 일 수준으로 떨어질 겁니다. 왜냐면, 밀천과의 전쟁에서도 삼할 정도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삼 할도 연우강이 측면 지원했을 때 나오는 수치입니다.”
“ 연우강이 측면 지원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 전력 손실이 생길 거라고 보느냐?”
“ 오 할입니다.”
“ 연우강을 너무 크게 보는 것 아니냐?”
“ 대야벌이 저 지경이 된 이유가 누구 때문인지 그걸 생각하면 금세 답이 나올 겁니다.”
“ 연우강 때문이란 말이냐?”
“ 천마삼경의 최초 소유자는 연우강이었습니다.”
“ 천마삼경이라고?”
그간 있었던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천마삼경의 등장으로 인해 생사림이 멸문했고, 그 일 이후로 대야벌에서는 갖가지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생사림 멸망은 대야벌 와해의 시작점이었던 것이다.
“ 그럼 연우강은 혈잔수, 백옥수, 흑마수를 익혔겠군.”
“ 원래 그 세가지는 흑마백옥혈잔이라는 하나의 무공을 풀어 쓴 겁니다. 흑마백옥혈잔을 펼치면 금강불괴라도 산산이 부술 수 있죠.”
“ 그 무공이 전부는 아니겠지?”
“ 흑마백옥렬잔만으로도 야궐 무인 일천 명을 저승으로 보내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 그렇겠군. 좋다. 그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도록 하자.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혁련무극은 화제를 돌렸다.
능청스럽게 앉아 있는 녀석이 연우강이든 유패든 의미가 없다. 녀석은 제 입으로 야궐을 돕겠다고 하였다.
밀천을 없앨 때까지는, 아니, 더 나아가 담대만승을 없앨 때까지는 한 배를 탈 수도 있다. 녀석과의 승부는 그 다음에 생각하면 될 것이다.
“ 무곡을 계속 이용해야 합니다.”
“ 남에서 북으로 공격하잔 말이냐?”
“ 그럴 거면 감로봉 주변의 상세 지도를 만들어 올 필요가 없지요.”
“ 허면?”
“ 놈들을 무공으로 끌어들이는 작전을 구사해야 합니다.”
“ 구체적으로 말해 보거라.”
“ 나적리의 입장에서는 은원 고수들이 당했기 때문에 야궐의 주력이 남쪽에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우린 그들 생각대로 해주어야 합니다.”
“ 남에서 북으로 공격해 가자는 말이냐?”
“ 그럴 순 없죠. 남쪽에 주력이 있다는 사실만 확인시켜 주고 실제로는 북쪽에서 공격해 들어가야죠.”
“ 남쪽엔 별동대를 보내면 된다는 말이구나.”
“ 별동대로는 부족합니다. 충분히 많은 무인들이 있다는 인식을 주려면 적어도 문파 하나 정도는 감로봉에 주둔해야 합니다.”
“ 그럼 남쪽에서 먼저 전투를 시작하고, 한창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질 때 북쪽에서 밀고 내려가면 되겠구나.”
“ 현재로선 그 방법이 최선입니다.”
“ 좋다. 그럼 넌 별동대를 데리고 무곡으로 가도록 해라.”
“ 별동대를 벌써 구성하셨습니까?”
“ 남쪽으로 가면 백 명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별동대의 대주는 유패 너다.”
“ 제 친구 관천행도 데리고 가고 싶습니다.”
“ 데려가고 싶은 무인은 마음대로 데려가도 된다. 나 문주에게도 그렇게 말해 두었다.”
“ 알겠습니다. 궐주님.”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 유패!”
혁련무극은 막 밖으로 나가려는 연우강을 불렀다.
“ 말씀하십시오.”
“ 잘해주리라 믿겠다.”
“ 전 작은 것을 위해 큰 걸 버리는 바보가 아닙니다. 궐주님도 그럴 거라고 믿습니다.”
연우강은 혁련무극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 으음!”
혼자 남은 혁련무극은 신음을 흘리며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솔직히 연우강이 그렇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 예상을 뒤집고 당당하게 나온 것이다.
“ 접니다. 궐주님.”
그때 문이 열리고 유악재가 안으로 들어왔다.
“ 들었는가?”
혁련무극은 유악재를 보며 물었다.
“ 예.”
“ 어떻게 생각하는가?”
“ 치밀하고 무섭고 강한 놈입니다.”
유악재 역시 혁련무극과 다르지 않았다. 혁련무극보다 훨씬 놀랐다. 물론 연우강은 대화 중 자신의 정체를 밝힌 적도 없고, 궐주 또한 묻지도 않았다.
마치 궐주와 유패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한 것이다.
“ 자네도 나와 생각이 같군. 이제 결론을 내려보게.”
“ 그의 생사에 대한 결론을 말하는 겁니까?”
“ 별동대에는 노욱과 복양후가 있네. 연우강이 심검을 익히지 않은 이상 없앨 수 있을 거네.”
“ 하지만 우리도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 내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도 바로 그 점이네. 우린 지금 당장 밀천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연우강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면 전쟁은 시작도 못 할 수가 있네."
" 우리 주력과 동떨어진 상태라면 데리고 가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 일이 끝난 다음에 처리하잔 말인가?"
" 우린 연우강이 잠입한 사실을 알고, 연우강은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 포탄인 줄 알면서도 끌고 가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군."
" 하지만 그 포탄 심지엔 아직 불이 붙지 않았습니다."
" 불이 붙기 전까지는 안전하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 좋네. 그럼 연우강에게 별동대를 맡기도록 하세. 그리고 대라검문은 연우강의 별동대 뒤를 따라 감로봉으로 이동시키게."
" 시작하실 참입니까?"
" 너무 오래 기다렸네. 그러니까......"
혁련무극은 혜광심어로 작전을 하달했다.
그들이 혜광심어와 전음으로 작전을 짜고 있는 그 시각, 연우강은 별동대 대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그 옆에는 나아추가 따르고 있었다.
" 제가 거느렸던 조원들도 함께 데리고 가고 싶습니다. 문주님."
연우강은 걸으며 나아추에게 말했다.
" 그건 바로 조치를 취하겠네."
" 감사합니다."
어느새 두 사람은 별동대 대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다. 별동대 대원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 저들은 이미 자네가 별동대 대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내."
" 별동대는 어떤 자들로 구성되는지 대충 알았으면 좋겠군요."
연우강은 싱긋 웃었다.
별동대 대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은 정체도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었다.
" 구천검마제 노욱과 청량왕 복양후도 별동대 대원으로 들어가있네."
나아추는 곁눈질로 연우강을 보았다.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고 싶었다.
" 어이쿠! 이거 심부름을 해야 할 사람을 대주로 앉힌 거 아닙니까? 그런 엄청난 자들을 어떻게 다루라고 부하로 집어넣었답니까?"
' 미치겠군!'
나아추는 어이가 없었다.
말로는 엄청난 자들이라고 하면서 얼굴엔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 아무튼 야궐의 승리를 위해 분골쇄신하도록 하겠습니다. 문주님."
연우강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별동대 대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고는 구천검마제 노욱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 소개시켜 주지 않아도 되겠는가?"
" 물론입니다. 문주님."
" 그럼 난 가보겠네."
나아추는 구천검마제 일행에게 목례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때 연우강은 노욱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욱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연우강이 나아추와 함께 도착하는 순간부터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 나 문주 말로는 알고 있다던데, 맞아?"
연우강은 노축을 뚫어지게 보며 물었다.
" ........"
노욱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별동대 대주가 됐다고 하지만 유패는 흑마괴문 문도 중 한 명이고, 자신은 야노원의 원주다.
신분으로 보면 유패가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다. 그런데 첫 만남에서 '별동대 대주를 맡게 된 유팹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소.'라는 말이 아닌 '나 문주 말로는 알고 있다는데, 맞아?' 라며 반말이다.
아니, 반말도 반말이지만, 묘한 의미를 가진 질문이었다. 그가 유패가 아닌 연우강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 말인지, 대주가 된 사실을 알고 있는지를 묻는 말인지 애매했다.
노욱은 대답을 못하고 멍하니 연우강을 보았다.
" 인사하기 싫은 모양인데, 어제까지 흑마괴문 문도였던 놈이 느닷없이 출세를 했으니 인사하는 것도 어색할 거야. 그건 나도 이해해. 서로를 소개하는 과정은 생략하도록 하고, 아무나 가서 식량이나 타와. 식량은 한 달 분량이면 될 거야."
그렇게 말하고 연우강은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 뭐냐, 저놈!]
조금 전부터 연우강을 주시하던 검붉은 옷을 걸친 노인이 턱으로 연우강을 가리키며 노욱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는 혈마제 단야였다.
[ 낸들 알겠는가?]
노욱은 모른다는 양 어깨를 으쓱했다.
[ 저 녀석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또 다른 전음이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전음의 주인은 웃으며 상대의 혼을 빼앗는다고 하여 담소탈혼이란 별호를 지닌 육패천이었다.
구천검마제 노육, 혈마제 단야, 담소탈혼 육패천, 이 세사람이 야노원을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수뇌다.
[ 제 녀석은 정체가 들켰다는 사실을 알고도 저렇게 태연하단 말인가?]
단야가 육패천을 보며 물었다.
[ 자신을 유패로 생각한다면 죽었다가 깨어나도 저렇게 행동할 수 없네.]
육패천은 단언하듯 말했다.
[ 그럼 서로가 알고 있는 셈인가?]
단야는 다시 물었다.
[ 그런 것 같네.]
육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 노 영감!"
그때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마, 말하게."
노욱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 아직 못 들은 거야?"
연우강은 눈을 뜨고 노욱을 빤히 보았다.
" 뭐, 뭘 말인가?"
" 이 별동대의 대주가 나라는 사실 말이야?"
" 들었네."
" 그런데 말투가 왜 그래?"
" 내 말투가 어때서 그런가?"
" 난 평 문도로 있을 때 노 영감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했을 뿐 아니라,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했잖아."
" 그, 그러니까 내 말투가 기분 나쁘단 말인가?"
노욱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궐주조차도 명령을 내릴 때는 부탁의 형식을 취한다. 그런데.......
" 기분 나쁜 게 아니라 예의가 아니라는 거야. 사회의 기본은 장유유서지만 조직의 기본은 상하복명이잖아. 특히 전투를 앞두고 있는 조직이라면 상하복명이 철저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영감 생각은?"
" 그, 그렇긴 하네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말이네."
" 너무 오랫동안 야노원에 있다 보니까 머리가 녹이 슬어 현실감이 많이 떨어진 것 같네. 아무튼 방금 내가 한 말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봐. 그리고 어제까지 부하였던 녀석을 대주로 모시는 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연우강은 말을 끊고 혈마제 단야와 담소탈혼 육패천을 빤히 보았다.
" 싶으면?"
노욱이 연우강의 말을 받았다.
" 내가 눈 뜨기 전에 일어나서 돌아가면 돼."
연우강은 다시 눈을 감았다.
' 허!'
노욱은 멍해졌다.
먼저 고개를 숙이며 잘 부탁한다고 하면 이곳에 있는 대원들 전부가 알아서 따를 것이다. 그런데 보자마자 말을 올리라니. 나이 팔십에 별 거지 같은 꼴을 당한다 싶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단야를 보았다.
[ 뱀을 잡는 법을 아는 영악한 놈이구먼.]
노욱의 시선을 받은 단야는 전음을 보냈다.
[ 뭐가 영악하단 말인가?]
[ 대원들을 보게.]
단야의 말에 노욱의 시선이 대원들에게로 향했다.
연우강의 정체를 모르는 자들은 의아한 얼굴로 이편을 쳐다보고 있고, 정체를 아는 자들은 차가운 기운을 흘리고 있다.
[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인가?]
[ 그렇네. 대원들이 따르는 사람은 연우강이 아니라 자네네.]
[ 연우강은 그 사실을 알고 날 잡으려 하는 거고?]
[ 독사를 잡응ㄹ 때 머리만 잡으면 나머진 저절로 따라오거든.]
[ 그래서 어쩌라고?]
노욱은 단야를 보았다.
[ 그걸 왜 내게 묻는가?]
[ 저 벼락출세한 녀석에게 대주님 어쩌고 하면서 꼬박꼬박 말을 올리라고?]
[ 방금 저 녀석은 그렇게 하기 싫으면 돌아가라고 한 것 같은데?]
단야는 턱으로 연우강을 가리켰다.
[ 자넨 도대체 누구 편인가?]
노욱은 눈에 힘을 주며 단야를 쏘아보았다.
[ 이 나이에 무슨 편이 있겠는가. 난 흥미를 쫓는 사람일 뿐이네.]
단야는 소리없이 웃었다.
[ 흥미?]
[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구천검마제 노욱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노는 녀석은 처음이거든.]
' 끄응!'
노욱은 내심 신음을 뱉어내며 연우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녀석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물려 있었다. 문득 웃고 있는 저 입을 향해 정권을 꽂아 넣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었다.
하지만 마음뿐이다. 노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연우강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 구천검마제란 별호를 지닌 노욱입니다. 대주님."
누욱이 자신을 소개하자 이어 단양와 육패천이 일어나 역시 포권을 취하며 본인들을 소개했다.
" 맙소사!"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복양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연우강과 야노원 원로 세 사람의 기 싸움을 지켜보면서도 이런 결과가 나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노욱 일행이 연우강에게 공대를 한 것이다.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그때 얼굴에서 따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복양후의 시선이 따가운 기운을 좇았다.
그 기운의 주인은 연우강이었다. 인사를 받은 연우강은 여전히 누운 자세로 이편을 빤히 보고 있었다.
" 넌 별동대 대원 아냐? 하기 싫으면 가."
" 아, 아닙니다. 난........"
복양후는 벌떡 일어났다.
원로 세 분이 연우강 앞에 머리를 숙였는데 못 한다고 할 수도 없었다.
" 이름은 복양후고 청랑왕이란 별호로 불리고 있습니다."
" 넌?"
연우강은 복양후 옆에 있는 사내를 보며 말했다.
" 전......"
사내는 벌떡 일어나 자신을 소개했다.
여랑대 출신 대원의 소개가 끝나고, 그 다음엔 흑마괴문 무인들의 소개가 이어졌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아직 소개하지 않았던 야노원 원로들의 소개가 있었다.
그들의 소개가 전부 끝날 때까지 연우강은 누은 상태 그대로였다.
" 아무리 대주라고 해도 수하들의 인사를 누워서 받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인사가 끝나자 노욱이 툭 쏘아붙였다.
" 하하하! 그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간혹 그렇게 해야 할 때가 있어."
" 지금이 그럴 때란 말입니까?"
" 응! 부하들이 같잖은 눈빛으로 쳐다볼 때는 약간은 거만하게 인사를 받아야 해."
" 효과가 있었습니까?"
노욱은 어이없는 얼굴로 물었다.
설사 그런 의도로 누워서 인사를 받았다고 해도 제 입으로 밝혀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니, 그렇게 하는 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 영감들이 정중하게 인사를 했고 지금은 대주로 생각하고 있잖아. 그럼 된 거 아냐?"
부르르!
노욱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연우강의 말처럼 궐주로부터 그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 같잖게 여겼다. 녀석의 말을 듣는 척하면서 감시할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없애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죽일 작정이었다. 그런데 녀석을 만난 지 반시진도 지나지 않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고, 지금은 대주로 인정하여 공개를 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물론 녀석이 싫다고 별동대를 떠날 수 없지만 진도가 너무 빨랐다.
" 머리 굴릴 필요 없어. 세상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나는 놈 위에는 날뛰는 놈이 있는 거야. 아무튼 영감이 부대주를 맡아줬으면 좋겠어."
" 부대주라는건........."
" 저 녀석들은 여전히 날 같잖게 여길 테고, 내가 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즉각 이행하지 않을 거란 말이야. 하지만 영감이 나를 대신해서 명령을 내리면 화살처럼 움직일 거 아냐."
" 그러니까 내가 대주의 입이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 바로 그거야. 조는 세 개로 나눌 거야. 일 조는 노인네들로 구성하고 조장은 단 영감이 맡아."
연우강은 단야를 보았다.
" 알겠습니다. 일 조 조장을 맡겠습니다."
" 이 조는 야랑대 무인들로 하고 조장은 복양후 당신이야."
" 아, 알겠습니다."
여전히 연우강의 반말에 적응이 되지 않는 듯 복양후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삼 조는 흑마괴문 무인들로 구성할 거고, 조장은 내 친구인 만인삭 관천행이 맡을 거야. 다른 의견 있는 사람?"
연우강은 대원들을 휘둘러보았다.
하지만 이견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연우강의 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아직은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이 조 조장은 가서 식량 준비해 와. 분량은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한 달치야."
" 아, 알겠습니다. 대주님."
복양후는 대원 몇몇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가급적이면 연우강을 보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고 생각한 듯 그의 걸음걸이는 상당히 빨랐다.
노욱은 혀를 내둘렀다.
일사천리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 부대주."
복양후를 지켜보던 연우강은 노욱을 보았다.
" 네."
" 벼락출세라는 것 말이야."
" 괜찮은 거란 말씀이십니까?"
" 응! 아주 좋아. 이래서 인간들이 출세를 하려고 발악을 하는가 봐."
연우강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맺혔다.
그런 그를 노욱을 비롯한 원로원 원로들은 일그러진 얼굴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