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64화 (164/232)

제 8장 전쟁 수칙 제 4조

나적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은원 무인을 공격한 자들을 찾기 위해 무곡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그런데 누군가가 머물렀다는 흔적만 발견했을 뿐 적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오늘도 역시 밀천무영대와 밀천사영대를 투입하여 무곡 일대를 수색 중이고, 보고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 어떻게 됐는가?"

나적리는 막 안으로 들어온 밀천무영대 대주 권자기를 보며 물었다.

" 적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방금 올라왔습니다."

권자기의 보고에 나적리는 반색했다.

그동안 형체도 없는 적 때문에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적을 발견했다고 하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시원해졌다.

" 정확한 위치는 파악했는가?"

나적리는 빠르게 물었다.

" 감로봉 북쪽입니다."

" 무인의 수는 어느 정도라고 하던가?"

" 파악된 인원만 사백에서 오백 정돕니다."

권자기가 파악된 인원이라 보고를 한 이유는 정확하게 얼마나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 그들이 전부라고 보는가?"

" 일단은 그렇습니다."

" 사오백이라......."

나적리는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는 오랫동안 찾아왔던 적을 발견했다고 해서 다짜고짜 출병을 감행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 원 가주는 어디 있는가?"

나적리는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 야궐 본영을 정찰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일단 출병 준비를 하고 기다리게."

" 병력은 어느 정도로 구성할까요?"

" 밀천무영대와 밀천사영대를 투입할 생각이네."

" 알겠습니다. 태상천주님."

권자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 밀사에게도 출병 준비를 하라고 전하게."

나적리는 나가는 권자기에게 말했다.

"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권자기가 나가자 나적리는 찻잔에 물을 따랐다.

" 이제 시작이다. 혁련무극."

그는 찻잔을 지그시 말아 쥐었다.

동쪽의 야궐 본영으로 정찰을 나갔던 원세군이 돌아온 건 저녁 무렵이었다. 원세군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수뇌들은 전부 나적리 천막으로 모여들었다.

" 보고하게."

나적리는 원세군을 향해 말했다.

" 적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 변화가 없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 오늘 남쪽 감로봉 부근에서 적이 발견됐다는 보고고 올라왔네. 규모는 사백에서 오백 정도라고 하네.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허허실실 계책일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해 봐야 하겠기에 말이네."

" 신중이 지나치면 실기할 수도 있습니다. 태상천주님."

전부터 계속해서 전쟁을 주장해 왔던 원세군은 남쪽에서 적이 발견됐다는 말에 더 이상은 참기 힘든 듯 강한 어조로 말했다.

" 당장 시작하잔 말인가?"

" 그렇습니다."

원세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 자네들 의견은 어떤가?"

나적리가 권자기와 무영세를 보았다.

" 문도들의 사기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공격을 늦추는 건 오히려 독이 될 듯합니다."

신중한 얼굴로 말을 하긴 했지만 권자기 또한 원세군의 의견에 동의했다.

" 그랬지. 산으로 들어온 지 벌써 두 달이 지났으니까."

나적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궐 무인들보다 보름 앞서 들어왔으니까 산 생활에 지칠 때도 됐다. 이젠 더 이상 정찰만 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 좋네. 공격을 시작하도록 하세."

나적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 잘 생각하셨습니다. 태상천주님."

원세군을 비롯한 수뇌들은 반색하며 소리쳤다.

" 지금부터 명령을 내리겠네. 나와 원 가주는 풍밀가 무인을 이끌고 혁련무극이 있는 자모곡과 동뢰곡을 공격하겠네."

"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태상천주님."

원세군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천막은 그대로 두고 갈 거네. 원 가주."

" 알고 있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원세군의 목소리는 활기가 넘쳤다.

" 그리고 자네들은 감로봉 쪽에 있는 적을 없애도록 하게."

" 알겠습니다."

이덕무와 권자기, 무영세는 고개를 숙이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로부터 반 시진 후.

삼천팔백여 명의 밀천 무인들은 야음을 틈타 각자에게 맡겨진 장소로 몸을 날렸다.

먼저 적진에 도착한 자들은 남쪽으로 향한 밀천무영대 무인들과 밀천사영대 무인 그리고 은원의 원로들이었다.

그들이 진영을 구축한 곳은 무곡 북부에 있는 황학봉 남쪽 기슭이었다.

진영에 도착한 이덕무는 권자기와 무영세를 불러 작전을 설명했다.

" 감로봉은 종남산 남쪽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고 거칠기로 유명하네. 좌우측에서 치고 들어가면 놈들이 갈 곳은 무곡밖에 없네."

" 무곡으로 놈들을 밀어넣자는 말입니까?"

권자기가 지도를 보며 물었다.

" 그들을 무곡으로 밀어 넣은 다음 신호를 보내면 내가 중앙에서 치고 들어가겠네."

" 신호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공격을 시작할 때 효시를 한 번 쏘고, 놈들을 무곡으로 밀어 넣지 못했을 경우엔 두 번, 그리고 무곡으로 밀어 넣었을 경우에 세 번을 쏘게."

" 알겠습니다."

권자기와 무영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 전 삼백을 데리고 난투곡을 통해서 감로봉 서편으로 가겠습니다."

먼저 권자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곧 밀천무영대 무인 삼백 명이 서쪽으로 몸을 날려갔다.

" 그럼 전 동쪽으로 가야겠군요."

이어 무영세가 삼백 명의 밀천사영대 무인을 데리고 동쪽으로 나 있는 포룡곡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전에 한번 와봤던 곳이라 밀천사영대 무인과 밀천무영대 무인은 거침없이 달려갔다.

" 우린 삼합정까지 간다."

이덕무는 나직이 말하며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권자기를 비롯한 밀천무영대 대원들이 감로봉 서편에 도착한 것은 축시 경이었다. 기척을 죽이며 전진하되 밀천무영대 대원들이 야궐 무인을 발견한 장소는 손자평이라는 벌판이었다.

" 산 위로 도망칠 염려는 없겠군."

권자기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손자평은 대부분이 자갈과 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뒤편엔 절벽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는 바로 뒤에 활을 든 무인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권자기의 시선을 받은 무인은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고 당겼다. 그가 화살을 쏠 준비를 하자 권자기는 삼매진화를 일으켜 화살 끝에 달린 심지에 불을 붙였다.

치이익!

심지가 타는 소리와 함께 화살 끝에서 푸른색 불꽃이 일렁였다. 사내의 손을 떠난 화살이 하늘 높이 올라갔다. 푸른 불꽃을 내는 화살은 밀천무영대와 밀천사영대만의 연락 수단이었다.

권자기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다렸다.

잠시 후, 동쪽 하늘에서 푸른빛이 목격됐다.

" 효시를 쏘아라!"

권자기는 검을 뽑으며 명령을 내렸다.

" 알겠습니다."

활을 든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는 효시를 시위에 재어 당겼다. 화살이 둥글게 휘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밀천무영대 무인들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효시가 쏘아지면 곧바로 공격을 시작해야 한다.

공격이 끝나고 다시 집합할 때까지 살아남게 될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다만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다.

밀천무영대 무인들은 각자의 무기를 불끈 틀어쥐었다.

휘이익!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르며 효시는 밤하늘을 뚫고 날아올라갔다.

" 공격하라!"

권자기는 고함을 지르며 손자평을 향해 몸을 날렸다.

" 공격하라!"

" 공격하라!"

바로 그때 손자평 동쪽에서도 우렁찬 함성과 함께 삼백 명의 밀천사영대 무인들이 각자의 무기를 치켜들고 야궐 무인들 진영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적이다!"

" 적이다!"

손자평에 진영을 구축하고 있던 자들은 대라검문 무인들이었다.

양쪽에서 살기 어린 외침이 들려오자 대라검문 문주 백마검 온자추는 좌우측에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그들은 사혈검 강석일과 건곤일검 남석선으로 대라검문 부문주였다.

" 행운을 비네."

" 문주님도 행운을 빕니다."

온자추의 말에 두 사람은 포권을 취하고는 곧바로 몸을 날려갔다.

" 대라검문 무인들은 나를 따라라!"

" 대라검문 무인들은 나를 따라라!"

좌우측에서 강석일과 남석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 창창창! 창창!

" 으악!"

" 아악!"

" 크아악!"

곧이어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렇게 한 식경 정도 싸웠을까.

차분하게 대응하던 대라검문 무인들이 무곡이 있는 방향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 적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앞에서 적을 공격하던 밀천무영대 부대주 화밀 자우철이 뒤편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 더 세게 밀어붙여라!”

권자기는 고함을 내질렀다.

아군이 강해서 대라검문 무인들이 물러나는 건지, 일부러 물러나는 건지 확인할 길은 없다. 아니,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경우이건 간에 자신들의 임무는 놈들을 무곡 안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그 임무만 완수하면 될 터였다.

“ 밀어붙여라! 죽여라!”

고함을 내지르고 난 권자기는 뒤를 돌아보았다.

“ 지금 쏠까요?”

화살을 들고 있던 자가 물었다.

“ 당장 쏘아라!”

“ 알겠습니다. 대주님.”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었다. 곧 세 대의 효시가 날카로운 수리를 내지르며 밤하늘을 갈랐다.

“ 이번엔 새 대네.”

“ 뭐가 세 대란 말입니까?”

연우강을 지켜보고 있던 노욱이 물었다.

“ 방금 그 소리 못 들었어?”

“ 그건 밤새 소리 아닙니까?”

“ 밤새 소리?”

“ 네.”

“ 밤새가 그렇게 울어?”

“ 그렇게 우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근데 왜 내겐 효시 소리로 들리지?”

연우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 효시 소리라고요?”

“ 군대 안 다녀왔지?”

연우강은 노욱을 빤히 보았다.

“ 어렸을 때 집안이 한가락했습니다.”

“ 빵빵했다는 말?”

“ 그렇습니다. 군역 같은 건 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부자였죠.”

“ 그런데?”

“ 사업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열 살이 되기 전에 홀라당 털어먹었습니다.”

“ 그래서 무인이 된 모양이지?”

“ 그런 셈이죠. 그런데 효시 소리라는 건 무슨 말입니까?”

“ 효시는 신호를 보낼 때 사용하는 화살이잖아.”

“ 그런 거였습니까?”

“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거야?”

연우강은 황당한 얼굴로 노욱을 보았다.

아무리 무인이라고 하지만 효시를 모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 무인들의 싸움에서 효시를 사용할 일이 얼마나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 한 번도 없었다는 거야?”

“ 우린 대야벌 소속 무인들입니다. 누군가에게 소식을 전할 일이 있으면 천리전음으로 충분했습니다.”

“ 그러니까 종남산처럼 엄청나게 넓은 장소에서 치러지는 대규모 전투는 처음이란 말이지?”

“ 그렇습니다.”

“ 초보들을 데리고 어떻게 전쟁을 치르라고.”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걱정 끼칠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그보다 효시는 왜 쏘는 겁니까?”

“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쓴다고 했잖아.”

“ 어떤 신호를 보내는 건지 알 수 있습니까?”

“ 효시는 개수에 따라 각각의 의미가 달라.”

“ 미리 정해놓고 쏜다는 말이군요.”

“ 그렇지. 하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엔 대충은 파악할 수 있어. 처음엔 한 번만 들려왔잖아.”

“ 네.”

“ 그건 공격을 시작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걸 거야.”

“ 누구에게 보낸단 말입니까?”

“ 누굴 거라고 생각해?”

“ 혹시....”

“ 맞아, 이 무곡 끝에는 적군이 무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을 거야.”

“ 그럼 두 번째 효시는?”

“ 두 번째는 세 번의 소리가 들렸잖아.”

“ 그랬지요.”

“ 그건 대라검문 무인들을 우리 안에 가뒀으니까 사냥할 준비하라는 신호일 거야.”

“ 우리라고요?”

“ 출구를 막고 입구를 막으면 무곡은 우리로 변하잖아.”

“ 그러니까 대라검문에서 놈들을 이곳으로 유인해 오는 것이 아니라 밀천 놈들이 대라검문 무인을 이곳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말입니까?”

“ 방금 내가 그랬잖아. 무곡은 좋은 우리라고.”

“ 그럼?”

“ 이 전쟁의 승패는 누가 무곡 지리를 잘 알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봐야 해.”

“ 밀천 무인들도 이곳 지리를 파악했다는 말이군요?”

그게 아니라면 대라검문 무인을 이곳으로 밀어 넣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묻는 말이었다.

“ 그 정도는 기본이잖아.”

“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잘해야지.”

“ 잘해요?”

“ 응! 모곤필.”

연우강은 한편 구석에 있는 모곤필을 불렀다.

“ 부, 부르셨습니까. 대주님.”

“ 네가 조사한 곳이 어디어디지?”

“ 일 번 통로와 삼 번 통로입니다.”

“ 일 번은 오 번과 연결돼 있고 삼 번은 구 번과 연결돼 있던가?”

“ 그렇습니다.”

“ 당장 출발해.”

“ 혼자 가는 겁니까?”

“ 남쪽 통로는 거의 쓸 일이 없을 거야. 그러니까 그쪽은 한 사람이면 돼.”

“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할까요?”

모곤필은 제 몸에 감고 있던 철삭을 가리켰다. 그의 철삭 위에 연우강이 쓰던 철삭을 감고 있었던 것이었다.

“ 주고 가야지.”

“ 알겠습니다.”

모곤필은 급하게 철삭을 풀어 연우강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인사를 하고 남쪽으로 내달렸다.

“ 운철 자넨 어디지?”

연우강은 철삭을 몸에 감으며 물었다.

“ 제가 맡은 곳은 칠 번 통로와 십일 번 통롭니다. 칠 번은 십일 번과 이어져 있고, 십일 번은 다시 십삼 번과 이어져 있습니다.”

“ 강무우와 함께 출발해.”

“ 알겠습니다. 대주님.”

이어 운철과 강무우과 몸을 날려갔다.

“ 우 영감.”

“ 난 이 번 통로와 사 번 통로요. 이 번 통로는 팔 번 통로와 이어지고, 팔 번은 다시 십사번 통로와 이어지오. 그리고 사 번 통로는 십이 번 통로와 이어져 있소.”

“ 차 영감과 함께 출발하시오.”

“ 알았소이다. 대주. 당장 출발하겠소이다.”

차석인과 우인남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날렸다.

“ 조심하시오. 두 분.”

“ 걱정 마시게. 대주. 우리 둘을 없애려면 최소한 적장 정도는 돼야 할 거네.”

멀리서 우인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초소칠을 보았다.

“ 전 육 번 통로입니다. 육 번 통로는 십 번 통로와 이어져 있습니다.”

“ 몸조심해.”

“ 알겠습니다. 대주님.”

초소칠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통로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지금껏 지켜보고 있던 혈마제 단야가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이거야.”

연우강은 품속에서 지도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단야는 지도를 보았다. 다른 곳은 그려져 있지 않고 오직 무곡만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구불구불하게 그려진 특정 부분에 숫자가 쓰여져 있었다.

서쪽에는 일, 삼, 오, 칠, 구, 십일, 십삼의 홀수가 적여 있고, 동쪽 즉 왼편에는 이, 사, 유, 팔, 십, 십이의 짝수가 적혀 있었다.

“ 이 숫자는 무슨 뜻입니까?”

조금 전에 통로 표시를 숫자로 했던 게 떠올라 물었다.

“ 무곡은 하나로 이어진 계곡이 아냐. 나무가 가지를 치는 것처럼 곳곳으로 뻗어 있는데, 그것들 대부분은 막다른 곳이야. 하지만 거기에 표시된 열네 곳은 다시 무곡 안으로 들어오게 돼 있어.”

“ 그러니까 일 번 통로로 들어가면 오 번 통로로 나온다는 말입니까?”

“ 그렇지. 반대로 해도 마찬가지고.”

“ 그런 곳이 전부 여덟 개가 있다는 말인군요.”

“ 우리가 찾아낸 건 그래.”

“ 지금 우리 위치는 어디쯤입니까?”

“ 십일 번 통로 부근이야.”

단야는 지도를 보았다. 십일 이라는 숫자가 적힌 곳은 무곡의 북쪽 부분이었다.

“ 대단하군요.”

단야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언제 이런 준비를 다 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 전쟁 수칙이라고 있는데 알아?”

“ 모릅니다.”

단야는 고개를 저었다.

“ 그럼 지금 가르쳐줄게. 죽기 전까지 네 가지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해. 전쟁수칙 제 1조. 적장의 상황을 파악하라! 전쟁 수칙 제 2조, 전투 치를 장소를 물색하라! 전쟁 수칙 제 3조, 물색한 장소를 완벽하게 파악하라!”

다른 이들이 전부 들을 수 있도록 연우강은 크게 말했다.

“ 제 4조는 뭡니까?”

“ 수칙 제 4조. 전부 죽여라!”

연우강은 차갑게 말하며 북쪽으로 몸을 날렸다.

‘ 놀라운 자군.’

연우강을 따라 몸을 날리는 단야의 눈에는 감탄의 기색이 역력했다. 팔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단시간에 연우강처럼 강한 인상을 주는 심어준 자는 없었다. 심지어 궐주인 혁련무극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에서는 노련함이 묻어 나오고,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진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돼 있다. 더욱 황당한 노릇은 녀석의 반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다.

‘ 이러다가 정말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네.’

[ 그러다 반하겠다.]

그때 노욱의 전음이 들려왔다.

[ 무슨 소린가?]

단야는 고개를 돌려 노욱을 보았다.

[ 자네 얼굴을 보니까 저 친구에게 반한 것 같아서 그래.]

[ 내 얼굴이 어때서?]

[ 회춘한 것 같아서 말이네.]

[ 회춘?]

[ 우리처럼 늙은이들에게 회춘이라는 건 꿈을 다시 꾸기 시작하는 걸 말하는 것 아닌가.]

[ 그러니까 내가 버렸던 꿈을 다시 꾸고 있단 말인가?]

[ 그런 것 같네.]

노욱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문득 궐주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 당시만 해도 세상을 우습게 보았고, 궐주와 함께라면 원하는 모든 걸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철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만큼 자신감이 넘쳤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자신감은 점점 퇴락하여 한때 꿈으로 묻혀갔다.

그리고 지금은, 그 꿈마저 접었다.

늙어간다는 것. 그것은 젊은 시절 꾸었던 꿈을 가슴 한편에 차곡차곡 쌓는 과정이었다.

[ 별소릴 다 하는구먼. 다 늙어서 꿈은 무슨 꿈]

단야는 피식 웃으며 연우강 바로 옆으로 따라붙었다.

노욱은 단야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전투를 앞둔 상황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오늘따라 유달리 단야의 몸에서 생기가 넘치는 듯했다.

‘ 어쩌면 궐주도 나와 같은지도.... 그래서 우리를 저 녀석 곁으로 보냈는지도.’

노욱은 내심 중얼거렸다.

자신, 단야, 육패천 세 사람은 야노원의 수장이고, 복양후는 궐주 호위대인 야랑대의 대주다. 게다가 네 명은 궐주 출타 시 단 한 번도 옆에서 떨어진 적이 없다. 즉 네 명이 있는 곳이 궐주가 있는 장소였다.

그런데 그 네명이 지금은 연우강을 따르고 있다.

단순히 감시할 목적으로 보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 당신도 늙었구려.”

“ 무슨 소린가?”

툭 뱉는 듯한 노욱의 말에 옆에 가고 있던 육패천이 고개를 돌렸다.

“ 누군가에게 꿈을 건네줘야 할 정도로 우리가 늙었다는 뜻이네.”

“ 내가 말했던가?”

“ 무슨 말 말인가?”

“ 자넨 너무 잘난 체한다는 거 말이네.”

“ 그렇게 느꼈는가?”

“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낀 거네.”

“ 난 그런 적 없네.”

“ 서생 자넨 못 느꼈겠지만 우린 그렇게 느꼈어.”

육패천은 빠르게 몸을 날려 연우강 왼편으로 섰다.

“ 클!”

단야는 낮게 웃었다.

서생.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별명이었다. 서생의 글 서 대신 쥐 서 자를 쓴 서생. 젊은 시절 단야와 육패천이 불렀던 별명이다. 육십대를 넘어 가면서 한번도 부르지 않았는데 오늘 이곳에서 다시 듣게 된 것이다.

‘ 그래, 죽기 전에 마지막 불꽃을 피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 일 조는 대주를 따르고, 이 조는 우측, 삼 조는 좌측을 맡아라.”

노욱은 주먹을 불끈 틀어쥠 고함을 내질렀다.

“ 존명!”

대원들은 우렁차게 소리치며 진형을 구축했다.

펄럭! 펄럭! 펄럭!

팟! 파앗!

바로 그 때 천리지청술을 펼치고 있는 일행의 귓전으로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와 더불어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멀리 수백의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삼합정에서부터 남쪽으로 다렬온 밀천 무인들이었다.

“ 몇 명이나 되는 것 같습니까?”

연우강은 철삭을 풀어내며 창노에게 물었다.

“ 사백 정도 되는 것 같구나.”

창노는 철삭을 풀며 대답했다.

“ 내기하시겠습니까?”

“ 무슨 내기?”

“ 누가 많이 죽이나 하는 내기요.”

파앗!

연우강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갔다.

오른편에는 단야가, 그리고 왼편에는 육패천이 따랐다.

“ 너무 빠릅니다. 대주.”

노욱은 검을 뽑아들고 연우강을 따라 내달렸다.

“ 쳐라!”

별동대 대원들이 몸을 날리는 그 순간 이덕무 또한 부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는 아직 앞에서 달려오는 자들이 누구인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다만 손자평에 주둔해 있다는 야궐 무인들 중 일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별다른 생각없이 공격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이덕무의 명령을 받은 밀천 무인들은 함성을 지르며 연우강 일행을 향해 질주해갔다.

“ 전쟁 수칙 제 4조!”

적진 앞에 당도한 연우강은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 전부 죽인다.”

별동대 대원들은 우렁차게 소리치며 밀천 무인들을 향해 쏘아져갔다.

촤르륵!

가장 먼저 연우강의 철삭이 쭉 나아갔다.

연우강을 향해 달려들던 밀천 무인은 철삭을 쳐내기 위해 검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막 검이 철삭을 쳐내려는 순간, 철삭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방향을 틀었다. 그러고는 사내의 왼쪽 가슴으로 거칠게 파고들어 갔다.

“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메아리가 되어 계곡 벽을 타고 퍼져 나갔다.

철커덩! 휘익!

들어간 속도보다 더 빠르게 튀어나온 쇠사슬은 채찍처럼 좌우로 크게 반동했다.

퍼억! 퍼억!

방금 죽은 사내 좌우측에 있던 두 명은 허리가 꺾이며 풀썩 쓰러졌다.

“ 차앗!”

연우강은 쥐고 있던 철삭을 사정없이 내던졌다. 그의 손을 떠난 철삭은 가공할 속도로 주변을 휩쓸었다.

활처럼 잔뜩 휘어졌다가 퍼지고, 둥글게 말렸다가 튕겨나간다. 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창처럼 쏘아져나가고, 도처럼 횡으로 쓸어간다.

“ 아악!”

퍼억!

“ 커억!”

푹!

“ 으아악!”

철삭이 휩쓸고 간 자리에 널따란 공터가 생겨났다.

“ 그건 무슨 수법입니까?”

연우강 근처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던 노욱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연우강은 철삭을 쥐고 있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 철삭은 살아 있는 것처럼 사방을 휘젓고 다니며 적을 도륙하고 있다.

옆에서 검을 휘두르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연우강의 철삭은 가공했다.

“ 지금부터 놈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물러나야 해.”

“ 알겠습니다. 대주님.”

노욱은 오른편의 복양후와 왼편의 창노에게 전음으로 지시를 내렸다.

“ 쳐라!”

“ 죽여라!”

좌우측에서 광포한 외침이 터져 나오고, 별동대 대원들의 공격이 더욱 거칠어졌다.

“ 빌어먹을!”

이덕무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파악된 적의 수는 백여 명뿐이다. 그런데 개개인의 실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특히 중앙에서 철삭을 휘두르는 자의 무공은 다른 자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엄청난 자였다.

“ 귀사!”

이덕무는 귀사 오창선을 불렀다.

“ 저놈을 맡아달라는 말인가?”

오창선도 연우강을 주시하고 있었던 듯, 그는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사사와 함께 가게.”

“ 알았네.”

고개를 끄덕인 오창선은 사사 적일광과 함께 연우강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 은원 무인들은 앞으로 나서라.”

두 사람이 몸을 날려가자 이덕무는 은원 무인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 존명!”

은원 무인들이 우렁차게 고함을 내지르며 전방으로 나섰다. 그 순간 오창선과 적일광은 연우강이 있는 곳으로 왔다.

“ 물러나라!”

오창선은 철삭을 향해 장력을 쏘아대며 소리쳤다.

콰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연우강의 철삭이 주춤했다. 바로 그 순간을 이용해서 밀천 무인들은 일제히 자리를 떴다.

“ 차앗!”

“ 타앗!”

공간이 만들어지자 오창선과 적일광은 광포한 고함을 내지르며 연우강을 공격해 들어갔다.

연우강은 주춤주춤 물러났다.

“ 쳐라!”

“ 밀어붙여라!”

전방으로 나선 은원 무인들은 무인들을 독려하며 무기를 휘두르고 장력을 난사했다.

[ 지금이야, 부대주.]

연우강은 노욱에게 전음을 보냈다.

[ 알겠습니다. 대주님.]

고개를 끄덕인 노욱은 복양후와 창노에게 연우강의 명령을 전달했다. 명령을 받은 별동대 대원들은 싸우는 척하면서 거의 표시가 나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물러났다.

하지만 예리한 눈으로 양 진영을 주시하고 있던 이덕무는 별동대가 물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금세 눈치챘다.

“ 놈들이 물러나고 있다! 더 세게 밀어붙여라.”

이덕무는 고함을 내질렀다.

“ 차앗!”

“ 타앗!”

“ 이야합!”

밀천무인들은 기합을 지르며 공격했다.

“ 아악!”

“ 으악!”

“ 크아악!”

계곡 곳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 어디까지 물러나는 겁니까?]

노욱은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구 번 통로까지 물러나면 될 거야.]

연우강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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