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66화 (166/232)

제 10장 살아서 귀환하라.

이천에 가까운 무인들이 흑우평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들은 동뢰곡을 떠나온 밀천 무인들이었다.

밀천 무인들에게 흑우평은 안방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흑우평에 들어서자마자 망설임 없이 남쪽으로 길을 잡았다.

나적리는 전 내공을 끌어올려 천리지청술을 펼치고 있었다. 그가 천리지청술을 펼치고 있는 이유는 남쪽의 무곡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천여 명이 전투를 치르고 있는 상황이고 이곳이 산이기 때뭉네 메아리가 돼 들려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가갷ㅆ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느닷없이 귓전으로 다수가 내지르는 함성이 들려왔다.

그 함성은 야궐 무인들이 내지른 외침이었다.

하지만 나적리는 그 함성을 누가 질렀는지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아직 전투 중이기 때문에 함성이 들려온 거라고만 생각했다.

“ 아직 전투중이다. 서둘러라!”

그는 급하게 고함을 내질렀다.

“ 서둘러라!”

“ 전력으로 달려라!”

각 수장들은 부하들을 독려했다. 그들은 곧 흑우평의 전우족곡과, 전좌족곡으로 들어갔다.

전우족곡과 전좌족곡은 아미곡으로 이어지고 아미곡은 다시 무곡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흡수되듯 빠르게 두 계곡으로 스며들어 가는 밀천 무인들을 바라보는 자들이 있었다. 흑우평 북쪽에 있는 그들은 혁련무극을 비롯한 야궐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밀천 무인들이 완전하게 모습을 감추자 하나 둘 흑우평으로 나왔다.

“ 여기서 무곡까지는 얼마나 걸리나?”

혁련무극은 유악재를 돌아보며 물었다.

“ 경공으로 가면 한 시진가량 걸리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 여기서 공격하려는 것 아니었냐는 질문인가?”

“ 그렇습니다.”

유악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네.”

“ 생각이 바뀌었단 말입니까?”

“ 조금 전에 들려온 함성 들었는가?”

“ 들었습니다.”

“ 그 함성은 대라검문 무인들이 내지른 함성이었네.”

“ 그걸 파악하셨습니까?”

유악재는 놀란 얼굴로 혁련무극을 보았다.

그는 천리지청술을 펼치는 상태에서도 희미하게 들려오는 함성만 들었을 뿐 누가 지르는 함성인지는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 그 전에 연우강의 외침이 들려왔네.”

혁련무극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역시 연우강은 영악한 녀석이었다.

일 조, 이 조, 삼 조.

그 세 개조는 야노원 원로들, 야랑대 대원들 그리고 흑마괴문 문도들을 지칭하는 말이 분명했다. 물론 밀천 무인도 조를 나누었을 테고, 일 조가 있고, 이 조가 있고, 삼 족,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파악한 바에 의하면 밀천의 정보 전달 수단은 효시였다.

효시를 가진 자들이 굳이 내공을 실어 고함을 지를 이유가 없다. 게다가 보통 사람이나 초극 무인이 아닌 자들은 천리지청술을 펼친다고 해도 연우강의 목소리는 듣기 힘들다. 이곳에 있는 자들 중 연우강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공격하라는 외침에 이어 들려온 함성.

그것이 대라검문 문도들의 함성이라는 것을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무곡의 전투는 대승을 거두었다는 의미일 테다. 그리고 연우강의 외침은 적을 무곡으로 끌어들이라는 신호였던 것이다.

“ 그랬군요.”

유악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은밀하게 따르라고 하게.”

“ 알겠습니다. 궐주님.”

유악재는 뒤편에 서 있는 흑마괴문 문주 나아추와 비도사문 문주 추도익에게 혁련무국의 명령을 전달했다.

곧이어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야궐 무인들이 남쪽으로 몸을 날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밀천 무인들처럼 허공으로 솟구쳐 몸을 날리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세를 잔뜩 낮추고 빠르게 이동했다.

전좌족곡과 전우족곡을 지나고 아미곡을 지난 야궐 무인들이 무곡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황학봉에 도착한 것은 새벽 무렵이었다.

구불구불 이어진 계곡에서 솟구쳐 오르는 안개는 그야말로 비경이었다. 그 속에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황학봉에서는 더 이상 천리지청술을 펼치지 않아도 싸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이상한데........”

유악재는 고개룰 갸웃했다.

무곡에서 들려오는 함성을 들은 시간은 한 시진 반 전이고 장소는 흑우평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싸우는 소리와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군인들의 전투와 달리 무인들의 전투는 빠르고 잔인하다. 양측 합쳐 천여 명가량이라고 해도 반 시진에서 한 시진 가량이면 전투는 끝나야 한다.

더구나 무곡은 좌우측 절벽이 높아 웬만한 경공을 가진 자가 아니면 넘을 수가 없다. 밀천과 야궐 무인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격인데, 아직 전투 중이라는 사실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 그래서 녀석이 무섭다는 거네.”

“ 무슨 말씀이십니까?”

유악재는 혁련무극을 돌아보았다.

“ 전투는 이미 끝났을 거네.”

“ 그럼 저 소리는?”

“ 대라검문 무인들끼리 대무를 하고 있을 거네.”

“ 대, 대무라고요?”

“ 싸우는 것처럼 해야 나적리가 무인을 이끌고 무곡 안으로 들어올 거 아닌가?”

“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유악재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 내려가 보면 알 것 아닌가?”

혁련무극은 싱긋 웃으며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황학봉 정상을 출발한 지 한 식경 후 일행은 공동 주변에 도착했다.

“ 저긴?”

이번엔 혁련무극이 고개를 갸웃했다.

공동을 보는 순간 차가운 기운이 섬광처럼 머릿속을 훑고 지나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 무곡, 포롱곡, 난투곡의 세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우물이라고 해서 삼합정이라고 부른답니다.”

공동에 대해 묻는 말인 줄로 착각한 유악재가 설명을 했다.

“ 그렇군.”

혁련무극은 공동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밀천과의 전쟁 중.

호기심을 충족시킬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 나적리가 이끄는 밀천 무인들은 이미 무곡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정찰을 나갔던 야랑대 대원이 돌아와 보고를 했다.

“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혁련무극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공동을 우회하여 무곡 입구로 갔다.

“ 정렬하라!”

무곡 입구에 서자 각 문파 문주들은 문도들을 향해 나직이 소리쳤다. 정렬하라는 명령이 뒤로 전달되고 야궐 무인들은 오와 열을 맞춰 늘어섰다.

“ 흑마괴문의 우인남과 차석인입니다.”

혁련무극은 나아추를 돌아봤다.

“ 그에게 보낸 문도가 맞습니다.”

나아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이쪽으로 와서 보고하라.”

혁련무극이 말하자, 안개 속으로부터 흑마괴문 옷을 걸친 자가 몸을 날려왔다.

“ 궐주님.”

우인남과 차석인은 혁련무극을 보자마자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한 우인남운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 이건 뭐냐?”

혁련무극은 종이를 펼치며 물었다.

“ 무곡의 지돕니다. 대주께서 전해주시라고 했습니다.”

“ 지도라면 이미......”

혁련무극은 의아한 얼굴로 우인남을 보았다. 전에 봤던 지도와는 많이 달랐다. 그때 지도에는 무곡을 비롯한 주변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이번 지도는 오직 무곡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구불구불 이어진 계곡을 따라 일 번부터 십사 번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고, 번호 두 개를 잇는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우측 끝에는 무곡 입구부터 출구까지 다섯 구역으로 나뉘어 아래쪽부터 시작하여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 이 숫자들은 뭘 나타내는 거냐?”

혁련무극은 우인남을 보며 물었다.

“ 계곡을 따라 적힌 숫자는 샛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샛길?”

“ 그렇습니다. 각 번호가 매겨져 있는 곳으로 들어가면 연결된 통로로 나오게 돼 있습니다.”

“ 그럼 일 번 통로를 이용해서 무곡을 빠져나가면 오번 통로를 통해 다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냐?”

“ 그렇습니다. 궐주님.”

“ 오른쪽에 있는 구역은 무엇을 나타내는 거더냐?”

“ 그것은 계곡의 폭에 따른 구분입니다. 맨 아래쪽 일 구역은 계곡의 폭이 삼십 장가량이고, 이 구역은 십오 장, 삼 구역은 십 장, 사 구역은 이십 장, 지금 궐주님께서 계신 이곳은 삼십 장입니다.”

“ 그렇구나.”

혁련무극은 놀란 눈으로 지도를 보았다.

폭이 삼십 장인 오 구역에 있는 십사 번 통로를 제외하면 나머지 구역에는 세 개씩의 통로가 있었다.

“ 십사 번 통로로 들어가면, 팔 번 통로로 나오고, 팔 번 통로로는 다시 이 번 통로와 이어져 있구나.”

“ 그렇습니다. 궐주님.”

“ 대라검문 무인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 이 구역과 삼 구역의 경계 지역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 계곡 폭이 가장 좁은 곳을 막고 있다는 뜻이구나.”

“ 네.”

“ 삼 구역의 통로는........”

“ 칠 번 통로, 팔 번 통로, 구 번 통로가 있습니다. 육 번 통로는 삼 구역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상당히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고요.”

“ 그럼 십삼 번, 십 번 통로를 이용하면 삼 구역으로 나갈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거구나.”

“ 그렇습니다.”

“ 이쪽으로 모이게.”

혁련무극은 각 문파 문주들을 불러 모았다. 곧 혁련무극 주변으로 유악재를 포함한 다섯 명이 모여들었다.

혁련무극의 작전은 간단했다.

각 문주들은 삼백 명의 무인을 이끌고 삼 구역의 각 통로로 가서 매복하고 있다가 적이 나타나면 치고 빠지는 작전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작전 회의가 끝나자 각 문주들은 삼백 명씩을 데리고 무곡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안내를 맡은 사람은 우인남과 차석인이었다. 천이백 명이 떠나고 나자 무곡 입구에는 천여 명 정도가 남아 있었다. 혁련무극은 그들을 다시 두 개 조로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오 구역고 사 구역 경계 지점까지 이동한 후 그곳에 오백 명을 배치했다.

그리고 남은 오백 명과 함께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 시각.

나적리를 비롯한 밀천 무인은 사 구역과 삼 구역 사이, 계곡의 폭이 시십 장에서 십 장으로 좁아지는 구간을 앞에 두고 있었다.

나적리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전방을 보았다.

밀천 무인은 이천 명에 육박한다.

그런데 계곡 폭은 십여 장. 반 장씩 늘어서면 한 줄에 세울 수 있는 무인의 수는 이십 명에 불과하고, 앞뒤 간격을 일 장으로 잡으면 밀천 무인들은 백 장 거리를 늘어서야 한다.

만일 적이 허리를 노린다면 아군에게는 치명적이다.

나적리는 좌우측 절벽을 보았다.

불과 오 장에 불과한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뿌옇게 흐려보인다. 나적리가 계곡의 폭보다 더 문제를 삼고 있는 건 바로 저 안개였다. 안력을 집중한다고 해도 칠, 팔 장 밖에 나오지 않는 시계는 그를 더욱 곤혹스럽게 하였다.

창! 창창창! 창창!

“ 으악!”

“ 아악!”

“ 크아악!”

잠시 잦아졌던 비명이 또다시 메아리가 되어 들려오고 있다. 소리가 큰 걸 보면 전투가 벌어지는 곳은 그리 멀지 않은 듯했다.

“ 이미 기호지세.”

나적리는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아군이 적과 싸우고 있는데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서 멈출 수는 없었다.

‘ 최대한 빠르게 치고 가는 수밖에.’

“ 지금부터 전력으로 달려간다!”

나적리는 고함을 내지르며 전방으로 몸을 날렸다.

“ 출발하라!”

“ 출발하라!”

앞쪽과 뒤쪽에서 우렁찬 함성이 들려오고, 밀천 무인들은 자욱하게 낀 안개를 뚫고 몸을 날렸다.

그렇게 일각 정도를 달려갔을까.

섬뜩한 기운을 감지한 나적리는 속도를 늦추며 오른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짙은 안개에 휩싸인 절벽만 보일 뿐이었다. 다시 그쪽으로 가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 아악!”

하지만 이내 다시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번 비명은 절벽을 타고 들려온 것이 아니라 곧바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최소 이백장 거리 안쪽에 적이 있다는 의미였다.

“ 서둘러라!”

나적리는 고함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그런 그를 가만히 쳐다보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있는 장소는 조금 전 나적리가 확인하려고 했던 곳으로 연우강이 작성한 지도에서 십 번 통로로 표시했던 곳이었다. 표정 없는 밀천 무인들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은 연우강을 비롯한 별동대 대원들이었다.

상당한 속도로 빠져나가고 있는 듯 밀천 무인들은 어느새 후미가 지나가고 있었다.

밀천 무인들은 통로 앞을 지나쳐 십여 장가량 멀어지자 연우강을 비롯한 별동대 대원들은 통로를 뛰쳐나갔다.

차르륵!

연우강의 몸에서 철삭이 풀려나가고 곧바로 밀천 무인의 등으로 파고들어 갔다.

“ 크악!”

처절한 비명이 사내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비명은 시작에 불과했다. 통로에서 튀어나간 별동대 대원들은 밀천 무인 후미를 무차별하게 공격해 들어갔다. 순식간에 수십 명이 죽어나갔다.

밀천 무인들은 공격을 시도해 보았지만 상대는 야궐 최강 무인들. 그들의 공격이 먹힐 리가 없었다.

무기조차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밀천 무인들은 쓰러졌다.

“ 이건 무슨 소리냐?”

앞에서 달려나가던 나적리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추며 소리쳐 물었다.

“ 저, 적입니다. 태상전주님. 후미에서 적이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 설마 계곡 이북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

나적리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무곡으로 진입하기 전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어떤 곳에서도 적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후미가 공격받고 있다니.

“ 비켜라!”

나적리는 후미로 몸을 날려갔다.

어떤 자들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생각이었다.

나적리가 뒤편으로 몸을 날려가자 그의 호위무사는 물론이고 원세군까지 뒤편으로 몸을 날려갔다.

“ 이럴 수가.......”

나적리의 얼굴이 참혹하게 굳었다. 공격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뒤로 왔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 이백여 명의 문도들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 놈들은 어디 있느냐?”

나적리는 문도들을 향해 소리쳐 물었다.

“ 사라졌습니다.”

“ 사라졌다고?”

“ 그렇습니다. 벌떼처럼 달려들어 공격을 해오더니 두어번의 공격을 마치고 안개 속으로 도망쳤습니다.”

“ 젠장!”

나적리는 전방을 노려보며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하지만 적의 움직임이라고 할 법한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 전진하라!”

그는 안개를 노려보다가 명령을 내렸다.

“ 전진하라!”

“ 전진하라!”

전진 명령이 떨어지자 밀천 무인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이번엔 전처럼 빨리 달리지 못했다.

안개 속에서 기습해 온 자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껏 들려오던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뚝 그쳐버린 것이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긴장감에 밀천 무인들은 빠르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밀천 무인들은 긴장한 얼굴로 좌우를 살피며 걸었다.

그렇게 반시진 정도를 걸었을까.

“ 와아!”

“ 우와아!”

느닷없는 함성과 함께 야궐 무인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그들은 연우강의 지시로 지금껏 싸우는 것처럼 행동했던 대라검문 무인들이었다.

“ 아악!”

“ 크아악!”

“ 으아악!”

또다시 밀천 무인들 선두가 홍수에 휩쓸린 둑처럼 무너져 내렸다. 백여 명을 없앤 대라검문 무인들은 빠르게 뒤편으로 몸을 날려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멈춰라!”

결국 나적리는 정지 명령을 내렸다.

지금처럼 나아가다가는 계속 당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던 밀천 무인들은 일제히 그 자리에 멈췄다.

“ 왜 그러십니까?”

안개 속을 살피던 원세군이 나적리 곁으로 가며 물었다.

“ 아무래도 우리가 당한 것 같네.”

지금껏 들려왔던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그것은 전투 중에 나온 소리가 아니라 야궐 무인들이 전투 중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 일부러 낸 소리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 함정이란 말입니까?”

“ 싸우는 소리는 놈들이 꾸민 거였네.”

“ 그럼 밀천무영대와 밀천사영대는?”

“ 전멸했겠지. 아무튼 지금부터는 신중하게 움직여야겠네. 앞쪽과 뒤쪽에 인사들을 내보내도록 하게. 남쪽에는 백명을 배치하고, 나머지 북쪽으로 배치하게.”

“ 후퇴하실 생각입니까?”

“ 우린 남쪽 지형을 잘 모르네. 하지만 삼합정 부근은 그동안 정찰을 많이 했던 곳이네. 전투를 치러야 한다면 이곳보다는 그곳이 훨씬 낫네.”

“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원세군은 각 부장들을 불러 모았다.

“ 남쪽에 백 명만 배치하고 나머지는 북쪽으로 배치하도록 해라.”

“ 알겠습니다. 가주님.”

각 부장들은 고개를 숙이고 앞과 뒤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곧 밀천 무인들 사이에서 백의를 걸친 자들이 앞쪽과 뒤쪽으로 향했다.

인사들이 투입되면서 전투의 흐름이 비로소 대등하게 바뀌었다. 통로에서 불쑥 튀어나온 야궐 무인들이 공격해 오면 밀천은 인사들이 나서서 그들을 막았다. 야궐의 일반 무인들은 안개 속에 숨어서 공격해 오는 인사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공격을 시도했던 자들 중 상당수가 죽임을 당했고, 그런 일이 잦다 보니 공격의 빈도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폭이 넓은 구간으로 갈 수가 없었다.

이십여 장만 더 가면 계곡의 폭이 이십 장으로 넓어진 곳으로 나갈 수가 있는데 상당수의 무인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무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앞을 가로막았다고 해야 했다.

“ 많군.”

나적리는 내심 침음성을 발했다.

자욱하게 긴 안개 때문에 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어느 정도 규모인지까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무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만으로도 적의 규모를 얼마든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앞을 가로막고 있는 기세는 엄청났다.

특히 그 기운들 속에 내포돼 있는 광포한 기운.

그 기운의 주인이 혁련무극이란 사실을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혁련무극 또한 나적리와 다르지 않았다.

밀천 무인들 쫓아 몸을 날리던 그는 진행을 멈추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전면 바닥이 아니라 허공이었다.  .

은밀한 기운이 안개 곳곳에 분포돼 있었다.

“ 동영의 인자들입니다. 궐주님.”

유악재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혁련무극을 보았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무곡은 은신술을 익힌 자들에게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장소다. 이런 상황에서 은신술을 펼친 자를 찾아 없앤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 인사들이라......”

휙!

혁련무극의 신형이 공간을 단축화여 날았다. 순식간에 오장여를 단축한 그는 허공을 향해 오른손을 쭉 내밀었다.

푸욱!

거북살스러운 소리가 흘러나오고, 그의 손이 들어간 자리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 크악!”

“ 아악!”

바로 그때 야궐 진형 좌우 끝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혁련무극은 오른편을 보았다. 야궐 문도 한 명이 목을 부여잡고 쓰러지고 있었다.  스악! 슥!

그리고 철삭 두 개가 허공을 유린했다.

흑마괴문 문도가 인사의 기척을 찾아 공격을 시도한 것이었다.

“ 컥!”

“큭!”

짤막한 비명과 함께 백의를 걸친 은사 두명이 몸통이 걸레처럼 찢긴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숨이 끊어진듯 두 명의 은사는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 넓은 곳으로 가면 오히려 당한다.’

혁련무극은 십 번 통로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 안 됩니다. 궐주.]

그때 그의 귓전으로 연우강의 전음이 들려왔다.

[ 왜 안된다는 거냐?]

[ 이번 작전의 승패는 적을 얼마나 오랫동안 끌고 다니느냐에 달렸습니다. 전면전을 할 것 같으면 이곳으로 끌어들인 의미가 없습니다.]

[ 밀천 무인들 중에 인사가 몇 명인지 아느냐?]

[ 그건 나도 모릅니다.]

[ 밀천 무인 중에 인사가 천 명 이상이라면 당하는 쪽은 우리다. 연우강.]

혁련무극은 이제 대놓고 연우강이라고 불렀다.

[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건 연우강 너는 야궐 무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 날 믿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 너 같으면 믿겠느냐?]

[ 하긴 나 같아도 그렇겠소이다. 아무튼 공격 명령을 내리는 건 실수하는 거라는 것만 알면 되오.]

[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연우강.]

“ 야궐 무인들은 공격하라!”

혁련무극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밀천 진영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쯧!”

연우강은 혀를 찼다.

밀천의 인사들이 위협적이긴 하지만 득보다 실이 많은 명령이었다.

“ 공격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대주.”

혁련무극이 공격 명령을 내리자, 노욱은 뛰쳐나갈 태세를 하며 연우강을 보았다.

“ 원래는 이게 아닌데..... 어쩔 수 없지.”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통로를 나섰다.

“ 미칠 준비는 됐느냐?”

통로를 나선 그는 대원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 됐습니다. 대주님!”

“ 좋다. 제군들. 지금부터 전투가 끝날 때까지 완전하게 미쳐라! 목이 마르면 적의 피로 갈증을 달래라! 그리고 그동안 즐거웠다.”

“ 떠날 겁니까?”

노욱이 연우강을 보았다.

“ 지금 당장 떠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 전쟁이 끝나면 보기 힘들거야.”

“ 저도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대주님.”

“ 즐거웠습니다.”

“ 아주 행복한 며칠이었습니다. 대주님.”

노욱을 비롯하여 연우강의 정체를 알고 있는 자들은 일제히 포권을 취했다.

“ 좋다. 제군들. 이제 마지막 명령을 내리겠다.”

연우강은 철삭을 풀면서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러고는 내공을 실어 크게 소리쳤다.

“ 하명하십시오. 대주님!”

별동대 대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고함을 내질렀다.

“ 별동대 대원들은 반드시 살아서 귀환하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 알겠습니다. 대주님!”

“ 차앗!”

“ 타앗!”

“ 이야압!”

별동대 대원들은 우렁차게 고함을 내지르며 적진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자들이 있었다.

절벽 위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들은 유를 비롯한 패천 무인들이었다. 물론 무곡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어, 아래쪽 상황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비명과 병기 부딪치는 소리만으로도 상황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 혁련무극은 지금 어디 있소?‘

유는 옆에 있는 신유를 보며 물었다.

“ 혁련무극과 나적리는 물론이고 두 단체의 수장은 중간지점에 있습니다.”

“ 방금 복소리의 주인은 연우강이고?”

“ 그렇습니다. 천주님.”

“ 진식을 발동하는 위치는?”

“ 저들이 있는 곳에서 이백 장 남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 시작하시오.”

“ 알겠습니다. 천주님.”

신유는 고개를 숙이고는 뒤편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장육철 일행이 서 있었다.

“ 맺힌 응어리를 풀도록 하게. 장 장로.”

“ 알겠소이다. 노야.”

고개를 끄덕인 장육철은 남쪽으로 몸을 날렸다.

잠시 후 그가 도착한 곳은 대라검문 무인들과 밀천 무인들이 접전을 벌이는 후미였다.

“ 준비됐느냐?”

장육철은 주변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 그렇습니다.”

사방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그런데 대답이 들려온 곳은 지상이 아니라 지하였다.

“ 발동하라!”

“ 존명!”

또다시 나직한 외침이 지하에서 들려왔다.

차르르! 차르르! 차르르!

곧이어 섬뜩한 느낌이 드는 쇠사슬 소리가 계곡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개의 쇠사슬을 동시에 끌고 당기는 듯했다.

우르르!

지진이 난 것처럼 계곡 전체가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지면으로부터 단면이 정사각형인 거대한 기둥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단면으로 가로 두 자, 세로 두자였다. 비 오는 날 죽순이 크듯 쭉쭉 밀고 올라온 기둥은 오 장 높이까지 솟구치더니 우뚝 멈췄다.

휘이익! 휘익!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소리가 기둥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주변을 감싸고 있던 안개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마치 기둥이 바람을 만들어내 안개를 날려보내는 듯했다.

쿠웅! 쿠웅! 쿠웅! 쿠웅!

기둥은 계속해서 솟아올랐다. 기둥의 수가 많아질수록 무곡을 채웠던 안개는 빠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안개가 사라진 곳을 새로운 기운이 채워나갔다.

그것은 음양의 기운이었다.

뜨겁고, 차가운 두 기운은 뱀처럼 서로 얽히면서 주변으로 펴져 나갔다.

차르르! 차르르! 차르르!

쇠사슬을 당기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때마다 지반을 뚫고 거대한 기둥들이 솟구쳐 올랐다.

무곡은 사각형 형태의 돌기둥 숲으로 변해하고 있었다.               ( 제 17권 끝)

황금 백수 1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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