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67화 (167/232)

제 1장 보는 걸로 족하자

쿠쿠쿠쿠!

돌기둥둘은 무서운 속도로 땅을 뚫고 솟구쳐 올랐다.

돌기둥이 솟구치면서 땅이 갈라진 듯 사방에서 뜨거운 물줄기가 분출했다.

외부에서 보는 모습은 단순히 돌기둥이 솟구치는 기이한 현상 같았지만 계곡 안쪽에 있는 자들에게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 절벽이 무너진다!”

“ 계곡이 무너지고 있다!”

대라검문 후미에 있던 자들은 겁먹은 얼굴로 고함을 내질렸다.

실제 그들 눈에 보이는 광경은 무곡의 양측 절벽이 무너지는, 아니 닫히는 것이었다. 마치 터진 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좁은 수로를 채우는 것처럼 계곡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폭이 삼십 장이나 되는 절벽이 닫힌다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계곡 안쪽에 있는 자들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 으아악!”

“ 아악!”

“ 아아악!”

미처 피하지 못한 무인들이 닫힌 계곡 안쪽에서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 계곡이 닫힌다!”

“ 계곡이 닫힌다!”

대라검문 무인들은 공포에 전 얼굴로 전방으로 내달렸다. 적과 교전 중이라는 사실은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아니 지워질 수밖에 없었다.

전투는 기본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한다. 요컨대 실력이 좋고, 약간의 운만 따라준다면 얼마든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싸운다는 말이다.

하지만 닫히고 있는 계곡은 다르다.

실력이나 운과는 무관하게 휩쓸리면 무조건 죽는다.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조금 전 들려온 비명으로 무섭게 닫히고 있는 저 모습이 상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대라검문 무인들은 앞만 보고 달리는 들소처럼 달려나갔다. 양쪽이 꽉 막힌 협소한 지역에서 뒤편에 있던 자들이 밀고 나가면 그 다음 상황은 뻔하다.

대라검문 진형은 서로 간에 얽히고설켜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하고 말았다.

“ 도대체!”

온자추는 넋을 잃었다.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가 있는 곳은 대라검문 진형 앞부분이었다.

“ 으악!”

“ 아악!”

처절한 비명이 또다시 들려왔다.

“ 빌어먹을!”

온자추의 입에서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온자추는 계곡이 닫히는 광경을 보았을 때 진식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문제는 저 진식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앞은 밀천 무인들에 의해 가로막혔고, 뒤에서는 죽음을 동반한 진식이 밀려오고 있다. 아군끼리 압사할 판이었다.

[ 나요, 문주.]

그때 귓전으로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연우강 너더냐?"

은자추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실은 이곳으로 오기 전 별동대의 대주가 연우강이란 사실을 혁련무극으로부터 들었다. 더불어 연우강을 대주에 앉힌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었다. 은자추가 대번에 연우강이라고 소리친 이유는 이번 일을 꾸민 사람이 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날 너무 높게 평가하는 것 같소이다. 문주.]

" 아니란 말이냐?"

[ 야궐 무인을 몰살시켜서 내가 얻을 게 있을 거라고 보시오?]

" 으음!"

은자추는 신음을 내뱉었다.

연우강의 말이 맞다. 지금 야궐은 대야벌과 척을 진 상황이다. 지금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대 또한 밀천 전 세력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양패구상시킨다고 해도 연우강이 얻을 건 거의 없었다.

[ 문주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아직 야궐을 필요로 하고 있소.]

" 하지만 우리를 이곳으로 끌어들인 사람은 너다."

[ 그래서 살아남을 방법을 가르쳐 주려는 거 아니오.]

" 방법이 있단 말이냐?"

[ 부문주가 무곡을 헤집고 다녔다는 사실을 잊은 게요?]

" 맞다. 통로."

은자추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깜빡하고 있었는데, 연우강의 말을 듣자 통로가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 가까운 곳에 구 번 통로가 있소. 그곳을 통해 차분하게 빠져나가도록 하시오. 우왕좌왕하며 빠져나가면 밀천무인들도 알아차린다는 걸 명심하시오.]

연우강의 전음을 들은 은자추는 주변의 부장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곧 대라검문 문도들은 구 번 통로를 통해 은밀하고 빠르게 빠져나갔다.

" 왜 우릴 돕는 거냐?"

은자추는 복잡한 얼굴로 물었다.

야궐과 밀천의 양패구상.

연우강이 야궐로 잠입해 들어온 이유라고 하였다.

두 세력을 양패구상시키려 한다면 지금처럼 좋은 기회는 없다. 뒤에서는 진식이 달려들고, 앞은 밀천 무인으로 막혔다. 그런데 연우강이 나타나 탈출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

물론 그동안 작전을 펼쳤으니까 통로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뒤쪽에서 덮쳐오는 진식이 통로까지 삼켜버리면, 통로는 의미가 없다.

두 세력을 양패구상시키기 위해 잠입했다는 녀석으로부터 탈출 방법을 듣자 기분이 묘했다.

[ 내가 당신들을 돕는다고 생각하는 거요?]

" 아니란 말이냐?"

[ 그렇소. 난 당신들을 돕는 게 아니라 내 편을 돕는 거요.]

" 네 편?"

" 첫째, 대야벌과 적이 되는 자. 둘째, 강호 무림의 주인이 돼도 금릉 연씨 세가에 해를 끼치지 않을 자, 셋째 내 부하들에게 억하심정이 없는 자, 이 세가지 조건이 충족되는 자들은 아직은 내 편이오.]

" 아직은?"

[ 그렇소. 아직은.]

" 그렇군."

" 문주님!"

그때 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부분이 빠져나가고 남아 있는 자들은 몇 없었다. 은자추는 구 번 통로를 향해 몸을 날려갔다.

대라검문 무인들이 연우강 덕분에 통로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면 밀천 무인들은 우연히 통로를 발견했다.

" 여기 통로가 있다!"

" 통로가 있습니다."

밀천 무인들은 고함을 내지르며 통로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손님이 있었다.

" 죽여라!"

흑마괴문 문주 나아추는 안으로 들어오는 밀천 무인들을 향해 철삭을 휘두르며 고함을 내질렀다.

" 적이다!"

" 매복이다!"

" 으악!"

" 아악!"

" 크아악!"

안으로 뛰어든 밀천 무인들은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나갔다.

" 매복입니다. 태상천주님!"

원세군은 굳은 얼굴로 보고했다.

" 철저하게 당했구나."

나적리는 뒤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양쪽 절벽은 빠르게 닫히며 이편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닫힌 절벽 아래쪽에서는 비명이 줄을 잇는다.

선택 가능한 수단은 두 가지.

피해를 무릅쓰고 통로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혁련무극이 가로막고 있는 적진을 향해 밀고 들어가야 한다.

" 결정하게."

나적리는 고개를 돌려 원세군을 보았다.

총지휘관은 자신이지만 문도들은 대부분 풍밀가 무인들, 자칫 전멸당할 수 있는 상황인데 풍밀가의 가주 원세군의 의견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통로는 이곳보다 더 좁습니다."

" 우리가 통로로 밀고 들어갔을 경우, 저들이 쫓아들어 오면 더 힘들어진단 말인가?"

나적리는 전방의 혁련무극 일행을 가리켰다.

" 그렇습니다. 지금음 밀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원세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뒤편에서 다가오는 진식이 있으니 적 또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이 결사적으로 통로를 방어하면 아군은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진식에 휩쓸리고 만다. 그럴 바엔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게 나은 방법이었다.

" 좋네. 그럼 돌진하도록 하세."

나적리는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곧 그의 입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 밀천 무인들은 돌격하라! 적을 부수고 전진하라!"

돌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밀천 무인들은 전방으로 쏘아져갔다.

승리하기 위한 돌진이 아니었다. 뒤쪽에서 다가오는 진식에서 살아남기 위한 돌격이었다.

살기 위한 싸움이 가져온 힘은 대단했다.

팽팽하게 유지되던 힘의 균형이 깨지고 야궐 무인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줄다리기에서 어느 한쪽이 밀리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처럼, 한번 물러나자 야궐 무인들은 걷잡을 수 없이 밀렸다.

" 물러나라!"

결국 혁련무극은 후퇴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후퇴 명령이 떨어지자 야궐 무인들은 빠르게 물러났다.

" 놈들이 도망친다! 공격하라!"

밀천 무인들은 고함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일각 정도 벌어졌을까.

그르릉! 쿠웅! 그그그!

이번엔 무곡 북쪽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떨리더니 기둥들이 불쑥불쑥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안개가 사라지고 새로운 기운이 들어차면서 야궐 무인들의 모습이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 야궐 무인들은 동뢰곡으로 와라!"

혁련무극은 전 내공을 실어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문도들을 제외하고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 진식이군."

아래로 내려선 혁련무극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안개는 짙게 낀다고 해도 내공을 끌어올리면 안개 속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기둥이 솟아오르면서 새롭게 생성된 기운에서는 어떤 기척도 감지되지 않는다. 마치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곳은 진식 내부밖에 없었다.

" 도대체 누가......."

혁련무극은 말끝을 흐렸다.

연우강으로부터 제삼 세력이란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잠룡대 대원들을 일컫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잠룡대 대원들과는 전혀 상관없었다.

무곡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의 대규모 진식은 하루 이틀에 설치할 수 없다.

더구나 진식의 매개체는 땅속에서 솟구친 돌기둥, 특수한 기관이 아니면 거대한 돌기둥을 밀어 올리지 못한다.

결국 이곳에 있는 진식은 최소 수십 년 전에 설치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잠룡대가 설치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 누가 됐든 나타나겠지. 가자!"

혁련무극은 북쪽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옆에는 야랑대 대원과 야노원 무인들이 따랐다.

스윽!

느닷없이 허공에서 차가운 기운이 밀려왔다.

혁련무극은 후려치듯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바닥에서 새하얀 광채가 폭사돼 부챗살처럼 퍼져나갔다.

" 큭!"

" 윽!"

허공에서 두 마디 비명이 흘러나오고, 백의를 걸친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밀천의 인사였다.

" 경계를 철저히 하라!"

혁련무극은 낮게 소리치며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 젠장!"

혁련무극은 얼굴을 찌푸렸다.

세상 만물은 기로 이루어져 있고, 아무리 막힌 곳이라고 해도 흐름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 있는 이곳은 사방이 꽉 막힌 석실 안에 갇힌 것처럼 흐름이 느껴지지 않았다. 엄청난 진식에 걸려들었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 모든 감각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말이군."

혁련무극은 그 자리에 가부좌를 했다.

일상적인 천리지청술로 파악할 수 없다면 초감각을 끌어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모든 감각을 주변으로 풀었다.

" 궐주님을 보호하라!"

야랑대 대원들이 일제히 몸을 날려 혁련무극 주변으로 늘어섰다.

" 으악!"

" 아악!"

" 아아악!"

바로 그때 가장자리에 선 야랑대 대원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야노원 원로들은 야랑대 대원들 사이로 들어가게."

원로 중 한 명이 고함을 내지르자 원로들은 몸을 날렸다.

" 차앗!"

" 타아!"

곧이어 야노원 원로들의 입에서 차가운 기합이 흘러나오고, 허공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리고 밀천 은사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지면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죽고 죽이는 살겁이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었지만 혁련무극은 태연했다.

그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식 안에서는 공격해 오는 적보다 사문을 피하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 엄청나군.'

감각을 주변으로 풀었던 혁련무극은 내심 신음을 흘렸다.

기의 흐르는 방향을 찾아내기는 했다. 그런데 한 곳밖에 없었다. 즉 진식을 설치한 누군가가 원하는 대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만일 기의 흐름이 끝나는 곳이 사문이라면, 문도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고 한 곳에 머물 수는 없는 상황이 아닌가.

' 일단은 가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인데...'

혁련무극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기의 흐름을 감지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혁련무극 일행이 이동하는 와중에도 밀천 인사들은 계속해서 공격을 해왔다. 일부는 야노원 원로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일부는 야량대 대원을 공격한 다음에, 야노원 원로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죽고 죽이는 접전을 펼치며 반 시진 정도를 내달렸을까.

혁련무극은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다름아닌 연우강을 따라갔던 노욱 일행이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많은 접전을 치른 듯 노욱 일행의 옷은 피로 점철돼 있었다.

" 적의 정체는 알아냈소?"

혁련무극은 노욱을 보며 물었다.

" 지금까지 만난 자들은 전부가 밀천 무인들이었소이다."

" 그럼 어떤 자들이 진식을 구축했는지 모르겠구려."

" 그렇소이다."

" 연우강은 어떻소?"

연우강이 아닐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딱히 집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 연우강은 절대 아니오."

노욱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 확신하시오?"

" 그렇소이다. 궐주."

" 양후 자네 생각은 어떤가?"

혁련무국은 시선을 돌려 복양후를 보았다.

" 저도 원주니모가 같은 생각입니다. 궐주님."

" 그렇군."

혁련무극은 노욱을 비롯한 일행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네 명의 얼굴을 차례차례 바라보던 그는 몸을 돌렸다.

" 녀석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구려."

혁련무극은 걸음을 옮기며 노욱을 향해 말했다.

" 인간적으로 끌리는 녀석이었소이다."

노욱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 어떤 점이 그렇게 끌렸소?"

" 그러니까......"

노욱은 그동안 연우강과 있었던 일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했다.

" 일부러 그렇게 행동했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소?"

" 우리 대부분은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살고 있소이다. 전투 중에 죽으면 그 자리에 묻은 다음에, 가족에게는 훌륭한 무인이었다는 말을 전하는 걸로 끝내오. 그런데 녀석은 죽은 무인들 뒤에 남은 가족을 더 걱정하더이다. 솔직히 충격받았소."

" 그랬구려."

혁련무극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아악!"

" 으아악!"

바로 그때 느닷없이 뒤편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혁련무극과 노욱은 급하게 뒤편으로 몸을 날렸다.

" 어떻게 된 일인가?"

혁련무극은 문도들을 보며 물었다.

" 갑자기 허공에서 팔이 튀어나왔습니다."

원로원 무인들은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 인사가 아니란 말이오?"

" 그렇습니다. 궐주님."

야노원 원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아악!"

휙!

반대편에서 비명이 들려오자마자 혁련무극은 몸을 날렸다. 몸을 날려가는 그의 시선에 허공으로 사라지는 손이 잡혔다. 마치 투명한 막을 빠져나가는 것처럼 팔이 사라지고 있었다.

쿠웅!

손이 완전하게 빠져나가는 순간 야노원 무인이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혁련무극은 쓰러진 무인 앞으로 내려섰다. 쓰러진 자는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는데 입술이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 독!"

혁련무극은 손바닥을 펴 시체 목 부근에 대고 허공섭물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시체 목에서 종이처럼 얇은 뭔가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뒤쪽은 둥글었고, 앞쪽은 뾰족한 흰색의 암기였다.

" 꽃잎처럼 생겼군요."

뒤따라온 노욱이 암기를 보며 말했다.

" 설마 이건....."

혁련무극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가문에서 보관해 온 고서에서 보았던 내용이 떠올랐다.

천오백 년 전 일세를 풍미했던 두 가지 암기.

그 중 하나는 밀천에서 보유했던 초살도였고, 다른 하나는 지천의 천단모용세가에서 보유했던 설화인이었다. 그 중 설화인은 백색이고 꽃잎 형태를 닮았으며 절독이 발라져 있다고 하였다.

" 아닐 거야."

그는 고개를 저었다. 백색 암기가 설화인이라고 보기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다.

" 그리고 설화인이 제 위력을 발휘하기 이해서는 바람이 강하게 불어야 하고, 풍천마인이 있다면 최강이 된다고 하였다. 이건 설화인을 흉내낸 물건에 불과할 뿐이다."

혁련무극은 부정하듯 고개를 저으며 전방을 주시했다.

바로 그때였다.

휘이익!

바람 소리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 마, 말도 안돼!"

휘이익! 휘이익!

그 말을 부정이라도 하듯 강한 소리와 함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 전력으로 달려라!"

혁련무극은 고함을 내질렀다.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니 설화인이 아니라고 해도 지금 당장은 자리를 피하고 볼 일이었다.

" 무슨 일이오?"

노욱은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 나중에 말해 주겠소. 뭐 하고 있느냐?"

혁련무극은 재차 소리쳤다.

" 알겠습니다. 궐주님!"

야랑대 대원과 야노원 무인들은 전방으로 질주해 갔다.

휘이이익!

그들이 몸을 날리는 순간 바람은 더욱 거칠어지고, 급기야 회오리바람으로 변했다. 그리고 십여 장 높이의 허공에서 하얀 물체가 눈처럼 회오리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 오냐, 한번 해보자."

혁련무극은 전 내공을 끌어올렸다.

구우웅!

장포가 팽팽하게 부풀고, 그의 전신이 먹물에 담근 것처럼 새카맣게 변했다.

" 나도 돕겠소이다."

" 아니오, 원주는 바람 속에 숨어 있는 놈들을 처리해 주시오."

" 바람 속에 사람이 숨어 있단 말입니까?"

" 저것들이 설화인이 맞다면 풍천마인이 숨어 있을 거요. 노 원주는 지금부터 문도들을 보호하시오."

콰앙!

전신이 먹물처럼 변한 혁련무극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그의 양손이 가공할 속도로 움직였다. 앞으로 뻗어내고, 옆으로 휘젓고, 아래로 긁어내리는, 마치 야수가 먹이를 덮칠 때 취하는 동작과 비슷했다. 그런데 그 위력은 야수가 앞발을 휘두를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손을 휘두를 때마다 공간이 찢겨 나가고 그 공간 안쪽에 있던 것들이 소멸됐다.

설화인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막강한 기운이 스치자 설화인들은 가루가 돼 흩날렸다.

콰앙!

바로 그 순간 그의 등판에서 둔탁한 소성이 흘러나왔다.

" 감히!"

혁련무극의 눈초리가 쭉 치켜 올랐다.

바람 속에 숨어 있던 어떤 것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이었다. 바람 소리가 워낙 거세어 바람 속에 누군가가 숨어 있다고 해도 알아차리는 건 쉽지 않았다.

그가 공격을 고스란히 허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혁련무극은 이미 금강불괴지신을 얻은 무인.

혁련무극이 받은 충격은 미미했다. 그는 갈고리처럼 구부리고 있던 오른손을 뒤편으로 휘둘렀다.

쩌엉!

순간 거대한 갈고리 형태의 강기가 허공에 나타나더니 뒤편 공간을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갔다.

스악!

허공에 다섯 줄의 혈선이 생겨나는 듯하더니 하얀 옷을 걸친 자가 지면으로 추락했다.

" 정말 풍천마인이란 말인가?"

혁련무극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추락한 시체가 풍천마인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조금 전 펼친 파천벽 때문이었다. 파천벽은 원래 금강불괴지신의 신체를 전문적으로 파괴하는 무공이다.

일반 무인의 몸이라면 몸을 베는 것처럼 쉽게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조금 전 파천벽으로 놈의 목을 잘랐을 땐 물을 베는 느낌이 아닌 딱딱한 뭔가를 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말은 곧 놈의 신체가 금강불괴지신에 가깝다는 뜻이다.

그러한 신체를 가진 자는 강시밖에 없을 테고, 바람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강시는 풍천마인밖에 없다.

" 크아악!"

" 으악!"

" 으아악!"

" 야노원 원로들은 강기막을 쳐라!"

처절한 비명에 이어 노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바람 속에 풍천마인이 숨어 있다. 그들을 조심하라!"

혁련무극은 고함을 내질렀다.

그는 허공을 건너뛰며 설화인을 가루로 만들고, 풍천마인을 없애고 다녔다. 그러나 회오리바람의 반경은 이십 장에 달할 정도로 넓었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설화인의 수는 너무 많았다.

혁련무극이 움직이는 와중에도 야랑대와 무인들은 설화인과 풍천마인의 공격을 받아 하나 둘씩 지면에 몸을 뉘였다.

" 어떤 놈이냐?"

혁련무극은 분노한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풍천마인은 혁련무극도 잘 알고 있었다.

풍천마인의 제강법이 적힌 비급을 발견한 사람은 담대천호였다. 비급을 발견한 담대천호는 곧바로 풍천마인 제강에 들어갔다. 그 일을 맡았던 자가 야효였다.

최근에 연우강의 무공 정도를 알고 나서 깨달은 사실이지만, 풍천마인을 제강했던 야효는 연우강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날  풍천마인도 전부 죽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다시 풍천마인을 보게 된 것이다.

천단모용세가의 설화인과 함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풍천마인을 제강하여 이곳에 푼 자가 담대천호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었다.

" 빌어먹을!"

혁련무극은 욕설을 뱉어내며 거칠게 무공을 펼쳤다.

풍천마인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있는 사람은 혁련무극 말고도 또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연우강이었다.

그는 마라천력을 끌어올려 바람으로 막을 친 상태였다. 그가 강기막이 아닌 바람을 이용해서 막을 친 것은 바람과 함께 날아다니는 하얀 암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막으로는 암기를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동정호 지하로 들어갈 때 소용돌이 속에서 쳤던 막이었다. 그때는 물속이었기 때문에 물로 막을 쳤고, 지금은 바람 속이기 때문에 바람으로 막을 쳤다.

효과는 좋았다.

바람 속에 섞인 하얀 암기들은 바람막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고 스쳐 지나갔다.

그를 비롯한 다섯 명이 비교적 편안한 얼굴로 진식을 헤치고 나아가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 거참 이상하네."

" 신발점이 필요한 상황이오?"

옆에 있던 군무옥이 물었다.

그와 무원은 진식이 완성되기 전에 연우강을 만나 합류한 상태였다.

퍼억!

막 안으로 손 하나가 쑥 들어왔다.

하얀 암기는 뚫지 못하지만 지금처럼 강한 힘은 막을 쉽게 뚫고 들어왔다.

차르르!

바로 그 순간 창노의 몸에 걸려 있던 철삭이 쭉 나아가서는 막 밖에 있는 괴인의 목을 감아 막 안으로 끌어들였다. 철삭으로 목을 감는 순간 목뼈를 부러뜨려 버린 듯 괴인은 이미 불능 상태로 변한 후였다.

" 저놈들은 내 손에 전부 죽었단 말이야."

연우강은 풍천마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 저것들이 뭔데 그러쇼?"

" 천마삼강 중의 하나인 풍천마인이야."

" 이놈이 풍천마인이란 말이냐?"

무원과 창노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 전에 풍천마인을 없앤다는 말을 했던가요?"

" 듣기는 했지만......"

두 사람은 연우강이 풍천마인을 없앤다는 말만 들었을 뿐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 풍천마인을 제강할 만한 곳은 무성밖에... 이런!"

연우강은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 왜 그러느냐?"

무원은 연우강을 보았다.

" 야효는 풍천마인을 어떻게 제강했을까요?"

연우강은 되물었다.

" 비급을 발견했겠지." "

" 그 비급은 어떻게 발견했을까요?"

" 그러니까 네 말은 풍천마인 비급의 최초 소유자가 신유 일행일 수도 있다는 거냐?"

" 그래야 이곳에 있는 풍천마인들이 설명되잖아요."

" 그럼 신유 일행은 풍천마인을 필요한 만큼 제강한 다음 비급을 무성에 던져 놓은 게로구나."

" 그런 것 같아요. 어쩌면 그 풍천마인으로 인해 담대천호가 벌주의 꿈을 꾸었을 수도 있고요. 그리고 전대 성주를 없앨 결심을 했을 수도..."

" 전대 성주를 없앨 결심을 했다는 건 무슨 소리냐?"

" 모르세요?"

" 뭘 말이냐?"

" 담대천호를 비롯한 무영들이 반란을 획책하여 전대 성주를 제거한 사건이 있었는데 정말로 모르세요?"

" 무성이 있는 지옥은 철저하게 비밀에 휩싸인 장소였다. 그곳으로 들어갈 방법도 없었을뿐더러, 설사 들어간다고 해도 살아 나온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도 하겠네요."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데 그 사건을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게냐?"

이십여 년 전에 무성 성주가 죽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영들이 성주를 해쳤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ㄲ다. 그런데 대야벌 최고 정보 단체라는 야장에서도 파악하지 못한 그 사건을 연우강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 담대천호를 비롯한 무영들에게 공격을 받은 그분은 팔다리가 잘린 상태에서 화산까지 도망쳤어요. 종남산 자락에 임신한 부인이 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분은 끝내 화산을 넘지 못했나 봐요. 태어날 자식을 위해서는 모자와 앙증맞은 신발, 베냇저고리를 준비했고, 해산할 부인을 위해서는 구엽음양과라는 영약을 준비했지만, 끝내 전해주지 못했죠. 결국 그분은 검애 아래쪽 동굴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어요."

" 그러니까 네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

" 우연히 알게 됐어요."

' 맙소사!'

창노의 눙니 휘둥그레졌다.

전에 연우강과 함께 이곳 지하로 들어갈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녀석은 친아버지 앞에서 운화와 잤다고 했다. 그렇다면?

' 그랬구나.'

창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의 전대 성주 묵사. 그는 다름 아닌 연우강의 친아버지였던 것이다.

푸욱!

또다시 손 하나가 바람의 막을 뚫고 들어왔다.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던 풍천마인이었다.

연우강의 시선이 풍천마인에게로 향했다. 원래부터 그런건지, 아니면 제강 과정을 거치면서 변했는지 모르지만 풍천마인의 얼굴은 새카맣다.

연우강은 풍천마인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얼굴 형태를 그리고, 눈을 그리고 입을 그렸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 저건?"

연우강 옆에 있던 독고철웅은 깜짝 놀랐다.

연우강의 몸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오는 듯하더니 풍천마인의 얼굴이 가루로 변한 것이었다.

" 어렵지 않네."

연우강은 피식 웃엇다.

" 방금 그건 뭔가?"

독고철웅이 물었다.

" 그림을 그렸소."

" 그림을 그렸다고?"

" 머릿속에 그림을 그렸단 말이오."

연우강의 시선이 이번엔 바람 속에서 날아다니고 있는 백색의 암기로 향했다. 마치 목련 꽃잎처럼 생긴 그것이 그의 머릿속에 박히는 순간, 가루로 흩어졌다.

" 심검인가?"

독고철웅은 뭐에 홀린 듯한 얼굴이었다.

" 아직은 초기 단계요."

연우강은 속도를 높였다.

다섯 명을 태운 바람의 막은 전방으로 쏘아져 갔다.

연우강은 빠르게 지나쳐 가는 설화인으로 시선을 주었다. 어떤 설화인은 가루로 변하고, 어떤 설화인은 멀쩡한 상태로 지나쳐갔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굳이 모든 걸 그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린다는 건 결국 사물을 정확하게 본다는 뜻이다. 정확하게 보는 게 곧 그림을 그리는 첫 번째 과정인 것이다.

" 심뢰는 보는 걸로 족하다!"

연우강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전방을 천천히 쓸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하얀 가루가 휘날렸다.

" 미친........"

독고철웅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조금 전 연우강은 분명 초기 단계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몸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오고,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의 물체가 가루로 흩어지고 있다.

저건 초기 단계가 아니라 완벽한 심검이다.

살아생전 심검을 성취하는 과정을 바로 옆에서 목격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난 마라천력인이잖소."

연우강은 독고철웅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 보, 보지 마, 인마!"

독고철웅은 버럭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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