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68화 (168/232)

제 2장 그들은?

희멀건 두 육체가 뱀처럼 엉켜 있었다.

두 육체가 엉켜 있는 이곳은 천막 안이었다. 아래쪽에 얇은 천이 깔렸고, 한편 구석에는 화로가 놓였다. 하지만 화로는 싸늘하게 식어, 사막의 바람을 데워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엉킨 두 육체의 움직임은 조금의 게으름도 용납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거칠어지고, 두 육체에서 붐어져 나오는 열기는 데일 듯 뜨겁다.

사내가 움직일 때마다 아래쪽 여자는 자지러지는 듯한 비음을 토해냈다. 그녀가 쾌락에 겨운 신음을 토해낼 때마다 백발은 잔물결처럼 휘날렸다.

그러면서도 여인은 결코 눈을 감지 않았다.

쾌감에 취한 듯 게슴츠레한 눈으로 사내의 눈을 응시하고 있는 여자는 북해빙궁의 궁주 수나인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찍어누르는 사내는 제천강이었다.

" 너무 강해서 견디기 힘들어요."

수나인은 수컷의 본능을 잘 아는 여자였다.

사실 제천강은 백 살이 넘는 나이에 비해 강건하지만, 젊은 청년과 비교할 수는 없다. 젊은 청년들이 광풍이라면 제천강은 미풍에 불과하다. 흡족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하면 절대 안 된다.

북해빙궁과 패천의 연합이 바로 이 육체관계로 인해 시작됐기 때문이다. 육체관계가 지속되고, 동일한 목표가 있는 한 서로를 배신할 일은 없을 것이다.

" 허허허! 내가 그렇게 강하더냐?"

역시 예상했던 말이 들려오고, 제천강의 몸에 힘이 실렸다.

수나인은 눈웃음을 치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부탁이 있는데......"

" 우리 사이에 부탁이란 말은 좀 그렇구나."

" 어머! 미안해요. 천강."

" 하하하!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더구나. 그래, 무슨 말이냐?"

천강이라는 호칭에 기분이 좋아진 듯 제천강의 몸놀림이 더욱 거칠어졌다.

" 북청강의 머리가 필요해요."

수나인은 달뜬 신음을 흘리며 소곤댔다.

" 그놈이 너를 배신한 게냐?"

" 그래요. 천강. 그자가 배신만 하지 않았더라면 우린 손쉽게 변황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을 거예요."

수나인의 눈에서 차가운 기운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북청강의 배신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가 야율사은을 따를 때만 해도 일부러 그런 걸로 여기고 다른 천주들을 포섭하는 작업을 했다.

그렇게 해서 새외귀막, 남만독존궁, 포달랍궁. 청해천종림까지 다섯 곳의 천주를 끌어들였다. 이제 거사만 남았는데 북청강이 연판장에 서명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건 명백한 배신이었다.

" 걱정 말거라. 그놈의 머리를 곱게 싸서 선물해 주도록 하마."  " 고마워요, 천강."

두 사람의 움지임은 더욱 거칠어지고, 천막 안은 후끈 달아올랐다. 수나인과 제천강이 천막을 나선 건 한 식경 후였다.

두 사람의 천막은 다른 천막과 멀리 떨어진 모래 언덕 위쪽에 세워져 있었다.

언덕 위에 선 두 사람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백 개의 천막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몸을 날린 두 사람은 곧 중앙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수나인은 일행을 둘러보았다.

천막 안에는 오른편부터 흑사귀랑 단극효, 만독존자 당갈, 가람존자, 해룡왕 막불군 그리고 동생인 나옥심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단극효에게로 향했다.

이번 일을 추진하는데 가장 공을 들였던 사람은 단극효다. 사막에 있는 북천지옥부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사막을 잘 아는 자들이 필요했다.

전에 북청강과 손을 잡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배신하고 나자 사막을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남만독존궁이나, 포달랍궁, 그리고 청해천종림은 사막과 거리가 한참 먼 자들이다. 그들을 데리고 북천지옥부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새외귀막의 천주 단극효를 포섭하기로 했다.

사실 단극효는 포섭하기 쉬운 자가 아니었다.

야율사은과 연우강의 도움으로 새외귀막의 천주가 된 단극효는 다른 천주들보다 야유사은에게 호의적이었다.

몇 번 만나서 슬쩍 떠보았지만 마음을 돌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선 사람이 옥심이었다.

선천적으로 꼽추였던 단극효는 혼인도 하지 못했고, 여자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옥심이 다가가 술을 잔뜩 먹인 상태에서 관계를 가졌다. 물론 단극효는 한 번의 관계로 마음을 돌릴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도 자식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옥심이 임신했다는 말을 은근슬쩍 흘렸는데, 그 말을 들은 단극효는 연판장에 장인을 찍었다.

" 자! 이제 새로운 역사의 시작입니다. 여러분. 최선을 다해 주세요."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지금 출발하는 거요?"

만독존자 당갈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 오늘 밤 안으로 끝내야지요."

" 알았소. 준비하도록 하겠소."

당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른 이들도 따라 일어났다.

" 단 천주."

수나인은 단극효를 불렀다.

" 우리가 앞장서겠소. 천주."

단극효는 수나인을 보며 말했다.

" 자식에게는 좋은 세상을 물려줄 수 있을 거예요."

수나인은 '자식' 이란 말에 힘을 주었다.

" 알았소."

단극효는 잠시 나옥심을 돌아보았다. 한동안 그녀를 쳐다보다가 천막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나옥심은 수나인을 보았다.

" 함께 가."

[ 이번 거사의 성패는 새외귀막이 어떻게 해주느냐에 달려 있으니까 잘해.]

[ 알았어요. 언니.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 뭐가 궁금해?]

[ 자식을 낳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 그건 왜?]

[ 그냥 궁금해서.]

[ 난 여설을 낳았을 때 화가 났다.]

[ 왜 화가 난 거지?]

[ 난 아들을 원했으니까.]

[ 아들을 원한게 아니고, 궁주 자리를 원한 거 아니었어?]

[ 내가 그 등신에게 시집을 간 이유가 궁주 자리 때문이었어. 그런데....]

[ 딸이 태어나면 장차 그 아이가 빙궁 궁주가 되니까 화가 났단 말이네?]

[ 자식은 북해빙궁과 나를 이어주는 매개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언니가 너무 이기적이란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

[ 그랬기 때문에 이 자리까지 와 있는 거야.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너와 난 골방 구석에 틀어박혀 내리는 눈을 쳐다보며 한숨이나 쉬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 너 이상하구나.]

수나인은 의아한 얼굴로 나옥심을 보았다.

수나인이 알고 있는 동생은 자신 이상으로 차고 매몰찬 성격의 소유자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했다.

전쟁을 앞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동생의 몸에서 따스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는 듯했다.

[ 혹시 정말로 임신한 거니?]

수나인은 굳은 얼굴로 물었다.

[ 별소릴 다 하네. 그냥 궁금했을 뿐이야.]

[ 정말이지?]

[ 그렇다니까 그러네. 아무튼 그이는 내가 감시할 테니까 걱정 마, 언니.]

나옥심은 싱긋 웃으며 나갔다.

" 같이 가요, 상공."

곧 밖에서 나옥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과 다름없이 약간은 차갑고 메마른 목소리였다. 그제야 수나인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가요, 천강."

그녀는 제천강과 함께 천막을 나섰다.

늘 그렇듯 사막의 밤은 추웠다.

추위에 익숙한 북해빙궁 무인들에게는 별것 아니었지만 남만의 독존궁이나, 청해천종림 무인들은 내공을 끌어올려 파고드는 한기를 막았다.

일만오천 명에 달하는 다섯 문파 무인들은 별빛을 길잡이 삼아 북천지옥부로 향했다. 그들이 북천지옥부가 내려다보이는 사구 위에 도착한 것은 새벽 무렵이었다.

곳곳에 횃불이 밝혀진 북천지옥부는 평온해 보였다.

북천지옥부를 내려다보는 다섯 문파 무인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이곳에 있는 누구도 북천지옥부를 혈맹이라고 여긴 적은 없다. 하지만 북천지옥부는 변황의 중심이었고, 존재 자체만으로 의의가 있었다. 그런 곳을 공격하려고 하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러한 분위기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수나인이었다. 수나인은 제천강을 돌아보았다.

[ 알았다. 우리가 먼저 시작하마.]

제천강은 전음을 보내고는 전방으로 나섰다.

제천강이 나서자 그를 따라왔던 패천 무인들이 일제히 몸을 날려 뒤편으로 늘어섰다.

" 뭐가 보이느냐?"

제천강은 북천지옥부를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물었다.

" 하룻강아지가보입니다."

패천 무인들은 동시에 소리쳤다.

" 그렇다. 저 하룻강아지는 지난 천여 년 동안 자칭 변황의 하늘이라며 거들먹거렸다. 우린 저 하룻강아지들에게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자칭 북천대제라고 부르는 애송이의 머리를 가져와라! 그리고 중원의 무학이 왜 천하제일인지를 북천의 애송이에게 확실하게 보여줘라!"

" 존명!"

패천 무인들은 우렁차게 소리치며 북천지옥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들의 선두에는 패천팔노인 암절 검산일이 있었다.

" 가자, 나인."

문도들이 먼저 몸을 날려 가자 제천강은 수나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 아, 알았어요."

수나인은 좌우측으로 시선을 주었다.

" 돌격하라!"

" 공격하라!"

" 출발하라!"

가장 먼저 단극효가 새외귀막 문도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고, 뒤이어 다른 천주들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일만오천 명의 무인들이 일제히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 이래서야.......'

수나인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아군 일만오천 명은 적진을 향해 몸을 날리는 중이다. 그런데 무인들의 몸에서 투기가 흘러나오지 않고 잇다. 아무리 야음을 틈탄 기습이라고 하지만, 싸우러 가는 자들의 자세가 아니었다.

' 방법을 찾아야 해.'

수나인은 내심 중얼거렸다.

만일 지금 상태에서 북천지옥부 무인과 마주한다면 전투를 치를 수 없을 것 같았다. 분위기를 바꿀 만한 뭔가를 찾아내지 못하면 패하고 말 거라는 걱정이 들었다.

[ 걱정 말거라. 무인이란 피를 보게 되면 흥분하기 마련이고, 흥분하게 되면 없던 투기도 생겨나는 거다.]

수나인의 내심을 눈치챈 제천강은 전음을 보냈다.

[ 그럴까요?]

[ 내 경험을 믿어라.]

제천강은 빙그레 웃으며 수나인의 손을 잡고 북천지옥부를 향해 몸을 날렸다.

먼저 달려갔던 패천 무인들은 북천지옥부의 담 앞에 당도해 있었다.

" 서둘러야겠구나."

제천강은 자랑을 하듯 다른 자들을 추월하며 쭉쭉 나아갔다.

빠르게 나아가는 제천강과 수나인은 조금 전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 중원의 무학이 왜 천하제일인지 북천의 애송이에게 보여줘라!'라고 하였던 제천강의 발언.

물론 이곳에 있는 이들은 제천강이 부하들을 독려하기 위해 그 말을 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모멸감에 얼굴을 붉혔다.

그들의 눈에 비친 제천강은 도움을 주기 위해 온 조력자가 아니라, 식민지를 둘러보러 온 제국 관리였다.

힘이 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한 사정은 천주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 난 당신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 전쟁을 찬성하지 않았을 거요."

단극효는 몸을 날리며 말했다.

" 단지 나 때문이란 말인가요?"

나옥심은 단극효를 돌아보았다.

" 난 사랑이란 말에 익숙하지가 않소. 유아기 때는 낙타 젖을 먹고 자랐고, 잠은 유모 방에서 잤소. 그녀가 죽고 나서는 줄곧 혼자 살았고, 내게 다가온 여자도 없었지만 다가가고 싶은 여자도 없었소. 그런데 난생처음으로, 아니 유모 이후에 처음으로 여자가 내 곁으로 다가온 거요. 그런데 그게 의도적인 접근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거부할 수가 없었소."

" 상공!"

나옥심은 단극효를 불렀다.

" 보통 사람에게는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일들이 내게는 기연처럼 다가오기도 하는데 그 만남이 그랬소. 내게는 그만큼 소중했소.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 만남을 지속하고 싶었고,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랑한다고 하였던 그녀의 말을 믿었소. 아니 어쩌면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소. 그래서 자식을 가졌다는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뻐하는 척했는지도 모르겠소. 아무튼 그동안 고마웠소. 나 같은 꼽추와 자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 부디 원하는 일을 이루기 바라오."

단극효는 내공을 끌어올려 나옥심에게서 멀어졌다.

나옥심은 멍한 얼굴로 멀어지는 단극효를 보았다.

그가 모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짐작 정도일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속아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사랑 때문이란다.

태어나 처음으로 찾아온 사랑.

" 난......."

나옥심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 상공!"

그녀는 단극효를 부르며 몸을 날렸다.

갑자기 불안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단극효는 새외귀막의 천주다. 그런 그가 문도들을 버려두고 혼자 북천지옥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의 뒷모습이 마치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 같이 가요, 상공."

그녀는 전 내공을 끌어올려 단극효를 쫓아 달렸다.

하지만 그녀는 북천지옥부에 도착할 때까지 단극효를 다라잡지 못했다.

" 텅 비었습니다."

북천지옥부 담을 넘으며 그녀가 들은 말이었다.

" 기습에 대비하라."

제천강은 급하게 주변을 쓸어보며 소리쳤다.

패천 무인들은 제천강 주변으로 모여들어 방어자세를 취했다. 북천지옥부 담 근처에 당도한 다른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외부에서 주변을 감시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북천지옥부 무인들은 공격해 오지 않았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들은 전부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 북천지옥부를 수색하라!"

수나인은 빙궁 무인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빙궁 무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북천지옥부 곳곳을 살폈다. 하지만 북천지옥부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다.

" 아무도 없습니다. 궁주님."

수색을 마치고 돌아온 빙궁 무인들이 수나인에게 보고를 했다.

[ 배신자가 있는 것 같구나.]

제천강은 각 문파 천주들을 쓸어보며 수나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 내 생각도 그래요, 천강.]

수나인은 단극효를 빤히 쳐다보았다. 배신할 사람은 단극효 말고는 없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 내가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거요?"

단극효는 씁쓸한 얼굴로 물었다.

" 우린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였어요. 단 천주!"

" 여긴 사막이외다."

" 사막에서는 비밀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 특히 북천지옥부가 있는 곳에서는 비밀이 유지될 수 없소."

" 왜 말하지 않았죠?"

" 천주의 동생에게 말을 했는데 듣지 못한 거요?"

" 그럼 그 말이?"

수나인은 나옥심을 보았다.

물론 그동안 나옥심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살아왔던 집을 버리고 떠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북천지옥부에서 취할 수있는 최선은 매복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패천 무인들을 선봉에 세웠는데 야율사은은 매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북천지옥부를 비워버린 것이다.

스스스! 스스스! 스스스!

바로 그때 어디선가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 화, 화살이다!"

" 화살이 날아온다!"

다섯 문파 무인들은 질겁한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하늘을 새카맣게 물들이며 화살이 쏟아졌다.

무인들은 급하게 몸을 날렸다.

그러나 화살이 떨어지는 지역은 생각보다 광범위했고, 한 자리에 모여 있는 무인의 수가 너무 많았다.

푹! 푹푹푹! 푹푹! 푹푹!

" 크악!"

" 아악!"

"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수백 명의 무인들이 짚단처럼 쓰러졌다.

" 흩어져라!"

수나인은 떨어지는 화살을 향해 장력을 쏘아대며 고함을 내질렀다.

무인은 기본적으로 한두 대의 화살을 막아낼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의 수는 너무 많았다. 더구나 지금은 사물을 분간하기 힘든 밤. 설사 한두 대의 화살을 쳐낸다고 해도 다른 화살에 당하기 일쑤였다.

그녀의 명령보다 무인들의 행동이 더 빨랐다.

한곳에 모여 있던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각자 살길을 도모했다.

그들이 몸을 피하는 와중에도 화살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그리고 서너 차례 더 떨어지더니 한여름 소나기가 그칠 때처럼 뚝 그쳤다.

" 패천 무인들은 준비하라!"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제천강은 북천지옥부 담으로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담 위로 올라간 그는 전방을 주시했다. 하지만 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천리지청술을 끌어올렸다.

화살의 사정거리는 팔십 장가량이고 천리지청술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는 백 장이다. 적이 근처에 있다면 천리지청술에 걸려들 터였다.

[ 정말 놀럈소, 영감.]

느닷없이 귓전으로 전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전음을 보낸 자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방향을 가능할 수 없었다.

" 어기전성?"

제천강은 전 내공을 끌어올려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하지만 여전히 전음을 보낸 자의 위치는 알아낼 수 없었다.

[ 백 살이 넘은 걸로 알고 있는데....... 무려 반 시진 동안 그 짓을 할 수 있는 비결이 뭐냐? 물건이 큰 것도 아니고, 최대로 키워봐야 두 치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던데, 비법이 있으면 좀 가르쳐줘.]

으드득!

제천강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신체 중 제천강이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단연 작은 물건이다. 물론 부부생활을 결정짓는 게 물건 크기도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 떠도는 많은 속설은 사내들에게 물건 크기에 집착하게 하였고, 대단한 물건을 가진 자들이 당당하게 행동하곤 했다. 제천강 또한 그런 사내들과 다르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작은 물건이 최대 약점이라고 여기게 됐다. 그래서 공연한 자격지심 때문에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해도 함께 목욕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점을 전음을 보낸 자가 들먹인 것이었다.

[ 혹시 바다에서 헤엄쳐 본 적 있냐?]

스윽!

" 개자식!"

제천강은 진득한 살기를 흘리며 몸을 날렸다.

그가 몸을 날려간 곳은 서쪽이었다.

제천강이 몸을 날려 가자, 패천 무인들은 일제히 지면을 박차고 따랐다.

순식간에 백여 장 가까이 날아간 제천강은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적의 기척은 감지되지 않았다.

[ 북천강은 여덟 치더라.]

스르르!

" 썅노무새끼!"

급기야 제천강은 이성을 잃었다.

그는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전력으로 내달렸다. 그의 신형은 순식간에 패천 무인 일행에게서 멀어졌다.

" 대장로님!"

" 대장로님!"

패천 무인들은 당황한 얼굴로 제천강을 쫓았다.

하지만 그들의 실력으로 심검의 경지에 이른 제천강을 따라잡는 건 무리였다.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지고 제천강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제기랄!"

암절 검산일은 욕설을 내뱉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여긴 사막 아닌가. 안내인도 없이 무작정 달려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그는 뒤편을 보았다.

북천지옥부에서 상당히 멀리 온 듯 불빛만이 아스라이 보였다.

검산일은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그러자 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북해빙궁 무리를 비롯한 무리들이 빠른 속도로 이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 대장로님을 쫓아간다! 전력으로 달려라!"

검산일은 고함을 지르며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곧 검산일을 비롯한 패천 무인들의 신형이 어둠을 뚫고 쏘아져갔다.

전력을 다해 달려가는 사람은 검산일을 비롯한 패천 무인들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 전음으로 제천강을 도발한 자들도 온 힘을 다해 내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전부 네 명이었다.

오른편에는 야율사은이 있고, 그 옆에는 사마윤, 마장승, 백을상이 달리고 있었다.

“ 뭐라고 했기에 백 살이 넘은 늙은 노마가 약 처먹은 개가 된 거냐?”

야율사은은 사마윤을 돌아보았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사마윤이 이번 작전을 입안할 때부터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해야 옳다.

사마윤은 제천강을 비롯한 패천림 무인을 유인해 낼 거니까 걱정말고 북천지옥부를 비우라고 하였다.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는 제천강을 유인해 낸 것이다.

제천강이 쫓아오면 패천림 다른 무인들은 따라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사마윤이 어떤 방법을 썼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 저놈의 역린을 송곳으로 헤집어놓았거든.”

“ 제천강의 역린이 뭔데?”

“ 두 치.”

“ 두 치?”

“ 내가 며칠 동안 저놈을 감시하지 않았냐?”

“ 그런데?”

“ 그 여우하고 수시로 동침을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걸 보게 된 거야.”

“ 그거라면?”

“ 아래쪽에 덜렁거리는 그거 말이다.”

“ 그런데?”

“ 완전한 상태였는데 두 치밖에 안 되더라.”

“ 그래서 그 두 치를 들먹이면서 비아냥댔다는 거냐?”

“ 우리 사내들은 물건 크기에 목숨을 거는 족속이라는 걸 몰랐냐?”

“ 그렇다고 백살 넘은 노마가 이성을 잃어버린다는 건 좀 그렇다.”

“ 너 동서가 땅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 들어본 적 있냐?”

“ 동서가 아니고 사돈이잖아.”

“ 여기선 동서야, 인마.”

“ 누가 동선데?”

“ 수나인하고 전에 사귀었던 남자와 제천강이 동서지. 누구겠냐?”

“ 전에 사귀었던 남자면 ........ 북청강?”

“ 그 양반 물건은 여덟 치라고 해줬거든.”

“ 북청강의 그것이 여, 여덟 치나 돼?”

야율사은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인마. 말이 그렇다는 것뿐이지.”

“ 그러니까 북청강의 크기가 여덟 치란 말을 듣고 제천강이 꼭지가 홱 돌아버렸다는 거구나.”

“ 제천강 저놈은 나름 수나인을 만족시켜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지 건 요만하고, 북천강이 이만하다고 했으니 그놈 기분이 어떻겠냐?”

“ 쿡쿡쿡!”

야율사은은 어이없는 얼굴로 사마윤을 보았다.

아니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장승과 백을상 또한 황당한 얼굴로 사마윤을 보았다.

“ 세상은 부자와 거지, 강한 놈과 약한 놈, 관리와 양민 등으로 계급을 나눌 수 있지만 한 가지 변치 않는 사실이 있어. 그게 뭔지 알아?”

“ 우월한 육체는 돈이나 무공으로 살 수 없다는 거냐?”

“ 맞아. 돈이 많거나, 무공이 강하다고 해서 작은 키를 키울 수는 없잖아.”

“ 하물며 물건은 더하다?”

“ 우리 속물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거지.”

“ 너 그런 놈 아니었잖아. 자식아.”

마장승이 소리쳤다. 다섯 명 중 가장 지적인 사람이 사마윤이었다. 방금 사마윤이 한 그런 말들은 군무옥이 전문이었던 것이다.

“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변해. 그리고 대장하고 오 년을 함께 살았는데 변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 큭큭큭! 맞다. 우린 다 변했지.”

“ 멈춰라!”

바로 그때 멀리서 제천강의 외침이 들려왔다. 목소리에 살기를 실은 듯, 일순 네 사람의 신형이 휘청했다.

“ 두 치야! 너 같으면 서겠냐?”

사마윤은 크게 소리치며 몸을 날렸다.

“ 우리 넷이 힘을 합쳐도 안 될까?”

뒤를 흘끔 돌아본 백을상이 사마윤을 보며 물었다.

“ 대장이 한 말 못 들었냐? 저놈은 심검을 성취한 무인이야. 공연히 달려들었다가는 개죽음을 당하기 십상이야. 인마.”

“ 그럼 언제까지 끌고 다닐 참이냐?”

“ 최소한 열흘.”

“ 미친놈처럼 뛰어야겠구나.”

백을상은 하늘을 보았다.

오늘따라 유달리 달빛이 밝은 듯했다. 문득 흑랑기 대원들과 함께 사막을 달리던 때가 떠올랐다. 흑랑기 대원들은 한 번 달리기 시작하면 쓰러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훈련으로 시작한 달리기는 경쟁으로 변하고 나중엔 악으로 변한다.

그렇게 대원들은 사막에서 살아남았다.

- 감상에 빠지는 순간 죽는다. 귀랑!

문득 연우강의 목소리가 귓전을 강타했다.

“ 아, 알겠습니다. 대장.”

백을상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몸을 날렸다.

“ 무슨 소리냐?”

마장승이 백을상을 보며 물었다.

“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구나.”

“ 사랑, 너도 그래?”

“ 무슨 수로 여길 빠져나가겠냐. 아마 관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아니 저승으로 간다고 해도 결코 빠져나기지 못할 거다.”

마장승은 씁쓸하게 웃으며 몸을 날렸다.

나머지 세 사람은 마장승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몸을 날렸다.

“ 죽여주겠다. 개자식들!”

제천강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백여 장 간격을 유지하고 달려가고 있는 야율사은 일행은 감지하지 못했지만 제천강은 벌써 대여섯 번의 심검을 펼친 상태였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앞서 달려가는 네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제천강은 전 내공을 끌어올려 나아갔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앞서가는 네 사람보다 특별히 빠르다고 할 수 없었다.

바닥이 모래로 이루어진 사막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고 해도 경공을 펼칠 때는 땅을 디뎌야 한다. 바닥에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는 초상비란 경공이 있기는 하지만 도망가는 자들도 초상비를 펼치며 나아가는 속도도 대동소이하다. 게다가 내공 소모도 상당하다.

결국 도망치는 자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경공을 펼쳐야 하는데, 그때 경공의 빠르기를 좌우하는 건 바닥이다.

맨바닥 같았으면 진작 거리를 좁혔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사막.

단단한 바닥에서는 한 번 바닥을 디딜 때마다 십오 장 이상 날아갈 수 있는 무인이라고 해도 사막에서는 십여 장밖에 날지 못한다.

제천강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한번 나아갈 때마다 십여 장밖에 이동하지 못했다. 그 거리는 야율사은 일행이 한 번에 나아가는 거리와 같았다.

“ 너희들이 나보다 강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새벽이 오기 전에 네놈들은 내 손에 죽는다. 반드시!”

제천강은 이를 부드득 갈며 몸을 날렸다.

네 명을 쫓아가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던 제천강은 뒤따라오던 패천 무인들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거리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서둘러라! 더 빨리 달려라!”

검산일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그는 미친 듯이 부하들을 독려하며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와 부하들의 무공 차이는 너무 컸다.

한 번에 팔 장 거리를 날아갔지만 나머지 패천 무인들은 오 장이 한계였다. 점점 거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 젠장!”

검산일은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제천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천리지청술에도 걸려들지 않았다. 어디를 얼마만큼 갔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 그놈의 성질머리하고는.”

급기야 검산일은 속도를 늦췄다. 부하들이 따라오질 못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뒤따라와야 할 북해빙궁 무인들의 기척 또한 천리지청술로도 파악되지 않았다.

제천강을 쫓아가다간 그들마저도 잃어버릴 것 같아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 심검을 성취한 어른이니까 알아서 하겠지.’

검산일은 그 자리에 멈췄다.

“ 여기서 북해빙궁 무인들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검산일의 명령이 떨어지자 패천 무인들은 일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들 또한 검산일을 쫓아가느라 내공 소모가 너무 심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북행빙궁 무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강한 바람이 불어와 이곳까지 오면서 찍었던 발자국을 지우고 있었다. 검산일을 비롯한 무인들의 얼굴에 불안한 그림자가 어렸다.

“ 장로님!”

무인 중 한 명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며 검산일을 불렀다. 그의 얼굴엔 되돌아갔으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그들이 우리를 찾을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는 게 낫다. 움직이면 오히려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검산일 또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물을 비롯한 음식은 전부가 북해빙궁 무인들이 들고 다녔고, 자신들은 아무것도 없다. 만일 북해빙궁 무인들이 이곳을 찾아오지 못한다면.....

‘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들은 몰라도 새외귀막 무인들은 사막이 안방이나 다름없어. 그들은 반드시 올 거야.’

한편.

검산일 일행이 목빠지게 기다리는 북해빙궁 일행은 패천 무인들이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장소로 이동 중이었다.

그들은 길게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새외귀막 무인 삼천 명이 선두에서 길을 잡고, 그 뒤에는 북해빙궁 무인들이, 그리고 남만 독존궁과 포달랍궁 무인들은 중간에 섰고, 맨 후미에는 청해천종림 무인들이 자리해 있었다.

“ 이 길이 맞는 겁니까?”

수나인은 앞에서 일행을 이끌고 있는 단극효를 보며 소리쳐 물었다.

“ 길은 내가 찾는 게 아니고 부하들이 찾는 거외다. 그리고 바람이 너무 세게 불고 있소.”

단극효는 차갑게 소리쳤다.

“ 바람이 너무 세게 분다는 건 무슨 소리죠?”

“ 방금 내가 밟았던 곳을 보시오.”

“ 바닥에 뭐가 있다고......”

문득 수나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새외귀막 무인들이 밟고 지나간 자리로 급속하게 모래가 채워지면서 원래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 발자국으로는 그들을 찾을 수 없소이다.”

“ 그럼!”

“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소.”

‘ 미치겠네.’

쭈뼛!

내심 투덜대고 있는데 갑자기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마치 광포한 맹수 앞에 선 듯한 기분이었다.

“ 적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경계를 강화하도록......”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청해천종림 무인들과 오십 여 장 떨어진 곳에서 모래가 벌떡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모래는 자세를 낮추는 듯하더니 천종림 무인들을 향해 뭔가를 겨냥했다.

곧 그들의 전면이 새카맣게 변했다.

그것은 화살이었다.

“ 적이다!”

“ 적이 나타났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천종림 무인들은 그 자리에 풀썩풀썩 쓰러졌다. 일부 무인들은 자신의 무기로 화살을 쳐내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지금은 바람이 강하게 부는 어두운 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걸 막아낸다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다만 살기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암기를 쳐낼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자들만 간신히 화살을 쳐낼 수 있었다.

강한 무인들이 화살을 쳐내는 사이에 약한 무인들은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 공격하라! 공격하라!”

결국 견디다 못한 해룡왕 탁불군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공격 명령이 더 큰 화를 불러왔다는 사실은 곧바로 드러났다.

청해천종림 무인들에게 활을 쏘는 자들은 화살에 내기를 실을 수 있는 고수들이었다. 그런 자들을 향해 몸을 날려 간다는 건 수천 길 낭떠러지를 향해 몸을 던지는 것과 같았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희생자가 더 많아졌다.

“ 죽이진 마라!”

“ 응?”

상황을 지켜보던 수나인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죽이지 말라는 외침이 흘러나온 곳은 적진이기 때문이었다. 저곳에서 활을 쏘고 있는 자들은 북천지옥부와 막북혈마성 무인이 분명할 것이다.

그런데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다니. 어떤 의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설마......”

수나인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변황인은 적이라고 간주하면 가차 없이 죽이는 거친 성정을 지닌 자들이다. 그런데 죽이지 말라고 했다는 것은, 지금도 이편을 동족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이다.

아니 동족으로 여기고 있다는 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아군이 동요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 북해빙궁 무인들은 공격하라!”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이제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동요하는 자들은 없겠지만 시간이 흐르고 힘든 상황이 닥치면 달라진다. 자칫 잘못하면 자중지란으로 인해 전쟁을 수행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 와아!”

“ 우와아!”

북해빙궁 무인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적을 향해 내달렸다.

“ 후퇴하라!”

“ 물러나라!”

수천 명이 동시에 달려가자 활을 쏘던 자들은 일제히 뒤편으로 몸을 날렸다.

“ 쫓아라!”

수나인은 몸을 날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 쫓아라!”

“ 쫓아라!”

곧이어 가람존자와 만독존자 당갈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 네 문파의 무인들은 도망치는 적을 쫓아 몸을 날려갔다. 현장에 남은 자들은 단극효를 비롯한 새외귀막 무인들과 부상자들뿐이었다.

“ 부상자들을 구출하라!”

명령을 내리는 단극효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 상공은 패할 거라고 보시는군요.”

단극효를 가만히 지켜보던 나옥심이 말했다.

“ 여긴 북천지옥부 영역입니다. 우리 새외귀막이 아무리 사막을 잘 안다고 해도 북천지옥부만 못합니다. 게다가 총천주는 머리가 뛰어납니다.”

단극효는 새외귀막 무인들이 부축하고 있는 부상자들을 보았다. 부상자의 수는 이백 명이 넘었다.

“ 그, 그가 우리의 분열을 노리고 저들을 살려줬다는 거예요?”

질문을 하고는 있지만 나옥심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단극효의 말투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정중하게 바뀐 탓이었다.

“ 분열뿐만이 아닙니다.”

단극효는 나옥심의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상처를 받는 걸 원하지 않았기에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

“ 다른 의도가 또 있다는 건가요?”

“ 저들을 보십시오. 부상자 한 명을 데려각디 위해서는 정상적인 무인 한 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단극효는 부상자를 가리켰다.

“ 싸울 사람이 줄어든다는 말이군요.”

“ 그렇습니다. 게다가 우릴 공격한 자들은 북천지옥부 무인이 아니었습니다.”

“ 막북혈마성 무인이었단 말입니까?”

“ 그들도 아닙니다.”

“ 그럼?”

“ 나 대주도 잘 아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단극효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 누구죠?”

“ 그가 온 모양입니다.”

팡황새의 총천주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버려버린 자, 아무렇지도 않게 새외귀막의 전대 막주 단리효를 없애버린 자.

“ 난 총천주보다 그가 두렵습니다. 그런데 그가 왔습니다.”

단극효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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