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71화 (171/232)

제 5장 모용세가

사람이 화를 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사소한 일로 기분이 나빴을 때,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했을 때 등 화를 내는 이유도 각양각색이다.

그 중 가장 크게 화가 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바로 본인의 한계를 절감했을 때다.

분명 힘도 있고, 능력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자들을 구할 수 없을 때 느끼는 무력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 상황을 만든 자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자괴감으로 인해 거의 미칠 지경이 되고 만다.

지금 혁련무극의 상태가 그랬다.

전방을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분노의 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야노원 원로 오십, 야랑대 삼백.

혁련무극을 따라온 자들은 삼백오십 명이었다.

그런데 지금 살아남은 자는 백사십 명에 불과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백육십 명의 부하를 잃은 것이다.

싸우다가 죽었다면 혁련무극이 이렇듯 분노하진 않았을 것이다.

실력이 부족하여 죽는 건 무인의 숙명이기에.

그런데 야랑대 대원이나 야노원 원로들은 실력이 부족해서 죽은 게 아니었다. 바람에 섞여 날아왔던 설화인과 풍천마인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아니, 바람 속에 설화인을 넣고, 풍천마인을 푼 문파가 밀천이나 여타 흑도로 분류되는 그런 문파였다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은 지난 천오백 년 동안 대야벌을 지켜왔던 패천림이었다.

금전적인 이익도, 명예도 탐하지 않고 오직 무공일로만 걸었던 자들이 아니던가. 그랬던 자들이 흑도 문파나 할 수 있는 그런 짓을 아무런 거림낌 없이 자행한 것이다.

“ 창피하지 않소?”

혁련무극은 전방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혁련무극의 십 장 건녀편에는 약간 뚱뚱한 노인 두 명이 이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들은 패천삼관과 사관을 담당했던 전추성과 가삼이었다.

“ 뭐가 창피하단 말인가?”

오른편에 있던 가삼이 물었다.

“ 천오백 년 동안 한 우물을 팠던 당신들이잖소. 그 세월이 가식이었단 말이오?”

“ 가식은 아니었네.”

“ 하면?”

“ 그분이 오시지 않았다면 우린 어쩌면 지금도 패천림에서 웅크리고 있었을 거네.”

“ 그분이라면 누굴 말하는 거요?”

“ 천마 제석강 그분이 돌아왔네.”

“ ........!”

혁련무극은 멍한 얼굴로 가삼을 보았다.

천마 제석강.

지천에 의해서 키워졌지만 영세오천에 의해 지워진 사람이다. 수많은 전설을 남겼고, 지금도 무의 조종이라 불리는 위대한 초인이다. 하지만 그는 천오백 년 전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돌아왔다니.

한 명이 그랬다면 노망이 났다거나, 기다림에 지쳐 미쳐버렸다고 하겠지만, 저 앞에 있는 자는 가삼과 전추성 두 명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미칠 확률은 마른 하늘에 벼락이 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하네. 우리도 처음엔 그분의 재림을 믿지 못했으니까.”

“ 정말 그가 다시 살아났단 말이오?”

“ 천년마인이라고 아는가?”

“ 맙소사, 그럼?”

“ 그렇네. 그분은 천년마인으로 다시 되살아났네.”

“ 가, 강시란 말이오?”

“ 아닐세. 우리와 똑같은 사람일세.”

“ 마, 말도 안 돼.”

“ 맞네.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 현실로 변했네. 그래서 우리도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을 연출할 수밖에 없었네.”

“ 그가 강호 무림에 욕심을 낸단 말이오?”

“ 그분 입장에서 보면 지천, 황천, 밀천이 남아있는 지금은 천오백 년 전과 다르지 않네.”

가삼은 거짓말을 했다.

천마 제석강은 강호 무림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건 딱딱한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과, 매일 매일 떠오르는 태양과, 떨어지는 낙엽 같은 하찮은 것들이다. 하지만 혁련무극 앞에서 그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 그럼 당신들은 그와 함께 강호를 도모할 생각이구려.”

놀람도 잠시, 혁련무극의 몸에서 폭풍같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가삼의 말처럼 천마가 다시 살아났다면 패천림이 천오백 년 은둔 생활을 깨고 강호를 도모할 만하다.

“ 도모할 생각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네.”

“ 그럼 패천림의 림주는 천마겠구려.”

“ 패천림이 아니고 패천이네. 그분은 총천주님이시고.”

“ 지금은 천오백 년 전이 아니오, 가삼. 그리고 천하를 도모할 생각이었다면 우릴 이곳으로 끌어들이는 게 아니었소.”

혁련무극은 천천히 내기를 끌어올렸다.

“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보는가?”

가삼은 단전을 활짝 열고 내기를 끌어올렸다.

가삼이 준비하자 전추성 또한 내기를 끌어올려 공격 준비를 했다.

“ 연우강에게는 누가 갔소?”

문득 자신에게만 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놈에게는 한사가 갔고, 나적리에게는 노 장로와 전 장로가 갔네.”

“ 장로들이 전부 동원됐구려.”

“ 그렇다고 볼 수있네.”

“ 당신네들이 내게 죽임을 당하면 만기팔유가 나서게 되는 거요?”

“ 그럴 경우는 없을 거네.”

“ 조금 전에 빠져나갈 수 있을 거냐고 물었소?”

“ 그렇네.”

가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전부 죽일 거요. 아니, 이곳에 있는 놈들을 전부 죽이기 전에는 빠져나가지 않을 생각이란 말이오!”

혁련무극은 오른발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강하게 내리찍었다.

쿠앙!

마치 얼음이 갈라지듯 혁련무극의 발이 파고든 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그 순간 혁련무극은 바닥을 향해 내리찍었던 오른발을 힘차게 튕겼다.

파악!

혁련무극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공간을 단축하는 혁련무극의 피부는 나아가면서 조금씩 변했다. 일 장을 나아가면서 회색으로 변했고, 이 장을 나아가면서 갈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삼 장을 나아갔을 때는 온통 번들거리는 검은색으로 변했다.

야수구벽신권.

지천오대가문의 한 곳인 구벽혁련세가의 천오백 년 무공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야수구벽신권과 한번 겨뤄보고 싶었네. 혁련 궐주!”

먼저 혁련무극을 향해 공격한 자는 가삼이었다.

가삼은 양손을 빠르게 휘저었다.

가삼이 펼치는 무공은 패천십경의 하나인 단천혈룡이었다. 가삼이 손을 휘젓자 앞에 거대한 혈룡이 나타났다. 혈룡은 커다란 입을 벌린 채 빠르게 날아오는 혁련무극을 향해 날아갔다.

“ 차앗!”

가삼에 이어 전추성의 입에서 우렁찬 기함이 터져 나왔다. 그는 달려오는 혁련무극을 향해 몸을 날리며 양손을 쭉 내밀었다. 그의 양손에서 피처럼 붉은 광채가 튀어나와 회오리치며 혁련무극을 향해 쏘아져 갔다.

전추성이 펼치는 무공 역시 패천십경의 하나인 천살혈광장이었다. 천살혈광장은 스치기만 해도 몸이 갈가리 찢겨나가는 극악한 마공이었다.

“ 파강!”

혈룡이 일 장 앞으로 다가온 순간 혁련무극의 입에서 우렁찬 일갈이 터져 나왔다. 곧 불끈 틀어쥔 주먹이 전방으로 쭉 내밀어졌다.

쿠아앙!

권과 혈룡이 부딪치면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 파혼!”

오른손에 이어 왼손 주먹이 쭉 내밀어졌다.

이번에 뻗어낸 왼손 주먹은 정확하게 천살혈광장의 기운을 쳐냈다.

쿵! 쿵!

선공을 가했지만 물러난 사람은 가삼과 전추성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 언뜻 놀람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들은 한 걸음씩 물러났는데 혁련무극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단 일초로 위아래가 갈린 셈이었다.

“ 차앗!”

“ 타앗!”

자신들이 물러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가삼과 전추성은 커다랗게 고함을 지르며 양손을 뻗었다.

가삼이 펼친 혈룡은 조금 전보다 두 배 커지고 더 빨라졌다. 전추성이 쏘아낸 붉은 회오리는 회전 반경이 더 커지고 더 광포해졌다. 두 사람이 펼친 장은 혁련무극을 향해 거세게 쏘아졌다.

“ 파천! 멸강!”

혁련무극은 양손을 번갈이 내밀었다.

왼손은 가삼의 혈룡을 향해 뻗어내고, 오른손은 전추성이 펼친 강기의 회오리를 향해 뻗어냈다.

콰앙! 콰앙!

둔탁한 소성이 울려 퍼졌다.

공동이 부르르 떨며 곳곳에서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 음!”

“ 크윽!”

가삼과 전추성은 신음을 내뱉으려 물러났다.

가삼보다는 전추성이 받은 충격이 더 큰 듯 그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반면에 혁련무극은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가삼과 전추성을 향해 다가가는 중이었다.

‘ 빌어먹을!’

전추성은 내심 욕설을 내뱉었다.

말로만 무성했던 혁련무극의 무공. 실제 경험해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두 명을 상대하면서도 조금도 물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권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 하지만!”

전추성은 전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장포가 찢어질 듯 펄럭였다.

“ 멸혼! 멸천!”

전 내력을 끌어올려 장력을 펼치려고 하는 순간 우렁찬 외침과 함께 거대한 주먹이 쏘아져 왔다.

‘ 이건?’

전추성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바닥에서 두 자가량 뜬 채 다가오는 거대한 주먹은 내력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하다. 그런데 마치 쇳덩어리가 날아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게다가 뿜어내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 바닥이 파이며 골이 생겨나고 있었다.

괴물 같은 놈이 아닐 수 없었다.

가삼 또한 전추성과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전 내력을 양손에 모아 힘껏 쳐냈다.

그가 펼치는 단천혈룡은 일 초식에 불과하지만 매 초식을 펼칠 때마다 위력은 두 배씩 강해진다.

그런데 혁련무극의 야수구벽신권도 그랬다. 아니, 두 배 이상 강해지는 듯한 기분만저 들었다. 거대한 주먹과 혈룡과 회오리가 세 사람 사이에서 부딪쳤다.

엄청난 폭음이 터져나오고, 가삼과 전추성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하지만 혁련무극의 상태는 여전히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설사 얼굴에 어떤 변화가 나타낫다고 해도 온몸이 새카맣게 변해 있어 알아볼 수도 없었다.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공격하는 자들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가삼과 전추성의 상태가 그랬다.

두 사람은 질린 듯한 얼굴로 혁련무극을 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공포였따.

“ 패강, 패혼!”

그런 두 사람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혁련무극의 입에서 또다시 일갈이 터져 나왔다.

“ 으음!”

가삼의 입이 쩍 갈라졌다.

조금 전 반 장에 달했던 주먹의 크기가 이번엔 일 장으로 변해 있었따. 그렇다고 공격을 고스란히 맞아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삼은 전추성을 보았다.

그때 전추성도 가삼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은 단전을 활짝 열고 내기를 바닥까지 끌어올렸다. 그런 다음 온 힘을 다해 양손을 떨쳐냈다.

콰콰쾅!

두 힘이 부딪힌 곳에서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

“ 크윽!”

“ 커억!”

가삼과 전추성은 비명을 흘리며 비틀비틀 물러났다. 이번에도 역시 충격을 심하게 받은 쪽은 전추성이었다.

눈동자는 흐릿하게 풀렸고, 입에서는 꾸역꾸역 피가 흘러나왔다.

파앗!

아직도 힘이 남았을까.

혁련무극의 신형이 공간을 단축했다. 화들짝 놀란 가삼이 양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콰앙!

그의 장력은 정확하게 혁련무극의 가슴을 강타했다. 하지만 혁련무극이 나아가는 속도는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그는 강하게 바닥을 차며 가삼을 향해 돌진했다.

“ 서, 설마 금강불...?”

콰앙!

가삼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혁련무극의 어깨가 가삼의 가슴을 강타했다.

“ 크아악!”

가삼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푸스스!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혁련무극의 어깨에 부딪힌 가삼의 가슴이 가루로 흩어지고 있었다.

엄청난 광경이었다.

물론 무인들 중 검탄 강기의 경지에 오르면 상대를 가루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때 그들은 권이나 장 또는 검 등의 무기를 사용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떤 대상을 가루로 만들기 위해서는 일정한 크기의 용기에 고도로 압축된 내기를 담아야 하는데 그 용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권, 장, 지 또는 무기인 것이다. 그런데 혁련무극은 어개를 이용해서 가삼의 가슴을 가루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곧 혁련무극은 전신을 병기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파앗!

가삼의 가슴을 가루로 만든 혁련무극의 신형이 이번엔 전추성에게로 향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전추성은 부지불식간에 양손을 들어올려 방어자세를 취했다.

푸스스!

먼저 전추성의 양손이 가루로 변했다.

콰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전추성의 신형이 훨훨 날아갔다. 그리고 뒤편 벽에 거칠게 처박혔다.  퍼억!

스스스!

벽에 부딪친 순간 전추성의 신형이 가루로 흩어져 내리고 있었다.

척!

혁련무극은 다시 원래 자리로 날아 내렸다.

검게 변했던 피부가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자 비로소 그의 상태가 드러났다. 핏기가 사라진 그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했다. 서 있기조차 힘든 듯 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 우엑!”

혁련무극은 고개를 숙인 채 피를 토했다.

육체의 한계를 극복한 야수구벽신권을 익혔다고 해도 패천림의 장로 두 명은 벅찬 상대였다.

“ 괜찮습니까?”

유악재는 걱정스런 얼굴로 혁련무극을 보았다.

“ 걱정할 정도는 아니네.”

혁련무극은 입술을 흠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유악재를 보았다.

“ 어떻게 생각하는가?”

“ 뭘 말입니까?”

“ 나, 연우강, 나적리를 공격하고 있는 자들은 전부가 과거 패천림 장로였네.”

“ 가삼이 한 말이 지금 상황과 맞지 않다는 말이군요.”

유악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패천림은 지난 천오백 년 동안 천마 제석강을 기다렸던 문파다. 만일 가삼의 말처럼 천마 제삭가이 재림했다면 패천의 수뇌는 과거 패천림의 장로들이 돼야 한다.

그렇다면 먼저 나와야 할 자들은 패천림 장로가 아니라 만기팔유다. 그런데 만기팔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패천림 장로들만 나와 있다.

“ 내 생각은 그렇네. 만일 정말로 천마가 재림했다면 일꾼은 만기팔유가 돼야 옳네. 그런데 지금 패천의 일꾼은 패천림 장로들이네. 그건 곧 만기팔유가 전권을 장악한 상황이란 말이 되네.”

“ 그럼 천마 제석강이 재림했다는 건 거짓말이란 말이 되는 겁니까?”

“ 자네 같으면 천오백 년 전 인물이 재림했다는 걸 거짓말로 할 수 있겠는가?”

“ 어차피 믿지도 않을 건데 거짓말할 이유가 없죠.”

가삼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그 때문이다. 천오백 년 전 인물이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믿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삼과 전추성은 그 말을 거리낌없이 했다. 아무도 믿지 않을 그런 말을 당당하게 했다는 건 곧 사실이란 뜻이다.

“ 맞네. 천마 제석강은 재림한 게 확실하네. 그리고 그는, 자기를 기다렸던 패천림이 아닌 만기팔유 일행을 후계자로 선택했다는 말이 되네.”

“ 만기팔유와 패천림 장로는 반목하는 사이로 변했겠군요. 아울러 만기팔유는 우리를 이용해서 패천림 장로들을 제거할 생각이고요.”

“ 그런 것 같네.”

그제야 상황이 정리가 된 듯 혁련무극은 빙긋 웃었다.

“ 하지만 만기팔유는 크나큰 실수를 범했네.”

“ 궐주님을 비롯한 연우강의 무공 정도를 제대로 몰랐단 말입니까?”

“ 그렇네. 아울러 이론과 실전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존재하는지도 그들은 모르고 있네. 한마디로 우물 안 개구리지.”

혁련무극은 통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혁련무극과 유악재의 예상은 대체로 맞았다.

유와 신유가 혼돈음양반천진 안으로 야궐과 밀천을 끌어들인 이유는 패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패천림 때문이었다. 승천비고와 천무비고에서 일했던 무인들의 수는 팔십 명에 불과한데 패천림 무인은 일천여 명에 육박한다. 게다가 각 장로들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그들로부터 충성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모든 명령은 각 장로들을 통해 내릴 수밖에 없고, 천주 자리에만 앉아 있을 뿐 실질적인 지배는 각 장로들이 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와 신유는 혼돈음양반천진을 이용해서 연우강, 혁련무극, 나적리를 비롯하여 장로들까지도 정리할 생각이었다.

“ 내가 그에게 당한 모양입니다.”

유는 건너편에 앉은 신유를 보며 말했다.

한사가 당하긴 했지만 광장 바닥에 남은 발자국 상태로 파악한 무공 정도는 연우강이 더 약했다고 하였다.

“ 심검을 성취하지도 못했는데 허세를 부렸단 말인가?”

신유는 광장에서 보았던 연우강을 떠올렸다.

그는 유가 심검을 펼치는 모습을 태연하게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오십 장이라는 말을 언급했다.

그 말은 곧 심검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 그런 것 같습니다.”

“ 그럼 한사를 없앤 건 옆에 있는 창노와 독고철웅이었겠구먼.”

“ 그런 것 같습니다.”

“ 기분이 좋은가.”

“ 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좋을 수밖에 없잖습니까? 그건 그렇고, 다른 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 가삼과 전추성은 혁련무극에게 당했고, 노대관과 전장운은 나적리에게 죽었네.”

“ 그럼 패천의 장로 중 살아남은 자는 제천강과 검산일밖에 없군요.”

유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어차피 그들은 소모품에 불과했다. 혁련무극, 나적리, 연우강과 함께 산화한다면 역할을 충분히 한 셈이다.

“ 난 걱정이네, 천주.”

“ 뭐가 걱정이란 말입니까?”

“ 적도 적이지만 우리의 희생도 너무 크네.”

“ 하하하!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사부. 내 생각대로 된다면......”

“ 천주의 생각을 알고 싶네.”

신유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

어린 시절부터 키웠다. 하지만 유가 모용세가 가주라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을 정도로 모르는 게 많다.

유 말고도 모용세가 무인들이 남아 있는지, 유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것조차 모른다.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보니 자꾸만 불안했다.

“ 사부는 제천강과 검산일이 어떻게 될 ㄱ라고 보십니까?”

“ 그들은.....”

“ 절대 돌아오지 못합니다.”

“ 북천지옥부의 야율사은을 너무 크게 보는 것 아닌가?”

“ 제천강과 검산일을 없앨 사람은 야율사은이 아닙니다.”

“ 그럼 누가 없앤단 말인가?”

“ 사부와 내가 그들을 없애게 될 겁니다.”

“ 제천강은 심검을 익힌 고수네.”

“ 우린 심검을 익힌 고수가 둘이 나 있는데 뭐가 걱저입니까?”

“ 만일 그 사실을 패천 무인들이 알게 되면......”

“ 천유께도 말하지 않을 참입니다.”

“ 언제 떠날 참인가?”

“ 누가 살아남을지 모르지만 살아남은 놈들을 그곳으로 밀어 넣고 떠나야지요.”

유는 식은 찻잔을 들어올렸다.

“ 그들을 없앤 다음엔 어떻게 할 건가?”

“ 기다릴 겁니다.”

“ 뭘 기다린단 말인가?”

“ 담대만승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강호 무림은 금세 정리될 겁니다. 그럼 그때 나서야지요.”

“ 한 손은 열 손을 당할 수 없다는 말도 있네. 천주와 내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수천의 무인이 있는 담대만승을 이길 수 없네.”

“ 내가 지닌 세력이 패천이 전ㅂ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없잖아요.”

“ 그럼 아니란 말인가?‘

“ 난 천단모용세가의 가줍니다. 가주란 수백 명의 식솔을 거느렸을 때 부르는 호칭이고욧. 한 명밖에 없는데 가주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 숨겨둔 세력이 있단 말인가?”

“ 모용세가는 드러나지 않았을 뿐 숨기고 말고 할 세력이 아닙니다.”

“ 그럼 이번 외유때 가뭄ㄴ에 들를 참인가?”

“ 이번 외유의 목적은 가문 어르신들게 인사를 드리는 겁니다. 제천강을 죽이는 건 아주 사소한 일입니다.”

“ 으음!”

신유는 신음을 내뱉었다.

문득 가문 어르신들이란 유의 말이 돌덩이를 등에 친 것처럼 무겁게 다가왔다. 유는 패천의 일천 무인을 버리는 패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대아벌 한 세력이었던 패천림을 버리는 패 정도로 여긴다면 모용세가는 얼마나 강할지.

“ 천 년의 세월을 기다림 속에서 살아온 곳은 패천림이나 만기팔유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천단모용세가도 그랬습니다. 아니 우리는 더했소. 우리 가문을 배신했던 자들이 강호무림을 지배하는 꼴을 지켜봤어야 했으니까.”

유는 차갑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딜 가는가?”

“ 수정이라고 했던 그 계집 말이오...... 아주 괜찮습니다. 사부.”

유는 싱긋 웃으며 자리를 떴다.

유가 나가자 신유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유를 처음 대야벌로 데리고 왔을 때가 떠올랐다.

유를 처음 만난 곳은 대야벌 외부의 간혹 찾았던 단골 주점 처마 밑이었다.

유난히 눈이 많이 왔던 그날 술 생각이 나 주점을 찾았다. 유는 머리와 어깨에 수북하게 눈이 쌓인 채로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 몇 살이냐?

- 다섯 살이에요.

- 집이 없는 게냐?

- 있었어요.

- 지금은 없단 말이냐?

- 네.

- 부모님은 계시냐?

- 내가 이 손으로 죽였어요.

유를 대야벌로 데려갈 결심을 했던 게 ‘내가 이 손으로 죽였어요.’라고 했던 말 때문이었다. 양손을 들어올리는 어린 아이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인연이 닿으려고 그랬는지,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이름을 물었다. 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유. 그 이름은 만기팔유의 마지막 자와 같았다. 그 때문에 녀석을 데리고 대야벌로 돌아왔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그 상황을 연출한 자가 유, 아니 유가 어르신들이라고 하였던 그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만일 그들이라면.....”

신유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섯 때 들어왔으니까 유는 사십 오 년동안 승천비고와 천무비고에서 살았고 무공을 광적으로 탐독했다.

어쩌면 천무비고와 승천비고의 모든 무공이 모용세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그 힘은?

“ 빌어먹을!”

신유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문득 지난 오십 년이 공백으로 변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어쩔 수 없는 건가?”

신유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누군가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든 이용물에 불과했든, 세월은 흘렀고 과거가 되고 말았다. 이제 와서 그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을 테다.

“ 갈 데까지는 가는 수밖에......”

신유는 주먹을 지그시 말아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와 혼돈음양반천진의 중추가 있는 석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완벽하게는 아닐지라도 혼돈음양반천지의 상황을 대충 파악할 수 있다.

“ 어떻게 됐느냐?”

안으로 들어선 신유는 물었다.

“ 혁련무극은 이곳에 있습니다.”

장한 한 명이 전면 벽에서 남쪽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벽면에는 검게 칠해진 중앙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선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장한이 가리킨 곳은 검게 칠해진 부분을 중심으로 보면 남쪽이었다.

“ 그곳엔 누가 나갔느냐?”

“ 지유, 인유, 정유 세 분이 나가 있습니다.”

“ 나적리는?”

“ 여깁니다.”

이번에 가리킨 곳은 동쪽이었다.

“ 연우강은?”

“ 지금쯤 나적리와 조우했을 겁니다.”

“ 거기엔 마유, 사유, 환유가 나가 있는 거냐?”

“ 그렇습니다.”

“ 계속 주시하도록 해라. 특이한 사항이 일어나면 즉시 보고하도록 하고.”

“ 알겠습니다.”

장한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

나적리의 표정을 복잡했다. 설마 이곳에서 연우강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좌우로 시선을 주었다.

이천여 명의 부하들 중 이곳까지 따라온 부하는 이백여 명에 불과하다.

물론 이천여 명이 동시에 들어온 것은 아니다.

각자 다른 통로로 들어갔다.

하지만 나적리는 그들이 살아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이곳까지 오면서 경험한 바로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진식은 약한 무인들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암기는 인사들조차도 피하지 못했다. 그것뿐이라면 이렇듯 많은 피해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색 암기에 이어 나타난 강시들.

그 강시들의 강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풍밀가의 가주 원세군 또한 그 강시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은원 무인들이 포함돼 있어 가장 강력한 무력을 지녔던 자신들이 이럴진대 다른 문도들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결국 이곳에 있는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멸했다고 봐야 할 듯했다.

“ 욕심이 과했어, 영감.”

연우강은 나적리와 그 주변에 있는 자들을 찬찬히 훑어보며 말했다.

“ 내가 이곳으로 온 게 욕심이었단 말이냐?”

“ 그럼 아냐?”

“ 그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곳으로 온 건 잘못된 결정이 아니었다. ”

“ 이천팔백 명이나 죽었는데 잘못된 결정이 아니었다고?”

“ 그렇다.”

“ 왜 그렇게 생각하지?”

“ 내 앞에 바로 네가 있기 때문이다.”

“ 내 머리가 밀천 무인 이천팔백 명의 가치가 있다는 거야?”

“ 물론 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야궐의 혁련무극과 야노원 고수 그리고 야랑대 무인들을 합치면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본다.”

“ 날 높게 쳐줘서 고맙긴 한데.... 문제는 아직 내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다는 거야. 고로 나적리 넌 네 야망을 위해 이천팔백 명의 생떼 같은 목숨을 지옥으로 처박은 아주 나쁜 놈이 되는 거야.”

“ 놈!”

나적리는 발을 사정없이 굴렀다.

쿠웅!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발이 돌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이곳에 진식을 설치한 자가 연우강이나 혁련무극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제삼의 세력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나중에 다시 싸우더라도 지금은 힘을 합쳐야 할 때였다.

연우강도 연우강강지만 옆에 있는 무원이나 창노는 무시하지 못할 고수들이 아닌가?

“ 좋다. 연우강, 그동안 네가 우리 밀천에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불문에 붙이겠다. 대신......”

“ 힘을 합쳐서 이곳을 빠져나가자고?”

“ 힘을 합치지 않으면 우린 이곳에서 전부 죽는다.”

“ 너희들은 몰라도 난 아냐.”

연우강은 고개를 저었다.

“ 물론 지금까지는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네가 우리와 힘을 합치지 않으면 난 공격 명령을 내릴 것이다.”

“ 날 죽일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거야?”

“ 우린 이백 명이다. 설사 우리가 너희들을 죽이지 못한다고 해도 너희들은 치명적인 부상이나 내상을 입게 될 것이다. 그 상태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보느냐?”

나적리가 자신들이 패할 경우로 예를 든 것은 실패할 거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연우강 일행을 끌어들이지 못할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사실 제삼자의 표적이 된 상황에서는, 승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떻게든 힘을 합쳐 빠져나간 다음에 승부를 가려도 가려야 할 터였다.

“ 응!”

“ .......!”

연우강의 입에서 너무도 쉽게 대답이 나오자 나적리는 일순 할말을 잃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힘을 합치지 않으면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녀석이 연우강이다.

그런데 ‘응’이란다.

“ 내가 말했던가?”

연우강은 나적리를 빤히 보았다.

“ 무슨 말 말이냐?”

“ 전쟁터에서 오래 굴러먹다 보면 내일이란 말의 의미를 잊어먹게 된다고.”

“ 뒷일은 생각지 않는다는 말이냐?”

“ 그건 어려운 말이고, 쉬운 말로는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라는 말이야. 난 너를 없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절대로.”

연우강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함께 죽자는 말이구나.”

“ 아냐, 죽는 건 너희들이야. 난 지금껏 그랬왔던 것처럼 살아남을 거야.”

철컥! 철컥! 철컥!

연우강의 손에서 사망낭조가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 정녕 싸우겠단 말이냐?”

“ 맞아, 영감. 난 이 자리에서 널 죽일 거야.”

“ 오냐, 놈! 죽여주겠다.”

더 이상 설득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나적리는 좌우를 보았다. 상대가 싸우길 원하는 데 꽁무니를 뺄 수는 없었다. 아니 도망치는 순간 공격을 해오면 더 힘들어진다.

없애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 죽여라!”

나적리는 은원 고수들을 향해 차갑게 소리쳤다.

“ 타앗!”

“ 차앗!”

나적리의 명령이 떨어지자 선두에 있던 무인 열 명이 연우강 일행을 향해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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