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72화 (172/232)

제 6장 잔인하고 확실하게

쿠웅!

“ 지옥의 입구는 활짝 문을 열었다!”

읊조리는 듯한 소리가 연우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목 주위에 있던 백팔 개의 사망정주가 부챗살처럼 퍼져나갔다.

슈아악! 슈악! 슈아아악!

사망정주가 날아가면서 흘러나온 소리는 공동 안을 가득 채웠다.

“ 아, 암기다!”

사망정주를 발견한 누군가가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사망정주는 빠르고 잔인했다. 동료들에게 경고의 말을 던진 노인은 물론이고, 그와 함께 열 명의 몸을 뚫어버렸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은원 무인 열 명이 한꺼번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 암기?’

나적리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이곳 광장을 밝히고 있는 건 석벽에 걸려 있는 다섯 개의 횃불이 전부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 하물며 암기는 말할 나위가 없다.

“ 놈이 암기를 가졌다. 조심해라!”

나적리의 말이 떨어지자, 밀천 무인들의 행동이 신중해졌다. 강기막을 펼쳐 몸을 보호하면서 공격 기회를 노렸다.

“ 시작하라!”

누군가의 입에서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 타앗!”

“ 차앗!”

밀천 무인들은 우렁찬 기합을 내지르며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이번엔 어떻게 나오는지 보겠다. 놈!’

나적리는 연우강을 관찰했다.

일상적으로 다수가 소수를 공격할 때는 특별히 진형을 구축할 필요가 없다. 앞에 선 자가 공격하고 빠지면 바로 뒤에 있던 자가 공격을 하고, 그자가 빠지면 또 다른 자가 공격하기 때문에 굳이 진형을 구축하지 않더라도 적에게 숨쉴 여유조차 주지 않는 연환 공격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적이 암기를 사용하는 자고, 초극 고수라면 연환 공격은 오히려 희생만 늘어날 뿐이다.

암기에 대응하는 첫 번째는 가급적 허공으로 솟구치지 않는 것이다. 허공으로 날아오르면 방향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고, 여러 개의 암기가 동시에 날아오는 상황에 직면하면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 없다.

두 번째는 상대를 현혹시켜야 한다.

즉 상대의 목표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지금 밀천 무인들의 행태가 그랬다.

그들은 허공으로 솟구치지 않고 종종걸음치는 것처럼 좁은 보폭으로 빠르게 움직인다. 게다가 연우강의 눈을 현혹하기 위해 두세 사람씩 교차하고 있다.

‘ 넌 죽는다, 연우강.’

나적리는 내심 중얼거렸다.

물론 얼마간의 희생은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연우강 또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나적리는 확신했다.

“ 저 자식들, 우리를 꿔다 놓은 보릿자루로 아네.”

비아냥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연우강 뒤편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는 군무옥이었다.

군무옥은 나오자마자 육참낭아곤을 휘두르며 밀천 무인들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 저놈을 먼저 죽여라!”

나적리는 군무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러자 밀천 무인 서너 명이 군무옥을 향해 달려갔다.

“ 난 우습다 이거지?”

군무옥의 입매가 슬며시 비틀렸다.

그는 왼팔로는 육참낭아곤의 중간을 잡고, 오른팔로는 뒤를 잡았다. 무게중심은 양다리에 공평하게 분배하고 허리를 쭉 편 채다. 걸음걸이는 밀천 무인과 마찬가지로 종종걸음이었다.

종종걸음치른 그의 몸에서 바람이 흘러나왔다. 전신 혈도에서 흘러나온 바람은 군무옥의 몸을 쓰다듬는 것처럼 이동하더니 육참낭아곤으로 흘러 들어갔다. 곧이어 육참낭아곤에서도 바람이 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바람은 강력한 회전력을 가진 와류로 변했다.

“ 차앗!”

군무옥의 입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육참낭아곤이 허공을 강하게 찌르고, 육참낭아곤을 중심으로 돌고 있던 와류가 탈피하는 것처럼 전방으로 쏘아져 갔다.

파앙!

대기가 찢겨나가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 타앗!”

군무옥 앞에 있던 사내는 와류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차르르!

“ 헉!”

노인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와류를 향해 무기를 내리찍는 순간 무기가 와류에 휩쓸려버린 것이었다. 한순간에 무기를 잃은 노인의 가슴을 향해 와류가 쏘아져 들어갔다.

“ 으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노인은 가슴이 뻥 뚫린 채 뒤편으로 훨훨 날아갔다. 설화인과 풍천마인의 공격속에서도 살아남은 노인을 단 일 초만에 저승으로 보내버린 가공한 무공, 그 무공은 다름아닌 광풍파랑십삼절이었다.

쿠웅!

노인 한 명을 처리한 군무옥이 오른발을 강하게 찍었다. 육참낭아곤에서는 더 강한 와류가 흘러나오고 그 와류는 살아 있는 것처럼 주변을 휩쓸었다.

회풍류에 이은 사풍류였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한자리에 멈추지 못하는 밀천 무인들처럼 군무옥 또한 쉬지 않고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이 움직여야 하는 이유는 완전히 달랐다.

밀천 무인들은 연우강의 암기 때문에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하지만 군무옥은 육참낭아곤을 멈추어서는 안 되기에 쉬지 않고 움직여야 했다.

광풍파랑십삼절.

그 무공은 끊임없이 흘러야 하는 무공이었다.

내기도 흘러야 하고, 무기도 흘러야 하고, 몸도 흘러야 한다. 열세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모든 초식은 연결돼 있고, 궁극엔 하나가 된다.

열세 개의 초식을 하나로 만드는 과정.

그 과정이 바로 광풍파랑십삼절의 정수였다.

쿵! 쿵! 쿵쿵쿵!

군무옥이 이동하는 곳에서 북을 치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럴 때마다 밀천 무인들은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나갔다.

“ 우리도 시작해 보세.”

“ 그럽시다.”

군무옥을 지켜보던 무원과 창노가 연우강 오른편으로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이 연우강 오른편에 내려서자마자 밀천 무인들은 거칠게 공격했다.

그런데 그 수가 연우강과 군무옥 앞에 있는 자들보다 많았다. 아마도 그들은 암기를 다루는 연우강이나, 엄청난 무위를 보여주는 군무옥보다는 무원과 창노가 더 쉽다고 생각한 듯했다.

“ 허허! 우리가 가장 만만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네. 그래도 한때 대야벌의 벌주까지 했던 사람인데 너무 하는구먼.”

어이없는 얼굴로 밀천 무인을 바라보던 무원은 검을 가볍게 횡으로 쓸었다. 그러자 진득한 살기가 실린 노을빛 광채가 부챗살처럼 퍼져 나갔다.

그때 창노는 들어올렸던 검을 내리긋고 있었다.

단순한 그 동작이 우주일만검결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노을빛 광채와 푸른 광채는 무자비하게 밀천 무인들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퍽! 퍽퍽퍽! 퍽퍽!

“ 크악!”

“ 아악!”

“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줄을 이었다.

두 사람의 무공은 가공하다는 말로 표현이 불가능했다.

노을빛 광채가 폭발하는 곳에서는 갈가리 찢긴 시체가 남았고, 푸른빛 광채가 스며드는 곳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아나왔다. 무원의 낙일마검법이나, 창노의 우주일만검결은 시체를 온전하게 보존시켜주는 그런 무공이 아니었기에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는 폭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처참했다.

군무옥과 무원 그리고 창노가 좌우측에서 밀고 들어가자 밀천 무인들이 분산되면서 연우강도 한결 편해졌다.

사망묵주를 거둬들인 그는 오른 손목에 있는 사망묵환으로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난무하는 허상은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는 구절처럼 면도가 움직이는 모습은 육안으로 파악이 불가능했다.

아니 연우강의 손목은 얼마든지 확인이 가능했다.

사망묵환에 죽어가는 자들이 확인하지 못한 것은 바로 면도의 끝이었다. 면도의 도신을 막아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무기를 위로 들어올리며 막아내면 고개를 푹 숙이는 것처럼 정수리로 파로들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누르면 고개를 쳐들고 솟구치는 뱀처럼 턱으로 파고들었다. 무기를 좌우로 휘둘러도 마찬가지였다.

면도는 모든 방향으로 자유롭게 움직여 어떤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막아낼 수가 없었다.

문제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모든 감각을 면도에 집중하고 있으면 어느새 암기가 날아와 이마나 심장으로 박히곤 했다.

“ 크윽!”

“ 커억!”

“ 큭!”

연우강을 향해 달려든 밀천 무인들을 보면 불로 뛰어드는 불나방을 연상케 했다. 삼 장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들은 목이나 가슴을 틀어쥐고 쓰러졌다.

“ 어떻게.....”

나적리는 넋을 잃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 있는 무인들은 꽃잎처럼 생긴 특이한 암기를 견디고, 강시를 견딘 강자들이다. 종남산으로 들어왔던 밀천 무인들 중 가장 강자인 것이다.

그런 그들이 바람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있다. 누구 한 명 만만한 놈이 없었다.

오른편에 있는 키 작은 녀석은 물론이고, 오른편의 무원이나 창노 그리고 한가운데 있는 연우강.

그들의 무기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밀천 무인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문제는 저들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 커억!”

밀천 무인 한 명이 나직한 비명과 함께 목을 틀어쥐었다. 나적리는 부하 한 명이 죽임을 당한 곳 허공을 보았다.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기척도 없이 밀천 무인의 목을 잘라내는 자. 그자에게 죽어간 밀천 무인의 수도 거의 삼십여 명에 달한다.

도무지 상대가 안 되는 자들이었다.

“ 밀천 무인들은 물러나라!”

결국 나적리는 후퇴 명령을 내렸다.

물러나라는 명령이 더 큰 화를 불러왔다는 걸 아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투 중에 물러나는 것도 상대가 허락해야 가능하다. 나적리의 명령을 듣고 물러나려고 했던 자들은 다른 자들보다 더 빨리 죽임을 당했다.

맨 후미에 있던 자들은 어떻게 물러날 수 있었지만, 연우강 일행을 공격하던 자들은 계속 싸우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사망자는 계속해서 생겨났다.

“ 죽이겠다. 연우강!”

나적리는 광포하게 고함을 지르며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다른 무인들과 다릴 그는 종종걸음치지 않았다. 허공답보의 경공을 익히고 있어, 원하면 허공에서도 방향을 바꿀 수가 있지만, 그것보다는 그가 익힌 우주일만검결이 상대보다 높은 위치에서 펼쳤을 때 최강의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었다.

허공을 밟고 몸을 날린 나적리는 연우강과 오 장을 남겨둔 지점에 내려서자마자 곧바로 우주일만검결을 펼쳤다. 그의 검에서 희뿌연 색의 강기가 흘러나와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갔다. 하지만 그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밀천 무인 십여 명이 연우강을 향해 공격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은 연우강과 밀천 무인들을 떼어놓은 다음에 전력을 다할 참이었다.

부하들의 생사를 무시하고 전력을 다했더라면 어쩌면 기회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적리의 첫 번째 실수였다.

쿠웅!

광장이 울릴 정도로 강한 소성이 연우강의 발치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잔뜩 오므렸던 연우강의 가슴이 나적리를 향해 활짝 펴졌다.

슈아악!

먼저 백팔 개의 사망정주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허리춤에 있던 사망월반이 날아가고, 맨 마지막으로 왼편 가슴에 있던 사망사화가 쏘아져갔다.

“ 어림없다. 놈!”

나적리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물렸다.

우주일만검결을 펼칠 때 쏘아져 나가는 기운은, 펼치는 당사자조차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하여 일만 개의 검결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비록 연우강의 몸에서 쏘아진 암기의 수가 생각보다 많기는 했지만 우주일만검결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 끝났다!’

나적리는 내심 소리쳤다.

연우강이 피하길 바라며 펼친 공격이었는데, 뜻밖에도 암기로 맞받아친 것이다. 다음 공격을 펼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 그럴 거라고 생각해?]

문득 귓전으로 연우강의 전음이 들려왔다.

“ 무슨........”

나적리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암기를 잘 봐. 나적리.]

또다시 연우강의 전음이 들려오자 나적리는 전면으로 시선을 주었다.

“ 허억!”

그는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자신이 펼친 우주일만검결의 기운이 하나씩 스러지고 있었다. 그 스러진 자리로 다른 기운이 들어차고 있는데, 그것들은 전부가 말 형상이었다.

“ 우, 우주일만검결이란 말이냐?”

나적리의 두 번째 실수였다.

놀라기보다는 먼저 피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 놀라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

나적리는 수만 마리의 말이 달려오는 듯한 착각을 했다.

퍽! 퍽퍽퍽! 퍽퍽!

그리고 나적리가 말로 착각했던 그것들은 그의 몸을 짓밟고 지나갔다.

털썩!

아직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로 나적리의 몸은 참혹했다. 부러지고, 깨지고, 찢겨나가고,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하지만 나적리는 여전히 놀란 얼굴을 한 채 연우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궁금증을 풀지 못하면 죽을 수 없다는 듯 그런 눈빛으로.

“ 어떻게?”

그는 망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연우강이 파천군마도를 보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파천군마도만으로 우주일만검결을 익혀낸다는 건 불가능하다. 밀천 무인 수천 명이 수천 년 동안 파천군마도를 보지 않았던가.

“ 혹시 천수장해라고 들어본 적 있어?”

연우강은 쏘아보냈던 암기들을 회수하며 말을 던졌다.

“ 천수장해라면......”

“ 그럼 천수귀장 혁미월은?”

“ 설마......?”

“ 맞아. 네가 날 처박은 그곳에서 천수귀장 혁미월이 남긴 책자를 얻었어. 그 책엔 재미있는 사실이 적혀 있었었어. 우주일만검결의 창시자는 천수귀장 혁미월이었는데 그녀에게 무공을 창안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 사람은 천마였어.”

“ 그, 그러니까 우주일만검결을 창안한 사람이 우주만옹이 아니었다는 거냐?”

“ 우주만옹은 혁미월의 후손이잖아.”

연우강은 나적리를 향해 걸어갔다.

“ 허허허! 결국.......”

나적리는 허탈하게 웃었다. 놈을 없애기 위해 사지로 밀어넣었는데, 그곳에서 우주일만검결의 완벽한 구결을 얻었단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 너도 도박을 해봤으니 알 거야. 한번 운이 틔기 시작하면 실력 같은 건 의미도 없다는 걸 말이야.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그 녀석을 막을 수 없어. 결국엔 운이 트인 놈이 판돈을 쓸어가는 거야.”

연우강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차앙!

사망묵환이 모습을 드러내며 나적리의 목을 감아돌았다.

“ 하지만 운으로 돈을 딴 도박꾼들은 다음 날에 다 털린다는 게 문제지. 아니, 돈을 땄을 때를 못잊고, 가진 재산을 전부 잃으면서도 도박장을 떠나지 못한다는 게 더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지. 죽을 때까지 말이야.”

“ 나도 그럴 거라고?”

“ 물론이다. 연우강. 달이 차면 기우는 것처럼 운도 언젠가는 끝장나게 돼 있다.”

“ 물론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하지만 네가 한 가지 모르는 게 있어.”

“ 뭘 모른단 말이냐?”

“ 운이 틘 그 도박사가 엄청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거야. 실력을 갖추고 있는데 운까지 따르게 되면, 그 도박사는 중원 전역에 있는 모든 도박장의 돈을 긁어모을 수가 있어. 그 도박사가 바로 나야.”

연우강은 오른 손목을 슬쩍 보았다.

차르르!

풀렸던 사망묵환이 빠르게 원래 자리로 들어갔다.

툭!

그리고 나적리의 머리가 지면으로 뚝 떨어졌다.

“ 태상천주께서 당하셨다!”

“ 철수하라!”

나적리의 죽음을 확인한 밀천 무인들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통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광장 밖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지만 밀천 무인들은 멈추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면 살아날 방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빠르게 몸을 날렸다.

“ 우린 앉자고.”

연우강은 광장 끝으로 몸을 날려 갔다. 그러고는 벽 가장 자리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 뒤로 군무옥, 무원, 창노가 다가와 같은 자세로 앉았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피곤에 지친 자들이 호흡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누굴 것 같소?”

건너편 통로로 시선을 주며 군무옥이 물었다.

“ 야궐 무인이거나 아니면 패천 무인들이겠지. 그리고 밀천의 최강 고수를 저렇듯 손쉽게 없앨 정도면 상당히 강자들이라고 볼 수 있고.”

비명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 그럼 저놈들을 없애고 나면 안으로 들어오겠군요.”

“ 그렇겠지.”

두 사람의 말이 끝나자마자 비명이 뚝 그쳤다.

그리고 광장 안쪽으로 십여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마유, 사유, 환유를 비롯한 패천 무인들이었다.

그런데 만기팔유 중 모습을 보이고 있는 자는 마유와 사유 뿐이었다. 둘을 알아본 연우강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 패천림 장로들은 전부 저승으로 간 모양이지?”

“ 그들이 널 만나고 싶다고 하더구나.”

마유가 대답했다.

“ 난 그놈들하고 술 마실 생각 없는데.”

연우강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자마자 좌우측에 앉아 있던 군무옥과 무원, 창노가 덩달아 일어났다. 그들은 천천히 광장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 술을 마시기 싫으면 옆에서 따라주는 것도 괜찮을 게다.”

마유는 연우강 일행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그는 곁눈질로 바닥을 살폈다. 백여 구가 넘는 시체들이 바닥을 채우고 있었다.

그 시체들 주에는 나적리도 있었다.

나적리의 시체를 확인한 마유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머물렀다 사라졌다.

시체의 상태만 보아도 싸움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바닥에 널부러진 시체는 온전한 것들이 별로 없다. 그렇다면 싸움은 상당히 치열했다는 뜻이 되고, 연우강 일행의 몸 상태는 최상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게다가 조금 전 연우강 일행은 반대편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밖에서 비명이 들려오는데, 그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을 터였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한 명이었다.

마유가 알기로는 연우강 일행은 다섯 명이었다.

그런데 지금 광장에 남아 있는 자는 네 명이다. 전에 대창익 장로를 데리고 광장으로 들어왔을 때 허공중에 숨어 있었던 자, 유령신마존 독고철웅이라고 하였던 그가 보이지 않았다.

마유는 두 가지로 예측하고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죽었을 거라는 것과, 허공 속에 숨어 있는 것, 하지만 그 두 가지 중 어느 쪽인지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싸움은 수천 명이 죽임을 당할 정도로 격렬했고, 패천림 최고 고수라고 할 수 있는 자들과도 싸웠으며 이곳에서는 나적리가 이끄는 밀천 무인들과도 싸웠다.

정황으로 보면 죽었다고 봐야겠지만, 그가 연우강의 말처럼 정말 유령신마존 독고철웅이라면 허공 어딘가에 숨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 하지만 우리에겐 환유가 있다.’

마유는 환유가 있는 곳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 말하게.]

환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전에 그 자가 숨어 있을 지도 모르니까 조심하게.]

[자칭 유렁신마존이라고 했던 그자 말인가?]

환유의 목소리엔 약간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 그렇네.]

[ 그자가 유령신마존이면 난 천마 사조네.]

[ 아무튼 조심하게.]

마유는 빙그레 웃으며 전면으로 시선을 주었다.

어느새 연우강 일행과는 십여 장으로 가까워져 있었다.

[ 어떻게 할 텐가?]

마유는 사유에게 전음을 보냈다.

[ 마유, 자넨 연우강만 맡게.]

사유는 턱으로 연우강을 가리켰다.

[ 알았네. 잠시만 시간을 끌면 연우강을 없애고 금세 합류하겠네.]

마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양측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서로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 급기야 두 기운은 무인들 중앙에서 부딪쳤다. 그 바람에 너부러져 있던 밀천 무인들의 시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찔거렸다.

" 아직 싸울 힘이 남은 모양이구나?"

마유는 연우강을 슬쩍 떠보았다.

" 물론이지 힘이 넘쳐서 탈이야."

연우강은 오른팔을 접어 알통 만드는 시늉을 하며 싱긋 웃었다.

' 큭'

마유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어렸다.

역시 허장성세에는 일가견이 있는 놈이었다.

" 그럼 나와 일대일로 대결할 수도 있겠구나."

" 한사보다 강해?"

연우강을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 물론 난 한사보다 강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하지만 너는 이길 수 있을 것 같구나."

" 후회할 짓은 않는 게 좋을 텐데.... 아무튼 한바탕 어울려보자고 했으니까, 거절하면 사내가 아니지."

연우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유 앞으로 걸어갔다.

[ 영감!]

연우강은 걸어가면서 창노에게 혜광심어를 보냈다.

[ 말하거라.]

[ 내가 마유를 죽이는 순간 저자는 깜짝 놀랄 거요. 그때를 놓치지 마시오.]

[ 알았다.]

창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유가 있는 곳으로 걸었다.

[ 독고 영감.]

연우강은 허공에 숨은 독고철웅을 불렀다.

[ 말하게.]

[ 환유는 찾았소?]

[ 거기에서 삼 장 떨어진 곳에 있네.]

[ 잠시 후에 마유란 놈이 있을 거요. 그때를 놓치지 마시오.]

[ 걱정 말게.]

독고철웅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방을 살폈다. 삼 장 건너편, 희미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 내가 인정하는 은신술은 만화은신사영 한 가지밖에 없다. 놈. 네가 익힌 건 삼류에 불과하다.'

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손에 내공을 모았다.

" 일 초를 양보하고 싶은데, 어때?"

바로 그때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거절하지 않겠다. 연우강!"

마유는 바닥을 박차고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때 창노는 사유에게로 군무옥과 무원은 패천 무인들에게로, 그리고 독고철웅은 환유가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 가라!"

순식간에 연우강 삼 장 앞에 선 양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양손에서 검은 장강이 쏟아져 나갔다.

" 차앗!"

연우강의 입에서도 우렁찬 기합이 터져 나왔다. 마유가 쏘아낸 검은 손바닥을 향해 양손을 거칠게 후려쳤다.

콰앙!

" 크윽!"

나직한 비명과 함께 연우강의 신형이 뒤편으로 훨훨 날아 갔다.

' 저런 독한 놈!'

연우강을 지켜보던 독고철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사와 싸울 때 가짜 발자국을 남기고, 이곳에서는 피곤한 척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 모든 행동이 전부 마유 일행을 쉽게 처리하기 위해서였고,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완벽함을 기하기 위해 마유의 일 초를 허용한 것이다.

" 끝이다, 연우강!"

마유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독고철웅은 무공을 펼칠 준비를 했다.

척!

뒤편으로 날아가던 연우강이 간신히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사이에 마유는 이미 삼 장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마유는 공격하지 않았다.

조금 전 펼친 혼세만겁장 때문이었다. 전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우강을 없애지 못한 것이다. 문득 연우강이 삼대 외공 중의 하나인 흑철마신과 불괴수호공을 익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두 가지가 다 호신 무공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들을 깨트리는 방법은 장강이 아닌, 직접 손으로 목을 꺾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연우강 앞으로 다가간 마유의 양손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혼세만겁장을 십이 성 끌어올렸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마유는 양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바로 그때였다.

연우강의 양손이 후려치듯 허공을 갈겼다.

퍼억!

연우강의 손에서 쏘아진 장력은 정확하게 마유의 가슴을 강타했다.

" 커억!"

이번엔 마유의 신형이 뒤편으로 훨훨 날았다.

파앗!

뒤편으로 날아가는 마유를 연우강이 따랐다.

" 헛!"

" 헉!"

여기저기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 끝이다, 마유!"

연우강의 입에서 차가운 외침이 흘러나왔다.

몸을 날리는 연우강의 양손은 조금 전 마유가 그랬던 것처럼 먹물처럼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그것은 천마삼경 중 흑경의 무공인 흑마수였다.

" 마, 마유! 피하게!"

사유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는 급하게 마유를 향해 몸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고 했다.

" 헉!"

사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느닷없이 엄청난 기운이 그의 사지를 옥죄어온 것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창노를 보았다. 그때 창노는 검을 내밀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우주일만검결이 내포된 무극검이었다.

기절할 듯 놀란 사람은 비단 사유만이 아니었다. 허공중에 숨어 있던 환유 또한 경악한 얼굴로 가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서는 피가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 크아악!"

" 으아악!"

두 마디 비명이 연속해서 들려왔다.

환유는 고개를 돌렸다.

먼저 비명을 지른 자는 마유였다. 마유의 가슴엔 먹물처럼 새카만 연우강의 손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연우강과 오 장 떨어진 곳에서는 사유의 동체가 가루로 변해 흩어지고 있었다.

환유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연우강이 마유를 이길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마유는 단 이초 만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 우리 다섯 명 중 가장 강자는 연 공자네."

독고철웅은 사유 몸 안으로 찔러 넣었던 손을 천천히 말아 쥐며 말했다.

" 그, 그가 가장 강자라고?"

" 그렇네. 우리 다섯 명 중에서 가장 강자가 아니라 강호 무림에서 가장 강자일 거네. 그건 내기해도 좋네."

독고철웅은 싱긋 웃으며 손을 사정없이 뽑았다.

" 커억!"

은신술이 풀린 환유는 피를 쏟아내며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마유, 사유, 환유가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 군무옥과 무원은 종횡무진 움직이며 패천 무인들을 없애고 다녔다.

몇몇 패천 무인들이 대항을 해보았지만, 무원은 전대 대야벌 벌주고, 군무옥은 광풍파랑십삼절이라는 절세의 무공을 완성한 상태.

패천 무인들은 도살장 짐승들처럼 도륙을 당했다.

반각이 채 지나지 않아, 광장에는 정적이 찾아들었다.

" 확인해!"

연우강이 군무옥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 알겠소. 대장."

군무옥은 육참낭아곤으로 시체를 뒤집고 다녔다.

" 전부 저승행 마차를 탔소."

시체를 전부 확인한 군무옥이 연우강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 몸은 어때?"

" 몸?"

군무옥은 고개를 갸웃했다.

" 운용 가능한 내공이 줄어들고 있지 않아?"

" 그건 아직 ..... 얼래?"

군무옥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팔 할의 내공을 운용하는 건 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흐름이 상당히 느려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 흐름이 느려진 것 같소."

군무옥은 제 몸 상태를 그대로 말했다.

" 음양지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혹시 대장도 몸이 이상한 거요?"

" 그런 모양이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하자."

연우강 일행은 조금 전 마유 일행이 들어왔던 통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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