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사막에서는 짐승이 된다.
산과 바다를 가르고 하늘을 나는 무인이라 할지라도 자연 앞에 서면 티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소가 두 곳 있다. 그곳은 바로 망망대해와 사막이다.
물론 먹을 것도, 물도 없는 상황이라는 조건이 따라야 하지만 그런 상황이 오면 무인은 본인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지금 제천강처럼.
미친 듯이 놈들을 쫓다가 문득 물도 없고, 음식도 길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저 앞에 네 놈이 가고 있으니 길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놈들과의 거리는 결코 좁혀지지 않았다.
제천강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녀석이 뿜어내는 열기는 모래를 얼마나 달궜는지, 신발을 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바닥이 데일 정도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모래로 이루어진 세상이 눈 안 가득 밀려 들어왔다.
" 큰 실수를 했어."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 내공을 끌어올려 천리지청술을 펼쳐보았지만, 들려오는 거라고는 바람 소리와 사구에서 모래가 흘러내리는 소리밖에 없다.
완전한 고립.
묘하게도 사방이 확 틔어 있어 지평선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밀려드는 건 지독한 고립감이었다.
이곳은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우뚝!
제천강이 걸음을 멈췄다. 발바닥에 오는 감촉이 지금까지와 달리 딱딱했던 것이다. 혹시나 땅을 밟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천강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 죽일 놈들!"
그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살기를 흘리던 것도 잠시 제천강은 급하게 몸을 숙여 양손으로 모래를 떴다. 며칠 동안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못한 제천강에게 물에 젖은 모래는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모래를 노려보던 그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렇게 구차한 짓을 하면서까지 살아야 하는지, 문득 굴욕감이 온몸을 잠식해 들었다.
' 어떻게 살아온 삶인데, 살아야지.'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모래를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러고는 단물을 빨아먹듯 쭉쭉 빨았다. 하지만 이미 말라가고 있던 모래에서 물이 나올 리가 없었다. 다만 약간 찝찔한 습기만 느껴질 뿐이었다.
[ 쯧! 거지새끼가 다 됐구나.]
또다시 비아냥대는 듯한 목소리가 귓전에 와 박혔다.
" 크아아!"
제천강은 짐승처럼 포효하며 전음이 들려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몸을 날려가는 그의 입 주변은 모래로 범벅이었다.
[ 넌 이제 큰일났다. 안 그래도 갈증이 심한데 소금물까지 처먹었으니, 쯧! 아무래도 넌 사막에서 죽을 팔잔가 보다.]
" 크아아!"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자들일수록 스스로에게 엄격하다. 그런 자들이 몰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누군가의 농간이 아니라 스스로가 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을 경우에 겪어야 하는 굴욕감을 극복하지 못해서다.
즉 자멸한다는 것이다.
제천강도 다르지 않았다.
지난 천오백 년 동안 패천림을 지켜왔고, 그러면서도 심검의 경지까지 올라,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자였다. 그런 그가 젖은 모래를 입 안 가득 집어넣고 쭉쭉 빨고 있었으니 그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는가.
다행히 아무도 보지 못했다면 자책하면서 끝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들키게 되면, 그 누군가를 향해 분노를 발산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게 화를 낸다. 신에게 화를 내는 건 훨씬 심리적인 타격이 크다.
제천강의 귀에는 소금물이라는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는 무서운 속도로 야율사은 일행을 쫓아갔다.
하지만 야율사은 일행 또한 약자가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은 음식과 물로 체력을 충분히 보충한 상태.
백 장에 달했던 거리가 오십 장까지는 좁혀졌지만 더 이상은 좁혀지지 않았다.
" 너무 심하잖아. 인마."
미친 듯이 쫓아오고 있는 제천강을 흘끔 쳐다본 야율사극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 가끔 늙은 사자의 발톱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해 봐야지. 마냥 끌고 다닐 순 없잖아."
그랬다.
사마윤이 제천강의 자존심을 바닥까지 긁은 이유는 몸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 저 정도면 아직도 오 일은 거뜬하겠다."
마장승이 제천강을 돌아보며 말했다.
" 오 일이 아니라 십 일도 거뜬하겠다. 자식아. 아무튼 뭘 먹었는지 체력 하나는 끝내주는 영감이야."
사마윤은 낄낄거리며 몸을 날렸다.
" 크아아!"
제천강은 계속 포효하며 네 사람을 쫓아갔다.
" 그쪽에서는 연락 왔냐?"
사마윤은 야율사은을 돌아보며 물었다.
" 북해빙궁 일행은 물과 음식이 충분하니까 아직은 쌩쌩할 거야."
" 하지만 잠은 못 자겠지?"
" 그렇지. 밤만 되면 무차별 공격이 이어지니까. 잠을 잔다는 건 곧 지옥 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셈이 되지."
" 그럼 그들도 조만간 무너지겠구나."
" 그럴 거야."
야율사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 수나인은 어떻게 할 거냐?"
" 그 양반은 여설 소저가 알아서 해아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 그래도 넌 팔황천의 총천주잖아."
" 여설 소저의 남편은 태상총천주야, 인마."
" 그렇구나. 아무튼 좋은 방향으로 끝났으면 좋겠다."
사마윤은 동쪽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동쪽 어딘가에 수여설을 비롯한 잠룡대 대원들은 패천 무인들을 쫓고 있을 것이다.
" 적랑, 저놈 속도가 빨라졌다. 서둘러라."
뒤쪽을 살피던 백을상이 소리쳤다.
" 알았다."
사마윤은 제천강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전음을 보냈다.
[ 모래를 실컷 처먹었으니까 배는 부르겠구나.]
" 죽여버린다!"
제천강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지르며 사마윤 일행을 쫓아 몸을 날렸다. 전 내공을 동원하여 몸을 날려가는 제천강의 얼굴엔 점점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얼굴 가득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자는 제천강만이 아니었다. 제천강을 따라 사막으로 들어왔던 검산일 일행의 얼굴에도 짙은 그늘이 져 있었다.
그것은 죽음의 기운이었다.
검산일은 굳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써 팔 일이 지났다.
그동안 음식은 고사하고 물조차 입에 대지 못했다.
현기증으로 인해 머리는 어질어질하고 시야는 뿌옇게 흐려진다. 무인이기에 지금까지 견디고 있을 뿐 양민 같았으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 결국......."
검산일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비라도 왔으면 좋으련만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햇빛은 무섭게 내리꽂히고 있다.
말 그대로 직사광선이다.
" 저, 저기!"
그때 문도 중 한 명이 전면을 가리켰다.
검산일은 고개를 들어 문도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낮은 사구 위에서 이백 여 명 되는 자들이 이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혹시...."
검산일의 눈이 반짝 빛났다.
" 여기요!"
문도 중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그는 사구 위에 있는 자들이 새외귀막 무인들로 생각한 것이었다.
" 아냐!"
검산일은 고개를 저었다. 새외귀막 무인들이라면 이쪽을 발견한 즉시 뛰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는다. 적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의미였다.
검산일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편을 빤히 쳐다보던 자들은 갑자기 몸을 날려오고 있었다. 뛰어오는 자들의 손에서는 간혹 광채가 번쩍였다. 그것은 무기가 햇빛을 반사하면서 나타나는 광채였다.
" 전투 준비하라!"
검산일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 무, 무슨 소리입니까? 장로님. 저들은 새외귀막 무인들입니다."
조금 전 손을 흔들었던 문도가 달려오는 자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 정신 차려라! 저들은 적이다!"
검산일은 내공을 실어 강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 아닙니다. 장로님께서 잘못 봤습니다.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패천림 문도는 달려오는 자들을 향해 마주 달려갔다.
" 저 친구 말이 맞습니다. 저들은 새외귀막 무인들입니다. 우리 친구들이란 말입니다."
이어 십여 명이 먼저 간 문도를 쫓아 몸을 날렸다.
" 멈춰라!"
하지만 달려나간 자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왜 이제야 오는 거요. 당신네들을 기다리다가 목 빠져 죽는 줄 알았소. 우선 물부터 좀 주시오!"
오히려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달려갔다.
" 설마 환영?"
검산일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저들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에서 적일지도 모르는 자들을 새외귀막 무인들이라고 단정지어 버린 듯했다.
" 도, 돌아와라!"
검산일은 재차 고함을 내질렀다.
" 죽여라!"
바로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사막을 강타했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오고, 패천 무인들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 후미에 있는 자들은 확살하라!"
" 존명!"
우렁찬 외침과 함게 쓰러진 자들을 향해 두 번째 공격이 자행됐다. 무서운 속도로 패천 무인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은 수여설을 비롯하여 잠룡대 대원들이었다.
" 방어 대형을 취하라!"
검산일은 암기를 던질 자세를 취하며 소리쳤다.
패천 무인들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 공격하라!"
거리가 십여 장으로 좁혀지자 수여설은 고함을 내지르며 검산일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차앗!"
검산일의 양손이 비쾌하게 뿌려졌다. 팔 일 동안 아무것도 섭취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는 패천팔관을 맡았던 장로. 그의 양손에서 쏘아져 나간 비수는 빛살처럼 수여설을 향해 폭사돼 갔다.
" 타앗!"
수여설은 양손을 쭉 내밀었다.
쩌엉!
새하얀 강기가 검산일이 쏘아낸 비수를 향해 쏘아졌다.
콰앙!
둔탁한 소성이 들려오고 얼음 가루가 사방으로 날렸다.
" 계집!"
검산일은 수여설을 향해 몸을 날려가며 연거푸 손을 뿌렸다. 그의 손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비수가 쏘아져 나갔다.
" 하앗!"
수여설의 입에서 우렁찬 기합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가슴 앞으로 모아들었던 양손을 다시 쭉 내밀었다.
쩌어엉! 쩌어엉!
새하얀 광채 수십 줄기가 쏘아지면서 사방에서 얼음덩어리가 생겨나며 검산일의 비수를 차단햇다. 그리고 그 광채들 중 하나는 검산일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우뚝!
검산일의 동작이 그대로 멈췄다.
" 시원하군."
검산일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맺혔다.
뭔가가 가슴으로 파고들어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뭔가는 분명 계집이 쏘아낸 빙공이 분명할 것이다. 공격을 허용했으니 남은 건 죽음밖에 없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는 시원함이 앞선다. 이젠 더 이상 목마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들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입을 달싹거렸다.
우르르!
그러나 그는 끝내 말을 하지 못하고 얼음 조각으로 부서져 내렸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사방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패천 무인들은 잠룡대의 상대가 아니었다. 정상적인 상태였더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자들이 잠룡대인데 하물며 지금은 팔 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상태.
무기를 휘두른다고 휘둘러보지만 힘이 실리지 않았다.
그런 그들을 향해 잠룡대 대원들은 무자비하게 무기를 휘둘렀다.
특히 가장 잔인하게 적을 없애는 자들은 잠룡 십 조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무기로 자르고 방패로 찍으며 확실하게 패천 무인들을 없앴다.
부상자조차도 용납하지 않는 잔인함.
그들의 모습이 그랬다. 잠룡 십 조 대원들은 어느새 이리가 돼 있었다.
그런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가 있었다.
그는 일행을 안내하고 있는 탈라하였다.
" 연 공자 저리가라네."
탈라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 싸움은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삼백 여 명에 달했던 패천 무인들은 대부분 죽고 남은 자는 몇 없었다.
그들 또한 금세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탈라하는 고개를 돌려 수여설을 보았다.
검산일을 없앤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확살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문득 대단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 끝났습니다. 조장!"
낭혼 북태우가 수여설 곁으로 몸을 날려 가며 보고했다.
" 머리는 취하고 몸통은 묻어주도록 하세요."
" 존명!"
수여설의 말이 떨어지자 잠룡대 대원들은 패천 무인들의 머리를 잘라내고 나머지는 모래 속으로 파묻었다.
그리고 수여설은 잘라낸 머리를 꽁꽁 얼렸다.
작업을 끝낸 잠룡대 대원들은 패천 무인들의 머리를 챙겨들고 동쪽으로 길을 잡았다.
빠르게 이동한 그들이 걸음을 멈춘 곳은 백여 장 높이의 사구 위였다. 그곳에 서자 아래쪽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수백 장 떨어진 곳에 수천 명이 길게 늘어선 채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북해빙궁을 비롯한 다섯 문파 무인들이었다.
수여설은 복잡한 얼굴로 그들을 보았다.
반란을 주도했던 사람은 어머니다. 아무리 계모고, 정이 없다고 하지만 아버지께서 사랑했던 분이고, 북해빙궁의 궁주다. 그런 그녀를 치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수여설은 탈라하를 돌아보았다.
" 저곳으로 가면 어디가 나오죠?"
" 유사지대가 나옵니다."
" 유사지대는 뭐죠?"
" 모래 늪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곳으로 들어가면 무인이라고 해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저들 중 팔할 이상은 죽음을 당할 겁니다."
" 새외귀막 천주는 유사지대를 모르나요?"
" 그도 알고 있습니다."
"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 적을 저곳으로 유인하는 건 단 천주 때문입니다."
" 단 천주때문이라는 건 무슨 말이죠?'
" 일종의 경고인 셈입니다. 계속 북해빙궁 쪽에 붙어 있으면 새외귀막이라도 적으로 간주하겠다는 뜻이지요."
" 단 천주는 아직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 건가요?"
" 단 천주는 총천주를 배신할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건 무슨 말이죠?"
" 그건 우리도 모릅니다. 다만 그가 저들 속에 끼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는군요."
" 그렇습니다."
" 좋아요. 그럼 유사지대 근처까지 가도록 해요."
" 모시겠습니다."
탈라하는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 유사지대에는 누가 기다리고 있는 건가요?"
" 이곳 주변에는 야수지옥군, 북천혈랑군, 철갑흑웅군, 암흑명왕군의 사천 명이 은신해 있고, 백의광마군 일천은 그들을 유인해 오고 있습니다."
" 그럼 북천지옥부 무인이 다 모여 있는 셈이네요?"
" 막북혈마성 무인 오천도 집결한 상태입니다. 혈마성과 북천지옥부를 이끌고 있는 분은 대혈마시고요."
" 그럼 이번 전쟁의 마지막 장소는 이곳이 되겠군요."
"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탈라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도를 냈다.
수여설은 말없이 탈라하를 따라 내달렸다.
수여설을 비롯한 잠룡대 대원이 유사지대에 도착한 것은 사흘 후였다. 그들이 도착하자 북청강을 비롯한 막북혈마성과 북천지옥부 지휘관들이 맞아주었다.
" 그들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습니까?"
탈라하는 북청강을 보며 물었다.
" 나흘이면 이곳에 도착할 거라고 하였네."
" 그럼 푹 쉬어도 되겠군요."
" 그렇게 하게."
" 알았습니다."
탈라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룡대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잠룡대 대원들은 그늘막 아래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 나흘 후에 도착한답니다."
탈라하는 수여설 일행이 앉아 있는 그늘막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 이곳으로 올 거라고 보세요?"
수여설은 탈라하를 보며 물었다.
새외귀막 무인들은 이곳 지리를 알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금세 유사지대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 상황에서도 그들이 따라올는지.
바보가 아닌 이상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변황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또한 피할 수도 없고요."
" 혹시 기습 공격을 그만 둔 것과 관계가 있나요?"
문득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몇 번의 기습 공격을 성공하였고, 승리를 확신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기습 공격을 멈추니 중원 무인들만 처리해 달라는 부탁을 해온 것이다. 어차피 없애야 할 자들이었기에 따르긴 했지만 여러 가지로 의문이 남는 작전이었다.
" 그렇습니다. 기습 공격을 계속하면 결국엔 우리가 승리할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북천지옥부는 더 이상 변황의 하늘이라 불릴 수 없게 됩니다."
" 승리는 정당한 대가로 얻어야 한다는 변황의 율법 때문이란 말이군요."
수여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거......"
탈라하는 수여설이 들고 있는 물잔을 보았다. 물잔 표면에 서리가 하얗게 끼어 있었다.
" 무공을 응용하면 생활에 편리를 얻을 있어요. 한 잔 할래요?"
수여설은 빙그레 웃었다.
" 그럼 좋지요."
탈라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여설이 눈짓을 하자 북태우가 물잔에 물을 담아 왔다. 물잔을 받아든 수여설은 손바닥으로 감싸고 슬쩍 내공을 주입하여 탈라하에게 건넸다.
탈라하는 물잔을 받아 들고는 급하게 물을 들이켰다.
" 카야!"
탈라하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더위가 싹 가셨다. 탈라하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피어났다.
" 기분 좋죠?"
" 네! 최곱니다."
" 이 물 한 잔에도 행복을 느끼는데, 왜 그렇게 욕심을 부리는지 모르겠어요."
" 그렇군요."
탈라하는 물잔을 가만히 보았다.
어머니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수나인은 지금도 충분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황의 지존을 노리고 전쟁을 시작했다. 과연 그렇게까지 해서 그녀가 얻을 게 얼마나 있을는지.
" 아무튼, 어머닌 제가 맡을게요."
" 알았습니다. 북 천주께도 그렇게 말하겠습니다."
탈라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여설은 물잔을 내려놓고 몸을 뉘었다. 적이 오는 동안 잠이라도 자둬야 할 것 같았다.
**********
" 으음!"
단극효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전에 와본 듯한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그는 옆에 있는 아극사를 보았다. 아극사는 새외귀막 최고 연장자로 부천주를 맡고 있는 자였다.
“ 전에 와본 적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아극사는 단극효를 보며 물었다.
“ 부천주 생각은 어떻소?”
“ 지형이 달라지긴 했지만 저도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 혹시?”
“ 천주의 생각이 맞을 겁니다.”
“ 그럼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이 사강이란 말이오?”
그곳으로 들어가면 죽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사강은 유사지대의 정식 명칭이었다.
“ 그럴 겝니다.”
“ 총천주는 우리를 죽일 셈이군요.”
“ 죽이려는 게 아니라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 전쟁을 계속할 건지, 아니면 투항을 할 건지 그 선택을 말하는 겁니까?”
“ 그렇습니다. 그리고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 뭐가 늦지 않았단 말입니까?”
“ 전 처음부터 이 전쟁은 잘못된 전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 끝났습니다. 백타. 우린 저들과 함께 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출병을 감행했습니다. 이제 아서 바꾸기엔 늦었습니다.”
“ 그랬죠. 그래서 저도 따라온 거니까요.”
아극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아가는 속도를 늦춰 뒤로 쳐졌다.
“ 상공!”
옆에 있던 나옥심이 단극효를 불렀다.
“ 대주는 앞으로 가서 궁주님께 방금 들은 말을 전하십시오.”
“ 상공.”
“ 난 약속을 했습니다. 대주. 그리고 백의광마군을 쫓아가면 우린 전부 죽습니다.”
“ 아, 알았어요.”
단극효가 강한 어조로 말하자, 나옥심은 진형 선두로 몸을 날려갔다.
잠시 후 그녀는 수나인 옆에 멈췄다. 그러고는 조금 전 들었던 말을 자세하게 전했다.
“ 그러니까 저들을 따라가면 유사지대에 도착한다는 거냐?”
수나인은 배여 장 앞에서 가고 있는 백의광마군 무인들을 가리켰다.
“ 그래요, 언니. 당장 추격을 멈춰야 해요.”
“ 호호호! 야율사은이 제 무덤을 파고 있구나.”
수나인은 활짝 웃었다.
“ 언니!”
나옥심은 의아한 얼굴로 수나인을 보았다. 적이 파놓은 함정으로 들어가고 있다는데 활짝 웃다니. 수나인이 제정신인가 싶었다.
“ 넌 저곳이 호굴이라고 생각하느냐?”
“ 아닌가요?”
“ 호랑이가 살아야 호굴이라 부를 수 있는 거다.”
“ 상관없단 말인가요?”
“ 상관없는 게 아니고 내가 기다렸던 순간이란다.”
“ 기다려요?”
“ 들어봐. 우리 병력은 전부 만 오천 명이다. 반면에 북천지옥부는 오천가량이고 막북혈마성 무인을 합친다고 해도 일만에 불과하다. 지금처럼 우리를 끌고 다니면서 조금씩 없앤다면 승산은 야율사은에게 있었을 게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싸울 수가 없다.”
“ 왜죠?”
“ 북천지옥부가 변황의 하늘이기 때문이다.”
지난 천여 년 동안 북천지옥부는 변황의 하늘이라고 불려왔다. 북천지옥부가 하늘이라 불린 이유는, 변황인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청부를 넣는 지옥부 때문이다. 그 지옥부로 인해 북천지옥부는 정정당당함의 상징이 됐던 것이다.
그런 자들이 기습으로 일관하여 도전자를 없애고 승리를 거두게 되면 변황인들은 더 이상 북천지옥부를 하늘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 설사 기습 공격으로 승리를 거머쥔다고 해도 야율사은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
“ 그럼 언니는 그들이 정면 공격해 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군요.”
“ 그래서 계속 쫓아다닌 거란다.”
수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 하지만 뒤쪽의 유사지대는.....”
“ 뒤에 유사지대가 있다는 건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 배수진이란 말인가요?”
“ 물론이다. 물러서면 무조건 죽고, 앞으로 나아가면 그나마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면, 사람은 전진할 수밖에 없다. 이번 전쟁은 우리가 이긴다.”
수나인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 승리하면 그땐 어떻게 할 거죠?”
나옥심은 전면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무슨 소리냐?”
“ 야율사은을 없액, 변황의 주인이 된 다음엔 어떻게 할 거냐는 거예요, 언니.”
“ 팔황천의 총천주가 돼 중원으로 들어가야지.”
“ 태상총천주는 대야벌의 담대만승과 전쟁을 치르고 있어요.”
“ 그래서 더욱 기회가 좋다는 거다.”
“ 어떤 기회요?”
“ 연우강을 비롯한 잠룡대 대원들의 머리를 들고 가면 담대만승도 우릴 박대하지 못할 것이 아니냐. 아마 최고의 환대를 받을 게다.”
“ 그 다음엔 대야벌의 벌주 자리를 위해 살겠군요.”
“ 내 꿈은 변황이나 중원의 한 귀퉁이에 있지 않다. 난 중원의 주인이 되기를 원한다.”
“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어요. 언니.”
“ 무슨 일 있는 게냐?”
수나인은 의아한 얼굴로 나옥심을 보았다. 문득 요즘 들어 많이 변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 제가 뭘요?”
“ 전과 달라진 느낌이 자꾸만 들어서 그런다.”
“ 그럴 리가요. 아무튼 알았어요.”
나옥심은 고개를 돌렸다.
“ 단 천주에게 부하를 이끌고 선두로 나오라고 전해라.”
“ 그들을 선봉에 세울 참인가요?”
“ 선봉에 세우는 게 아니라 유사지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다.”
“ 알았어요.”
수나인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나옥심은 뒤편을 향해 몸을 날려 갔다.
잠시 후,
새외귀막 무인들은 진형의 선두로 나와 길을 잡았다.
부지런히 길을 재촉한 그들이 유사지대인 사강 근처에 도착한 때는 달이 훌쩍 떠오른 밤이었다.
유사지대는 달이 이동하는 쪽,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유사지대 앞은 수백 장에 달하는 폭을 가진 평지였는데, 그 끝에서 다섯 개의 사구가 둥글게 늘어서 있었다.
“ 전투 진형으로!”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수나인은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자 북해빙궁을 비롯한 만오천 무인들이 빠르게 움직여 진형을 구축했다. 오른편부터 남만독존궁, 청해천종림, 북해빙궁, 포달랍궁, 새외귀막 무인들이 늘어섰다.
그들은 긴장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했다.
하지만 금세 나타날 것 같았던 북천지옥부 무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진형을 유지한 채 쉬어라!”
별수 없이 수나인은 휴식 명령을 내렸다.
무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적이 쳐들어오면 언제라도 싸울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춘 채였다. 하지만 아침이 되고, 다시 점심 때가 지나도 적은 보이지 않았다.
“ 우리가 지치길 기다릴 모양입니다.”
남만독존궁의 궁주 당갈이 수나인 곁으로 다가왔다.
“ 적 또한 우리와 같은 상황이에요. 우리가 지치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야율사은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 그가 저곳에 없단 말이오?”
당갈은 턱짓으로 전면 사구를 가리켰다.
“ 야율사은은 제천강을 유인해 갔으니까요.”
“ 그가 어떻게 됐을 거라고 보시오.”
“ 내가 우리 일에 제천강을 끌어돌인 건 그가 심검을 익힌 고수였기 때문이에요.”
“ 그럼 야율사은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당갈은 감탄한 얼굴로 수나인을 보았다.
지금 보니 그녀는 패천과 손을 잡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그녀가 필요로 했던 건, 야율사은을 잡아줄 사람, 즉 제천강 한 명이었던 것이다.
“ 심검을 익힌 고수니까 혼자 죽진 않을 거예요.”
수나인은 확신하듯 말했다.
“ 내 생각도 그렇소. 천주.”
수나인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듯 당갈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제천강의 상황은 수나인과 당갈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전방을 바라보는 제천강의 얼굴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심검을 터득한 고수도 갈증 앞에서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의 십 장 건너편에는 네 사람이 서 있었다.
“ 지, 지독....”
제천강은 지독한 놈들이란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까지 마른 듯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제천강은 하루 전을 떠올렸다.
그 당시 머릿속에는 두 가지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오십 장 밖에서 도망치는 네 명을 잡아 없애야 한다는 생각과 물이 가득 든 물주머니. 아니, 놈들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보다 물주머니가 더 간절했다.
물주머니를 생각하면 할수록 목은 더욱 말랐고, 갈증이 심해질수록 물주머니가 더욱 간절해졌다. 그러다가 문득문득 환영이 생겨나곤 했다. 그 환영은 다름아닌 물주머니였다. 달리다 보면 물주머니가 앞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작정 물주머니로 돌진하여 마개를 따고 물을 마셨다.
하지만 그 물주머니가 환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원한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데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려보면 손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후로도 환영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때마다 물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환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주머니를 주워 들고 마개를 따고 물을 마셨다.
그 짧은 순간.
그 물주머니가 환영임을 알아차리기 전까지 반각도 채 되지 않는 그 순간에는 갈증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앵속을 복용한 것처럼 그 순간에는 희열을 느꼈다. 그 다음부터는 반사적으로 환영으로 나타난 물주머니를 주워 들고 물을 마셨다.
그걸 마실 때도 그랬다.
한 순간의 희열을 위해 물주머니를 주워 들고 마셨는데, 그 안에서 진짜 물이 흘러나온 것이다. 한가득 들어 있는 그걸 전부 마시기 전까지는 어떤 물인지 생각조차 못했다. 아니 물의 상태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순간의 갈증 해소.
그런데 그 물에는 소금이 잔뜩 풀어져 있었다.
갈증으로 쓰러지기 직전인 상황에서 소금물로 배를 채운 셈이 되고 만 것이다.
“ 이 정도는 지독한 게 아니다. 정말로 지독한 건 뭔지 아느냐?”
사마윤은 제천강을 향해 걸어가며 나직하게 말했다.
제천강은 다가오는 사마윤을 가만히 보았다.
“ 정말로 지독한 것은 이런 짓을 해야만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하는 우리들이다.”
사마윤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제천강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턱!
마장승이 몸을 날려 제천강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바닥으로 내려선 그는 제천강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 왜 우리를 이리라고 부르는지 아느냐. 사막에 들어오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되기 때문이야. 넌 상대를 잘못 고른 거야.”
마장승은 제천강의 머리를 요대에 끼워 질끈 동여맸다.
“ 가자!”
네 사람은 동쪽으로 몸을 날렸다.
네 사람이 달려가는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그들은 보통 걸음보다 약간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틀 후 저녁 무렵.
네 사람은 북천지옥부 무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당도했다.
“ 수고하셨습니다. 총천주님.”
가자 먼저 북청강과 탈라하가 그를 반겼다.
그리고 각 군장들이 네 사람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 적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야율사은은 탈라하를 보며 물었다.
“ 전투 준비를 한 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사강을 뒤로 한 상탠가?”
“ 그렇습니다.”
“ 준비하게.”
“ 좀 쉬어야 하지 않습니까?”
탈라하는 마장승의 요대에 매달린 머리를 보며 물었다. 머리의 주인은 제천강이 분명할 터였다.
“ 우리가 뭘 한 게 있다고 쉬어, 당장 불부터 지펴.”
마장승은 피식 웃으며 허리춤에 있는 제천강의 머리를 풀어 탈라하에게 건넸다.
“ 아, 알겠습니다.”
탈라하는 군장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각 군장들은 고개를 숙이고는 각자가 맡은 곳을오 몸을 날려갔다.
그로부터 반시진 후.
사강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둘러싸고 있는 다섯 개의 사구 위에서 횃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쪽 끝에서 시작한 횃불은 사구의 능선을 타고 동쪽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마치 횃불로 북해빙궁 무인들을 포위한 듯한 형태였다.
“ 응?”
물로 갈증을 달래고 있던 수나인은 벌떡 일어났다.
“ 북해빙궁 무인들은 공격 준비하라!”
그녀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 독존궁 무인들은 준비하라!”
“ 천종림 무인들은 준비하라!”
“ 포달랍궁 무인들은 준비하라!”
각 천주들의 외침이 터져 나오고, 무인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를 뽑아들었다. 하지만 무인들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는 수천 개의 횃불, 적의 전력과 상관없이 두려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 우린 일만오천이다!”
수나인은 다시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외침이 술렁이는 무인들을 안정싴미지 못한 듯, 두려움은 전염병처럼 번져갔다.
휙! 휙휙! 휙!
바로 그때 사구 중간 지점에서 검은 물체가 아래를 향해 날아왔다.
“ 암기는 아닐 테고, 뭐지?”
수나인은 의아했다.
암기를 던져 아군을 공격하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퍽! 퍽퍼퍽! 퍽퍽!
북천지옥부 진영에서 던진 물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 가서 확인하라!”
남만 독존궁의 천주인 당갈이 부장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진중에서 십여 명이 달려나갔다.
“ 머, 머립니다.”
검은 물체를 확인한 남만독존궁 무인이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 누구 머리란 말이냐?”
“ 중원에서 온 패천 무인들의 머립니다. 제천강도 있습니다!”
“ 제천강의 머리를 가져와라!”
당갈은 재차 고함을 내질렀다.
부장은 제천강의 머리를 가지고 몸을 날려 왔다. 곧 제천강의 머리는 천주들의 확인을 거쳐 수나인에게로 전달됐다.
“ 으음!”
수나인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설마 제천강이 야율사은 일행에게 당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하지만......”
“ 저, 저, 저........”
바로 그때 진중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무인들의 시선이 전부 한 곳을 향해 있었다.
수나인은 그들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 죽일!”
그녀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전방의 사구 위에 흰색 낙타를 탄 자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탁타 위 사내는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변황의 지존신물이라고 할 수 있는 혈루를 들고 있었다.
그는 북천대제 야율사은이었다.
수십 개의 횃불이 그를 둘러싸고 있어 삼백여 장이나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율사은의 모습은 선명하게 보였다.
“ 난 팔황천의 총천주 북천대제 야율사은이다!”
내공이 잔뜩 실린 야율사은의 목소리가 사강 북해빙궁 일행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