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경험은 실력을 이긴다
‘ 우리가 졌군.’
당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수가 참여하는 전쟁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건 부하들이라 할 수 있다. 지휘관이 전사하고도 승리를 거두는 경우는 있지만, 부하들이 전멸하고 지휘관만 살아남으면 그 전쟁은 승리했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다섯 문파의 무인들은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전의를 잃고 말았다.
인원수가 훨씬 많다고 해도 전의를 잃은 병사를 이끌고 전쟁을 치를 수는 없다.
“ 우린 졌소, 탁 천주.”
당갈은 탁불군을 보며 힘없이 말했다.
“ 그런 것 같소.”
탁불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해 볼 수 없는 완벽한 패배다. 가장 큰 패인은 수나인이 중원에서 데려온 패천 무인들의 전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제천강의 죽음은 치명타였다.
패천 무인을 데려오면서 수나인은 제천강이 심검의 고수라며 대대적인 광고를 했고, 제천강은 직접 시범까지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패인이었다.
제천강이 심검을 펼치는 모습을 보며 모두 얼마나 놀랐던가, 무공의 새로운 경지를 견식했다면 좋아했음은 물론이고, 전쟁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심검의 고수라고 하였던 그 제천강이 머리만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야율사은에 의해.
그것뿐이라면.....
탁불군은 고개를 들어 사구를 보았다.
자신들이 있는 곳을 제외한 모든 방향이 횃불로 막혀 있다. 수천 개의 횃불이 뿜어내는 위압감에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전투를 수행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 수 천주!”
탁불군은 수나인을 불렀다.
[ 아직 끝난 게 아니오, 탁 천주.]
수나인 또한 당갈이나 탁부군과 비슷하게 전면전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장의 수가 아직 남아 있었다.
[ 이 난국을 타개할 방법이라도 있소?]
수나인이 전음으로 말하자 탁불군 역시 전음으로 물었다.
[ 제천강이 죽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 이유를 알아야 하는 거요?]
[ 제천강은 결코 무공이 약해서 죽은 게 아니에요. 탁 천주. 제천강이 죽은 이유는 사막을 몰랐기 때문이에요.]
[ 그럼?]
[ 갈증에 시달리던 제천강은 소금물을 마셨어요.]
수나인은 아래쪽에 뒹굴고 있는 제천강의 머리를 턱으로 가리켰다.
[ 확실하오?]
[ 조금 전에 확인했어요.]
[ 좋소. 그렇다 칩시다. 하지만 제천강이 소금물을 마시고 죽었다는 사실을 밝힌다고 지금 상황이 달라질 거라고 보시오?]
[ 그 사실을 밝힌다고 해서 부하들의 투지를 되살릴 순 없겠죠.]
[ 하면, 어떻게 하겠단 말이오?]
[ 우리에게 남은 건 비무밖에 없어요.]
[ 비무?]
[ 북천지옥부와 막북혈마성, 그리고 북해빙궁, 청해천종림, 남만독존궁, 포달랍궁, 새외귀막의 모든 걸 걸고 생사투를 벌이는 거예요.]
[ 야율사은이 응할 거라고 보시오?]
[ 그는 응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면 우린 전에 변황의 운명을 십뢰로 결정한 적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 주최자는 야율사은이었고요.]
수나인은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수나인도 처음엔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다가 문득 적진에 고수다운 고수는 야율사은과 북청강 두 사람밖에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이편이 불리하겠지만, 소수 인원으로 벌이는 비무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더구나 전에 야율사은은 십뢰라는 무기로 변황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았던가. 비무 또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야율사은 입장에서는 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상황은 내가 만들도록 하죠.]
수나인은 진영을 벗어나 몸을 날려갔다.
수나인이 몸을 날려 가는 사이에 탁불군은 다른 천주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천주들은 시선을 돌려 수나인을 보았다.
수나인은 십여 장을 날아가더니 그 자리에 멈췄다.
곧 내공이 가득 실린 그녀의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 먼저 병력을 일으켜 변황을 어지럽게 한 것에 대해 심심한 사의를 표할게요. 하만 나를 비롯한 다섯 천주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왜냐면......”
그녀의 말은 장황하게 이어졌다.
회합을 가졌을 때부터 시작하여, 십뢰로 총천주를 정한 사연까지, 수나인은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하면서 자신들이 북천지옥부에 대해 반기를 들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주장했다.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요?”
야율사은은 물었다.
그의 목소리 역시 내공이 가득 실려 있어,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이만여 명의 무인이 전부 들을 수 있었다.
‘ 걸려들었구나, 야율사은!’
수나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그녀는 어깨를 활짝 펴고 입을 열었다.
“우리 황천은 예로부터 정당한 대결에 의해 승리한 승자만 인정해 왔어요. 북천지옥부도 다르지 않아요. 황천의 종주임을 증명하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봐요.”
“ 비무를 하잔 말이오?”
야율사은의 얼굴이 슬쩍 찌푸려졌다.
사실 야율사은이 제천강을 비롯한 패천 무인의 머리를 던지고, 횃불을 밝혀 분위기를 조성한 이유는 유혈사태 없이 이번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는 생각대로 됐고, 다섯 문파 연합의 무인들에게서 타오르던 전쟁의 불길을 거의 꺼트렸다. 이제 항복만 받아내면 끝날 터였다.
그런데 수나인이 꺼져가는 불길을 다시 되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북천지옥부라고 꼭 찍어 말했다. 그 말은 곧 막북혈마성이 끼어드는 건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적은 수나인을 비롯한 수뇌들이 나올 게 뻔한데 북천지옥부에는 그들과 일대일로 싸울 만한 무인이 없었다.
그렇다고 수나인의 제안을 거절할 명분도 없다.
“ 강자와 약자를 결정하는 가장 좋은 수단은 비무라고 알고 있어요. 부주.”
수나인은 득의만면한 얼굴로 대답했다.
“ 비무라.......”
[ 한다고 하세요.]
그때 귓전으로 수여설의 전음이 들려왔다.
[ 적은 다섯 천주가 나옵니다. 그리고 수 소저를 비롯한 잠룡대는 북천지옥부 무인이 아닙니다.]
[ 지금부터 북천지옥부 무인이 되면 되잖아요. 그리고 이번 전쟁에 중원인을 끌어들인 쪽은 저들이에요.]
[ 알겠습니다.]
야율사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 난 대답을 듣고 싶어요. 부주.”
야율사은이 망설이는 듯하자 수나인은 다그쳤다.
“ 좋소. 수 천주. 북천지옥부와 다섯 천 간의 비무로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도록 합시다.”
“ 와아!”
“ 우와아!”
야율사은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섯 문파 진영에서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함성을 내지르는 그들의 얼굴엔 안도한 기색이 역력했다. 비무를 하게 되면, 비무 당사자들이 아닌 자들은 최소한 죽임을 당할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비무를 한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사구 뒤편에 숨어 있던 북천지옥부와 막북혈마성 무인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며 사구 아래로 내려갔다.
“ 맙소사!”
“ 세상에!”
다섯 문파 진영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사구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들은 아군의 수에 비해 결코 적지 않았다. 만일 저들과 전쟁을 치렀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그들이 지켜보는 사이에 북천지옥부와 막북혈마성 무인들은 백 장 앞으로 다가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가 정돈되자 야율사은은 낙타를 몰고 동쪽으로 갔다. 그는 낙타 등에 혈루를 둔 채 내렸다.
“ 비무의 승자가 백타와 혈루의 주인이 될 거요. 수 천주.”
“ 좋아요. 그쪽엔 누가 나올 거죠?”
수나인의 얼굴은 이미 승리를 거머쥔 듯했다.
그녀는 웃으며 북천지옥부 무인들을 스윽 훑어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서 우뚝 멈췄다. 수나인의 시선 끝엔 수여설이 있었다.
“ 우리가 나갈 거예요.”
시선이 마주치자 수여설은 나직하게 말하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녀의 뒤를 사마윤, 마장승, 백을상이 따랐다.
“ 너희들은......”
수나인의 머리가 홱 돌아갔다.
수여설을 따르는 세 명은 처음 보는 자들이었다.
두 명은 검을 들었고, 한 명은 도를 들었는데, 세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사이에 네 사람은 다섯 문파 진영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먼저 자신을 소개한 사람은 수여설이었다.
“ 난 한때 북해빙궁에 몸담았던 수여설이에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북해빙궁의 진영에서 작은 소요가 일었다. 북해빙궁 무인들 중 수여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비무자로 나온 것만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인데 한때 몸담았다고 한 것이다.
한때 몸담았다는 말은 곧 북해빙궁을 떠났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궁주의 장녀인 그녀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이 아니었다. 아니, 그녀가 북해빙궁을 떠났다는 건 곧 누군가 내쳤다는 말이 되고, 북해빙궁에서 그녀를 내칠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해빙궁 무인들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 내가 이 자리에 선 것은 북천지옥부 무인으로 비무를 하기 위함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잃었던 지위를 되찾기 위해서에요.”
북해빙궁 진영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마치 커다란 돌이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을 때와 같은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 한때 몸담았다.’는 말과 ‘잃어버린 지위를 되찾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는 두 말은 연장선상에 있다.
즉 어린 시절 차기 궁주로 지목됐지만 어머니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북해빙궁에서 축출됐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북해빙궁 무인들은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수나인을 보았다.
수나인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수여설이 저런 말을 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졸지에 자신은 궁주 자리를 위해 딸을 내친 어미가 돼 버린 것이다.
“ 난 네게 나가라고.......”
“ 난 귀랑이외다. 북천지옥북 천주 야율사은과는 군에서 인연을 맺었고, 얼마 전 그의 원대한 포부를 듣고 북천지옥부에 가입했소이다.”
백을상이 수나인의 말을 자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 이익!”
변명할 기회를 잃은 수나인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 두 분이 비무를 하게 됐을 때 가정사는 따로 정리를 하도록 하는 게 어떻습니까?”
백을상은 수나인을 빤히 보며 말했다.
“ 그래도 할 말은 하고......”
“ 내 목표는 북천지옥부의 이인자가 되는 것이고 이번 기회를 통해 총천주께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고 싶소이다. 어떻습니까?”
이번에도 역시 수나인의 말을 자른 백을상은 포달랍궁의 궁주 가람존자를 보았다.
“ 나와 비무를 하고 싶다는 말인가?”
가람존자는 앞으로 걸어나가며 물었다.
가람존자가 나오자 백을상, 수여설, 마장승, 사마윤은 뒤편으로 물러났다.
“ 비무가 아니라, 생사투를 하고 싶습니다.”
“ 내가 바라던 바군.”
가람존자는 차가운 눈으로 백을상을 보았다.
“ 혹시 생사투의 의미를 정확하게 아십니까?”
백을상은 정중하게 물었다.
“ 목숨을 건 결투를 생사투라고 부르는 걸로 알고 있네.”
“ 그런 건 비무라고 하지 생사투라고 하지 않습니다.”
백을상이 고개를 저었다.
“ 하면 어떤 걸 생사투라고 부르는가?”
“ 어느 한쪽이 숨을 쉬지 않아야 끝나는 걸 두고 생사투라고 합니다.”
“ 숨을 쉬지 않아야 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
“ 팔이 잘리거나, 움직이지 못하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을 경우라도 가차 없이 이걸 자르든지 여길 박살내 주는 걸 생사투라고 합니다.”
백을상은 제 목과 머리를 차례로 가리켰다.
“ 상대가 부상을 당해도 숨통을 끊어놔야 한다는 말이군.”
“ 그게 바로 사막의 철칙 아닙니까?”
백을상은 싱긋 웃으며 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검집을 뒤로 던져버렸다.
“ 그렇게 하도록 하지.”
가람존자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말투는 아주 공손하다. 하지만 그 공손함 속에는 ‘반드시 널 죽이겠다.’고 외치는 것보다 더 잔인한 살기가 포함돼 있다. 어린 녀석이라고 허투루 볼 수가 없었다.
가람존자는 얼굴을 굳히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우우웅!
그의 장포가 팽팽하게 부풀며 전신에서 은은한 금빛이 새어나왔다.
“ 밀종대수인!”
누군가 나직하게 소리쳤다.
가람존자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금광은 바로 포달랍궁 최고 절학이라고 불리는 밀종대수인을 운기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 겉모습은 부처님을 닮았소이다, 그려.”
백을상은 검을 가슴 앞으로 세웠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백무가 흘러나왔다. 조금씩 농밀해지던 백무는 곧 백을상의 전신을 완전하게 가렸다.
백을상의 신형이 안개에 휩싸인 순간 가람존자 또한 짙은 금광에 휩싸였다.
“ 타앗!”
먼저 공격을 시작한 사람은 가람존자였다.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가람존자는 백을상을 향해 양손을 천천히 밀어냈다. 순간 가람존자 앞에 손바닥 형상 백여 개가 나타났다. 전부 일천 개의 손바닥 형상이 나타난다고 하여 대라천수라고 불리는 밀종대윈의 일 초였다. 금빛 손바닥들은 빠르게 백을상을 향해 쏘아져 갔다.
“ 차앗!”
백무 속에서 우렁찬 함성이 터져나오고, 백을상의 검이 허공을 수십 번 찔렀다. 그가 검을 찔러댈 때마다 짙은 어둠과 같은 음울한 기운이 흘러나와 금빛 손바닥을 향해 쏘아져 갔다. 짧은 꼬리를 달고 있는 그 기운들은 마치 혼령처럼 보였다.
콰앙! 쾅쾅쾅! 쾅쾅!
금빛 손바닥과 백무가 부딪치며 폭음이 터져 나왔다. 모래가 푹푹 파이면서 먼지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 하앗!”
가람존자의 입에서 두 번째 기합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 나타난 금빛 손바닥의 수는 처음보다 두 배나 많았다. 밀종대수인의 이 초인 대라만수였다.
“ 차앗!”
백을상 또한 두 번째 초식을 펼쳤다.
아니, 그의 초식은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음울한 기운이 더욱 강해지고, 검을 찌를 때마다 쏘아져 나간 기운이 더욱 선명해졌다는 것만 달랐다.
콰앙! 쾅쾅! 쾅쾅!
“ 이야합!”
폭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가람존자는 광포한 외침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려 삼 장 높이에 달하는 거대한 금빛 손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밀종대수인의 마지막 초식인 대라겁수였다.
대라겁수는 주변 기운을 장악하며 백을상에게로 밀려갔다.
백을상은 검을 불끈 틀어쥐었다.
거대한 손바닥에 가려 가람존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금광을 뿌려대는 엄청난 크기의 손바닥은 공격 무기임과 동시에 최상의 방패였다.
“ 캬우우!”
이리가 울음을 토해내듯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괴성을 내지른 백을상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가 위로 올라가자 금빛 손바닥 또한 방향을 틀어 괴성을 내지른 백을상을 쫓았다. 그때 가람존자는 오른팔을 쭉 내밀고 있었다. 백을상과 거리가 가까워지자 가람존자는 펼친 손가락을 천천히 구부렸다. 그러자 삼 장 크기의 거대한 손바닥도 손가락을 구부렸다. 백을상을 으깨버리려는 듯한 모양새였다.
거대한 손바닥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백을상은 검을 번쩍 들어올렸다. 하늘로 향한 검 끝에서 백무가 뭉클뭉클 흘러나왔다.
“ 잘라봐야 의미없다. 놈!”
가람존자는 내밀었던 손바닥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콰악!
그러자 백을상 앞에 있던 거대한 금빛 손바닥도 동시에 오므려지며 백을상을 움켜쥐었다.
바로 그 순간 백을상은 들어올렸던 검을 사정없이 내리그었다.
까앙!
강기로 만들어진 손바닥인 듯 백을상의 검이 파고든 자리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 캬우!”
백을상의 입에서 재차 늑대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고 그의 검이 거대한 손바닥을 수직으로 자르며 지나갔다.
“ 잘렸다!”
북천지옥부 무인들의 입에서 환희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외침은 금새 수그러들었다.
검에 잘려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금색 손바닥은 여전히 백을상을 틀어쥐고 있는 것이었다.
차르르!
마치 뭔가가 갈리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오며 금새 손바닥에 피가 튀었다.
“ 역시 밀종대수인!”
북천지옥부 무인들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포달랍궁의 최고 무학인 밀종대수인.
특이한 무공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잘려나간 상태에서도 위력을 잃지 않을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 아,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검에서.....”
누군가가 또다시 소리쳤다.
북천지옥부 무인들은 일제히 백을상의 검을 보았다.
금색 손바닥 안에 갇혔음에도 불구하고 백을상의 검에서는 여전히 백무가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백무는 빠르게 가람존자를 향해 쏘아져 갔다.
“ 이건?”
가람존자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검에서 흘러나온 백무가 금광에 찰싹 달라붙는 듯하더니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안으로 파고들어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 속도가 엄청나가 빨랐다.
그는 전 내공을 끌어올리며 손을 오므렸다.
금광 안으로 파고들어 오는 백무를 멈추게 하는 방법은 적을 없애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 억!”
가람존자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이미 전 내공을 동원하고 있어 더 이상 끌어올릴 내기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차라리 주먹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더라면.
퍽! 퍽! 퍽퍽퍽! 퍽퍽!
내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촌각의 시간을 허비한 그 순간 금광을 뚫고 들어온 백무는 가람존자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폭죽처럼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 크아악! 아아악!”
가람존자는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몸 속 폭발은 쉬지 않고 일어났다. 마치 몸 안으로 들어온 백무가 피를 타고 돌면서 폭발을 일으키고 있는 듯했다. 폭발한 부위에서 흘러나온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혈인으로 변한 가람존자의 동체가 풀썩 쓰러졌다.
가람존자가 쓰러지자 백을상을 틀어쥐고 있던 대라겁수도 씻은 듯 사라졌다.
“ 크윽!”
백을상은 비명을 지르며 지면으로 추락했다.
백을상의 몸 또한 가람존자와 다르지 않았다. 마치 면도로 가죽을 벗겨낸 것처럼 그의 전신은 피투성이었다.
백을상은 비틀거리며 쓰러진 가람존자 곁으로 다가갔다. 쓰러지긴 했지만 가람존자는 살아 있었다.
“ 이제 비무 전 했던 약속을 지키겠소.”
백을상은 검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가람존자의 심장을 향해 미련 없이 찔러넣었다.
푸욱!
“ 커억!”
가람존자의 입에 쩍 벌어지고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백을상은 가람존자의 심장에 검을 꽂은 채 다서 문파 무인들을 보았다.
그러고는 검을 쥐고 있던 손목을 사정없이 틀었다.
뼈를 가르는 소리가 가람존자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다섯 문파 무인들은 움찔 몸을 떨었다.
“ 내가 이겼군요.”
백을상은 싱긋 웃으며 검을 뽑았다.
다섯 문파 무인들은 할 말을 잃었다. 특히 포달랍궁 승려들은 망연한 얼굴로 시체로 변한 궁주를 보았다.
그들이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가람존자는 포달랍궁 최고 무공인 밀종대수인을 완벽하게 익혔다. 게다가 내공도 삼갑자를 진작에 넘어섰다.
그런 그가 마지막 초식을 펼치고도 패한 것이다. 이곳에 있는 포달랍궁 무인들 중 궁주가 패할 거라고 생각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이름조차 듣지 못한 신출내기가 아닌가?
그들은 멍한 얼굴로 피투성이가 된 채로 걷고 있는 백을상을 보았다.
“ 방금 그건 무슨 무공이오?”
포달랍궁의 이인자 보리존자가 벌떡 일어났다.
“ 상천의 지존무공이었습니다.”
“ 백무탈혼유마검이었단 말이오?”
보리존자는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자들 또한 경악한 얼굴로 백을상을 보았다. 설마 가람존자를 없앤 그 무공이 상천의 최고 절학인 백무탈혼유마경일 거라고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 밀종대수인도 대단한 무공이었소.”
백을상은 포달랍궁 문도들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고는 몸을 돌렸다. 만일 가람존자가 중간에 멈칫하지 않았더라면 죽은 사람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 자부심을 가져도...... 젠장!”
북천지옥부 진영을 향해 걸어가던 백을상이 풀썩 쓰러졌다.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었던 것이다.
마장승이 달려 나왓다.
“ 아직 완성하지 못한 거냐?”
백을상은 안아 든 마장승은 진영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 난 대장이 아냐, 인마, 구 성이 내 한계였어.”
마장승이 내려주자 백을상은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 그럼 난 대충해도 되겠네.”
마장승은 피식 웃으며 곤오신도를 어깨에 걸쳐 메고 앞으로 걸어갔다.
“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천대제와는 군에서 함께 생활했소. 그런데 제대하고 나니까 갈 곳이 없지 뭡니까. 그래서 밥이나 얻어먹으려고..... 당신이 좋겠구먼.”
말을 하다 말고 마장승은 청해천종림의 탁불군을 가리켰다.
“ 내가 가장 만만해 보이는 모양이구나.”
탁불군은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 맞소. 당신이 나이가 가장 들어 보여서 선택했소.”
마장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곤오신도를 뽑았다. 하지만 마장승은 도갑을 버리지 않았다.
“ 이길 자신이 있느냐?”
앞서 싸웠던 백을상과 달리 도갑을 버리지 않기에 묻는 말이었다.
“ 자신이 있어서 그런게 아니라 이 곤오신도는 집안의 가보라서 함부로 버릴 수가 없소. 유림 마가의 장자는 이 곤오신도를 반드시 자식에게 전할 의무가 있어서 말이오. 나도 그렇게 해야 하고.”
마장승은 도갑을 들어 보이며 히죽 웃었다.
“ 죽일......”
탁불군의 눈에 차가운 광망이 맺혔다.
도갑을 자식에게 물려주겠다는 것은 승리할 자신이 있다는 말의 우회적인 표현이었던 것이다.
“ 우리 대장이 말하길 싸우기 전엔 반드시 약 올리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적앙히 약이 올랐나 모르겠소.”
마장승은 곤오신도를 수평으로 눕혀 앞으로 내밀며 구유잔백일천도를 끌어올렸다.
쓰쓰쓰!
곤오신도에서 스산한 소성이 흘려나왔다.
“ 오냐, 놈!”
탁불군은 전 내공을 끌어올렸다.
가람존자가 죽임을 당한 이상 나중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내공을 끌어올리자 탁불군의 몸이 부상하듯 천천히 떠올랐다.
그의 내공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 아무나 한 명만 이겨, 그럼 당신네들이 승리한 걸로 해줄 테니까.”
파앗!
마장승의 신형이 탁불군을 향해 폭사돼 갔다.
몸을 날리면서 그는 곤오신도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삼 장을 남겨둔 지점에서 도끼질하듯 힘껏 내리찍었다.
쓰쓰쓰!
곤오신도에서 흘러나오던 괴성이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스ㅜ백 개의 곤오신도 형상이 나타나 탁불구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구유잔백일천도의 일 식인 구유만환이었다.
염자생이 펼쳤을 때 나타난 검은 고리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마장승이 가전 무공에 구유잔백일천도를 섞었기 때문이었다.
“ 마공?”
탁불군은 얼른 청력을 차단했다. 도에서 흘러나온 소리를 듣자 갑자기 머릿속이 멍해졌던 것이다.
“ 차앗!”
탁불군은 고함을 내지르며 양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그가 펼치는 무공은 청해천종림의 지존무공인 황해폭뢰장이었다. 광해폭뢰장의 특징은 실상 범위가 광범위하다는 데에 있다. 그가 양손을 휘젓자, 새파란 강기가 마장승의 곤오신도를 향해 쏘아져 갔다.
까앙! 깡깡깡! 깡깡!
퍽! 퍼억! 퍽퍽! 퍽퍽퍽!
쇳소리가 흘러나오고, 두 힘이 부딪친 반발력이 지면을 후려치자 모래가 튀어올랐다.
“ 하하하! 영감, 우리 아버지도 예순이 넘자 현역에서 은퇴를 했소, 늙으면 무조건 은퇴를 해야 하는 거외다.”
마장승은 반발력에 의해 저절로 들어올려진 곤오신도에 내기를 주입했다.
[ 당기듯 찍게!]
바로 그때 북청강의 전음이 들려왔다.
곤오신도를 내리그으려던 마장승이 움찔했다.
퍼억!
바로 그 순간 푸른 기운 하나가 그의 명치로 작렬했다.
“ 크윽!”
마장승은 비명을 토해내며 곤오신도를 힘차게 내리그었다. 처음처럼 도끼질하듯 내리그은 게 아니라 톱질할 때처럼 안쪽으로 당기며 찍었다. 이 식인 신원잔백이었다.
쓰쓰쓰! 쓱쓱쓱!
곤오신도에서 흘러나온 거북살스러운 소성은 거의 음공 수준으로 변했다. 초승달 형태의 도탄 강기 천여 개가 탁부군을 향해 쏘아져 갔다.
‘ 어라?’
마장승은 깜짝 놀랐다.
당긴다는 느낌으로 신월잔백을 펼쳤을 뿐인데, 전보다 배 이상 강해진 것이다. 게다가 도탄강기의 형태도 달랐다. 전에는 곤오신도의 모습이었는데 이번엔 초승달 모양이었다. 초승달 형태의 도탄강기는 더 빠르고 더 잔인했다.
‘ 이왕 시작한 거 끝장을 보자!’
마장승은 아래쪽 상황은 확인하지도 않고 또다시 곤오신도를 들어올렸다.
“ 차앗! 일천지옥!”
마지막 초식인 일천지옥은 이제 발만 담근 상태였다. 그런데 문득 북청강으로부터 당기라는 말을 듣고 나자 삼 식도 펼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쓰아악! 쓰아악!
광포한 소성이 주변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새카만 구들이 탁불군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 맙소사, 이건?”
탁불군은 멍한 얼굴로 위를 보았다.
검은 유성이 비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어떤 무공을 펼쳐야 저 검은 구들을 막아낼 수 있을는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떠오르지 않았다.
“ 빌어먹을!”
퍽! 퍽퍽퍽! 퍽퍽퍽! 퍽!
“ 크아악!”
탁불군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일천지옥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탁불군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음에도 불구하고 검은 유성우는 계속 떨어졌다. 머리가 산산이 부서지고, 양쪽 어깨가 부서지고, 상체가 부서지고 마지막으로 하첵 부서졌다.
“ 우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섯 문파 무인들은 공포로 창백하게 질렸다. 잔인한 무공을 많이 보았지만 상대를 형체조차 남기지 않는 무공은 처음이었다. 조금 전까지 무공을 펼치던 탁불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어떻게......”
누군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지천의 지존 무공인 구유잔백일천도요. 원래 지천 놈들이 좀 잔인한 면이 있잖소.”
별것 아니라는 듯 마장승은 싱긋 웃으며 곤오신도를 도갑에 넣기 위해 도갑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도를 도갑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해도 곤오신도는 들어가지 않았다. 극심하게 떨고 있어서였다.
“ 이거 왜 안들어가는 거지?”
마장승은 옆에 와 있는 사마윤을 보며 물었다.
“ 너 당장 운기행공하지 않으면 곤오신도를 네 자식에게 물려주지 못할지도 몰라.”
사마윤은 마장승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마장승의 입에서는 꾸역꾸역 피가 넘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 그, 그 정도로 심각하냐?”
“ 사은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지 못한다는 데 내 전 재산을 걸어도 좋다.”
“ 정말이냐?”
“ 물론.”
“ 너도 들었지?”
마장승은 야율사은을 보며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었다.
하지만 성큼성큼 걷는다는 건 그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는 걸음마 하는 어린아이처럼 아장거리며 걸었다. 그것도 세 걸음을 걷고 나자 더 이상 무리였던지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 야! 적랑. 모래가 내 얼굴을 때려.”
마장승은 몸을 일으켜 보려고 애를 쓰며 소리쳤다.
그런 그를 보며 피식 미소를 지은 사마윤은 앞으로 나아갔다.
“ 내 상대는 당신이오.”
사마윤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당갈을 지목했다.
“ 난 일 초만 펼치겠다.”
당갈은 양팔을 편하게 늘어뜨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앞으로 걸어가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했다. 두 번의 싸움을 보면서 당갈이 내린 결론은 가람존자와 탁불군의 내공이 귀랑과 사랑이라고 소개했던 두 놈보다 더 높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했다는 건 무공의 약점을 간파당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 무공의 약점을 가르쳐준 사람은 너겠지.’
당갈은 뒤편에서 북천지옥부 진영에 있는 야율사은을 바라보았다.
‘ 하지만 난 독존궁 무공을 펼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펼칠 무공은.....’
당갈이 준비하고 있는 무공은 만천화우였다.
사천당문을 떠나기 전 몰래 암기했던 사천당가 가주 무공. 언젠가는 당문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서 익혀두었던 만천화우를 펼치는 수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 그럼 나도 일 초만 펼치겠소.”
말보다 행동이 더 빨랐다.
사마윤은 곧바로 허공으로 솟궅쳐 올랐다.
“ 차앗!”
사마윤이 허공으로 솟구치자 당갈의 양손이 비쾌하게 움직였다. 손의 움직임이 얼마나 빠른지 육안으로는 파악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다만 한 가지, 밖으로 휘두르는 동작만큼은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손이 정지해서가 아니라, 그의 손을 떠난 형형색색의 암기 때문이었다. 손을 뿌릴 때마다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암기들이 사마윤을 향해 쏘아져 갔다.
“ 당신은 실수한 거요, 당갈.”
사마윤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물렸다.
“ 암기는 대장의 전문 분야였단 말이오.”
사마윤은 암기를 향해 몸을 날리며 우주일만검결을 펼쳤다. 사마윤의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수백 개의 광채가 생겨나고 그것들은 당갈을 향해 쏘아져갔다.
“ 저건?”
당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말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말은 보통 말들이 아니었다. 만천화우를 펼쳐 쏘아낸 암기를 튕겨내고 있었다. 달려오는 말이 강기로 이루어졌다는 의미였다.
간혹 몇 개의 암기가 말 사이로 지나쳐갔지만 이내 다른 말에 막혀버렸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당갈은 이를 악물었다.
수천 마리의 말이 달려오는데 방어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최선의 방어는 곧 공격!
당갈은 전력을 다해 만천화우를 펼쳤다.
퍽! 퍽퍽!
전방에서 나직한 소리가 들려오자 당갈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맺혔다. 나직한 그 소리는 암기가 살 속으로 박혀 들어갈 때 나는 소리가 분명했다. 그리고 달려오던 말 수십 마리가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 내가 이겼......”
푸욱!
승리의 미소를 지으려는 순간 가슴 부분이 화끈댔다. 당갈은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 놈이 들고 있던 검이 손잡이 부분만 남겨두고 파고들어 가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전면을 보았다.
사마윤 또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 당신이 독공을 펼쳤으면 내가 패했을 거요.”
사마윤은 당갈 곁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 내가 만천화우를 펼쳐서 패했단 말이냐?”
“ 그런 것 같소. 그리고 내가 띄운 승부수는 말이 아니라 그 검이었소.”
사마윤은 당갈의 가슴에 꽂힌 검을 가리켰다.
“ 그랬군.”
당갈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천의 말 속에 섞여 있던 하나의 검.
만일 강한 힘으로 검을 던졌다면 알아치라고 방어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녀석이 던진 검은 어떤 기운도 품고 있지 않았다.
“ 실전을 많이 겪게 되면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는 방법이오. 그리고....”
사마윤은 당갈의 가슴에 꽂힌 검을 잡았다.
“ 내 검은 가져가야겠소.”
사마윤은 백을상이 그랬던 것처럼 손목을 비틀면서 검을 뽑아냈다.
털썩!
당갈의 신형이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이없는 얼굴로 물었다.
사마윤은 천천히 걸어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 아무튼 네 꼼수는 이거다.”
백을상과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던 마장승이 엄지손가락을 세워 들며 환하게 웃었다.
“ 꼼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마장승을 향해 주먹질을 하려던 사마윤이 풀썩 쓰러졌다. 무릎을 꿇을 힘도 없었던 듯 사마윤은 얼굴부터 모래에 처박혔다. 잠시 그 상태로 있던 사마윤은 몸을 굴려 하늘을 보고 누웠다.
“ 잡아주면 어디가 덧나냐?”
그는 마장스응ㄹ 보며 눈을 흘겼다.
“ 잡아주려고 했는데......”
마장승이 말을 받았다.
“ 했는데?”
“ 어차피 누을 거잖아. 그래서 그냥 뒀다.”
“ 개자식.”
“ 아프냐?”
“ 응! 많이 아파.”
“ 엄살이 많이 늘어난 것 같다. 그치?”
“ 그런 모양이다. 전엔 이런 부상은 술 한 잔 마시면 털고 일어났는데.”
“ 몇 개나 박혔냐?”
이번엔 백을상이 물었다.
“ 정확하게는 모르겠어. 대충 오십 개 정도는 박힌 것 같아.”
“ 독은 없는가?”
이번 질문은 위에서 들려왔다. 세 사람은 고개를 들었다. 북청강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시체를 온전하게 보존해 줬잖습니까.”
사마윤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독을 썼더라면 목을 잘라냈을 거라는 말이었다.
“ 독공을 쓴 자가 암기에 독을 바르지 않다니. 별일이네. 일단 옷을 벗게.”
북청강은 사마윤 앞에 쪼그려 앉았다.
설사 독을 바르지 않았다고 해도 몸 속에 박힌 암기를 서둘러 빼내고 소독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은 금세 썩어 들어가고 말 터였다.
“ 굳이 펼칠 일도 없는데, 독을 묻혀서 다닐 이유가 없잖습니까.”
“ 그건 무슨 소린가?”
북청강은 사마윤의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 만천화우는 사천당문 문주만이 폍칠 수 있는 무공 아닙니까. 당연히 그가 펼칠 이유가 없지요. 펼칠 이유가 없는데 독을 발라 놓을 필요는 더더욱 없고요.”
“ 펼치지도 않을 거면서 암기를 소지하고 다녔단 말인가?”
“ 암기는 그의 꿈이었겠죠.”
“ 꿈?”
“ 사천당문으로 돌아가고 싶은 꿈 말입니다.”
“ 그러니까 자넨 그가 만천화우를 펼칠 걸 알고 있었단 말이군.”
“ 사막으로 들어오면 우리 머리는 미친 듯이 빠르게 돌아갑니다. 천주.”
“ 미치겠군.”
북청강은 멍한 얼굴로 세 사람을 보았다.
백을상과 마장승은 두 가지 역할을 했다. 하나는 적을 죽여 아군에게 승리를 안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갈이 만천화우를 펼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유도한 것이다.
당갈 입장에서는 앞선 두 사람이 허망하게 당하자, 무공이 파악돼서 그런 거라고 여겼을 테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무공에 승부를 걸었다.
그 무공이 바로 만천화우다.
하지만 만천화우는 펼치지 않는 무공이기 때문에 암기에 독을 발라둘 필요가 없다. 사마윤은 그 점을 파악하고는 암기를 허용하면서 당갈을 없앤 것이다.
놀라운 자들이 아닐 수 없었다.
“ 놔두면 썩느다면서요.”
“ 아, 알았네.”
북청강은 사마윤의 상체를 걷어올렸다.
“ 엄청나군.”
북청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심장과 단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는 암기가 새카맣게 박혀 있었다.
“ 혹시 앵속 없습니까?”
사마윤은 북청강을 빤히 보며 물었다.
“ 없네.”
북청강은 고개를 저었다.
“ 사랑, 앵속이 없단다.”
사마윤은 마장승을 돌아보았다.
“ 알았다.”
마장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사마윤 뒤편에 섰다.
“ 살살 해.”
“ 앵속을 복용하는데 살살 하는 게 어딨냐?”
“ 그래도 네가 하는 건 아프단 말이야.”
“ 전랑 그놈처럼 어디 하 ㄴ곳 부러뜨려줄까?”
마장승은 피식 웃으며 사마윤의 뒷목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 컥!”
사마윤은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 뭐, 뭐하는 짓인가?”
북청강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마장승의 한 방에 사마윤이 기절해 버린 것이었다.
“ 앵속을 먹인 거니까 걱정하지 마쇼.”
“ 앵속?”
“ 암기를 빼내려면 칼로 몸뚱이를 헤집어야 할 거 아뇨.”
“ 그럼?”
“ 깨어나기 전에 빨리 해치우쇼. 카롤 헤집고 있는데 정신이 들면 더럽게 아프단 말이오.”
“ 아, 알았네.”
북청강은 잔뜩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허리춤을 더듬어 소도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