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변황 일통
다섯 문파 진영은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다.
세 번의 패배와 세 구의 시체.
그 시체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주로 불리며 명령을 내렸던 자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명령도 내릴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설마 그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패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두 명.
설사 단극효와 수나인이 승리한다고 해도 대결의 결과는 삼대 이, 북천지옥부의 승리다. 차라리 패배 선언을 하는 게 백번 나은 상황이었다.
“ 이제 우리 차례네요.”
다섯 문파 무인들은 일제히 시선을 들었다. 어느새 수여설이 비무 장소에 나와 있었다.
“ 한 사람만 승리하면 총천주 자리를 넘기겠다고 한 것 같은데 그 말 아직 유효한가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수나인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장승이 비무 중에 했던 말을 기억하고는 야율사은에게 물었다.
야율사은은 수나인을 가만히 보았다.
수나인의 상대는 그녀의 큰 딸이다. 즉 혈육과 생사를 치러야 한다. 그런데 그녀는 마장승이 했던 말을 언급하고 있다. 그 말은 곧 큰딸을 죽여서라도 승리를 거머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야율사은은 시선을 돌려 수여설을 보았다.
“ 권력에 대한 집착은 앵속에 대한 집착보다 더 강하다고 누군가 그러더군요.”
“ 그렇군요.”
야율사은은 다시 수나인을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렇소. 수 천주. 아무나 한 명만 이기면 난 팔황천의 총천주 자리를 넘기겠소.”
“ 총천주가 한 말이니까 믿겠어요.”
수나인은 수여설을 보았다.
“ 자식을 죽여서라도 총천주가 되고 싶은 모양이죠?”
시선이 부딪치자 수여설이 물었다.
“ 난 네게 나가라고 한 적 없다.”
수나인은 비무 전에 하려고 했던 말을 꺼냈다.
“ 물론 그런 적은 없죠. 하지만 직접 대놓고 나가라고 말한 것보다 더 실질적이고 잔인하게 절 몰아붙였죠. 뛰쳐나갈 수밖에 없도록 말이에요.”
“ 수천의 목숨을 책임지는 자는 강해야 한다. 약한 자는 궁주가 될 수 없는 곳이 북해빙궁이다. 넌 처음부터 궁주의 자질이 없었다.”
“ 아버지와는 다른 말을 하시네요. 아버진 제게 북해빙궁 천오백 년 역사에 길이 남을 궁주가 될 거라고 했는데....”
“ 네 아비는 정상이 아니었다.”
“ 빙하빙백강은 상당히 긴 구결로 이루어져 있죠. 그런데 아버지는 그 구결을 전부 암기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장단점까지 알려주셨어요. 정상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할 수가 없죠. 그리고 정상적인 엄마는 자기 밥그릇의 밥을 덜어 딸에게 먹이지, 딸의 밥을 빼앗아 먹지는 않아요.”
“ 그때 넌 너무 어렸다.”
“ 지금은 서른이 넘었죠. 그리고 어머닌 수정을 차기 궁주로 지목했고요.”
“ 그래서 서른이 넘고 보니까 권력을 잡고 싶어졌단 말이더냐?”
“ 제가 그것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왔다고 생각하세요?”
“ 난 그렇게 보이는구나.”
수나인은 비아냥대듯 말했다.
“ 난 권력에 욕심 없어요.”
수여설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 그럼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게냐?”
“ 우리 북해빙궁의 미래에 관심이 있어요.”
“ 내가 북해빙궁의 미래를 망칠 거란 말이냐?”
“ 미래에 망치는 게 아니고 지금 망치고 있죠.”
“ 너희들이 없었더라면 난 지금 팔황천의 총천주가 돼 있을 거다. 우리 북해빙궁의 미래를 망친 건 너다.”
“ 착각이에요. 어머니. 지금 어머니 무공으로는 저도 넘지 못해요. 총천주에게는 더더욱 어림없고요. 아니, 설사 총천주를 물리치고 팔황천의 천주가 됐다고 쳐요. 태상총천주는 어떻게 할 거죠?”
“ 난 연우강 그 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 그 자는 운이 좋아서 태상총천주가 됐을 뿐이다.”
“ 그는 팔황천의 태상총천주일 분 아니라 북해태상영의 주인이기도 해요.”
“ 부, 북해태상영의 주인이라고?”
수나인은 깜짝 놀랐다.
더불어 북해빙궁 진영이 다시 술렁거렸다.
북해태상영.
비록 전설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북해빙궁 무인들은 북해태상영에 얽힌 사연을 알고 있었다.
지난 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외인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던 북해태상영의 주인을 찾았다는 건 빙하빙백강이 완전한 무공이 됐다는 뜻이다. 더불어 연우강이 수여설의 남편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다.
“ 저, 정말 네가 빙하빙백강을 완성했다는 말이냐?”
수나인은 당혹한 얼굴로 소리쳤다.
“ 그래요, 어머니. 빙하빙백강을 극한으로 끌어오린다고 해도 제 머리는 더 이상 백발로 변하지 않아요.”
“ 믿을 수 없다.”
수나인은 버럭 소리쳤다.
“ 이제 믿게 될 거예요. 어머니.”
수여설은 천천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 난 총천주가 될 거다. 설사 딸이라고 해도 내 앞을 막을 순 없다.’
수나인은 이를 악물고 전 내공을 끌어올렸다.
두 모녀가 내공을 끌어올리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차앗!”
먼저 공격을 시작한 사람은 수나인이었다.
빙하빙백강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그녀의 머리카락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삼 장 높이로 솟구친 수나인은 수여설을 향해 양손을 사정없이 뿌렸다.
그녀의 양손으로부터 흘러나온 새하얀 광채가 부챗살처럼 퍼지며 수여설에게로 밀려갔다.
“ 죄송해요, 어머니.”
수여설은 중얼거리며 수나인의 단전으로 시선을 주었다.
퍼억!
둔탁한 소성이 수나인의 단전에서 터져 나왔다.
“ 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수나인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아래로 추락하는 수나인의 단전에서 얼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옷이었다.
“ 저, 저건?”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북해빙궁 무인들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수여설은 내공만 끌어올렸을 뿐 초식을 전개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수나인의 단전에 커다란 장인이 찍힌 것이다. 허공을 격하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공의 경지. 그것은 바로 빙공의 최고 경지라고 부르는 빙허였던 것이다.
“ 비, 빙허!”
누군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 정말이었어.”
북해빙궁 무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그들도 수나인과 마찬가지로 수여설이 빙하빙백강을 완성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완성된 빙하빙백강보다 더 위인 빙허의 경지를 목격한 것이었다.
빙허의 경지.
그 경지에 오르면 허공을 격하여 상대에게 빙공을 펼칠 수 있다고 하였다.
쉽게 말하면 빙공으로 펼치는 심검의 경지다.
하지만 북해빙궁의 역사에서 그 경지에 올랐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빙허는 전설의 경지일 뿐이었다.
< 빙허의 경지에 오르는 자. 그는 이세 빙하여제가 될 것이다.>
북해태상영과 함께 천 년을 내려온 또 하나의 전설.
그 전설이 수여설을 통해 재림한 것이다.
[ 모두 일어서라고 하게!]
북해빙궁의 이인자이자 장로원 수장인 빙옥파파 적심연은 주변에 있는 장로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 어쩌실 셈이세요?]
장로 한 명이 물었다. 그녀는 장로 중 한 명인 한빙파파 옥정인이었다.
[ 빙하여제 조사께서는 빙허를 익힌 자를 이세 빙하여제로 부르라는 말만 남겼을 뿐, 대우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네.]
[ 직책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을 거예요?]
[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궁주가 빙허의 경지에 올라 이세 빙하여제가 되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못했을 경우도 생각해야 하니까.]
빙하여제는 참으로 영리한 분이셨다.
만일 이세 빙하여제를 궁주로 임명하라는 유지를 남겼다면 어떻게 됐을까. 궁주를 따르는 자들과 이세 빙하여제를 궁주로 옹립하려고 하는 자들 사이에 반목이 생겨날 테고, 자칫 잘못하면 북해빙궁이 둘로 나눠질 수도 있다. 그런데 빙하여제는 이세 빙하여제로 부르라는 호칭만 명시했을 뿐 직책은 말하지 않았다.
결국 이세 빙하여제가 나타날 당시 수뇌들이 알아서 대우하라는 의미였다.
[ 그럼 수여설 저분을....!]
[ 우리가 사는 유일한 길이네. 저분을 궁주님으로 모시지 않으면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가 없네.]
[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옥정인은 북해빙궁 무인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잠시 후 북해빙궁 문도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세 빙하여제님을 뵙습니다.”
먼저 장로들이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 이세 빙하여제님을 뵙습니다.”
이어 삼천여 북해빙궁 문도들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 아냐!”
바로 그때 수여설 앞에서 째지는 듯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참혹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수여설을 보았다.
단 일 초였다.
아니,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자신은 이미 저승문턱을 밟고 있을 것이다.
“ 저, 정말 빙허란 말이냐?”
수여설을 바라보는 수나인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역력했다.
“ 그에게 배웠어요.”
“ 그라면, 연우강?”
“ 네.”
수여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내가.... 어떻게......”
수나인은 망연한 얼구롤 중얼거렸다. 여전히 믿기지가 않았다.
“ 꿈은 끝났어요. 어머니.”
수여설은 혼잣말처럼 말하고는 적심연을 보았다.
시선을 받은 적심연은 허리를 숙였다.
“ 하,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 날 인정하나요?”
수여설의 목소리는 전혀 동요가 없었다.
“ 네.”
적심연은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여설은 전대 궁주의 장녀고, 율법대로라면 궁주가 돼 있어야 한다.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간 것 뿐이다.
적심연은 그렇게 합리화했다.
“ 태상 궁주를 빙궁으로 모시도록 하세요. 그리고 뱐황의 맹세를 어긴 죄는 내가 받도록 하겠어요.”
“ 알겠습니다. 궁주님.”
적심연은 뒤편에 있는 빙궁 무인들에게 눈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그녀의 지시를 받은 빙궁 무인들은 앞으로 나와 수나인을 부축하여 들어갔다.
“ 난 네 어미다. 난 네 어미란 말이다! 난 네 어미라고.”
수나인은 문도들에게 들려 자리를 뜨면서도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다섯 문파 무인들은 정신이 없었다.
네 명이 연속으로 패한 것도 부족하여 이젠 심검의 경지라는 빙허까지 목격했다. 더 이상은 희망이 없었다.
그런 그들이 제 정신을 수습기도 전에 나직한 목소리가 귓전을 강타했다.
“ 난 북천지옥부 부주 야율사은이오.”
목소리의 주인은 야율사은이었다.
다섯 문파 무인들은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사실상 비무는 북천지옥부의 승리로 끝났다고 봐야 한다.
승리 선언만 남은 상황인데, 야율사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다섯 문파 무인들은 긴장한 얼굴로 야율사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원래 내 상대는 북해빙궁의 수 천주가 돼야 하나, 이세 빙하여제 때문에 부득이하게 단 천주로 정했소. 이 점 양해해 주시오.”
야율사은은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 포기하세요. 상공!”
단극효를 바라보는 나옥심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가람존자, 당갈, 탁불군은 죽임을 당했고, 언니인 수나인은 단전이 파훼됐다.
단극효 또한 그들의 전철을 밟을 게 분명했다.
더구나 야율사은은 명실공히 변황 최고 고수.
그런 그를 상대하여 단극효가 승리한다는 건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기보다 더 어렵다.
“ 허허! 지금도 상공이라고 부르십니까? 정말로 잔인하십니다.”
단극효는 나옥심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단극효는 나옥심이 살아남기 위해 상공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 상공!”
나옥심은 다시 단극효를 불렀다.
“ 하지만 난 나 대주가 불러주는 그 상공이란 말이 좋았소. 비록 가식이었다고 하지만 죽어도 그 상공이란 말을 잊지 않겠소.”
단극효는 나옥심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단극효는 걸음을 옮기면서 허리춤에 꽂아둔 낫을 뽑아 들었다. 그의 무기는 혈사쌍겸이라고 부르는 낫이었다. 양손에 낫을 쥔 그는 야율사은 삼 장 건너편에 멈춰 섰다.
“ 어린 시절 단 천주는 내 유일한 지기였소.”
“ 먼저 그 점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총천주님.”
단극효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나옥심 대주 때문이었던 게요?”
“ 이 단극효 인생에서 첫 여자이자 마지막 여자였습니다. 아마 제 등에 있는 혹처럼 전 미련한 놈인가 봅니다. 가식인 줄 알면서도 차마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녀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갖은 노력을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랬습니다. 지극 정성을 다하면 이 꼽추의 마음도 통할지도 모른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 아직도 꿈을 포기하지 않은 거요?”
“ 총천주님 같으면 첫 번째 꿈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 그렇구려. 난 변황을 통일하는 게 첫 꿈이었고, 이제 끝자락에 도달했을 뿐이니까.”
야율사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극효는 첫 번째 꿈을 포기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이미 올라타 버린 꿈에서 내리고 싶지 않은 게다.
야율사은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 나 개인적으로 그대를 용서해 줄 수 있소. 단 천주. 하지만 팔황천 총천주 입장에서는 그대를 용서할 수가 없소. 단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죄지은 자를 용서하고, 잘못을 덮어버린다면 그 조직은 금세 무너지기 때문이오.”
“ 이해합니다. 총천주님. 하지만 저도 만만치 않습니다. 총천주님께 무공의 기초를 잡아준 사람이 저였다는 사실을 설마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단극효는 빙그레 웃으며 낫을 고쳐 잡았다.
“ 물론이오. 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소. 오늘 단 천주는 당신이 얼마나 훌륭하고 멋진 스승이었는지를 확인하게 될 거요.”
야율사은은 검을 들어 단극효를 겨냥했다.
“ 가식이 아니었어요!”
바로 그때 새외귀막 진영에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옥심이 눈물을 흘리며 걸어나오고 있었다.
“ 우리 사이의 이야기는 끝났소. 나 대주. 난 평생 따르겠다고 맹세했던 주공을 배신했소. 이제 그 죗값을 치르는 것 뿐이오. 당신과는 상관없소.”
“ 북 천주가 우리와 한 배를 타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에 사막을 아는 사람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상고응ㄹ 찾아갔던 거예요. 처음 상공을 찾아갈 때는 분명 의도적이었고 가식이었어요. 하지만 그 후엔 아니었어요. 지극 정성으로 절 위하는 상공의 마음에 감복하고 사랑하게 됐어요. 전 상공이 필요해요.”
“ 난 비무를 하기 전에 총천주님께 대주를 살려달라고 할 참입니다.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단극효는 나옥심을 가만히 보았다.
궁주인 언니의 수족으로 평생을 살았을 뿐, 자신의 삶은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여인. 어쩌면 그런 그녀가 측은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부러 속아주었는지도.
단극효는 고개를 돌려 야율사은을 보았다.
“ 그녀에게는 아무런 감정 없소. 어찌됐든 단 천주가 사랑했던 첫 여인 아니오.”
“ 감사합니다. 총천주님.”
“ 상공이 죽으면 아이는, 아이는 어떻게 하라고요.”
“ 나 대주!”
단극효는 엄한 얼굴로 나옥심을 보았다.
“ 사실이에요.”
“ 뭐가 사실이란 말입니까?”
“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당신의 아이를 가진 게 사실이란 말이에요.”
“ 나 대주 나이가 몇인 즐이나 아시오?”
단극효는 다시 소리쳤다.
나옥심이 임신했다고 했을 때도 좋아한 척만 했을 뿐 믿지 않았던 것은 그녀의 나이 때문이었다. 이미 그녀는 사십이 넘었다. 그런데 임신을 했다니.
“ 임신할 수 없는 나이라는 걸 저도 알아요. 그런데 임신 맞아요.”
“ 마, 말이....”
“ 언니 말이 맞아요. 언니 임신했어요.”
옥녀빙인대에서 한 명이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그녀는 나옥심 대신 옥녀비인대를 맡고 있는 쇄심옥녀 유영이었다.
“ 저, 정말입니까?”
단극효는 더듬거렸다.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자식이라니.
“ 그래요, 상공.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변황의 주인이 되는 것도 싫고, 북해빙궁의 주인이 되는 것도 싫어요. 전 다만 당신과 함께 있고 싶을 뿐이에요. 그러니......”
나옥심은 간절한 얼굴로 단극효를 보았다.
“ 그건 내 뜻이 아니오. 난 총천주님을 배신한 배신자요. 하지만 노력은 해보겠소.”
단극효는 몸을 돌려 야율사은을 보았다.
그는 왼팔을 옆으로 뻗었다. 그러고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낫을 휘둘렀다.
스악!
살이 잘려나가는 소리와 함게 단극효의 팔이 떨어져 나갔다.
“ 사, 상공!”
나옥심은 질겁한 얼굴로 소리쳤다.
“ 옥심, 멈추시오.”
단극효는 엄하게 소리치고는 떨어져나간 팔을 들어 야율사은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그의 발치에 왼팔을 놓고 무릎을 꿇었다.
“ 살고 싶습니다. 총천주님.”
“ 난 팔황천의 총천주요. 단 천주.”
“ 알고 있습니다.”
“ 지금 단 천주는 내게 율법을 어기라고 강요하고 있소.”
“ 팔 하나로 부족하면 오른팔도 버리겠습니다.”
단극효는 오른팔을 폈다.
“ 그럼 밥은 뭘로 먹을 거요?”
“ 무공이 있고, 옥심도 있으니까 밥을 먹는 덴 지장이 없을 겁니다.”
“ 아버지에게 가장 큰 기쁨이 뭔지 아시오?”
“ 모릅니다.”
“ 자식을 안아보는 거요. 하지만 두 팔이 없는 사람은 아이를 안을 수 없소. 그래도 상관없소?”
“ 안아보는 것까지는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 자식을 보고 싶은 뿐입니다.”
“ 그렇겠지. 좋소. 그럼 그렇게 하겠소. 팔 두 개로 자네를 용서해 주도록 하겠소.”
야율사은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내공을 가득 실어 소리쳤다.
“ 여기 있는 단 천주는 내 어린시절의 유일한 친구였고, 오늘 내가 있도록 해준 분이오. 하지만 그는 충성맹세를 어기고 팔황천을 배신했소. 배신자는 죽음으로 단죄하는 게 우리 팔황천의 율법이었소. 그런데 나는 지금 그 율법을 어기려고 하고 있소. 그래서 여러분들게 묻겠소. 팔 두 개면 단 천주를 용서할 수 있겠소?”
“ 용서할 수 있습니다. 총천주님.”
팔황천 무인들은 일제히 고함을 내질렀다.
누가 단극효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누구도 단극효를 나쁘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사랑을 지키려고 애를 썼던 단극효를 동정했다.
“ 고맙소. 그럼 팔황천의 율법 앞에 팔 두 개를 바치겠소.”
야율사은의 검이 허공으로 쳐 올랐다.
그러고는 휘뿌연 광채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 헛!”
“ 헉!”
“ 어?”
여기저기서 경악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야율사은의 검이 나아간 곳은 쫙 펴고 있는 단극효의 오른팔이 아니라 그의 왼팔이었던 것이다. 야율사은의 왼팔이 단극효의 왼팔 옆에 뚝 떨어졌다.
“ 초, 총천주님!”
단극효는 모래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 아비는 자식을 안아볼 권리가 있소. 단 천주. 그 권리를 빼앗는 놈은 인간도 아니오.”
야율사은은 몸을 돌려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자 북청강은 금창약을 꺼내 팔이 잘려나간 부위에 발랐다.
“ 그럴 가치가 있는 거냐?”
옆으로 다가간 마장승이 야율사은을 향해 물었다.
“ 보기...... 싫냐?”
야율사은은 헐렁해진 왼팔을 물끄러미 보았다.
사실 그가 왼팔을 버린 건 도박이었다.
그가 이번 비무를 통해 노린 건 천주들의 처단과 이곳에 모인 여섯 문파의 완전한 굴복, 그 두가지였다.
각 문파의 천주들을 없애긴 했지만 그들의 부하들이 따를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팔황천에서 탈퇴하겠다고 해도 잡을 명목도 없었다.
그래서 팔 하나를 걸고 도박을 한 것이었다.
“ 제수씨한테 맞아 죽을 각오 해야 할 거다. 승률은 어느 정도로 본 거냐?”
마장승은 야율사은이 팔로 도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 육 할 내지는 칠 할.”
“ 팔 하나를 버려서 수만 개의 팔을 얻을 수 있는 것치고는 나쁘지 않은 승률이구나.”
“ 그렇지.”
“ 그럼 뭔가 한마디 해야 하는 거 아냐?”
“ 잘린 팔을 들고?”
“ 그럼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되겠지.”
“ 하지만 그 또한 강요된 선택이 될 뿐이야. 강요된 선택은 얼마 가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고. 이번에는 스스로 선택하게 해야지.”
야율사은이 팔 하나를 버린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강요된 선택은 결국 다섯 천주의 배신을 불러왔고, 다시 그런 실패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 떠날 자는 떠나고, 남을 자는 남는다는 거냐?”
“ 그렇지.”
야율사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안 아프냐?”
이번엔 사마윤이 물었다.
“ 엄청나게 아퍼.”
“ 양팔을 쓰다가 한 팔만 쓰게 되면 엄청 불편할 거야.”
“ 그럴까?”
“ 어쩌면 처음엔 돌아버릴지도 몰라. 괜히 잘랐다고 후회도 할 테고.”
“ 그럼 눈을 뽑을 걸 그랬나?”
“ 그게 훨씬 나았을 것 같아. 눈을 뽑고 난 자리는 안대로 가리면 되고, 어쩌면 훨씬 강인해 보이기도 하니까.”
‘ 이 사람들 지금.’
야율사은의 팔을 치료하고 있던 북청강은 놀란 눈으로 마장승 일행을 보았다. 야율사은은 스스로 팔을 자르고 들어왔다. 그런데 한다는 소리가, 아프냐고 묻고, 팔보다는 눈이 나았을 거라고 한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팔이 잘린 걸 마치 생채기 정도 난 걸로 생각하는 듯하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자들이었다.
“ 아무튼 저자들이 사은 네 녀석의 팔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난 북천지옥부를 탈퇴할 거다.”
사마윤이 턱으로 다섯 문파 무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때 다섯 문파 무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렬하고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뒤편에 있던 북천지옥부 무인들과 막북혈마성 무인들도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 언제 들어오기는 했냐?”
야율사은은 피식 웃었다.
“ 저 녀석들에게 북천지옥부 일원이 됐다고 했잖아.”
“ 탈퇴해서 뭐 할 건데?”
“ 팔을 수집하러 다닐 참이다. 한 오만 개 정도만 수집할 생각이야. 귀랑, 네 생각은 어떠냐?”
사마윤은 백을상을 돌아보았다.
“ 오만이면 너무 적지 않냐?”
“ 그럼 십만 개로 할까?”
“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백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 총천주님!”
바로 그때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던 일곱 문파 무인들이 일제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 너희들은 계속 북천지옥부 무인으로 행세해도 되겠다.”
야율사은은 세 사람을 보며 활짝 웃었다.
“ 이젠 한마디 해줘야 한다. 그래야 저 녀석들이 진한 감동을 먹고 네 부하가 된다.”
“ 안 그래도 그럴 참이다.”
야율사은은 중앙으로 걸어갔다. 곧 내공이 가득 실린 그의 목소리가 사막의 하늘로 터져 나갔다.
“ 이제 우리 변황은 하나가 됐다. 난 제군들에게 내 가족과 등을 맡길 것이다. 맡아줄 수 있겠는가?”
야율사은의 몸에서 추상과 같은 위엄이 흘러나왔다.
“ 목숨을 걸겠습니다. 총천주님!”
다섯 문파 무인들뿐만이 아니었다. 뒤편에 있던 북천지옥부 무인과 막북혈마성 무인들도 무릎을 꿇은 채 고함을 내질렀다.
“ 고맙다. 제군들. 팔황천의 총천주로서 제군들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리겠다.”
“ 하명하십시오. 총천주님.”
“ 각 문파는 최고 고수 오백 명씩을 뽑아 보름 후까지 북천지옥부로 집결하라! 이제 우린, 중원으로 갈 것이다!”
“ 추웅!”
무인들은 우렁차게 함성을 지르며 머리를 조아렸다.
북천대제 야율사은에 의해 변황이 하나로 통일되는 순간이었다.
**********
“ 어떻게 됐습니까?”
신유가 안으로 들어오자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유가 물었다.
“ 당했네.”
신유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 당했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유의 손끝이 우뚝 멈췄다.
“ 지유, 인유, 정유는 혁련무극을 비롯한 야궐 무인들에게 당했고, 마유, 사유, 환유는 연우강 일행에게 당했다고 하네.”
“ 정말입니까?”
유는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 그렇네.”
“ 타격이 너무 크군요.”
“ 타격이 큰 정도가 아니라, 우린 전멸 직전까지 몰린 상황이네.”
연우강과 혁련무극을 없애지 못할 수도 있다는 예상을 했고, 진식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천유를 제외한 나머지 만기팔유를 전부 동원했다. 그런데 그들이 전부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다.
“ 난 그들을 투입하라고 한 적 없습니다. 사부. 사부가 결정한 일이었고, 난 따랐을 뿐입니다.”
“ 그건 알고 있네, 하지만.......”
신유는 할 말이 없었다. 패천림의 장로들을 투입한 건 유의 결정이었지만 만기팔유의 투입은 자신의 결정 사항이었다. 그들이 아니면 연우강과 혁련무극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에 내린 결저이었다. 그런데 동생들만 잃은 결과가 나온 것이다.
“ 밀천 무인은 전멸했고, 야궐 무인들 또한 반 이상을 잡았습니다. 반면에 우린 절반 정도를 잃었을 뿐이고, 우린 크게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니까 너무 심려 마십시오. 그리고 부하들은 다시 뽑으면 되잖습니까.”
유는 싱긋 웃으며 피풍의를 걸쳤다.
캬우우우!
그때 느닷없이 어디선가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괴성이 들려왔다.
부르르!
신유는 풍을 맞은 것처럼 온몸을 격력하게 떨었다. 백 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그런 엄청난 공력이 담긴 소리는 처음이었다. 아니, 무림에 그런 공력을 가진 자가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게다가 그 소리는 지상에서 들려오는 게 아니었다. 지하 깊숙한 곳, 마치 지옥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였다.
신유는 고개를 돌려 유를 보았다.
혹시 그는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일이 잘 됐다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무튼 천유에게 가서 음양뢰를 제외한 모든 진식을 폐쇄하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음양뢰의 기관을 작동하도록 하고요. 끝나면 서쪽 통로로 오십시오.”
유는 활짝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 알았네.”
신유는 잠시 유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유의 거처를 나선 그는 통로를 따라 걸었다.
잠시 후 기관을 조정하는 곳에서 발을 멈췄다. 그곳을 지휘하고 있는 사람은 천유였다.
“ 나 좀 보세.”
신유는 천유를 불러냈다.
아직 패천이 어떤 상태인지 파악하지 못한 천유는 의아한 얼굴을 하며 밖으로 나왔다.
“ 무슨 일 있습니까?”
천유는 신유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 웅아를 본 적이 있는가?”
웅아는, 신유가 그의 손자인 혼무영 나웅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신유가 나웅을 마지막으로 본 건 이곳에 자리를 잡고난 후였다.
그때만 해도 신유는 천마의 후계자가 나웅이나 제천강 두 사람 중 한명이 될 걸로 여겼다. 그래서 천마 제석강 앞에서 나웅을 만상문의 문주로 소개했다. 그런데 천마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 유에게 일백마를 조종할 수 있는 무음마소를 건네준 것이었다.
천마 제석강의 선택을 받지 못한 웅은 폐관을 한다며 지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후로 소식이 없었다.
“ 내보낸 거 아니었소?”
천유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천유 역시 나웅이 폐관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 그 뒤로 한 번도 못 봤네.”
“ 말도 없이 떠날 애는 아닌데.....”
“ 아무튼 그 아이를 찾아봐 주게.”
“ 어디 가십니까?”
“ 자넨 천주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유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 그 질문은 좀 더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형님.”
신유의 얼굴이 심상치 않아 보이자 천유는 내공을 끌어올려 강기막을 쳤다.
“ 좋네. 솔직하게 말하겠네!”
신유는 그동안 유를 보면서 느낀 점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 으음!”
신유의 말을 듣고 난 천유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 그러니까 형님은 우리가 지금껏 모용세가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단 말입니까?”
“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네.”
“ 음양뢰의 기관을 발동시키고 다른 장소는 모두 폐쇄하라고 했고요.”
“ 그렇네.”
신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 지금 각 기관에 들어가 있는 문도의 수가 이백 명입니다. 형님. 당장 기관을 폐쇄하면 그들마저도 희생을 당하게 됩니다.”
“ 그들을 철수시키는 데 얼마나 걸리겠는가?”
“ 기관을 폐쇄하면서 철수하면 최소한 반시진은 걸립니다.”
“ 그럼 그렇게 해주게.”
“ 믿지 못하면 지금이라도 갈라서는 게 어떻습니까?”
천유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 그럴 수 있었으면 나도 좋겠네. 하지만......”
“ 그를 키웠던 오십 년은 우리 인생이란 말입니까?”
“ 그렇네. 단지 의심스럽다는 정황만 가지고 내 인생 오십년을 지워버릴 순 없지 않은가.”
“ 알았습니다. 문도들이 전부 빠져나온 다음에 기관을 폐쇄하도록 하겠습니다.”
천유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 수고하게.”
신유는 천유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마치를 그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아닐 거야.’
상념을 털어내듯 신유는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곧 신유의 신형이 통로의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