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장 선택의 바위
파악! 파악! 파악!
두 사람이 질풍처럼 내달리고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와 나무는 무형의 힘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엄청난 크기의 짐을 등에 매고 달려가는 두 사람은 백강과 염자생이었다.
“ 서둘러라, 이놈아!”
백강은 염자생을 보며 버럭 소리쳤다.
그가 이렇듯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는 이유는 연우강이 종남산 무곡에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아니, 단지 무곡이란 말만 들었더라면 이렇듯 급하게 달릴 이유가 없었다. 연우강이 무곡으로 간 이유를 알기 위해 하오밀문 지부장에게 이런저런 말을 물었는데, 그 와중에 전에 패천림 무인들을 놓친 곳도 종남산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 말을 듣자마자 기억 저편에 숨어 있던 무곡이란 말이 떠올랐다.
아니, 정확하게는 무곡이 아니라 음양뢰였다.
- 이건 그분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사실 내가 음양인이 된 건 가문의 어른들 때문이었어.
- 가문?
- 원래 내이름은 희수연도 아니고 연수도 아냐.
- 본명이 따로 있다는 말이냐?
- 모용수연이야.
- 모용수연이라면 모영세가 인물이란 거냐?
- 응! 우리 모용세가가 똬리를 튼 곳은 종남산의 묵고이란 곳인데 그곳에는 음양지라는 곳이 있어.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곳 음양지에서 신방을 차리셨고, 날 낳으셨지.
- 왜 음양지를 택한 건데?
- 양극불사신공이라는 고대 무공 한 가지를 얻었거든. 그런데 파천의 힘을 간직한 그 무공은 아무나 익힐 수 없는 무공이었어.
- 음양인만 가능하다는 말이냐?
- 그랬더라면 내가 잠마나 혈마가 될 이유가 없었겠지.
- 그럼?
- 음양의 기운을 동시에 간직한 자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이었어. 그런데 난 두 가지를 동시에 간직한 게 아니라 보름은 양, 보름은 음의 기운을 가진 음양인이 되고 말았지. 그 사실을 안 어르신들이 가문에서 날 내쳤고.
- 그걸 내게 말하는 이유가 뭐냐?
- 난 마총에 못 들어가.
- 천년마인이 돼 다시 살아가는 게 싫다는 거냐?
- 넌 일생 동안 사내였으니까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지만 난 아니잖아. 나는 사는 게 지긋지긋했어. 얼마나 죽음을 바랐는지.......
- 그랬구나.
- 이해해 주는 거야?
- 물론이다. 연수. 난 널 이해한다. 우린 신경 쓰지 말고 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 혹시 대법이 성공해서 살아나면 종남산 무곡으로 와. 그곳에 검은 구덩이 하나가 있는데, 음양뢰라는 곳이야. 난 거기에 있을 거야.
- 가서 술이나 한 잔 부어달라는 거냐.
- 아래까지 들어오면 안 돼. 그곳에는 설사 그가 들어온다고 해도 양처럼 순한 양민처럼 되고 마니까. 술은 뒤에서만 부어.
- 얼마나 깊은데?
- 아주 깊어.
- 너는 내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거냐?
- 바람을 간직한다는 건 좋은 거잖아.
죽기 직전 희수연, 아니 연수로부터 들은 말이었다.
패천림 무인들이 종남산 무곡에서 사라졌다면 그들은 결국 모용세가 무인들이라는 말이 된다. 모용세가 무인들이 음양뢰를 이용해서 뭔가를 꾸민다면 그곳으로 간 자들은 몰살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상황을 알아보니 벌써 일이 벌어져 있었다. 하오밀문 문주를 비롯하여 남궁운화 향노 등 몇몇은 실종됐고, 연우강은 두 문파를 무곡으로 끌어들인 상황이었다.
“ 저깁니다. 사부!”
전력을 다해 백강을 따르던 염자생은 아래쪽 검은 공동을 가리켰다.
“ 가자!”
백강은 빠르게 몸을 날렸다.
드드드드! 드드드드!
“ 빌어먹을! 벌써 시작됐군.”
주변은 지진이 난 것처럼 무섭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음양뢰에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고, 좋지 않은 일이 분명했다.
백강은 좌우를 살폈다.
“ 줄은 거기에 내려 놓고 이쪽으로 와!”
백강은 등에 지고 있던 것을 내팽개치듯 내려놓고 커다란 나무들이 우뚝우뚝 솟은 곳으로 몸을 날려 갔다.
염자생은 동아줄을 내려놓고 백강이 간 곳으로 내달렸다.
“ 나무를 잘라!”
염자생이 곁에 서자 백강은 좌우측으로 손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염자생은 광인을 뽑아 들고 나무를 베어나갔다.
수백 그루의 나무가 쓰러졌다.
“ 나무를 들고 와!”
백강은 베어낸 나무 세 그루를 들고 몸을 날렸다.
음양뢰 앞에 선 그는 음양뢰 안쪽 벽을 향해 내던졌다.
퍼억!
내기를 잔뜩 머금은 나무를 돌을 뚫고 박혀 들어갔다.
“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나무를 들고 온 염자생이 백강을 보며 물었다.
“ 음양뢰 바닥에서는 내공을 전혀 사용할 수가 없어. 그런 상황에서 이곳이 무너지기라도 해봐라. 그럼 어떻게 되겠느냐?”
“ 사다리를 만들 참입니까?”
“ 음양의 기운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모르지만 내공을 사용할 수 있는 곳까지 나선형으로 사다리를 만들고 그곳에서 줄을 늘어뜨리는 수밖에 없다.”
“ 만일 저 안에 장주님 일행이 없으면요?”
“ 저곳에 그 녀석이 없다면 더 좋지 뭘 그래. 인마. 서둘러!”
“ 알았습니다. 사부님.”
염자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날렸다.
음양뢰 안에 연우강 일행이 없으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테다. 하지만 만일 연우강 일행이 음양뢰 안으로 들어갔다면.......
“ 젠장!”
염자생은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날렸다.
행운을 부르는 말은 잘도 틀리지만 불길한 예측은 묘하게도 잘 들어맞는다는 옛말처럼, 연우강 일행은 음양뢰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남궁운화와 향노를 비롯한 하오밀문 무인들이 잡혀 있어 연우강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석문을 나서자 뿌연 안개가 일행을 맞았다. 그곳은 무곡에서 지겹게 보았던 수증기였다.
“ 남궁 소저!”
연우강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돼 광장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 여기 있어요!”
그때 멀리서 남궁운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갑시다.”
연우강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 몸은 어떠냐?”
아래로 내려온 창노가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내공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
연우강은 말끝을 흐렸다.
내공은 전혀 이상이 없다. 그런데 마치 늪처럼 무겁게 움직이고 잇다.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는 내공을 운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 운용은 불가능하단 말이냐?”
“ 그런 것 같습니다. 영감님들은 어떻습니까?”
“ 우리도 마찬가지다.”
창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팔 할 정도의 내공을 운용할 수 있게 해주었던 음양순응기도 더 이상 먹히지 않았다.
“ 걱정이구나.”
무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개가 들어차 있어 시계는 거의 나오지 않고, 지반은 극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남궁운화 일행을 찾기는 했는데 빠져 나갈 수 있을는지.
‘ 이보다 더한 곳에서 살아 나왔는데, 어떻게 되겠지.’
무원은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남궁운화 일행은 반대편에 모여 있었다.
“ 연 공자!”
남궁운화는 연우강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 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창노가 헛기침을 했다.
“ 어마!”
남궁운화는 화들짝 놀라며 연우강의 품에서 떨어졌다.
“ 아무튼 눈치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어요.”
연우강은 창노를 노려보았다.
“ 찬물도 위아래가 있어, 이 녀석아. 납치됐던 손녀는 할아버지가 먼저 안아봐야 하는 거야.”
창노는 남궁운화를 덥석 안았다.
“ 고생 많았지.”
창노는 측은한 얼굴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부모도 없는데 제대로 돌봐 주지도 못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 저흰 괜찮았어요. 할아버지는요?”
“ 우리도 괜찮았다. 널 잡아간 놈들에 대한 복수는 확실하게 해 주고 왔구나.”
남궁운화와 창노가 인사를 하는 사이에 다른 이들도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 이곳은 어때요?”
대충 주변이 정리되자 연우강은 상황을 물었다.
“ 그동안 꾸준히 조사를 했는데......”
남궁운화는 말끝을 흐렸다.
“ 꽉 막힌 곳이란 말인가요?”
“ 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벽은 물론이고 바닥까지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공동 어디에도 나갈 곳은 없었다.
“ 식량은 어때요?”
“ 이끼와 육포와 건포를 번갈ㄹ아 먹으면서 버티긴 했는데, 이젠 육포와 건포는 떨어졌어요.”
남궁운화는 한편에 둔 사망궤를 바라보았다.
지금껏 비교적 건강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사망궤 안족에 넣어둔 육포와 건포 덕분이었다.
“ 약간 이상하게 보이는 곳은 없었어요?”
“ 그런 곳은 별로......”
이번에도 역시 남궁운화는 고개를 저었다.
“ 다시 한 번 둘러보도록 하죠.”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망궤가 있는 곳으로 가서는 안쪽에서 철립을 꺼내 썼다.
“ 그건 가능해요?”
뒤따라온 남궁운화가 물었다.
“ 마라천력?”
“ 네.”
“ 마라천력은 음양의 기운과는 상관없으니까요.”
“ 그거라도 있어서 다행이네요.”
남궁운화는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최악의 순간에 마라천ㄹ겨을 이용하면 연우강만큼은 빠져나갈 수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 혹시 내가 저 위로 날아갈 수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 안 돼요?”
“ 흑풍마라천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십 장 이상은 힘듭니다.”
연우강은 고개를 저었다. 내력을 운용할 수 없게 되면서 가장 먼저 생각한 건 그 점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마라천력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 일단 돌아보도록 하죠.”
연우강은 사망궤를 걸머지고 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살피며 일각 정도 나아갔을 때, 소란한 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은 바로 야궐 궐주인 혁련무극 일행이었다.
혁련무극 일행의 인원수는 이십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연우강을 발견한 혁련무극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을 건넸다.
“ 살아 나왔구려.”
“ 글쎄 음양뢰에 온 걸 살아 나왔다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 여길 아시오?”
“ 영세오천 적통들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장소네.”
“ 그건 무슨 소리요?”
“ 천마가 주고 영세오천은 천마 이전의 상황을 원하는 적통 세력과, 새로운 세력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이인자 세력의 두 파벌로 나뉘었네.”
“ 기득권층과 천마와 싸우면서 새롭게 형성된 신생 권력과의 싸움이었군요.”
“ 그렇네. 모용세가가 주축이 된 신생 권력은 음양뢰에 함정을 준비하고 영세오천의 적통들을 끌어들였다네. 싸움의 결과는 대야벌이었네.”
“ 신생 세력이 승리했다는 말이구려. 적통 세력을 없애는 데 가장 큰 공헌을 세웠던 모용세가는 토사구팽당하고.”
“ 그런 셈이네.”
“ 그럼 빠져나가는 방법은?”
“ 그건 나도 모르네.”
혁련무극은 고개를 저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또 다른 통로에서 백여 명이 쏟아져 들어왔다. 피곤한 기색을 한 채 다가온 그들은 밀천 무인들이었다.
밀천 무인들을 혁련무극 일행을 발견하자마자 적의를 드러냈다. 하지만 감히 공격해 오지는 못했다.
“ 이곳이 음양뢰가 아니었으면 너희들은 벌써 내 손에 죽었다. 자중하라!”
혁련무극은 밀천 무인들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 내공도 운용할 수 없으면서 너무 큰 소리를 치는 게 아닌가 모르겠소.”
비아냥대는 소리와 함께 밀천 무인들 속에서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걸어나왔다.
“ 그래서 인원수를 믿고 공격을 해보겠단 말이냐?”
혁련무극은 사내를 빤히 보며 물었다.
“ 전쟁은 시작했으면 끝장을 봐야 하는 거 아니오.”
사내는 피식 웃으며 뒤편에 있는 밀천 무인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밀천 무인들은 연우강과 혁련무극 일행을 둥글게 포위했다.
“ 죽겠다는 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지.”
혁련무극은 주먹을 쥐고는 앞으로 나섰다.
내공을 운용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단전에 내공이 꽉 차 있어 금강불괴지신을 유지되고 있다. 적의 인원수가 많다고 하여 두려워 할 이유는 없었다.
“ 그 전에 한가지 묻고 싶소.”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알고 싶은 게 있을 땐 이름 정도는 밝히는 게 예의다.”
“ 난 섬전쾌도 장상이오. 나적리 태상총천주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소.”
“ 야궐 문도들도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 모른단 말이오?”
“ 그렇다.”
“ 좋소. 그럼 지금부터 우리의 전쟁을 마무리짓도록 합시다.”
우르르! 드드드!
장상이 막 공격 명령을 내리려고 하는데 바닥이 심하게 떨렸다. 밀천 무인들은 흠칫 놀란 얼굴로 주변을 보았다.
차르르! 철컥! 차르르! 철컥!
곧이어 바닥에서 쇠사슬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밀천 무인들은 재빨리 장상 곁으로 모여들었다.
철컥! 철컥!
그르릉!
또다시 쇠사슬 걸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더니 밀천 무인들이 서 있는 바닥이 한편으로 기울어졌다.
“ 바닥이 기울어진다!”
밀천 무인들은 깜짝 놀라 기우는 바닥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이번엔 그들이 몰려간 쪽이 아래로 푹 꺼졌다. 그들 앞에 검은 암흑이 나타나며 순식간에 수십 명이 아래로 추락했다.
“ 으아아!”
“ 아아아!”
지하 저 깊은 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 저건?”
연우강의 눈에 광채가 어렸다.
커다란 바위가 뒤집히는 광경은 밀천 지하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석문 앞에도 저런 기관장치가 돼 있었다. 바위에 세로로 구멍을 뚫어, 그 구멍에 쇠사슬을 끼우고, 끝을 양쪽 벽에 고정시킨다. 그런 다름 바위의 균형을 맞춘 후 꺾쇠 등의 특별한 장치를 이용하여 고정시키면 바위는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특별한 장치를 제거하면 바위는 무게가 가해지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동정호 지하에는 하나만 그렇게 대 있었다면 이곳에는 수십 개의 바위가 그런 식으로 연결돼 있었다.
“ 여, 여기도 기울어...”
“ 움직이지 마.”
바위가 왼편으로 기울어지는 듯하자 연우강은 다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그가 소리치는 아중에는 바위판은 계속 기울어지고 있었다.
연우강은 빠르게 오른편으로 걸어갔다.
“ 잘 들어! 우리가 딛고 있는 바위판은 가로 칠 장, 세로 칠장이야. 이 바위판은 허공에 떠 있는 상태고 중간에 끼워진 쇠사슬로 지탱되고 있어. 즉 균형을 잡지 못하면 바위가 뒤집혀서 방금 그들처럼 추락한다는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일행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연우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밀천 무인들은 네 개의 바위판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상황이고, 하오밀문과 야궐 무인은 각각 하나의 바위판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었다. 문제는 지금 상태에서 이곳을 어떻게 탈출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아니, 탈출이 문제가 아니라 바위판 위를 떠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진퇴양난이었다.
“ 재미있는 곳이네.”
연우강은 머리를 긁적였다.
“ 지금 재미있다는 말이 나와?”
건너편에 있던 창노가 버럭 소리쳤다.
“ 우리 중 한 사람이라도 자기만 살겠다고 움직이게 되면 이 바위판은 균형이 무너지면서 뒤집어진단 말이지. 그럼 바위판 위에 있는 자들은 전부 아래로 추락하게 되죠.”
연우강은 시선을 돌려 혁련무극을 보았다.
“ 나갈 방법이라도 있는가?”
“ 아직은 없소. 하지만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이 드오.”
“ 기다리면 방법이 나온단 말인가?”
“ 조금 전에 이곳이 영세오천의 천주들을 잡기 위해 만든 관문이라고 하지 않았소.”
“ 그랬지.”
“ 그럼 영세오천의 이인자가 이곳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고 싶은 게 뭐겠소?”
“ 영세오천의 천주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을 없애는 것 말고도 다른 목적이 또 있단 말인가?”
“ 수뇌를 없앤다고 그 조직을 장악할 수 있는 건 아니잖소.”
“ 하면?”
“ 조직을 장악하는 방법은 두 가지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확고한 명분으로 설득하거나, 아니면 수뇌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거요.”
“ 인간적인 모습?”
“ 이기적인 모습을 말하는 거요. 내공도 사용할 수 없고, 일반 양민과 같은 상태에서 죽음이 코앞에 닥쳤을 때 그들의 행태를 다른 자들에게 보여주는 거요. 그래서 이걸 준비한 거요.”
연우강은 밟고 있는 바위판을 가리켰다.
“ 그렇군.”
혁련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이곳을 만든 자는 엄청나게 머리가 좋은 자였다. 사실 무공을 펼칠 수 있을 때라면 아래쪽 바위판은 아무 것도 아니다. 답설무흔, 초상비, 허공답보 등의 경공을 이용하여 빠르게 달려가면 빠져나갈 수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무공을 펼칠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다. 내공이 단전에 채워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죽음의 위기가 닥쳤을 때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인이 느끼는 공포는, 같은 상황에 직면한 일반인이 느끼는 두려움보다 훨씬 크다.
게다가 이 바위판 위에서는 상사도 부하도 없다.
모두가 공평하게 서로의 목숨을 쥔 상태다.
하지만 지금 상태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한계에 달했을 때다. 천주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자들이라면 탈출 방법이 나올 때까지 참겠지만, 천주를 믿지 못한 자들은 바위판을 떠나려 할 것이다.
그때 천주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누군가 자리를 비웠을 때 반대편에 있는 자가 재빨리 자리를 옮겨 균형을 유지하거나, 자리를 뜨려고 하는 자를 죽여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전자는 바위판에 있는 모두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고, 후자는 지금까지 따랐던 부하를 죽여야 한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천주로서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면 안개가 걷혀야겠군.” 뜩 휘어져 있던 철삭이 가공할 속도로 적 “ 그렇소.”
연우강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안개가 천천히 걷혔다. 연우강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위쪽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안개는 십여 장 위쪽까지만 걷혔을 뿐 더 이상 걷히지 않았다.
“ 만일 궐주가 영세오천의 천주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소?”
“ 글쎄, 그건 상황이 닥쳤을 때 그때 생각해봐야지.”
혁련무극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쿠웅!
바로 그때 건너편에서 뭔가가 넘어지는 듯한 둔탁한 소성이 들려왔다.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불빛이 밝혀진 동굴이 눈에 들어왔다.
“ 통로다!”
밀천 무인 한 명이 그곳을 향해 가리키며 소리쳤다.
“ 움직이지 마라!”
장상은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막 걸음을 내대디려고 했던 밀천 무인들이 움찔했다.
“ 정교해.”
연우강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각 문파 무인들이 밟고 있는 곳을 제외한 나머지는 어떤 기관장치도 돼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마치 널따란 호수에 얼음이 얼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얼음은 너무 얇아서 밟기만 하면 금세 깨져 밟은 사람을 삼키고 만다.
이곳 또한 다르지 않았다.
바위로 된 평지처럼 보이지만 어느 한쪽에 무게가 실리면 곧바로 뒤집어진다.
그나마 밟아도 상관없는 유일한 지점이 쇠사슬 위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또한 바위판의 크기가 전부 같아야 한다. 만일 바위판의 크기가 다르다면 곧바로 아래로 추락하고 만다. 바위판의 크기를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가로 세로로 그어진 줄이다.
혁미월의 작품인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지만 대단한 기관임에는 분명했다.
‘ 얼마나 버틸까?’
연우강은 밀천 무인들을 보았다.
그들은 전부 반대편의 통로를 바라보고 있다. 거리는 대략 오십 장. 너무 멀면 포기하겠지만 살아남아 이곳까지 온 자들은 각 문파의 최강자라고 할 수 있다.
저들의 실력이면 대여섯 번의 도약으로 도달할 수있는 거리가 오십 장이다. 기관장치가 돼 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대여섯 번의 도약이면 당도할 수 있는 짧은 거리.
어쩌면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강렬한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난 가게소!”
일각 정도 지났을까.
밀천 무인 한 명이 급하게 내달렸다.
한 명이 빠져나가자 바위판은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 규, 균형을 잡아!”
누군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밀천 무인들은 그 사내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다만 자리를 떠난 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 규, 균형을 잡으란 말이다. 개자식들아!”
“ 괜찮다. 가자!”
자리를 떠난 사내가 달려가도 바닥이 움직이지 않자, 밀천 무인들은 우르르 달려나갔다. 누가 말릴 새도 없었다. 수십 명이 동시에 자리를 뜨자, 균형을 잃은 바위는 급격하게 기울어졌고, 남아 있던 자들은 아래로 추락했다.
“ 으아아!”
“ 아아아!”
자리를 뜬 자들 처지 또한 남아 있던 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십 장도 채 달려가지 전에 밟고 있던 바위판이 뒤집어지며 지하로 추락했다.
공동엔 정적이 흘렀다.
이백여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데 촌각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바위판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 있다. 두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 건너가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먼저 두 명이 건너가서 균형을 잡은 다음 한 사람씩 건너간다!”
혁련무극은 일행을 보며 소리쳤다. 그러고는 노욱과 단야를 보았다.
“ 두 분이 머넞 나서주시오.”
“ 알았소. 궐주.”
노욱과 단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자리를 이동했다. 두 사람이 움직이자 다른 두 명이 움직이며 바위판의 균형을 잡았다. 가장자리에 당도한 노욱과 단야는 긴장한 얼굴로 전면을 보았다.
“ 먼저 바위판의 크기를 파악하고 무조건 가운데 지점으로 달려.”
그때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알겠습니다. 대주님!”
전에 하던 대로 습관적으로 나온 말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야궐 무인들은 깜짝 놀랐다.
구천검마제 노욱.
그는 야노원의 원주고, 야궐의 최고 어른이다.
그런 그가 연우강에게 대주님이라고 불렀음은 물론이고 공대를 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궐주인 혁련무극에게도 반공대를 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야궐 무인들은 놀란 눈으로 노욱을 보았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욱과 단야는 조심스럽게 건너갔다. 그러고는 바위판이 기우는 듯하자 급하게 중앙으로 내달렸다.
“ 균형을 잡으면서 거리를 벌려, 천천히 해.”
또다시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또다시 노욱이 소리쳤다.
두 사람은 느릿하게 움직이며 바위판의 균형을 잡았다.
“다음은 육 영감과 복양후 두 사람이 건너 가.”
이번에도 역시 연우강이 지시를 내렸다.
“ 알겠습니다. 대주님.”
“ 알았습니다.”
두 사람 역시 대답을 하고는 노욱과 단야가 올라서 있는 바위판 앞으로 걸어갔다.
“ 한 발씩만 올려놓고 천천히 체중을 실어. 노 영감과 단 영감은 바위판의 균형을 잡고!”
“ 알았습니다.”
네 사람은 일제히 소리치며 신중하게 움직였다. 육패천과 복양후는 한 발을 걸친 채 천천히 체중을 실었고, 바위판의 움직임에 따라 노욱과 단야는 위치를 이동했다. 그들이 체중을 옮기는 사이에 남아 있는 자들 또한 위치를 이동하며 바위판의 균형을 잡았다.
“ 전부 봤지?”
“ 봤습니다. 대주님.”
야궐 무인들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노욱, 단야, 육패천, 복양후, 네 사람이 연우강을 대주님이라고 부르자 그들 역시 자신들도 모르게 덩달아 대주님이라고 한 것이다.
“ 좋아. 가장 중요한 것은 서두르지 않는 거야. 설사 화살이 날아오더라도 절대 급하게 움직여서는 안 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 네!”
“ 연우강!”
“ 장주님!”
바로 그때 위쪽에서 연우강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형님이오?”
연우강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사실 연우강이 희망을 걸고 있던 사람은 백강이었다. 유람을 간다며 염자생을 데리고 떠났지만 하오밀문이 도처에 깔려 있으니 이곳 소식을 접하면 금세 달려올 거라고 믿었다. 게다가 백강은 패천 무인들과 함께 떠났던 사람 아닌가.
“ 그래, 나다. 그런데 얼마나 깊은 곳에 있는 거냐?”
위에서 백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걸 내게 물으면 어떡합니까?”
“ 나도 몰라.”
“ 모른다고요?”
“ 내가 형님을 따라 이곳으로 왔을 땐 정신을 차리지 못했거든. 처음 온 거나 다름없다.”
“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 음양뢰 벽에 나무를 박아가면서 내려왔다. 오십 장 가량 내려온 것 같구나.”
“ 더 내려올 수 없습니까?”
“ 내공을 정상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다. 더 내려가면 나도 너와 같은 상태가 되고 말아!”
“ 동아줄은 준비해 왔습니까?”
“ 백 장 정도 된다.”
“ 그걸 가지고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 동아줄 백 장이 얼마나 무거운지 아느냐? 이걸 가져오느라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어. 이놈아!”
“ 아무튼 내려보십시오.”
“ 알았다.”
백강의 목소리가 들려온 후 한참 있다가 동아줄이 내려왔다. 동아줄은 거의 팔목 두께만 했다. 저런 두께의 동아줄이 백장이면 엄청난 무게가 나갈 것 같았다.
“ 됐습니다. 남은 부분은 얼마나 됩니까?”
“ 사십오 장 남짓이다.”
“ 젠장!”
연우강은 욕설을 내뱉었다.
백강이 있는 곳에서 이곳까지는 오십 장 깊이라는 말이 된다.
패천에서 백강 일행이 나타난 걸 알게 되면 당장 공격을 해올 것이다. 무인은 이곳으로 올 수 없지만 화살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인원은 사십 명 가량인데 하나의 동아줄에 의지하기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 둘로 나누세요.”
“ 알았다!”
내려왔던 동아줄이 약간 올라가고, 바로 옆에 다른 줄 하나가 내려왔다.
“ 이제 저 줄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도록 해.”
연우강은 줄을 가리켰다. 줄은 공동 가운데에서 왼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으로 내려와 있었다. 그곳까지 거리는 대략 삼 장.
“ 줄이 너무 높습니다. 대주님!”
줄의 높이를 가늠하던 노욱이 말했다. 줄의 끝은 바닥에서 육 장가량 떨어져 있었다. 내공을 운용할 수 있는 상태라면 그 정도 높이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지금은 양민이나 다름없는 상태.
육 장 높이를 뛰어오른다는 건 불가능하다.
“ 그건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일단 이동부터 해.”
“ 알았습니다.”
노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조심스럽게 자리를 이동했다. 동아줄이 내려오기 전에 움직여 본 상황이라 이번엔 비교적 쉽게 바위판을 옮겨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시간은 오래 걸렸다. 일행이 동아줄이 있는 곳까지 삼십 장을 이동하는 데 반 시진이나 걸렸다.
그런 그들을 쳐다보는 자들이 있었다.
계단 위쪽의 석문에서 연우강 일행을 바라보고 있는 자는 천유를 비롯한 패천 무인들이었다.
“ 어떻게 할 참이냐, 연우강. 육 장이면 뛰어오를 수 없는 거리다. 응?”
천유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느닷없이 연우강 일행이 있는 곳에서 두 명이 둥실 떠오르는 것이었다.
“ 어떻게?”
천유는 놀란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허공으로 떠오른 두 명은 곧 동아줄을 잡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올라가자마자 곧바로 다른 두 명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 비장의 수가 있었단 말이구나. 준비하라.”
천유는 좌우측을 보며 소리쳤다.
그러자 활과 화살을 든 패천 무인들이 앞으로 나오더니 계단의 아래쪽으로부터 위쪽으로 늘어섰다.
화살은 굳이 내공을 운용하지 못한다고 해도 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패천 무인들은 연우강 일행이 모여 있는 곳을 노려보며 천천히 시위를 당겼다.
< 제 18권 끝>
황금 백수 19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