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척하면 척
슉! 슉슉! 슉슉슉!
패천 무인들이 쏜 화살은 허공을 가르며 날았다.
" 화살이 날아온다! 화살이다!"
올라갈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야궐 무인이 날아오는 화살을 가리키며 고함을 내질렀다.
순간 바위판에 있던 이들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내공을 운용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날아오는 화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내공을 운용할 수 없는 상황. 호신강기를 펼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방패로 쓸 만한 물건도 없고 자리를 떠나서도 안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가지고 있던 무기를 머리 위로 들어올리는 것뿐이었다.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품안으로 끌어들였다.
" 움직이면 우린 전부 죽는다!"
혁련무극은 고함을 내질렀다.
바로 그 순간 화살이 비처럼 떨어졌다.
푹! 푹푹푹! 푹푹!
화살이 박혀드는 섬뜩한 소리가 사방에서 요동쳤다.
" 크윽!"
" 으윽!"
" 커억!"
가슴에 화살을 맞은 자들, 팔에 화살을 맞은 자들, 다리에 화살을 맞은 자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무인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서둘러 주게."
혁련무극은 다급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이곳에 있는 무인들을 동아줄이 있는 곳까지 들어 올리는 힘은 연우강의 마라천력이었다.
" 그렇지 않아도 죽어라 하고 있소. 두 명 더 나오시오. 부상을 당한 사람 위주로 나오시오."
연우강은 일행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다리와 팔에 화살을 맞은 두 명이 중앙으로 나왔다. 연우강은 마라천력으로 무인들을 들어 올렸다. 지금껏 두 명씩 들어올리다가 네 명을 한꺼번에 들어올리자 곧바로 몸에서 신호가 왔다.
이마의 힘줄이 불거지고 코에서 혈흔이 비쳤다.
그의 시선이 위로 향하자 네 명은 동시에 허공으로 떠올랐다.
슉! 슉슉! 슉슉!
" 또 화살이 온다. 준비하라!"
패천 무인들 일행을 바라보고 있던 혁련무극이 고함을 내질렀다. 무인들은 잔뜩 굳은 얼굴로 무기를 들어올리며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푹! 푹푹푹!
" 크윽!"
" 으윽!"
또다시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잡았습니다. 대주님!"
" 잡았습니다."
더불어 위쪽에서는 동아줄을 잡았다는 외침이 들려왔다.
연우강은 다시 시선을 내려 한가운데로 들어온 네 명을 보았다. 올라갈 자들은 가운데로 이동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바위판의 균형을 잡고 있다. 두 명은 하오밀문 무인이고, 나머지 두 명은 야궐 무인이었다. 그들 역시 몸 곳곳에 화살을 맞은 채이고 심지어 두 대의 화살을 꽂고 있는 자도 있었다.
" 무조건 올라가. 떨어지면 죽는다는 걸 명심해."
" 알겠습니다. 대주님."
네 명은 동시에 소리쳤다.
연우강은 그들을 보며 마라천력을 끌어올렸다.
네 명이 들어 올려졌다.
슈욱! 슈욱!
푹푹푹! 푹푹푹!
" 크윽!"
" 아악!"
" 으아악!"
화살에 맞은 듯 무인 한 명이 얼굴을 감싸고 풀썩 쓰러졌다. 화살이 정통으로 이마를 꿰뚫은 것이었다. 사내는 숨이 끊어졌지만 바위판은 변화가 없었다. 숨진 자의 몸 또한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퍽! 퍽!
두 대의 화살이 연우강의 등을 향해 날아왔지만 사망묵의는 뚫지 못했다.
" 잡았습니다. 대주님!"
" 잡았습니다."
잡았다는 소리가 들려오자 연우강은 시선을 내려 네 명을 들어 올렸다.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코에서 비치던 혈흔은 어느새 핏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전력을 다해 네 명을 들어 올렸다.
남궁운화는 걱정스런 얼굴로 연우강을 올려다보았다. 연우강의 코에서 떨어진 피가 얼굴로 떨어졌다. 하지만 남궁운화는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연우강의 손을 꽉 쥐었다. 손을 잡는다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그에게 힘을 보태고 싶었다.
" 감사합니다. 대주님!"
" 감사합니다. 대주님!"
무인들은 고함을 내지르며 줄을 잡고 빠르게 올라갔다. 바위판 위에 있는 인원이 줄어들수록 패천 무인들이 쏘는 화살의 수가 많아졌다. 이제는 거의 비처럼 쏟아녀 내렸다.
" 컥!"
" 크윽!"
" 으윽!"
바로 옆에서 동료가 죽고, 몸에 꽂힌 화살의 수가 늘어갔지만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 젠장!"
허일구는 허벅지에 박힌 화살을 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절뚝거리며 중앙으로 자리를 옮겼다.
허일구가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반대편에서는 육패천이 걸어나왔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균형을 잡으며 자리를 이동했다.
" 아아악!"
올라가던 자가 화살에 맞은 듯 처절한 비명과 함께 아래로 추락했다.
" 조심해!"
혁련무극은 고함을 내질렀다.
퍼억!
사내가 떨어지자마자 혁련무극은 재빨리 자리를 이동하여 균형을 잡았다. 기울어지던 바위판이 간신히 제자리를 잡았다. 그 순간 연우강은 허일구를 비롯한 네 명을 들어 올렸다. 힘에 겨운 듯 위로 올라가는 속도도 점점 느려졌다.
" 감사합니다. 대주님!"
" 고맙네!"
" 감사합니다. 대주님!"
밧줄을 잡은 자들이 감사의 인사를 보내오자 연우강은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제 남은 사람은 무원, 창노, 향노, 독고철웅, 남궁운화, 혁련무극, 노욱, 단야, 복양후의 아홉 명이었다. 아니 연우강까지 합치면 열 명이었다.
" 운화야, 먼저 가라!"
창노가 남궁운화를 보며 말했다.
" 아니에요, 할아버지 먼저 가세요."
" 운화야."
" 전 연 공자 품안에 있으면 화살 걱정할 필요 없잖아요. 제 걱정은 말고 할아버지 먼저 가세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저었다.
" 남궁 소저가 시키는 대로 하시오."
" 알았네."
연우강의 말에 창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내디뎠다. 그와 함께 올라갈 사람은 향노, 복양후, 단야였다.
네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슉! 슉!
바로 그때 화살이 날아와 복양후의 등과 향노의 어깨에 꽂혔다.
" 크윽!"
두 사람은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멈췄다.
" 계속 움직이게."
혁련무극은 두 사람을 보며 소리쳤다.
잠시 멈칫했던 두 사람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곧 한가운데로 모였다.
연우강은 마라천력을 동원하여 그들을 끌어올렸다. 그도 많이 지친 듯 처음처럼 쉽게 올리지 못했다.
네 사람은 올라가다 멈추고, 올라가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간신히 동아줄이 있는 곳까지 끌어올린 연우강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 감사합니다. 대주님!"
" 감사합니다. 대주님!"
동아줄을 잡은 복양후와 단야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소리쳤다. 두 사람의 얼굴엔 감격한 빛이 역력했다.
과연 자신이 연우강 입장이라면 적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까. 아무리 자문을 해보아도 대답은 '아니오.'라고 나온다. 그런데 연우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일을 하고 있다.
' 이 은혜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리고......'
복양후는 손을 놀리면서 화살이 날아온 곳을 보았다.
" 반드시 죽여줄 것이다. 반드시!"
그는 패천 무인들을 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러고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 가급적이면 줄을 맞추도록 해봐라."
계단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천노는 문도드릉ㄹ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연우강 일행을 쳐다보는 천노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어렸다.
보통 지금과 같은 상황에 처하면 우왕좌왕하닥 자멸하고 만다. 그런데 녀셕들은 화살에 맞으면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놀라운 녀석들이 아닐 수 없었다.
" 하지만!"
그는 시선을 내려 연우강과 혁련무극을 보았다.
이제 남은 자는 여섯 명.
저들만큼은 반드시 음양뢰 깊숙한 곳으로 묻어야만 할 터였다.
" 괜찮은가?"
혁련무극은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연우강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한계 상황에 도달했다는 의미였다.
" 괜찮지 않다고 쉴 순 없잖소."
연우강은 코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세명으로 줄이세."
" 한꺼번에 올라가는 게 낫소."
" 자넨 지금 한 명 들어올릴 힘도 없네. 세 명을 들어올리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하세."
" 잠깐만 기다리시오!"
연우강은 사망궤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사망묵의를 벗어 남궁운화에게 머리부터 덮어 씌웠다.
" 여, 연 공자."
남궁운화는 울 듯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난 사망궤와 철립이 있으니까 대충 피할 수 있어요. 걱정 말고 걸치도록 해요."
연우강은 다시 사망궤를 걸머졌다.
그가 사망궤를 걸머지고 일어서자 무원, 독고철웅, 노욱이 균형을 잡으며 앞으로 나왔다. 연우강 또한 조금씩 위치를 옮겼다. 그가 걸머진 사망궤가 엄청나게 무거워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훨씬 안쪽으로 들어가야 했다.
바위판의 균형이 잡히자 연우강은 세 사람을 들어올렸다. 네 명에서 세 명으로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버거웠다.
푸욱!
" 크윽!"
바로 위에서 나직한 비명이 들려왔다.
날아오는 화살에 맞은 사람은 무원이었다. 배를 뚫고 들어간 화살 사이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 됐네."
" 잡았네."
" 이제 풀어도 되네."
위에서 무원 일행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연우강은 또다시 무릎을 꿇었다.
" 자네 성이 주씬가?"
바로 그때 혁련무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흔들고 있던 연우강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주씨냐는 물음.
뜬금없지만 그 안에는 여러 의미가 내포돼 있는 듯하다. 친아버지를 알고 있다는 의미부터, 혁련무극의 과거와 현재가 포함된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 주씨가 아니고 연씨요."
연우강은 고개를 저었다.
" 난 한때 무영이었네."
연우강은 고개를 들어 혁련무극을 보았다.
툭! 툭툭툭!
화살이 사망궤를 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 그를 마지막으로 본 곳이 검애 위였네."
" 그분을 공격할 때도 있었단 말이오?"
" 공격할 때 그 자리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난 주모자의 한 명이었네."
" 지금은 후회하시오?"
" 글쎄.... 후회한다고 하면 비겁한 변명이겠지. 그 당시 난 담대만승을 벌주에 옹립하기 위해 광분했었네. 그 일에 방해가 되는 거라면 무조건 없앴지."
" 그 일을 이제 와서 밝히는 건......."
" 자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함이네."
" 복수할 기회?"
" 그렇네. 자네가 날 살려서 나가면 난 자네를 죽여야 할지도 모르네. 아니 죽일 거네. 복수를 하고자 한다면 지금이 기회네. 날 이대로 두고 남궁 기주를 안고 올라가면 되네."
" 그렇구려. 그렇게 하면 복수를 할 수 있겠구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사망궤를 벗어 한가운데로 천천히 밀었다.
턱!
사망궤를 밀고 있는 그의 손을 작은 손이 잡았다. 그 손의 주인은 남궁운화였다.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보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 지금 내 힘으로는 사망궤까지 들어올리지 못해요."
" 그럼 절 먼저 올려주세요. 사망궤는 제가 질게요."
남궁운화는 사망궤를 끌어당겼다.
" 나중에 찾으로 올 거니까 걱정말고 놔두세요."
" 위급하다고 아버지를 버리고 갈 수는 없잖아요."
" 그 안에 있는 건 아버지가 아니고 아버지 유품입니다."
" 연 공자한테는 유품이 아버지잖아요. 그리고 신발도 배냇저고리도, 모자도 있잖아요.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준 선물을 버리고 간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제가 지고 갈 테니까 우선 먼저 올려 주세요."
" 아무튼!"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마라천력을 끌어올렸다.
약간 쉰 탓에 조금 전보다는 나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곧이어 혁련무극을 비롯한 세 사람의 몸이 동시에 떠올랐다.
" 나도 살려주는 겐가?"
혁련무극은 놀란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담대만승에게 무슨 빚을 졌는지 모르지만, 이제부터는 내 빚을 갚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해야 할 거요, 궐주."
" 날 종으로 부려먹으려면 담대만승이 그랬던 것처럼 날 이겨야 하네."
" 그건 어려운 조건이 아니오."
" 과거 담대만승과 비무를 할 때보다 최소한 네 배 이상은 강해졌네. 몸은 이미 금강불괴지신의 경지에 올랐고, 심검은 오 년 전에 터득했네."
" 종은 강할수록 좋은 거 아니오. 그쪽으로 올라가시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바로 앞으로 다가온 줄을 가리켰다.
혁련무극은 줄 하나를 잡았다.
그가 줄을 잡자 남궁운화도 줄을 잡았다.
" 난 저쪽으로 갈게요."
" 그게 나을 것 같아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강은 마라천력으로 몸을 조정하며 혁련무극이 올라가고 있는 줄 아래쪽을 잡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올라갔다.
남궁운화는 연우강과 보조를 맞추며 손을 놀렸다.
화살은 여전히 새카맣게 날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화살 대부분은 남궁운화의 등에 막혀 아래로 떨어졌다. 남궁운화가 연우강더러 다른 줄로 가라고 했던 것은 그렇게 해야만 연우강에게로 갈 수 있는 화살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슈욱!
툭!
느닷없이 남궁운화가 붙잡고 있는 줄이 흔들렸다. 남궁운화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화살에 맞아 줄이 끊어지는 중이었다.
" 사망궤를 버려요!"
연우강은 급하게 마라천력을 끌어올리며 소리쳤다.
" 저 위로 절 올려 주면......."
뚝!
바로 그 순간 줄이 끊어지며 남궁운화의 신형이 아래로 추락했다.
" 빌어먹을!"
연우강은 황급히 몸을 날렸다. 사망궤의 무게에 남궁운화까지 더해져 추락하면 그 충격은 엄청나다. 아니 충격만 받는다면 상관없지만, 그 무게가 바위판을 내려치면 바위는 금세 뒤집어지고 만다.
그 상황만큼은 피해야 할 터였다.
연우강은 전력을 다해 마라천력을 펼쳐 남궁운화가 떨어지는 속도를 늦췄다.
쿠웅!
바로 그 순간 남궁운화와 사망궤가 동시에 아래로 푹 꺼졌다. 검은 구덩이가 모습을 드러내고 남궁운화의 신형이 아래로 추락했다.
연우강 또한 검은 구덩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연 공자!"
줄을 잡고 있던 혁련무극은 아래를 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검은 공동으로 뛰어 들어간 연우강은 대답이 없었다.
" 난 자네가 살아 나올 거라고 믿네. 그리고 자넨 이미 날 이겼네."
다시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바위판을 내려다보던 혁련무극은 줄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바위판 위에 있던 이들이 모두 사라지자 화살도 뚝 그쳤다.
" 도대체....."
천유는 연우강이 떨어진 바위판 위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위에서 내려온 동아줄은 내공을 운용할 수 없는 자들이 뛰어오를 높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수십 명이 그 동아줄을 잡고 탈출한 것이다.
어떤 힘이 작용한 것 같은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연우강을 잡은 걸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군."
천유는 씁쓸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한편.
공동 안으로 몸을 날린 연우강은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고 있었다. 먼저 떨어진 남궁운화를 잡기 위해 추락하는 속도에 마라천력까지 더한 상황이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남궁운화가 보였다.
" 사망궤를 버려요."
연웅강은 아래쪽을 향해 고함을 내지르며 더욱 속도를 냈다.
" 아, 알았어요."
남궁운화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연우강은 이번엔 그녀를 향해 마라천력을 펼쳤다. 멈췄던 피가 터진 듯 코에서 액체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남궁운화의 무게가 가벼워진 듯한 기분이 들면서 거리가 가까워졌다.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잡자마자 이번엔 자신의 몸에 마라천력을 가해 떨어지는 속도를 늦췄다.
쿠웅!
바로 그때 아래쪽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 남궁운화가 벗어 던진 사망궤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 대략 십 장.'
연우강은 내심 중어럭리며 마라천력을 더욱 강하게 끌어 올렸다. 떨어지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다.
연우강은 빙글 몸을 돌려 남궁운화를 위로 올렸다.
쿠웅!
곧 그와 남궁운화는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하지만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마라천력으로 속도를 늦춘 탓도 있지만 먼저 떨어진 시체들이 완충작용을 해 준 것이었다.
" 괜찮아요?"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보며 물었다.
" 고마워요."
남궁운화는 연우강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줄이 끊어지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때는 어떤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바위판이 뒤집어지면서 아래로 떨어지는 때 비로소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연우강이 구해 준 것이다.
" 고맙단 말은 내가 해야죠. 사망궤를 지키다가 그렇게 됐잖아요."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안고 일어났다.
사망궤는 반 장 옆에 떨어져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간 그는 사망궤를 열고 야명주를 꺼냈다. 푸르스름한 빛이 내부를 밝히자 주변 전경이 드러났다.
주변에는 시체가 가득했다.
" 들고 있어요."
남궁운화에게 야명주를 건넨 연우강은 사망궤를 걸머졌다.
" 여긴 어딜까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캄캄한 어둠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내공은 운용이 불가능하다.
" 지금부터 알아봐야죠. 가요."
연우강은 남궁운화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위쪽과는 달리 아래쪽은 그렇게 넓지 않았다. 형태는 타원형이었다.
"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문득 연우강이 코피를 쏟았다는 사실이 떠올라 남궁운화가 물었다.
" 쉴 땐 쉬더라도 일단 시체가 없는 곳으로 가야 하잖아요."
" 그런 장소가 있을 것 같지가 않은 데요 뭘."
남궁운화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 무섭지 않아요?"
" 무서운 상황인가요?"
남궁운화는 되물었다.
" 얼마나 깊은 곳으로 떨어졌는지 알 수가 없고, 바닥엔 시체가 발에 치일 정도로 널렸으니까, 이 정도면 두려움에 덜덜 떨어야 하잖아요."
" 듣고 보니 그렇네요."
남궁운화는 활짝 웃었다.
연우강의 말이 맞다.
지금은 두려움에 덜덜 떨어야 하는 상황이 분명하다. 사망궤 안에 있던 식량은 이미 바닥났고,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 나갈 곳은 있는지 그것조차 불분명하다. 최악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그녀는 연우강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내심 말했다.
' 연 공자가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 지하에 갇히면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것이 흐름입니다."
" 대기의 흐름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죠?"
" 맞아요."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하지만 내공을 운용할 수 없는 상태에서 흐름을 찾아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 어려울 게 뭐 있습니까. 저쪽으로 가면 되는데요."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남궁운화를 이끌고 갔다.
" 잠시 후 두 사람 앞에 동굴이 나타났다.
" 마라천력으로 흐름도 파악할 수 있어요?"
남궁운화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 피이! 야명주 불빛 때문에 발견했으면서."
이내 남궁운화는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은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은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 여긴 어딜까요?"
남궁운화는 불안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야명주가 박힌 동굴 천장은 푸른 광채를 흩뿌리고 있다. 야명주가 박혀 있는 곳이라면 패천의 내부라는 의미가 된다. 여전히 내공을 운용할 수 없는 상황인데 만일 적이라도 만난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 바닥을 보세요."
연우강은 동굴 바닥을 가리켰다.
" 바닥이 왜요?"
남궁운화는 시선을 내렸다.
이끼가 무성하게 자라 푹신한 양탄자를 밟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사람이 자주 다니는 길이라면 이끼가 낄 리가 없잖아요. 어쩌면 이곳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동안 방치된 곳인지도 모릅니다."
이끼도 이끼지만 연우강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혁련무극의 말 때문이었다. 영세오천의 이인자들은 적통들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이곳에 기관을 바탕으로 한 진을 설치했다. 이 동굴은 이 일을 하는 과정에 만들어진 통로 같은데 전쟁이 끝나고 폐쇄된 듯했다.
" 패천 무인들도 모르는 장소라는 건가요?"
"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아무튼 여긴 따듯하네요."
그랬다. 온천이 곳곳에 있어 다른 지역보다 따뜻하긴 하지만 지금 가고 있는 이곳은 한여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더웠다.
" 그렇네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지런히 걸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막다른 곳에 도착했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연우강과 남궁운화는 석벽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 어라?"
연우강은 의아한 얼굴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지금까지는 석벽에 바짝 붙으면 기관 장치에 의해 저절로 열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석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 기관이 고장난 것 아닐까요?"
남궁운화는 석벽을 살폈다. 벽면 전체는 이끼로 덮여 있었다. 석문이 한 번이라도 열렸다면 벽과 문 사이의 이끼가 벗겨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문이 열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 그럼 힘으로 열어야지요."
연우강은 양손으로 석벽을 밀었다. 그러나 석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남궁운화가 합세하고, 마라천력까지 끌어올리자 비로소 석문은 조금씩 열렸다.
쿠웅!
급기야 석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섰다.
" 와아!"
남궁운화는 제 처지도 잊고 탄성을 흘렸다.
눈앞 원형 광장, 폭은 십 장가량이고 벽면을 따라 일 장 간격으로 야명주가 박혀 있었다.
그 야명주 빛이 비추는 곳은 광장 중앙이었다.
그곳에는 폭이 삼 장가량 되는 연못이 있었다. 연못을 채우고 있는 물이 온천수인 듯, 수면으로부터 수증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연못 주변으로, 양손을 다소곳이 모아 앞으로 내민 여섯 개의 석상이 무릎을 꿇은 채 있었다. 그들 손에도 역시 벽면에 있는 야명주가 들려 있었다. 그 야명주가 비추는 곳 또한 연못 안쪽이었다. 피어오르는 수증기 사이로 투과한 야명주 빛은 연못 하나와 조각상 다섯 개밖에 없는. 어떻게 보면 단조로운 광장을 환상적인 장소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두 사람은 광장으로 걸어갔다.
" 글이 적혀 있어요. 그런데 전서체예요.'
석상을 살피던 남궁운화가 연우강을 보며 말했다.
연우강은 남궁운화 곁으로 다가갔다. 석상의 가슴에는 '상천'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 뭐라고 적혀 있는 거죠?"
" 상천이라고 적혀 있네요."
연우강은 자리를 옮겼다.
두 번째 석상에는 '지천', 세 번째 석상에는 '흑천', 네 번째 석상에는 '황천', 다섯 번째 석상에는 '밀천', 그리고 마지막 석상에는 '천마'라고 적혀 있었다.
" 다른 석상은요?"
" 영세오천의 나머지 이름과 천마라는 글이 적혀 있네요."
" 그럼 저들은 영세오천의 다섯 천주와 천마가 되는 거네요?"
" 그런 셈이죠."
" 그런데 무슨 생각으로 저런 석상을 만들었을까요?"
" 영세오천과 천마 제석강을 종으로 부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에요."
" 그들을 종으로 부려요?"
" 자세를 보세요. 영세오천의 천주들과 천마 제석강이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야명주를 들고 있어요. 마치 주인의 목욕 시중을 드는 노예들이 취하는 자세잖아요."
" 그러면 이 연못을 만든 자는 모용세가 무인이겠군요."
" 그렇겠죠. 그리고 씌어진 글이 요즘 유행하는 서체가 아니고 천오백 년 전에 유행했던 전서체라는 건, 그 당시에 만들어졌다는 걸 의미하고요."
" 게다가 누군가 들어온 흔적이 전혀 없으니까....."
" 영세오천의 적통과 이인자들의 전쟁 이후 최초의 방문자가 우리라는 뜻이죠. 그 말은 곧 이곳이 기연의 장소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되고요."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사망궤를 내려놓았다.
" 아직도 기연을 얻고 싶어요?"
남궁운화는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는 이미 심검을 얻은 걸로 알고 있다. 무의 끝을 보았다고 해도 무방한데, 아직도 기연 타령이다.
" 부족해서 손해나는 경우는 있어도 많아서 피해 보는 경우는 아직 보지 못했거든요. 내공, 돈, 무공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겁니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바닥에 나 있는 이기를 걷어 나갔다.
" 아무튼."
남궁운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바닥의 이끼를 걷어냈다. 이끼를 걷어내자 연못을 중심으로 십 자형으로 파인 홈이 나타났다. 바닥에서 솟구친 물의 수면이 일저앟게 유지되고 있던 이유가 바로 그 홈 때문이었다.
연못의 물이 홈을 따라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꼬르르!
이끼를 걷어내고 있는데 문득 뱃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 맞다!"
남궁운화는 고개를 들어 연우강을 보았다.
" 뭐라도 발견한 거예요?"
" 그게 아니라 우린 먹을 게 없어요."
남궁운화는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사망궤 안에 있던 음식은 진작 바닥을 보았다. 음식이 없으면 기연 할아버지를 발견한다고 해도 버텨낼 재간이 없다. 이곳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음식이었던 것이다.
" 내가 말했던가요?"
" 무슨 말이요?"
" 군무옥 그 녀석과 나는 오 년 동안 한솥밥을 먹었다는 걸 아직 말하지 않았단 말이에요."
" 그게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말인가요?"
" 아주 중요합니다. 녀석은 지금쯤 우리에게 음식 넣어줄 방법을 강구하고 있을 겁니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다시 이끼를 걷어내는 작업에 몰두했다.
연우강의 예상대로였다.
군무옥을 비롯한 염자생은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달려가는 군무옥과 염자생은 등에 커다란 자루 하나씩 짊어진 채였다.
" 우리 왔소!"
멀리 음양뢰의 구덩이가 보이자 군무옥은 고함을 내질렀다. 그와 염자생은 곧 음양뢰 근처에 당도했다.
" 어서 오게, 음식은 있던가?"
혁련무극은 군무옥을 보며 물었다.
" 모르겠소. 먹을 만한 것들로 대충 챙겨 왔소. 장작은 준비됐소?"
군무옥은 자루를 내려 혁련무극에게 건넸다.
그와 염자생이 다녀온 곳은 밀천 무인 진영이었다. 주변에 산짐승이라도 있으면 잡으려고 했는데, 무인들이 전쟁을 치르는 바람에 몽땅 도망가고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밀천 진영으로 다녀온 것이었다.
" 자루만 묶으면 되네."
고개를 끄덕인 혁련무극은 군무옥으로부터 자루를 받아 커다란 짐 위쪽으로 묶었다.
밧줄로 친친 동여맨 그것은 바위와 장작이었다.
그 위에 자루를 묶은 혁련무극은 곧바로 짐을 들고 음양뢰 안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몸을 날리는 순간 작업을 끝낸 창노가 혁련무극을 따라 몸을 날렸다. 그 뒤를 군무옥이 따랐다. 세 사람은 백강이 박아 놓은 나무를 타고 맨 아래쪽 나무를 향해 몸을 날려 갔다. 그곳에는 백강이 아래를 살피고 있었다.
" 어떻습니까?"
혁련무극은 짐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아직 인사도 나누지 못해씨만 몸에서 풍기는 기운만으로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기관이 작동하는 소린 아직 듣지 못했네."
백강은 준비하고 있던 밧줄로 짐 위쪽을 묶으며 말했다. 그가 짐을 묶는 사이에 창노와 군무옥은 다른 밧줄을 이용해서 짐 위쪽에 있는 밧줄에 연결했다.
" 그럼 우리가 올라올 때와 같은 상황이란 말이군요."
혁련무극은 아래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 그럴 거네."
백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됐소. 내려주시오."
군무옥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백강은 짐을 아래로 내렸다. 두 개의 짐을 묶은 밧줄이 내려지고 짐 위쪽에는 군무옥이 매달렸다. 밧줄은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잠시 후 안개가 들어차 잇는 곳으로 짐과 군무옥이 모습을 감췄다.
" 어떠냐?"
백강은 아래쪽을 보며 소리쳐 물었다.
" 그대로요."
군무옥은 광장을 살피며 소리쳤다. 만일 기관이 원래대로 돌아갔다면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음양뢰라는 글이 새겨진 광장엔 안개가 들어차 있지 않았다.
" 오붓한 시간 보내시오, 대장."
군무옥은 싱긋 웃으며 두 개의 짐이 매달린 바로 위쪽을 잘라냈다. 밧줄이 잘려나가자 식량 주머니를 매단 짐은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쿠웅! 쿠웅!
꿀꺽!
군무옥은 긴장한 얼굴로 짐을 주시했다.
만일 저 짐이 바위를 뒤집고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면 연우강과 남궁운화는 굶어 죽고 말 것이다. 물론 지하로 다시 들어가겟지만 그때까지는 살아 있어야만 한다.
" 됐소!"
바위가 뒤집히며 짐이 아래로 떨어지자 군무옥은 활짝 웃으며 위를 향해 소리쳤다.
군무옥의 소리가 들려오자 백강은 밧줄을 끌어당겼다.
일행은 곧 음양뢰 위쪽으로 올라갔다.
" 대장이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거요.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쥐새끼들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야 하오."
군무옥은 허일구를 보았다.
" 우리가 납치됐던 곳으로부터 찾자는 말인가?"
" 무곡에도 입구가 있기는 한데 진입이 불가능하니까 그쪽에서 시작하는 수밖에 없잖겠소."
" 알았네. 당장 시작하겠네."
허일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날려 갔다.
" 어떻게 하시겠소?"
군무옥은 이번엔 혁련무극을 보았다.
" 난 받은 건 반드시 갚는 사람이네."
혁련무극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야수구벽신권을 운기했을 때 나타나는, 살기와 광기가 뒤섞인 야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