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78화 (178/232)

제 2장 천흡

쿠웅! 쿠웅!

열린 석문을 타고 뭔가가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열심히 이끼를 뜯어내고 있던 남궁운화는 고개를 돌려 연우강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 적이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음식이 도착한 모양입니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음식이라고요?"

" 조금 전에 그 녀석과 오 년 동안 한솥밥을 먹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 그러니까 조금 전 그 소리는......"

" 일단 가보도록 하죠."

연우강과 남궁운화는 처음 떨어졌던 장소로 갔다. 그곳에는 밧줄로 꽁꽁 묶인 짐 두 개가 떨어져 있었다.

" 저 장작은 뭐죠?"

남궁운화는 자루 바로 아래쪽에 묶인 나무를 가리키며 물었다. 불을 피울 때 사용하는 바싹 마른 장작이었다.

" 따뜻한 밤을 보내려면 불을 피워야 하잖아요."

" 그러니까 불을 피우라고 장작까지 보냈단 말이에요?"

" 오 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일단 챙기도록 하죠."

두 사람은 짐 아래쪽에 있는 돌을 빼내고 장작과 자루를 챙겨 광장으로 돌아왔다.

" 하지만 장작에 불을 피우는 건 무리일 것 같네요"

남궁운화는 장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삼매진화를 펼치기 위해서는 내공 운용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 그거야 방법이 있겠죠. 일단 식사부터 하세요."

연우강은 자루 하나를 풀었다. 말린 고기와 말린 과일 등이 잔뜩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것들 한 가운데에 술병 몇 개도 있었다.

연우강은 빙긋 웃으며 육포와 건포, 술 한 병을 꺼냈다.

" 아이고, 반가워라!"

남궁운화는 헤벌쭉 웃으며 육포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 행복해요."

그녀는 정신없이 육포를 씹어댔다.

그런 남궁운화를 보며 연우강이 육포를 잘게 찢었다. 그러고는 하나씩 입으로 집어넣고 육즙이 완전하게 빠져나올 때까지 천천히 씹었다.

"그렇게 먹으면 맛있어요?"

" 맛있는 게 아니라 습관이라서 그래요."

그는 술병 뚜껑을 따서 남궁운화에게 내밀었다.

" 술은 잘 못마시는데, 물은 없어요?"

" 군무옥 그 녀석이 원래 좀 짓굿거든요."

" 일부러 술만 집어넣었단 말이에요?"

" 아마도."

" 정신없이 바빴을 텐데 그런 생각을 다 하고 아무튼 대단한 사람이네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술병을 받아 입으로 가져갔다. 마실 게 술밖에 없는데 다른 방법이 없었다.

" 저기에 적힌 내용은 뭐였어요?"

술 냄새가 역한 듯 남궁운화는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끼를 뜯어내고 난 자리에 글이 씌어져 있었다.

" 양극 기운을 타고난 자식을 얻게 해달라는 간절한 바람을 적은 글이에요."

" 음양의 기운을 동시에 간직한 사람을 말하는 거군요?"

" 그런 체질을 양극신무지체라고 부르나 보죠?"

" 저기에 그렇게 적혀 있어요?"

남궁운화는 글씨가 적혀 있던 곳을 가리켰다.

" 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헷! 체질만 그렇게 만들면 뭐해. 머리가 안 따라주면 만사 도로아미타불인데."

남궁운화는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다 먹었어요?" " 네, 이제 몸 좀 돌려주세요."

" 몸을 돌려달라는 건?"

" 납치당하고 난 뒤로 세안 한번 못했어요."

" 그러니까 씻겠다는 말?"

" 따뜻한 물이 있는데 그냥 갈 순 없잖아요."

" 알았습니다."

연우강은 건포를 입 안에 밀어 넣고 몸을 돌렸다.

" 고개 돌리면 안 돼요."

남궁운화는 빠르게 옷을 벗었다. 허물을 벗듯 순식간에 옷을 벗은 그녀는 행여 연우강이 볼까 봐 허둥지둥 물속으로 들어갔다.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사망궤를 열어 옷가지와 세안제를 꺼내 연못가에 놓았다.

" 따뜻해요?"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보며 물었다.

" 사지가 노곤하게 풀리는 것 같아요. 연 공자도 들어오세요."

" 그래도 괜찮아요?"

" 피이!"

남궁운화는 입을 씰룩 비틀었다.

" 난 멋진 남자라고요. 여자가 싫어하는 건 절대 하지 않습니다."

연우강은 웃으며 옷을 벗었다. 그러고는 연못 안으로 들어갔다. 남궁운화의 말처럼 물은 약간 뜨겁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마자 온몸의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이쪽으로 오세요."

연우강은 연못가에 두었던 조두를 손바닥에 뿌려 물을 섞은 후 거품을 냈다.

" 등 밀어 주려고요?"

" 멋진 남자는 여자의 등을 잘 밀어줘야 하거든요."

" 알았어요."

남궁운화는 고개만 내놓은 채 연우강 앞으로 가서는 돌아앉았다.

연못은 원래부터 욕조로 만들어진 듯 앉으면 가슴이 약간 드러날 정도의 깊이였다. 하지만 키가 작은 남궁운화는 거의 목까지 잠겼다.

" 몸을 들어야 등을 밀죠."

" 아, 알았어요."

남궁운화는 얼굴을 붉히며 자세를 약간 높였다.

상체가 드러나자 연우강은 거품이 잔뜩 인 손바닥으로 그녀의 등을 밀었다. 연우강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남궁운화는 움찔움찔했다. 느닷없이 전에 화산 동굴에서 관계를 가졌던 장면이 떠올랐다.

" 나, 나갈 수 있을까요?"

남궁운화는 야릇한 느낌을 몰아내려고 아무 말이나 했다.

" 나가고 싶어요?"

연우강은 허리춤으로 손을 내리며 물었다. 그러고는 남궁운화의 허리를 잡고 가볍게 들어 올렸다.

" 그럼 나가지 않을 셈이에요?"

남궁운화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때 연우강의 손은 그녀의 엉덩이에 거품을 내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 비해 유달리 발달한 남궁운화의 엉덩이는 쳐다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였다. 게다가 연우강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남궁운화는 움찔움찔 떨었다.

연우강은 다시 조두를 손바닥 가득 부어 물과 섞어 거품을 냈다. 그러고는 이번엔 허벅지에 비누칠을 하기 시작했다.

" 난 남궁 소자와 함께라면 나가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 저, 정말요?"

연우강의 손이 다시 위로 올라오자 남궁운화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리고 눈동자에 열기가 어렸다.

" 그럼요. 남궁 소저 같은 예쁜 여자가 있는데, 굳이 나갈 이유가 없잖아요. 여기가 극락인데."

직접적인 자극이 아니더라도 상대방을 쾌감으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을 남궁운화는 처음 알았다. 연우강의 말이 빈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말을 듣자 머릿속이 아득해질 만큼 쾌감이 밀려온다.

" 여, 연 공자는 여자가 좋아하는 말만 골라서 잘하는 것 깉아요. 이, 이럴 때 보면 정말 바람둥이 같아요."

남궁운화는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연우강의 손길을 음미했다. 문득 그가 탁월한 연주 실력을 갖춘 악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하게 손을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다섯 손가락에 주는 힘이 전부 달랐다. 어떤 손가락은 가볍게, 어떤 손가락은 강하게, 그리고 어떤 손가락은 긁는 것처럼 움직인다. 그럴 때마다 몸은 소리를 토해낸다.

얕은 소리, 깊은 소리, 가벼운 소리, 무거운 소리, 맑은 소리, 탁한 소리 등 몸에서 시작된 소리는 입 밖으로 쉬지 않고 흘러나온다.

배를 쓰다듬던 손이 서서히 위로 올라오면서 소리는 더욱 커졌고, 숨결도 거칠어졌다. 가슴으로부터 격렬한 쾌감이 밀려오자 그녀는 홱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연우강의 다리에 걸터앉으며 격력하게 입술을 맞췄다.

제대로 씻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두 사람은 정신없이 서로를 탐했다. 손과 손이 넘나들며 서로의 몸에 깊은 화인을 남기고 입과 입은 뜨거운 열기를 불어넣었다.

알몸이 된다는 것은 곧 부끄러움 또한 벗어 던진다는 것과 같다는 듯 평소에는 꿈도 꾸지 못할 대담한 행동을 했을 뿐 아니라 눈을 빤히 뜬 채로 상대의 반응을 관찰하기도 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 열기가 어렸다.

열정적인 사랑속에 그렇게 밤은 깊어갔다.

연우강이 눈을 뜬 것은 다음 날 저녁 무렵이었다.

물론 지하에 있던 탓에 점심때인지 저녁때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실컷 잤다는 생각뿐이었다.

연우강은 옆을 돌아보았다.

커다란 가슴이 겨드랑이를 압박하고 있었다. 연우강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물렸다.

새로운 발견을 한 밤이라고 할까.

남궁운화가 그렇게 열정적인 여자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 화산에서 처음 관계를 가졌을 때의 그녀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 일어났어요?"

반짝 눈을 뜬 남궁운화는 연우강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 머리가 맑아진 걸 보면 우리 엄청나게 잔 것 같아요."

" 그런가 봐야. 피곤이 말끔하게 풀렸어요."

남궁운화는 활짝 웃었다.

참으로 묘했다. 음양뢰라는 글이 새겨진 광장에서도 거의 잠을 자지 못했고, 먹는 것도 부실했다. 그런 상황에서 간밤에는 땀이 홍건하게 흐를 정도로 격렬한 관계를 가졌다. 그런데 전혀 피곤하지 않다. 아니 피곤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날아갈 듯 상쾌했다.

이래서 남녀가 혼인을 하고 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한숨 더 잘래요, 아니면 일어날래요?"

" 일어나야 할 일도 없잖아요."

남궁운화는 연우강의 허벅지 위에 한쪽 다리를 올리며 말했다.

" 그럼 한숨 더?"

" 네."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실컷 자고 난 다음이라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한 시진가량 흐른 뒤 두 사람은 옷을 입고 자루에서 음식을 꺼내 사망궤 안으로 넣을 수 있을 만큼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그곳을 나섰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길은 전부 동굴 길로 이루어져 있었다. 길은 구불구불했고, 방향이 바뀔 때마다 석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연우강은 사망마비 하나를 꺼내 방향이 바뀌는 곳마다 표시를 했다.

그렇게 한 식경 정도 걸었을까. 지금까지와는 달리 문양과 글이 새겨진 석문이 나타났다.

천로.

석문 중앙에 씌어진 글이었다. 그 글 역시 전서체였다.

" 천로라고 씌여 있네요."

" 무슨 뜻일까요?"

남궁운화는 석문을 보며 물었다.

" 무인에게 하늘은 곧 천하제일인을 의미하잖아요."

" 천하제일인으로 가는 길이라는 뜻이군요."

" 그럴 거예요."

" 여긴 우리가 첫 손님이 아닌 것 같은데요?"

남궁운화는 아래쪽을 가리켰다. 지금까지 왔던 곳과는 달리 석문이 열린 흔적이 남아 잇엇다.

" 어쩌면 밖으로 나가는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석문을 밀었다.

" 피이! 어제는 나가기 싫다고 해놓곤."

남궁운화는 연우강을 흘겨보았다.

"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어요. 아니 전보다 더 나가기 싫어졌다고요."

연우강은 문을 밀던 손에서 힘을 뺐다.

" 왜요?"

" 그런 멋진 밤은 난생처음이었거든요. 매일매일 그런 밤이 기다리고 있는데 나가고 싶다면 말이 안 되잖아요."

" 지금 저 놀리는 거죠?"

남궁운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 놀릴 이유가 없잖아요."

" 놀리는 거면서."

" 아주 좋다는 말입니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남궁운화의 엉덩이를 슬쩍 쓰다듬었다.

" 엉큼해요."

남궁운화는 다시 연우강을 흘겨보았다. 하지만 연우강의 손을 떼어내지 않았다. 그녀는 연우강에게 엉덩이를 맡긴 채 석문을 밀었다. 심검 고수가 내공을 운용할 수 없다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마라천력을 펼칠 수 있는 연우강이 가장 유리하다. 설사 석문 건너편에 적이 있다고 해도 겁 먹을 이유가 없었다.

석문이 열리고 아래로 나 있는 계단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끝에는 세 개의 석문이 나란히 서 있었다.

" 여기도 글이 있네요?"

" 왼편 석문의 글은 천동, 오른편은 지동, 중앙에 있는 석문의 글은 양극동이네요."

" 그럼 여기가?"

남궁운화는 연우강을 보았다.

" 음양지의 중심이죠."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극동이란 글이 적힌 가운데 석문을 밀었다. 석문은 소리없이 열렸다.

" 얼레?"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단순히 동굴로 알았던 안쪽은 갖가지 가재도구가 비치된 가정집과 비슷했다. 침대, 책장, 탁자, 식탁, 의자, 장식장들이 배치돼 있었는데, 재질은 전부가 돌이었다.

" 특이한 돌이네."

연우강은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양극동을 만든 석재는 단순한 돌이 아니었다. 벽부터 시작하여 가재도는 물론 바닥까지도 특이한 기운을 내포하고 잇었다. 그 기운은 다름 아닌 음양의 기운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중앙을 중심으로 왼편은 뜨거운 기운, 오른쪽은 차가운 기운으로 나뉘어 있었다.

" 저기......."

남궁운화가 중앙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커다란 석관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석관도 특이했다. 절반은 하얗게 서리가 맺혀 있고, 나머지 절반은 수증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석관 또한 내부 기운처럼 절반은 양기가 흐르고 나머지 절반은 음기가 흘렀다.

" 설마 이 석재들은?"

남궁운화는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득 어린 시설 보았던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 이런 돌에 대해 들어봤어요?"

" 들은 적은 없지만 책에서 본 기억은 있어요."

" 어떤 돌인데요?"

연우강은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 음양천반석이라고 나와 있었어요."

남궁운화는 기억을 더듬었다.

음양천반석.

그것은 전설에 등장하는 돌이라고 하였다. 음기와 양기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돌인데, 그 돌의 기운을 흡수하게 되면 초극 고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남궁운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음양천반석의 기운을 일컬어 음양쌍극기라고 하는데 금강불괴지신도 부술 수 있다고 했어요."

" 무공이 아니고 단순한 기운만으로도 금강불괴지신을 부술 수 있다고요?"

"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적어 놓은 책이었어요."

" 믿거나 말거나란 말이죠?"

" 네."

" 음양쌍극기가 금강불괴지신을 부순다는 건 말이 안 될지 모르지만 음양천반석만은 확실한 것 같네요."

연우강은 가운데 석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석관은 침대를 연상케 할 정도로 상당히 컸다.

석관 앞에 멈춰 선 연우강은 안쪽을 보았다.

" .........?"

일순 그는 말을 잃었다.

석관 안쪽에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누워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잘 아는 사람이었다.

" 여기서 뭐 하십니까?"

놀랍게도 석관에 누워 있는 사람은 천마 제석강이었다.

" 넌 웬일이냐?"

눈을 번쩍 뜬 제석강은 되물었다.

" 질문은 제가 먼저 했습니다. 도대체 여기서......."

말을 하던 연우강의 눈이 점점 커졌다.

" 지금 제가 본 게 맞습니까?"

연우강은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이곳이 음양지고, 설사 무한대의 공력이 있다고 해도 운용할 수 없다. 그런 사정은 천마 제석강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천마 제석강은 내공을 운용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니라 아예 없었다.

" 여기에 있던 걸 말하는 게냐?"

제석강은 단전을 가리켰다.

" 네."

" 줘 버렸다."

" 줘버렸다고요?"

더욱 황당한 말이었다. 정확하게 몇 갑자가 나갈지 모르지만 강호 무림에서 가장 강한 내공을 지닌 사람이 제석강이다.

그런데 그 내공을 전부 줘버렸다니.

아니 그의 내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그것도 의문이다.

내공이란 전이를 해준다고 해서 전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릇에도 크기가 있는 것처럼 단전도 크기가 있고, 일정 양 이상의 내공을 담을 수가 없다.

그 이상을 담으려고 하면 자칫 내공이 폭주하여 몸이 폭발해 버리고 만다. 하물며 보통 사람도 아니고 천마가 아닌가. 그런데 그는 내공을 전부 줘버렸단다.

" 그게 가능해요?"

연우강은 다시 물었다.

" 기쁜 얼굴로 뛰어나가더구나."

" 끄응!"

연우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천마 제석강의 내공을 전부 받아들이고 아직 살아 있다면 그는 정말 고금제일인이 분명하다.

" 누굽니까?"

연우강이 물었다.

" 실패한 천년마인이다."

" 그러니까 그 천년마인이 누구냐고요."

" 잠마 희수연."

" 맙소사. 혹시.......?"

너무 놀라 입이 절로 벌어졌다.

" 그녀의 본명은 모용수연이다. 양극신무지체를 원했던 부모님들 때문에 음양인이 돼야 했던 불행한 여자고."

" 그녀는 어디로 간 겁니까?"

" 그건 나도 모른다. 내가 모든 내공을 주자 웃으면서 떠났다. "

" 실패한 천년마인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실패한 천년마인은 의지가 없기에 하는 말이었다.

누군가 조종하지 않으면 그녀가 이곳을 떠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렇지."

제석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실패한 천년마인이 제 마음대로 떠날 수 있습니까?"

" 무음마소가 있으면 천년마인을 부릴 수 있다."

" 그건 누구에게 있는데요?"

" 유에게 줬다."

" 유 그놈이 모용세가의 가주라는 걸 몰랐어요?"

" 모용세가의 가주였다고?"

" 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맹랑한 놈이구나."

제석강은 피식 웃었다.

" 맹랑한 정도가 아니라 무림을 피로 물들일 놈입니다."

" 무림이 걱정되느냐?"

" 제가 무림을 걱정할 이유가 없잖아요."

" 하긴 네 녀석이 무림인을 걱정한다는 자체가 모순이지. 그럼 뭐가 문제냐?"

" 그놈의 표적이 담대만승이 아니라 저라는 게 문제죠."

" 그러니까 유가 널 없애려고.... 가만, 그러고 보니 네가 여기 웬일이냐?"

이곳은 종남산 무곡의 지하고 패천 무인들 말고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마음에 대화를 나눴지만 여긴 연우강이 잇을 자리가 아니었다.

" 지금 패천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세요?"

"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

" 여긴 언제 내려왔습니까?"

" 이곳에 뭔가 있다며 조사해 달라는 말을 듣고 내려왔으니까.....상당히 됐을 거야."

" 조사해 달라고 했어요?"

" 유 그녀석이 그러더구나. 이곳이 음양지 같은데 안에 뭔가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내려왔다가 수연을 발견했다."

" 유 그놈에게 당한 거네요.“

“ 당했거나 말거나 난 아주 좋다.”

“ 아무튼 그놈은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어 놓고 떠났습니다.”

“ 지옥으로 만들어?”

“ 그러니까....”

연우강은 그간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 그럼 패천은 끝장났다고 봐야 하는 거냐?”

“ 패천이 끝장났다고 봐야 하는 게 아니라 모용세가의 숨겨진 힘이 패천을 버려도 상관없을 정도로 대단하다고 봐야 합니다.”

“ 그럼?”

“ 그런 그들에게 형님은 천마와 잠마의 내공을 지닌 고금제일 고수를 선물로 보낸 게 됐고요.”

“ 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 제가 무슨 수로 천마와 잠마의 내공을 지닌 고수를 이깁니까?”

“ 못 이겨?”

“ 잠마는 일천오백 년 전에도 최강 고수였잖아요.”

“ 그럼 너도 수연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리면 되잖아.”

“ 음양쌍극기를 말하는 겁니까?”

“ 네가 그녀와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가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 음양쌍극기를 몸 안으로 끌어들여 내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 같은데 방법이 있어요?”

“ 내가 모르는 건 하늘도 모른다. 녀석아. 앉아라.”

제석강은 웃으며 앞을 가리켰다.

연우강과 남궁운화는 제석강 앞에 정좌했다.

“ 지금부터 내가 구술할 무공은 부부가 아니면 익힐 수 없는 무공인데, 어떠냐?”

“ 상관없으니까 불러주세요.”

“ 상관없다고?”

“ 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도동놈!”

제석강은 연우강을 빤히 보았다.

“ 무슨 소립니까?”

“ 저 아이는 아무리 봐도 어린아이 같은데, 아니냐?”

“ 남의 정인을 가로챈 분이 할 소린 아닌 것 같네요.”

“ 내가 남의 정인을 가로챘다는 거냐?”

“ 잠마 희수연은 제 사부인 가립하 그분의 정인이었잖아요. 희수연에게 실연당하고 사막으로 가서는 쓸쓸하게 죽었단 말입니다.”

“ 실연당한 건 가립하가 아니라 수연이었어. 이놈아. 그놈은 말로만 수연을 사랑한다고 했을 뿐이야. 수연이 음양인이란 사실을 알고는 멀리했어.”

“ 멀리한 게 아니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겠죠.”

“ 생각할 시간이 왜 필요한데?”

“ 여자로 알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남자로 변했는데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건 당연한 거잖아요.”

“ 그럼 가립하 그놈은 수연이란 사람을 사랑한게 아니라 수연의 성기를 사랑한 모양이구나.”

“ 서, 성기라고요?”

“ 수연에게서 바뀐 거라고는 그것밖에 없잖느냐. 게다가 수연은 속임수를 쓴 것도 아니고, 불구와 같을 뿐이야. 그런데 그놈은 그걸 인정하지 못했지. 수연이 떠난 건 당연했던 거야. 이놈아.”

“ 끄응!”

연우강은 할 말이 없었다.

“ 사랑은 조건없이 모든 걸 주는 거야. 주는데 이건 이렇게 해야 하고, 저건 저렇게 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이 붙으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냐, 사랑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거고 변치 않는 거야.”

제석강은 피식 웃으며 구결을 읊었다.

“.........!”

한참 동안 구결을 듣던 연우강이 고개를 갸웃했다.

비단 연우강뿐만이 아니었다. 남궁운화 또한 처음엔 고개를 갸웃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놀랍게도 제석강이 읊는 구결은 온갖 낯 뜨거운 자세로 관계를 가지는 색공이었던 것이다.

“ 색공 같아서 놀랐느냐?”

두 사람의 내심을 눈치챈 제석강이 빙그레 웃었다.

“ 색공 비슷한 게 아니고 진짜 색공 아니에요?”

연우강이 말을 받았다.

“ 내가 너희들에게 색공을 가르쳐서 뭐 하게?”

“ 색공이 아니라는 거예요?”

“ 도교의 방중술이다, 이놈아.”

“ 방중술?”

“ 천지교태음양대법, 대라합환음양대법을 합쳐서 만든 운우지정공이란 무공이다.”

“ 킥!”

남궁운화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운우지정은 남녀관계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공 자만 붙여서 무공이라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 남궁 소저와 절 신선으로 만들 참입니까?”

“ 널 신선으로 만들면 내 밥은 누가 책임지는데?”

“ 그럼 뭡니까?”

“ 이곳에 있은 음양쌍극기는 음양인이 아니면 얻을 수 없다는 건 아느냐?”

“ 알고 있습니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하지만 음기와 양기를 따로 받아들일 수 있다.”

“ 그러니까 남궁 소저는 음기를 받아들이고, 전 양기를 받아들인단 말인가요?”

“ 음기와 양기를 받아들인 상태에서 운우지정공으로 두 기운을 하나로 합치면 음양쌍극기를 얻을 수 있다.”

“ 그런 간단한 방법이 있었네요.”

“ 천마 제석강이 심혈을 기울여 창안한 걸 간단하다고 한 녀석은 이 세상에 너밖에 없을 거다.”

제석강은 연우강을 쏘아보았다.

희수연을 보내고 관에 누워 생각해 낸 방법이다. 물론 연우강의 말처럼 이론은 간단하다. 하지만 음양합일을 통해 서로의 기운을 합치는 과정이나, 음기와 양기를 받아들이는 건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식음을 전폐하고 며칠 동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간신히 창안한 무공이다. 그런데 간단하다니.

“ 속이야 어찌됐든 겉모습은 남궁 소저와 제가 음기와 양기를 흡수해서 서로 나누는 거잖습니까?”

“ 그게 간단하면 무공을 익힌 놈들은 전부 신선이 되게?”

제석강은 피식 웃으며 무공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무공 구결은 상당히 길었다.

‘ 맙소사. 이건.......?’

한 번의 구술이 끝나고, 눈을 감고 구결을 음미하던 연우강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러고는 제석강을 보았다.

놀랍게도 제석강이 불러주는 구결은 어떤 기운을 단순하게 끌어들이는 방버이 아니라, 끌어들인 기운을 곧바로 내공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이었다. 외부에서 끌어들인 기운을 곧바로 내공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무공의 마지막 단계인 공령을 의미한다.

“ 알아차린 모양이구나.”

“ 끄응! 영원히 넘을 수 없는 벽이네.”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에 제석강은 공령의 경지에 올라 있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그는 공령의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다.

엄청난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 당연하지. 이놈아. 일천오백 년 전에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고, 천하의 모든 무공이 이 안에 있는데, 그런 사람을 넘어보겠다고 하는 놈이 바보지.”

제석강은 제 머리를 툭툭 두들겼다. 그러고는 다시 무공 구결을 읊었다.

연우강과 남궁운화가 구결을 완벽하게 암기하자 이번에는 설명이 이어졌다.

“ 천흡이라 이름지었다. 운화 넌 지동에서 무공을 익히고, 넌 천동에서 익혀라. 10성을 성취하면 이곳으로 와서 운우지정공을 펼치면 될 게다.”

설명을 끝낸 제석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가실 겁니까?”

따라 일어난 연우강은 사망궤를 열어 전표 뭉치를 꺼내 내밀었다.

“ 뭐냐?”

“ 늙고 돈 없는 것처럼 서러운 게 없거든요. 드시고 싶은 거 마음껏 드시라고 드리는 겁니다.”

“ 어째 죽기 전에 마음껏 쓰라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 그런 것도 없지 않습니다.”

“ 하여간 넌 말을 해도. 아무튼 수고.. 아니구나. 넌 수고할 일이 없겠구나. 수고는 제수씨가 하겠네.”

제석강은 남궁운화를 빤히 보았다.

“ 네? 네!”

제수씨란 말에 남궁운화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설마 천마 제석강이 자신에게 제수씨라고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 지동에 보면 먹을 거 잔뜩 있습니다. 제수씨. 그럼 수고하세요.”

제석강은 빙그레 웃으며 몸을 돌렸다.

“ 아, 알았어요.”

남궁운화는 어정쩡하게 선 채로 제석강을 배웅했다.

“ 휴우!”

제석강이 나가자 남궁운화는 한숨을 재쉬었다.

“ 어색해요?”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보며 물었다.

“ 일천오백 살이나 차이가 나잖아요.”

남궁운화는 배시시 웃었다.

“ 형님을 볼 땐 나이 생각을 안 하는 게 좋아요. 그보다 형님이 불러준 건 다 이해했어요?”

“ 이해는 한 것 같은데......”

남궁운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 이상해요?”

“ 이상한 게 아니라 구결이......”

아무리 생각해도 제석강이 구술한 내용은 공령의 경지를 풀어 놓은 것 같다. 하지만 공령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었다. 공령의 경지에 대해 언급을 하려면 최소한 심검은 성취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은 심검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공평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공령일지도 모른다는 거죠?‘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 설마......”

“ 맞아요. 형님이 구술해 준 내용에는 공령으로 가는 길이 들어 있어요.”

“ 정말이에요?”

남궁운화는 다시 물었다.

“ 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노력하는 자를 따르지 못한다는 말을 남궁운화를 보면서 실감하는 중이다.

남궁운화는 절대 요령을 피우지 않는다. 지름길로 갈 생각도 하지 않고, 건너뛸 생각도 하지 않는다. 오직 가르쳐 준 길로만 고집스럽게 나아간다.

그 고집으로 인해 처음엔 무공이 거의 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무공을 익히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설사 공령의 구결을 불러준다고 해도 그 구결이 공령을 뜻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무공 명칭처럼 외부의 기운을 흡수하는 구결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남궁운화는 대번에 그 구결 속에 공령으로 가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언젠가는 그 길로 갈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남궁운화는 공령 또한 꾸준함으로 얻어낼 것이다.

“ 그럼 그분은 내공이 없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요.”

“ 형님을 걱정한 거예요?”

“ 그분은 고금제일인이잖아요. 내공이 없으면 별것도 아닌 자들에게 모욕을 당할 수도 있고요.”

“ 아무튼 남궁 소저는 너무 착해서 탈이에요.”

“ 착하기는 뭐가 착하다고 그래요. 일단 식사부터 하실래요?”

“ 그렇게 하죠.”

두 사람은 지동으로 이동했다. 음식은 지동 한편 구석 커다란 궤짝 안에 들어 있었다. 육포와 건포가 대부분이었지만 제대로 식사조차 못한 두 사람에게는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은 허겁지겁 음식을 입 안으로 밀어넣엇다.

그러고는 연우강은 천동으로 건너갔다.

혼자 남은 남궁운화는 동굴을 살폈다.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지동은 온통 음한지기로 가득 들어차 있고, 중앙에는 음양천반석으로 만들어진 좌대가 놓여 있었다. 남궁운화는 그곳으로 가 앉았다.

서늘한 기운이 엉덩이를 타고 올라온다.

‘ 고마워요.’

남궁운화는 연우강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이미 심검을 성취한 극강의 고수라 음양쌍극기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은 아니다. 얻어도, 얻지 못해도 그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흡을 익히려고 한 것은 바로.....

‘ 저 때문이라는 거 알고 있어요.’

남궁운화는 지그시 눈을 감고 천흡의 구결을 읊조렸다. 몇 번에 걸쳐 설명을 들은 터라 운용은 어렵지 않았다. 천흡의 구결을 읊고 단점을 열자마자 차가운 기운이 몸 내부로 쏟아져 들어왔다.

남궁운화는 안으로 들어온 기운으로 의식을 집중했다. 그 기운은 오로지 기해혈을 타고 들어왔다.

완전한 공령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혈도를 타고 들어와야 할 터였다. 하지만 그 경지는 아직 요원하다. 심검을 익히고 난 다음에야 생각할 수 있다.

‘ 지금은 음양쌍극기를 먼저 얻어야 해.’

남궁운화는 안으로 들어온 기운을 이용해서 운기행공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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