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잊힌 자들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밝혀낸 비밀에 대한 사후처리다. 그 비밀이 밝혀내려고 했던 목적과 부합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큰 부상과 승진이라는 달콤한 과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밝혀낸 비밀이 목적과 다를 뿐 아니라 자신들의 발목을 잡을 때다.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는 남철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 사막 폭풍 작전이 시작되자 저은 첨목장군 양성일과 북로정군을 없애기 위해 함정을 팠습니다. 그 함정을 파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적장의 딸과 사귀고 있던 주무상이었습니다. 주무상은 자신이 포로로 잡힌 것처럼 꾸며 그 정보를 북로정군에 넘겼으며 첨목장군 양성일은 주무상과 상관없이 적을 섬멸할 작전을 세웁니다.
그때 연우강은 주무상을 구하기 위해 사막으로 들어갔고, 흑랑기 일천이백 명은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 연우강을 따라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막으로 들어간 연우강은 새위귀막의 최정예인 혈도부대 일천 명을 혼자 유인해 가고 나머지는 적군의 본진을 쳤습니다.
그 와중에 흑랑기 일천이백 명이 전사했지만 주무상을 구출돼 부중응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동료를 배신했다는 자괴감에 견디지 못한 주무상은 연우강을 부른 다음 그가 오기 전에 스스로 주화입마에 들어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주화입마에 든 주무상을 발견한 연우강은 고통을 없애 주기 위해 주무상의 목을 쳤습니다.
결론.
연우강은 단 한 번의 패배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하들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최고의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최고의 영웅이었습니다.
급기야 남철진은 부들부들 떨었다.
보고서대로라면 연우강은 주무상을 죽인 살인자가아니라 남경왕 주진무를 살려준 은인이다. 그런 사람을 이제껏 살인자로 몰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연우강을 살인자로 몰아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 사람 정도 살인자로 만들어 파멸시키는 건 일도 아니니까. 문제는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일이 주무상 살해 사건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주무상이 억울하게 살해당한 게 아니고 배신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주진무는 물론이고 금의위도 끝장나고 만다.
‘ 막아야 해.’
남철진은 탁자 위를 보았다. 금밀사의 관인이 찍힌 보고서는 전부 네 부였다.
“ 정수!”
그는 호위 관정수를 불렀다.
“ 부르셨습니까?”
밖에 있던 관정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일을 해줘야겠다.]
[하명하십시오.]
남철진의 말이 전음으로 바뀌자 관정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 연우강 사건에 대해 조사한 자들은 전부 몇 명이냐?]
[ 서른 다섯 명입니다.]
[ 정리해라.]
[ 정리라 하심은....]
[ 이 사건이 새어 나가면 우린 파멸한다.]
남철진은 보고서를 들어올렸다.
[ 남경왕 전하까지 포함입니까?]
[ 그렇다. ]
[ 알겠습니다.]
관정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 난 잠시 나갔다 오마.]
관정수가 나가자 남철진은 내실에 있는 비밀 통로를 통해 건물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그의 손에는 여전히 조금 전 받은 보고서가 들려 있다. 남철진은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단순한 보고서가 아니었다. 자칫 발을 잘못 담그면 곧바로 지옥으로 들어가는 엄청난 파급력을 가진 보고서인 것이다.
‘ 어떻게 해야 하나.......’
남철진은 갈등했다.
지금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직속 상관인 공오인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경왕 주진무를 직접 찾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둘 다 지극히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 일단은 살아야 하니까.’
이내 결심을 굳힌 듯 남철진은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려 갔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다음날 삼경 무렵. 남경왕 주진무 처소였다.
“ 그동안 조사했던 것에 대해 결과가 나왔다고 했느냐?”
자다가 일어난 듯 주진무의 얼굴엔 짜증이 배어 있었다.
“ 그렇습니다. 전하.”
남철진은 고개를 숙였다.
“ 결과가 나왔으면 공 영반에게 보고를 하면 될 것이지.....”
“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 이 사건을 조사했던 서른다섯 명은 전부 입을 막았습니다.”
주진무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서른 다섯 명의 입을 막았다는 건 곧 살인멸구를 했다는 뜻이다.
“ 심..... 각한 내용인가 보구나.”
“ 그렇습니다. 전하.”
남철진은 재차 소리쳤다.
“ 보고서는 어디 있느냐?”
“ 그 전에 한 가지 약속해 주십시오.”
“ 감히!”
어둠 속에서 차가운 기운이 쏘아져나오더니 남철진의 등을 강타했다. 그것은 주진무를 지키는 천해장군 철리목이 쏘아낸 기운이었다.
“ 크윽!”
남철진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머리를 조아렸다.
“ 죽일 놈!”
“ 그만 하게. 천해.”
주진무는 손을 들어 철리목을 말렸다.
그런 다음 다시 남철진을 보며 입을 열었다.
“ 무엇을 약속해 달라는 말이냐?”
“ 소신의 목숨을 살려 주신다는 약속을 해주십시오.”
“ 네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내용이란 말이구나.”
“ 소신이 직속상관인 공오인을 찾아가지 않고 이곳으로 직접 온 것 또한 살기 위해섭니다.”
“ 좋다. 살려주겠다고 약속하마.”
“ 감사합니다. 전하.”
남철진은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보고서를 꺼낸 다음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주진무에게 내밀었다.
“ 금의위 정보원들만 사용하는 비어로 만들어진 보고서를 해석한 겁니다.”
“ 그럼 이건 원본이 아니라는 말이구나!”
“ 주진무는 남철진을 보았다.
“ 원본에는 금밀사 관인이 찍혀 있습니다.”
“ 만일 네가 죽으면 원본은 다른 누군가에게로 들어간다는 말이렷다.”
“ 황공하옵니다. 전하.”
남철진은 이마를 다시 바닥에 대었다.
“ 그럴 만한 내용인지 보자꾸나.”
주진무는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담담했던 그의 얼굴이 이내 굳어지고, 급기야는 잔뜩 일그러졌다. 남철진이 그랬던 것처럼 주진무는 부들부들 떨었다. 주진무의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주진무는 고개를 들어 남철진을 보았다.
“ 사실이냐?”
사실인지 아닌지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었다. 남철진은 보고서를 가져오면서 목숨을 걸었다. 그런 보고서가 거짓일 리가 없을 터였다. 다만 믿기지가 않았을 뿐이었다.
“ 황공하옵니다. 전하.”
남철진은 고개를 조아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일어나거라.”
주진무는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남철진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이마와 등은 땀으로 홍건하게 젖어 있었다.
“ 앉아라!”
주진무는 건너편 의자를 가리켰다.
“ 아니옵니다. 전하. 전 이곳이 편합니다.”
“ 두 번 말하지 않게 하라, 진무사.”
“ 황공하옵니다. 전하.”
남철진은 얼른 자리에 앉았다.
“ 영반이 되고 싶은 게냐?”
주진무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아, 아니옵니다. 전하. 소신은 지금 자리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남철진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 그럼 영반 자리를 원하지 않으면서 이걸 직접 가져왔단 말이냐?”
주진무는 보고서를 가리켰다.
“ 보고서를 직접 들고 온 건 한 명이라도 아는 사람이 적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전하.”
남철진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또다시 시험대에 오른 기분이었다. 보고서 원본을 따로 숨겨두긴 했지만 자칫 잘못하면 이곳에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 좋다. 네 충절을 인정하겠다.”
“ 황공하옵니다. 전하.”
“ 이 보고서가 알려지면 금의위는 물론이고 나도 파멸한다는 걸 알고 있느냐?”
“ 알고 있습니다. 전하.”
“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 그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의 입을 막아야 합니다.”
“ 알고 있는 자들은 누구누구일 거라고 생각하느냐?”
“ 양성일과 연우강입니다.”
“ 양성일은 도독동지고, 연우강은 대야벌 벌주도 없애지 못했던 초강자다. 그런 자들을 없앨 수 있을 거라고 보느냐?”
“ 양성일은 동창과 관계가 있는 살수를 보내 없애면 됩니다.”
“ 그런 자가 있느냐?”
“ 흑살대 대원 중 이십 명은 금의위에서 들여보낸 자들입니다.”
흑살대는 동창에서 운용하는 살수조직의 이름이었다.
“ 양성일을 죽이되 동창 손에 죽은 걸로 한다는 말이구나.”
“ 그렇습니다. 전하.”
“ 하면 연우강은 어떻게 처리하겠느냐?”
“ 놈은 구룡천군에게 맡기면 될 줄 아옵니다.”
“ 구룡천군까지 알고 있었느냐?”
주진무는 깜짝 놀랐다.
구룡천군의 역사는 홍무제로 거슬러올라간다.
대야벌을 견제하는 데 황궐만으로 부족하다고 판단한 홍무제는 은밀하게 무인들을 모아 세력을 만들었다.
그런 홍무제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자들이 바로 구파일방이었다. 금분세수를 하여 무림에서 은퇴하거나, 사제나 제자에게 자리를 물려준 자들 중 원하는 무인들만 용림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들어왔다. 홍무제는 그들을 구룡천군이라 칭하고 북경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극비사항이었다. 그런데 남철진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전하께서 구룡천군의 군주란 사실은, 연우강 사건을 조사하면서 알았습니다.”
“ 영반에게는 아직 보고하지 않았단 말이렷다.”
“ 영반이나 동창 제독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보고하지 않았고, 전하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엔 보고를 올릴 생각도 없었습니다.”
“ 눈치가 빠른 녀석이구나. 좋다. 어차피 알려지겠지만 그 일 또한 당분간 비밀로 해라.”
“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하.”
“ 연우강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 대야벌에서 쫓겨나 도망치는 중입니다.”
“ 대야벌에서 쫓겨났다는 말이냐?”
주진무는 깜짝 놀라 물었다.
“ 그렇습니다. 전하.”
“ 자세하게 말해 보거라.”
“ 그러니까......”
남철진은 그동안 올라온 보고서를 바탕으로 연우강과 그의 가족이 처한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대야벌의 육 할 이상 무너졌다는 말이냐?”
“ 그렇습니다. 연우강의 활약으로 인해 대야벌의 전력은 밀천이나 팔황새에 비해 특별히 나을 게 없는 상태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엔 대야벌, 밀천, 팔황새는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 걸로 보느냐?”
“ 전쟁의 결과를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 전하께 구룡천군이 있기 때문입니다.”
“ 구룡천군을 이용해서 무림을 장악하란 말이냐?”
“ 과거엔 대야벌 때문에 불가능했지만, 세 세력이 전쟁을 치르고 난 다음이라면 다릅니다. 구파일방이 하나로 합쳐진 세력이면 대야벌을 대신할 수 있을 겁니다.”
“ 그러니까 이젠 연우강이 없어도 문제가 없다는 말이구나.”
“ 그렇습니다. 전하.”
남철진은 고개를 숙였다.
“ 그랬단 말이지.....”
주진무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물렸다.
무림에 대한 그림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잠시 그 그림을 음미하던 주진무는 남철진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 그놈의 가족은 어떻게 됐느냐?”
“ 머잖아 그들 또한 직접 보게 될 것입니다. 전하.”
“ 좋다. 별도의 명이 있을 때까지 모든 보고는 내게 직접 올리도록 해라. 그리고 양성일에 대한 건도 바로 시작하도록 하고.”
“ 알겠습니다. 전하.”
남철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나는 남철진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물려 있었다. 그것은 다름 승자의 미소였다.
사실 남철진에게 이번 일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물론 영반을 찾아간다고 해도 살인멸구를 당할 가능성이 높아 어쩔 수 없었지만, 남경왕의 신임을 얻어낼 줄은 생각지 못했다.
직속상관인 공오인을 건너뛰고 직접 보고하라는 말. 그건 곧 출세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한 거나 다름없었다. 위험이 크면 얻는 것도 크다는 옛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 물러가겠습니다. 전하.”
“ 비밀 통로로 안내해 줄 것이다. 앞으로 그곳으로 다니도록 해라.”
“ 감사합니다. 전하.”
남철진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남철진이 사라자지 어둠 속에서 네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주진무를 호위하는 사장군이었다.
“ 맹랑한 놈입니다. 전하.”
천해장군 철리목이 나직하게 말했다.
“ 저 나이에 진무사 자리에 오른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네.”
“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보십니까?”
“ 권력을 탐하는 놈들의 가장 큰 특징은 권력을 쥐고 있는 자를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거네. 남철진 그놈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날 배신하지 못하네.”
“ 그렇군요. 그런데......”
철리목은 말끝을 흐렸다.
“ 구룡천군에 대해 알고 싶은가?”
“ 그렇습니다.”
철리목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수십 년 동안 주진무를 모셨다. 하지만 구룡천군에 대하여 들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남철진으로부터 그러한 조직이 있다는 말을 듣자 섭섭하기 그지없었다.
“ 구룡천군은 내가 만든 조직이 아니라, 태조께서 만든 조직이네. 대야벌이 황실을 넘볼 때를 대비해 만든 조직이라 함부로 밝힐 수가 없었네. 만일 대야벌이 저렇듯 몰락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남철진을 죽여 입을 막았을 거네.”
“ 비밀로 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 이해해 주기 바라네.”
“ 알겠습니다. 전하.”
“ 황공하옵니다. 전하.”
네 사람은 고개를 숙였다.
“ 그건 그렇고, 대야벌, 밀천, 팔황새의 전쟁이 끝나면 강호 무림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주진무는 화제를 다시 강호 무림으로 돌렸다.
“ 만일 남철진의 말처럼 대야벌의 전력이 사 할밖에 남지 않았다면, 설사 어느 한 세력이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무림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 강호 무림이 무주공산으로 변한단 말이구먼.”
“ 그렇습니다. 전하. 무주공산인 곳은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잡니다.”
“ 구룡천군을 정식으로 출두시켜야 한다는 말이군.”
“ 그런데 구룡천군을 구성하고 있는 무인은 어떤 자들입니까?”
“ 구파일방에서 은퇴한 고수들이네. 전대 또는 전전대 장문인은 물론이고 장로들까지 망라돼 있네. 인원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개개인의 실력은 최강이네.”
“ 어떤 자들인지 궁금하군요.”
“ 곧 알게 될 거네.”
주진무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 아이, 참! 돌아버리겠네.”
우성연은 연신 머리를 벅벅 긁었다.
갑자기 올라온 보고서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던 탓이었다.
“ 도대체 사라지는 이유가 뭔데?”
우성연은 버럭 소리쳤다.
아침부터 그를 짜증나게 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계속해서 올라오는 실종에 대한 보고서였다.
“ 왜 설질을 내고 지랄이야?”
문이 벌컥 열리며 유설연이 안으로 들어왔다.
“ 마침 잘 왔어요, 언니.”
“ 이년아, 잘 온 게 아니고 이제 퇴청한 거여.”
요 위로 풀썩 드러누우며 유설연이 말했다. 그런 그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 많이 시달린 거예요?”
“ 말도 마라. 정력제란 정력제는 다 처먹었는지 밤새도록 그 짓을 해대는데......아예 사람 잡는다, 잡아.”
유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호호호! 그 덕분에 지금은 제독께서도 언니에게 쩔쩔매잖아요.”
“ 그래서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있잖아. 그런데 아침부터 웬 지랄이냐.”
유설연은 고개를 내밀어 수북하게 쌓인 종이를 보았다.
“ 이상한 정보가 올라오고 있어서 그래요.”
“ 이상한 정보?”
“ 언니가 부하를 시켜서 금밀사 대원들을 감시하라고 했잖아요.”
“ 그랬지.”
“ 그 금밀사 대원들이 떼거리로 실종됐어요.”
“ 떼거리면 몇 명인데?”
“ 사흘 사이에 서른 다섯 명이 사라졌어요.”
“ 서른다섯 명이 사라졌다고?”
유설연은 벌떡 일어났다.
“ 여기요.”
유설연이 일어나자 우성연이 보고서를 내밀었다.
유설연은 보고서를 꼼꼼히 살폈다.
“ 맙소사! 이놈들은?”
유설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왜 그러세요?”
“ 이 바보야. 이 녀석들 몰라?”
“ 누구를 말하는 건데요?”
“ 이놈 구야기 말이야.”
“ 구야기라고요?”
우성연은 유설연이 내민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 그래, 이것아.”
“ 구야기라면 우강 오라버니 사건을 조사하던 놈이잖아요.”
“ 우강 오라버니?”
유설연은 우성연을 흘겨보았다.
“ 그럼 형님이라고 불러요?”
“ 이년아, 우강은 너보다 나이가 적어.”
“ 오라버니라는 칭호는 나이와 상관없어요. 제가 보기에 오라버니 같으면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거라고요.”
우성연은 혀를 날름 내밀었다.
“ 올라가지도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 요년아.”
“ 흥! 올라가지 못할 나무인지 올라갈 나무인지는 두고 보면 알겠죠. 그보다 어떻게 된 것 같아요?”
우성연은 다시 보고서로 화제를 돌렸다.
“ 우강 일을 조사하던 밀사 서른다섯 명이 전부 실종됐다면, 죽었을 가능성이 높아.”
“ 그러니까 왜 죽었냐고요.”
“ 밀사를 죽이는 이유는 한가지 밖에 없잖아.”
“ 살인멸구라고요?”
“ 맞아.”
“ 뭘 감추기 위해 살인멸구를 한 거죠?”
“ 그 일 때문일 거야.”
“ 그 일이라면...... 그러니까 언니 생각은 금밀사에서 우강 오라버니의 사건에 대해 조사를 하다가 알려져서는 안 될 내용을 접했고, 입을 막기 위해 조사하던 대원들 모가지를 비틀어 버렸다는 거죠?”
“ 그게 아니라면 대원들이 떼로 사라질 이유가 없지.”
“ 그럼 엄청난 내용이겠네요?”
“ 이건 엄청난 정도가 아니라 주진무의 목을 틀어쥘 수 있는 건수야.”
“ 정말 그렇게 생까하세요?”
“ 주진무와 금의위에서 조사한 게 뭐지?”
“ 주무상을 죽인 사람이 우강 오라버니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개지랄을 했죠.”
“ 맞아, 그랬어. 그런데 갑자기 조사에 투입됐던 자들을 전부 죽여 버렸어. 왜 그랬을까? 어떤 결과가 나왔는데 부하들을 죽여 입을 막아야 했을까?”
“ 주진무에게 불리한 결과가 나왔으니까 그렇겠죠.”
“ 불리한 결과가 나왔다고 서른 명이 넘는 부하들을 없애진 않아. 그 정도를 없애려면....”
“ 이게 위험하다는 말이군요.”
우성연은 자기 머리를 툭 쳤다.
“ 맞아. 성연. 우리가 감시하고 있을 걸 뻔히 알면서도 그들을 지웠다는 건, 그 내용이 밝혀지면 주진무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뜻이야.”
“ 그러면 지금부터는 그 결과를 알아내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겠네요?”
“ 바로 그거야.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남철진 그 놈의 행적을 조사해야 하고, 그 다음엔 금밀사에서 만든 보고서 원본을 찾아내야 해.”
“ 알았어요. 어닌. 지금부터 모든 역량을 그 일에 집중하도록 할게요.”
“ 그래, 그럼 난 잘게.”
“ 목욕하고 주무세요.”
“ 냄새나?”
“ 박꽃 냄새가 진동해요.”
“ 끄응! 빌어먹을 영감탱이.”
유설연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 참! 우강인 지금 어딨지?”
욕실로 향하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 유설연이 물었다.
“ 종남산으로 들어간 다음 행적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어요.”
“ 그럼 종남산에서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말이네?”
“ 그런 것 같아요.”
“ 당분간 우강이 쪽은 접어두고 황실 쪽에 더 치중해. 아무래도 이쪽에서 일이 먼저 터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
“ 알았어요. 언니. 등 밀어드려요?”
“ 당연히 그래야지.”
유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욕실로 들어갔다.
*********
철리목은 놀란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를 비롯한 사장군이 주진무를 따라간 곳은 북경 북부에 위치한 산이다. 맑은 날보다 안개에 휩싸인 날이 더 많아, 산속에 잇으면 마치 꿈속을 거니는 듯하다고 해서 몽산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소나무 숲을 헤치고 올라가던 주진무는 좌우측 절벽으로 둘러싸인 계곡으로 들어갔다. 계곡 안쪽은 안개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 응?”
철리목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곳까지 오면서도 안개를 헤치고 왔다. 그런데 계곡 안쪽에 들어차 있는 안개는 지금까지 보았던 안개와 달랐다. 딱히 표현하기 힘들지만 부자연스럽다는 기분이 들었다.
“ 지금부터 내 발자국만 따라오게.”
주진무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진식이군요.”
“ 자네 정도 고수이면서 예민한 자가 아니면 진식이 있다는 것 자체를 알아차리지 못하네.”
다섯 명은 안개를 뚫고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수십 차례 방향을 바꾸고 동굴을 통과하고, 절벽을 오른 반 시진 후에야 확 트인 공간에 당도했다.
“ 세상에......”
철리목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방금 전까지 눅눅한 안개를 헤치고 왔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전경은 마치 다른 세상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마을 중앙을 관통하는 실개천 주변으로는 수양버들이 가지를 드리우고 있고, 그 가지들 사이로 팔각형 정자가 만들어져 있는데 정자 안쪽에는 신선 풍채를 가진 노인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 무릉도원이네.”
광해장군 율사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일행은 맨 앞에 보이는 정자를 향해 걸어갔다. 다섯 명이 들어왔지만 누구 한 명 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 이곳에 오신 지 얼마나 됐습니까?”
철리목은 주진무를 보며 물었다.
“ 구룡천패를 받을 때 이후 처음이네.”
“ 두 번째 방문이란 말입니까?”
“ 그렇네.”
다섯 사람은 어느새 첫 번째 정자 앞에 와 있었다.
찌르르!
“ 헉!”
철리목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에서 강력한 기운이 쏘아져 와 심장으로 파고들어 온 것이었다. 만일 그 기운이 적의 공격이었다면 벌써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 도대체 누가?’
그는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정자 안쪽을 살폈다. 그의 시선이 정자 안쪽 민머리 노인에게 멈췄다. 중인 듯한 노인은 백색 바둑돌을 들고 어디에 놓을지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아미타불!”
나직한 불호에 이어 노승이 고개를 돌려 주진무 일행을 보았다.
주진무 일행이 노승의 얼굴에서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은색 눈썹이었다.
“ 혹시......”
“ 아직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스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허허허! 이거 내가 복을 타고난 모양입니다. 요료대사. 설마 아직도 생존해 계실 줄은 몰랐소이다.”
“ 요, 요료대사란 말입니까?”
철리목은 경악했다.
은색의 눈썹 때문에 은불이란 별호로 더 많이 불렸고, 소림사 최강 무승이라고 알려진 요료대사가 이곳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요료대사가 이곳에 있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요료대사가 은불이라 불렸던 시기가 이 갑자, 즉 백이십 년 전이고, 이미 타계한 걸로 알려졌다는 사실이다. 죽었다고 알려진 사람을 보고 있는 셈이었다.
“ 아미타불! 소승뿐만 아니라 무당파의 창천진인도 살아 있고, 화산의 자허검신, 개방의 용왕개도 아직 살아 있소이다.”
“ 허! 정말로 무릉도원이네.”
철리목을 비롯한 사장군은 넋을 잃었다.
요료대사가 언급한 창천진인과 자하검신 그리고 용왕개 전부가 이 갑자 전에 활동했던 무인들이었던 것이다.
“ 하하하! 맞다. 여긴 무릉도원이다. 그런데 네 녀석은 누구냐?”
누더기를 걸친 노인 한 명이 껄껄 웃으며 정자 안쪽으로 들어왔다. 입고 있는 옷만 보아도 그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온갖 누더기로 온몸을 감싼 그는 개방 방주 출신인 용왕개였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용왕개를 향해 주진무는 고개를 조아렸다.
“ 20년 만이구나.”
용왕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응?’
철리목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마도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남경왕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했다. 아무리 나이를 먹었다고 해도 군왕인 남경왕에게 반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용왕개란 자는 거리낌 없이 반말을 했고, 남경왕은 어르신이라고 했다. 남경왕이 어르신이라고 부른다면 용왕개 또한 황ㄱ실 인물이라고 봐야 한다.
“ 그동안 남경에 있다가 이제야 복귀했습니다.”
“ 권력다툼에서 밀려났던 게냐?”
“ 그런 셈입니다.”
“ 하면 그 일도 하지 못했겠구나.”
“ 약간의 소득은 있었습니다.”
“ 어떤 소득 말이냐?”
“ 안정군왕 주인문이 주선엽이라는 아들을 봤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 지, 지금 주선엽이라고 했느냐?”
용왕개는 쫓기듯 물었다.
“ 그렇습니다. 어르신.”
“ 그, 그녀석이 인문의 아들이었다고?”
“ 이번에 밝혀진 사실입니다.”
주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주인문과 주선엽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며느리인 이지약의 보고서 때문이었다. 이지약이 올린 보고서에는 대야벌의 묵사 주선엽이 안정군왕 주인문의 친자라고 돼 있었다. 물론 주선엽이 주인무느이 친자라는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지만 황제는 거의 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런 연유로 주인문과 주선엽을 종친에 등재시키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 그 녀석이 인문의 아들이었단 말이지. 그 녀석이....”
용왕개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 왜 그러는가?”
옆에 있던 요료대사가 물었다.
“ 난 그 녀석이 몰락한 황실 종친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불쌍한 마음에 얻어맞고 살지말라고 몇 가지 무공을 가르쳐줬어. 형편없는 무공 몇 가지를......”
용왕개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아이와의 만남은 칠 일 동안의 짧은 인연이었다.
자금성에 볼일이 있어 갔을 때였다.
이미 황실을 떠난 상태고 집도 없었던 때라 객잔에 머물러야 했다. 그 객잔은 금루였는데 황실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머무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들 중에는 몰락한 황족도 있었다.
그곳에서 녀석을 보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름이 주선엽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금루에 머물면서 주씨 성을 가졌다면 황족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슬쩍 떠보니 짐작대로 녀석은 황족이었다. 다만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용왕개 또한 주선엽에게 아버지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아니 묻지 못했다.
황족이면서 북경에 집 한 채 없이 객잔에 머물고 있다면 몰락한 황족이라는 의미다. 그런 자에게 아버지 함자를 물을 수는 없었다.
좋은 만남이었다고 여기고 헤어지는 게 최선이었다.
용왕개 또한 그렇게 했다. 다만 가진 재산도 없고, 권려도 없는 아이가 불쌍하여, 힘이 없어 모욕을 당하지 말라고 무공 몇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런 다음 나중에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 인문이 그 녀석이 내 아들이네.”
용왕개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 아미타불!”
요료대사는 나직하게 불호를 읊었다.
젊은 시절부터 친구였으니 누구보다 용왕개를 잘 알고 있다. 용왕개는 오직 황실의 안녕을 위하여 모든 걸 희생한 사람이다. 황자라는 직위를 버리고 무림으로 나와, 개방의 방주까지 지냈다. 하지만 그 세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황자였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늘그막에 장가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전히 개방 방주였을 뿐이다.
아마 구룡천군을 창설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신의 이름이 주선풍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 그 아이를 만났을 때 자네 이름을 말하지 않았는가?”
“ 난 인문이 그 녀석에게 금책과 금인을 주고 주선풍이라는 이름만 가르쳐 줬을 뿐이네. 그 녀석에게는 내 신분이 용왕개라는 사실을 숨긴 거지. 그러고 나서 황족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만 잔뜩 이야기해 주었지.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그건 그래서 안 된다는 말을 잔뜩 늘어놓았지.”
“ 그 뒤로는 찾아가지 않은 건가?”
“ 구룡천군 창설 때문에 한창 바빴으니까. 그런데 구룡천군 창설이 끝나고 집에 가 보았는데 아무도 없더군. 마누라도 아들도.....”
“ 그런데 몇십 년 후에 금루에서 손자를 만났구먼.‘
“ 그런 셈이네.”
용왕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주진무를 보았다.
“ 주선엽 그는......”
“ 죽었느냐?”
“ 대야벌 무성의 성주인 묵사였습니다. 부하들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 후, 후손은......”
“ 현재까지 조사한 바로는 후손은 남기지 않은 걸로 나왔습니다.”
“ 그걸 조사한 사람이 누구냐?”
“ 제 며느립니다.”
“ 그 아이를 만나볼 수 있느냐?”
“ 주선엽에 대해 좀더 알아보기 위해 강호 무림으로 나갔습니다.”
“ 그랬구먼. 그보다 군주께서 여긴 어쩐 일이신가?”
그제야 본분으로 돌아간 듯 용왕개는 주진무에게 반공대를 했다. 황실의 웃어른 신분일 때는 말을 놓았지만, 구룡천군 문도의 신분일 때는 말을 놓을 수가 없었다.
“ 대야벌이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 무슨 소린가?”
주진무의 말에 용왕개는 깜짝 놀라 물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 또한 깜짝 놀란 얼굴로 주진무를 보았다.
“ 그러니까.....”
“ 아미타불!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 알겠소이다. 대사.”
정자로 올라가 앉은 주진무는 그간 강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 아미타불!”
“ 무량수불!”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설마 강호 무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니 대야벌이 그런 식으로 몰락할 거라곤느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 그러니까 자네 말은 연우강이라는 그 아이를 없애고 구파일방을 동원해 세력을 만들면 중원 무림은 정리가 끝난단 말씀이신가?”
이야기를 듣고 난 용왕개가 물었다.
“ 그렇습니다. 어르신.”
“ 그렇게 능력이 뛰어난 녀석이면.....”
“ 회유하는 것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녀석은 저를 죽이겠다고 면전에 대고 말한 녀석입니다.”
“ 감당할 수 없는 자란 말이구먼.”
“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놈에게 중원 무림을 맡기면 10년 안에 대야벌보다 더 큰 세력을 만들어 낼 놈입니다. 더구나 놈은 금릉 연씨 세가의 장잡니다.”
“ 강호 무림과 상계를 동시에 장악할 거란 말이구먼.”
용왕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강호 무림을 장악한 대야벌은 지난 천오백 년 동안 황실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만일 그런 상황에서 상계가 더해진다면, 그들은 황실 위에 서게 될 것이다. 어쩌면 황제가 되려면 금릉 연씨 세가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 생겨날 지도 모른다.
“ 더 크기 전에 싹을 자르는 게 황실이나 구파일방을 위하는 길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 그를 없애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오, 군주.”
용왕개는 고개를 저었다.
“ 그놈을 없애면 안된다는 말입니까?”
“ 지금까지 군주가 한 말을 종합해 보면 연우강은 무림은 물론이고 상계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자 같은데, 맞소?”
“ 그렇소이다.”
주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 무림 또한 황실과 다르지 않소. 군주. 이름 없는 자 같으면 상관없는데, 연우강처럼 무림과 상계에 영향을 미치는 자를 없애기 위해서는 반드시 명분이 있어야 하오. 아무런 명분도 없이 없애게 되면 구파일방의 연합세력은 강호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소.”
“ 그럼 어떻게 하시겠다는 말이오?”
“ 그 일은 우리에게 맡겨두시오. 군주는 두 달 후에 소림사로 오시면 되오.”
“ 알았소이다. 그럼 그때 뵙도록 하겠소이다.”
주진무는 일행을 향해 목례를 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사장군과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가 용림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