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83화 (183/232)

제 7장 장유유서의 뜻은?

먼저 들어간 자들이 밝혀 놓은 듯 동굴 벽을 따라 횃불이 걸려 있었다. 아마도 나올 때를 대비해서 피워 놓은 모양이었다.

연우강은 장풍을 쏘아 불을 꺼트렸다.

" 자넨 나올 자신 있는가?"

혁련무극은 뒤를 돌아보았다.

세카만 어둠만이 있을 뿐 조금 전까지 길이 있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 이걸 가지고 가시오."

연우강은 검은 주머니 하나와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 뭔가?"

혁련무극은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 검은 주머니 안에는 야명주가 들었고, 종이는 이곳 지도요. 그리고 방향이 꺾이거나 막다른 곳에 당도하면 화살표로 방향 표시가 돼 있을 거요. 그것만 따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소."

" 여긴 어떤 곳인가?"

혁련무극은 주머니에서 야명주를 꺼내 주변을 비춰 보았다. 벽돌 형태의 돌로 정교하게 쌓았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특징은 찾아볼 수 없었다.

" 우연히 발견한 무덤이라는 것밖에는 해줄 말이 없네요."

" 안으로 들어온 자들만 없애면 된다는 뜻인가?"

" 그게 아니라면 굳이 들어올 이유가 없잖아요."

연우강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 그럼 없앨 놈들을 찾아야지."

어느새 일행은 막다른 곳에 당도해 있었다. 전방은 막혀 있고 좌우측으로 길이 나 있었다.

혁련무극은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했다.

내공을 끌어올려 천리지청술을 펼친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힌 것은 잠시 후였다.

" 왼쪽과 오른쪽에 다 있구먼."

" 궐주는 왼편으로 가시오. 난 오른편으로 가겠소."

" 운이 좋으면 다시 만나고 아니면 밖에서 만나겠군."

" 그렇게 될 것 같소. 혹시라도 길을 잃게 되면 물을 따라 가도록 하시오."

" 물을 따라가라는 건 무슨 소린가?"

" 여기가 물에 잠길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다음에 뵙지요."

연우강은 목례를 하고 오른편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연우강이 발을 멈춘 곳은 가로 오 장 세로 오 장으로 돼 있는 정사각형의 석실이었다. 조사할 때 들어와 본 공간이었다.

" 웬 놈... 연우강이다!"

안에 있는 자들은 대야벌 무인들이었다.

무인들은 검은 철립과 검은 옷으로 연우강임을 알아보고는 곧바로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다가서기도 전에 연우강의 상체에서 사망정주가 쏘아져 나갔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 크아악!"

좁은 공간에서 가장 강한 무공은 암기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한판이었다.

안쪽에는 삼십 여 명 정도가 있었다. 하지만 실체가 드러나 있었던 자들은 이십여 명가량이었고, 나머지 십여 명은 허공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데 단 한 번의 암기 공격이 끝나고 나자 서 있는 자는 물론이고 숨어 있는 자들까지도 한 명도 남지 않았다.

말 그대로 몰살이었다.

" 더 세졌네."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백팔 개의 사망정주를 날리고 회수하는 게 전보다 훨씬 편하다. 이미 심검을 성취하여 암기를 쏘아내고 회수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지옥탄을 펼칠 때마다 두껍고 무거운 옷을 걸치고 있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옷을 입지 않은 듯하다.

비로소 암기술이 완전해졌다는 의미였다.

" 언제까지 숨어 있을 거예요?"

연우강은 마라천력으로 시체를 들어올려 입구 쪽으로 옮기며 말했다.

" 피이!"

불만 어린 듯한 목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작은 얼굴이 나타낫다. 몸은 물속에 있고 얼굴만 내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이지약이었다. 연우강을 보는 이지약의 얼루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 언제부터 알았어요?]

이지약은 연우강의 품에 안기며 물었다.

" 조금 전....."

[ 막다른 곳에서요.]

말을 하던 연우강은 혜광심어를 펼쳤다.

입 안 가득 밀려들어온 이지약의 혀 때문에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 저 때문에 혁련무극을 반대편으로 보낸 거예요?]

[ 그가 있으면 불편하잖아요.]

연우강은 안쪽으로 걸어갔다.

구석으로 향하던 연우강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두 개였다. 전에 왔을 때에는 벽면에 출구 하나만 있었는데 지금은 지하로 내려가는 출구가 하나 더 있었다. 아마도 대야벌 무인들이 발견한 모양이었다.

[ 왜 그러세요?]

[ 저긴 전에 보지 못했던 곳이라서요.]

연우강은 아래쪽으로 나 있는 출구를 가리켰다.

[ 연 공자가 발견하지 못한 걸 철무련 무인들이 발견했다는 건가요?]

[ 그런 가봐요.]

[ 그럼 철무련 무인들이 저 아래로 내려갔나요?]

[ 그런 것 같아요.]

[ 그러면 아래쪽 말고 위쪽에 나 있는 통로로 가요.]

[ 거긴 아무도 없는데요?]

[ 아무도 없으니까 가자는 거잖아요.]

[ 알아모시겠습니다. 마님.]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이지약이 가자는 곳으로 갔다.

이미 와봤던 곳이라 비어 있는 공간을 금세 찾아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이지약은 곧바로 천마환환신공을 풀었고, 연우강의 등에서 사망궤를 풀어 내렸다.

사망궤를 내리자마자 그녀는 뚜껑을 열고 요를 꺼내 허공섭물로 깐 뒤 연우강에게로 다가가서는 그의 옷을 벗겼다.

" 여자를 수고스럽게 하는 건 실례에요, 연 공자."

" 알아 모시겠습니다."

연우강은 마라천력을 펼쳐 순식간에 자신과 이지약의 옷을 벗겼다. 이지약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연우강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급한 마음과는 달리 행동은 느긋했다. 그녀는 녹아가는 당과가 아쉬워 일부러 천천히 먹는 아이처럼, 음미하듯 입을 맞췄다. 이마에, 눈에, 입과 코에 입을 맞추고 다시 귀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베어 물었다.

이지약이 미식가처럼 연우강의 몸을 맛보고 있는 그 순간 연우강은 노련한 연주자처럼 연주를 시작했다.

그의 손은 활이고 이지약의 몸은 악기였다.

활이 움직일 때마다 악기는 천상의 소리를 내었다. 때로는 귀를 간질이는 것처럼 감미롭게, 때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격정적인 소리를 토해 냈다.

그렇게 긴긴 연주가 끝나고 두 사람은 말없이 꼭 껴안은 채 서로의 체온을 나눴다.

" 우린 지하에서 더 많이 만나는 것 같네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그녀를 안은 곳은 동정호 지하였고, 그녀가 떠날 때는 과거 생사림이 있던 자리 지하에서 관계를 가졌다.

지상보다는 지하에서 더 많이 만나게 되는 사람.

" 전 유부녀잖아요."

" 혼인도 하지 않은 유부녀죠."

" 그렇다고 해도 이런 지하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을 마음껏 안아볼 수 없는 운명이죠."

" 원래 숨어서 먹는 음식이 훨씬 맛있다고 하잖아요."

" 그런 거예요?"

" 군대에 가보면 알게 되거든요. 숨어서 먹는 음식은 너무 맛있어서 다 먹고 나면 항상 갈증같은 아쉬움이 남아요."

" 그건 맞는 것 같아요."

이지약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연우강은 이지약의 얼굴을 가만히 보며 물었다. 전에 비해 살이 많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 세상이 제게 강요하는 도덕과, 당신이라는 부도덕 사이에서 허우적대고 있어요."

" 그래서 이렇게 살이 빠진 거예요?"

" 당신이 없는 자리에서는 늘 다짐을 해요."

" 어떤 다짐을?"

" 처음 본 사람처럼, 아니 몇 번 보기는 했지만 특별히 친하지 않은, 인사만 나누는 그런 사람으로 대하자고 말이에요."

" 여기로 오기 전까지도 그랬어요?"

" 아뇨?"

" 그럼?"

" 독고 할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만 그랬어요. 독고 할아버지로부터 당신 소식을 듣자마자 천마환환신공을 펼치며 몸을 날리고 있었어요."

" 그 정도면 병인데..... 그것도 불치병."

" 부담돼요?"

" 그럴 리가요?"

" 제가 혼인해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죠?"

" 도망칠 겁니다."

" 어디로요?"

" 어디가 됐든."

" 혼인을 요구하지 않으면 지금 우리 관계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는 말?"

" 어쩌면."

" 갑자기 화가 나려고 하네."

"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서요?"

"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여자는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고 난린데 사내는 도망칠 궁리만 하면 화가 날 수밖에 없잖아요."

" 하지만 이 소저는 저와 혼인할 수가 없잖아요."

" 굳이 제가 아니라더라도 남궁 소저, 수 소저, 몽요 소저도 있잖아요."

" 그들 중 한 사람을 택해 혼인을 하게 되면 이 소저를 다시는 못 만나잖아요."

" 그, 그래서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 그렇다고 하면 이 소저는 감격하겠죠?"

" 지금도 감격하고 있어요."

이지약은 연우강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잠시 동안 그렇게 있던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 이젠 일하러 가는 거네요?"

사망묵의를 걸치고 사망궤를 걸머지자 이지약은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 이젠 팔 부 능선까지 왔어요."

" 기간은 얼마나 잡고 있어요?"

" 앞으로 육개월 정도. 그때가 되면 모든 게 끝날 거예요."

연우강은 조금 전 들어왔던 곳으로 들어갔다.

안쪽을 잠시 둘러보던 그는 검은 주머니를 이지약에게 건넸다.

" 뭐죠?"

" 안에 야명주가 들어 있어요."

" 역시 준비는 철저하게 했네요."

이지약은 피식 웃으며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야명주를 꺼냈다. 그러고는 천마환환신공을 펼쳐 허공으로 녹아들어 갔다.

그녀가 천마환환신공을 펼치자 허공에는 야명주 불빛만 남았다.

" 풋!"

야명주를 바라보던 이지약이 픽 웃었다. 야명주를 싼 천 때문이었다. 그 천은 잠룡 때 연우강으로부터 샀던 망사 속옷과 같은 종류였던 것이다.

" 이건 누구 거죠?"

이지약은 망사 속옷을 연우강 눈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 공식적으로는 팔다가 남은 거라고 합니다."

" 그럼 비공식적으로는?"

" 몽요가 그걸 주면서 툴툴거렸다고 말하죠."

" 설마 입던 것을 벗어준 건 아니겠죠?"

" 아껴두었던 거라고 하기에 다음에 원하는 만큼 사준다고 했어요."

" 사줬어요?"

" 아직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잖아요."

연우강은 아래로 내려갔다.

횃불이 밝혀져 있어 굳이 야명주를 꺼낼 필요도 없었다. 계단 아래쪽은 회랑이 나 있었다.

그 회랑을 따라 십여 장가량 걸어가자 조금 전과 같은 형태의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는 대야벌, 아니 철무련 무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연우강은 공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사망정주를 날렸다.

상황은 위쪽과 같았다.

연우강을 발견하고 공격을 시도했던 자들은 일 장을 이동하기도 전에 사망정주에 죽임을 당했다.

무인의 수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망정주가 공간을 가득 채운 순간, 모습을 드러내고 있던 자들부터 시작하여 허공에 숨어 있던 자들까지 몰살을 당했다.

시체를 치우고 나자 또다시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나왔다.

" 누구 무덤일까요?"

연우강은 아래로 내려가며 물었다.

아래쪽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이미 철무련 무인들이 살피고 지나간 듯 광장의 벽과 중앙에는 횃불이 걸려 있었다.

" 얼마나 된 무덤인지 알아요?"

" 그걸 모르겠어요. 동정호 지하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전에 만들어진 것은 분명한데......"

" 정확힌 시기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말?"

" 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저기에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지약은 광장 중앙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동물처럼 보이는 조각상들이 우뚝우뚝 서 있었다.

" 말처럼 보이는데요?"

연우강은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상했던 대로 그것들은 말이었다. 그런데 말만 있는 게 아니라 뒤쪽에는 두 사람이 탈 수 있는 마차가 매달려 있었다.

" 전차에요."

이지약은 속삭였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이인용 마차는 춘추전국시대 고관들의 교통수단임과 동시에 전투에 사용됐다.

그 말은 곧 이 무덤은 춘추전국시대나 또는 그 이전에 만들어졌다고 봐야 한다.

휘리릭! 휙! 슈아악!

막 전차를 향해 발을 내딛는 순간 전방에서 서늘한 기운이 밀려왔다.

연우강은 피식 웃었다. 희미한 어둠을 뚫고 날아오는 그것은 암기였다.

" 잠용(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겠다고?"

쿠웅!

연우강은 오른발을 앞을오 대디딤과 동시에 가슴을 활짝 폈다.

슈악!

그러자 그의 왼편 가슴에 붙어 있던 사망사화가 가공할 속도로 어둠을 뚫었다.

" 크윽!"

" 커억!"

" 으윽!"

어둠 속에서 나직한 비명과 함께 다섯 명이 뚝 떨어져 내렸다.

" 죽여라!"

또다시 살기 어린 외침이 터져 나오고 이번에는 수백 개의 암기가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 왔다. 연우강은 허공으로 손을 뻗어 이지약을 품안으로 끌어들인 다음 몸을 돌렸다.

턱! 턱턱! 턱턱! 턱턱!

수십 수 백 개의 암기가 등과 사망궤를 때렸다. 하지만 연우강에게는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했다.

일차 공격이 끝나자 연우강은 이지약을 내려놓고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가슴을 안쪽으로 오므렸다 활짝 펴면서 오른발을 강하게 찍었다.

쿠웅!

슈아악!

스아악!

갑자기 폭우가 쏟아질 때 나는 듯한 소리가 어둠을 장악했다.

백팔 개의 사망정주와 네 개로 분리되는 사망월반, 열여덟 자루의 사망마비가 한꺼번에 어둠을 뚫고 날아간 것이었다.

" 맙소사!"

어둠 속에 있던 이지약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미 초극의 반열에 오른 그녀는 방금 연우강의 몸에서 쏘아진 암기의 수가 몇 개인지 대략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백 개 이상이다. 그런데 그 암기들 전부가 이기어검술로 던진 것처럼 날아간다.

한두 개도 아니고 백여 개에 달하는 무기를 이기어검술로 던져내는 무인이 있다면 과연 믿을 사람이 있을까.

백이면 백 허풍 떨지 말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무인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다.

마라천력을 가진 무인이 아니면 절대로 익힐 수도 없는 무공. 그 무공이 바로 백여 개의 암기를 이기어검술로 날리는 무공이었다.

앞쪽에 있던 말과 마차가 부서져 희뿌연 먼지가 날렸다. 그 먼지를 뚫고 암기들은 광란의 질주를 시작했다.

' 전부 죽었군.'

그녀는 전면을 응시했다.

" 아, 암기다. 호신강기를.... 으윽!"

" 커억!"

" 크윽!"

" 아악!"

부챗살처럼 퍼져 나간 암기는 어둠 속 곳곳에 숨어 있던 차혼암영단 단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휘리릭!

잠시 후 암기들은 일제히 돌아와 연우강의 사망묵의에 장착됐다.

" 저놈!"

연우강은 중앙에 있는 조형물을 가리켰다.

전차와 말 대부분이 부서졌는데 중앙에 있는 것만 거의 원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말과 전차를 만든 재료가 흙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 쇠로 만든 건가......"

이지약은 고개를 갸웃하며 전차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사망정주에 의해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는 그것은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 다른 놈들은 전부 흙으로 만들었는데 이놈만 금속으로 만들었다면......"

연우강은 전차를 꼼꼼하게 살폈다. 그리고 전차 왼편에 세워진 깃발에서 글을 발견했다. 깃발 또한 전차처럼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한가운데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 혹시 태양왕이라고 알아요?"

" 태양왕이라고 적혀 있어요?"

이지약은 연우강 곁으로 다가갔다.

" 네."

연우강은 깃발을 가리켰다.

" 그럼 여기가....."

이지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 알아요?"

" 태양왕은 주나라 전에 중원의 주인이었던 상나라 제후였다고 알고 있어요."

" 제후이면서도 후대에까지 알려진 정도면 대단한 사람이었겠네요."

" 가진 재산에서 나오는 광채가 태양처럼 밝다고 해서 태양왕이란 별호를 얻은 사람이니까요."

" 엄청나게 부자라는 말?"

" 상인이란 말의 유래를 알아요?"

" 상인이면 장사꾼을 뜻하는 말이잖아요."

" 지금은 그렇죠. 하지만 원래는 상나라 사람을 뜻했어요."

" 상나라 사람이라는 뜻이 장사꾼으로 뜻이 바뀐 거예요?"

" 네." " 설마."

" 주나라에 멸망한 상나라 사람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먹고살 길이 없었대요. 그래서 그들은 물건을 사서 파는 교역업을 시작했다고 해요. 교역업에 종사하는 자들을 주나라 사람들은 상인이라고 불렀고,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하네요."

" 믿거나 말거나 그랬다는 거죠?"

" 물론이죠. 아무튼 그 교역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주걸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보물에서 흘러나온 광채가 중원 전역을 비췄다고 해요. 그래서 그를 태양왕이라고 불렀대요."

" 그러니까 여기가 그 재신의 무덤이란 말이죠?"

" 이 마차의 주인이 태양왕 주걸이 맞다면 그럴 거예요."

이지약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이곳에 엄청난 보물이 묻혀 있다면 침입자를 막기 위한 장치가 돼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저도 그게 궁금해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 고장난 거 아닐까요?"

" 이걸 보고도 그런 소릴 해요?"

연우강은 마차를 가리켰다. 천오백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차는 원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건 곧 이곳에 만든 기관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 그건 금이라서 그런 거예요."

" 금?"

" 몰라어요?"

" 동인 줄 알았죠."

" 태양왕의 무덤이라면 금이 맞을 거예요."

" 그러니까 저기 말 네 마리하고 마차가 전부 금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인가요?"

연우강은 사망정주가 뚫고 지나간 구멍을 보았다.

금이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금색 광채가 반짝이고 있었다.

" 부자가 된 기분이 어떠세요?"

" 보석에서 흘러나오는 광채가 태양처럼 빛났다면서 이 정도로 부자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우르릉! 그르르!

" 크아악!"

" 아악!"

" 으아악!"

바닥과 천장이 울리는 듯한 느낌에 이어 벽을 타고 비명이 들려왔다.

" 태양왕이 재산을 지키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입니다."

" 그런가 보네요. 우린 어떻게 하죠?"

" 일단 태양왕을 만나봐야죠."

" 태양왕을 만나요?"

이지약은 마차 앞에 서 있는 조각상을 보았다. 그 조각상이 태양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그자는 태양왕이 아니라 마부에요."

연우강은 고개를 저었다.

"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 말과 마차는 전부 금인데 이놈은 쇠로 만들어졌잖아요. 태양왕 본인이었다면 금으로 만들었겠죠."

" 그럼......."

" 일단 타세요."

연우강은 이지약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그러고는 뒤편 자리에 앉았다.

" 정말로 마차가 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지약은 어이없는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일단 앉아보세요."

연우강은 이지약을 끌어당겨 무릎 위로 앉혔다.

" 이건 나쁘지 않네요."

이지약은 빙그레 웃으며 연우강의 가슴에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 어디로 모실까요?"

연우강은 마차를 몰고 갈 것처럼 물었다.

" 우리 둘만 살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 그러면 지금부터 아무도 찾지 못하는 그런 곳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르릉!

연우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차가 흔들렸다.

이지약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마차와 말이 서 있던 공간이 천천히 하강하고 있었다.

" 우리 정말로 태양왕에게로 가는 거예요?"

" 그렇다니까요."

연우강은 빙그레 웃었다.

아래로 내려가면서 주변이 점차 밝아졌다.

마차가 멈춘 곳은 기다란 동굴이었다. 동굴 폭은 삼 장가량이었는데, 중앙에는 일 장 폭의 수로가 있고, 좌우측 벽면에는 반 장 간격으로 야명주가 박혀 있었다.

" 세상에!"

이지약의 입이 쩍 벌어졌다.

수로 안에는 물이 찰랑거리고 수로 바닥에는 금색 광채를 뿌리는 형태의 물건이 흩어져 있었다.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그것들이 금이라는 사실은 금세 알 수 있었다.

" 금만 보지 말고 그 옆도 좀 봐야 할 것 같네요."

연우강은 수로 옆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아주 오래돼 흔적만 남아 있는 뼈가 뒹굴고 있었다.

" 시체인가요?"

" 시체 정도가 아니라 공동묘지네요."

연우강은 수로를 가리켰다. 번쩍이는 금전들 옆으로 뼈처럼 보이는 것들이 함께 잠겨 있었다.

" 왜 저렇게 됐을까요?"

" 여길 지었던 자들이거나 도둑이거나 둘 중 하나겠죠.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할 모양입니다."

연우강은 이지약을 안은 채 몸을 날려 마차에서 내렸다.

" 우리보다 먼저 온 자들이 있는 것 같은데요?"

내리자마자 이지약은 천마환환신공을 펼쳐 허공으로 녹아들어갔다. 연우강은 동굴 가장자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차앙! 창창! 창창창!

십여 장쯤 걸었을까.

전면에서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우강은 마라천력을 끌어올려 전방으로 내달렸다. 수로는 미로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몇 개의 모퉁이를 돌자 널따란 공간이 나타났다. 온통 금색으로 둘러싸인 그곳에서는 수십 명이 드잡이를 벌이고 있었다. 한편은 이곳까지 오면서 없앴던 철무련 무인들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은 처음 보는 복장이었다.

[ 누군지 알겠어요?]

[ 화산파 무인들이에요.]

[ 화산파?]

[ 매화 향이 나는데 못 느꼈어요?]

[ 아주 멋진 향에 취해 있으면 다른 향은 맡질 못하잖아요.]

[ 무슨 향에 취했는데요?]

[ 이 소저의 몸에서 나는 향기죠.]

[ 우욱!]

[ 왜 그래요?]

[ 토할 것 같아서요.]

[ 임신했어요?]

[ 임신을 했으면 좋겠는데 아직 아니네요.]

[ 그런데 왜 토할 것 같다는 거죠?]

[ 제 향기에 취했다는 연 공자의 말이 느끼해서요.]

[ 그래도 기분은 좋죠?]

[ 네.]

이지약은 빙긋 웃으며 연우강의 목을 껴안았다.

연우강은 무인들이 싸우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철무련 무인들과 화산파 무인들이 싸우는 곳은 지르이 십여 장가량 되는 원형 공터였다. 화산파 무인과 철무련 무인들은 수로를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는데, 양측이 공히 수로 속에 있는 뭔가를 노리고 있는 듯한 형국이었다.

[ 뭐죠?]

[ 상자를 두고 저렇게 싸운다는 거예요?]

[ 그런 것 같아요.]

[ 상자 안에 좋은 게 들었나 보네요.]

연우강은 공터 안으로 들어갔다.

연우강이 들어서자 양측은 싸움을 멈추고 물러났다.

" 계속해."

연우강은 손을 휘젓고는 한쪽 구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 누구냐?"

왼편에 있던 화산파 무인들 중 한 명이 날카로운 눈비으로 연우강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그는 화산판 전대 장문인 제검 양정일이었다.

" 연우강?"

철무련의 련주였떤 모두악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제는 상징처럼 돼 버린 검은 철립과 궤짝 때문에 연우강임을 금세 알아본 것이었다. 본의 아니게 그는 화산파 무인 일행에게 연우강의 이름을 밝힌 꼴이 되고 말았다.

" 네가 연우강이란 말이냐?"

양정일은 연우강을 보았다.

우연찮게 마총의 소문을 듣고 무덤 안으로 들어왔지만, 이곳으로 온 원래 목적은 연우강을 없애기 위해서다. 잠시 연우강을 살피던 양정일은 이번엔 내기를 끌어올렸다.

" 너, 나 알아?"

연우강은 양정일의 눈에 시선을 맞췄다.

난생처음 보는 자다. 그런데 바라보는 눈빛에 살기가 어려 있다. 단순히 궁금증 때문에 이름을 물은 게 아닌듯했다.

" 소문은 많이 들었다."

" 나에 대해 말해준 사람이 누구지?"

" 넌 아무나 보고 반말을 하는 모양이구나."

양정일은 얼굴을 찌푸렸다.

" 반말은 네가 먼저 했잖아."

" 그러니까 내가 반말을 해서 너도 반말을 했단 말이냐?"

" 당연한 거 아냐?"

" 넌 장유유서도 모르느냐?"

" 그건 나이를 많이 처먹은 사람이 먼저 죽어야 한다는 말이잖아."

양정일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장유유서가 그런 식으로도 해석된다는 걸 처음 들었다.

" 그 정도는 군대 가면 다 아는 상식이야. 넌 군대 근처도 가보지 않은 모양이구나."

" 난 나이가 팔십이다. 놈!"

양정일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 네가 나보다 먼저 죽는다는 사실은 나도 알아. 그러니까 굳이 그렇게 강조할 필요 없어. 그보다 날 죽이려는 이유가 뭐야?"

" 널 죽이려는 이유?"

" 상황이 그렇잖아."

" 상황이 어떻단 말이냐?"

" 말다툼을 하다가 갑자기 나이를 들먹이는 것들은 대부분 시비를 걸려고 발악을 하는 자들이거든."

" 내가 그랬단 말이냐?"

" 기억력도 맛이 간 모양이구나. 아무튼 조금 전 너는 오늘 처음 봤는데 느닷없이 이름을 확인하고는 장유유서 어쩌고 하면서 나이를 들먹였잖아. 그건 곧 어떻게든 시비를 걸어 싸움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보통 양민이 시비를 거는 건 치고받고 싸우고 싶다는 말이고, 너처럼 무인이 시비를 걸면 죽이려고 작정을 하고 나선 걸로 보면 되거든. 근데 정체가 뭐야?"

" 죽일 놈!"

파앗!

양정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대야벌이란 이름 앞에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이 싫어서 금분세수를 하고 무림을 떠났다.

하지만 무공에 대한 자부심은 그 누구보다 높다.

더구나 화산파 문주까지 지내지 않았는가.

그런 그가 이제 서른도 되지 않은 새파란 녀석에게 이놈저놈 소리를 듣자 간신히 쥐고 있던 이성의 끈이 뚝 끊어지고 말았다. 사실 다른 때 같았으면 연우강이 아무리 도발을 감행했다고 해도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몸을 날리진 않았을 것이다. 먼저 상대방의 실력을 알아보고 신중하게 접근했을 것이다.

쉽게 흥분하지 않는 성격인 양저일이 이렇듯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변한 건 순전히 남철진 때문이었다.

- 그렇소이다. 무당파와 함께 움직여 주시오.

연우강을 잡으러 간다고 했을 때 남철진이 했던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화인처럼 남아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연우강으로부터 이놈저놈 소리를 듣고, 시비 어쩌고 하는 말까지 듣고 나자 더 이상은 견딜수가 없었다.

" 그러다 다쳐 인마."

연우강은 빠르게 날아오는 양정일을 향해 인사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파앗!

그러자 쓰고 있던 사망마립이 가공할 속도로 양정일을 향해 날아갔다.

" 차앗!"

느닷없은 기습 공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정일의 대처는 빨랐다.

그는 황급히 강기막을 펼쳤다.

하지만 연우강의 공격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빙빙 돌면서 나아가던 사망마립이 한순간에 여덟 조각으로 분리되더니 양정일의 요혈로 파고들었다.

" 헉!"

양정일은 질겁했다. 그는 급하게 방향을 틀어 허공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 차앗!"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앉아 있던 연우강의 신형이 앉은 자세 그대로 양정일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리고 그의 허리춤에서 새빨간 광채가 폭사됐다.

" 허억!"

양정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허공답보를 펼치를 무인인 그가 연우강의 허리춤에서 쏘아져 나온 그것이 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철립에 의한 공격은 허초고 진짜는 지금 나온 붉은 광채다.

그런데 그 광채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 그렇소이다. 무당파와 함께 움직여주시오.

뜨거운 뭔가가 목 안으로 파고들어 오는 순간, 남철진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 장유유서는 늙은 놈이 먼저 죽어야 세상이 바로 서는 거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크아악!"

양정일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겠다는 뜻이지요."

연우강의 허리에서 쏘아진 뇌섬은 양정일의 목을 감아 돌더니 그대로 잘라내 버린 것이었다.

" 놈!"

" 개자식!"

" 죽일 놈!"

화산파 무인들은 질겁하여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 가는 그들의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검을 다스리는 경지에 올랐다고 해서 제검이라는 별호로 불렸던 사람이다. 그런 양정일이 자신의 검법 일초식도 펼치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 맞아, 이곳에 너희들을 끌어들이는 순간, 난 죽일 놈이, 개자식이, 놈이, 되기로 했어. 너희들은 전부 이곳에서 죽어!"

가부좌를 풀어 우뚝 선 자세가 된 연우강은 날개짓하듯 가슴을 털었다.

슈아악!

왼편 가슴에 있던 사망사화가 쏘아져 나가고, 온몸 구석구석에 숨어 있던 사망마비가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허리에 있던 사망월반과 허공에서 배회하고 있던 사망마립이 화산파 무인들을 향해 유성처럼 쏘아졌다.

" 허억!"

" 억!"

" 헉."

갖가지 경호성을 내지르며 방어하려고 해보았지만, 그들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퍽! 퍽퍽퍽! 퍽퍽퍽! 퍽퍽!

서른아홉 개의 암기는 무자비하게 화산파 무인들을 유린했다.

" 크아악!"

" 으아악!"

" 아아악!"

화산파 무인들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수로로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연우강의 공격은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떨어진 자들 위로 몸을 날려가더니 화산파 무인을 공격하고 돌아온 암기를 다시 아래로 날려보냈다.

퍽! 퍽퍽! 퍽퍽!

서른아홉 개의 암기는 쓰러진 자들의 몸 안으로 다시 파고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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