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사건사고의 삼 요소
이막수는 곤혹스런 얼굴로 앞에 있는 자들을 보았다.
그를 비롯한 개방 무인들이 그들을 만난 건 일각 전이었다.
지금 있는 이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모른다.
수로를 따라오다가 막다른 곳에서 석문을 발견해 부수고 들어왔다. 그런데 그곳은 팔각형 형태의 광장이었다. 광장 가운데에는 보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곳에 있는 보석들은 전부 금보다 몇 배나 가치가 나가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상의를 벗어 소매 끝을 묶어 보물을 담았다. 데리고 들어온 타구대 삼백 명이 전부 담고 나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보석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막 몸을 돌리려고 하는데 그들이 나타난 것이다.
누구의 소유도 아닌 무덤 속에 숨겨진 보물을 주워 가는데도 도둑질하다가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팔각형 광장에 모습을 드러낸 자들은 사유성을 비롯한 밀천 무인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엔 슬쩍 미소가 어렸다.
그런데 그 미소가 참으로 묘했다.
어떻게 보면 옷으로 만든 보물 자루를 하나씩 둘러메고 있는 개방 무인을 비웃은 조소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너희들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듯한 그런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표정만 그럴 뿐 개방 무인들을 향해 욕을 하는 자들은 없었다.
묘한 기류가 양측 진영에 흘렀다.
" 쿡!"
문득 어디선가 나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웃음의 진원지는 밀천의 무영환사대 대원들 속이었다.
" 킥킥킥! "
" 큭큭큭!"
그 웃음이 도화선이 된 듯 무영환사대 대원들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사실 웃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개방은 기본적으로 무소유를 근간으로 해서 창설된 문파다. 설사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개방 방도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거지가 돼야 한다. 즉 한푼이라도 재산이 있으면 개방 방도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두 명도 아니고 삼백여 명이나 되는 개방 방도 전부가 옷으로 만든 보석 자루를 둘러메고 있으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 이익!"
" 젠장!"
밀천 무인들의 웃음이 커질수록 개방 무인들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분명 밀천 무인들에게 비웃음을 당할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의 웃음을 듣자 짜증이 나고 화가 치밀었다.
" 씨팔!"
급기야 타구대 대원 한 명이 등에 메고 있던 자루를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몽둥이를 들고 밀천 무인들을 향해 쏘아져갔다.
이번에는 그의 행동이 도화선이 됐다.
다른 대원들 또한 일제히 자루를 내려놓고 밀천 무인들을 향해 몸을 날려갔다.
"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이건 뭐."
밀천 무인들은 황당한 얼굴로 개방 무인들을 보았다.
자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이곳으로 들어오게 됐고, 저들을 발견했을 뿐이다.
보석을 담다간다고 욕을 하거나, 내려놓으라고 하지도 않았다. 단지 웃었다. 그런데 이 미친 작자들이 보석을 내려놓고 공격을 해온 것이다.
" 쳐라!"
" 죽여라!"
밀천 무인들은 고함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 끄응!"
이막수는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 그는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얼마든지 말릴 수 있었다. 아니 이곳이 지하가 아니고 지상이었다면 분명 말렸을 것이다. 이막수가 대원들의 행동을 말리지 않은 것은 그 또한 타구대 대원들과 비슷한 심정이기 때문이었다. 공연히 짜증이 나고 화가 난 상태인데 비웃는 듯한 웃음까지 듣게 되자 참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밀천 무인의 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는 게 크게 작용했다. 사실 안으로 들어온 밀천 무인의 수는 오백 명이었다. 그런데 사유성은 삼백 명을 은신시키고 이백 명만 드러냈다.
도둑질하다가 들켰을 때의 수치감, 적보다 아군의 수가 더 많다는 확신, 그리고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지하, 이 세가지 요소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이막수를 비롯한 개방 무인들은 살인멸구를 택하고 만 것이다.
문제는 눈에 보이는 자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창! 창창창! 창창!
" 으악!"
" 아악!"
" 크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그런데 죽어나가는 자들은 개방 무인이 더 많았다.
" 응?"
이막수는 깜짝 놀랐다. 느닷없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들이 개방 무인을 공격하기 싲가한 것이었다.
" 은신해 잇는 자들을 조심하라!"
" 늦었소."
사유성은 이막수를 향해 몸을 날려가며 말했다.
" 응?"
이막수는 깜짝 놀랐다.
사유성의 동체가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마치 똑같이 생긴 사람을 낳는 것처럼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사유성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더니, 삼 장 건너편으로 갔을 때는 서른 두 개의 객체로 변했다.
그것은 환밀가문의 독문 무공인 환허무령대법술이었다.
" 빌어먹을!"
욕설을 뱉어낸 이막수는 만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처럼 걸어가는 그의 몸에서는 희뿌연 운무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개방의 취선보였다.
이막수가 취선보를 펼친 이유는 사유성의 환허무령대법술 때문이었다. 환술을 상대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허상과 실체가 뒤섞여 있어, 실체가 공격하는 시점을 제대로 파악해내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즉 허상의 공격을 막아내다가 실체의 공격을 놓칠 수가 있다. 그때 가장 유용한 방어 수단은 어떤 자세에서도 수비와 공격이 가능한 취선보였다.
이막수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고 두 사람 사이에 강력한 역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사유성이 만들어낸 서른두 개의 객체는 이막수의 주변을 빙빙 돌며 기회를 노렸고, 이막수는 타구봉을 불끈 틀어쥔 채 쉬지 않고 취선보를 펼쳤다.
" 크아악!"
" 으아악!"
" 아악!"
두 사람이 기회를 노리는 와중에도 주변에서는 계속 비명이 흘러나왔다. 어느 쪽도 위위를 점하지 못한 팽팽한 접전이었다. 결국 인원수가 많은 밀천이 승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사유성은 비교적 느긋하게 싸움을 풀어나갔다. 그는 굳이 위험한 공격도 감행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협공할 수 있는데 굳이 모험을 할 이유가 없었다.
사유성의 공격이 느슨해지자, 이막수는 다급해졌다. 그는 전력을 다해 삼십육로타구봉법을 펼쳤다. 그의 타구봉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녹색 광채가 사유성의 몸을 찢어발겼다.
하지만 이막수의 타구봉이 찢어발기는 사유성의 몸통은 대부분이 허상이었다.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는 눈동자 두 쌍이 있었다. 공터 가장자리 선반처럼 튀어나온 곳에 걸터앉아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은 연우강과 이지약이었다.
다른 자들과는 달리 두 사람은 아무런 충돌 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이지약과 연우강의 몸 속에 있는 음양쌍극기 때문이었다. 이지약이 연우강의 손을 잡은 채 음양쌍극기를 끌어올려 천마환환신공을 펼치게 되면 연우강도 함께 천마환환신공을 펼치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 어떻게 상대하죠?"
이지약은 연우강을 돌아보며 물었다.
" 환술을 쓰는 자들을 상대할 때 가장 먼저 봐야 할 게 뭔지 아직 몰라요?"
" 그림자를 말하는 거예요?"
" 알아요?"
" 그건 상식이잖아요."
이지약은 입을 삐죽 내밀며 연우강을 흘겨보았다.
" 그럼 그림자가 있는 자를 찾으면 되잖아요."
" 그림자가 전혀 생기지 않으니까 문제잖아요."
" 그림자가 없다고요?"
연우강은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위쪽 천장을 보았다.
이지약의 말대로였다.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바로 위쪽에 야명주가 몰려 있어, 아래쪽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았다.
" 사유성이 일부러 저 장소를 택한 것 같아요."
"자식, 제법 머리를 굴렸네요."
" 만일 연공자가 개방 방주 입장이라면 어떻게 할래요?"
" 저 자가 개방 방주에요?"
연우강은 이막수를 보며 물었다.
겉모습만으로는 개방 방주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했다.
" 몰랐어요?"
" 있는 집안 자식이 거지 새끼와 안면을 틀 이유가 하나라도 있으면 대보세요."
" 거지라고는 해도 저자는 십만 방도를 거느린 개방의 방주에요. 연 공자. 함부로 무시했다가는 큰코다쳐요."
" 제 본업이 뭔지도 모르는 저런 놈이 방주로 있는 방파라면 미래가 없다고 봐도 무방해요."
" 이 방주가 무능력한 자란 뜻이에요?"
" 무능력자인지 그건 모르지만 개방 방주 자격은 없는 자는 맞아요."
"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 저놈이 입고 있는 옷을 보세요. 비록 낡기는 했지만 떨어진 데는 한 곳도 없어요. 반면에 부하들이 입고 있는 옷은 말 그대로 거지 옷이죠."
" 그래서 이 방주가 거지 아닌 거지라고 해서 부불개라고 불러요."
" 그게 웃긴다는 거예요. 지휘관이 된다는 것은 수백 수천 명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격을 갖는다는 뜻이에요. 그 명령 중에는 죽어도 막으라는 사수명령이 있을 수도 있고,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작전을 내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경우에 부하들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지 못한 지휘관의 명령은 먹히질 않아요."
" 듣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 물론 듣는 시늉을 하겠죠. 하지만 진정으로 그 임무를 완수하진 않아요."
" 중간에 포기해 버린단 말이군요."
" 그럴 수밖에 없죠."
" 이 방주가 그렇다는 말인가요?"
" 부하들은 거지처럼 사는데 혼자만 고고하게 살겠다는 놈을 누가 믿고 따르겠어요? 니 좋을 대로 해라, 그러고 말죠."
" 풋! 아무튼 그렇다고 하고요. 저 고고한 양반이 사유성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는 거예요?"
" 그림자를......"
" 그림자는 없다고 했잖아요."느낌으로 신월잔백을 펼쳤을 뿐인데, 전보다 배 이상 강해진 " 그림자를 찾아보라는 말이 아니고, 그림자에 답이 있다는 거예요."
" 그림자에 답이 있다고요?"
이지약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연우강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미 그림자로 실체를 찾아낼 수 없다고 하였고, 그건 연우강도 인정했다.
그런데 그림자가 어떤 역할을 한다는 건지.
" 사유성은 어떤 조건에서 저 무공을 가장 많이 펼쳤을까요?"
" 어떤 조건이라는 건 무슨 소리죠?"
" 사실 저 무공은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날씨, 즉 비가 온다거나 구름이 낀다거나, 달이 없는 밤에는 최강의 위력을 발휘하잖아요."
" 그러니까 그림자가 생기는 날에 더 많이 펼쳤는지 아니면 그림자가 없는 날에 더 많이 펼쳤는지 그걸 묻는 거예요?"
" 네."
" 당연히 그림자가 많은 날에 더 많이 펼쳤겠죠."
" 그건 저와 생각이 같네요. 아무리 비가 오는 날이 많다고 해도 맑은 날보다는 적을 테니까요. 자, 그럼 그림자가 생기는 날 무공을 펼치다 보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 그림자가 생긴다는 걸 본인도 잘 알 테니까, 의식적으로 그림자를 감추려고 하겠죠."
" 감추는 방법은?"
" 상대방이 아래를 보지 못하게 파상적인 공격을 하든지 허상을 이용해서 교묘하게 그림자를 감추든지 해야겠죠."
"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거군요."
그제야 이지약은 빙그레 웃었다.
그림자에 답이 있다는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서른세 명의 사유성 중에서 진짜는 가장 빨리 움직이고 있는 자였다.
" 하지만 방금 말한 건 차선이에요."
" 다른 방법이 또 있어요?"
" 당연히 있죠."
" 어떤 방법이 있다는 거죠?"
" 그건 조금 있다가 가르쳐 줄게요. 그보다 저 보물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연우강은 개방 무인들이 담다가 남긴 보물을 가리켰다.
" 보물은 왜요?"
" 이 소저와 전 말을 타고 내려왔으니까 기관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고 봐야 하잖아요."
" 그렇죠."
" 네 마리의 말과 두 사람을 태운 마차를 기관을 이용해서 다른 장소로 이동시켰다는 건 기관술이 상당하다는 뜻이겠죠.?"
" 네."
이지약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상당한 정도가 아니고 엄청난 기술이라고 해야 한다.
" 그런 대단한 기술을 가진 자가 보물 주변에는 기관 장치 하나 해두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 그렇네요."
이지약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까지 오면서 수로에 깔려 있는 금전에 눈이 팔려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아니 워낙 지하 깊숙이 들어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 혹시 독일까요?"
" 맞아요. 태양왕 그 양반은 세월이 지나면 썩어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르는 기관보다 독을 택한 거예요."
" 하지만 중독된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 누구나 알아차리게 만드는 건 기관이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 그럼 어떻게 한다는 거죠?"
" 이 안에 있는 각 장치를 이용해서 독을 만들었을 거예요."
" 이를 테면?"
" 석문을 밀 때 손바닥에 돌가루가 묻게 되고, 수로로 갈 때는 습기를 머금게 되죠. 아무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린 지하 환경과 접하게 되잖아요."
"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독이 된다는 거예요?"
" 아마 수로에 있던 그 금전들은 태양왕이 뿌려놓은 게 아니라, 무덤 공사를 한 자들에게 품삯으로 준 것일지도 몰라요."
" 품삯을 받고 나가다가 죽었다는 말이군요."
" 지금으로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네요."
" 크아악!"
바로 그때 공터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머리 하나가 둥실 떠오르고 있었는데 그는 다름아닌 이막수였다.
" 거보세요. 겉멋만 잔뜩 든 놈의 최후는 저럴 수밖에 없다고요."
" 거지 옷을 입었더라면 이막수가 승자가 됐을 거란 말이에요?"
" 좀 더 상황이 나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읏차!"
연우강은 아래로 몸을 날렸다.
이지약으로부터 떨어지자 천마환환신공이 풀리면서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 응?"
느닷없이 연우강의 등장에 숨을 고르고 있던 사유성은 깜짝 놀랐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무영환사대 대원들도 깜짝 놀란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지나가다 들른 것뿐이니까."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사유성 앞으로 걸어갔다.
" 우릴 잘도 속였더군."
사유성은 연우강을 가만히 보았다.
수백 명의 무인을 이곳으로 끌어모은 장본인. 여기가 마총이 아니라는 사실은 연우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무인들을 끌어들였는지 궁금했다.
" 정말 이곳이 마총이라고 생각한 거야?"
" 처음엔 그랬네."
" 하지만 마총이 아니라는 건 금세 알았잖아. 알았으면서도 나가지 않은 건 사유성 네가 선택한 거고."
" 그렇군. 그보다 우릴 이곳으로 끌어들인 이유가 뭔가?"
" 슬슬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런 거야."
" 정리?"
" 이제 대야벌 벌주는 선출하는 게 아니라 강한 놈이 먹는 자리로 변했거든."
" 강한 자가 먹는 자리로 변했다는 건 무슨 소린가?"
" 담대만승이 백인위원회를 해산하고 조직을 새로 정비했어. 대야벌과 벌주만 남고 모든 것이 바뀌었지."
" 어떻게 바뀌었단 말인가?"
" 벌주 혼자 다 해먹는 구조. 즉 담대만승은 무림 황제가 댔다는 거야."
" 담대만승이 무림 황제가 된 것과 우릴 끌어들인 게 관계가 있는가?"
" 담대천호와 군마팔선, 모두악과 철무십옹, 화산파 전대 문주인 제검 양정일을 비롯한 서른 명, 무당파 전대 장문인인 만광진인을 비롯한 서른 명, 소림사 무승으로 보이는 중들, 방금 네가 죽인 이막수를 비롯한 타구대 대원, 야궐 궐주 혁련무극 그리고 금의위 북진무사 남철진이 이 안으로 들어왔는데, 혈사신군 모두악을 비롯한 차혼암영단, 제검 양정일과 화산파 무인 서른 명은 네 손에 죽었고, 만광진인을 비롯한 무당파 무인은 담대천호를 비롯한 군마팔선에게 죽고, 개방 방주 이막수와 타구대 삼백 명은 방금 네 손에 죽었어."
" 그럼 남은 사람은 내가 데리고 들어온 밀천 무인과 혁련무극, 담대천호와 군마팔선, 남철진 그리고 자네군."
" 군마팔선은 네 명만 남았어."
" 군마팔선 중 네 명이 죽었단 말인가?"
" 남은 네 명도 담대천호와 함께 죽은 녀석들 곁으로 갈 거야."
" 응?"
사유성의 눈빛이 깊어졌다.
문득 조금 전 연우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분명 혈사신군 모두악, 차혼암영단과 제검 양정일이 이끄는 화산파 무인을 없앴다고 햇다. 그리고 지금은 담대천호와 군마팔선의 남은 네 명을 없애겠다고 한다.
" 사유성 네가 생각하는 게 맞을 거야."
" 전부 죽이기 위해 우리를 끌어들였단 말인가?"
" 너희들뿐만이 아냐."
" 그럼?"
" 입구와 출구가 같다는 건, 들어갔던 자들이 같은 장소로 나온다는 뜻이잖아."
" 하남으로 들어왔던 모든 무인들이 묘곡 주변에 몰려 있다는 말이군."
" 정확하게는 군마련 무인 이천 명, 철무련 무인 이천 명, 밀천 무인 이천오백 명, 야궐 무인 이천 명, 구파일방 무인이 천 명이야."
" 많군."
" 지금 그놈들은 미친 듯이 싸우고 있을 거야."
" 으음!"
사유성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각 세력의 수장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면서 부하들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각 세력의 수장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보물을 가지고 나올 것을 대비하여 부하들에게 잘 지키라는 언질까지 하고 들어왔다.
부하들은 잔뜩 긴장한 채 마총 입구를 노려보고 있을 테고, 그 상태에서 누군가가 도발을 감행하면 금세 전쟁으로 확대되고 말 것이다.
사유성은 굳은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 대야벌의 벌주가 되고 싶은 겐가?"
"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돼야 할 일이 생겼어."
" 그 일이 뭔지 궁금하군."
" 그건 남철진에게 물어보면 될 거야."
" 남철진은 금의위 진무사라고 알고 있는데, 아닌가?"
" 맞아. 사실 그놈이 아니었으면 담대만승을 죽이는 걸로 끝났을 거야. 그런데 그 빌어먹을 자식 때문에 대야벌 벌주가 돼야만 하게 생겼어."
" 그도 죽일 참인가?"
" 난 내게 온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아."
" 금의위 진무사를 죽이면 어떻게 된다는 걸 모르는가?"
" 그래서 여길 택한 거야. 이 안에서는 죽는다고 해도 누가 죽었는지도 아무도 몰라. 아니 이 안으로 들어온 놈들 중 내가 허락하는 놈들 말고는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할 테니까 상관없다고 봐야겠지."
" 그 비밀이 지켜질 거라고 보는가?"
사유성은 사군양에게 눈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 공격준비를 하라. ]
사군양은 다시 전음으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무영환사대 대원들은 하나둘 허공으로 녹아 들어갔다.
" 방금 말했잖아. 이 안으로 들어온 놈들은 다 죽일 거라고."
" 자네 말대로 되기를 바라겠네."
협상의 여지도 없고 선택의 여지도 없다.
연우강은 이 안으로 들어온 자를 전부 없애기로 작심을 한 모양이다. 그럴 능력이 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대응해 주면 될 터이다.
사유성은 차가운 눈으로 연우강을 노려보며 환허무령대법술을 펼쳤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새로운 객체가 하나씩 튀어나와 연우강 전면으로 늘어섰다.
" 묘아!"
허상을 만들어내는 사유성을 보며 연우강은 허공에 대고 나직하게 불렀다.
[ 네, 네?]
느닷없이 연우강의 입에서 묘아라는 애칭이 흘러나오자 이지약은 깜짝 놀라 그를 보았다.
전에 대야벌로 들어가기 전 천하평에서 그에게 '이 소저'나 ' 묘아' 둘 중 마음에 드는 걸로 부르라고 한 적이 있었다. 지나가는 투로 한 말이지만 실상 연우강을 떠보기 위함이었다. '묘아'라고 부르면 마음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런데 그는 '이 소저'를 택했고, 관계를 갖고 난 후에도 그는 계속 '이 소저.'라고 불렀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가 '묘아.'라고 불러준 것이다.
" 싫어요?"
[ 당신은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해요.]
" 기분 좋다는 말?"
[ 저치들이 없었다면 당장 당신을 끌고 으슥한 곳으로 갔을 거예요.]
" 기분 좋다는 말로 받아들일게요."
[ 날아갈 것 같아요. 그런데......]
" 아까 그림자를 보는 건 차선이라고 하면서 다른 방법이 있다고 했잖아요."
[ 그랬죠.]
" 지금 그 방법을 가르쳐 줄게요."
" 연우강!"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연우강의 행동에 기분이 상한 듯 사유성은 광포하게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외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방에 무영환사대 대원들이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실체와 허상, 그리고 암기와 무기가 한데 어우러진 공격이었다.
" 그 방법은?"
콰앙!
연우강의 오른발이 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가슴이 한껏 오므려졌다가 펴졌다.
슈아악!
사망정주, 사망사화, 사망마립, 사망월반, 사망마비, 사망낭조, 사망지환, 사망혈삭이 동시에 소아져 나가고 그의 전방은 암기들로 인해 시커멓게 물들었다.
" 이건......"
사유성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전방에서 쏘아져 오는 암기의 수가 수백 개, 아니 수천 개로 보였다. 그 많은 암기들이 전부 산악과 같은 거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저 암기들 앞에서 환허무령대법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기에 불과했다.
빠져나갈 구멍도 없고, 막을 수 있는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아 버렸다.
퍽! 퍽퍽!
뭔가가 몸을 뚫고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 악!"
사유성은 의아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는데, 눈을 뜨고 있을 때보다 더 선명하게 보인다.
암기가 머리를 관통하면 머리가 부서지고, 몸을 관통하면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가루로 부서지기도 했다.
" 이기어검술!"
사유성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공간을 장악하고 무영환사대 무인들을 도륙하는 암기들은 전부가 이기어검술로 던져낸 것들이었다.
느닷없이 주변이 조용해졌다.
사유성은 눈을 떴다.
백여 개가 넘는 암기가 일렬로 늘어선 채 연우강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의 옷 사이로 스며들어 간다.
" 이기어검술인가?"
" 아마 그럴 거야."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무섭군."
" 그건 나도 인정해. 이것저것 주워 먹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괴물이 돼 버렸더라고. 아무튼 그만 끝내자고."
연우강은 양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그의 아홉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사망낭조가 일제히 허공을 갈랐다.
"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사유성의 동체가 갈가리 찢겨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찢겨나간 부분이 가루로 변해 흩어졌다.
" 그림지가 나발이고 전부 부숴버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첫 번째 방법이에요."
연우강은 허공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 그렇네요."
모습을 드러낸 이지약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개방 무인들과 싸움을 마치고 난 무영환사대 대원들의 수는 이백여 명 남짓이었다. 그런데 살아남은 자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부상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사유성의 말처럼 백육십여 개의 암기가 전부 이기어검술로 날아가 적을 없앴기 때문이었다.
연우강의 무공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찌익! 찌익! 찌익!
차르르! 차르르!
갑자기 공터 중앙에서 뭔가가 찢겨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자 이지약은 시선을 들었다. 개방 무인들이 상의에 담았던 보석을 연우강이 다시 한 곳으로 모으고 있었다. 연우강이 시선을 줄 때마다 보석을 담은 옷은 둥실 떠올라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러고는 소매가 찢겨 나가며 보석을 쏟아냈다.
" 이왕 왔는데 좀 챙겨 나갈까요?"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보석이 쌓인 곳으로 걸어갔다.
사망궤를 내려놓고 뚜껑을 연 다음 보석을 집어넣었다. 물론 보석을 집어넣을 때도 마라천력을 사용했다.
" 보석에 독이 묻어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 우린 약을 먹었잖아요."
" 그럼 그 약이 해독제란 말이에요?"
" 굳이 해독제가 아니더라도 그런 엄청난 영약을 먹었는데 독에 중독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상자 가득 보석을 담은 연우강은 뚜껑을 닫고 둘러맸다.
" 역시 돈 값을 하네요."
몸이 휘청할 정도로 무게감이 느껴지자 연우강은 싱긋 웃었다.
" 가죠."
두 사람은 광장 가장자리에 나 있는 수로를 따라 걸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발을 멈춘 곳은 또 다른 창고였다.
그곳에는 까까머리 중 백여 명이 쓰러져 있었다. 그들 등에는 바랑이 하나씩 둘러매어져 있었는데, 주둥이 쪽으로 보석이 흘러나와 있었다.
" 쯧!"
이지약은 혀를 찼다.
비록 평범한 승복을 입어 신분을 숨기려고 했지만 낙양 근처에는 소림사밖에 없다. 누가 보아도 소림사 승려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런데 중원 최대 사찰의 승려마저도 보물을 탐하는 모습을 보니 씁쓸했다.
" 그거 알아요?"
연우강은 시체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 어떤 거요?"
"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의 원인을 따지면 결국에는 단 세가지로 귀결된다는 사실 말이에요"
" 설마."
" 정말이에요. 딱 세가지 밖에 없어요."
" 어떤 건데요?"
" 첫째 돈, 둘째 권력, 셋째 여자."
" 풋!"
이지약은 피식 웃었다.
" 웃을 일이 아니에요. 묘아. 이런저런 이유를 대곤 하지만 깊이 파고들어 가면 결국 돈, 권력, 여자로 귀결되죠. 그걸 일컬어 사건 사고의 삼 요소라 하고요."
" 하긴......."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물론 연우강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그 세가지 이유로 인해 발생한 사건 사고를 제외하면 범죄는 몇 건 남지 않을 거라는 건 분명하다.
" 이 사람은....."
이지약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 아는 사람이에요?"
" 소림 사대금강의 한 명인 증장천왕 망현대사에요."
" 그럼 이곳에 죽어 있는 자들은 소림사 중이겠군요."
연우강은 마라천력을 끌어올려 바랑 안에 들어 있는 보물을 한 곳으로 모았다.
" 하남성에서 무승이 있는 곳은 소림사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이들을 누가......"
이지약은 승려들을 보았다.
죽은 중들의 모습은 마치 야수에게 공격을 당한 것처럼 갈가리 찢겨 나가 있었다. 망현대사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건 심후한 내공 때문인 듯했다.
" 야수구벽신권에 당한 거네요."
" 야수구벽신권이면 혁련무극?"
" 네.'
" 참, 그것 좀 물어보려고 했는데."
" 뭘요?"
" 야궐 궐주와는 어떻게 된 거죠?"
이지약은 그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물었다.
연우강은 혁련무극이 이끄는 야궐에 쫓겨 대야벌을 나갔다. 그런데 이곳에서 두 사람은 상당히 친분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 어쩌다 보니 친하게 됐어요."
" 어쩌다 보니?"
" 사람 사이라는 게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곤 하잖아요."
" 우리처럼?"
" 네, 우리처럼."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앞으로도 계속 좋은 사이가 유지될 것 같아요?"
" 우리 사이를 말하는 거예요, 아니면 혁련무극과 저 사이를 말하는 거예요?"
" 내가 책임지라고 매달리지만 않으면 우리 사인 문제 없다고 했잖아요."
" 혁련무극과의 관계도 문제없을 것 같아요. 그는 무영의 일인이었고 그것과는 별도로 제게 목숨을 빚졌거든요."
" 그럼 두 번의 빚을 졌다는 거예요?"
" 네.' .
" 대야벌의 벌주가 되겠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군요."
수로를 따라 걷던 두 사람은 또 다른 공간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거쳐온 곳과는 달리 그 공간에는 갑옷을 걸친 조각상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조각상 사이는 물론이고 안쪽 벽면에는 자색 무복을 걸친 자들이 뭔가를 찾고 있었다.
연우강과 이지약이 들어서자 자색 무복을 걸친 자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 연우강?"
자색 무복을 걸친 자들 속에서 나직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사내를 발견한 연우강은 피식 웃었다.
그는 다름 아닌 남철진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