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저문다는 것은?
' 구파일방이 드디어 힘을 합쳤다!'
' 그들이 세운 문파는 구룡천문이고 총단은 개봉에 있다.'
' 곧 개파대전이 열린다!'
소문이 돌기가 무섭게 강호 무인들은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구파일방이 하나가 됐다는 소식에 그렇게까지 폭발적인 반응을 보여줄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수많은 무인들이 구룡천문에 가입하겠다며 길을 나섰다.
"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철상은 적잖이 놀랐다.
그를 비롯한 잠룡대 대원들은 규동의 밀천 총단으로 가는 길이었다. 보름 전부터 시작된 철무련과 밀천의 전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정보가 입수됐고, 이철상 일행은 열 명씩 한 조를 이뤄 규동으로 향했다.
연우강이 이철상 일행을 만난 지점은 상강, 증수, 내수, 세 개의 강이 만나는 형양의 한 객잔이었다.
" 그 정도야?"
연우강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일행의 얼굴을 보았다.
이철상 일행을 차례로 살피던 그의 눈이 수여설 얼굴에서 멈췄다. 수여설의 얼굴은 만개한 꽃처럼 환했다. 갈수록 아름다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시선이 마주치자 수여설은 혜광심어를 보냈다.
하오밀문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담당하는 사람이 그녀였다. 그런데 최근에 엄청난 내용이 들어 있는 보고서가 올라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남경왕 주진무와 연우강이 얽힌 사건이었다.
- 구룡천문 무인들과 남경왕 심복 넷을 없앤 사건을 말하는 거예요?
- 네, 일을 너무 크게 벌인 것 아니에요?
- 지금은 그렇게 해야만 해요.
- 왜요?
- 대야벌과의 싸움이 막바지에 이르렀기 때문이에요. 자칫 잘못하면 지금까지 이뤘던 모든 것을 남경왕 입 안에 털어 넣는 꼴이 되고 말아요.
" 아마......"
연우강과 수여설이 혜광심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이철상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고 입을 닫았다.
" 계속해도 돼."
연우강은 이철상을 보며 말했다.
" 아마 이 객잔에 있는 자들도 최소한 삼 할은 하남성으로 향하고 있을 겁니다."
" 어떻게 생각해?"
갑자기 연우강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 뭘 말입니까?"
" 전쟁이 끝났을 때 강호 무림에 대한 그림이 어떻게 나올건지 그걸 묻는 거야."
" 솔직한 대답을 원하십니까?"
" 당연하지."
" 대야벌 시대는 저물었습니다."
이철상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 저물어?"
" 네."
" 그 정도로 심각한 거야?"
연우강은 이철상을 가만히 보았다.
더 이상 대야벌을 강호 무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거나, 밀천과 동격으로 전락하여 과거의 위용을 잃었다는 그런 대답을 기다렸다.
즉 완벽했던 장비가 약간 고장난 그런 상태라는 답 말이다. 그 상태라면 얼마든지 수리가 가능하고, 제대로 수리만 하면 원래보다 더 나은 상태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저물었단다.
저물었다는 말은 퇴락했다는 말이고, 사람으로 치자면, 어떤 방법을 써도 젊음을 되돌릴 수 없는 노인이 됐다는 뜻이다.
" 전엔 강호 무인들은 대야벌을 경외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감히 넘보지 못하는 황실과 같은 존재였죠.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그들은 대야벌을 피곤한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 피곤한 존재?"
" 힘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지만, 뒤돌아서면 바로 욕을 하는 그런 존재라는 거죠."
" 시장 통의 건달과 같은 거네?"
" 이를테면 그렇습니다."
" 만일 말이야."
연우강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 말씀하십시오."
" 강호 무림을 완벽하게 정리해서 대야벌을 교랑 네게 넘겨주면 다시 원래대로 고칠 수 있을 것 같아?"
" 제가 벌주가 됐을 경우를 말하는 겁니까?"
" 널 방해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고, 네 말이 곧 진리고, 법인 상황을 가정했을 때."
" 한 세대는 가능합니다."
" 한 세대라면?"
" 제가 벌주일 동안은 군림이 가능할 겁니다. 벌주가 되기 위해 보았던 피보다 더 많은 피를 봐야 하겠지만요."
" 결국 대야벌 마지막 벌주이자 폭군으로 기록될 거란 말이구나."
" 그럴 겁니다."
" 확실한 거냐?"
" 우리 미랩니다. 많은 밤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 그렇겠지."
연우강은 찻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정원으로 나갔다.
" 심란해요?"
뒤따라온 수여설이 물었다.
" 예상했던 대답이었어요."
" 연 공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 아무리 내공을 기르고, 좋은 영약을 먹는다고 해도 세월을 거슬러 젊어질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노력해도 안 되는 게 분명히 있거든요."
" 대야벌이 그렇다는 거예요?"
" 수십 번 바뀐 왕조에 비하면 대야벌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오랜 세월을 버틴 거예요."
" 연 공자가 벌주 자리에 앉아도 불가능해요?"
" 전 부수는 사람이지 창조하거나,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 제가 보기엔 잘해낼 것 같은데."
" 그건 수 소저가 절 객관적으로 보지 못해서 그런 거예요."
" 제가 객관적이지 못한다는 거예요?"
" 원래 함께 자고 나면 그 사람 편이 되거든요. 특히 아침에 일어나서 맡는 상대의 입 냄새마저도 정겨운 시기에는 객관적이 될 수가 없죠."
" 피이!"
수여설은 입을 삐죽 내밀고 연우강을 흘겨보았다.
" 제 말이 틀려요?"
" 하지만 남경왕 주진무와 싸우려면 벌주가 돼 있어야 하잖아요."
" 제가 말한 건 그마저도 정리를 하고 났을 때에요."
" 그렇군요. 그럼 앞으로 무림을 이끌어갈 자들이 누구라고 보세요?:"
" 신선함으로 가득한 문파가 될 거예요."
" 구파일방?"
" 대야벌이나 밀천은 오직 무인들 집단이지만 구파일방은 양민들과 함께 숨을 쉬고 있어요. 즉 양민들의 삶 속에 깊이 파고들어가 있다는 뜻이죠."
" 양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자들이 결국엔 강호 무림의 주인이 된다는 뜻인가요?"
" 겉보기에는 가장 약한 것 같지만 세상을 바꾸는 자들은 양민들이거든요. 그들의 지지를 받게 되면 결국엔 주인으로 등극하게 되죠."
" 그럼 앞으로는 구파일방 세상이 되겠군요."
" 그렇게 될 것 같네요. 하지만 그것도 제 허락을 받아야 해요. 제 허락을 받지 않고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무림의 주인은 되지 못해요."
연우강은 남은 차를 한 입에 털어 넣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식사가 준비돼 있었다. 식사는 쇠고기 야채 볶음이었다.
" 참! 아버지 쪽은 어때요?"
쇠고기 야채 볶음을 보자 문득 절강성으로 간 아버지 일행이 떠올랐다. 워낙 강자들로 구성돼 있어 특별히 걱정할 것은 없지만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 절강성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어요. 뒤쫓아오는 자들 때문에 늦어졌대요."
" 그랬군요."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에 열중했다.
" 무공은 좀 늘었어?"
연우강은 건너편에 앉은 윤허를 보며 물었다.
" 글쎄 그게......"
" 무섭게 강해지고 있습니다."
윤허가 말끝을 흐리자 옆에 앉은 거철산이 대답했다.
" 얼마나 강해졌는데?"
" 저보다 한 단계 위입니다."
" 쉬어가면서 해라, 인마. 무공 익히다가 머리 터져 죽겠다."
" 천재니까 쉽게 말할 수 있겠죠."
윤허는 툭 쏘아붙였다.
그동안 그는 거철산으로부터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혼을 전수받고는 미친 듯이 연마했다. 그러다가 일천파류혼에 또 다른 초식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 무공에 일천참혼류라는 이름도 지었다.
일천참혼류를 완성하고 나자 이제는 연우강을 잡을 수 있을 정도는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나 연우강은 끝이 보이지 않는 아주 먼 곳으로 가 있었다.
" 잠룡들치고 천재 아닌 녀석들이 있기나 해? 너도 천재 중의 한 명이잖아, 자식아."
" 총대주님은 우리들보다 한 수 위의 천재죠."
" 그건 윤 군장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 제가 뭘 잘못 알고 있다는 겁니까?"
" 난 윤 군장 너보다 월등히 뛰어난 천재가 아니라는 거야. 다만 다른 점은 있어."
" 다른 점?"
" 다른 점이 아니라 차이점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 머리는 분명 차이가 있죠."
" 그건 아니라고 했잖아. 인마."
" 그럼 어떤 차이점이 있다는 겁니까?"
" 나는 즐기고 너는 익힌다는 차이점이 있어."
" 총대주는 즐기고 전 익힌다고요?"
" 응, 나는 늘 편안한 상태고 너는 늘 조급한 상태라는 거야. 내 머릿속에는 온갖 잡다한 것들이 다 들어 있어. 그 잡다한 것들 중에는 여자 나체도 있다고, 하지만 윤허 네 머릿속에는 무공 구결들만 들어 있어. 오늘도 내일도 모래도 글피도... 지금 머릿속을 채운 무공을 익히면 다른 무공을 채워넣고, 그 무공을 익히면 또 다른 무공을 채워 넣어. 무공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무공으로 하루를 마감한다는 거야."
" 하지만 그 바람에 일천파류혼에 숨겨진 초식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 네가 찾아낸 그걸 난 일천파류혼을 익힌 첫날 찾아냈어."
" 그것도 즐겼기 때문이란 말입니까?"
" 즐긴다는 건 관조한다는 뜻이야. 즉 멀리 떨어져서 무공을 바라본다는 거지 가까이서 보면 분명히 좀 더 세밀하게 볼 수 있고, 정수를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무공 초보들에게 해당하는 말이야. 초보들은 분명 무공 초식을 이루는 글자 하나하나에 집중해야 해. 하지만 너처럼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무인들은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안목을 길러야 해. 무공에 대해서는 잊고 삶을 즐기려고 해봐."
연우강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수여설이 찻잔을 건네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마친 연우강은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가요."
그는 수여설을 보며 말했다.
수여설은 깜짝 놀란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와 몇 번 관계를 갖긴 했지만 아직 잠룡들에게는 비밀이었다.
그런데 이철상 일행이 있는 곳에서 가자고 한 것이다.
" 저 녀석들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그래요."
연우강은 이철상과 윤허 일행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러고는 수여설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 왼편 별채에 방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밖으로 나가는 연우강을 보며 이철상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거봐요."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별채로 향했다.
촛불이 밝혀진 별채의 방에는 말린 과일과 육포가 올려진 간단한 안주상이 차려져 있었다.
방을 가로지른 연우강은 창문을 열었다.
" 강이네요."
창문 바로 아래쪽에는 강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상강의 지류인 증수였다.
" 먼저 씻을게요."
증수 물을 바라보던 수여설을 욕실로 향했다.
" 함께 씻을까요?"
연우강은 짖궂은 얼굴로 물었다.
" 헹! 꿈도 크셔."
수여설은 혀를 쑥 내밀고는 소리나게 욕실 문을 닫았다.
욕실 안에는, 물이 가득찬 사각형 형태의 욕조가 놓여 있었다. 수여설은 물속에 손을 넣어 보았다.
" 끄응!"
그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빙공을 극성으로 익힌 그녀는 삼매진화를 일으켜 물을 데울 수가 없었다. 결국 물을 데우기 위해서는 연우강이 있어야만 했다.
그녀는 문을 열고 연우강을 불렀다.
" 수 소저에게는 내가 있어야 한다고 했잖아요."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욕실로 들어가 혈잔수를 끌어올려 물을 데웠다. 금세 수증기가 피어올라 욕실 안이 뿌옇게 변했다.
" 이제 됐습니다."
물을 데운 연우강은 이내 몸을 돌렸다.
" 괜찮아요. 연 공자."
" 네?"
연우강은 수여설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옷을 벗은 채 욕조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었다.
연우강은 숨이 턱 막혔다.
욕조 안을 가득 채운 뿌연 수증기는 속살이 살짝살짝 비춰 보이는 옷처럼 그녀의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색목인의 피를 이어받아, 그렇지 않아도 풍만한 그녀의 몸매는 삼십대에 접어들면서 이제는 농밀한 염기마저 뿌려대고 있다. 연우강은 아래쪽으로 피가 쏠리는 듯하자, 심호흡을 했다.
" 전 남궁 소저처럼 유연하지 못해서 등에 손이 닿지 않아요."
수여설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 그러지요."
연우강은 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물은 적당하게 뜨거워 온몸이 나른하게 풀렸다.
" 이쪽으로 와요."
연우강은 오른팔을 활짝 폈다.
" 그것보다는 이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수여설은 활짝 웃으며 연우강의 허벅지에 엉덩이를 걸치고 두 다리로는 허리를 감았다. 그러고는 손은 자연스럽게 연우강의 어깨 위에 놓았다.
" 자세가 너무 야한 거 아니에요?"
굳이 시선을 틀 필요가 없었다. 저절로 가슴으로 시선이 갔다.
" 우리 둘만 있는 데 뭐 어때요."
수여설은 보란 듯이 가슴을 내밀었다.
" 괜찮아요?"
" 뭐가요?"
" 어머니 말이에요."
" 괜찮고 말고 할 게 아니잖아요. 그분은 그분이고 나는 나니까. 그리고 제 나이가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잖아요. 물론 혼이란 형식을 거치긴 하지만."
" 혼인?"
" 싫어요?"
수여설은 연우강을 빤히 보았다.
" 혼인은 내 취향이 아닌데....."
연우강은 말끝을 흐렸다.
" 왜 혼인이 싫은 거죠?"
" 글쎄요. 그건 나도 모르겠어요."
연우강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그도 모른다. 말로는 황금백수가 꿈이라 혼인이 싫다고 했지만, 가만 생각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냥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 혹시 누군가에게 얽매이는 게 싫은 거예요?"
" 그것도 판단이 서지 않아요."
연우강은 고개를 저었다.
" 얽매이는 게 싫은 것도 아니고, 여자를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혼인은 싫다는 거예요?"
" 제가 좀 이기적인가요?"
" 여자뿐 아니라 남자들 입장에서 봐도 충분히 이기적이라고 할 거예요."
" 여자는 이해를 하겠는데 남자는 왜?"
" 여러 여자를 붙잡고 놔주질 않고 있잖아요. 다른 남자들은 그만큼 기회가 줄어들게 되죠."
" 그건 좀 억지다."
" 억지가 아닐 제 말이 맞아요. 그건 그렇고 아이는 어때요?"
" 뭐, 뭐가요?"
아이라는 말이 떨어지자 연우강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 응?'
수여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만일 그의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다리로 허리를 감은 상황이 아니었다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반응은 미약했다.
하지만 수여설은 분명 느꼈다.
아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연우강은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던 것이다.
그녀는 연우강의 눈을 보았다.
평소에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의 눈빛이 지금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아이, 싫어하세요?"
그녀는 연우강의 눈을 살피면서 다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 아뇨."
눈빛의 흔들림은 더욱 커졌다.
" 그럼 좋아해요?"
" 싫어하지 않는다고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요."
" 지나가는 아이들을 보면 예쁘지 않아요?"
" 전혀."
연우강은 고개를 저었다.
" 조카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 연화?"
" 연화는 예뻐요?"
" 네."
" 자주 안아주고 그래요?"
" 그거야..... 조카니까."
" 솔직하게 말해 보세요."
" 내가 일부러 안아준 적은 없고, 연화가 다가왔을 때만 어쩌다 한 두 번?"
" 거의 안아준 적이 없다는 말이네요?"
" 그거야 내가 집을 떠나 있었으니까 그렇죠."
" 연화가 어렸을 때는 함께 살았을 거 아니에요."
" 그때 연화뿐만 아니라 나도 어렸어요. 부모님께 반항하느라 조카가 있는지도 몰랐고요."
" 혹시 일부러 모른 척한 거 아니에요?"
" 그건......."
연우강은 놀란 얼굴로 수여설을 보았다.
그녀의 말이 맞다. 우진 녀석이 아버지가 됐다는 말을 듣고도 찾아가 보지 않았고, 축하한다는 말도 해주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딸을 낳았나 보다 하며 그냥 넘어갔던 것이다.
" 에이, 설마요. 내가 연화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연우강은 부정하듯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 그......렇죠."
이번에는 수여설이 말을 더듬었다. 연우강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엔 연민이 배어 있었다.
' 그랬군요.'
연우강이 혼인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는 혼인이 싫은 게 아니라 혼인으로 인해 태어날 아이를 마뜩잖아하고 있다.
그는 태어날 아이를 자신과 동일한 존재를 여기고, 자기처럼 버려질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하고 있다.
물론 그런 생각은 그의 잠재의식 속에만 존재하고 있을 뿐 그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던 그도 사실은 많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죠?"
연우강은 물었다.
" 그냥요."
수여설을 좀더 가까이 다가앉았다.
아이라는 말 때문인 듯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당했던 그가 잔뜩 위축돼 있었다.
" 혹시 임신한 거예요?"
임신했냐는 물음에 수여설은 연우강의 눈을 가만히 보았다. 그의 눈빛은 조금 전처럼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아니에요, 임신은 무슨."
수여설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 그냥 이대로 살아요. 내일과 모레는 생각지 말고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도록 해요."
그녀는 얼굴을 숙여 입을 맞췄다.
하지만 연우강의 몸은 잔뜩 경직돼 있었다.
수여설은 연우강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더 적극적이면서 대담하게 행동했다. 어느덧 연우강도 그녀와 보조를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 그래요, 우강. 지금은 이 상태가 좋을 것 같아요.'
수여설은 연우강의 머리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뭔가 기대 때문인 듯 그녀의 아랫배가 위아래로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
서호는 전당강 포구를 막아 놓은 인공 호수다.
하지만 그 크기는 바다라고 여겨질 만큼 거대하고 또 아름답다. 서호의 아름다움은 중원 사대미인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서시에 비견되기도 한다.
당나라의 시인 이백은 서호를 서시에 비유했는데, 맑은 날 서호는 화장을 한 서시와 닮았고, 흐린 날 서호는 서시의 화장하지 않은 모습이라고 읊었다고 한다.
서호가 그만큼 아름답다는 의미였다.
중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라고 하였던 서호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 기운은 다름 아닌 살기였다.
" 놈들은 어디 있느냐?"
관복으 걸친 관인 한 명이 뒤에 선 자를 향해 물었다.
그는 금의위 남진무사 광양 이대진이었다.
" 정가산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 인원수는 파악했느냐?"
" 사백오십 명입니다."
" 사백오십 명이라.......'
이대진은 말끝을 흐렸다.
그가 동원한 금의위 위사들은 이천 명익, 서호 주변에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었다.
" 놈들이 빠젼갈 구멍은 없기는 한데....."
이대진의 고민은 따로 있었다.
천라지망 안쪽에 있는 연금석 일행이 빠져나갈 길이 없기도 하지만 금의위 위사들 또한 함부로 공격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즉 공격할 명분이 없다고 해야 했다. 만일 명분도 없이 공격했다가, 금릉 연씨 세가와 친한 자들에게 역공당할 염려가 있다.
그렇지 않아도 모든 부분에서 남철진보다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공연한 공명심으로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 밀천에서는 사람이 왔느냐?"
"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 늦는......."
" 접니다. 진무사."
수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며 위사가 다가왔다.
" 무슨 일이냐?"
" 밀천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 접객실로 모셔라."
" 알겠습니다. 진무사."
위사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가자 이대진은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가 도착한 곳은 서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건물의 안이었다. 그 건물은 금의위에서 운영하는 안가 중의 한 곳이었다.
" 처음 뵙습니다. 난 밀천 대외총관인 서담상입니다."
짙은 눈썹에 장비 수염을 한 자가 이대진을 향해 포권을 했다.
" 저담상이면 혹시 별호가 칠비천수 아니오?"
이대진은 깜짝 놀랐다.
" 그렇습니다. 대인."
저담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 하하하! 이거 반갑네. 철비. 자네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네. 현상엽부들 중 최고 실력자라는 소문이 자자하더니 밀천의 대외총관이 됐나 보구먼."
이대진은 웃으며 저담상을 보았다.
칠비천수 저담상.
강호 무림에서는 현상범을 잡은 인강 사냥꾼이라고 무시하지만 금의위와 동창에서는 최고의 사냥꾼으로 상당히 유명인이었다.
" 천주님께서 절 인정해 주셨습니다. 대인."
이대진은 자리를 권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부관이 차를 내왔다.
" 북망산에서 곤욕을 치렀다고 하던데 괜찮은 겐가?"
이대진은 북망산에서 있었던 일을 먼저 꺼낸 이유는 북진무사 쪽에서 그곳에 대한 정보를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대진이 알고 있는 것은 각 세력들이 서로 상잔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뿐이었다.
" 그곳으로 갔던 모든 세력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우리 밀천 또한 사유성을 포함하여 환밀가 무인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적은 피해를 입은 셈입니다. 담대천호와 모두악이 이끌고 왔던 대야벌은 몰살을 당했고, 구파일방 무인들 또한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 서로 상잔했다는 말인가?"
" 서로 상잔한 것도 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로부터 기습을 당했습니다."
"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
이대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북망산으로 모여든 자들은, 대야벌, 밀천, 남철진이 이끄는 금의위 그리고 구파일방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전 무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무인들의 수도 거의 일만 명에 육박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살수를 펼친 자들이 있다니.
그들을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살수를 펼치기 위해서는 엄청난 힘을 보유한 세력이어야만 한다.
' 새로운 세력의 등장이란 말이군.'
이대진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어렸다.
" 나도 말로만 들었을 뿐 정확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곳에 있던 무인들 대부분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을 피해 도망쳤다고 합니다."
" 밀천에서도 그들의 정체를 아직 파악하지 못한 건가?"
" 불사선곡이 아닐까 추측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 불사선곡이라......."
"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대인."
" 비밀로 해야 할 사안인데 내게 말하는 거 아닌가?"
" 대인에게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잖습니까."
" 하하하! 이거 빚을 졌구려, 저 총관."
이대진은 호칭을 자네에서 저 총관으로 슬쩍 바꿨다.
" 빚이라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담상은 빙그레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 아무튼 고맙네. 그런데 저 총관이 이곳으로 온 이유는?"
" 절강성에 있는 대야벌 지부를 없애기 위해섭니다. 이곳만 정리가 끝나면 대야벌 지부는 전부 사라진다고 보면 됩니다."
" 야궐 지부는 그대로인 걸로 알고 있네만."
" 야궐은 대야벌과 척을 진 상황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대야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 그럼 대야벌은 고립됐다는 말이구먼."
" 상황은 그렇습니다만 워낙 거대한 조직이라 고립됐다는 말이 어울릴는지 모르겠습니다"
" 하하하! 저 총관 같은 유능한 사람이 있는데 뭐가 걱정인가. 그보다 부하는 몇 명이나 데리고 왔는가?"
" 일류 고수 칠백을 데리고 왔습니다."
" 칠백 명이라... 그 정도면 아주 적당하구먼."
이대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저담상은 비로소 앞에 놓인 찻잔을 그러쥐었다.
" 그들은 지금......."
이대진은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그러고는 서호 주변 한 지점을 손가락을 짚었다.
" 정가산이군요."
" 그렇네 저 총관."
"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 동창을 이용할 참이네."
" 동창이라고요?"
저담상은 고개를 갸웃했다.
금의위와 동창은 견원지간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동창을 이용하겠다니.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연우강은 동창의 소제독이라 불리는 유설연과 상당한 친분이 있다는 걸 아는가?"
" 알고 있습니다."
" 그 친분이 놈들을 옭아 넣게 될 거네."
하지만 저담상은 여전히 이대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 아무튼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되네. 이번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정신없이 놈들을 몰아쳐야 하네."
" 알겠습니다. 대인, 곧바로 부하들을 투입하도록 하겠습니다."
" 그렇게 하는 게 아니네, 저 총관."
저담상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이대진인 얼른 붙들었다.
" 다른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 밀천 무인들은 바다에서 상륙한 왜구가 돼줘야 하네."
" 그게 무슨 말입니까?"
" 놈들을 호위하고 있는 자들 중 왜구가 사백여 명이 있는 걸로 밝혀졌네."
" 그럼 왜구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바로 공격하면 되지 않습니까?"
" 그들이 은신술로 숨어 있지만 않으면 진작 공격했을 거네."
" 은밀막부 무인들이군요."
저담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 해줄 수 있겠는가?"
"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담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 저 친구를 따라가면 왜구들이 입는 옷과 무기를 줄 거네. 그걸 부하들에게 입히도록 하게."
" 알겠습니다. 대인."
저담상은 고개를 숙이고는 한편에 서 있던 자를 따라 나갔다. 저담상이 나가자 이대진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 남철진, 너는 무식하게 힘으로 밀어붙였지만 난 머리로 밀어붙인다.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남철진."
이대진은 찻잔을 단숨에 비우며 중얼거렸다.
그는 남철진이 연우강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 너를 잡으면 난 남철진과 비슷한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다. 너를 반드시 잡을 것이다. 연금석!"
이대진의 눈동자에서 새파란 광망이 쏘아져 나왔다.
**********
" 어떤가?"
욱일승은 정찰을 나갔다가 돌아온 전장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 전당강으로 나가는 길목은 물론이고, 남쪽, 북쪽, 서쪽이 전부 막혔습니다."
전장사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막힌 정도가 아니라 천라지망이 펼쳐진 상태였다. 지금 상태라면 소리 없이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 금의위 무사들인가?"
" 그렇습니다. 어르신."
" 작정을 하고 나선 모양이군."
욱일승은 심각한 얼굴로 이자승을 보았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자들이 무인들이라면 진작 치워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무인들이 아니라 금의위 위사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금의위에서 꼬투리를 잡기 시작하면 금릉 연씨 세가 힘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 상황만큼은 막아야 할 터였다.
" 동창 지부에 연락을 했으니까 기다려보자."
말은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도 이자승의 얼굴은 어두웠다.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였고, 서호에서 배를 타고 항주만까지 가면 추격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항주만을 얼마 남겨놓지 ㅇ낳고 서호에서 발이 묶여 버린 것이었다.
삐이익! 삐이익! 삐이익!
" 응?"
이자승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서쪽 하늘 위로 십여 개의 불화살이 날아 올라가고 있었다. 그것은 신호를 보낼 때 사용하는 효시였다.
" 경계를 강화하라!"
" 크악!"
" 으아악!"
이자승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후미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 적입니다. 어르신."
그리고 암자대 대원이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 어떤 자들이냐?"
전장사는 대원을 보며 물었다.
" 우린 동영인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 미나모토 가문이더냐?"
" 그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자들도 은신술을 펼치고 있습니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또다시 후미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휙!
그리고 암자대 대장 일라잉 일행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려왔다.
" 어떤가?"
" 적이 너무 많습니다. 어르신."
" 좋네. 천천히 물러나도록 하게."
이자승은 고개를 돌려 두작군을 보았다.
" 알았소, 형님."
고개를 끄덕인 두작군은 열 명과 함께 뒤편으로 향했다. 두작군 일행이 뒤로 가자 이자승은 몽요의 동생이자 은밀막부의 부주인 백천을 보았다.
" 알겠습니다. 어르신."
고개를 숙인 백천은 주변을 향해 나직이 소리쳤다.
" 경계 수준을 특급으로 올린다. 진영 안으로 들어오는 자는 무조건 척살하라!"
" 하이."
나직한 외침을 뚫고 싸늘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 가요, 아주머니."
몽요는 주변을 둘러보며 이숙경에게 말했다.
" 공연히 우리 때문에......"
이숙경은 미안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섭섭해요. 저희들이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연공 덕분인데요. 그가 아니었으면 우리 은밀막부는 진작 전멸했을 거예요."
" 그것과 이건 다르잖아요."
" 전 같다고 생각해요. 아무튼 잘 될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몽요는 앞으로 나서서 길을 잡았다.
" 으아악!"
" 아악!"
" 왜구들이 정가산으로 들어갔다! 위사들은 정가산으로 가라!"
" 으음!"
이자승은 신음을 내뱉었다.
이제야 공격해 온 자들이 왜구 복장을 하고 있었다는 말의 의미를 알 듯했다. 금의위에서는 이편을 칠 명분을 얻기 위해 왜구로 꾸민 자들을 동원한 것이다.
왜구 복장을 한 자들은 계속해서 쫓아올 테고, 금의위들은 그들을 쫓게 될 테니까 끊임없이 쫓기게 될 게 뻔하다.
" 머리 뛰어난 놈이 금의위에 있는 모양이다."
욱일승이 이자승을 돌아보며 말했다.
" 그런 것 같다."
이자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날렸다.
[ 작군!]
욱일승은 후미로 간 두작군에게 전음을 보냈다.
[ 말하시오.]
[ 정체는 알아냈는가?]
[ 정체는 모르겠지만 왜놈들이 아닌 건 분명하오.]
두작군은 방금 죽인 자의 머리를 보며 말했다.
동영인들은 머리만 보면 금세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공격해 오는 자들의 방갓을 벗겨내자 중원인의 머리와 얼굴이 나온 것이다.
" 하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지."
두작군은 어둠 속을 향해 검을 쓸었다. 그의 손에 들린 청로가 움직였다. 청로의 움직임은 아주 느렸다. 하지만 청로의 끝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엄청났다. 청로의 끝이 향하는 곳은 그야말로 초토화되고 있었다.
완전한 광풍파랑십삼절, 아니 두작군에 의해 재해석된 광풍파랑십삼절이었다.
퍽! 퍽퍽퍽! 퍽퍽! 퍽퍽!
검 끝에서 쏘아져 나간 검탄강기가 전면 허공을 강타했다.
" 크윽!"
" 아악!"
"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연이어 들려왔다. 하지만 죽임을 당한 자는 적들만이 아니었다. 비명을 지르진 않았지만 암자대 대원들도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은신술로 숨어 있던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죽임을 당했다는 의미다.
" 차앗!"
허일삼의 입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는 강하게 발을 구르며 어둠 속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가 양손을 허공으로 뻗어낼 때마다 거력이 쏟아져 나갔다.
그것은 일천독신행에 이은 일천파류혼이었다.
검을 휘두르면 검탄강기가 쏘아져 나가고, 손을 뻗어내면 장강이 전명을 초토화시켰다.
비명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갈가리 찢겨나간 시체가 비처럼 뿌려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왜구 복장을 한 자들은 동료들의 시체를 밟으며 밀고 들어왔다.
결국 암자대 대원과 두작군 일행은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두작군 일행이 물러날수록 적의 공격은 더욱 거칠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금의위 복장을 한 자들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일행이 나아가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고, 두 시진 후 정가산을 빠져나와 남으로 내달렸다.
" 어떻게 할 참인가?"
욱일승은 이자승 옆을 따라 붙으며 물었다.
" 남으로 가다가 소제를 따라 북으로 올라간 다음 백제를 따라 동쪽으로 갔다가 다시 남으로 내려올 생각이네."
" 호수를 한 바퀴 돌 참인가?"
" 기현을 만나기로 한 장소가 서호 남서쪽에 있는 봉황산이네."
" 언제 만나기로 한 건가?"
" 삼 일 후에 그곳으로 오기로 했네."
" 그럼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겠구먼."
" 그래야지. 전 대장!"
이자승은 전장사를 불렀다.
" 하명하십시오. 어르신."
" 소제 입구에 보면 수전이라는 갈대밭이 있다. 그곳까지 전력을 다해 달려라!"
" 뒤쫓아오는 적은 어떻게 합니까?"
" 그들은 그대로 두고 달리면 된다."
" 알겠습니다. 어르신."
잠시 후 이자승 일행은 싸움을 피하고는 전력을 다해 남쪽으로 내달렸다.
" 놈들이 도망친다!"
" 쫓아라!"
" 서둘러라!"
밀천 무인들은 고함을 내지르며 은밀막부 무인들을 쫓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