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휴식은 늘 필요하다.
절강선 동창 지부 지부장인 채성만은 초저녁잠이 많은 자였다. 하지만 그는 요즘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바로 보고서 작성 때문이다.
며칠 전 금의위 동향을 샅샅이 파악하여 보고하라는 명령서가 상부로부터 내려왔는데 그곳에는 제독보다 더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소제독 유설연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그날부터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머리를 짜냈다.
사실 일하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보지 않으면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보고서로 하는 것밖에 달리 수가 없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하급 관리들은 일보다는 보고서 작성에 더 열을 올린다.
하지만 채성만이 보고서 작성에 열을 올린 건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고 노후 준비도 끝났다. 출세에 대한 미련은 버린 지 십 년이 넘었다.
이제는 현역을 떠나 은퇴를 해야 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지부장 자리에 연연하고 있는 건, 내시가 되기 전에 얻었던 아들 때문이었다.
그 아들의 출세를 위해 지부장 자리를 유지하고 있고 지금껏 가짜 보고서를 상부에 올렸던 것이다.
금의위는 서호를 중심으로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으나, 연가주 일행은 이미 배편으로 전당강을 빠져나갔습니다. 오늘 밤이 지나면 그들은 전단강을 빠져나가 항주만으로 들어갈 걸로 보입니다.
이제........
" 접니다. 지부장님."
방금 작성한 보고서를 보고 있는데 부지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쩐 일이냐?"
채성만은 물었다.
" 하오밀문 문도가 찾아왔습니다."
" 이름이 뭐라고 하더냐?"
" 절강 지부장 기현이라고 하였습니다."
" 손님방으로 안내해라."
" 알겠습니다. 지부장님."
부지부장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채성만은 첩지를 돌돌 말아 손가락 길이의 대롱이 집어넣고 뚜껑을 닫아 밀봉했다. 그러고는 대롱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가 도착한 곳은 별채의 손님방이었다.
손님방 안에는 부지부장인 양상휘와 처음 보는 중년 사내가 앉아 있었다.
채성만이 들어가자 두 사람은 동시에 일어났다.
" 전 하오밀문 절강 지부장 기현입니다."
중년 사내가 채성만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 늦었구나."
채성만은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사내의 몸에서 악취가 풍겨 나왔던 것이다. 다른 사람은 느끼지 못할 그런 냄새였지만 채성만은 코가 워낙 예민하여 금세 맡을 수 있었다.
" 죄송합니다. 대인. 다급한 일이 생기면 대인을 찾아가라고 하셔서......"
기현은 몸둘 바를 몰랐다.
상대는 동창의 지부장, 하오밀문의 문도인 그가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기현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 어떤 급한 일이 생겼단 말이냐?" 로 스며들어오면서 짜릿한 느낌이 뇌리를 강타했다. " 금릉 연씨 세가 가주 가족이 포위를 당했습니다."
" 금의위 위사들에게 포위를 당했단 말이냐?"
" 그렇습니다. 어르신."
" 내가 어떻게 도와주기를 바라느냐?"
" 그분들을 만나기로 한 장소가 봉황산입니다. 봉황산 남쪽 산기슭에 동창 무인을 파견해 주셨으면 합니다."
" 그곳에서 동차잉 작전을 펼치는 것처럼 하란 말이구나."
" 그렇게 하면 금릉 연씨 세가 가주 가족은 곧바로 전단강으로 가서 배를 탈 수가 있습니다."
" 금의위 위사의 수는 어느 정도냐?"
" 우리 하오밀문에서 파악한 수는 천오백여 명입니다."
" 내가 거느리고 있는 동창 무인의 수는 삼백 명이 채 되지 않는다."
" 그럼?"
기현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절강성 지부장인 채성만이 연 가주 일행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연 가주 일행은 몇 명이더냐?"
" 사백여 명입니다."
" 그들 전부를 구하는 건 무리다, 기현."
" 하면?"
" 연 가주 가족만 따로 구하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 그분들만 따로요?"
" 연 가주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는 상당한 고수들로 알고 있다. 그들이 금의위 위사들을 유인해 가면 일이 좀더 쉬워질 것 아니냐."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어르신.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만날 장소는 어디로 할까요?"
" 사흘 후조문에서 만나자고 해라. 그곳에 동창 전함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어르신."
" 그만 나가보거라."
" 수고하십시오."
기현은 포권을 취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별채를 나와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을 나선 기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창의 소제독이라고 불리는 유설연의 명령이다. 그런데 채성만은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과 같은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권력으로 먹고사는 자들로서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 하긴 출세와는 상관없는 나이니까.'
기현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주름으로 뒤덮인 채성만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미 황혼녘에 접어든 채성만이 권력에 욕심을 둔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공직을 떠날 때까지 사고 없이 보내고 싶은 그의 입장에서는 이번 사건을 짜증스럽게 바라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일단 소식은 알려야지."
기현은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어둠을 뚫고 내다리는 기현을 가만히 바라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동창 처마 아래쪽에서 기현을 바라보고 있는 자는 금의위 남진무사인 이대진이었다.
기현이 어둠 속으로 완전하게 모습을 감추자 이대진은 은신술을 펼쳤다. 허공 속으로 모습을 감춘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채성만의 침실이었다.
" 왔느냐?"
채성만은 웃으며 이대진을 맞았다.
내시가 되기 전에 얻어던 아들. 그 아들이 바로 이대진이었던 것이다.
채성만은 애틋한 눈으로 이대진을 보았다.
" 평안하십니까?"
" 나야 늘 좋지. 넌 어떠냐?"
" 저도 좋습니다. 아버지."
" 사흘 후 후조문에서 연금석 가족만 우리 동창 전함에 태우기로 했다."
"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동창 전함을 움직이면 의심을 받을겁니다."
" 내일부터 삼 일간 전단강에서 작전이 있을 예정이다. 절강성 해군 전함 열 척이 동원되는 대규모 작전이다. 동창 전함은 그 안에 있을 게야. 넌 놈들을 쫓는 시늉을 하다가 배를 타고 주사군도에 있는 사도로 오면 된다."
" 알겠습니다. 아버지."
이대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 참, 그 말 들었느냐?"
" 무슨 말 말입니까?"
" 남철진이 실종됐다고 하더구나."
" 실종이라고요?"
이대진은 깜짝 놀랐다.
" 훌륭한 심복은 주인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자라는 건 아느냐?"
" 알고 있습니다."
" 지금껏 남철진이 너보다 앞서 나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공오인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그런데 이번에는 벗어났다는 말입니까?"
" 벌써 며칠 째 나타나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 그게 어떤 의미일까요?"
" 남철진 그놈이 마지막으로 들어간 곳은 북망산의 마총이란 곳이었다."
" 연우강도 그곳으로 들어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그랬지. 아무튼 그날 이후 남철진이 보이지 않았다. 그게 무슨 뜻이겠냐?"
"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 있다는 말이 아니라 십중팔구는 죽었을 게다."
"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 이 아비를 믿어라. 그놈은 죽었다."
채성만은 단정하듯 말했다.
" 그럼?"
" 너만 남았다는 말이 된다. 게다가 넌 연씨 일가를 잡아 북경으로 들어가게 될 게다. 그러면 차기 영반은......"
" 저란 말이군요."
" 그렇다. 난 지부장에서 멈췄지만 넌 금의위 영반이 돼 천하를 향해 호령하게 될 것이다."
채성만은 활짝 웃었다.
" 감사합니다. 아버지."
" 별말을 다하는구나. 그건 그렇고 혹시 불사선곡이라고 들어봤느냐?"
" 들었습니다."
며칠 전 저담상으로부터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강호를 대표하는 세력의 고수들이 불사선곡에서 나왔다는 노인들을 피해 도망을 쳤다고 하였다.
" 북망산에서 엄청난 혈겁이 일어났다는 말은 들었느냐?"
" 알고 있습니다."
" 맨 마지막에 나타났던 자들이 불사선곡 무인들이었다고 하더구나."
" 그들의 정체를 아십니까?"
"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대야벌이나 밀천, 그리고 구파일방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새로운 세력이라는 사실이다."
" 그들과 손을 잡으란 말입니까?"
" 숭산 불노곡으로 가봐라."
" 알겠습니다. 아버지."
" 실패는 늘 방심에서 온다는 사실을 명심하거라."
" 명심하겠습니다."
" 그래, 수고하거라."
이대진 앞으로 다가간 채성만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 그럼 사도에서 뵙겠습니다."
이대진은 고개를 숙이고는 은신술을 펼쳐 밖으로 나갔다. 이대진이 나가자 채성만은 떠날 준비를 했다. 이번 일을 끝으로 정계에서 완전하게 사라질 생각이었다.
" 내 아들이 금의위 영반이 되는 건 전부 네 덕분이다. 연우강."
채성만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슈캉!
" 크아악!" 까?
스악!
" 으아악!"
어둠을 뚫고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짙은 혈향과 살기로 뒤덮인 이곳은 소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수전이라고 불리는 갈대밭이었다.
갈대밭은 동서 십 리, 남북 이십 리로 주변에서 가장 컸다. 바닥은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질척한 뻘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은신술을 펼치는 은밀막부 무인들에게는 안방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소리없이 갈대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적을 척살했다.
" 어떤가?"
이자승은 주변을 둘러보고 온 욱일승을 보며 물었다. 언니네, 험!"
" 금의위 놈들이 큰 실수를 했네."
" 실수를 해?"
" 우리를 왜구로 몰아간 게 실수였다는 거네."
" 금의위 무인들을 죽여도 상관없게 됐다는 건가?"
" 오히려 편해졌네."
" 금의위는 지금 어디 있는가?"
" 저기 어딘가에 숨어 있겠지."
욱일승은 전면을 가리켰다.
욱일승이 가리킨 곳에는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금의위 위사들이 아니라 밀천 무인의 수장인 저담상이었다.
" 죽일 놈들!"
갈대밭을 바라보는 저담상의 몸에서 줄기줄기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의 시선 끝에는 검은 인영들이 우뚝우뚝 서 있었다. 동서남북 네 방향에 칠, 팔 명씩 늘어서 있는 저들은 전부가 갈대를 밟고 서 있었다.
바람만 불어도 흔들리는 갈대를 밟고 서 있다는 건 초극 고수들이라는 소리다. 문제는 저들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갈대를 밟고 서 있는 자들 사이사이엔 절정의 은신술을 펼치고 있는 살수들이 있다.
은밀막부 무인들, 아니 왜놈들이다.
은신술과 암살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을 때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동영 무공이 대단해 봐야 얼마나 할까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실제로 겪어 보니 그들의 무공은 대단했다.
게다가 놈들은 심리전마저 펼치고 있다. 소리 없이 다가와서, 공포에 전 비명을 내지르도록 잔인하게 처리한다. 그러고는 소리 없이 떠난다.
어느새 갈대를 밟고 있는 자들보다 어둠 속에 있는 살수들이 더 무서운 자들로 변하고 말았다.
슈캉! 슈악! 슥!
" 커억!"
" 크윽!"
" 으윽!"
또다시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창생은 어디 있느냐?"
저담상은 나직이 소리쳤다.
휙!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갈대를 헤치며 커다란 덩치가 날아왔다. 그는 부단장인 탈혼살부 창생이었다. 접전을 치르고 온 듯 그의 도끼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어떤가?"
저담상은 창생의 도끼를 보며 물었다.
" 바위를 치는 기분입니다."
" 바위?"
" 부하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가는데 전혀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이걸로 머리를 쪼갰는데 비명조차 지르지 않더군요."
창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때려도 때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때리는 자가 먼저 지치는 것처럼, 죽어가면서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부하들이 오히려 겁에 질려 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무기를 휘두르는데 자신감이 결여되고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 대흔천만상은형진을 준비하게."
아직 완전하게 익히지 못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창생은 다시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려갔다.
삐익! 삐익! 삐익! 삐익!
곧이어 네 번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고 밀천 무인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후, 수전 곳곳으로부터 안개가 솟아오르더니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 진식이다. 조심하라!"
전장사가 주변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스악!
" 컥!"
슉!
" 윽!"
밀천 무인의 비명인지 은밀막부 인사들의 비명인지 알 수 없는 비명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 백발랑군은 이십 장을 더 나아가서 갈대를 정리하도록 하게."
" 존명!"
우렁찬 외침이 사방에서 들려오고, 갈대를 밟고 있던 지옥의 죄수들이 전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지옥의 죄수들이 펼치는 무공은 한결같이 일천독행신이었다. 하지만 펼치는 모습은 전부가 달랐다. 일천독행신만 따로 익힌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무공에 일천독행신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즉 자신들의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 일천독행신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 차앗!"
" 타앗!"
" 이야압!"
죄수들의 양손과 양발이 움직일 때마다 갈대는 갈가리 찢겨 나가고 그 안에 숨어 있던 밀천 무인들은 처절한 비명을 토해 내며 죽어갔다.
" 너희들은 상대를 잘못 택했어. 놈들아!"
두작군의 검이 허공을 수평으로 잘랐다. 허공을 자른 검이 다시 벼락처럼 아래로 향했다.
" 커억!"
" 크악!"
두 마디 비명을 들으며 갈대를 차고 날아올랐다.
두작군의 신형을 따라 수천 조각으로 잘려나간 갈대가 눈처럼 휘날리며 따랐다.
" 차앗!"
십 장 높이로 솟구친 두작군은 방향을 아래로 틀며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 끝에서 수십 줄기의 검탄강기가 쏟아져 나와 지면으로 파고들었다.
퍽! 퍽퍽퍽! 퍽퍽!
" 크윽!"
" 으윽!"
" 커억!"
" 전 대장."
천리지청술로 주변을 살피던 이자승이 전장사를 불렀다. 그의 명령은 주변으로 빠르게 퍼져나갔고 잠시 후 전장사가 다가왔다.
" 말씀하십시오. 어르신."
" 자넨 인사대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게."
" 매복을 하란 말입니까?"
" 그렇네."
" 알겠습니다. 어르신."
고개를 숙인 전장사는 빠르게 몸을 날려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잠시 후 은밀막부 무인들 중 인사대 대원들이 조용히 빠져 나갔다. 워낙 은밀하게 빠져나가 그들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 견딜 만하냐?"
이자승은 옆에 있는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이 아이도 견디고 있는데 내가 견디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연운상은 업고 있는 연화를 가리켰다.
" 어떻게 된 일이지 네게도 말하지 않은 거냐?"
" 뭐가?"
" 남경왕의 아들 주무상이 죽은 사건을 말하는 거지 뭐겠냐?"
" 나도 궁금해 죽을 지경이다. 네 손녀딸이 열심히 조사하고 다니는 것 같더니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게냐?"
" 이거 한 가지만 알아냈다고 하더라."
이자승은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내 연운상에게 보여 주었다.
" 이게 뭔데?"
" 주무상이 죽기 전에 우강이 녀석에게 줬단다."
" 왜?"
" 묘아에게 가져다주라고 한 모양이야."
" 이건 신월영이잖아."
" 알아?"
" 사막으로 장사를 수도 없이 떠났는데, 당연히 알지. 이건 사막 부족의 딸들이 목에 걸고 다니는 건데, 네 손녀딸에게 왜 보낸 거지?"
" 이건 내 생각인데 주무상 그 녀석은 선물을 보낸 것 같아."
" 말이 되는 소릴 해라. 그 목걸이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사막 부족의 부족장 딸이 걸고 다니는 목걸이라는 건 금세 알 수 있어. 게다가 이건 새것도 아니잖아. 누군가 찼던 목걸이를 제 정혼녀에게 선물로 보내는 놈이 어디 있냐? 파혼하자는 거면 모를까."
" 바로 그거야."
" 뭐가?"
" 주무상은 파혼의 징표로 이 신월영을 우강이 녀석에게 줘 보낸 거야. 즉 신월영은 파혼의 징표고, 선물은 우강이야."
" 선물이 우강이라고?"
연운상은 황당한 얼굴로 이자승을 보았다.
" 이 목걸이를 건네주려면 반드시 만나야하잖아. 하지만 묘아는 이 목걸이는 처음 보니까 우강에게 계속 묻게 되겠지. 우강은 모른다고 하겠지만 묘아는 좀 집요한 성격이거든."
" 집요하게 캐물을 거란 말이냐?"
" 남녀라는 게 계속 만나다 보면 정분이 쌓이게 되지."
"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 우리 사돈 맺자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다."
"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자식아. 네 손녀딸은 남경왕부의 며느리야."
주변에서는 죽고 죽이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듯 연운상은 버럭 소리쳤다.
" 남경왕은 내가 정리하마. 넌 받아주기만 하면 돼. 아니 네가 아니라......"
이자승은 연금석과 이숙경을 보았다.
" 자네들이 받아주면 되네."
" 그게......"
연금석은 황당한 얼굴로 이자승을 보았다.
" 우리보다는 몽 처자가 허락해야 합니다. 어르신."
듣고 있던 이숙경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 아, 아주머니."
몽요는 당황한 얼굴로 이숙경을 보았다.
" 난 네가 싫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이다."
" 그러다가 우강이 밖으로 나돌면 어떡......."
몽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직 혼인도 하지 않았고, 이숙경 또한 며느리라고 부른 적도 없다. 그런데 벌써부터 부인이 된 것처럼 말을 한 것이다.
" 그건 팔자려니 해야지. 그보다 언제까지 아주머니라고 부를 참이냐?"
이숙경은 몽요를 반히 바라보며 물었다.
" 그, 그게......."
" 지금부터 어머니라고 부르도록 해라."
" 아, 알겠습니다. 어, 머니."
몽요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내 손녀딸은 어떻게 할 건가?"
이자승은 이숙경을 보며 물었다.
" 이 아이 말처럼 밖으로 나돌게 되면 서로 힘들어지잖아요."
" 받아줄 건가?"
" 받아들이는 건 어렵지 않아요. 어르신 문제는 남경왕부와 구림세가 가주에요."
" 그쪽은 내가 정리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무튼 자네들은 허락하는 걸로 알겠네."
이자승의 얼굴이 단박에 환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자승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타다닥! 탁탁! 타탁!
매캐한 연기와 함께 화마가 강한 바람을 타고 이편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 형님!"
전방에서 적을 막고 있던 두작군이 뒤편으로 왔다.
" 어떻게 된 건가?"
" 우리를 포위하고 있던 놈들이 빠지는 것 같더니 곧바로 사방에서 불길이 올랐습니다. 불길의 폭은 오십 장이 넘습니다."
" 우리는 몰라도 은밀막부 무인들이 불길을 타고 넘는 건 무리라는 말이군."
" 그렇습니다. 형님."
" 그럼 남은 방향은 저긴가?"
이자승은 뒤쪽을 가리켰다.
사실 동쪽은 탈출로였고 소재로 들어가는 길목까지는 확보해 두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 시체를 챙기도록 하게."
" 그건 무슨 말입니까?"
두작군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화살 때문이네."
" 그렇군요. 알았습니다. 형님."
고개를 끄덕인 두작군은 왔던 곳으로 몸을 날려 갔다.
" 방패가 될 만한 것들을 챙겨라!"
" 방패가 없는 자들은 시체를 챙겨라!"
" 알겠습니다."
인사들은 우렁차게 소리치며 주위에 널린 시체를 들어올려 동쪽으로 몸을 날렸다.
사우던 장소에서 백여 장 나아갔을까.
어둠 속에서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 화살은 일반 양민들이 쏘는 화살과는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지금은 칠흑 같은 어둠 속. 날아오는 화살을 육안으로 좇는다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다.
퍽! 퍽퍽퍽! 퍽! 퍽퍽!
" 컥!"
" 윽!"
나직한 비명이 연이어 들려오며 인사들이 풀썩풀썩 쓰러졌다.
" 차라리 불을 피우는 건 어떻겠나?"
인사들이 쓰러지는 광경을 지켜보던 연운상이 말했다.
" 이편이 밝아지면 적은 조준이 가능해. 그럼 지금보다 더 위험해질수도 있어."
이자승이 걱정하는 건 바로 그 점이었다.
물론 불을 피우고 그 불을 따라가면 뒤편에서 다가오는 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전방에서 활을 쏘는 자들이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편을 향해 대충 쏘아대고 있지만, 불로 인해 주변이 환해지면 조준해서 활을 쏘게 될 것이다.
" 하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더라도 죽지 않는 곳에 맞는 건 가능하겠지."
" 좋다. 그렇게 해보자."
" 불을 질러라!"
이자승은 선두에 서 있는 인사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잠시 후 일행이 가고 있는 곳 선두에서 불길이 올랐다. 불길은 바람을 타고 거칠게 동쪽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화살은 멈추지 않았다. 조금 전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쏘아져 왔다.
슉! 슉슉슉! 슉슉!
" 큭!"
" 윽!"
" 컥!"
은밀막부 인사들의 입에서 쉬지 않고 비명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쓰러지는 자는 거의 없었다. 몸을 약간씩 틀어 치명적인 부상을 방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피하지는 못해도 죽지는 않을 거라고 하였던 연운상의 말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전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섯 명에 한 명꼴로 시체가 생겨났다.
그렇다고 해도 멈출 수는 없었다. 일행은 불길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다. 소제가 가까워질수록 화살은 점점 거세졌다. 또다시 수십 명의 시체를 남기고 일행은 소제로 들어섰다.
소제는 말 그대로 소동파가 만든 제방을 일컫는 말이다. 다리처럼 남북으로 놓였고 폭은 이 장가량으로 좌우측으로는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었다.
제방으로 들어선 일행은 빠르게 북쪽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활을 든 밀천 무인들이 소제로 들어섰다. 그리고 제방 좌우측 호수에는 십여 명을 태울 수 있는 쾌속선이 나타났다. 쾌속선 위에도 활을 든 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금의위 위사들이었다.
" 쏴라!"
" 쏴라!"
좌우측에서 살기 어린 외침이 흘러나오고 쾌속선에 타고 있던 금의위 위사들이 일제히 시위를 놓았다.
" 나무를 잘라 방패를 만들어라! 백발랑군은 놈들을 공격하라!"
이자승은 바로 옆에 있는 나무를 향해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끝에서 금색 강기가 검처럼 솟구쳐 나왔다.
황금색 강기가 몇 번 허공을 가르자 서너 개의 방패가 만들어졌다.
휙! 휙! 휙!
그가 방패를 만들어 연금석 가족을 맡고 있는 기운상 일행에게 건네는 순간 좌우측을 맡고 있던 두작군 일행이 쾌속선을 향해 몸을 날렸다.
" 놈들이 온다. 활을 쏘아라!"
수십 대의 화살이 그들에게 집중됐다.
두작군을 비롯한 백발랑군 무인들은 검을 휘둘러 방어막인 검벽을 생성했다.
텅! 텅텅텅! 텅텅!
검벽에서는 화살 부디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그럴 때마다 백발랑군들이 나아가는 속도가 조금씩 느려졌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고 쾌속선을 향해 나아갔다.
" 죽여라!"
마침내 쾌속선에 올라선 백발랑군들은 살기어린 외침을 토해내며 배에 타고 있던 금의위 위사들을 공격했다.
" 크악!"
" 아악!"
" 으악!"
십여 명의 위사가 당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방어를 하기 위해 검을 들어 올려 보지만 백발랑군의무기를 막는다는 건무리였다. 그들은 피를 뿌리며 물로 떨어져 내렸다.
" 차앗!" " 수고했다. 하지만 이 할애비는 네가 무공보다는 자식이나 그런 쪽에 더 관심을 " 타앗!"
" 이얍!"
자기가 맡은 배에 있던 위사들을 없앤 백발랑군들은 배를 박차고 다시 원래 위치로 몸을 날렸다.
" 달려라!"
백발랑군들이 돌아오자 일행이 나아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 놈들을 없애라!"
" 활을 쏴라!"
저담상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부하들을 독려하며 내달리고 있는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인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 활을 쏴라! 달려라! 죽여라!"
" 칙쇼!"
" 코로시테야루!"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 좌우측에서 동영어가 들려오며 검은 그림자들이 날아올랐다. 그들은 먼저 소제로 떠났던 인사대 대원들이었다.
그들은 몸을 날리자마자 곧바로 밀천 무인들을 향해 무기를 날렸다.
" 크악!"
" 으악!"
" 아악!"
인사대 대원들의 공격은 단순했지만 정확하고 잔인했다. 그들의 검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밀천 무인들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털썩! 털썩! 털썩! 털썩!
밀천 무인들은 짚단처럼 쓰러졌다.
툭! 툭툭! 툭툭!
쓰러진 충격으로 인해 비로소 잘린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 따라붙어라!"
적의 목을 베어 버린 전장사는 전면으로 내달리며 소리쳤다.
굳이 그의 명령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한 번의 공격을 마친 인사대 대원들은 일제히 허공으로 녹아들어 가며 전면을 내달렸다.
" 쏴라!"
틱! 틱틱틱! 틱틱! 틱틱틱! 틱틱!
슉! 슈슉! 슉! 슉!
수백 대의 화살이 어둠을 뚫고 날아갔다.
퍽! 퍽퍽! 퍽퍽!
인사대 대원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조준해서 쏜 화살은 아니었지만, 화살이 너무 많아 떨어지는 자들이 속출했다.
" 걸을 수 없는 자들은 명예를 택해라!"
" 칙쇼!"
" 칙쇼!"
낮은 외침과 함께 인사대 대원 십여 명이 밀천 무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고 하지만 인사대 대원들의 검은 무자비하고 빨랐다. 그들은 최소한 두 명 이상의 밀천 무인을 저승의 동반자로 삼았다.
죽고 죽이는 혈전은 소제 끝가지 이어졌다. 얼마나 많은 밀천 무인들이 죽었는지, 얼마나 많은 금의위 위사들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정가산에서 시작한 싸움은 수전, 소제를 지나 서호의 북쪽을 동서로 가르는 백제를 지나고 한 바퀴를 완전히 돌았다.
삼 일 동안 이어진 여정으로 밀천 무인들은 삼분의 이가 죽임을 당했고, 금의위 위사들 또한 상당수가 죽었다. 그리고 은밀막부 무인들 또한 절반가량이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쫓기는 자들이나 쫓는 자들이나 멈출 수가 없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멈춘 곳은 서호 남쪽에 위치한 봉황산에서였다. 수림이 울창하게 우거진 봉황산은 쫓기는 자들에게는 최고의 은신처였다.
게다가 쫓는 자들이나 쫓기는 자들은 지난 삼 일 동안 한 숨도 자지 못한 상태. 무엇보다 절실한 건 적의 머리가 아니라 휴식이었다.
결국 양측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양측은 휴식을 취할 장소를 확보하자마자 그동안 밀렸던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