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불놀이
사내의 장심에서 쏘아진 강력한 기운이 대기를 가르며 빠르게 나아갔다.
콰앙!
둔탁한 소성과 함께 커다란 대문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 웬 놈이냐?”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열 명의 무인이 정문을 향해 내달렸다. 한 번에 오 장여씩 나아가는 걸 보면 내공이 심후한 자들이 분명했다.
이들은 섬서마가의 호위를 책임지고 있는 자들로, 무인들은 이들 열 명을 섬서십걸이라고 불렀다.
맨 앞에서 달려가고 있는 자는 섬서십걸ㄹ의 대형인 금도장 관천위였다.
관천위는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대문 앞에는 상당히 많은 자들이 몰려 있었다.
“ 도대체 어떤 놈들이!”
멀리 대문이 보이자 관천위는 속도를 늦ㅤㅊㅝㅅ다.
“ 저건 관복인데 관인들이 왜?”
관천위는 고개를 갸웃했다.
대문 앞에 모여 있는 자들은 자색의 관복을 걸치고 있었다. 보통 관에서 섬서마가를 방문할 때는 미리 연통을 넣어주고, 섬서마가에서는 마중을 나간다.
아니 그러한 절차는 차치하고라도 대문을 부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대문을 삼 장여 남겨둔 지점에서 관천위는 멈춰 섰다. 그러고는 포권을 취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 소생은 섬서십걸의 대형인 금도장.....”
“ 없애라!”
관천위의 말을 자르고 살기 가득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내지른 사람은 대문을 박살냈던 자였다.
“ 존명!”
관복을 걸친 자들은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며 섬서십걸을 향해 몸을 날려갔다.
관복 무인들의 신법은 대단했다. 단순히 발을 튕겼을 뿐인데 어느새 관천위를 향해 검을 찔러가고 있었다.
“ 무, 무슨 짓이오?”
관천위는 질겁하며 왼편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관천위를 공격한 자는 안으로 뛰어들어온 자들 중에서도 가장 강자였다. 그는 이미 일류를 넘어섰을 뿐 아니라 실전의 달인들이었다.
그는 관천위가 내려서는 자리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관복 무인의 검은 정확하게 관천위의 심장을 찔렀다.
“ 크윽!”
“ 아악!”
“ 으악!”
관천위가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에 두 명이 더 죽임을 당했다.
“ 차앗!”
관복을 입은 자라고 해서 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남은 일곱 명은 우렁차게 고함을 내지르며 관복 무인들을 향해 몸을 날려갔다. 하지만 검은 옷을 걸친 자들의 무공은 대단했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섬서십걸의 검을 피했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면서 드러난 허점을 향해 무지막지하게 검을 쑤셔 넣었다.
“ 크악!”
“ 아악!”
“ 으악!”
또다시 섬서십걸 세 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하지만 관복 무인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 여세를 몰아 나머지 네 명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그들은 금세 섬서십걸의 남은 네 명을 제압했다.
“ 머, 멈추시오. 난 섬서마가 가주 마주영이오. 내가 왔으니까 그들은 살려주시오.”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한 걸음으로 달려오는 자는 섬서마가 가주 마주영이었다. 대문을 향해 달려오는 마주영의 얼굴은 해쓱하게 질려 있었다.
섬서십걸 네 명의 목을 치려던 관복 무인들은 검을 목에 댄 채로 조금 전 박살냈던 자를 돌아보았다.
“ 명령은 이미 내려졌다.”
사내는 신경질적인 얼굴로 소리쳤다.
“ 존명!”
관복 무인들은 검을 사정없이 당겼다.
“ 크악!”
“ 아악!”
“ 으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머리 네 개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요?”
대문 앞에 도착한 마주영은 관복 무인들을 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 난 반포사의 사주 금포밀영 조천산이다!”
“ 바, 반포사란 말입니까?”
마주영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반포사.
금의위 오대 조직 중의 한 곳으로 반역자를 색출하여 생포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그런 자들이 왜 섬서마가를 찾아왔는지.
“ 마주영 너를 비롯한 마씨 일가를 역모 혐의로 체포하겠다.”
“ 지금 역모라고 하셨소?”
마주영은 넋을 잃은 얼굴로 물었다.
“ 반항하는 자는 죽여라!”
조천신은 위사들을 향해 차갑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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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세 번의 전투가 더 있었고, 양측이 대치하고 있는 진영 사이에는 수백 구의 시체가 쌓였다.
하지만 상황은 처음 전투를 시작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밀천 총단을 감싼 짙은 안개였다.
“ 진식은 풀어냈는가?”
유자웅은 굳은 얼굴로 제갈생을 보며 물었다.
그를 비롯한 묵야련 무인 일천 명이 있는 이곳은 만양평 북편, 즉 밀천 총단 북쪽의 커다란 바위 뒤쪽이었다.
앞을 가로막은 바위가 워낙 커서 밀천 건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묵야련 무인들은 은밀하게 작업을 하고 있었다.
동문 쪽에 있던 그들이 이곳으로 온 것은 땅굴을 파기 위해서였다.
물론 동문 쪽에서도 땅굴을 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적의 시선을 끌기 위한 작업일 뿐 실질적인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은 바로 이곳 북쪽이었다.
묵야련 무인들이 굴을 파는 장소로 북쪽을 택한 것은 벌판에 널려 있는 커다란 바위 때문이었다.
작게는 이 장, 크게는 칠 팔 장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들은 작업을 하는 모습뿐만이 아니라 땅굴을 파면서 나오는 흙을 숨길 수 있게 해주었다.
지난 사흘 동안 파고 들어간 동굴의 깊이는 구십여 장. 빠르면 오늘 밤, 늦는다고 해도 내일이면 적진 바로아래쪽에 도착할 수 있다.
유자웅이 고민하는 이유가 바로 그 도착 시점이었다.
땅굴 밖으로 나갔을 때 맞닥뜨리게 될 현기환사죽영진.
물론 승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같은 승리라도 희생이 많고 적음에 따라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부하 대부분을 잃고 승리를 거머쥐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희생으로 승리하느냐가 관건이었다.
“ 일단 진이 구축된 형태를 알아야 합니다.”
제갈생은 종이 한 장을 유자웅에게 내밀었다.
“ 이게 진식의 모습이란 말인가?”
유자웅은 종이에 그려진 그림을 보았다.
안쪽에 태극이 있고, 태극 외부에 여덟 방향에 거쳐 팔괘가 그려져 있었다.
“ 설명해 보게.”
유자웅은 제갈생을 보았다.
“ 태극 문양이 있는 곳과 팔괘 문양이 있는 곳에, 그 문양과 같은 형태로 건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 여기 건에는 세 채의 건물이 세워져 있단 말인가?”
유자웅은 막대기 세 개가 삼 자 형태로 그어진 건을 가리켰다.
“ 그렇습니다. 련주님. 그곳에는 막사 형태의 건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건의 반대편인 곤의 자리에는 여섯 채의 건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 좋네. 그럼 안으로 들어가면 어디로 움직여야 하는가?”
“ 건물과 건물 사이는 휴문이고 건물 안은 생문입니다.”
“ 건물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군.”
“ 그렇습니다.”
“ 하지만 건물 안에는 적이 있을 거 아닌가?”
“ 그래서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 기름?”
유자웅은 뒤를 보았다. 바위 뒤쪽에 기름이 잔뜩 들어있는 양가죽 백여 개가 놓여 있었다.
불공을 만들고 난 기름이었다.
“ 건물을 불태우면 진시근 조금씩 힘을 잃게 됩니다. 진식이 힘을 잃게 되면, 묵야련 무인들의 적은 삼류 무인만 남게 될 겁니다.”
“ 그렇군.”
유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기환사죽영진만 없다면 밀천 무인 일만 여명은 아군의 상대가 아니다. 적을 전부 없애는 데 하룻밤도 걸리지 않ㅤㅇㅡㄺ 것이다.
“ 육 할의 희생을 말한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 좋네. 서두르도록 하세.”
유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토굴은 폭이 일 장에 달하고 높이는 반 장이다. 토질은 진흙으로 이루어져 있어 무너질 염려도 없었다. 정 불안한 곳은 만양산에서 베어온 나무를 괴었다.
“ 서둘러라!”
유자웅은 교대를 하러 들어가는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땅을 파는 자들은 비단 묵야련 무인들뿐만이 아니었다. 안개 속에서도 부지런히 움직이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바닥이 푹푹 파여나갔다.
그들은 다름 아닌 밀천 무인들이었다.
“ 최소한 십 장은 파야 한다. 그래야 놈들이 파는 땅굴을 막을 수 있다.”
동쪽 성문 바로 앞에서 부하들을 독려하는 자는 천기수사 사마종이었다.
“ 다 팠습니다. 대주님!”
“ 집어넣어라!”
사마종의 말이 떨어지자 커다란 바위가 구덩이 안으로 떨어졌다. 구덩이의 폭은 무려 일 장 반에 달했다.
그 안을 바위로 채우고 바위와 바위 사이에는 자갈을 채워넣었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흙을 덮어 마무리했다.
“ 어떻게 됐는가?”
나진관은 바닥을 평평하게 고르고 있는 사마종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 이곳은 끝났습니다. 지금부터는.....”
“ 이곳만 하면 되네. 사마 대주.”
“ 다른 곳은 필요 없단 말입니까?”
“ 서쪽과 남쪽, 북쪽이 바위로 이루어졌다고 한 사람이 그런 소릴 하면 어떻게 하는가?”
“ 그래도 만일에 대비해서....”
“ 만일은 무슨. 그리고 내게 비장의 수가 있네.”
“ 비장의 수라면?”
“ 잠깐 걷겠는가.”
나진관은 걸음을 옮겼다.
“ 그렇게 하죠.”
사마종은 나진관을 따라나섰다.
“ 사실 군산 총단에서 지원군을 보내 주기로 했네.”
“ 지원군이라면, 어느 정도입니까?”
“ 혹시 환수라고 들어본 적 있는가?”
“ 환수요?”
“ 처음 듣는 모양이군.”
“ 그렇습니다.”
사마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혹시 신 내린 사람을 본 적은 있는가?”
“ 작두 날을 거꾸로 세워놓고 타는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 그 시닝 내린 상태의 무인을 일컬어 환수라고 부르네.”
“ 쉽게 좀 설명해 주십시오.”
“ 그들은 내기를 끌어올리게 되면 자아를 잃는 대신 잠재력을 극한까지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을 익히고 있네. 그 상태를 환수라고 부르는데, 환수 상태에서는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네.”
“ 그런 무공이 존재합니까?”
사마종은 놀라 눈이 커졌다.
“ 우리 밀천이 가진 비전 중의 하나였네. 천오백 년 전에 사라졌었는데.. 드디어 환수를 제강해 냈다네.”
“ 혹시 강시와 비슷한 종류입니까?”
제강이라는 말을 써서 묻는 말이었다.
내공심법을 익혀 그런 상태에 도달했다면 결코 제강이란 말을 쓰지 않았으 것이다.
“ 인간과 강시의 중간상태라고 보면 되네.”
“ 그렇군요. 그럼 실력은 어느 정돕니까?”
“ 반 갑자의 내공을 지닌 무림인이 잠재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면 얼마나 강해지겠는가?”
“ 일류 고수 급이라는 말이군요.”
“ 최소한 오백이 이곳으로 올 거네.”
“ 적이 공격하기 전에 도착해야 합니다. 외천주님.”
“ 모레 도착하기로 했네.”
“ 그때까지만 방어하면 되겠군요.”
“ 내가 느긋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를 알았는가?”
“ 이제야 저도 마음이 놓입니다.”
사마종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진작 말을 했어야 했는데, 미안하게 됐네.”
“ 아닙니다. 그런데 영세오천은 비장의 무기를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었던 겁니까?”
“ 한 가지뿐이겠는가.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최소한 세 가지씩은 가지고 있었네.”
“ 환수와 같은 초인들이 세 가지씩이나 있단 말입니까?”
“ 우리 밀천만 해도 환수, 수마, 풍마라 불리는 초인을 보유하고 있네.”
“ 수마와 풍마도 엄청나겠군요.”
“ 내가 우리 밀천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 초인들 때문 아니겠는가.”
“ 구룡천문을 겁낼 이유가 없군요.”
“ 물론이네. 사마 대주. 우리 밀천만 천상천하 유아독존할 거네.”
나진관은 활짝 웃었다.
“ 힘이 무럭무럭 솟는군요. 전 잠시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외천주님.”
사마종은 익살스러운 동작을 취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 멀리는 가지 말게.”
“ 우리 밑으로는 들어올 수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마종은 쾌활하게 말하고는 몸을 날렸다.
잠시 후 사마종은 북동쪽 성벽 아래쪽에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웅크린 상태로 주변을 살피던 그는 구렁이가 담을 넘어가는 것처럼 소리 없이 담을 넘었다. 바닥에 내려선 그는 엎드린 상태 그대로 앞으로 나갔다.
그가 가는 곳에는 좌우 폭 십 장, 높이가 이 장 가량 되는 커다란 바위가 서 있었다. 바둑판처럼 생겼다고 하여 반상석이라고 부르는 그 바위 아래쪽이 그의 목적지였다.
반상석 근처에 도착한 그는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어두컴컴한 곳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사마종이 들어간 곳은 짐승이 파놓은 것처럼 보이는 굴이 있었다.
사마종은 망설임 없이 그 굴속으로 들어갔다. 방향을 몇 번 틀자, 환한 불빛이 그를 덮쳐왔다. 그는 얼른 눈을 감았다.
“ 어서 오너라.”
그리고 묵직한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안쪽이 비로소 환하게 보였다.
그곳은 상당히 넓은 공터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바위 하단을 천장으로 삼고 그 아래쪽에 땅을 파내고 만든 공간이었다. 아무렇게나 벽에 기대어 누워 잠을 자고 있는 자들은 잠룡대 대원들이었다.
사마종은 내공을 풀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 근육이 밀가루 반죽처럼 뒤틀리는 듯하더니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다름 아닌 적랑 사마윤이었다.
그가 한번도 본 적이 없던 밀천의 대주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천기수사 사마종 때문이었다. 천기수사 사마종은 그의 숙부였던 것이다. 조금 전 사마윤에게 어서 오라고 하였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 여기요.”
사마윤이 자리에 앉자마자 장사덕이 찻잔을 내밀었다.
“ 식었잖아. 인마.”
“ 데워서 마시면 되잖소.”
장사덕은 건성으로 받아넘기며 사마윤 앞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 그보다 어떻게 돼 가고 있소?”
사실 이곳 규동에 잠룡대 전원이 출병한 것은 묵야련과 밀천을 상잔시키기 위함도 있지만, 동정호 군산에 있는 밀천 총단을 치기 위한 예행연습의 의미도 포함돼 있다.
“ 이틀 후에 지원군이 오기로 한 모양이야.”
그 말에 구석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던 막장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 어떤 지원군 말인가?”
“ 강시처럼 되는 내공심법을 익힌 자들이라고 하오.”
“ 내공을 끌어올리면 강시처럼 된다는 거야?”
이번 질문은 공간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들려왔다.
사마윤에게 질문을 한 사람은 연우강이었다.
“ 제갈생은 어떻게 된 거요?”
사마윤은 웃으며 물었다.
그는 숙부 사마종을 만나 밀천으로 숨어 들어갔지만 연우강은 어떻게 할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유자웅의 군사가 돼 나타난 것이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정보력 하면 야장이잖아. 제갈생 같은 녀석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지.”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때 수여설이 차를 가지고 왔다. 그런데 그녀가 가져오는 차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막장에게 삼매진화를 펼쳐달라고 하여 차를 데운 것이다.
“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장가를 가두는 건데.”
사마윤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냉기가 손바닥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는 삼매진화로 찻잔을 데웠다. 차갑던 찻잔이 따뜻해지면서 곧 수증기가 피어 올랐다.
“ 강시를 만든다는 내공심법에 대해서 말해 봐.”
연우강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면 이성이 사라지는 대신 잠재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괴물이 탄생한답니다. 고통을 모르는 그 상태를 환수라고 부른다고 하네요.”
“ 정말 그런 무공이 있단 말인가?”
사마윤을 보는 막장의 얼굴엔 미심쩍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많은 무공을 접하진 않았지만 대야벌에 있을 때 무공에 대해 많은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 많은 무공 지식들 중 강시와 비슷한 상태로 만드는 무공은 없었다.
“ 당연히 있지.”
대답은 연우강이 했다.
“ 있다고?”
“ 특이한 힘이긴 하지만 마라천력도 인간이 지닌 잠재력 중의 하나잖아. 그 잠재력과 무공을 결합시킨 것이 바로 흑풍마라천력이고.”
“ 엄밀하게 따지면 너도 강시라고?”
“ 강시가 아니라 잠재력을 극한으로 개발한 경우라는 거야.”
“ 그럼 환수는 너 같은 상태라는 거냐?”
“ 그놈들은 주화입마를 통해 내공을 연마하지도 않았고, 여의선천신단도 없고, 풍천영수도, 만년지극화령실도, 음양쌍극기도 없잖아.”
“ 맞아. 그렇지. 넌 영약이란 영약은 전부 처먹은 괴물이지. 그런데 음양쌍극기는 또 뭐냐?”
“ 빙공을 극한으로 익힌 사람도 삼매진화를 펼칠 수 있는 비결이 들어 있는 기운이야.”
“ 그럼 그걸 익히면 제수씨도 삼매진화를 펼칠 수 있는 거냐?”
“ 지금 운우지정공을 열심히 연마하는 중이야.”
“ 우, 운우지정공?”
막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공의 명칭이 너무 해괴했기 때문이다.
“ 석강 형님이 그렇게 지은 거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 그 고매하신 분이 그런 이름을 지었다고?”
“ 고매는 또 무슨 소리야?”
“ 천마잖아.”
“ 천마가 어쨌는데?”
“ 천마는 그 이름만으로도 고매하고 높은 인격을 갖춘 사람의 표본이야, 인마.”
“ 미친 놈. 지랄하고 있네. 그 양반은 치사한 사람이야, 자식아.”
“ 치사한 사람이라고?”
“ 누군가가 형수씨를 가로채 갔다고 생각해 보면 알잖아. 그럼 넌 그놈을 어떻게 할 건데?”
“ 패 죽여야지.”
“ 그 양반이 그랬어.”
“ 진짜?”
“ 그 양반의 마지막 여자였던 잠마 희수연은 내 사부인 가립하의 정인이었어, 자식아.”
“ 정말?”
“ 그랬다니까. 아무튼 그 일로 인해 가립하는 강호를 떠돌다가 사막에서 쓸쓸하게 죽었어.”
“ 쓸쓸하게?”
“ 응! 아주 외로운 홀아비로 죽었지.”
“ 그래도 전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인데 홀아비로 외롭게 살다가 죽었다고 하니까 좀 그렇다.”
“ 그래서 하는 말이 있잖아.”
“ 무슨 말?”
“ 배고픈 심검보다는 배부른 삼류가 낫다는 말.”
“ 고매한 척 고상한 척 해봐야 배고프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거냐?”
“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는 게 아니라 먹는 거야. 사실 옷이나 집은 없어도 살잖아. 옷이 없으면 풀로 엮어 대충 걸쳐도 되고, 집이 없으면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처럼 굴을 파고 살면 돼. 하지만 먹을 게 없으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잖아. 밥 이야기 하니까 배고프다.”
연우강은 수여설을 보았다.
수여설은 한편 구석으로 가더니 사망궤를 들고 와 연우강 앞에 놓았다.
연우강은 뚜껑을 열고 육포를 담은 주머니를 꺼냈다.
“ 어?”
주머니를 연 연우강은 깜짝 놀랐다.
그 안에 잘게 찢어진 육포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수여설을 보았다.
“ 딱히 할 일이 없어서요.”
“ 잘 먹을 게요.”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육포를 입으로 가져갔다.
늘 그렇듯 연우강은 육포 하나를 입으로 가져가서는 육즙이 완전히 빠질 때가지 씹고는 삼켰다.
“ 연 공자가 육포를 먹는 모습을 보면 진수성찬을 앞에 둔 사람처럼 보여요.”
수여설은 웃으며 말했다.
“ 보기 싫어요?”
“ 그럴 리가 없잖아요.”
" 오래 씹으면 여러 가지로 몸에 좋대요. 수 소저도 오래 씹는 습관을 들여보세요."
연우강은 고개를 돌려 이철상을 보았다.
" 동쪽을 제외한 나머지 세 방향에서 파고들어 간 땅굴은 각 건물의 창고로 이어져 있습니다."
잠룡대 대원들이 땅굴을 파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오래됐다. 밀천 총단 담에서 백 장 떨어진 곳에서 파기 시작한 땅굴은, 밀천 총단 아래쪽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데 주방에서 가장 가까운 창고로 나가게 돼 있다.
" 팔괘만상미혼대진은?"
" 그것도 끝났습니다. 바위 하나만 가져다 놓으면 진식은 곧바로 발동할 겁니다."
" 환순가 하는 것들이 도착하자마자 시작할 거야. 그때까지 푹 쉬어둬."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알겠습니다. 대장."
" 이쪽으로 오세요."
수여설은 연우강을 데리고 자기 처소로 들어갔다.
오른편 끝에 붙은 작은 공간은 일행이 그녀를 위해 만들어 준 쉼터였다. 바닥에는 풀이 푹신하게 깔려 있었다.
" 이렇게 나와 있어도 돼요?"
수여설은 앉으며 물었다.
" 지금은 자는 시간이니까 상관없어요. 그보다 운우지정공은 어때요?"
" 그건........"
수여설은 말끝을 흐렸다.
" 운우지정공이 어려워요?"
" 어려운 건 아니에요."
" 말하기 곤란한 거예요?"
연우강은 수여설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 그걸 익히면 수여설이 아닌 다른 사람이 돼 버릴 것 같아서 그래요."
" 그걸 익힌다고 사람이 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 그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난 지금이 더 좋은 것 같아요."
" 잠깐 귀 좀 줘봐요."
연우강은 수여설의 머리를 끌어내렸다.
" 왜요?"
" 그걸 익히라고 한 이유는........"
연우강은 수여설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 킥!"
수여설은 작게 웃었다. 그러고는 연우강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제가 지금보다 더 요염해지기를 바라는 거예요?"
" 그런 건 아니에요."
" 그럼 됐잖아요. 구결은 암기하고 있으니까 나중에 익히고 싶으면 그때 익힐게요."
수여설은 싱긋 웃으며 입을 맞췄다.
잠시 눈을 붙인 연우강과 사마윤은 다시 제갈생과 사마종으로 얼굴을 바꾸고는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땅굴이 완성된 시간은 이틀 후 아침이었다.
" 공격 시간은 오늘 밤 삼경이네."
유자웅은 각 대주들을 모아놓고 작전 지시를 내렸다. 그의 작전은 대부분 제갈생, 아니 연우강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작전을 하달받은 대주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느린 듯하면서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밤이 오자 만양평 동쪽에 있던 묵야련 무인들은 하나 둘 북쪽의 바위 뒤편으로 이동해 왔다.
" 수고해 주게."
유자웅은 연우강을 보며 말했다.
연우강의 어깨 위에는 기름이 가득 들어 있는 양가죽 부대가 올려져 있었다.
" 승리는 거두고 나서 입 닦는 건 아니겠지요?"
연우강은 유자웅을 빤히 보았다.
" 여기서 우리가 승리를 거두면 전부 자네 덕분인데 그럴 리가 있는가? 최고 대우를 해 주겠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자기보다 머리가 좋다고 생각되는 자를 천성적으로 싫어하는 그는 연우강을 다시 볼 생각이 없었따. 다시 볼 생각이면 무공도 모르는 자를 선봉으로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연우강의 쓰임새는 여기까지였다.
" 알겠습니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땅굴 안으로 들어갔다.
" 시작하라!"
곧이어 유자웅의 입에서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먼저 기름이 든 양가죽을 든 자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연우강을 포함하여 일백 명으로 구성된 그들은 현기환사죽영진의 매개체친 건물을 속속들이 파악한 상태였다. 그들이 해줄 일은 적을 없애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맡은 건물에 불을 지르는 것이었다.
기름을 멘 자들이 안으로 들어가고 잠시 후 무적철검대를 비롯한 각 대의 무인들이 차례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유자웅을 비롯한 호위들이 들어가자 만양평 북쪽 벌판은 텅 비었다.
" 우리도 시작해 볼까?"
어디선가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집채만한 바위가 움직이더니 묵야련 무인들이 들어갔던 땅굴의 입구를 막았다.
탁탁!
손을 터는 소리와 함께 검은 옷을 걸친 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커다란 바위 아래 숨어 있던 막장 일행이었다.
" 이 정도면 못 움직이겠죠?"
이철상이 바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 뚫고 나오면 뭐 할 건가. 잠룡들에게 죽임을 당할 텐데."
막장은 피식 웃었다.
" 하긴요, 그만 가시죠."
일행은 공간을 만들어 두었던 커다란 바위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려갔다.
잠시 후 바위 아래쪽 공간에 내려선 일행은 그동안 파 놓았던 땅굴을 따라 이동했다.
잠룡대 대원들이 판 땅굴은 한 사람이 지나가면 꽉 찰 정도로 좁았다. 적을 기습할 목적으로 만든 땅굴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넓을 이유가 없었다.
좁은 땅굴을 타고 빠르게 이동한 일행이 나온 곳은 밀천 총단 북쪽, 하인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땅굴은 주방 근처 식량 창고와 이어져 있었다.
창고 주변은 온통 안개로 들어찬 채였다.
막장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현기환사죽영진에 의해 생성된 안개 때문에 오히려 움직이기가 편해졌다. 진식에 걸려들지만 않으면 아주 편하게 작전을 펼칠 수 있을 듯했다.
" 끝나고 보자고."
막장은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고는 안개 속으로 몸을 날렸다.
곧이어 다른 이들도 일제히 몸을 날렸다.
수여설이 맡은 곳은 창고 근처였다.
식량 창고를 나선 그녀는 주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향해 날아갔다.
밀천 내부에는 두 종류의 건물이 지어져 있다. 전체 건물의 삼분의 이는 현기환사죽영진의 매개체고 나머지는 진식과 상관없는 건물이다. 진식과 상관없이 지어졌기 때문에 진식 안에 있는 돌멩이들처럼 진식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수여설이 몸을 날려간 곳은 구 층 건물이었다.
허공답보 경공을 펼쳐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창문 근처에 멈춰 천리지청술을 펼쳐 내부를 살폈다.
안쪽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벽면에 그림이 걸려있고, 천장에서 늘어뜨린 쇠사슬에 걸린 커다란 쇠 화로로 보아 상급자의 처소인 듯했다.
안쪽을 살피던 그녀의 시선이 벽면을 따라 만들어진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은 옥상과 이어져 있었다.
훌쩍 몸을 날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 누군지 몰라도 고상한 취미를 가진 녀석이네."
수여설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지붕이 없고, 높이가 세 자가량 되는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안에는 서너 사람이 누워도 될 정도로 커다란 침상이 있었다.
아마도 한여름에 하늘을 보며 자려고 만든 공간인 듯했다. 침상 위에는 아무것도 깔려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 위에 누워 보았다.
그러자 하늘이 한 눈에 들어왔다. 별들은 광채를 뿌려대며 인사를 하는 듯했다.
" 지을 만하네."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이런 건물을 지은 건 고상한 취미가 아니라 아주 멋진 발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건물을 짓게 되면 이런 장소를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벌써 시작한 모양이네?"
기름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오자 그녀는 몸을 일으켜 가장자리로 갔다.
그녀가 불꽃을 가장 먼저 발견한 곳은 남쪽이었다.
처음엔 불꽃이 아주 작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불빛을 보는 것처럼 깜빡거렸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거대한 불기둥으로 변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방에서 불길이 솟구쳐 올랐다.
" 불이야!"
" 불이다!"
" 불이다!"
" 물을 가져와라!"
" 물을 가져와라!"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하지만 불을 끄는 것도 쉽지 않겠지."
" 맞아요. 물을 길려면 우물로 가야 하고, 우물로 가려면 건물을 벗어나야 하는데, 우물이 있는 곳이 사문일 경우도 있거든요."
그녀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나직한 목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수여설은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보았다. 연우강이 천천히 날아올라오고 있었다.
수여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처럼 손을 내밀어 연우강을 끌어올렸다.
" 멋진 불꽃놀이가 되겠네요."
연우강을 끌어올린 수여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불길이 솟구치고 있는 곳은 정확하게 예순 네 곳이다. 그곳이 완전하게 타버리면 현기환사죽영진은 파훼될 테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 아무리 멋진 불꽃놀이라도 혼자 보면 재미가 없죠."
" 함께 있어서 좋다는 말?"
" 당연히 그렇죠."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늘 그랬던 것처럼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하겠죠?"
" 기회를 잡았을 때 끝내지 못하면 언젠가는 그 일 때문에 내가 당하는 게 세상이거든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해놓지 않으면 안 돼요."
" 현기환사죽영진이 파훼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죠?"
" 그럴 거예요. 이제 시작인데 벌써 지겨운 거예요?"
" 당신 같으면 한눈에 반할 정도로 멋진 여자가 바로 옆에 있는데 불꽃놀이가 눈에 들어오겠어요?"
수여설은 연우강을 빤히 보았다.
" 당연히 눈에 들어오죠. 불놀이를 핑계 삼아 작업을 걸어야 하는데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큰일이잖아요."
" 당신은 그런지 몰라도 전 들어오지 않아요."
와락!
수여설은 연우강의 멱살을 가볍게 그러쥐더니 천장이 없는 공간으로 끌고 들어갔다.
" 여긴 어디죠?"
연우강은 안쪽을 둘러보았다.
" 이럴 땐 말이 아니라 행동을 해야 멋진 남자라는 거 몰라요?"
수여설은 연우강의 귓전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으며 빠르게 옷을 벗었다. 그러고는 연우강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 맞습니다. 수 소저."
연우강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수여설이 옷을 벗기기 편하도록 양손을 들어 올렸다.
" 마라천력은 사람 죽일 때만 쓸 거예요?"
옷이 걸려 잘 벗겨지지 않자 수여설은 연우강을 쏘아보았다.
" 옷은 내가 벗을 테니까 수 소저는 다른 걸 하면 되잖아요."
" 다른 거?"
" 네."
" 이를테면?"
" 이런 거 말이에요."
연우강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춤과 동시에 양손으로는 가슴을 감싸쥐었다.
" 맞네요."
수여설은 눈을 찡긋하며 벗기다 만 바지 속으로 손을 쑥 밀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