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그의 눈빛은.
" 사마종! 사마종은 어디 갔느냐?"
나진관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사마종을 부르는 그의 얼굴에는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불이 났다는 보고가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는데, 지금껏 작전을 주관했던 사마종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 외천주님!"
그때 탈백신도 모철이 뛰어들었다.
모철이 맡고 있는 방향은 동쪽이었다.
" 어떤가?"
나진관은 모철을 돌아보며 물었다.
" 부하들이 들어가 있는 모든 건물에서 불길이 솟구쳐 오르고 있습니다."
" 부하들이 들어가 있는 건물이란 말인가?"
나진관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부하들이 들어가 있는 건물이라면 진의 매기체인 동시에 유일한 생문이다. 진식의 매개체를 노렸다는 건 곧 적이 현기환사죽영진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 놈들이 나온 곳은 어딘가?"
" 정확한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키는 동쪽은 아닙니다."
" 동쪽이 아니라면."
" 가장 먼저 불길이 오른 곳은 북쪽이었습니다."
" 북쪽이란 말인가?"
나진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문득 그동안 사마종에게 너무 의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마종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어 봤어야 했는데 아무런 의심도 없이 믿었다.
어쩌면 환수대를 믿고 방심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랬다.
환수대가 있는데 굳이 작전 같은 게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사마종에게 일임하고 말았다.
" 해진해야겠네."
적을 없앨 방안이 없다면 진식을 계속 유지하면서 싸우겠지만 환수대라는 막강한 전력이 있다. 굳이 머잖아 파훼될 진식에 의존할 이유가 없었다.
" 해진하면 우리가 불리합니다. 외천주님!"
환수대의 존재에 대해 모르는 모철로서는 당연한 말이었다.
" 지원군이 따로 있으니까 걱정 말게."
" 지원군이라면......"
" 크악!"
" 아악!"
" 으아악!"
" 놈들을 없애라! 한 명도 남기지 마라!"
처절한 비명과 살기 가득한 외침에 연이어 들려왔다.
" 서두르게, 모 대주."
" 알겠습니다. 외천주님."
모철은 급하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모철이 뛰쳐나가자 나진관은 위층으로 몸을 날렸다. 단숨에 구 층까지 뛰어올라간 그는 전 내공을 모아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목소리는 밀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 진식을 해진하라! 진식을 해진하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마라! 움직이는 자는 죽는다는 걸 명심해라!"
해진 명령을 내린 나진관은 곧바로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내실로 들어갔다.
내실에는 푸른 무복을 걸친 덩치 큰 사내가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저녁 무렵에 도착한 그는 환수대 대주 파찰극으로 밀천 ㅤㅊㅗㄷ단의 내부 상황을 살피기 위해 혼자 들어온 것이었다.
" 놈들이 쳐들어온 것이오?"
" 내가 허를 찔린 모양이외다."
나진관은 파찰극 건너편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 우리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오. 너무 걱정 마시오. 놈들은 어느 쪽에 있소?"
파찰극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 진식 때문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북쪽인 것 같소이다."
" 알았소. 북쪽에서부터 시작하겠소. 그 전에 한 가지 말해줄 게 있소."
" 환수가 되면 피아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말이오?"
" 그렇소. 우린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않고 걸리는 건 전부 없애버리오. 그쪽에서 알아서 피해야 하오이다."
" 이미 명령을 내려두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 좋소. 그럼 가보겠소."
파찰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진식이 해진되고 있는 듯 안개가 걷혀가고 있었다.
" 좋군!"
파찰극은 싱긋 웃으며 신법을 펼쳤다.
그의 신형은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순식간에 동문에 도착한 그는 훌쩍 몸을 날려 담을 넘었다.
환수대 대원들이 은신해 있는 곳은 만양평에 세워진 거대한 무덤 후미였다. 그것은 연우강이 일백마를 위해 만들어준 무덤이었다. 벌판을 가로지른 파찰극은 무덤 뒤편으로 돌아갔다.
그가 도착하자 환수대 대원들이 벌떡 일어났다.
" 출동이다!"
" 놈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 북문 쪽에 몰려있다."
" 그럼 우리도 그곳으로 가야겠군요."
" 물론이다. 출발하라!"
" 존명!"
환수대 대원들은 우렁차게 고함을 내지르며 북문을 향해 내달렸다. 대원들과 함께 달리던 파찰극은 바둑판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나타자자 그 위로 올라갔다.
파찰극은 나진관을 위해 환수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실 이성이 말살된 살인 무기가 돼 살아 있는 생명체를 무차별하게 도륙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여섯 시진이 지나고 깨어나면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불쾌하다.
" 난 환수대의 강함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을 뿐이야."
" 그건 나도 그래."
" 헉!"
느닷없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파찰극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차가운 건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뒷목에서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감지되고 있다. 그것은 무기 끝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었다.
" 누구냐?"
파찰극은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처음 출병하는 환수대 대원들 때문에 흥분해 있었다고 하지만 적이 뒷목에 무기를 댈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네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부하들과 함께 갔거나, 이곳으로 올라오지 않았다면 날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파찰극의 뒷목에 검을 들이대고 있는 사람은 이철상이었다.
이철상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밀천 외곽에 설치한 팔괘만상미혼대지 때문이었다.
밀천의 지원군이 모습을 드러내 안으로 들어가면 진식을 발진할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앞으로 놈들이 지나갔을 뿐만 아니라 그들 중 한 놈은 바위 위까지 올라온 것이다.
" 참! 난 잠룡대의 군사 교랑 이철상이야."
" 잠룡대? 혹시 연우강이 이끄는 조직을 말하는 거냐?"
" 잘 아네. 사유성도 광랑 손에 죽었는데,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어."
이철상은 검을 밀어 넣었다.
" 크윽!"
파철극의 입에 쩍 벌어지고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순시간에 파찰극의 숨통을 끊어 버린 이철상은 검면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환수대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환수대 대원들은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 나도 가볼까!"
파앗!
이철상은 생긋 웃으며 북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철상이 북문을 향해 달려가는 그 순간 환수대 대원들은 그들을 환수로 변신시켜주는 내공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오 할의 내공을 끌어올리자 나아가는 속도가 두 배로 빨라졌다.
팔 할의 내공을 끌어올리자 둥글었던 눈동자의 좌우측이 좁아지면서 위에서 아래로 줄을 그어 놓은 것 같은 도마뱀 눈으로 변했다.
구 할의 내공을 끌어올리자, 키가 일 장으로 커지고 옷이 찢겨나가며 송곳니가 돋아났다.
십 할의 내공을 끌어올리자 손과 발에서 검은 털이 숭숭 돋아났다.
그리고 그들은 고통을 전혀 모르는 짐승이 됐다.
캬우!
크아아!
크아아!
환수대 대원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밀천 총단의 담을 넘었다.
" 하하하! 대단한 녀석들이네."
북문 앞에 당도한 이철상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나는 곳이 무림이라고 하지만 키가 커지고, 털이 돋아나는 무공은 난생처음이었다.
환수는 인간과 강시의 중간이 아니라 인간과 짐승의 중간에 서 있는 생명체를 일컫는 말이었다.
" 끄응!"
거대한 바위 앞으로 걸어간 그는 전 내공을 동원하여 들어올렸다.
" 하긴, 내가 집채만 한 바위를 들어올리는 것도 말이 안되는 경우니까."
그는 피식 웃으며 북문 앞으로 걸어가서는 바위를 허공으로 던져 올렸다.
쿠웅!
바위는 삼분의 일 가량이 땅속으로 박혀 들어갔다.
스스스!
바위가 박히는 순간 주변 대기가 요동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담을 따라 오른편으로 돌아갔다.
" 사냥철이네."
이철상은 작은 바위가 있는 곳으로 가서는 그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 다 들어간 거요?"
품속에서 육포를 꺼내 씹고 있는데 장사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런 모양이다."
이철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 적이다!"
" 괴물이다!"
" 무적철검대는 진영을 유지하라!"
" 철혈전마대는 나를 따라라!"
" 마극파천대는 놈들을 없애라!"
" 무형혈인대는 놈들의 다리를 잘라라!"
" 제갈생은 어디 있느냐? 제갈생은 어디에 있느냐?"
" 큭!"
" 풋!"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이 급한 와중에도 유자웅은 연우강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 유자웅, 저 자식. 죽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이오, 형님."
장사덕이 피식 웃으며 이죽거렸다.
" 그러게 말이다."
" 괴물이다! 다리를 잘라라!"
" 다리를 잘라라!"
캬우!
크아아!
캬아악!
" 전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장사덕은 이철상을 보았다. 그가 구축한 팔괘만상미혼대진은 외부에 있으면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안쪽 상황이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온다.
" 그동안 진식에 대해 공부 좀 했거든."
" 그럼 저 소리가 공부의 결과란 말이오?"
" 응! 저 옆에 있는 돌을 빼내면?"
이철상은 커다란 바위 옆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어른 머리 크기의 돌 하나가 딸려 나왔다.
요란하게 들려오던 소리가 뚝 그쳤다.
" 너무 조용하오. 형님."
" 그렇지?"
이철상은 싱긋 웃으며 돌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밀어놓았다. 그러자 그쳤던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 역시 싸움은 요란해야 하는 모양이오."
장사덕은 이철상을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두 사람은 육포를 나눠 먹으면서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순간에 공포에 전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환수들이 본격적으로 학살을 시작한 듯했다.
" 그나저나 유자웅 그놈은 기절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 그놈 겁이 많소?"
" 겁이 많은 개일수록 사납다는 말 들어봤냐?"
" 아뇨?"
" 우리는 보통 요란하게 짖는 녀석들을 보면 사납다고 하잖아."
" 그런데 그게 상대방을 위협하려고 짖는 것이 아니라 겁이 많아서 짖는 거다?"
" 응."
이철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 하고 싶은 말이 뭐요?"
" 그런데 요란하게 짖는 녀석들은 대부분 다른 종에 비해 머리가 좋다고 알려져 있거든."
" 아! 그러니까 머리 좋은 놈들은 겁이 많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구료. 유자웅도 그런 놈이라고."
" 지금쯤 똥줄이 바싹바싹 타고 있을 거다."
" 오줌이나 지리지 않았는지 모르겠소."
" 어쩌면 지렸을지도 몰라."
" 보고 싶네."
두 사람의 말처럼 유자웅은 오줌을 지리진 않았지만 돌아버리기 직전이었다.
아니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강기 경지에 이른 검이 아니면 잘리지도 않고, 빠르기는 전광석화다. 크기는 일 장에 달하고 손에 들린 무기뿐만이 아니라 팔과 다리 그리고 이도 치명적인 무기다. 그것들 중 아무것에라도 걸리면 죽음으로 이어진다.
캬우!
캬아아!
크아아!
" 도대체......."
유자웅은 멍한 얼굴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건물을 태우는 불길이 없었다면 상황이 더 나았을 지도 모른다. 수십 채의 건물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주변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 주고, 그 안에서는 잔인한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 부맹주님!"
철검패왕 소무생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돌렸다. 혈투를 벌이고 온 듯 왼팔이 보이지 않았다.
" 철수해야 합니다."
" 이대로 도망치잔 말인가?"
" 그렇지 않으면 전멸합니다. 부맹주님."
" 아니오. 소 대주. 조금만 더 버티면 우리에게 승산이 있소."
소무생의 말을 받은 사람은 마극파천대 대주 마영군 수자양이었다.
" 무슨 소리요?"
" 놈들은 강하긴 하지만 사리 분별을 못하고 있소이다."
" 강시와 비슷한 상태란 말인가?"
이번엔 유자웅이 물었다.
" 그렇습니다. 부맹주님. 놈들은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
" 적이 있는 곳으로 유인해 가면 된다는 뜻이군."
유자웅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제는 육 할이나 사 할의 희생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승리를 해야 대야벌로 돌아갈 수가 있을 터였다.
" 그렇습니다. 대응하는 대신 적이 숨어 있는 곳으로 유인해 가면 오히려 우리가 승리할 수 있습니다."
" 지금부터 그들을 놈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유인해 가도록 하게."
유자웅은 결정을 내렸다.
" 알겠습니다. 부맹주님."
소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라는 명령이 아니고 유인하라는 명령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는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잠시 후 묵야련 무인들은 환수대를 밀천 무인들이 숨어 있는 건물로 유인했다.
하지만 유인한다고 해서 희생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아니 전보다 더 늘어났다.
희생자가 더 늘어난 이유는 다름 아닌 밀천 무인들 때문이었다.
환수들을 건물 안으로 유인해 들어가게 되자, 안에 있던 밀천 무인들이 환수를 피해 도망쳐 나오면서 그들과도 싸움을 해야했다.
밀천 무인들과 싸우고 있으면 어디선가 환수들이 나타나 덮쳐오고 또다시 그들을 건물로 유인하는, 같은 상황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면서 양측 무인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 외천주님!"
모철은 나진관을 불렀다.
지금 그는 철수하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삼경에 시작된 전투는 주변이 환해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어느 쪽도 승리를 점하지 못하고, 양패구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상태로 가면 남는 건 전멸밖에 없을 듯했다.
" 철수를 하잔 말인가?"
" 아니면 전멸합니다."
" 적도 우리와 마찬가지 상황이네. 모 대주."
나진관은 철수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환수대가 아군 편이다. 비록 자아를 상실한 상태라 아군도 희생이 나고 있지만, 승리를 확신하는 순간 파찰극에게 환수대를 철수하라고 하면 된다.
물러날 이유가 없었다.
" 전 적이 아니라 우리 문제를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외천주님."
" 날 믿는가?"
나진관은 모철을 보았다.
" 믿습니다. 믿으니까 지금까지 외천주님을 모시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하지만 지금은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 그럼 날 믿어 주게. 모 대주. 조금만 더 있으면 상황이 정리되네. 우리의 승리로 끝날 거란 말이네."
"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저 모습이 보이지도 않습니까?"
모철은 환수를 피해 도망치고 있는 밀천 무인들을 가리켰다.
캬우!
" 크악!"
" 아악!"
"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연이어 들려왔다.
" 좋네. 자네에겐 말하겠네. 사실 저 괴물은 환수라고 부르는 우리 밀천의 비밀 병기네."
더 이상은 숨길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해서 모철이 마음대로 철수를 명해 버리면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린 격이 되고 만다. 일단은 모철의 행동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나진관의 말이 모철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 그러니까 저 괴물들이 밀천에서 만들어낸 병기란 말입니까?"
모철의 목소리가 약간 커졌다.
" 그렇네. 모 대주. 천오백 년 만에 복원한 밀천의 비밀 병기로 이번에 첫 출정이네. 내가 보기엔 완벽한 것 같은데 모 대주 생각은 어떤가?"
환수들의 활약에 고무된 나진관은 모철의 말투가 변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화가 나서 목소리가 커진 게 아니라 밀천의 강함에 흥분하여 목소리가 커진 걸로 착각했다.
" 개자식들!"
모철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더불어 진득한 살기가 그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 지, 지금 무슨 소릴 한 건가?"
나진관은 깜짝 놀라 물었다.
푸욱!
바로 그 순간이었다.
모철의 도가 나진관의 단전으로 파고들어 갔다.
" 커억!"
나진관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새로 영입한 무인들 중 충성심과 무공이 강하여 제일대 대주로 삼았던 자가 모철이었다.
" 왜?"
" 난 너희 밀천은 대야벌과는 다른 줄 알았어. 약자를 배려하는 그런 단체인 줄 알았단 말이다. 그런데 착각이었어. 너희들은 대야벌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 무공이 약한 자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으면서, 화살받이를 시킬 사람이 필요할 땐 부하라며 친한 척하지."
모철이 화가 난 건 바로 그 점이었다.
진급을 시켜주지 않아도 상관없고,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필요가 없다면 내보내면 그만이지 최소한 화살받이는 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저들은 새로운 병기를 만들어 내서는 아군을 상대로 성공 여부를 실험하고 있다.
울컥하고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올랐다.
" 우린 너희들이 가지고 놀다가 지겨워지면 버리는 그런 장난감이 아니다. 나진관."
모철은 차갑게 말하며 도를 뽑았다.
" 크윽! 우, 우리가 언제 자네들을 장난감으로 ........ 설마 저 광경 때문에?"
나진관은 밀천 무인들을 도륙하고 있는 환수를 보았다. 환수 상태가 되면 자아를 상실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철로서는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 서, 설명해 줄 수 있는데......"
털썩!
나진관은 단전을 부여잡고 앞으로 처박혔다.
" 설명해 준다고 바뀔 상황이 아니다. 나진관."
차갑게 말한 모철은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 밀천 무인들은 철수하라! 당장 만양평으로 나가라!"
모철의 외침은 밀천 전역으로 펴져 나갔다.
" 철수하라!"
" 철수하라!"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밀천 무인들은 건물 밖으로 몸을 날렸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들은 가장 가까운 담으로 가서는 망설이지 않고 담을 넘었다.
담 너머에는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밀천 무인들은 계속해서 담을 넘었다.
" 놈들이 도망치고 있습니다. 부맹주님!"
무형혈인대 대주 종도는 유자웅을 향해 몸을 날려 가며 소리쳤다.
" 적을 쫓아가면 괴멸시킬 수 있겠는가?"
유자웅은 급하게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살겠다는 놈을 누가 믿고 따르겠어요? 니 좋을 적의 본거지를 점령했다는 건 곧 전쟁의 승리를 의미한다.
하지만 도망친 놈들이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돌아온다면 복잡해진다.
이곳에는 아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편인지 알 수 없는 괴물들까지 있었다. 밀천 무인도 없는 데 굳이 괴물들과 싸울 이유가 없었다.
" 괴물들은 어떻게 됐는가?"
" 절반 정도가 남았습니다."
" 아군의 패해 상황은?"
" 남은 인원이 천여 명입니다."
" 적을 섬멸할 수밖에 없겠구먼."
" 그렇습니다. 부맹주님!"
" 알았네."
고개를 끄덕인 유자웅은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십여장 높이에서 멈춘 그는 부하들에게 고함을 내질렀다.
" 묵야련 무인들은 듣거라! 놈들이 도망치고 있다. 도망치는 적을 쫓아가서 섬멸하라!"
" 와아!"
" 우와아!"
이보다 기쁠 수가 없었다.
묵야련 무인들은 열화와 같은 환호로 유자웅의 명령에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 놈들을 죽여라!"
" 놈들을 섬멸하라!"
" 서둘러라!"
묵야련 무인들은 엄청난 속도로 환수대 대원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크아아!
캬우!
환수대의 환수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묵야련 무인들을 쫓아 몸을 날렸다.
그로부터 반 각 후,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처절한 비명이 난무하던 밀천 총단은 침묵으로 빠져들어 갔다.
갑자기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은 듯한 침묵이었다.
느닷없이 찾아온 침묵은 잠에 취해 있던 사람을 깨웠다. 눈을 뜬 사람은 북쪽의 구 층 건물 꼭대기에서 잠을 자던 수여설이었다.
그녀와 연우강이 누워 있는 곳은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그녀는 시선을 내렸다.
발가벗은 채 연우강의 장포를 덮고 있었다. 장포 안쪽의 가슴에는 그의 손이 턱 올려져 있고, 허벅지에는 그의 다리가 걸쳐져 있다.
" 연 공자."
수여설은 연우강의 귓전에 대고 나직이 불렀다.
" 끝났어요?"
잠에 취한 듯한 목소리가 연우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그런 것 같아요. 아주 조용........"
수여설은 말끝을 흐렸다. 가슴에 올려져 있던 연우강의 손이 천천히 움직여 다녔다.
" 아직 하루는 더 기다려야 해요. 수 소저."
" 그럼 계속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거예요?"
" 갈 곳이라도 있어요?"
" 아뇨."
" 가고 싶은 곳은?"
" 있을 리가 없잖아요."
" 그럼 열두 시진 동안 심심해서 어쩌죠?"
" 설마 청춘남녀가 둘만 있다고 심심할 리 있으려고요."
" 그럴까요?"
" 그렇다니까요."
수여설은 연우강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 일단은 한숨 더 자는 게 어때요?"
" 저도 그게 나을 것 같아요."
수여설은 연우강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두 사람이 눈을 뜬 건, 깊은 호수 속 같은 침묵을 몰아내고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한 다음 날이었다.
" 청춘남녀 둘이 있으면 심심할 리가 없을 거라고 하더니 정말 그렇네요."
연우강은 웃으며 말했다.
사실 연우강은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수여설이 워낙 곤하게 자고 있어 깨우지를 못했다. 그러다 보니 꼬박 하루가 지나 버리고 만 것이다.
" 미안해요. 제가 피곤했나 봐요."
수여설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 잠자는 모습이 아주 예뻤으니까 됐네요. 녀석들 기다릴 텐데 그만 일어날까요?"
" 그래요."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몸을 날렸다.
팔괘만상미혼대진에서 나온 자들에 대한 정리가 끝ㅋ난 듯 잠룡대 대원들은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나르는 중이었다.
" 어떻게 됐어?"
연우강은 막장 옆으로 날아내리며 물었다.
" 우린 분명 지옥 갈 거다."
" 그걸 이제 알았어? 무림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지옥행은 정해진 거야. 인마. 아무튼 빨리 정리해."
연우강은 막장의 어깨를 툭 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 잡랑."
" 여기 있습니다."
연우강이 부르자 장사덕이 사망궤를 가지고 왔다.
연우강은 사망궤를 열고 사망묵의를 꺼내 걸쳤다.
" 연 공자! 연우강 공자 계시오?"
그때 만양평 동쪽에서 연우강을 찾는 외침이 들려왔다.
연우강은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양평 동쪽에서 남색 무복을 걸친 자들 세 명이 이편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 저들은 동창 무인들인데......"
연우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 연우강 공자 없소?"
동찬 무인들은 다시 소리쳤다.
" 내가 연우강이오!"
연우강은 그들을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 아이고, 거기 계셨구려."
동창 무인들은 반색을 하며 연우강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 누구요?"
연우강은 세 사람을 보며 물었다.
" 난 동창의 호남 지부장 좌욱기외다."
맨 오른편에 있는 사내가 연우강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첩지를 꺼내 내밀었다.
" 반갑소, 좌지부장."
연우강은 첩지를 펼쳤다.
연우강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곧 그의 몸에서 겨울 바람보다 더 차가운 살기가 흘러나왔다.
" 으음!"
연우강의 몸에서 흘러나온 살기를 접한 좌욱기 일행은 저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났다.
첩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연우강은 고개를 들어 좌욱기를 보았다.
" 헉!"
자욱기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스치듯 마주친 연우강의 눈빛 때문이었다.
그 눈을 보는 순간 수천 길 깊이의 무저갱으로 빠지는 듯한 아득함이 밀려왔다. 그 눈비은 사람의 눈빛이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고 짐승의 눈빛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예전에 그런 눈빛을 분명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 봤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생각날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기억에 공연히 짜증이 났다.
그때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 첩지 언제 온 거요?"
" 다, 닷새 됐습니다."
" 닷새라......... 교랑!"
연우강은 이철상을 불렀다.
" 말씀하십시오. 광랑."
이철상은 연우강 옆으로 다가갔다.
" 동정호로 가서 사은을 기다려. 그리고 염소수염 영감에게 연락해서 북경으로 집결하라고 해. 상대는 금의위니까 각오 단단히 하라고 하고."
" 그, 금의위란 말입니까?"
이철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경왕으로 인해 연우강과 금의위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연우강이 자기 입으로 금의위와 전쟁을 할 거라고 말한 것이다.
" 설연 그 녀석으로부터 이게 왔다. 수 소저에게만 보여 주고 태워."
연우강은 첩지를 이철상에게 건넸다.
" 알겠습니다."
이철상은 첩지를 펼쳤다.
" 수 소저. 먼저 갈게요. 동정호에서 봐요."
연우강은 바닥을 치고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순식간에 만양평 동편으로 날아갔다.
양성일 도독 동지가 죽었다.
그리고 잠룡대 대원들 가족을 잡기 위해 반포사가 나섰다.
벌써 몇몇 가족은 체포된 걸로 알고 있다.
이 첩지를 보는 대로 바로 북경으로 와라. - 유설연.
" 과, 광랑!"
처비를 수여설에게 건네준 이철상은 연우강을 불렀다.
" 군산 주변을 샅샅이 훑어 놔!"
천리전음으로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괜찮으십니까?"
이철상은 멀어지는 연우강을 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사람은 다 죽어. 교랑. 그리고 죽은 자는 언젠가는 잊히게 돼 있어. 안 내가 그를 잊기 전에 뭔가를 해주고 싶을 뿐이야. 이성을 잃진 않았으니까 걱정하지마."
더 이상 연우강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벌판 너머 햇빛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죽은 시체의 눈이었어."
문득 좌욱기가 버럭 소리쳤다.
" 죽은 시체의 눈이라는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철상은 좌욱기를 보며 물었다.
" 아, 아니네."
좌욱기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시선을 들어 연우강이 사라진 곳을 보았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그의 눈.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여겼던 그 눈은 다름아닌 눈을 뜨고 죽은 시체의 눈동자와 비슷했다.
다시 연우강의 눈동자를 떠올리던 좌욱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