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97화 (197/232)

제 1장 연우강의 관심사는

금향이 최고의 정보력을 가진 단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보의 질 때문이다.

출입하는 손님 대부분이 권력의 심층부에 있는 자들이라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라도 상당한 파급력을 지닌 고급 정보들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버릴 게 거의 없다.

그런 정보들이 계속해서 축적되다 보니 금향은 어느 순간 최고의 정보 단체가 된 것이다.

하지만 단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주로 북경 정계에 있는 자들의 입을 통해 나온 정보이다 보니 중원 전역을 아우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북경 외부에 대한 정보라고는 남경왕처럼 권력의 정점에 있다가 지방으로 떠난 자들에 대한 것들 뿐이었다.

그랬던 그들이 강호 무림에 관심을 두게 된 건 금의위와 밀월 관계를 유지하면서부터였다. 금의위가 강호 무림과 얽히면서 자동적으로 무림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금향에서 정보를 다루는 조직은 암향이었다.

암향의 구성원은 사향과 염향에서 은퇴한 자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들이 머무는 건물 또한 암향이라고 불렀다.

암향의 향주인 조난설은 깜짝 놀랐다.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연우강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전율적인 기운이 아니었다. 검은색의 고대 장포와 검은색 철립, 그리고 검은색 궤짝, 바로 그 특이한 복장이었다.

검은색 일색인 모습은 금의위 수뇌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사초 연우강의 복장이었던 것이다.

' 설마 그가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건가?'

조난설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하였다.

연우강에게 당했다고 하였던 무림 고수들의 이름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지금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만으로도 무공 정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느 순간 조난설은 부르르 떨었다.

감당할 수 없는 자.

연우강에게 대한 첫인상이었다.

[ 극천!]

조난설은 과극천에게 전음을 보냈다.

과극천은 남자들로 이루어진 염향의 전대 향주였다.

[ 말하게.]

과극천의 전음이 들려왔다.

[ 당장 총루주께 가서 연우강이 왔다고 전하게.]

[ 저자가 연우강인가?]

[ 맞네.]

[ 어떤가?]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암향의 외부라 연우강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 무공 말인가?]

[ 그렇네.]

[ 여기가 우리 무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네.]

[ 그렇게 강하단 말인가?]

[ 구룡천군 무인 백여 명과 사장군을 없앴다는 말을 못 들었는가?]

[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라고 한 사람은 자네네.]

[ 아무튼 빨리 가서 총루주께 전하게. 어쩌면 염정탈혼환락진을 펼쳐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도 하고.]

[ 정말인가?]

과극천은 안으로 들어가 연우강의 무공을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애써 눌러 참았다.

그때 조난설의 전음이 또다시 들려왔다.

[ 그것도 약하게 본 거네. 서두르게.]

[ 알았네.]

과극천은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

보통 기루업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은 간단하다.

돈 많은 재력가가 건물을 새로 짓거나 사들여서는 기녀를 구해 술을 파는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지극히 일차원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다.

가루업의 기본은 기녀고, 뛰어난 기녀들이 사업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뛰어난 기녀를 구하는 게 결코 쉽지가 않다.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은 뛰어난 기녀들은 대부분 주변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검은손들과 이어져 있고, 그 검은손들은 무인들과 연계돼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기녀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이 투자될 수밖에 없다.

아무튼 막대한 돈을 써서 기녀를 구했다고 해도 바로 기루를 운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녀를 구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관청의 허가가 남아 있다. 관청의 관리를 상대하는 건 검은손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욱 까다롭다는 게 정설이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관리들에게 바칠 뇌물을 총투자비의 이 할까지도 잡기도 한다. 그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기루를 열 수 있는데, 기루의 운영은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기녀를 택해 맡긴다.

술에 취한 취객을 상대하는 데는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낫고, 기녀를 거느리는 것 또한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향은 여타 다른 기루와는 약간 달랐다.

옥향부인 두심향은 주인이면서 운영자였다.

물론 그녀 밑으로 다섯 명의 루주가 있기는 하지만 그녀들은 수백 기녀들의 맏언니 역할을 할 분 금향의 운영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았다.

오백여 명에 달하는 기녀를 관리하고, 금향을 운영하는 사람이 두심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두심향이란 이름이나 옥향이란 별호 대신 '북경의 여장부'라고 부른다.

두심향에게 ' 북경의 여장부 ' 라는 별명을 지어준 것은 단순히 금향의 주인이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다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금향의 특수성이었다.

금향을 찾는 자들은 거의가 북경 최상류층이고, 권력까지 쥔 자들이라 상대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입는 옷이며 신는 신발, 그리고 몸에 걸치는 장신구 등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하고, 고서화나 명필에 대한 식견이 있어야 하며, 당대 또는 전대에 이름을 날린 문장들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꿰고 있어야 한다.

즉 최상류층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그들의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면 장사를 계속할 수가 없다.

그런데 두심향은 그런 최상류층만이 가지는 독특한 사고방식을 이해했을 뿐 아니라 그들보다 더 풍부한 지식과 식견으로 압도했다. 그러면서도 상대를 높이고 자신은 낮추는 화술을 구사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는 고관대작들의 신뢰를 얻어냈을 뿐 아니라, 금향을 북경 최고의 명물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금향의 회원임을 나타내는 금향패는 능력 있는 자들의 상징이 됐다. 사용한 무공은  그런 일은 아무나 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를 '북경의 여장부'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이십대처럼 보이고, 또 어찌 보면 사십대처럼 보이는 특이한 여인이었다. 여인의 얼굴은 천하절색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맑고, 커다란 눈동자는 호수처럼 깊다. 오뚝 솟은 코와 입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 입술은 단호한 분위기를 풍긴다.

얼굴이나 몸매로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이 여인이 바로 금향의 주인이자 '북경의 여장부'라고 불리는 두심향이었다.

두심향은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초상화가 그려진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초상화 속의 인물은 조금 전 소진이 그렸던 연우강이었다.

" 연우강이라......."

두심향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는 지금 암향에 들어와 있다고 하였다.

암향의 향주인 조난설은 이 갑자의 공력을 지닌 초절정 고수다. 금향에는 조정 관리들만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관리들이 넓은 인맥을 과시하기 위해 강호 무인을 간혹 데려오곤 했었는데, 그들을 보고도 조난설은 콧방귀를 뀌곤 했다. 그랬던 그녀가 위기의식을 느낄 정도로 연우강은 강하다고 하였다.

" 북경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린다고 했다던가?"

북망산에서 연우강과 주진무 사이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들었다. 연우강은 반역죄로 엮어 넣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발언을 남경왕과 금의위 영반 공오인 앞에서 했다고 하였다. 그 말로 인해 연우강의 부모가 잡히고, 연우강을 따른 잠룡대의 가족이 반포사들에 의해 체포돼 압송되고 있었다.

그런 다급한 순간에 연우강은 이곳 북경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금향에.

" 그에 대해 나온 거 있어요?"

또 다른 사랆이 있는 듯, 두심향은 내실을 향해 나직이 물었다.

" 연우강 말입니까?"

남자의 목소리도, 그렇다고 여자의 목소리도 아닌 중성적인 목소리가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육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자가 두심향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찻잔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있는 이 사람은 한때 황실 장인태감을 지낸 동각이란 자였다.

장인태감은 황제 바로 옆에서 근무하는 내관의 우두머리를 칭하는 관직명인데, 황제 바로 옆에 있다 보니 북경 정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두심향이 금향을 최고의 기루로 키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동각이었다. 지금은 은퇴를 하여 황실을 떠났지만,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황실에 남아 있고, 황제가 주관하는 어전회의 안건은 물론이고, 황제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속속들이 꿰고 있다. 금향의 최고 정보통은 암향이 아니라 바로 동각인 것이다.

" 네."

두심향은 가운데 자리로 가 앉았다.

" 위험한 잡니다."

동각은 단언하듯 말했다.

" 그는 상계의 대야벌이라 불리는 금릉 연시 세가의 장자지만 업둥이에 불과해요, 할아범."

" 그가 위험하다는 건 금릉 연시 세가의 장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 그의 성이 주씨 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주씨라고요?"

두심향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동각이 말을 들었다는 건 황제 바로 옆에서 수발을 들고 있는 내관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뜻이다.

물론 중원에는 수많은 주씨들이 있다. 하지만 자금성 가장 깊은 곳에서 주씨일지도 모른다는 언급이 있었다는 건 연우강이 황족일 수도 있다는 말인 것이다.

" 자세히 좀 말씀해 주세요."

두심향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 혹시 안정군왕 주인문이라고 들어본 적 있습니까?"

" 얼마 전에 구룡천군을 만든 용왕개 주선풍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용왕개 주선풍과 안정군왕 주인문에 대한 정보는, 구룡천군을 파헤치며 알아낸 것이다.

" 맞습니다. 최근에 알아낸 정보죠."

" 연우강이 그와 관계가 있나요?"

" 안정군왕 주인문은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그 아들의 이름이 주선엽이었답니다. 그리고 주선엽은 대야벌 암중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무성의 성주 묵사였고요."

" 그럼 연우강이 그 주선엽의 아들이란 말인가요?"

"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 높다는 건?"

"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아가씨."

" 그 일을 누가 하고 있죠?"

" 구림세가의 딸이자 남경왕의 며느리인 소명공주 이자약이 하고 있습니다."

" 그럼 설사 연우강의 진짜 성씨가 주씨라고 해도 밝혀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연우강과 이지약의 사이를 모르는 그녀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 그건 알 수 없습니다."

" 왜요?"

" 이지약이 남경왕 편이었다면 방금 제가 말한 것들도 밝히지 말았어야 합니다."

" 그러네요."

두심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연우강에게는 화화로 유설연이라는 막강한 배경이 있습니다."

" 동창의 이인자인 유설연이 연우강의 뒤를 봐준다는 말인가요?"

" 지금은 동창의 이인자가 아니라 일인잡니다."

" 유 공공이 죽기라도 했어요?"

두심향은 주변을 둘러보며 속삭였다.

" 그게 아니라......."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동각은 내기를 끌어올려 강기막을 쳤다. 그러고는 유설연과 황제와의 관계를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 맙소사. 저, 정말 그래요?"

두심향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산전수전 다 겪었으니 사내들의 성적 취향을 모르진 않는다. 말 한마디면 수만 명을 없앨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자가 잠자리에서는 젖먹이처럼 행동하는,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진 자도 경험했다.

그런데 황제가 그런 변태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그렇습니다. 아가씨. 지금 북경 황실의 권력은 화화호와 남경왕이 양분하고 있는 셈입니다."

" 둘 중 누가 유리하죠?"

" 현재는 남경왕이 유리한 상황입니다. 게다가 강호에서 추진하고 있는 구룡천문이 성공한다면 지금보다 더한 권력을 쥐게 될 겁니다."

" 결국 그의 세상이 될 거란 말이군요."

" 그렇습니다."

" 만일 실패하면?"

"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자리에 화화호가 오르게 될 겁니다."

"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두심향은 굳은 얼굴로 물었다.

금향이 금의위와 손을 잡았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일 뿐 알만한 자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남경왕이 권력을 쥐게 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반대로 호화호가 권력을 쥐게 되면 금향은 초토화 되고 말 것이다.

" 그래서 제가 금의위와 손을 잡는 걸 결사반대한 겁니다. 아가씨. 장사꾼은 어느 한쪽 편을 들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우린 이곳에서 쫓겨날 처지였다고요.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아시면서 왜 그래요."

" 답답해서 그렇지요."

" 답답한 건 저도 마찬가지에요. 하지만 답답하다고 가슴을 쳐봐야 해결되지 않아요.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내야 해요."

"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 어떤.......?"

" 첫째는 그를 생포해서 우리가 보유한 봉원쇄정대법을 펼쳐 꼭두각시를 만드는 겁니다."

" 우리 금향에 봉원쇄정대법을 익힌 사람은 저밖에 없다는 걸 아시고 하는 말씀이세요?"

두심향의 얼굴은 여전히 굳은 채다.

봉원쇄정대법은 머릿속에 금제를 가하는 최강의 대법 중의 한가지다.

일반적인 금제술은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명령을 거부하면 극심한 고통이 따르고,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명령을 따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봉원쇄정대법에 걸린 자는 명령권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의지가 발현된 걸로 여기고 행동하게 된다.

요컨대 명령권자가 누군가를 없애라고 명령을 내리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게 아니라, 그 자를 없애야 할 명분을 스스로 만들어낸 다음 일을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봉원쇄정대법을 펼치는 방법이었다.

대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음양화합을 해야 하고 상대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이라야만 한다.

두심향의 얼굴이 더욱 굳어진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 두 번째 방법은 원앙음양고를 사용하는 겁니다. 아가씨."

두심향의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동각은 두 번째 방법을 말했다.

" 할아범은 혹시 제 나이를 까먹고 있는 거 아니에요?"

두심향은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원앙음양고는 양고와 음고의 암수 한 쌍으로 돼 있으며, 키우는 사람이 남자면 양고가 주고가 되고 음고는 종고가 되며, 여자면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게다가 녀석들은 일심동체고 또는 부부고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건 바로 원앙음양고가 지닌 특징 때문이다.

녀석들은 흥분하게 되면 최음제 성분의 배설물을 뿜어내 숙주들이 관게를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주고가 죽으면 종고는 스스로 독을 뿜어내 자살을 하게 되는데, 그 독은 숙주마저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즉 한쪽이 죽으면 다른 쪽도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고가 바로 원앙음양고였다. 그러한 효과 때문에 연인 사이의 사랑을 맹세하는 수단으로 많이 사용되곤 했다.

문제는 원앙음양고를 주입하기 위해서는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동각이 말한 봉원쇄정대법이나 원앙음양고는 음양화합이 전제가 돼야 하는 방법이었다.

" 아직 이십대로 보입니다. 아가씨."

" 전 마흔한 살이에요, 할아범."

" 하지만 혼인을 한 적은 없었죠."

" 혼인은 하지 않았지만 남편은 있었어요."

" 그는 남편이 아니라 금의위에서 보낸 첩자였습니다."

" 그렇다고 해도 전 그를 남편으로 대했어요. 비록 이 손으로 처리하긴 했지만."

두심향은 양손을 펴 보였다.

" 아직 못 잊으신 겁니까?"

" 무슨 소리에요. 십 년이 흘렀는데, 그보다 할아범은 지금 그에게 미인계를 사용하란 말인가요?"

두심향은 연우강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 황족이면서 금릉 연씨 세가의 장자면 중원 최고의 혈통입니다. 게다가 그는 서른도 되지 않는 혈기 왕성한 청년 아닙니까. 아가씨가 손해날 일은 절대 없습니다. 아가씨를 잊지 못하고 간혹 찾아온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은 것 같고요."

" 풋!"

두심향은 피식 웃었다.

" 어쨌든 가장 좋은 방법은 녀석을 사로잡아 봉원쇄정대법을 펼치는 겁니다."

" 사로잡는 게 불가능하면 어떡하죠?"

" 그동안 그 녀석에 대해 많은 걸 알아보았습니다."

" 그랬는데요?"

" 지금껏 그 녀석에게 달려들었다가 살아남은 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적이라고 결정을 내리면 가차없이 응징을 가했습니다."

" 우리도 그렇게 되겠군요."

" 막지 못하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 무공도 강하고, 머리도 좋고, 적에게는 조금의 자비심도 보이지 않는 자를 무슨 수로 잡는다는 거죠?"

" 녀석에게는 단 한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 무슨 약점이 있다는 거죠?"

" 그가 대야벌에서부터 도움을 주었고, 지금도 도움을 주고 있는 두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운화와 북해빙궁의 수여설입니다. 그 두 여자의 공통점이 뭔지 아십니까?"

" 공통점이 있어요?"

" 부모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 아!"

두심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 연우강은 고아에게 유독 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고아들에게 잘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그냥 불쌍해서 도와줄 뿐이라고 여기고 있겠지요."

" 하지만 난 고아라는 사실을 들먹이기에는 너무 늙었어요, 할아범."

" 그건 나중에 그를 옭아맬 때 써먹을 겁니다. 우선은 봉원쇄정대법과 원앙음양고로 제압하는 게 먼접니다."

" 그를 제압할 방법이 있어요?"

" 있습니다."

" 말씀해 보세요."

" 그러니까......"

동각은 전음으로 말을 이었다.

" 정말 그렇게 하면 된다는 거예요?"

" 절 믿으십시오. 아가씨. 그는 절대 아가씨를 외면하지 않을 겁니다."

" 그러다가 정말로 외면하면?"

" 그럼 팔자려니 해야겠지요."

" 할아범!"

두심향은 동각을 쏘아보았다.

" 클클클! 암향에서 그를 제압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텐데 뭐가 걱정입니까?"

" 그렇다고 해도 봉원쇄정대법은 제가 펼쳐야 하잖아요."

" 그런 걸 일컬어 일석이조라고 하는 겁니다."

동각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웃는 건 그의 얼굴 뿐이었다. 눈 깊은 곳에서는 슬픔이 눈물처럼 고여 있었다.

원나라 마지막 황족.

그녀의 정체다.

두심향이 이곳 북경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과거 영화에 대한 환상도, 멸망한 원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도 아니다. 하북 곳곳에 흩어져 노예 또는 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원나라 공신의 후예를 찾아 보살피기 위함이다. 금향에 있는 기녀로 있는 여자들 중 삼백여 명도 원나라 공신들의 후예들이다.

그 일을 하면서 남자를 만나기도 했지만 그는 금의위에서 들여보낸 첩자였다.

다행히 금의위에 심어놓은 자가 있어 상부로 보고되기 전에 처리하긴 했지만, 그 일이 있고 난 후에 두심향은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 그렇게 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어느새 마흔을 훌쩍 넘기고 만 것이다.

이제 와서 혼인은 불가능하겠지만 말년을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 아무튼 암향에서 그를 잡으면 봉원쇄정대법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쓸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 저희들입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저는 들어가보겠습니다. 아가씨."

동각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실로 들어갔다.

" 들어와!"

두심향은 나직이 말하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곧 문이 열리고 여자 다섯 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색색의 옷을 걸친 자들이 안으로 들어오자 실내가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들은 두심향 못지않은 미녀들이었다.

금세 꽃망울을 터뜨릴 것 같은 화려한 여자는 제일 루주인 화용부인이고, 물기를 머금은 듯 촉촉한 눈망울이 돋보이는 미녀는 제이 루주인 수국부인, 청순해 보이는 미녀는 제삼 루주인 목련부인, 새침데기처럼 보이는 미인은 제사 루주인 금와부인,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단아해 보이는 미녀는 제오 루주인 토룡부인이었다.

각각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는 이들 다섯 미녀가 금향을 이끌어가는 새끼루주들이었다.

다섯 루주가 자리에 앉자 두심향은 손수 차를 준비해 루주들 앞으로 놓았다.

" 무슨 일 있어요?"

아직 보고를 받지 못한 듯 화용부인 유만옥이 두심향을 보며 물었다.

한창 영업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호출을 받고 달려온 것이다.

" 지금 암향에 연우강이 들어가 있어."

두심향은 찻물을 따르며 대답했다.

" 연우강이라고요?"

루주들은 다들 의아하다는 얼굴이었다.

루주들은 연우강의 이름을 듣기는 했다. 하지만 금릉 연시 세가 장남이라는 신분보다는 강호 무인으로 더 많이 언급됐고, 북경 정계와는 관련이 없기 때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연우강이 누구인지 곧바로 떠올리지 못한 이유였다.

" 가만! 혹시 금릉 연시 세가 업둥이인 그 연우강을 말하는 거예요?"

그제야 생각이 난 듯 화용부인 유만옥이 입을 열었다.

" 응! 바로 그야."

" 그가 왜 암향으로.... 혹시 금의위와 관련이 있는 건가요?"

유만옥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얼굴이 잔뜩 굳은 사람은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네 명의 루주들 또한 굳은 얼굴로 두심향을 보았다.

암향은 금지나 다름없는 곳이고 금향의 존폐가 달렸을 때만 문이 열린다. 그런 곳으로 연우강을 유인해 갔다는 건, 연우강이 금향의 존폐를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자라는 뜻이 된다.

" 그런 모양이야."

두심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암향으로 집어넣었으면 걱정할 이유가 없는 거 아닌가요?"

수국부인 서나임이 물었다.

" 그건 나임 네가 연우강을 몰라서 그래."

" 연우강의 실력이 그렇게 뛰어나다는 말이에요?"

서나임은 다시 물었다.

" 전에 구룡천군에 대해 말해 준 적이 있지?"

" 구파일방에서 은퇴한 고수들로 이루어진 조직이라고 했잖아요. 전대 장문앸들도 포함돼 있다고 했고."

" 그 구룡천군 백여 명이 연우강에게 죽임을 당했어. 그리고 남경왕 전하의 호위인 사장군도 죽었고."

" 사, 사장군이 죽임을 당했단 말이에요?"

서나임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전에 천해장군 철리목 일행을 접대한 적이 있기에 그들의 무공 정도를 잘 알고 있었다.

철리목 일행은 최소한 그녀보다 두 단계 위의 고수였다. 그런 그들이 연우강에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서나임은 믿을 수가 없었다.

" 정말이에요?"

믿기지 않기는 금와부인 언나향도 마찬가지였다.

" 조금 전에 암향 향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염정탈혼환락진을 펼쳐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

" 염정탈혼환락진이라고요?"

다섯 루주는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염정탈혼환락진.

염정탈혼환락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삼백 년 전이었다. 환희궁이란 단체였는데 문도는 대부분 여자였고, 남자는 하인들이 전부였다. 아름다운 미녀들로 구성된 환희궁은 그 미모를 바탕으로 사내 무인들을 끌어들이며 세를 확장해 나갔다. 환희궁의 전성기는 요희나찰 설희가 궁주로 재직하던 때였다.

환희궁의 무공은 무인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무공이 아니었다. 색공과 음공이 대부분이었는데, 음공 또한 색공을 보조하는 것들이라 모든 무공이 색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환희궁을 대야벌에서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그 당시 대야벌 벌주였던 무치벌주 나추웅은 환희궁을 강호 무림을 좀먹는 사악한 집단으로 간주하고 토벌을 감행했다.

하지만 색공으로 무장한 환희궁은 쉽지 않은 상대였다. 특히 환희궁 궁도들이 펼치는 염정탈혼환락진은 대야벌 무인수천 명을 색의 노예로 만든 가공할 색진이었다. 더불어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색의 노예로 만들어 정혈을 고갈시켜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을 만나면 스스로 몸을 던져 동귀어진을 택했다. 강호 무림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가들은 만일 환희궁의 문도가 대야벌의 절반만 됐더라도 강호 무림은 환희궁 수중에 떨어졌을 거라고들 한다. 환희궁을 대야벌의 동등한 위치까지 올려주었던 색진.

그 진식이 바로 염정탈혼환락진이었던 것이다.

" 그 진식이 효과를 발휘할 거라고 보세요?"

토룡부인 방인화가 물었다.

" 나이 때문에?"

두심향은 되물었다.

" 네."

방인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염정탈혼환락진의 모체는 춤과 나찰섭혼공이다.

물론 기녀는 물론이고 주방에서 음식을 하는 요리사와 청소부까지도, 금향 소속이면 누구나 나찰섭혼공을 익히고 있고, 천욕무를 배웠다.

하지만 암향에 있는 이들은 나이가 가장 적은 사람이 사십 대다. 사십대가 넘은 여자들이 추는 천욕무가 과연 사내를 홀릴 수 있을지. 방인화가 걱정하는 바는 바로 그 점이었다.

" 염정탈혼환락진이 무서운 점은 바로 환각이야."

" 본래의 얼굴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 천욕무를 추는 이의 얼굴이 아니라 진 안에 갇힌 자가 원하는 얼굴이 나타나는 거야."

" 평소에 사모했던 여자가 반라 차림으로 춤을 춘다는 말이군요."

" 그래서 치명적인 유혹이 되는 거지."

두심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 진식을 연우강이 견뎌낼 거라고 보는 거예요?"

방인화가 다시 물었다.

연우강은 이제 삼십도 되지 않는 청년.

여체의 유혹에 약할 수밖에 없는 나이다. 그런 자가 염정탈혼환락진을 벗어난다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걱정할 이유가 없을 듯했다.

" 글쎄....."

두심향은 말끝을 흐렸다.켜보겠다는 건가?’

물론 걱정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보통 무인이 아닌 특이한 능력을 가진 자다. 목에 생선가시가 걸린 것처럼 흑룡마란천력이란 무공이 껄끄럽다.

" 대야벌 무인도 견디지 못했던 진식이에요. 언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유만옥이 걱정을 떨쳐내듯 활달하게 말했다.

" 그럴 거야. 아무튼 암향이 열렸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위해 부른 거야."

우선은 그렇게 정리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암향으로 밀어 넣었으니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암향으로 가시게요?"

화룡부인 유만옥이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 일단은 봐야 할 것 같아서."

두심향은 고개를 저으며 방을 나섰다.

" 알았어요. 언니."

"바쁜 사람은 따라오지 않아도 돼."

두심향은 아래로 내려가며 말했다.

" 지금은 바쁠 시간이 아니잖아요."

유만옥을 비롯한 다섯 루주는 따라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사향의 향주 여몽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품안에는 사양마금이라고 부르는 칠현금이 안겨 있었다.

" 향녀들은 어떻게 하고 있지?"

향녀는 사향 소속 무인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 암향 곳곳으로 숨어 들어간 상탭니다."

" 암향은?"

" 그들도 역시 안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 그럼 공격을 시작한 거야?"

" 아직은 대치하고 잇는 상황입니다."

" 소진은?"

" 암향 근처에 있습니다."

" 불러와."

" 알겠습니다. 루주님."

여몽은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잠시 후 여몽은 소진을 데리고 왔다.

" 부르셨어요?"

소진은 두심향을 보며 인사를 했다.

" 연우강을 만났다고 들었다."

두심향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시서금화는 물론이고 무공도 최상이고, 얼굴과 몸매는 극상이다. 게다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다루는 기술까지 겸비하고 있다. 장차 금향을 이끌어갈 최고의 단체가 바로 소진이었다.

" 어떤 사람인지 종잡을 수가 없어요."

"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 권력을 쥔 자이거나 엄청난 부자라고 해도 처음 금향으로 들어오면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어요."

" 어떻게 나뉜단 말이냐?"

" 위축돼 말이 없거나 과장되게 허세를 부리곤 해요."

" 그런데?"

" 그는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요. 심지어는 제 가슴을 빤히 바라보며 희롱하기까지 했어요."

" 싸구려 기루에 들어간 것처럼 행동했단 말이구나."

" 네."

" 무공에 대해서는 어떻게 봤느냐?"

" 무공은 잘 모르겠지만, 암향에 들어서서는 저보고 찬물을 한 그릇 떠오라고 했어요."

" 자신 있다는 말이구나."

" 그런 것 같았어요."

소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 언니!"

듣고 있던 화용부인 유만옥이 두심향을 불렀다.

" 왜?"

" 금의위에 알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 그건 그를 잡고 나서 알려도 늦지 않아."

두심향도 그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니 동각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면 금의위에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동각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을 바꾸었다.

" 오늘 밤 예약 상황은 어때?"

" 다섯 건이 있는데, 전부 해시말이에요."

" 그럼 아직 시간이 있구나."

어느새 일행은 암향에 도착해 있었다.

" 소진, 너도 들어가자."

" 네."

소진은 두심향을 따라 몸을 날렸다.

두심향을 비롯한 소진과 루주들이 몸을 날려간 곳은 암향 삼층이었다. 삼층에는 의자에 앉아서도 일층까지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비밀 공간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소진이 차를 준비했다.

그녀는 흘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등 하나가 밝혀진 일층은 어두컴컴했다.

일층은 십여 개의 탁자가 놓여 있을 뿐 텅 빈 공간이나 다름없다. 그 공간 한가운데 연우강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조금 전과 달라져 있었다.

암향으로 데려다 줄 때만 해도 궤짝을 멘 평범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검은 철립을 쓰고 검을 옷을 걸치고 있다. 그리고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삼층에서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싸늘했다.

그때 옆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두심향이 다가와 연우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 마음에 드느냐?"

두심향이 나직이 물었다.

" 악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소진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아래쪽에서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가 이 세상을 나누는 방식은 아주 단순해. 말살시켜야 할 자, 어울려 살아야 할 자, 관심을 두지 않을 자, 이 세 부류로 나눠. 말살시켜야 할 자는 적을 말하는 데 내게 적이란 과거 내 가족에게 해를 가했거나, 현재 가하고 있거나, 미래에 가할 소지가 있는 자들이야. 그래서 대야벌과 전쟁을 시작했고, 가장 친했던 친구의 아버지인 남경왕과도 전쟁을 벌이고 있는 거야. 나는 누가 됐든 일단 적이라고 간주하면 그들을 없애는 데 목숨을 걸어. 내 가족에게 해를 가한 놈을 죽이고, 그놈의 가족을 죽이고, 관련된 자들을 전부 죽일 때까지 전쟁은 멈추지 않아."

" 여기서도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에요?"

두심향은 연우강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두심향의 목소리는 삼층 비밀의 방이 아닌 이층에서 흘러나왔다. 본인이 있는 위치를 숨기기 위해 다른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게 하는 이기전성 수법이었다.

" 금의위와 관계를 맺지 말았어야 했어."

"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너희들이 어쩔 수 없이 금의위와 관계를 맺은 것처럼, 나도 어쩔 수 없이 너희들을 없앨 수밖에 없어."

띠리링!

연우강의 말이 끝나는 순간, 어디선가 칠현금을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 우리를 없앨 자신은 있어요?"

두심향은 물었다.

" 많은 놈들이 그렇게 물어왔어."

연우강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 패천림의 림주였던 철전패왕 백독수가 그렇게 물었고, 군자무림행 우담보가, 묵연노도 유자웅이, 혈사신군 모두악이, 천붕대야 나적리가, 전마 사유성이 그랬고, 십절무적검 담대천호도 그랬어. 그들이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연우강은 삼층으로 시선을 주었다.

" 으음!"

두심향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방금 연우강이 언급한 자들의 이름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대야벌과 밀천의 주축이었던 무인들 이름이다. 그들 중 천붕대야 나적리는 밀천 천주 나천후의 할아버지고, 십절무적검 담대천호는 대야벌 벌주의 친동생이다.

" 그들을 전부 죽였단 말이에요?"

두심향은 이기전성을 펼쳐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 아냐, 담대천호는 살려뒀어. 왜냐면 그놈은 다른 놈들과 달랐거든."

" 어떻게 달랐다는 거죠?"

" 다른 놈들은 내 가족에게 해를 가할 소지가 있어서 없앴지만 그놈이 이미 해를 가했었지. 그래서 두 다리와 팔을 잘라내고는 살려주었어. 그러면서 이렇게 말해 주었어. 내가 대야벌로 들어가기 전까지 가족을 피신시키라고."

부르르!

두심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말은 곧 가족을 피신시키지 않으면 전부 없애겠다는 협박이었던 것이다.

" 악독하군요."

" 그건 나도 인정해. 난 잔인하고 악독하고 이기적이기까지 해. 하지만 상관없어. 왜냐면 내 관심사는 강호 무림이나 명나라, 또는 정의 같은게 아니니까. 내 관심사는 오직 내 가족이야. 이 세상 사람들이 전부 죽어도 내 가족만 살아 있으면 나는 만족해."

" 이기적이군요."

" 난 그런 놈이라고 그랬잖아."

" 하지만 오늘은 다를지도 몰라요. 연 공자." .

두심향이 말하는 사이에 음악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칠현금으로 시작한 연주에 피리를 비롯한 갖가지 악기들의 소리가 섞여들면서 암향 건물을 장악하기 시작햇다.

그것은 염정탈혼환락진의 효능을 극대화시키는 천상지락마음공이라는 음공이었다.

팟! 팟!

그리고 꺼져 있던 등에 불이 밝혀지면서 어두컴컴했던 실내가 달빛이 비추는 벌판처럼 환하게 변했다.

둥둥! 둥둥둥! 둥둥! 둥둥!

갖가지 악기가 만들어낸 화음 속으로 북소리가 스며들었다. 그리고 불빛 아래쪽에서 붉은색 운무가 피어올라 일층을 채워 나갔다.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내부가 붉게 물들고 대기가 요동쳤다.

그것은 염정탈혼환락진의 발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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