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염정탈혼환락진.
음악은 참으로 묘하다.
소리의 단순한 조합이 분명한데도 마음을 울리고 감정을 움직이게 한다.
휘익! 휙! 휘익!
덩실! 덩실! 덩실!
음악이 점점 고조되면서 안개 속에서 뭔가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팔다리를 흔들며 춤을 추고 있는 그들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자들이었다.
그녀들은 어깨가 훤히 드러나 있고, 겹겹이 겹쳐 입은 얇은 옷 밖으로 슬몃슬몃 속살이 살짝살짝 비춰 보인다. 소매와 치마는 길면서 풍성하다.
여자들이 연우강 주변을 수십 겹으로 둘러싼 채 춤을 추고 있었다. 특히 훌쩍 날아오를 때마다 출렁이는 가슴의 움직임은 사내의 시선을 묶기에 충분하도록 색정적이었다. 하지만 이제 발진한 염정탈혼환락진이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비밀의 방 안에 있는 두심향 일행 뿐이었다.
“ 대단해요, 언니.”
아래를 내려다보던 유만옥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지금 있는 이곳은 염정탈혼환락진의 생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식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난잡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좋아했던 사내와 지냈던 밤이 떠오르며 숨이 가빠졌다.
“ 기분 좋은 모양이구나.”
“ 좋은 시절에 대한 기억인데 나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모처럼 여자가 된 것 같아서 기분 좋아요.”
유만옥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염정탈혼환락진이 무섭다는 건 바로 그런 점 때문이야. 행복했던 기억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거든.”
“ 그럼 방금 제가 떠올린 그것들이 염정탈혼환락진으로 빠져들어 가게 하는 것들이란 말이에요?”
“ 물론이야. 그리고 이곳이 생문의 기능을 유지하는 건 이식인 천욕대염무까지야. 삼식에 이르면 이곳 또한 사문으로 변하니까 그땐 피해야 해.”
“ 저잔 저보다 더하겠죠?”
유만옥은 아래쪽 연우강을 가리켰다.
“ 글쎄, 연우강이 있는 곳은 사문이니까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다르겠지.”
두심향은 연우강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두심향의 말대로였다.
사문에 갇힌 연우강에게는 홍등가를 연상시키는 붉은 운무만 보일 뿐 여자들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 으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우강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가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뇌리를 가득 채운 음악 때문이었다.
처음엔 귀를 트이게 해주었던 그 음악이 지금은 온갖 난잡한 환상을 일으키고 있다. 수여설이 웃으며 다가오고 그 옆에는 남궁운화가 있다. 그리고 그들 뒤편으로는 이지약과 몽요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다.
네 여자는 전부 알몸이었다.
손을 들어올리고 발을 들어올릴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힌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황당한 노릇은, 들려오는 음악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빠져들어 간다는 것이었다.
이러다 큰일나겠다 싶어 연우강은 천리지청술을 펼쳐 연주자들을 찾았다.
‘ 이거 봐라.’
연우강의 입매가 슬쩍 비틀렸다.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모르지만 연주자들의 기척이 감지되지 않았다.
“ 호랑이 굴이란 말이네.”
소진이라고 하였던 소녀가 펼쳤던 무공과 은신한 채 따랐던 자들을 통해 금향이 보통 기루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엄청난 진식을 보유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천리지청술을 펼치게 되면 청력은 평소보다 수십 배 강해지고 무공에 따라 들을 수 있는 거리가 달라지는데, 연우강은 백 장 밖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까지 감지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있는 곳에서 이 장 건너편 상황이 감지되지 않았다.
사방이 확 틔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장 건너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특이한 공간에 갇힌 꼴이었다.
바로 그때 진식에 새로운 변화가 생겨났다.
운무 사이로 무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긴소매가 달린 옷을 걸친 여자들은 전부가 면사를 쓰고 있었다.
연우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아래쪽으로 피가 쏠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설마 했는데, 이곳에 펼쳐진 진식은 색진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무희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자 붉은 운무에서 달콤한 향이 풍겨나왔다.
그것은 아마도 최음제인 듯했다.
호흡을 멈추려고 하던 연우강은 이내 포기했다.
붉은 안개가 피어오른 것은 반각 전이다.
수십 번이나 들여마셨고, 온몸 피부에 달라붙었는데 이제와서 호흡을 멈춘다고 중독을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금향은 기루.
굳이 억누르려고 하여 약점을 노출할 필요가 없었다. 연우강은 오히려 깊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 대단한 녀석.’
두심향은 내심 중얼거렸다.
염정탈혼환락진의 무서운 점은 처음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던 붉은 운무가 시간이 흐르면서 최음제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백이면 백, 최음제 성분이 퍼지기 전에 끝내려고 다급하게 공격을 시작한다. 그런데 연우강은 전혀 급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차분하게 진식을 관찰하고 있다.
‘ 하지만 거기에서는 눈을 감을 수도 귀를 막을 수도 없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연우강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붉은 운무 속에 섞여 있는 최음제가 아니었다. 바로 머릿속을 난잡한 환상으로 채우는 음악과 색무를 추는 무희들이었다.
음공을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듣지 않는 것이고, 그에게는 오감을 막아버릴 수 있는 무공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이 장 건너편이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하고, 면사를 쓴 무희들이 언제 살수로 변해 공격을 해올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귀를 막아 소리를 차단한다는 건 적 앞에 무방비 상태로 목을 내미는 것과 다르지 않다.
눈을 뜨고, 귀는 열어둔 채 견디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 앞으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이곳에 있느냐가 문젠데....”
연우강은 망설였다.
그가 진식의 변화를 살피기만 할 뿐 선뜻 행동에 나서지 않은 이유는 전에 겪었던 팔괘만상미혼대진 때문이었다.
이철상이 펼쳤던 팔괘만상미혼대진은 늪 속에서 움직이는 듯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 냈다. 그 공간은 무공의 고하와는 상관없었다. 아무리 무공이 강한 자라고 해도 하루 동안 움직여 진식을 빠져나가면 일반 양민과 다름없었다. 대야벌 상생전 소속 검왕, 권왕, 도왕이 그렇게 죽었다.
이곳에 펼쳐진 진식 또한 팔괘만상미혼대진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듯하다.
최음제 성분이 포함된 붉은 운무는 지척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욱하고 전 내기를 끌어올려도 이 장 건너편 상황을 알 수가 없다. 어떤 진식인지 알 수는 없지만 팔괘만상미혼대진이 만들어낸 공간처럼 이곳도 다른 공간으로 바뀌어 있을 게 분명하다.
‘ 처음 만난 사람이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 알고 싶다면 먼저 관찰하라.’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쿠웅!
연우강은 사망궤를 내려놓고 그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러한 와중에 면사를 걸친 여자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단순한 손짓에 불과한데도 도발적인 눈빛과 어우러지면서 치명적인 유혹으로 변했다.
심장에서 아랫배까지 커다란 통로가 생겨난 듯 피가 거칠게 흘러 내렸다.
연우강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진식을 주시했다.
그런 연우강을 노려보는 사람이 있었다.
운무 속에서 칠현그믕ㄹ 연주하고 있는 그녀는 암향의 향주 조난설이었다.
“ 천욕무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연우강.”
별일 아닌 것처럼 중얼거리고는 있지만 조난설은 내심 놀랐다 전에 진식의 위력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진 내부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부향주와 함께 들어갔었는데 일식인 천욕무가 끝나기도 전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부향주와 끌어안은 채 헐떡거리고 있었다.
삼백 년 전에는 지금 펼치고 있는 천욕무만으로도 수백 명의 대야벌 무인을 색의 노예로 만들었다고 하였다는 말을 몸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연우강은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하다.
문득 염정탈혼환락진으로 녀석을 잡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블안감이 밀려왔다.
“ 오욕칠정을 가진 인간이라면 걸려들 수밖에 없다.”
띠리링!
조난설은 거칠게 고개를 흔들며 현을 튕겼다.
칠현금의 운율이 강해지고, 그것을 신호로 북과 소 그리고 다른 악기들도 일제히 새로운 운율을 쏟아냈다.
그것은 염정탈혼환락진의 이식인 천욕대염무였다. 잠시 후 운무 속에서 뭔가가 나풀거렸다.
그것은 무희들의 몸을 감싸고 있던 옷이었다. 한 겹씩 떨어져 나가고 어느새 무희들은 잠자리 날개 같은 얇은 망사 하나만 걸친 상태가 됐다. 다만 일 장 길이의 기다란 소매는 여전히 그녀들의 손끝에서 화려하게 나풀거렸다.
“ 윽!”
연우강의 입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기가 막힌 광경이었다.
망사 옷을 걸친 여자들이 움직일 때마다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가 출렁거리고 그것들이 뿜어내는 뜨거운 육향 사이로 달뜬 교성이 들려온다. 그 교성이 얼마나 자극적인지 귓전을 파고들 때마다 쾌감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 맙소사!” 마라천력인.
연우강은 멍한 얼굴로 전면을 보았다.가?]
음악이 들려올 때만 해도 난잡한 환상으로 나타났던 그녀들이 지금은 눈앞에서 춤을 추고 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몸매만으로도 그녀들을 알 수가 있었다.
키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몸매를 가진 여자는 남궁운화와 몽요고, 키가 크면서 탄탄한 몸매를 가진 여자는 이지약이다. 그리고 백색 피부를 가진 여자는 다름 아닌 수여설이었다.
그녀들이 이곳에 나타날 리가 없다는 건 누구보다 연우강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우강은 그녀들의 면사를 벗겨 얼굴을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엇다. 아니 그녀들이 있으니 이제 최음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띠이링! 둥둥! 삐이이!
칠현금과 소와 북소리를 비롯한 악기 소리가 더욱 고조되고 무희들의 움직임이 격렬해졌다. 이제 무희들은 스스로를 자극하며 교성을 흘리고 있었다.
연우강은 계속 심호흡을 하며 끓는 피를 식혔다.
심호흡을 하는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삼층 비밀의 방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두심향 일행도 심호흡으로 난잡한 환상을 몰아내고 있었다.
“ 어떻게 된 거죠?”
유만옥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두심향을 보며 물었다.
두심향은 천욕대염탈의무를 펼치게 되면 삼층도 진식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그런데 이식인 천욕대염무를 펼치고 있는데도 무희들의 본래 모습이 사라지고 환상이 보였다.
“ 암향 향주가 전력을 다하고 있는 모양이야.”
두심향 또한 유만옥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잔뜩 상기돼 있고, 숨결마저 흐트러진 채였다.
“ 대단하네요.”
수국부인 서나임은 넋을 잃은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믿기지가 않는 광경이었다.
연우강 주변에서 춤을 추고 있는 이들은 현역에서 은퇴한 무인들이다. 나이가 가장 적은 이가 마흔이 넘는다. 가슴과 엉덩이는 축 늘어졌고, 피부는 푸석하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암향 무인들의 몸매는 젊은 여자들처럼 팽팽했다. 아니 오히려 더 풍만하고 아름다웠다.
풍만한 가슴은, 모든 물체는 아래로 떨어져야 한다는 진리를 거부하는 것처럼 봉긋 서 있고, 달덩이 같은 엉덩이는 조금도 쳐지지 않았다. 피부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건드리면 툭 터질 것처럼 탄력이 넘친다.
저런 몸매를 가진 여자들이 잠자리 날개 같은 망사를 입고 춤을 추면서 교성을 흘려대는데, 피가 끓지 않는다면 사내가 아닐 터였다.
“ 내 생각도 그래.”
두심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떻게 할 테냐, 연우강. 성욕은 무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암컷의 유혹에 넘어가는 건 수컷의 숙명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두심향은 허벅지를 사정없이 꼬집었다.
강한 통증이 밀려오자 몽롱했던 머릿속이 약간 맑아졌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말대로다.
성욕은 무공의 깊이나 내공의 대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연우강은 자리를 박차고 몸을 날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내리눌렀다.
대신 사망마비 하나를 뽑아들었다.
검지와 중지로 사망마비의 손잡이를 잡은 그는 키가 작으면서도 가슴과 엉덩이락 유난히 풍만한 무희를 노려보았다. 남궁운화의 몸매를 가진 무희였다.
“ 돌아버리겠군.”
연우강은 어이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분명 감가깅 미치는 곳은 이장까지였다. 그런데 무희들은 삼 장가량 떨어진 곳에서 춤을 추고 있는데 그녀들이 흘리는 교성은 선명하게 귓전으로 들려온다.
“ 이러다가 터져 죽겠네.”
자신의 아래를 흘끔 내려다본 연우강은 신경질적으로 오른팔을 뿌렸다. 그의 손을 떠난 사망마비 하나가 허공을 갈랐다. 연우강은 마라천력을 일으켜 사망마비를 조정했다. 운무를 뚫고 들어간 사망마비는 키가 작고 가슴과 엉덩이가 풍만한 무희의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 끄응!”
사망마비가 무희의 심장을 팍로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연우강은 신음을 내뱉었다.
심검의 유효 거리는 오십 장이고, 그가 익힌 심뢰의 유효 거리는 심검보다 이십 장이 더 먼 칠십장이다.
그런데 사망마비가 이 장 건너편으로 날아가는 순간 사망마비와 이어져 있던 의념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이 장 밖은 이곳과 전혀 다른 공간이란 의미였다.
“ 감옥에 갇힌 셈이네.”
연우강은 쓴입을 다셨다.
진식을 펼친 자들에게는 하나의 공간이 되고, 진식에 갇힌 자들에게는 두 개의 공간이 되는 모양이었다.
“ 살수가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데, 몸이 견뎌주려나 모르겠네.”
지금 연우강이 할 수 있는 것은 운기행공으로 최음제 성분을 몰아내든지, 아니면 여자를 찾아 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느 것도 할 수가 없다.
연우강은 손으로 턱을 괸 채 무희들을 바라보았다.
춤이 격렬해지고 교성이 커질수록 머릿속은 몽롱해지고, 저들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해진다.
아니 이 상태로 조금만 더 지나면 분명 저 속으로 뛰어들고 말 터였다.
“ 다시 못 볼 구경거린데.......”
연우강은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오너라, 연우강. 어서 와서 죽음을 안아라!”
연우강이 벌떡 일어나자 조난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연우강이 반항을 끝내고 무희들을 향해 뛰어들 거라고 확신했다. 그가 무희들을 향해 뛰어들면 죽음을 향해 가는 마지막 정사가 시작될 것이다.
염정탈혼환락진으로 최강의 무인을 상대할 때는 적이 진식 안으로 뛰어들어왔다고 해서 곧바로 공격하지 않는다. 수십 번에 걸친 정사로 내공을 완벽하게 소진시킨 다음 목에 검을 꽂든지 제압한다.
연우강은 제압하는 선에서 끝나게 될 것이다.
“ 응?”
연우강을 바라보던 조난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연우강이 이편을 향해 뛰어들어올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연우강은 달려오는 대신 그 자리에서 특이한 동작을 하고 있었다.
조난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그 동작은 연우강이 약 먹는 것과 더불어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왔던 몸풀기 동작이었다. 그가 위기 탈출 수단으로 무공이 아닌 몸풀기 동작을 택한 것은 ‘ 위기의 순간에는 최고의 무공이 아니라 몸에 익은 무공을 펼쳐라’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왔던 몸풀기는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몰두하게 해 준다. 게다가 지금은 단순한 몸 풀기가 아니라 가공할 기운을 뿜어내기까지 한다.
연우강은 천천히 오른발을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왼손을 내지른다. 하지만 내지른다는 건 연우강의 생각일 뿐 그의 동작은 굼벵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렸다. 아니 마치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했다.
지독하게 느린 움직임.
어떻게 보면 아무런 힘도 없는 것 같은 그의 움직임에서 어느 순간 미약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그 기운은 미약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 서 있을 때, 바람이 불긴 하지만 더위 때문에 느끼지 못하는 그런 것처럼 연우강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감지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잠시 후 그 기운은 엄청난 속도로 커졌다.
주변 대기를 먹고 자라는 것처럼 점점 커지더니 어느 순간 연우강의 감각이 미치는 거리인 이 장 안쪽을 완전하게 장악했다. 그곳은 완전하게 연우강의 공간이 된 것이다. 커져가던 공간과 공간의 경계 지점에서 잠시 멈칫했다.
그런 사실을 아는 지 모르는지 연우강은 천천히 양손을 움직였다.
찌이익! 찌이익! 찌이익!
진식이 만든 공간과 연우강이 만든 기운이 부딪치면서 천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 응?”
조난설은 깜짝 놀랐다.
염정탈혼환락진이 가진 최고의 강점은 두 개로 나뉘어진 공간이 창출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두 개의 공간은 진식을 펼친 사람에게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진식 안에 갇힌 자는 가로세로 높이가 이장인 공간 안에 갇힌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 무공이나 감각은 그 공간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연우강은 기운을 사방으로 풀어 그 공간을 깨트리려 하고 있었다.
대단한 자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띠링!
결국 그녀는 염정탈혼환락진의 마지막 초식인 천욕대염탈의무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칠현금이 급박한 소리를 토해내자 춤을 추고 있던 무희들은 망사를 찢어 알몸으로 변해갔다.
춤사위는 더욱 격렬해지고, 교성은 높아갔다.
무희들은 두 명씩 짝을 이뤄 서로의 몸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연우강의 동작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삼 장 건너편에서 춤을 추는 알몸의 무희들을 바라보면서도 팔과 다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 대단하구나.”
삼층 비밀의 방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두심향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설마 연우강을 상대로 삼 초까지 펼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상대적으로 무공이 약한 루주들의 눈이 완전하게 풀린 상태다. 자신 또한 루주들과 다르지 않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몸은 간절하게 남자를 원하고 있다. 만일 바로 앞에 사내가 있다면 그의 품에 몸을 던졌을지도 모른다. 생문 안에 들어와 있고, 여자인 자신도 견디기 힘들 지경인데, 연우강은 천욕대염무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운을 일으켜 깨트리려고 시도했다.
엄청난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 아음!”
왼편에서 신음이 들려오자 두심향은 고개를 돌렸다.
소진이 천상지락마음공에 걸려든 듯, 스스로 온몸을 더듬고 있었다.
“ 눈을 감고 귀를 막아라, 소진.”
두심향은 소진의 마혈을 향해 지풍을 쏘았다.
“ 초, 총루주.....!”
소진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소진의 머릿속에는 기녀 수업을 받으면서 공부했던 방중서의 내용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두심향의 말대로 눈을 감자, 그 책 속에서 보았던 그림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림 속의 여자는 소진 그녀였고, 남자는 조금 전 만났던 연우강이었다.
소진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 소진!”
소진의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는 듯하자, 두심향은 내공을 실어 소리쳤다.
“ 헉!”
소진은 깜짝 놀랐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섯 루주들의 정신도 일깨웠다. 그녀들은 급히 내기를 끌어올려 들끓는 몸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한껏 달아오른 몸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 정신 차려라. 염정탈혼환락진은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잡념을 몰아내도록 해라.”
“ 아, 알았어요. 총루주님.”
“ 알았어, 언니.”
“ 알았어요.”
소진을 비롯한 다섯 루주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하고 천상지락 마음에 대항했다.
마음이 진정되자 다섯 루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괜찮은 게냐?”
두심향은 루주들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 지금은 견딜 만해요. 하지만 얼마 못 갈 것 같아요.”
유만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 저자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두심향은 아래로 시선을 주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아악!”
“ 으아악!”
“ 아악!”
그녀의 말을 부정이라도 하듯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 다, 단 일초 였어요. 언니.”
화용부인 유만옥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두심향이 바라보는 건 암향 무인들의 시체가 아니었다. 그녀는 연우강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 커졌군!’
두심향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었다.
놀랍게도 연우강은 진식 안에서 내기를 끌어올려 자신만의 공간을 창조해낸 것이다. 진식이 암향 무인들의 영역이라면 저 공간은 연우강만의 영역일 것이다.
“ 아악!”
“ 으악!”
“ 아악!”
이번에는 연우강이 만들어낸 공간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춤을 추던 무희들은 면사를 뜯어냄과 동시에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지금껏 가리고 있던 면사를 뜯어내면 무희들의 얼굴은 진식에 걸려든 자가 아는 얼굴로 변한다. 즉 연우강이 과거에 사모했거나, 지금 사모하고 있는 정인의 얼굴이 된다는 것이다. 설사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상대가 정인으로 변하면 놀라기 마련이고 자세가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 그 순간을 노려 무희들은 공격을 한다.
그녀들의 손에는 여전히 일 장 길이의 소맷자락이 있고, 그 소매 안에는 암기를 비롯한 무기가 숨겨져 있다.
그런데 안쪽으로 뛰어들었던 무희들은 소매를 떨치기도 전에 연우강의 몸에서 쏘아진 암기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띠리링!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강력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음악은 두심향의 자세가 흐트러질 정도로 강했다.
두심향은 느닷없이 떠오르는 난잡한 사념을 지우기 위해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아래쪽에 시선을 집중했다. 조난설을 비롯한 암향 소속 모든 대원들이 연우강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들 또한 옷을 벗은 채였다. 그리고 그녀들 사이로 도기를 든 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남자들로 구성된 염향에서 은퇴한 자들이었다.
“ 만옥!”
그녀는 고개를 돌려 유만옥을 보았다.
“ 말씀하세요.”
“ 견디기 힘들면 몸을 피하도록 해.”
“ 가시게요?”
“ 준비를 해야 해.”
“ 무슨 준비를 한다는 거죠?”
“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자리를 피하도록 해.”
“ 알았어요.”
유만옥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심향은 몸을 돌렸다.
[ 여몽.]
창가로 가면서 그녀는 사향의 향주 여몽을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 난 금향각 지하에 있을 거야.]
[ 금향각 지하란 말입니까?]
여몽은 확인하듯 물었다.
금향각 지하는 두심향만의 비밀 거처로 그녀가 뭔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만 이용하는 장소였다.
[ 이곳이 무너지면 그를 금향각으로 유인해 오라는 말이야.]
두심향은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 연우강에게 당할 거라고.......]
“ 아악!”
“ 으아악!”
“ 크아악!”
대답은 일층에서 들려왔다.
이번 비명에는 남자들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여몽은 고개를 돌려 아래를 보았다. 연우강이 만든 공간은 오 장가량으로 넓어져 있고, 그 공간 안에는 십여 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 빌어먹을!’
그녀는 창 밖으로 몸을 날려 아래로 내려간 다음 다섯 조장들을 불렀다. 연우강을 유인하기 위해서는 작전을 다시 짜야 했기 때문이었다.
여몽이 작전을 짜는 그 순간에도 안쪽에서는 처절한 비명이 건물 벽을 넘어 들려왔다.
으드득!
연우강을 노려보는 과극천의 입에서는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우강이 만들어낸 영역은 어느새 칠 장에 이르러 있고 그 안쪽에 있는 암향 무인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과극천은 도끼를 불끈 틀어쥐었다.
원래 염향은 남자 하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강한 무공을 지녔기 때문에 강호로 나가면 금향에 있는 것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암향 무인들은 금향을 떠나지 않았다.
금향에서 그들에게 베풀어준 은혜 때문이었다.
염향 무인들은 전부가 노예로 팔려온 자들이었다. 노예였던 그들에게 글과 무공을 가르쳐주고 인간답게 살게 해준 곳이 바로 금향이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금향은 어머니의 품속과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 난설!”
과극천은 반라 차림으로 칠현금을 연주하는 조난설을 보았다. 그가 금향을 떠나지 못했던 것은 바로 조난설 때문이기도 했다.
“ 이런 제길!”
과극천은 급하게 몸을 날렸다.
연우강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은 어느새 십여 장에 이르러 있었다. 저 정도면 암향 전역이 연우강의 영역으로 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조 단주.]
과극천은 조난설에게 전음을 보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 폭풍은 날아오르고! 폭풍비!”
살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극천은 고개를 돌려 연우강을 보았다.
파앗!
연우강의 머리에 있던 검은 철립이 공간을 단축하더니 여덟 개로 분리돼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여덟 개로 분리된 철립에서 흘러나온 살기가 얼마나 강하던지 오 장이나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름이 돋았다.
“ 월광은 잔인하기 그지없다! 월광잔!”
이번에는 허리춤에 있는 요대가 네 개로 분리되며 전방으로 날아갔다.
“ 크악!”
“ 으악!”
“ 아악!”
처절한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우강은 비명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 미친 늑대는 바람처럼 내달리고, 광랑풍!”
그는 양손을 사정없이 뿌렸다.
손을 떠난 아홉 개의 사망낭조는 검은 광채를 뿌리며 부챗살처럼 퍼져나갔다.
“ 아악!”
“ 으악!”
“ 검은 해골은 활짝 미소 짓는다. 일지소!”
검은 색 해골이 새겨진 반지가 공간을 단축하며 날았다. 그 반지가 날아가는 곳에는 조난설이 칠현금을 안고 있었다.
그녀는 경악한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반지를 보았다. 마치 거대한 해골이 덮쳐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칠현금의 현을 강하게 튕겼다.
띠리링!
칠현금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해골 반지를 향해 쏘아져 갔다.
따앙!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반지가 튕겨 나갔다.
하지만 연우강은 계속해서 조난설을 향해 몸을 날려갔다.
조난설은 뒤편으로 몸을 날리며 칠현금의 현을 튕겼다.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띠리리링!
그녀의 열 손가락이 무서운 속도로 현 위를 오갔다. 그리고 칠현금 소리는 진득한 살기를 머금은 기운으로 변해 몸을 날려오는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 갔다.
“ 난무하는 허상은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데, 환환난!”
차르르!
연우강의 손목에서 풀려나온 사망묵환이 허공에 무수한 그림자를 남겼다. 그 그림자는 조난설이 쏘아낸 음공의 기운을 잘게 잘랐다.
띠리링! 띠리링! 띠리링!
조난설은 더욱 강하게 현을 뜯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전 내공을 동원하여 칠현금을 연주하는 것뿐이었다. 피를 토하고 있는 듯 입 안이 비린내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는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따앙! 따앙! 따앙!
급기야 현이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턱!
그리고 등이 벽에 닿았다.
촤르르!
남은 현을 튕기려는 순간 사망묵환이 그녀의 모긍ㄹ 감아 돌았다.
“ 멈춰라, 연우강!”
과극천은 도끼와 하나가 돼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려가며 고함을 내질렀다.
“ 늦었어!”
연우강은 아래로 날아 내려오는 과극천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사정없이 당겼다.
“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조난설의 머리가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연우강은 벽을 박차고 재주를 넘어 과극천을 바라보는 모습이 되었다.
“ 죽음의 꽃은 쉬지 않고 피어나고, 사우화!”
왼편 가슴을 가볍게 털었다.
그러자 그의 가슴에 달려있던 사망사화가 과극천을 향해 쏘아져 갔다.
차앗!
과극천은 도끼를 사정없이 휘둘렀다.
그가 평생을 익혀왔던 단월부였다.
그의 도끼가 달빛 형태의 부강을 사방으로 뿌려놓았다.
하지만 부강은 사망사화에 이어 허망하게 잘려나갔다. 부강을 잘라낸 사망사화는 계속해서 날아가더니 과극천의 도끼를 잘라냈다.
날을 자르고 몸통을 자르고, 손잡이를 잘라냈다.
과극천은 멍한 얼굴로 도끼를 보았다.
어느새 도끼는 반 자가량의 손잡이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검은 꽃잎 하나가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씀벅.
아프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
다만 머리솟이 아득해질 뿐이었다.
그는 시선을 들었다. 조금 전 죽임을 당한 조난설을 찾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조난설의 머리는 바로 아래쪽에 있었다.
그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맺힌 순간, 여덟 개의 꽃잎이 파고들어 갔다.
“ 크아악!”
과극천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텨져 나왔다.
“ 지옥의 입구는 활짝 문을 열었다.”
과극천의 몸통을 박차며 몸을 날린 연우강은 한가운데로 가서는 엎드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된 그는 강하게 소리를 질렀다.
“ 지옥탄!”
살기를 가득 머금은 목소리가 내부를 강타하고, 백여덟 개에 달하는 사망정주가 부챗살처럼 퍼지며 아래로 향했다.
푸아악!
푹푹푹! 푹푹! 푹푹푹!
콰콰쾅! 쾅쾅! 쾅쾅쾅!
“ 크아악!”
“ 아악!”
“ 으아악!”
포탄이 터지는 것 같은 소성과 더불어 처절한 비명이 연이어 들려왔다.
“ 이럴 수가!”
유만옥 일행은 넋을 잃었다.
이미 염정탈혼환락진이 파훼되는 바람에 그녀들은 더 이상 환상에 시달리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환상보다 더 처참한 광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일층은 폭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처참했다.
여기저기에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고, 그 구덩이 주변에는 갈가리 찢겨 나간 시체들이 뒹굴고 있다. 진식 또한 이미 파훼돼 붉은 운무가 급격하게 사라져 갔다.
운무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 살아남은 대원들은 진득한 살기를 흘리며 연우강을 노려보고 있었다.
휘리릭!
사방으로 퍼져 나갔던 암기들이 일제히 연우강의 옷에 장착됐다.
암기를 장착한 연우강은 조금 전 내려놓았던 사망궤로 시선을 주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사망궤는 둥실 떠올라 연우강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 쳐라!”
이번에 연우강을 공격한 자들은 사향 무인들이었다.
철컥! 철컥!
오므라져 있던 사망낭조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연우강은 허리춤에 꽂아두었던 낫과 손괭이를 뽑아 들었다. 두 무기를 잡자마자 싸늘한 기운이 왼편에서 다가왔다. 그는 왼손의 낫을 들어올려 상대의 무기를 막고 그와 동시에 오른 손에 쥐고 있던 손괭이를 내리찍었다.
퍼억!
“ 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피가 휙 튀었다.
그 순간 왼손에 들려 있던 낫이 허공을 갈랐다.
스악!
뭔가를 베어내는 듯한 소리가 어둠 속에서 흘러나오고 잘려나간 팔 하나가 둥실 떠올랐다. 그 팔이 떠오른 어둠 속으로 연우강은 손도끼를 찍었다.
푹!
“ 아아악!”
어둠 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연우강은 앞을 막아서는 자들을 없애며 전진해 갔다.
공격해 오는 자들은 쉬지 않았고, 그들을 없애는 연우강도 쉬지 않았다. 낫이 허공을 가르고, 손도끼가 어둠을 찍을 때마다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잔인한 놈!”
여몽은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고 해도 남자들은 상대가 여자면 멈칫거리곤 한다. 인정이 많아서가 아니라 여자는 보호 대상이란 인식이 머릿속에 박혀 있어 저절로 일어나는 행동이다. 그런데 연우강은 상대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혀 망설임이 없다.
게다가 부상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단 한 방에 머리를 부수거나 목을 잘라 사향 무인을 없애고 있다.
[ 유인하나 보지?]
그때 귓전으로 연우강의 전음이 들려왔다.
여몽은 깜짝 놀랐다. 지금 사향 무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연우강을 유인하고 있다. 많이 움직여 봐야 한 번에 반 장 정도고, 일직선으로 유인하는 게 아니라 이리저리 방향을 틀고 있다. 그런데 연우강은 대번에 유인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아다.
[공연히 애들 죽이지 말고 두심향에게 안내해.]
[ 물러나라!]
그녀는 각 조 조장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상대가 알고 있는데 굳이 유인하겠다고 나설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명이 떨어지자 연우강 주변에 있던 사향 무인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부하들이 물러나자 여몽은 연우강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따라와라!”
연우강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 이름이 뭐지?”
연우강은 여몽을 따르며 물었다.
“ 사향의 향주 여몽이다.”
“ 루주가 고민을 많이 했겠어.”
“ 그게 무슨 소리냐?”
“ 기녀로 쓸 걸지 호위로 쓸 건지 고민을 많이 했을 거란 말이야.”
“ 그건.....”
여몽은 깜짝 놀랐다.
연우강의 말은 사실이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루주는 그 두 가지를 놓고 고민을 많이 했다.
자신 또한 많은 날을 고민했다. 그렇게 일 년가량 기녀 생활을 하다가, 어떤 일로 인해 그 생활을 접고 사향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연우강은 대번에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 엉덩이 때문이야.”
“ 어, 엉덩이라고?”
“ 사내 여럿 잡을 엉덩이거든. 아무튼 가급적 엉덩이를 흔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지금 너희들이 뿌린 최음제 때문에 돌아버릴 지경이니까.”
“ 그럼 난 더욱 흔들어야겠네.”
연우강이 덮여 오면 그보다 좋은 기회가 없을 것이다.
여몽은 사향으로 들어가기 전에 배운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육감적으로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심지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간간히 신음도 내뱉었다. 하지만 연우강은 금향각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덮쳐오지 않았다.
금향각 안으로 들어서려고 하는데 엉덩이에서 강하 통증이 밀려왔다.
‘ 잡았다.’
금향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뒤따라 오던 연우강이 참지 못하고 드디어 행동에 나섰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몸에 힘을 풀었다.
“ 구경 잘했어, 여몽.”
‘ 이런 개자식.’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여몽은 내심 욕설을 흘렸다. 눈요기를 위해 일부러 엉덩이 이야기를 꺼낸 녀석 앞에서 온갖 교태를 부리며 엉덩이를 흔들어댄 것이다.
“ 역시 최고의 엉덩이야.”
연우강은 여몽의 귓불을 가볍게 핥고는 엉덩이를 놓아주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안으로 들어가면 돼?”
연우강은 걸음을 멈추고 여몽을 돌아보며 물었다.
“ 지, 지하로 가면 돼요.”
“ 고마워.”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