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팔자인걸 어떻게 하라고.
일층은 마치 상품을 전시해 놓은 전시관을 방불케 했다. 바닥에는 서역에서 건너온 양탄자가 깔려 있고, 고풍스럽게 보이는 가구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배치돼 있었다. 그리고 벽에는 고서화가 걸려 있다.
그것들은 척 보아도 수백 년 묵은 골동품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연우강운 맨 앞에 있는 그림 앞으로 걸어갔다.
그림 바로 위에는 등 하나가 걸려 있어, 그림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그림을 들여다보던 연우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화선지 위에는 하늘색 물감만 칠해져 있을 뿐 그림이라고 할 수 없을 듯 했다.
그는 오른편 아래로 시선을 주었다. 그곳에는 ‘패아지근심향’이라는 여섯 글자가 전서체로 씌어 있었다.
“ 패아지근이면 원나라 황제의 성씨를 말하는 건데.. 맞소?”
그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일까.
연우강은 그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질문을 던졌다.
“ 옛글자인데 잘 아는구먼.”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한편 구석에서 들려왔다.
“ 자유로운 삶에 대한 욕망을 그린 건가 보죠?”
연우강은 여전히 그림에 눈을 둔 채 물었다.
어린 시절에 무던히도 많이 그렸던 그림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혀 구속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건 마음대로 할 수 있었고, 가고 싶은 곳도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답답했다.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그건 그래서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불도 질러보고, 사고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 무한한 자유가 때론 더 숨이 막히기도 하지.”
연우강은 몸을 돌려 안쪽을 보았다.
초원의 풍경이 그려진 커다란 그림 아래쪽에 허리가 굽은 노인이 쟁반을 든 채 서 있었다. 쟁반 위에는 차가 올려져 있었다. 노인은 두심향이 할아범이라고 부르는 동각이었다.
“ 마시겠는가?”
동각은 쟁반을 살짝 들어올려 그 위에 놓인 찻잔을 눈으로 가리켰다.
“ 날 위해 준비한 것 같은데, 거절하면 예의가 아니잖소. 그런데 황족의 후예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맞는가보구려.”
연우강은 노인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 우리 집에서 자랐네.”
“ 업둥이?”
“ 업둥이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우리 집으로 피신 왔을 뿐이네.”
“ 그게 업둥이지 뭐.”
연우강은 노인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겉으로는 무공을 익힌 것 같지 않지만 노인은 반박귀진에 오른 초극 고수였다. 게다가 유설연과 흡사한 분위기를 풍겼다. 전에 내시였던 것 같았다.
“ 난 오 년 전까지 황실 사례감에서 근무했다네.”
“ 정보원이었던 거군요.”
“ 그런 셈이네.”
“ 좋은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이곳에서 살고 있는 거요?”
원나라 황족 입장에서 보면 수도였던 북경은 애증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원나라 후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당장 추방을 당하든지, 반역을 도모한다는 미명하에 귀향을 가든지 할 것이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이곳에 사는 이유가 문득 궁금했다.
“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자가 몰락하게 되면, 갈 곳은 저승밖에 없다는 말을 아는가?”
“ 고향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이오?”
“ 황제는 지금도 달탄에 군사를 보내고 있네. 그런 상황에서 돌아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 그렇구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권력이란 참으로 무섭다. 권력을 쥐고 있을 때는 얼굴조차 모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알은 체를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내려오면 가장 친했던 친구들마저도 전염병 환자를 대하듯 한다.
갈 곳이 있을 리 없다.
“ 삼대가 지났는데도 이곳 북경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의 후예가 상당히 살고 있네.”
“ 영감도 그들 중 한 사람이오?”
“ 나뿐만이 아니라 금향에 있는 기녀와 남자 하인들 중 육할은 원나라 황조에서 권력을 휘둘렀던 자들의 후예라고 보면 되네.”
“ 그걸 내게 말해주는 이유가 뭐요?”
“ 아기씨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자네이기 때문이네.”
“ 내가 몰락한 황족의 후예의 처지를 어떻게 이해한단 말이오?”
“ 과거 내 직책은 장인태감이었네.”
“ 황제의 항문에 있는 점의 수까지 알고 있겠구려.”
“ 지금은 내 제자가 황제 항문에 나 있는 점의 수를 세고 있다네.”
“ 하고 싶은 말이 뭐요?”
“ 얼마 전에 소명공주가 주선엽이란 인물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다는 말을 들었네.”
동각은 연우강을 빤히 보았다.
하지만 연우강의 얼굴은 미세한 변화도 없었다.
“ 난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영감이 아기씨라고 부르는 두심향을 없애러 왔을 뿐이오.”
“ 그녀는 황제 폐하께 그 주선엽의 혈육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네.”
“ 내가 그 혈육이란 말이오?”
“ 자네라면 아기시의 처지를 이해해 줄 거라고 했을 뿐, 자네가 주선엽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네.”
“ 처음 듣는 이름이오.”
“ 그런가? 아무튼 자네 알아서 하게.”
동각은 그림 아래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르릉!
육중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그림 왼편 벽면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아래로 향햐는 계단이 나타났다.
“ 두심향이 저 안에 있는 거요?”
“ 원나라 마지막 황족이네. 아마 그녀의 머리를 들고 동창으로 간다면 자넨 영웅이 될지도 모르네. 어쩌면 잃었던 성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 쿡!”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 내가 북망산에서 남경왕의 호위인 철리목 일행을 죽인 사실을 알고 있소?”
연우강은 내려가면서 물었다.
“ 들었네.”
“ 왜 그들을 없애게 됐는지 아시오?”
“ 자세한 내막까진 모르네.”
“ 남경왕이 내 가족에게 해코지를 하겠다고 했소. 그 말에 대한 답으로 나는 북경에서 주씨 성을 쓰는 자들은 물론이고 그들 가족까지 전부 없애서 선물로 주겠다고 했소. 신분에 상관없이 말이오.”
“ 신분에 상관없다는 건........”
“ 자금성이 지옥으로 변한다는 뜻이오. 영감.”
“ 저, 정말 그렇게 할 참인가?”
“ 내가 죽지만 않으면.”
연우강의 목소리가 여운처럼 어둠 속에 남겨졌다.
동각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의 등을 보았다.
‘ 내가 죽지만 않으면.’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무공은 측정하기 힘들 정도고, 머리 또한 사악할 정도로 뛰어난 자라고 하였다. 그런 자가 자금성을 상대로 전쟁을 치른다면.
그의 말처럼 정말로 지옥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 남경왕 당신은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소.’
동각은 그림 아래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르릉!
그러자 열렸던 벽이 천천히 닫혔다.
‘ 그를 잡아야 합니다. 아기씨. 오늘 그를 잡지 못하면 금향은 망합니다.’
동각은 굳은 얼굴로 닫힌 벽면을 바라보았다.
저 벽을 열고 두심향이 나오면 성공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장례를 치를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 나는 내 눈을 믿는다. 연우강. 왜냐면 아기씨 또한 너와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넌 아기씨가 죽는 걸 절대 외면하지 못한다.’
계단 끝에 있는 문을 나서자 먼저 연우강을 반긴 것은 호수였다. 지름이 십 장가량인 원형 호수에는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지하라서 그런 듯 호수 수면은 얼음이 얼어 있는 것처럼 미동도 없다.
저 호수가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원나라의 현재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문득 무상함이 느껴졌다.
연우강은 시선을 들어 호수 중앙을 보았다.
그곳에는 호수 건너편까지 이어지는 구름다리가 놓여 있었다. 구름다리 입구에는 사람과 같은 크기로 조각된 나신상이 허리를 숙인 자세로 서 있었다. 아마도 구름다리를 건너오는 자를 환영한다는 뜻인 듯했다.
연우강은 구름다리로 올라갔다.
나신의 조각상은 입구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구름다리 좌우측 가장자리에도 나신 조각상들이 난간처럼 세워져 있었다. 왼편은 여자이고 오른편은 남자 상이었다. 으로 익힌 그녀 호수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는 불빛의 근원지가 바로 나신 조각상들이 들고 있는 황금색 등이었다.
구름다리 너머에는 아름다은 건물 한 채가 서 있었다.
건물의 지붕은 세 개였다. 맨 위쪽에 하나가 나와 있고, 그 아래쪽에 두 개의 지붕이 연결돼 있는 형태였다. 세 개의 지붕에 몸체는 하나인 특이한 건물이었다. 그 건물의 각 처마에는 황금색 등이 걸려 있었다.
다리를 건넌 연우강은 건물 앞에 섰다.
몽루.
정문에 걸린 작은 편액에 쓰인 글이었다.
“ 꿈꾸는 집이라는 뜻인가?”
연우강은 몽루라고 쓰인 편액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득 두심향은 무슨 꿈을 꾸고 있는 지 궁금했다.
그르릉!
기관장치가 돼 있는 듯 그가 서자마자 문이 열렸다.
연우강은 열린 문을 만져보았다.
두께는 한 가량이고 백색에 쇠로 돼 있다. 쇠의 색이 흰 색인 것은 만년한철 한가지밖에 없다.
“ 가둘 참인가?”
연우강은 안쪽을 보았다.
띠리링!
바로 그때 안쪽에서 칠현금 소리가 들려왔다.
" 들어가면 죽는 거 아냐?"
연우강은 투덜거리며 안으로 향했다.
안쪽에는 작은 문이 하나 더 있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자 특이한 장소가 나타났다.
장소의 절반은 물이 찰랑거리는 욕조로 채워져 있었다. 아니 욕조라고 하기보다는 작은 연못이라고 불러야 할 듯 했다. 욕조의 한가운데에는 장미꽃잎 형태의 대가 있고, 그 위에는 조금 전 구름다리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나신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 아무리 최음제에 중독됐다고 하지만 이건......."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릎서기를 한 채 오른손으로는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자세가 얼마나 요염한지 갑자기 하체로 피가 쏠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각상의 오른편 옆구리에는 물통 하나가 끼워져 있었는데 그곳으로부터 물이 욕조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 굉장하네."
조각상 앞으로 다가간 연우강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조각상은 살아 있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생생했다.
가는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환하게 웃으면서 생겨나는 주름과 가슴에 나 있는 작은 점까지도 조각돼 있었다. 마치 웃고 있는 여자를 한순간에 돌로 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시선을 돌려 욕조 가장자리를 보았다.
바닥을 파서 만든 듯 가장 자리 위쪽은 방바닥과 같은 높이였다. 절반이 욕조라면 나머지 절반은 양탄자 차지였다. 관리를 잘한듯 양탄자는 깨끗했다.
그 양탄자 중앙에는 바닥에 앉아서 차를 마시는 키 낮은 탁자가 놓여 있었다. 양타자와 마찬가지로 서역에서 들여온 듯 탁자의 상판 재질은 유리였다.
유리 탁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네 개의 의자로 둘러싸인 원형 탁자가 놓여 있었다.
주방과 가까운 곳에 배치한 걸 보면 식탁인 듯했다.
그 식탁 뒤쪽으로는 무쇠로 만든 화로가 벽에 붙어 있었는데, 화로 안에서는 장작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방 안은 가득 채운 소나무 향기의 근원지가 바로 그 장작이었다. 특수한 장치를 한 듯 장작이 타면서 나는 연기는 안으로 흘러 들어오지 않았다.
띵! 띵! 띵! 띵!
연우강은 악기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두심향은 침상 앞에 앉아 칠현금을 타고 있었다.
" 어?"
그녀의 얼굴을 본 연우강은 깜짝 놀랐다.
그는 고개를 돌려 욕조 안에 있는 조각상을 보았다. 조각상과 두심향은 쌍둥이를 보는 것 같았다.
" 내가 만든 거예요."
나직한 목소리가 두심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좋은 재주를 가지고 있네요."
연우강은 사망궤를 내려놓고 철립을 벗어 그 위에 올려놓고 욕조 앞으로 다가갔다.
" 목욕하시게요?"
" 규동에서 이곳까지 단숨에 달려왔거든요."
연우강은 사망묵의를 벗었다.
그러고는 안에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욕조 앞에 섰다.
" 규동이면 밀천 제이 총단이 있는 곳?"
두심향은 연우강의 알몸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 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식사도 못했겠네요?"
" 사막에서 오 년 동안 생활하게 되면 적에게 당해 죽는 경우는 있어도 굶어 죽는 경우는 없습니다."
" 오는 도중에 먹었단 말인가요?"
" 저 안에는 최소한 한 달은 버틸 수 있는 육포가 들어 있어요."
연우강은 사망궤를 가리켰다.
" 철저하군요."
"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연우강은 욕조 안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했다.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자 머릿속이 약간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맑아졌던 것도 잠시, 이번엔 조금 전 보았던 조각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서둘러 몸속에 들어 있는 최음제 성분을 뽑아내지 않으면, 두심향을 덮치고 말 것 같았다.
" 연 공자는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찾아가는 성격인가 보죠?"
두심향의 말에 연우강은 눈을 뜨고 그녀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두심향의 행색은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상의는 벌어져 깊게 파인 가슴 골이 드러나 있고, 치마 또한 한쪽이 터져 엉덩이가 고스란히 보였다.
사십이 넘은 나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두심향의 몸은 탄력이 넘쳤다. 살피듯 두심향의 몸매를 바라보던 연우강은 다시 눈을 감았다.
" 내가 너무 낡았어요?"
" 몸매에 자신을 가져도 될 것 같네요."
" 그런데 왜 눈을 감는 거죠?"
"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경우거든요."
" 이를테면?"
" 지금과 같은 상황."
" 최음제 때문에 여자를 덮쳐야 하는 상황이 싫다는 건가요?"
" 그 상황도 싫지만 그 후 상황이 더 싫은 거죠."
" 그 후 상황이라고요?"
" 최음제 성분을 해소시켜 주기 위해 나와 자려는 건 아니잖아요."
" 어떤 의도를 숨긴 채 당신을 기다렸다는 건가요?"
" 아닌가요?"
" 그걸 알면서 당신은 이곳으로 들어왔나요?"
" 당신을 죽일 수 있는 곳이니까."
" 그런데 왜 죽이지 않는 거죠?"
" 그걸 결정하기 위해 운기행공을 하려는 겁니다."
" 맞아요."
" 뭐가 맞다는 거죠?"
느닷없는 말에 연우강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아무리 사내가 마음에 든다고 해도 첫 만남에서 옷을 벗는 여자는 없다는 말이에요."
" 의도를 숨기고 날 이곳으로 유인했다는 말인가요?"
" 네."
두심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 숨긴 의도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겠죠?"
" 말해 줄 수 있어요."
두심향은 연우강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그녀는 단순히 금향의 운영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열다섯 살 때부터 서른 살까지, 십오 년 동안 기녀 생활을 했다. 그 덕분에 기녀들의 생활을 이해할 수 있었고, 권력을 쥔 사내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똑 부러지게 알게 됐다.
그리고 그것들보다 더 큰 수확이라면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보는 안목이 탁월해졌다는 것이다.
기루로 들어온 사내는 거의 비슷한 성향을 보인다.
연우강 또한 그런 자들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슴골을 훤히 드러내놓고 치마는 엉덩이가 드러날 정도로 찢은 채 천상지락마음공을 연주했다. 완전하게 벗는 것보다 그 상태가 사내를 더욱 자극한다는 것을 알고 한 행동이었다.
연우강이 옷을 벗을 때까지만 해도 성공을 확신했다.
얼굴과 가슴에서는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고, 남성은 바지를 내리기 힘들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그 정도면 여자 냄새만 맡아도 짐승이 되고 말 터였다.
그런데 그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참아냈을 뿐 아니라 대화까지 나누고 있다.
놀라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 루주가 숨기고 있는 건 뭐죠?"
" 봉원쇄정대법과 원앙음양고 두 가지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겼어요."
원래 봉원쇄정대법과 원앙음양고는 관계가 끝날 때까지 숨겨야 할 말이었다.
만일 연우강이 이곳으로 들어오자마자 덮쳐왔더라면 숨겼을 것이다. 하지만 연우강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태연하게 옷을 벗고 지금은 욕조 안에 들어가 있다.
그가 이성을 잃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럼 남은 건 정면돌파 밖에 없다.
" 금제 같은데 맞나요?"
" 맞아요. 연 공자. 봉원쇄정대법은 본인을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에 대법을 거는 금제술이에요. 장점은 금제에 걸린 당사자는 자신이 봉원쇄정대법에 당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 시술자가 내린 명령을 자기가 해야 하는 일처럼 생각한다는 건가요?"
" 그래요, 스스로 명분을 만들어 처리를 하게 되죠."
" 황실에도 봉원쇄정대법을 건 자가 있나요?"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에 내시 노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제자 중 한 명이 황제 엉덩이에 나 있는 점의 수를 헤아리고 있을 거라고 하였다. 어쩌면 그가 봉원쇄정대법에 걸린 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건 비밀이에요."
" 그렇겠죠. 그럼 단점은 뭐죠?"
" 이걸 사용해야 한다는 거예요."
두심향은 가슴을 가리고 있던 옷을 조금 더 내렸다. 그러자 가슴이 절반가량 드러났다. 그녀의 옷은 바람만 불어도 떨어져 내릴 것처럼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 헉!'
연우강의 얼굴이 화로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가슴을 절반가량 드러낸 두심향의 몸에서 폭발적인 염기가 흘러나온 것이었다.
연우강은 급하게 내기를 끌어올렸다. 곧 단전으로부터 시원한 기운이 올라와 열기를 식혔다. 하지만 그건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짐승이 되는 것만을 막았을 뿐 갈증을 해갈시켜 주진 않았다.
' 역시!'
두심향의 얼굴에 실망스러운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미천염요화상.
정숙한 여자와 요녀의 기질을 동시에 가지고 태어난 상을 말하고, 내미천염요화상을 타고난 여자가 유혹을 시작하면 설사 부처님이라고 해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였다. 두심향은 그 내미천염요화상을 타고 태어났고, 색공인 나찰 섭혼공과 염정환희미소마저 익혔다.
방금 가슴을 드러낸 동작에는 그 세가지 전부가 내포돼 있었다. 그런데 연우강은 움찔 몸을 떨었을 뿐,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 원앙음양고는 뭐죠?"
연우강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물었다.
두심향을 보고 있으면 빨려들어 가고 말 것 같아서였다.
" 말 그대로 고예요. 암수 한 쌍으로 돼 있고 주고의 상태에 따라 종고는 최음제와 독을 배설물로 뿜어내게 돼요."
" 고약한 것들을 뿜어내는군요."
" 그래서 부부 사이를 일컫는 말 중 하나인 일심동체란 말과 합쳐 일심동체고라고 부르기도 해요. 남자가 됐든 여자가 됐든 주고를 가진 사람이 성적으로 흥분하게 되면 종고는 최음제 성분이 들어 있는 배설물을 뿜어내고, 주고가 죽으면 종고는 독을 배설하고 죽게 되죠."
" 그럼 종고를 가진 숙주도 죽겠군요."
" 그렇게 될 거예요."
" 만독불침은 어떻게 되죠?"
" 글쎄요. 실험을 해보지 않아서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책에 나오기로는 만독불침에 이른 고수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게 음양고의 독이라고 하더군요."
" 어떻게 주입하죠?"
" 정사 도중 사내의 요관을 통해 들어가게 돼요."
" 날 잡는 걸 포기한 겁니까?"
숨겨야 할 걸 순순히 가르쳐주기에 하는 말이었다.
" 아직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 잡을 자신 있나 보죠."
" 자신은 없어요."
" 그런데......."
" 나도 당신처럼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거든요."
두심향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이번 곳은 색공이 아닌 일반인을 상대로 연주하는 곡이었다.
" 목숨을 건다고 다 성공하는 게 아니에요, 루주."
연우강은 눈을 감고 흑풍마라천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흑풍마라천력에 혈잔수의 기운을 밀어넣었다.
최음제는 열양 기운으로 태워 버리면 구 할 이상은 제거할 수 있다. 일 할 정도는 피 속에 남게 되겠지만 그 정도는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약간의 활력소가 될 수도 있다.
혈잔수의 기운에 의해 새빨갛게 달궈진 흑풍은 온몸의 혈도를 타고 달리며 몸 구석구석 파고든 최음제 성분을 태웠다.
그리고 그 세맥을 활짝 열어 최음제 성분을 내보냈다.
그의 몸에서 분홍색 기체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최음제 성분을 내보낸 연우강은 곧바로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그런 연우강을 지켜보던 두심향은 슬쩍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연우강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분홍색 기체가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 성공하지 못해도 상관없어요. 연 공자. 왜냐면......"
그녀는 얼굴 앞으로 다가온 분홍색 액체를 보며 입을 벌렸다. 그러자 분홍색 기체는 그녀의 입 안으로 빠르게 빨려들어 갔다. 분홍색 기체를 전부 들이켠 그녀는 탁자 위로 시선을 주었다.
둥실!
그 위에 있던 술병이 떠오르더니 그녀 앞으로 날아왔다. 두심향은 술병을 바라보며 입을 쩍 벌렸다. 술병의 뚜껑이 떨어져 나가고 호박색 액체가 그녀의 입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 술에서는 호박색 기체가 풍기던 것과 같은 향기가 흘러나왔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술병을 비운 그녀는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 그를 잡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아기씨.
- 설사 동귀어진의 수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를 이길 수 없어요. 할아범.
- 무공으로 싸우면 그렇지요.
- 무공이 아니면 어떤 걸로 싸우죠?
- 아기씨의 몸으로 싸워야 합니다.
- 몸으로?
-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연우강은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면 전후 사정을 따지지 않고 도움을 주는 성격입니다. 우선은 제가 위층에서 아기씨에 대해 말을 해두겠습니다.
- 원 황실의 마지막 후손이란 사실을 말한다는 거에요?
- 그도 황실에서 버림받은 사람의 후손이니까요.
- 그리고?
- 제 집에 업둥이로 들어왔다는 사실도 말해야지요. 제가 업고 키웠다는 말도 하고.
- 그럼 그가 우릴 도와줄 거라고 보세요?
- 아닙니다. 그는 아기씨를 살려주기는 하겠지만 도와주진 않을 겁니다.
-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 아기씨께서 최음제를 드셔야 합니다.
- 최음제라고요?
- 스스로 결박도 해야 하고요.
- 최음제를 먹고 스스로 결박을 하면 그자가 절 도와줄 거라고 보세요?
- 전 확신합니다.
- 그는 냉정한 사람이에요, 할아범.
- 적에 대해서만 그렇습니다. 적이 아닌 사람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만일에 대비해서 해약을 가지고 들어가시면 되잖습니까.
- 생각해 볼게요.
술에 취한 것처럼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두심향은 시선을 들어 연우강을 보았다.
정말로 운기행공을 하고 있는 듯 연우강의 신형은 수면 위로 올라와 있었다.
보통 연우강 정도 되는 고수가 운기행공을 하면 일 장가량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부공삼매의 경지가 나타나게 되는데 연우강의 몸에서는 어떤 기운도 흐르지 않고 높이 솟아오르지도 않았다.
마치 편안하게 쉬는 듯한 모습이었다.
' 극을 넘어선 자의 모습인가 보네.'
두심향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정 경지를 넘어서면 평범해 보이는 반박귀진 경지처럼 운기행공 또한 어느 경지를 넘어서면 앉아 쉬는 것처럼 평범하게 돼버린 모양이었다.
" 이제 당신은 선택을 해야 해요, 연 공자."
그녀는 나직하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 아래쪽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러고는 그걸 들고 화로 앞쪽으로 가져다 놓았다.
그녀가 놓은 것은 직사각형의 틀이었는데, 한 사람 정도가 누울 수 있는 크기였다.
다시 침상으로 가서 이불을 가져와 위로 깔았다.
이불을 고르게 편 다음 지풍을 쏘아 등을 꺼트렸다. 그리고 침상 머리맡에 툭 튀어나온 물체를 향해 다시 지풍을 쏘았다.
그르릉!
육중한 소리와 함께 열렸던 문이 천천히 닫혔다.
" 으음!"
두심향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최음제의 효과가 극한으로 치닫고 잇는 듯 난잡한 환영이 타나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금 전 이불을 깔아두었던 틀 위로 누웠다. 그러고는 두 팔을 들어올렸다.
철컥! 철컥!
팔을 위로 뻗자마자 틀에서 뭔가가 튀어나와 손목과 발목을 감아 돌았다.
" 원래 이건 죄수들을 고문할 때 쓰는 형틀이에요. 우리 금향을 염탐하러 들어온 자들을 생포했을 때 사용하곤 했어요. 지금 나처럼 최음제를 먹인 다음 고문을 했죠. 만년한철로 돼 있어서 내공으로는 잘라낼 수 없어요. 내가 목숨을 걸었다는 건 바로 이거에요. 연 공자. 할아범에게는 해약을 가지고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실은 가져오지 않았어요. 당신이 날 구해주지 않으면 난 정혈이 고갈돼 죽게 될 거예요. 왜 해약을 가져오지 않았냐고요? 그냥 내 운을 시험해 보고 싶었어요. 당신이 날 구해주면 다시 힘을 내서 살아보고, 그냥 가면..... 어쩌면 삶에 지쳤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기운을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 정신을 잃어야 할 시간이다. 만일 연우강의 도움으로 다시 정신을 차리면 살아보는 거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저승으로 가면 그만이다.
' 안녕!'
그녀는 내심 중얼거리며 솟구쳐 오르는 뜨거운 기운에 정신을 맡겼다.
운기행공을 마친 연우강이 가장 먼저 들은 건 달뜬 신음이었다. 신음이 얼마나 자극적인지, 최음제를 복용했을 때처럼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만일 운기행공을 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그녀를 덮치고 말았을 것이다.
" 원래 당신을 죽이러 들어왔는데....."
연우강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옷을 걸쳤다.
위쪽에 있던 노인의 말이 맞다. 두심향의 과거를 몰랐다면 아무 거리낌없이 그녀를 없애고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 업둥이었다는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당신을 죽였을 거요. 당신이 원나라 황실의 마지막 후예라는 사실을 비밀로 할게요. 지금처럼 살면 될 거에요."
사망묵의를 걸치고 사망궤를 둘러멘 연우강은 들어왔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응?"
그의 얼굴이 의아해졌다. 안으로 들어올 때 있었던 문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사망낭조를 펼쳐 벽을 할퀴어 보았다.
끼이익!
쇠가 긁히는 거북살스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 끄응!"
연우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 보았던 대문이 떠올랐다. 거의 한자 두께의 만년한철로 돼 있었다. 그걸 뚫으려면 최소한 하루는 이곳에서 머물러야 할 것이다.
"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네."
그는 몸을 날려 두심향 옆으로 갔다.
" 허!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그는 어이없는 얼굴로 두심향을 보았다.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간신히 걸려 있던 상의는 흘러내려 가슴이 훤히 드러나 있고, 엉덩이가 드러날 정도로 찢겨나갔던 하의는 떨어져 따로 뒹굴고 있었다.
하의 속옷 하나만 걸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육감적이었다.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는 그녀의 입에서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달뜬 신음이었다. 그녀의 신음이 귀에 꽂히는 순간, 온몸이 짜릿짜릿해지며 덮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솟았다.
" 원앙음고의 노예가 되고 싶으면 덮쳐라, 연우강."
연우강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두심향의 단전에 손바닥을 댔다. 그러고는 내기를 주입하며 나직하게 소리쳤다.
" 루주!"
내공에 실린 그의 목소리가 두심향의 귀를 강타했다.
" 어?"
강한 외침에 퍼뜩 정신이 든 듯 두심향은 연우강을 보았다.
" 정신없는데 미안해요. 출구를 찾을 수가 없어서요."
" 추, 출구라고요?"
두심향의 얼굴에 어둠이 짙게 드리웠다.
그녀는 연우강이 입고 잇는 옷을 보며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연우강이 자신과 잘 생각이 있었다면, 저 모습이 아니라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어야 한다.
" 역시 내가 많이 낡았죠?"
모든 것을 포기하자 문득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 인연은 강제로 맺는 게 아니니까요."
" 그렇죠. 강제로 안 되는 게 인연이죠. 침상 머리맡에 보면 튀어나온 게 있을 거예요. 그걸 누르면 비밀 통로가 나와요. 그 통로를 따라가면 금방 밖으로 나가게 돼요."
두심향은 눈을 감았다.
연우강의 부름으로 잠시 맑아졌던 머릿속이 다시 뜨거운 기운으로 들어찼다. 그녀는 밭은 신음을 뱉어내며 온몸을 배배 꼬았다.
" 빨리 해약을 복용하는 게 좋을 거요."
두심향을 가만히 바라보던 연우강은 침상으로 몸을 날려갔다.
두심향의 말처럼 침상 머리맡에 돌 하나가 장식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연우강은 그 돌을 가볍게 눌렀다.
그르릉!
육중한 소성과 함께 침상 옆쪽 바닥이 열렸다. 그러자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연우강은 고개를 돌려 두심향을 보았다.
온몸을 비비 꼬면서 달뜬 신음을 흘려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조금 전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더 심해진 듯 수갑이 채워진 손목 부분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요, 루주."
연우강은 몸을 돌려 계단으로 내려갔다.
계단은 상당히 깊었다. 이 장 정도를 내려가자 작은 문이 나왔다. 연우강은 문을 열기 위해 손바닥을 댔다.
" 젠장!"
귓전으로 쉬지 않고 두심향의 신음이 들려왔다. 이미 몇 번의 산을 넘은 듯 그녀의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지고, 강해지고 있었다. 저 단계를 넘어가면 정혈이 고갈되는 상태가 돌 테고, 그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에 심장이 멈추고 만다.
" 빨리 해약을 복용하세요." 원들도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위쪽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두심향의 신음은 더욱 커져만 갔다.
연우강은 그 자리에 앉았다.
두심향이 해약을 복용하면 그때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두심향의 신음은 잦아들지를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커졌다.
" 가만......."
- 왜 해약을 가지고 오지 않았나고요? 그냥 내 운을 시험해 보고 싶었어요. 당신이 날 구해주면 다시 힘을 내서 살아보고, 그냥 가면....... 어쩌면 삶에 지쳤는지도 모르겠어요.
문득 운기행공 할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연우강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계단 위로 몸을 날렸다.
" 이런 바보 같은 사람."
두심향 곁에 선 그는 사망궤를 내려놓고 급하게 옷을 벗었다. 두심향의 입과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알몸으로 변한 연우강은 두심향을 덮쳤다. 느닷없이 후각을 자극하는 사내 냄새 때문이었을까?
두심향은 눈을 번쩍 떴다.
" 정신이 들어요?"
연우강은 그녀의 눈을 보며 물었다.
" 그, 그냥 가세요. 나, 날 안으면 원앙음양고에......"
" 아주 멋진 조력자를 얻는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 나, 난 당신을 이용할 거예요. 다, 당신은 원하지 아, 않는 일을 하게 될 테고요."
"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야죠. 이건 제 생각인데 두 루주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면......"
연우강은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혜광심어로 나머지 말을 이었다.
[ 우린 같은 처지니까요.]
간신히 돌아왔던 두심향의 정신은 다시 사라졌다. 그녀는 최음제의 열기에 몸을 맡기고 말았다.
이젠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저승에서 정신을 차리는 게 아니라 연우강의 품속에서 깨어나게 될 테니까.
" 어이쿠!"
연우강은 화들짝 놀랐다.
두심향은 강한 흡인력을 가진 늪이었다. 두 팔이 묶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녀는 적극적이었다. 아니 묶여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 세상을 살다 보면 수없이 많은 상황에 직면하게 되고, 그 상황 중에는 피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그 속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길이 보일 게다.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연우강은 두심향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지금 상황을 예견하고 이번 일을 준비했다. 원래대로라면 그녀가 죽든 말든 떠났어야 옳다.
양심의 가책은 남겠지만 몸 안에 징그러운 벌레를 넣고 다니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엔 벌레를 몸 속으로 집어넣는 중이다.
' 팔자인 걸 어떡하라고.'
연우강은 두심향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