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멋진 사내란
두심향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꿈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내와 한 침상을 사용한 지 십 년이 넘었다. 삼 년 동안 살을 붙이고 살았던 그의 심장에 검을 찔러넣고 난 후엔 어떤 남자도 돌아보지 않았다.
어쩌면 돌아볼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를 잊기 위해 일에만 매달렸다. 그렇게 십 년의 세월이 흘렀고 남녀 관계가 주는 느낌은 완전하게 잊었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비구니로 살아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연우강의 몸짓에 몸은 격렬하게 반응했다.
가벼운 손짓에 소름이 돋고, 스치는 숨결에 격한 신음을 토해냈다. 그건 그녀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최음제는 해갈됐지만 몸이 느끼는 목마름은 해갈되지 않는 듯 그녀는 쉬지 않고 연우강을 탐했다.
그렇게 밤인지 낮인지를 모를 시간을 꼬박 보냈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두심향은 몸을 돌려 옆에 누워 있는 연우강을 보았다.
피곤한 듯 연우강의 코에서는 나직이 코 고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문득 한숨도 자지 못하고 규동에서 이곳까지 달려왔다고 하였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 사람을 밤새도록 붙잡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공연히 그에게 미안했다.
두심향은 연우강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을 타고 따뜻한 느낌이 전해져오자 두심향은 간밤의 일이 떠올라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손을 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연우가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 어쩌다가 금의위에게 약점을 잡히게 된 거죠?"
느닷없이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의 손이 우뚝 멈췄다.
" 내가 깨운 건가요?"
" 잠깐 눈을 붙이면 피로는 금세 회복될 정도로 난 젊어요."
" 부럽네요."
" 루주도 몸 관리 잘하셨던데 뭘 그러세요."
" 풋!"
두심향은 피식 웃었다.
참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사림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통 사내들은 잠을 자고 나면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고, 상전처럼 행동한다. 물을 떠오라는 사람도 있고, 몸을 주물러 달라는 사람도 있다. 게다가 여자가 재산을 가지고 있다면 그 재산마저도 자기 걸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연우강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연우강이 보통의 사내들과 다르게 행동했다고 해서 상대를 배려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두심향이 연우강을 편한 남자라고 생각한 것은 따스함이 어려 있는 목소리 때문이었다ㅏ. 연우강은 함께 잔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 그 웃음의 의미는 뭐죠?"
" 입술이 마른 것 같아서요."
" 거짓말이라는 거에요?"
" 난 연 공자의 가슴을 쓰다듬고 있지만 연 공자의 손은 놀고 있잖아요."
" 그러니까......"
연우강은 이불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깊은 골이 파인 두심향의 가슴이 눈 안에 가득 들어왔다.
" 몸 관리를 잘했다는 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거예요."
" 내가 실수했네요."
연우강은 음흉하게 웃으며 두심향의 가슴을 그러쥐었다.
" 하룻밤에 불과할지 모르는 인연이지만 그 시간만큼은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예요."
두심향의 얼굴에 홍조가 어렸다.
그녀는 슬쩍 눈을 감고 사내의 느낌을 즐겼다.
" 그렇게 하겠습니다."
" 그는 우일기라는 청년이었어요!"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 금향패의 주인 말인가요?"
" 네, 한족이면서 원나라 황실에 충성했던 자의 후손이었죠. 그를 데려다가 학문을 가르치고 정계에 진출을 시켰어요. 그런데 이중 간자였더군요. 우일기의 또다른 신분은 금의위 위사였어요."
" 금의위에서 왜 간자를 집어넣은 거죠?"
" 십 년 전 사건 때문이에요."
" 십 년 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데요?"
" 내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남자가 있었거든요. 아마 잘됐더라면 그 남자가 금향의 바깥주인이 됐을 거예요."
" 사랑한 사람?"
" 금향을 달라고 했으면 그냥 줬을 거예요."
" 많이 사랑했나 보네요?"
" 누군가를 그렇게 죽도록 사랑해 본 건 처음이었으니까요."
" 그런데 그 자는 거짓 사랑을 하고 있었다는 건가요?"
" 내 정체를 캐기 위해 금의위에서 내게 접근시켰던 자였어요. 이미 혼인한 유부남이었고요."
" 미남계였나 보네요."
" 그런 셈이죠."
" 그래서 어떻게 됐죠?"
" 그는 내 이름이 패아지근심향이란 사실만 밝혀냈을 뿐이에요."
" 증거는 얻지 못했단 말인가요?"
" 맞아요. 아무리 금의위가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지만, 나 또한 상당한 인맥을 가지고 있어요. 아무런 증거도 없이 진술만으로 날 조사하진 못해요."
" 그 후로도 압박이 심했을 텐데, 어떻게 피한 거죠?"
" 오군도독부 요인들과 친분을 쌓았어요. 특히 오군도독부 중 최고 권력을 지녔던 후군도독부와 친했죠."
" 동창은 배제했나 보죠?"
" 동창이나 금의위나 한번 엮이면 빠져나오지 못하는 조직이잖아요."
" 그렇죠. 그들과 엮이기 시작하면 결국 손해를 보고 끝나기가 쉬우니까."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의위와 동창.
그들은 막강한 정보력과 무력을 지닌 조직이고, 임무의 성격 또한 비슷하여, 어느 한쪽이 약해지면 다른 쪽이 강해지게 돼 있다.
그러다 보니 금의위와 동창은 끊임없이 암투를 벌이고 있다.
금의위 편을 들면 동창으로부터 해코지를 당하고, 동창편을 들면 금의위 쪽에 당한다. 명령을 내리는 입장이 아니라면 결코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자들이 바로 동창과 금의위다.
그래서 장인태감을 지닌 자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창에 도움을 청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 그럼 우일기를 집어넣은 건 두 루주가 원나라 황제의 후예라는 증거를 잡아내기 위해서였나 보죠?"
" 네."
두심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 성공했나 보죠?"
" 이곳까지 침입해서는 내 이름이 적힌 황실 족보를 훔쳐갔어요."
" 그럼 금의위는 그걸로 루주를 협박하고 있는 겁니까?"
" 금향을 없애는 것보다는 지금껏 축적된 정보를 이용하겠다는 심산이겠지요."
" 지금은 정보 때문에 살려주겠지만, 언젠가는 루주의 신분을 밝히고 체포할 거예요."
금의위나 동창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그들은 죄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잡아들이지 않는다. 죄의 경중아니 또는 성격을 따져 가장 필요한 자들만 잡아들이고, 다른 자들은 감시만 한다. 그러다가 금의위가 곤경에 처했을 때, 국면전환을 위해 그동안 묻어두었던 사건을 터뜨리게 된다.
두심향 또한 그렇게 이용될 소지가 높았다.
" 그건 나도 알아요."
" 그땐 어떻게 할 거죠?"
" 그래서 대책을 세우고 있잖아요."
" 대책?"
" 이 정도면 괜찮은 대책 아닌가요?"
두심향은 가슴에 있던 연우강의 손을 아래로 잡아 내렸다.
" 그러니까 금의위에서 벗어날 대책이 나라는 거예요?"
" 연 공자의 머릿속에는 원앙음양고가 들어 있어요. 지금쯤 자리를 잡았을 거예요."
두심향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어 그녀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원양음양고가 자리를 잡았다고 하였던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두심향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자, 연우강은 온몸을 적셔오는 쾌감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놀란 눈으로 두심향을 보았다.
설마 고 한 마리가 이런 영향을 미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어젯밤 연 공자는 봉원쇄정대법에도 당했어요."
두심향은 요염한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아래로 뻗었다.
" 정말이에요?"
연우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정신이 없는 와중이었다고 하지만 그녀가 봉원쇄정대법을 펼치는 것까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에요. 올라와요"
그녀는 손을 당겼다.
연우강은 곧바로 두심향 위로 올라갔다.
" 입을 맞춰봐요."
두심향은 왼손으로 연우강의 머리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 봉원쇄정대법은 입으로만 명령을 내리는 거 아닌가요?]
연우강은 입맞춤을 하면서 혜광심어를 보냈다.
[ 지금 입으로만 하고 있잖아요.]
두심향은 혀를 쑥 밀어 넣었다.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하자 머릿속에 있는 원양음양고가 최음제를 배설하기 시작한 듯 급격하게 피가 뜨거워졌다.
[ 아래로 내려가요.]
그녀는 연우강의 얼굴을 가슴을오 밀었다.
[ 거봐요. 내 말 잘 듣잖아요.]
두심향은 가슴으로 감각을 집중하며 말했다. 곧 그녀의 입에서 달뜬 신음이 흘러나왔다.
[ 내려가요.]
그녀는 연우강의 머리를 아래로 밀었다.
[ 난 정말로 봉원쇄정대법에 당한 것 같아요. 도무지 거부할 수가 없어요.]
연우강은 두심향의 몸에 입을 맞추면서 혜광심어를 보냈다.
[ 그, 그래요. 당신은 내 노예가 돼, 됐어요. 그, 그리ㅗㄱ 이제부터는 다,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나, 난.......]
두심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연우강의 머리카락을 힘껏 그러쥐었다.
연우강이 지하 공간을 나선 것은 그날 밤이었다.
나가는 장소는 처음 나가라고 했던 비밀 통로였다.
비밀 통로는 상당히 길었다. 거의 오백 장가량 걸어가자 커다란 바위에 막힌 막다른 곳이 나왔다.
바위에는 마치 대문처럼 문고리가 달려 있었다. 문고리를 젖히고 오른편 끝을 밀었다.
바위 아래쪽에 특수한 장치가 돼 있는 듯 별로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바위가 천천히 열렸다. 비밀 통로의 끝은 야트막한 야산과 이어져 있었다.
바위 주변은 소나무와 풀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여간해서는 발견되지 않을 정도로 은밀했다.
게다가 바위는 외부에서는 끌어당길 수 없도록 앞면이 평평했다.
아쪽에서 고리를 걸어 버리면 외부에는 용을 써도 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바위를 원래대로 해놓은 다음 자리를 떴다.
십여 장 가량 걸어갔을까.
앞쪽에서 술 냄새가 풍겨왔다.
연우강은 술 냄새가 풍겨온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커다란 바위에는 동각이 술병과 안주를 앞에 놓은 채 앉아 있었다.
"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요?"
연우강은 동각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 어젯밤부터 있었네."
" 내가 어제 나왔으면 어쩔 셈이었소?"
연우강은 슬쩍 몸을 날려 동각 앞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자네도 알다시피 난 내시였네. 아내도, 자식도, 친척도 없네. 이 세상에 내가 정을 준 유일한 사람이 바로 심향이었네."
" 딸처럼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구려."
" 자네가 어제 나왔더라면 난 자네에게 죽여 달라고 부탁을 했을 거네, 이 검으로."
동각은 오른편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검집이 없는 검이 놓여 있었다.
" 검집을 버리고 왔다는 건 동귀어진을 뜻하는 건데... 죽여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그 검을 들고 덤빌 생각이었구려."
연우강은 동각의 잔에 술을 따랐다.
" 어떻게든 내가 죽는 결과만 나오면 되니까."
동각은 술잔을 들어올리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덕분에 난 여기에 벌레 한 마리를 넣고 살게 됐소."
연우강은 술잔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 하지만 자넨 그 벌레와 비교할 수조차 없이 큰 걸 얻지 않았는가?"
" 금향을 말하는 겁니까?"
" 금릉 연씨 세가 장남인 자네 앞에서 돈 자랑할 바보는 아니네."
" 그럼 뭐가 벌레보다 낫다는 겁니까?"
" 자네가 지금까지 함께 지냈던 그분을 말하는 거네."
" 이게 뭔지 아세요?"
연우강은 팔을 안쪽으로 굽히며 물었다.
" 내가 심향을 딸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다고 보는 건가?"
" 아닌가요?"
" 난 황제의 침소에 수많은 여자들을 넣어주었고, 침소 밖에서 밤을 세웠네."
" 힘들었겠군요."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물건이 없는데 힘들 게 무에 있는가. 그리고 처음에만 약간 싱숭생숭할 뿐이지 나중엔 자장가 삼아서 잠을 자기도 한다네."
"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 여자 때문에 사내 팔자가 바뀐다는 말을 들어봤는가?"
" 들어본 적도 있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 하면 사내의 양기를 북돋워 주는 체질이 있다는 말은?"
" 그 역시 들어는 봤는데 아직 경험은 없어요."
" 간밤에 어땠나?"
" 나쁘지 않았어요."
아니 나쁜 정도가 아니었다. 항주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녀와 잤지만 두심향 만한 여자는 아직 없었다.
그녀를 만나고 나서 비로소 속궁합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됐을 정도였다. 그녀는 지금껏 경험한 여자들 중 단연 최고였다.
"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최고의 밤을 보냈을 거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넨 지금 조금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고 있을 거네. 내 말이 틀린 건가?"
" 그렇긴 하네요. 머릿속에 들어 있는 벌레를 빼면 몸은 아주 편합니다. 설마 내 몸이 편한 이유가 그녀 때문이라고 하고 싶은 건가요?"
" 내미천염요화상을 타고난 여자라서 그런 거네."
" 그런 걸 믿어요?"
" 난 자네를 만나기 전에는 마라천력인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네."
" 좋아요. 그런 관상을 가진 여자가 있다고 하자고요. 그럼 그 내미천염요화상을 가진 여자가 어쨌다는 겁니까?"
" 조금 전에 말한 대로네. 사내를 꼼짝 못하게 할 정도로 뇌쇄적이면서도 양기를 북돋워주는 보약 역할까지 하는 여자를 일컫는 여자를 말하네.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고, 낵 모시던 황제 폐하께서 하신 말씀이네. 그런 여자를 얻는 사내는 성공적인 삶을 산다고 하였네."
" 내미천염요화상을 타고난 여자를 얻으면 성공한다는 건 좀 그렇네요. 그리고 난 며칠 동안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체력을 가졌어요."
" 내미천염요화상을 가진 여자를 얻었다고 성공하는 건 아니지. 하지만 부부생활이 좋은 사내는 얼굴이 밝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게 되네. 얼굴이 밝다는 건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뜻이고, 첫인상이 좋은 사람들은 거래의 성사 확률이 높다네. 그리고 자신감이 넘치는 사내는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건 곧 속임수를 잘 쓰지 못한다는 말이 되네. 속임수에 당하지 않고 거래의 성사 확률이 높은 사람은 당연히 성공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수신제가치국평천하란 말인가요?"
" 허허허! 바로 그거네. 연 공자. 남자의 성공 유무를 결정짓는 건 바로 전날 밤이라네."
" 설마 책임지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 심향이 열 살만 젊었다면 책임자리고 했을 거네."
" 그럼 영감님이 원하는 건 뭡니까?"
" 크게 원하는 건 없네. 혹시 북경을 지나거나 들르게 되면 한 번씩 들여다 봐 달라는 거네."
" 그녀가 원할 거라고 보십니까?"
" 원하지 않을 지도 모르네. 그런 걸 바라기에는 나이를 너무 먹었으니까. 하지만 자네가 온다면 절대 문전받개를 하진 않을 거네."
" 그게 그녀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세요?"
" 자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난 심향의 마음속에 있는 그 녀석을 몰아내고 싶네."
" 무평이라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까?"
" 그 아이가 관무평에 대해 말을 했는가?"
동각은 반색한 얼굴로 물었다.
그가 이렇듯 반색한 이유는 관무평에 대한 걸 두심향이 말을 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가슴 깊이 묻었던 사연을 꺼내 외부에 펼쳐놓았다는 건 더 이상 정신적인 충격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두심향에게 있어 묻어두었던 사연은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사내를 그녀의 손으로 죽여야 했다는 것이다.
그 사내가 바로 관무평이다.
관무평을 없앤 후 두심향은 금향각에 칩거했다. 그녀가 그곳을 나온 것은 일 년 후였다. 금향각을 나온 그녀는 관무평에데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일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십 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연우강에게 관무평에 대해 말을 한 듯했다.
" 이름은 말하지 않았어요."
연우강은 고개를 저었다.
" 하면?"
동각의 얼굴이 실망스럽게 변했다.
" 나를 그 사람으로 착각했나 봐요."
" 끄응!"
동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두심향이 제정신이었다면 절대 두 사람을 착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절정의 순간을 맞아 그녀도 모르게 관무평이라고 불러 버린 듯했다.
" 괜찮은가?"
동각은 연우강을 보았다.
관계를 갖는 여자가 절정의 순간에 다른 사내의 이름을 부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공연히 연우강에게 미안했다.
" 우린 우연히 관계를 갖게 됐을 뿐,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잖아요."
" 상관없다는 말인가?"
" 그 순간 그녀가 좋았다면 그걸로 된 거죠 뭐. 나도 나쁘진 않았고요."
" 자네, 특이한 사람이구먼."
동각은 놀란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 특이한 게 아니고 하룻밤을 함께 잤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의 추억에까지 관연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 허허허! 자네는 정말 멋진 사람일세 그려."
동각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왜 이런 사람을 이제야 만났는가.
문득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 그럼 내 말대로 해주겠는가?"
동각은 물었다.
" 나야 손해 볼 게 전혀 없죠. 오면 밥 주고, 재워주고, 떠날 때는 노자까지 받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게 그녀를 위하는 일인지는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영감님. 오히려 그녀를 더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 그건 걱정하지 말게. 자넨 금향각으로 와서 술만 마셔주면 되네. 그리고 이거 받게."
동각은 활짝 웃으며 품속에서 책 한권을 꺼내 내밀었다.
" 이건 뭡니까?"
연우강은 책을 받아들었다.
" 금의위 정보 조직인 금밀사 대원 명부네. 북경에 암약하고 있는 대원의 수가 이천여 명가량인데 우리가 파악해 낸 자는 육백 명에 불과하네."
" 금밀사 명단이라고요?"
연우강은 깜짝 놀랐다.
정보원은 신분이 밝혀지는 순간 생명이 끝났다고 본다. 그래서 정보원들은 신분을 숨기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 부인에게까지 숨긴다.
일반적인 단체의 정보원도 그 정도인데, 금의위 금밀사 정보원들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더구나 중원 최고의 정보력을 보유했다고 하는 동창과 경쟁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 금밀사 소속 정보원 삼 할을 파악해 두었다는 건 엄청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금향의 정보력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안에 자세히 적어두었지만 앞쪽에 있는 자들은 상당한 수뇌급들이네. 그들을 족치면 그 책의 세 권 분량의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거네."
" 이건 완전히 죽이는 거네요."
연우강은 헤벌쭉 웃으며 책자를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 얼마나 걸릴 걸로 보는가?"
" 기간을 정해놓으면 실수를 많이 해서요. 실수를 하게 되면 이게 날아가니까."
연우강은 제 머리를 툭 쳤다.
"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말인가?"
"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게 끝날지는 알 수 있습니다."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술병은 텅 비어 있었다.
" 어떻게 끝나는가?"
동각은 빈 술병과 남은 안주를 챙겨 자루 안으로 집어넣으며 물었다.
" 금의위 위사들이 목에 힘을 주고 다니려면 최소한 이십 년은 걸릴 거요."
" 완전히 끝장을 보겠다는 말이군."
" 그게 바로 개독새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내가 금향에 왔다 갔다는 사실을 금의위에 보고하세요."
" 그래도 상관없는가?"
" 어차피 알려진 건데 숨기면 더 이상하잖자요."
" 알았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네."
동각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인연이 있으면 또 보도록 하죠."
연우강은 손을 흔들며 언덕을 내려갔다.
" 연 공자."
동각은 멀어지는 연우강을 불렀다.
연우강은 고개를 돌려 동각을 보았다.
" 심향 그 아이......"
" 좋은 여자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영감님. 장담은 못하지만 북경을 지나가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들렸다가 가도록 할게요."
" 저 바위 문 잠그지 않을 생각이네."
" 다음에 뵐게요."
연우강은 손을 흔들며 아래로 내려갔다. 잠시 후 연우강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 허허허! 이젠 죽어도 되겠구먼."
동각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연우강이 나왔던 바위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허공섭물로 바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위 문을 닫으려고 문고리를 잡은 그는 조금 전 연우강이 사라진 어둠 속으로 시선을 주었다.
" 물론 심향이 힘들 거라는 건 나도 아네. 연 공자. 하지만 자네가 한두 번만 더 찾아오면 심향 그 아이는 관무평을 죽인 죄책감 위에 자네 얼굴을 덧씌우게 될 거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죄책감은 희미해질 테고, 자네 얼굴만 남게 되겠지. 내가 바라는 건 바로 그 상황이네. 물론 가슴에 품어버린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네. 하지만 그 기다림은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 거라네. 설사 기다리는 사람이 죽을 때까지 오지 않는다고 해도."
동각은 바위 문을 닫고 몸을 돌렸다.
그가 연우강에게 시간이 나면 꼭 들러달라고 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두심향의 마음속에 있는 관무평에 대한 기억을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다른 기억으로 대체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연우강이었다.
구불구불 이어진 통로를 따라 걸어간 동각은 계단 앞에 섰다.
" 접니다. 아기씨."
동각은 위쪽을 향해 나직하게 소리쳤다.
" 열려 있어요, 할아범."
두심향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동각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두심향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십 년 전 그 사건 이후 두심향의 목소리는 단 한 번도 높게 올라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방금 목소리는 경쾌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는 웃으며 계단 위쪽의 문을 열었다.
파앗!
그러자 밝은 광채가 눈을 덮쳐왔다.
곳곳에 불이 켜진 실내는 대낮처럼 밝았다.
" 너무 밝은 거 아닙니까?"
동각은 밖으로 나가며 물었다.
" 칙칙한 것 같아서 불을 밝혔는데 너무 밝은가요?"
" 전 눈이 부십니다. 아기씨. 절반은 꺼트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얼굴을 가린 동각은 중앙에 있는 의자로 가며 말했다.
" 알았어요."
두심향은 지풍을 쏘아 열 개 중 다섯 개를 꺼트렸다.
" 너무 어둡지 않아요?"
" 딱 좋습니다. 아기씨. 그리고 이쪽으로 앉아 보세요."
동각은 건너편 의자를 가리켰다.
" 왜요?"
두심향은 동각 건너편으로 앉았다.
동각은 두심향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목소리만 밝아진 게 아니었다. 한껏 밝아진 얼굴에서는 은은하게 광채가 흐르고 있는 듯 했다.
" 연 공자를 만나고 왔습니다."
동각은 찻잔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
"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잘 갔어요?"
" 제가 주제넘은 짓을 했습니다."
" 그게 무슨 소리죠?"
" 혹시 북경 근처에 올 일이 있으면 이곳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 몸이 세 개라도 부족한 것 같던데 여기에 올 시간이 있겠어요?"
두심향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미소가 머무른 시간은 앞에 앉은 동각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짧았다.
" 그 친구 공짜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술을 공짜로 대접하겠다고 했더니, 북경 근처에 오면 무조건 들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 정말 그랬어요?"
" 저와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정문으로 들어오는 건 싫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기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 비밀 통로요?"
두심향은 조금 전 동각이 나왔던 통로를 가리켰다.
" 네."
" 비밀 통로는 잠가야 하잖아요."
" 워낙 은밀한 곳에 숨어 있어서 잠그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 하지만 여기로 들어온다고 해도 밖으로 나가질 못하잖아요. 저긴 항상 잠겨 있을 건데."
이번엔 밖으로 나가는 문을 가리켰다. 금향각 지하는 어쩌다 한 번 들어오는 곳일 뿐 일 년 내내 잠가놓았다. 설사 연우강이 이곳으로 왔다고 해도 밖으로 나갈 방법이 없다.
" 사실 저도 그게 고민이긴 합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생각을 해봤는데요."
" 방법을 찾았어요?"
" 아기씨께서 다시 이곳에 살면 될 것 같더라구요."
" 저보고 여기에 살라고요?"
" 아기씨 처손데 제가 살 수는 없잖습니까?"
" 내가 여기서 산다고 하면 루주들도 이상하게 여길 테고..... 그럼 할 말이..."
" 그럼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만날까요? 지금이라도 쫓아가면 연 공자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동각은 일어나는 시늉을 했다.
" 아, 아니에요. 오늘부터 여기서 살게요."
두심향은 화들짝 놀라며 동각을 말렸다.
" 그럼 살림살이를 이곳으로 옮기라고 말해 두겠습니다. 아기씨."
동각은 자리에서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할아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두심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각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 고마워요."
나이가 마흔인데 동각이 연우강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이유를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모른 척했을 뿐이었다.
" 별말씀을 그보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아기씨."
" 말씀하세요."
" 만일 함께 잔 남자가 절정의 순간에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면 여자의 기분이 어떨까요?"
" 그거야......... 혹시?"
두심향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 보통 업둥이로 들어가면 비뚤어지기 쉬운데 그 녀석은 참 잘 자랐더군요. 아주 착해요."
동각은 두심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두심향은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녀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술에 취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잠자리에서 그랬다면 사내에게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다. 지금껏 기녀들에게도 그렇게 교육을 해왔고,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 기녀는 바로 내보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실수를 자신이 한 것이다.
" 어떡하지?"
그녀는 안절부절 못했다.
상대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의 그 기분은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관무평이 금의위 첩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 전해준 첩지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명확한 이유는 바로 절정에 이르렀을 때 부른 다른 여자 이름이었다.
십 년이 더 지났지만 지금 생각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 물론 연우강과는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 조금은 덜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건 예의가 아니었다.
" 아이고, 미친년, 어쩌라고."
두심향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이미 쏘아진 화살이고 쏟아진 물이었다.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이상 복구할 방법은 없었다.
" 할아범."
급기야 두심향은 문쪽으로 걸어가며 고함을 내질렀다.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두심향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