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201화 (201/232)

제 5장 함정

촛불이 밝혀진 어둠 속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이들은 금의위에서 진무사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삼사의 수뇌들이었다.

오른편에 앉아 있는 남색 장포를 걸친 자는 금밀사 사주 뇌력비자 조현이었다. 조현은 정보를 취급하는 자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덩치가 컸다. 그에게는 붓보다는 청룡언월도가 어울릴 것 같았다.

조현 왼편에 있는 자는 통통한 체구를 가졌다. 머리는 약간 벗겨지고 후덕한 얼굴을 가졌지만 눈을 깜빡일 때마다 차가운 광채가 어름에 반사된 빛처럼 흘러나왔다. 금포를 걸친 이자가 바로 역모자를 포획하러 다니는 반포사의 사주 금포밀영 조천신이었다.

그리고 조천신 옆에는 금세라도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살기를 뿌려대는 사내가 앉아 있었다.

불쌍해 보일 정도로 바싹 마른 이자는 척살사의 사주 잔심인호 육양이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잔심인호 육양이었다.

" 하남에서 들어온 소식은 있는가?"

이곳에 있는 세 사람의 관심사는 북경이 아니라 하남이었다. 영반 공오인은 물론이고, 북경의 이인자라고 불리는 남경왕 주진무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머잖아 대야벌과 비슷한 전력을 가진 거대한 단체가 탄생할 조짐이 보이네."

조현은 찻잔을 들며 대답했다.

" 그 정도로 대단한가?"

이번에 질문을 한 사람은 금포밀영 조천신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 구룡천문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다.

대야벌의 존립을 위협하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대야벌은 건재한 상태고, 그런 강호에서 구파일방이 주도세력으로 나선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대야벌과 비슷한 전력을 가진 세력이 탄생할 거라니.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 사실 나도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

조현은 조천신의 빈 술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뜻밖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강호를 주시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동안 금밀사는 강호 무림을 살폈다. 하지만 어떤 특이한 정황도 발견하지 못했다.

대야벌은 여전히 강호 무림이었고, 밀천의 발호는 미풍으로 막을 내리는 중이었다.

이번 일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 그러다가 남경왕께서 강호로 나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구먼."

조천신은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 무인이 되고 싶은가?"

조현은 물었다.

" 글쎄...... 지금 내 위치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간호 무력감을 느끼곤 한다네."

" 뭔가 변화가 필요하단 말이구먼."

" 그렇네."

" 육 형, 자넨 어떤가?"

이번에는 육양을 돌아보았다.

" 난 구룡천문 문주 자리를 준다고 해도 결코 그곳으로 가지 않을 거네."

" 지금 자리가 더 좋단 말인가?"

" 당연히 좋지. 상전의 눈 밖에만 나지 않으면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리가 척살사 사주 자리 아닌가. 난 사람을 죽일 때마다 몇 번씩 생각해야 하는 문주 자리보다는 죽이고 나서도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사주 자리가 더 좋네."

" 양성일처럼?"

" 그렇지. 만일 내가 구룡천문 문주였다면 죽었다가 깨어난다고 해도 도독동지인 양성일을 죽일 수 없네. 하지만 난 그의 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를 자르고, 가족마저 죽였네. 그러면서도 두 다리를 뻗고 잠을 자고, 여기서는 자네들과 함께 노닥거리고 있네. 그런 즐거움은 금의위 척살사 사주가 아니면 결코 맛볼 수 없다네."

" 하긴 구 맛을 본 사람은 절대 이 자리를 떠날 수가 없지."

조현은 히죽 웃었다.

조현 또한 육양과 같은 생각잉ㅆ다. 금의위 삼사 사주의 권력. 그 권력은 신분을 초월하여 강한 압력을 행사한다. 신분이 더 높은 자들, 거부들, 그리고 강한 무공을 가진 자들마저 무릎을 꿇릴 수 있는 힘. 그 힘을 주는 원천이 바로 삼사의 사주인 것이다.

" 참! 금향에 대한 서류는 가져왔는가?"

반포사의 사주 금포밀영 조천신이 조현을 보며 물었다.

" 사본을 만들어 오기는 했네만......."

조현은 옆에 둔 보자기를 들어 조천신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건네준 보자기 안에는 그동안 금향에 대해 조사한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 고맙네."

" 그건 어디에 쓰려고 그러는가?"

조현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 그건 나중에 말해 주겠네."

조천신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접니다. 사주."

그때 밖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일이냐?"

" 연우강이 북경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올라왔습니다."

" 들어와라." 조현의 목소리에 이어 날렵하게 생긴 중년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금밀사의 부사주 비뇌 이여천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이여천은 세사람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 어디서 올라온 정보냐?"

" 금향에서 올라온 정봅니다."

" 금향이라고?"

" 그렇습니다. 사주. 그곳에 나타나 금향의 호위 오십여 명을 살해하고 떠났다고 합니다."

" 밀사들은 놈을 발견하지 못한 게냐?"

조현은 싸늘한 얼굴로 이여천을 보았다.

양성일의 죽음 이후 금밀사는 비상체계로 운영됐다. 연우강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놈은 이천 명에 달하는 밀사들의 눈을 피해 금향애 들른 것이다. 갑자기 짜증이 확 치밀었다.

" 죄송합니다. 사주."

이여천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북경에 퍼져 있는 밀사의 수는 이천 명이다. 밀사들이 태만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 아침까지 전부 집합시켜라!"

" 저, 전부......"

퍼억!

이여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가슴에서 둔탁한 소성이 들려왔다.

" 크윽!"

이여천은 가슴을 감싸쥐고는 문이 있는 곳까지 물러났다. 조현이 쏘아낸 암경이 그의 가슴을 강타해 버린 것이었다.

" 집합 시간은 인시초다. 그 시간에 늦은 놈은 출근하지 말고 그대로 짐을 싸서 고향으로 보내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 알겠습니다. 사주."

이여천은 부동자세를 취하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곧바로 방을 나갔다.

" 나도 그만 일어나 보겠네."

조천신은 금향에 대한 자료가 들어 있는 보자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갈 텐가?"

조현이 그를 보며 물었다.

" 연우강이 나타났으면 우리도 준비를 해야 하니까, 금향에 들렀다가 숙소로 갈 생각이네."

" 자넨 어떻게 할 텐가?"

조현은 육양을 돌아보며 물었다.

" 나도 일어나야지."

조천신을 가만히 바라보던 육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럼 내일 보도록 하세."

먼저 일어난 조천신이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 금밀사를 나선 조천신은 밖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 어디로 모실까요?"

마차 앞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차 주변을 호위하고 있는 그들은 사주의 호위대인 포밀명들이었다.

" 금향으로 가자."

조천신은 보자기를 풀며 말했다.

" 알겠습니다."

곧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천신이 펼친 보자기 안에는 두 권의 책자가 들어 있었다. 책자에는 제목이 적혀 있지 않았다.

그는 한 권씩 펼쳐보았다. 첫 번째 펼친 책자에는 금향에 소속된 기녀들과 하인들의 신분에 관해 적혀 있었다.

조천신은 책자를 덮고 두 번째 책자를 펼쳤다.

그 책자에는 금향의 역사부터 시작하여 주인인 두심향에 관한 내용이 나와 있었다.

< 두심향.

나이: 41세.

신분: 원나라 중신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음.

특이사항.

서른 살 때 관무평이라는 자와 혼인을 할 뻔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관무평이 그녀의 곁에서 사라짐.

그리고......>

" 쿡!"

조천신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조천신의 시선을 붙들고 있는 것은 '관무평이라는 자와 혼인을 할 뻔했지만 어느날 갑자기 관무평이 그녀의 곁에서 사라짐.'이란 글귀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관무평이라는 글귀였다.

조현은 원본을 그대로 모사해서 보낸 것이 아니었다. 관무평이란 자와 혼인을 할 뻔했던 건 맞지만, 관무평의 정체에 대해서는 적어놓지 않은 것이다.

사실 관무평은 조천신의 친구였다.

함게 훈련을 받은 동기로 일 년간의 훈련이 끝나고 관무평은 금밀사로 발령을 받았고, 조천신은 반포사로 발령을 받았다.

- 이번 임무를 무사히 마치면 난 금밀사 사주 자리에 한 발짝 더 다가서게 된다.

- 들키면 죽음이라는 것도 알고 있냐?

- 하지만 위험이 클수록 열매는 크고 달지.

- 그 계집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 장가만 안 갔다면 그 계집과 함께 살았을 것이다.

- 그 정도냐?

- 기회가 닿으면 언제 한번 자봐. 그럼 내 기분을 알게 될거야.

- 그런데 너의 정확한 임무가 뭐냐?

- 그녀의 신분을 밝혀내는 거라고 했잖아.

- 단지 계집의 신분을 밝혀내려고 금밀사 최고 인재를 투입했다는 거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말이...... 안 되냐?

- 당연히 말이 안 되지. 인마. 차기 금밀사 사주가 되더니 우리 둘의 맹세를 잊은 모양이구나.

- 잊었을 리가 없지. 하지만 상부에서도 그 이상은 말해 주지 않았다. 다만 내 짐작인데....

- 말해 봐.

- 전국옥새 때문인 것 같아.

- 전국옥새? 그러니까 진나라 때 시황이 화씨벽으로 만들었다는 그 옥새를 말하는 거야?

- 응! 그 계집이 전국옥새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 그 계집이 누군데?

- 지금까지 밝혀낸 바로는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토곤 테무르의 증손녀야.

- 정말?

- 그리고 전국옥새의 마지막 소유주가 바로 토곤 테무르였고.

- 그럼 두심향의 본명은?

- 패아지근심향이지.

' 난 십년을 기다렸다. 두심향.'

조천신은 내심 중얼거리며 책을 덮었다.

관무평의 말을 듣고 두심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하지만 두심향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직급이 낮아 금향 출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금향으로 들어갈 기회가 생겼다.

영반이 금향에서 회식을 시켜준 것이었다.

그날 처음으로 두심향을 보았다.

그녀를 보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단단한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엄청난 충격이 온 몸을 강타했다.

그녀를 본 후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아도 그녀가 떠오르고, 눈을 떠도 그녀가 보였다. 그녀를 생각하며 얼마나 많은 날들을 수음으로 보냈는지 모른다. 하지만 관무평의 실종으로 인해 그녀에 대한 조사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 전국옥새라.....'

사실 전국옥새는 춘추전국시대에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했던 진나라의 시황이 만든 도장에 불과하다.

' 수명어천, 기수영창 -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아, 장수를 누리고 영원히 번창하리라,' 는 여덟 자가 새겨진 전국옥새는 언제부터인가 '천명을 받은 자.' 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였고, 천하에 뜻을 둔 자는 전국옥새의 주인이 되고자 하였다.

원나라를 몰아내고 천하의 주인이 됐던 태조 홍무제 또한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토곤 테무르를 놓친 것보다 전국옥새를 얻지 못한 것이 더 안타깝다고 말할 정도로 전국옥새의 상징성은 크다.

그 전국옥새의 행방을 두심향이 쥐고 있는 것이다.

조천신은 전국옥새를 얻어 천하의 주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차기 금의위 영반 자리였다.

끼이익!

바로 그때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천신은 보자기로 책자를 싸맸다. 그러고는 정좌를 했다. 대문으로 들어간 마차는 계속해서 안으로 달렸다. 그리고 잠시 후, 마차 문이 열렸다.

" 호호호! 어서 오세요. 대인. 너무 오랜만에 오시는 것 같사옵니다."

아찔한 미소로 조천신을 맞이한 사람은 제일루주 화용부인 유만옥이었다.

" 내가 이곳에서 술을 마시려면 몇 달을 저축해야 하는지 아느냐?"

" 호호호! 누가 들으면 진자인 줄 알겠습니다. 대인. 안으로 드시지요."

유만옥은 웃으며 조천신을 안내했다.

그녀가 조천신을 데리고 간 곳은 삼층에 있는 귀빈실이었다. 귀빈실로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어린 기녀 세 명이 들어왔다.

" 오늘은 술을 마시러 온 게 아니다."

" 그렇다고 해도 금향은 차 대신 술을 마시는 술집입니다. 대인. 술은 당연히 기녀가 따라야 하고요."

" 난 어린 계집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 호호호! 죄송합니다. 대인. 조현 사주님과 같은 취향이신 줄 알고 당장 농염한 아이들로..."

" 난 마흔이 넘었으면서 적당히 살이 찐 여자를 좋아한다. 유 루주."

조천신의 말에 유만옥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금향에서 마흔이 넘은 사람은 총루주인 두심향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본래의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 이거 죄송해서 어쩌나. 저희 금향에는 그런 기녀는 없사옵니다. 대인."

" 내가 알기로는 패아지근심향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녀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 처음 듣는 이름이옵니다."

" 두심향에게 말하면 찾아줄 거다."

" 알겠습니다. 대인."

상대방의 목소리에 살기가 실리면 물럿야 한다는 걸 유만옥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목례를 하고는 방을 나왔다.

[ 평소처럼 하거라.]

주변에 있는 기녀들에게 전음을 보낸 유만옥은 금향각을 향해 몸을 날려갔다. 잠시 후 두심향이 화용각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심향의 얼굴은 잔뜩 굳은 채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귀빈실의 문을 두드렸다.

" 들어와!"

조천신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두심향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이쪽으로 앉거라."

조천신은 바로 옆 자리를 가리켰다.

두심향은 조천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껏 수많은 벼슬아치들이 다녀갔고, 그들 중에는 최고 공직인 사공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반말을 하지 않았다. 깍듯하게 대우를 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천신은 보자마자 곧바로 반말을 하고 있다. 시비를 걸기 위해 온 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일부러 싸우기 위해 온 자를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조천신 옆자리로 앉았다.

" 네가 패아지근심향이더냐?"

조천신은 두심향 앞으로 술잔을 내밀며 물었다.

쿠웅!

두심향의 머릿속으로 뭔가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 알고 왔다는 말인데.......'

두심향의 심장이 급하게 뛰었다.

조천신은 단순하게 떠보려고 온 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금향에서 파악한 조천신은 저렇듯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하는 자가 아니었다. 대화와 질문으로 원하는 대답을 유도해 내는 자였다. 그런 자가 저렇듯 단호하게 말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알고 왔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 그렇습니다. 대인. 제가 패아지근심향입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 아닙니다. 대인. 우리 금향에는 원나라 황제의 성을 쓰는 기녀는 없습니다."

두심향은 술잔에 술을 따르며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차분한 말투와는 달리 그녀의 손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조천신은 떨리고 있는 술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난 패아지근심향이라는 이름의 기녀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런데 네가 들어왔구나.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조천신은 두심향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조금 전 술을 따를 때 떨렸던 술병과 마찬가지로 두심향의 어깨에서도 미미한 떨림이 감지됐다.

' 쿡!'

조천신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어렸다.

그는 두심향을 빤히 바라보며 술잔을 비웠다.

" 손은 치워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두심햐은 조천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넘기며 말했다.

" 관무평을 아느냐?"

"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럼 관무평이 내 동기였다는 것도 아느냐?"

" 그가 금의위 소속이었단 말입니까?"

" 관무평이 금의위 소속이었던 걸 몰랐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 처음 듣는 말입니다."

" 나는 관무평에게 너에 대해서 많이 들었다. 그 친구가 말하길 네 몸매에서 가슴과 엉덩이가 가장 멋지다고 하더구나."

조천신은 어깨에 올리고 있던 왼손응ㄹ 두심향의 기슴으로 밀어넣었다. 바로 그 순간 두심향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 하하하! 날 죽이고 싶은 모양이구나. 마음대로 해보거라. 관무평 그 친구를 없앴을 때처럼 날 죽여보란 말이다. 아니 한 대만 쳐보아라."

하지만 조천힌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죽거리며 두심향의 가슴을 그러쥐었다.

두심향은 손을 쓰지 못했다. 분명 그녀의 무공은 조천신보다는 강했다. 그러나 조천신은 금의위 삼사 중 한 곳인 반포사의 사주라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자, 조천신을 공격하는 순간 금향은 끝장이라는 사실을 두심향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실은 조천신도 알고 있었다.

그는 두심향의 가슴을 계속 주물럭거렸다.

" 사십이란 나이가 믿기지가 않는구나. 두심향. 관무평 그 친구가 한 말을 이제야 이해할 것 같아. 난 기분이 좋은데 넌 어떠냐?"

조천신은 두심향을 빤히 바라보며 이죽댔다.

" 이건 사내가 할 짓이 아닙니다. 사주."

두심향은 차가운 눈으로 조천신을 쏘아보며 말했다.

" 가슴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구나. 알았다. 아래가지 만져주마."

조천신은 두심향의 치마를 사정없이 당겼다.

찌익!

치마가 북 찢겨 나가고 속옷이 드러났다. 조천신은 속옷 안으로 손을 쑥 밀어 넣었다.

으드득!

두심향의 입에서 이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지금 갈등 중이었다.

조천신은 공격을 기다리고 있다. 놈은 가증스럽게도 가슴을 더듬고 아래를 더듬으면서도 내기를 끌어올려 공격에 대비하고 있다. 하지만 그냥 있자니 이보다 더한 치욕은 없을 것만 같았다.

" 하하하! 네가 사내 복이 없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구나. 원래 아래쪽이 휑한 계집은 팔자가 박복해 남편 복도 자식복도 없다고 하던데 네 년이 그쪽이구나."

말을 함과 동시에 조천신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 개자식!"

급기야 두심향은 참지 못하고 암경을 쏟아냈다.

그녀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암경은 조천신의 전신으로 소아져갔다.

퍼억!

그녀가 쏘아낸 암경은 그대로 조천신을 강타했다.

" 크아악!"

조천신은 비명을 내지르며 뒤편으로 날아갔다.

" 죽일 놈!'

두심향은 날아가는 조천신을 향해 오른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 안 됩니다. 아기씨.]

바로 그때 동각의 전음이 천둥처럼 들려왔다.

[ 할아범.]

[ 저놈은 지금 전 내공을 끌어올려 방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한 번에 죽이지 못할 거면 손을 대지 않는 게 낫습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한다고 해도 죽일 수 없습니다.]

콰앙!

동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조천신은 벽을 뚫고 옆방으로까지 날아갔다.

쿠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조천신은 거칠게 떨어졌다.

" 저 계집을 포박하라!"

포밀영의 수좌 우포 금철은 두심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 차앗!"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포밀영 한 명이 문을 부수며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 물러가라!"

포밀영이 안으로 뛰어들어오자 두심향은 가볍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사건을 키울 생각이 없었기에 그 자리에 멈추게 할 요량으로 가볍게 경력을 밀어내기만 했다.

" 크아악!"

그런데 안으로 뛰어들던 포밀영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편으로 튕겨져 나갔다.

" 이건?"

두심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된통 걸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주가 쓰러졌으면 가장 먼저 그에게 가야 하는데 다짜고짜 공격을 시도하고 있다. 게다가 살짝 쳤을 뿐인데 강력한 공격을 받은 것처럼 훨훨 날아가고 있다.

" 도, 동파가 죽었습니다!"

더 황당한 말이 포밀영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 죽일 놈!'

두심향은 고개를 돌려 옆방에 있는 조천신을 보았다.

" 북경 황실에 날 도와줄 사람은 넘친다. 오늘은 날 체포해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일이면 풀려날 거다."

[ 그거야 죄가 없을 때 이야기지. 반포사 사주의 팔을 부러뜨리고 포밀영을 죽인 계집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네 팔을 스스로 부러뜨리겠다는 말이냐?"

" 부러뜨리는 게 아니라 벌써 부러졌어. 이렇게 말이야. ]

조천신은 오른팔을 들어 보였다. 그런데 그의 팔은 힘없이 덜렁거렸다.

"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 너와 원한이 있어서가 아니다. 계집. 난 다만 네가 싫을 뿐이야.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년이 권력자처럼 행동하는 것도 싫고, 머릿속에 뭔가 든 것처럼 난 체하는 건 더욱 싫어.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아. 털 없는 계집을 좋아하는 놈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내가 널 잡아가려는 가장 큰 이유는 내 친구 관무평 때문이야. 패아지근심향 네년이 없앤 그 관무평 말이야.]

" 뭐 하고 있느냐?"

두심향에게 전음을 보낸 조천신은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포밀영들은 긴장한 얼굴로 두심향 앞으로 다가갔다.

" 옷을 다오, 만옥!"

두심향은 부서진 문 밖에 서 있는 유만옥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 어, 언니!"

유만옥은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그녀의 치마를 벗어 두심향에게 내밀었다.

" 고마워."

[ 저예요, 언니.]

이번에는 여몽의 전음이 들려왔다.

두심향은 슬쩍 포밀영들을 보았다. 하의를 벗고 있는 두 여자의 모습이 어색한 듯 함부로 달려들지 않았다. 아마도 옷을 걸칠 동안은 기다려 줄 모양이었다.

두심향은 최대한 천천히 옷을 걸치며 여몽에게 전음을 보냈다.

[ 외부 상황은 어때?]

[ 눈에 띄진 않지만 수백 명이 은신해 있어요.]

[ 작정을 하고 왔다는 말이구나.]

[ 날 잡아가두는 곳을 알아둬야 해.]

[ 금옥으로 가지 않을 거라고 보세요?]

금옥은 금의윙서 운영하는 감옥의 이름이었다.

[ 뒤탈을 없애기 위해 스스로 팔을 부러뜨린 자야. 금오긍로 데려가면 내일 당장 풀려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놈은 비밀 감옥을 준비해 두었을 거야.]

[ 알았어요. 언니. 대문을 나서자마자 미행하도록 할게요.]

[ 그래, 그리고.....]

또다시 전음을 보내려는 순간 기해혈이 뜨끔했다. 포밀영의 수좌 금철이 내공을 제압해 버린 것이었다. 그러고는 포승줄을 가져와 팔을 뒤로 돌려 포박했다.

" 물러가라!"

두심향의 포박을 끝낸 금철은 옆에 서 있는 유만옥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유만옥은 금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유만옥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하의를 벗은 채로 문 밖에 서서 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 지금 기분이 어떠냐, 두심향."

조천신은 두심향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 날 얼마나 잡아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두심향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녀는 차분한 얼굴로 조천신을 쏘아보았다.

" 글쎄, 그건 두고 봐야지. 하지만 이게 있으니까....."

조천신은 부러진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 모험을 하고 수습을 하는 건데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 모험?"

" 네 목에 바람구멍을 내는 모험 말이다."

두심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천신의 왼손이 허공을 갈랐다.

짜악!

입 안이 터진 듯 두심향의 입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 이 세상에서 제일 못난 사내가 계집을 때리는 자라는 걸 아직 모르는 모양이구나. 조천신. 그러니까 넌 혼자 사는 게야. 태생 자체가 박복한 놈은 마누라 복도 자식 복도 없어."

두심향은 조금 전 조천신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 마누라 복과 자식 복은 없어도 계집 복은 타고난 것 같구나."

조천신은 두심향의 가슴을 그러쥐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난 십오년 동안 기녀 생활을 했어. 기녀 생활 십오 년이 뭘 뜻하는지 알기나 해? 볼 것 안 볼 것 다 겪을 수 있는 세월이야. 어린애처럼 징징대는 사내자식도 겪었고, 때려줘야 흥분하는 사내자식도, 항문을 좋아하는 사내자식도, 심지어 여자를 벗겨놓고 혼자 수음하는 변태자식들까지 겪었어. 오늘 밤 수음을 하고 싶어서 내 가슴을 만지는 거라면 몰라도, 날 모욕 주기 위해서라면 잘못 생각한 거야."

두심향은 사내를 잘 알고 있었다.

전부 다는 아니지만 그녀가 겪은 많은 사내들은 여자가 수동적으로 나가면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수작을 걸지만 여자가 자기보다 경험이 많다고 생각되면 잔뜩 위축돼 어쩔 줄 몰라한다.

즉 치근덕거리는 남자를 퇴치하기 위해서는 정중한 부탁이 아니라, 적극성을 보이면서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치근덕대는 남자들뿐만이 아니라 여자를 무시하는 자들을 다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한 말에 한 마디만 더 추가하면 백이면 백 손을 들고 물러나고 만다.

" 조천신, 내가 수음하는 걸 도와줄 수도 있어."

" 호송해!"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조천신은 두심향의 가슴에서 손을 떼고는 고함을 내질렀다.

" 데려가라!"

금철의 명령이 떨어지자 포밀영 두 명이 나서더니 커다란 자루를 두심향에게 씌웠다. 그러고는 자루 끝을 묶은 다음 한 명이 어깨에 걸머졌다.

" 출발한다!"

금철의 입에서 나직한 외침이 흘러나오고 두심향을 둘러멘 자가 창문을 통해 몸을 날렸다.

' 설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몽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그녀는 급하게 포밀영을 쫓아 몸을 날렸다.

두심향을 둘러멘 포밀영은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십여 장을 달렸을까, 갑자기 사내 주변으로 다른 포밀영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 맙소사!"

여몽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자루를 걸머진 포밀영들이 열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 무향! 천향! 지향! 인향! 야향!]

여몽은 몸을 날려가면서 다섯 대주에게 전음을 보냈다.

[ 말씀하세요, 향주.]

다섯 곳에서 거의 동시에 각 대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향 너는 저기 가는 두 명을 맡아.]

여몽은 각 대주에게 두 명씩 할당해 주었다.

[ 절대 놓치면 안돼!]

[ 알았어요.]

각 대주들은 각자가 맡은 자를 쫓아 몸을 날렸다.

어느새 포밀영 일행은 금향의 정원을 가로질러 정문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여몽은 고개를 갸웃했다.

열 개의 자루를 준비했다는 건 사방으로 흩어지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루를 걸머진 열 명은 줄을 맞춰 달려가고 있다. 지금 모습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불안해졌다.

" 문을 열어라!"

" 문을 열어라!"

우렁찬 외침과 함께 금향 대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대문사이로 포밀영들은 빠르게 달려나갔다.

사향 무인들은 빠르게 몸을 날려 그들을 쫓았다.

" 헉!"

여몽의 입에서 재차 신음이 흘러나왔다.

대문 밖으로 나오자 자루를 걸머진 자들의 수가 또다시 두 배로 늘어난 것이었다. 외부에 대기하고 있던 반포사 대원들인 모양이었다. 이젠 정말로 어느 자루에 두심향이 들어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 전부 다 쫓아! 무슨 말인지 알겠지?"

여몽은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 알았어요."

사향들은 일제히 소리치며 금의위 위사들을 쫓았다.

금향 앞 대로를 빠져나간 금의위 위사들은 빠르게 내달리더니 대로 끝에 있는 거대한 저택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있는 저택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반포사 대원들이 들어간 저택도 외부에서는 안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담이 높았다.

게다가 반포사 대원들을 쫓아 담을 넘으려고 하자 암경이 밀려와 사향들의 진입을 막았다.

" 빌어먹을!"

여몽은 욕설을 내뱉었다.

담 위쪽에는 반포사 대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은미랗게 움직인다고 해도 저들을 뚫고 들어가는 건 무리일 듯했다.

" 언니!"

" 언니!"

다섯 대주들이 여몽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잠시 그녀들을 바라보던 여몽은 등에 메고 있던 기다란 물체를 풀어내렸다. 겉에 싸고 있는 가죽자루를 벗겨내자 칠현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별호이자 사향의 향주 신물인 사향마금이었다.

여몽은 건물을 노려보았다.

" 지금부터 우린 사향이 아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 알았어요, 언니."

대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 시작하자!"

여몽은 그 자리에 가부좌를 했다.

그런 다음 사향마금을 무릎 위에 올리고 연주를 시작했다.

띠리링! 띵! 띠리링! 띵!

그녀의 양손 손가락이 빠르게 사향마금 위를 누볐다. 처음엔 일상적인 음악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반각 가량 지나고, 건물 전체가 사향마금에서 흘러나온 음악으로 들어차자 점차 사향마금의 위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구르릉! 쿠릉!

사향마금에서 새하얀 광채가 쏘아져 나가기 시작하면서 지진이 난 것처럼 건물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향마금으로 펼치는 구천신마조화곡이었다.

콰앙!

급기야 구천신마조화곡의 힘을 견디지 못한 대문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 킬킬킬!"

대문이 부서지는 폭음을 들은 조천신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어렸다.

그는 한편 구석으로 시선으로 주었다. 그곳에는 커다란 자루가 놓여 있었다. 다름 아닌 두심향이 들어 있는 자루였다.

" 들었느냐, 두심향. 방금 그 소리는 사향의 향주 여몽이 금의위 안가의 대문을 부수는 소리쳤다. 아니 정확하게는 너희 금향의 주춧돌이 빠지는 소리겠지. 이제 남은 건 금향이 무너지는 것밖에 없다. 계집."

조천신은 창가에 놓인 의자로 가 앉았다.  정도까지 와 있습니까?”

' 공격해서는 안 돼. 여몽! 이건 우리를 잡으려는 함정이다. 물러나라!'

자루 안에 있는 두심향은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마혈에 이어 아혈까지 점혈된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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