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알고 있는 걸 전부 쓰면 돼.
" 이 자식은 도대체."
유설연은 들고 있던 서류 더미를 홱 내던졌다.
연우강이 북경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지 사흘이 지났다. 이제나저제나 녀석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수천 명이나 깔려 있는 동창 정보원의 눈에도 걸려들지 않았다.
" 하여간!"
유설연은 물 속으로 머리를 푹 담갔다.
" 언니!"
바로 그때 욕실 문이 열리며 우성연이 들어왔다.
" 그놈의 성질 좀 죽이세요, 제발."
문 근처에 흩어져 있는 종이를 쓸어모으며 투덜댔다.
" 찾았어?"
유설연은 우성연을 보며 물었다.
" 금의위가 못 찾는 걸 무슨 수로 우리가 찾아내요?"
우성연은 문을 열고 정리한 종이를 밖으로 내놓았다.
" 보고할 게 있어서 들어온 거 아냐?"
" 조천신이 두심향을 잡아간 이유를 알아냈어요."
" 이유가 뭐래?"
" 잠깐만요."
우성연은 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 요즘 잘 먹는 게 뭐야?"
유설연은 우성연의 가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우성연의 가슴과 엉덩이가 전에 비해 커진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몸에서 자르르 윤기마저 흐르고 있다.
" 대식국에서 가져온 석류를 줄기차게 먹고 마시고 바르고 있어요."
" 어때, 괜찮아?"
" 여자 피부엔 석류가 이거에요."
우성연은 최고라는 뜻으로 세운 엄지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었다.
" 콩이나 칡즙보다 더 나아?"
" 제 몸매를 보면 알잖아요. 가슴이 한 치가량 늘어났고, 엉덩이는 두 치가 늘어났어요. 지금과 같은 속도로 나가면 머잖아 봉연을 따라잡을 거예요."
우성연은 양손으로 가슴을 받쳐 들며 말했다.
" 그랬단 말이지. 좋아. 하북에 들어와 있는 석류를 전부 사들여."
" 언니도 하게요?"
" 좋은 건 나눠야지, 이것아."
" 흥! 시험해 본 거면서."
우성연은 유설연을 흘겼다.
우성연이 석류의 효과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우연히 대식국에서 온 상인을 만났는데 그 상인 또한 우성연처럼 겉은 남자인데 속은 여자였다. 그가 추천한 과일이 바로 석류였다. 그날부터 우성연은 석류를 사들여 즙을 내서 꿀에 섞어 마시고 몸에 발랐던 것이다.
물론 그 사실은 유설연도 잘 알고 있었다.
" 잘됐으니 됐잖아. 그보다 조금 전에 했던 말은 뭐야?"
" 두심향에 대한 이야기요?"
" 응!"
유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두심향의 본명이 패아지근심향이라고 하네요."
" 패아지근?"
유설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패아지근은 원나라 황족의 성이었던 것이다.
" 네."
우성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누구의 후손이지?"
" 그것까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어요."
우성연은 고개를 저었다.
" 너도 몰라?"
유설연의 시선이 이번에는 허공으로 향했다.
" 정확하진 않고 토곤 테무르의 후손이라는 말이 있었어요."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혈루향 봉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 들어와!"
유설연은 손가락을 물속을 가리켰다.
" 저도 들어가요?"
봉연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 여자끼린 데 어때."
" 전 겉모습만 여자일 뿐이에요. 속은 완전히 남자라고요."
" 넌 사내 수십 명을 잡아먹을 가슴을 지녔어. 이것아. 헛소리 말고 들어와! 그리고 며칠 전에는 사내하고 잤다며?"
" 그거야 임무를 위해서 잔 거죠. 그리고 몸 구조상 사내하고 잘 수밖에 없잖아요."
봉연은 입을 삐죽 내밀고는 옷을 벗었다.
" 아무튼 세상은 불공평해"
유설연은 봉연의 가슴을 바라보며 투덜댔다.
옷 속에 감춰진 봉연의 몸매는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대단했다. 피부는 우유처럼 희고 투명하며, 저렇게 큰 게 어떻게 형태가 흐트러지지 않고 매달려 있는지 의아할 정도로 가슴은 풍만하다. 허리는 개미허리처럼 가늘고 엉덩이는 보름달을 머금은 듯하다. 게다가 중키임에도 불구하고 다리는 상체에 비해 훨씬 길어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저런 미친 몸매를 가진 봉연이 남자보다 여자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이 불가사의였다.
유설연은 시선을 돌려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절로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봉연의 가슴이 성숙한 여자의 가슴이라면 자신의 가슴은 이제 막 소녀 티를 벗은 여자의 가슴이었다.
" 니미럴! 이걸 언제 저렇게 키우냐."
유설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난 소제독의 몸매가 더 부러워요."
봉연은 정말로 부러운 눈으로 유설연의 가슴을 보았다.
" 부럽기는 개뿔이."
" 정말이에요, 소제독."
" 그럼 바꿀래?"
" 바꿀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바꿀게요."
봉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됐어. 이것아. 알아낸 거나 말해 봐."
" 토곤 테무르의 후손일지도 모른다는 말이요?"
" 응!"
" 그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봉연은 욕조 안으로 들어가며 입을 열었다.
" 십 년 전?"
" 두심향이 혼인을 결심했을 때에요. 상대는 관무평이라는 자였어요."
" 그런데?"
" 그런데 그 관무평이라는 자가 금의위 위사였던 거예요."
" 금의위에서 미남계를 쓴 거야?"
" 네."
"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 관무평이라는 자는 실종되고, 두심향은 계속 혼자 살게 됐죠."
" 아무런 이유도 없이 관무평이 실종됐다는 거야?"
" 그럼?"
" 두심향이 관무평의 정체를 알아차렸어요."
" 그럼 두심향에게 죽임을 당한 거야?"
"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은데 관무평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서 실종이라고 한 거예요."
" 혹시 두심향에게 관무평의 정체를 알려준 측이 동창이야?"
유설연은 모호한 눈빙으로 봉연을 보았다.
두심향이 관무평의 정체를 알아낸 이면에는 동창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동창이 아니라 저였어요."
" 너라고?"
유설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창이 아니라 그녀였다는 말은 임무가 아니라 사적인 일이라는 의미였다.
" 네."
봉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왜 금의위 일에 재를 뿌린 거지?"
" 그건......"
봉연은 말끝을 흐렸다.
" 혹시 너?"
유설연은 봉연을 가만히 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 두심향을 좋아했던 거구나?"
" 그때.... 어렸으니까요."
봉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금향의 사향 향주로 있는 여몽은 함께 동창으로 들어왔던 동기였고 가장 친했다. 훈련을 끝내고 발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섭섭했지만 워낙 임무가 많아 그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여몽을 다시 만난 장소는 북경이었다.
그날 그녀가 동창을 나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됐다. 원나라 공신의 후예라는 신분 때문에 동창 무인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두심향이란 사람을 만나 금향에 정착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며칠 후 두심향이란 여자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그런데 인사를 한 장소가 바로 욕실이었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숨이 가빠지곤 한다.
동창에서 훈련을 받을 때는 물론이고 발령을 받고 난 다음에도 많은 여자들과 함께 목욕을 했다. 그런데 두심향의 알몸을 보는 순간, 머리솟이 아득해지며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놀랍게도 여자를 보고 흥분해 버린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두심향의 몸매가 대단해서 그렇게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알몸이 떠오르고 어느 순간 그녀와 관계를 갖는 상상을 하며 수음을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아도 그녀 얼굴이 떠오르고, 잠을 자면 꿈속에서 그녀와 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자신이 여성 취향이란 사실을 깨닫게 됐다.
" 오호호! 아무튼 네가 질투를 하는 바람에 금의위는 작전에 실패한 셈이 되고 말았구나."
" 그런 셈이죠."
그녀를 생각하자 또다시 숨이 가빠지는 것 같아 봉연은 얼른 심호흡을 했다.
" 토곤 테무르의 후손이라......"
그런 봉연을 가만히 바라보며 유설연은 중얼거렸다.
" 조천신이 그녀가 토곤 테무르의 후손이란 사실을 알고 잡아갔다고 보는 거예요?"
옆에 있던 우성연이 물었다.
" 그녀가 진짜 토곤 테무르의 후예라면."
" 원나라는 이미 잊힌 제국이에요. 언니. 설사 토곤 테무르 본인이 살아서 돌아온다고 해도 황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예요."
" 물론 토곤 테무르가 돌아온다고 해도 코웃음을 칠 거야. 하지만 그가 가져간 물건을 보면 코웃음을 치지 못해."
" 어떤 물건을 가져갔는데요?"
" 전국옥새."
" 전국옥새가 뭐죠?"
우성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 몰라?"
" 알아야 하는 거예요?"
" 너도 모르는 게 있다는 게 신기해서 그래."
" 전 역사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어요. 언니."
" 그럼 중원을 처음으로 통일했던 황제가 누군지도 모르겠네."
"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 넌 다른 면에서는 천재라고 불러도 되는데 역사는 영 아니더라."
유설연은 웃으며 말했다.
사실 우성연은 한 번 들은 말은 결코 잊지 않을 정도로 좋은 머리를 타고났다. 하지만 그건 그가 관심을 갖는 것들에 한해서다. 관심이 없는 분야는 수십 번을 말해 주어도 곧바로 잊어버린다. 천부적인 기억력과 천부적인 건망증을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우성연이었다.
"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가급적이면 알려고 하지 않거든요."
" 왜?"
" 머리 아프잖아요."
" 간단해서 좋다."
" 얼른 설명해 주세요."
" 그래봐야 금세 잊어버릴 거잖아."
" 그래도 일단 말해 주세요."
" 알았어. 전국옥새는 최초로 중원을 통일하고 제국을 연 진시황제가 만든 도장을 말해."
" 천몇 백 년 전에 만들어진 도장이란 말이죠?"
" 그런 셈이야. 하지만 전국옥새가 가진 상징성은 엄청나."
" 어떻게 엄청난데요?"
" 전국옥새에는 수명어천 기수영창이란 글이 쓰여 있어."
"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아, 장수를 누리고 영원히 번창하리라'라는 뜻이네요?"
" 맞아. 그래서 전국옥새를 얻는다는 건 곧 천명을 받았다는 것을 뜻했어. 그래서 삼국시대 때는 수많은 영웅들이 그 전국옥새를 얻기 위해 투쟁하곤 했지."
" 쉽게 말하면 전국옥새의 주인이란 것은 천하를 도모하는 명분이 된다는 뜻이네?"
" 맞아. 삼국시대 때에는 전국옥새를 가진 자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기도 했어."
" 그 옥새를 두심향이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 토곤 테무르가 가지고 도망쳤으니까."
" 그럼 금의위에서는 전국옥새를 노리고 두심향에게 미남계를 썼던 걸까요?"
" 그랬더라면 관무평이 죽고 나서도 계속 작업을 했겠지. 그들은 전국옥새에 대해서는 모른 채 두심향의 정체만 캐려고 했을 거야."
" 하지만 조천신은 전국옥새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거군요."
" 그럴 가능성이 높아."
유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조사를 해봐야 하겠지만 전국옥새 때문이라는 건 대충 맞을 듯했다.
" 슬쩍 흘려볼까요?"
우성연의 말에 유설연은 고개를 저었다.
" 아냐, 그럴 필요는 없어 두심향이 전국옥새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북경은 난리가 날 거야. 금의위에서 밝히면 모를까 우리가 먼저 발설할 필요는 없어."
" 그런데 금향은 상당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우성연은 고개를 돌려 봉연을 보았다.
" 총루주인 두심향과 그녀가 할아범이라고 부르는 동각은 초특급 고수에요."
" 그 두 사람이 힘을 합쳐도 연 공자의 상대가 안 될까요?"
이번에는 유설연을 보았다.
" 그 둘에 사향 전부를 합쳐도 우강에게는 안 돼."
" 하지만 사향은 다친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어요. 언니. 그 말은 곧 연 공자와 싸우지 않는다는 말이라고요."
" 그들이 다치지 않은 이유는 봉연에게 물어봐야지. 내게 물으면 어떡해?"
유설연은 봉연을 보았다. 그녀가 사향의 향주 여몽과 친구라는 사실을 알기에 하는 말이었다.
" 암향은 연 공자에게 당했나 봐요."
" 그럼 처음엔 우강을 잡으려 했다는 거네?"
" 그런 셈이에요."
" 바보 같은 짓을 했네."
" 연 공자의 실력을 정확하게 몰랐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하지만 두심향 루주는 연 공자와 싸우다가는 금향이 멸문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나봐요. 연 공자를 금향각 지하에 있는 그녀의 비밀 공간으로 유인해 갔대요."
" 그런 곳도 있어?"
" 여몽의 말로는 지하에 있는 두심향의 거처는 그녀가 아니면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이라고 하던데요?"
" 그 다음엔 어떻게 됐는데?"
" 그걸로 끝이에요."
"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이상 연 공자와 두심향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 그래서 이게 있는 거야."
유설연은 제 머리를 툭 쳤다.
" 짐작할 수 있을 거라는 거예요?"
" 물론이지."
" 어떤 짐작인데요?"
" 일단 정리부터 해보자. 두심향의 몸매는 어때?"
" 아직도 옛날 몸매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요. 물론 제가 푹 빠졌을 때보다는 더 농염해졌지만, 아직 이십대 아이들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라고 해요."
" 그러면 그녀는 무공으로 연우강을 이길 수 있을까?"
" 그건 연 공자를 상대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 나도 그의 십 초 상대가 안 돼, 봉연."
" 그렇게 강해요?"
연우강이 강하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하지만 앞에 있는 유설연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강자다. 그런데 그가 십 초를 버티지 못한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 그 녀석은 강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인이야."
" 하지만 무공이 강하다고 전부 승리하는 건 아니에요. 소제독, 전 무공 말고도 상대를 없앨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을 배웠어요."
" 그걸로 우강을 잡아보겠다고?"
유설연은 봉연의 가슴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실 봉연의 가슴은 사내를 홀릴 정도로 대단하긴 했다.
" 못할 것도 없죠."
" 좋아, 그럼 내기를 하자."
" 무슨 내기요?"
봉연의 얼굴에 잔뜩 기대감이 어렸다.
" 네가 단 한 번이라도 우강을 제압하면 소원 한 가지 들어줄게."
" 제가 원하는 건 어떤 거라도 전부 들어준다는 거예요?"
" 내 목을 달라는 것만 아니면."
" 호호호! 약속했어요?"
봉연은 웃음을 터트렸다.
" 네가 배운 모든 것을 이용해서 그를 유혹해봐."
유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데 두심향이 연 공자가 턱도 없이 강하다는 걸 몰랐을까요?"
봉연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 암향 고수들이 당하는 걸 봤을 테고, 두심향도 초특급 고수니까 정면 대결로는 연우강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거야."
" 무공이 아니라면 이걸 이용했다는 거군요?"
봉연은 제 가슴을 가리켰다.
조금전 두심향의 몸매를 물었던 유설연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은 결국 두심향이 연우강을 몸으로 유혹하여 위기를 벗어났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 이 세상에 가장 묘한 관계가 뭔지 알아?"
" 남녀관계라고요?"
" 아니야."
유설연은 고개를 저었다.
" 그럼?"
" 며느리와 시어머니 관게가 일등이고, 그 다음이 남녀관계야."
" 풋!"
봉연은 맑게 웃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라고 말하는 유설연의 말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남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웃을 일이 아냐, 이것아."
" 좋아요. 나도 그건 인정해요. 문제는 두심향이 발가벗고 유혹을 했을 때 연 공자가 넘어가느냐 하는 거예요."
" 넘어갔다면 너도 발가벗고 유혹해 보려고?"
" 못 할 것도 없죠. 두심향의 몸매가 대단하긴 하지만 저 또한 만만치 않거든요."
봉연은 가슴을 불쑥 내밀었다.
" 커서 좋겠다. 이년아."
" 그리고 전 두심향보다 젊구요."
" 두심향은 마흔한 살이고, 넌 서른다섯 살이지."
" 여섯 살이면 엄청난 차입니다."
" 여섯 살이 엄청난 차이가 나는 건 스무 살 이전에 해당하는 거야. 서른이 넘어가면 여섯 살 차이는 친구 먹어도 돼."
" 그건 소제독 생각이고요. 아무튼 발가벗고 유혹하면 연 공자가 넘어갈 거라고 보세요?"
" 당연히 넘어가지 않지."
" 그럼 어떻게 유혹하죠?"
" 약을 복용하고 유혹해야지."
" 약이라고요?"
봉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 남자를 유혹하는 가장 좋은 약은 춘약이야."
" 그러니까 두심향이 춘약을 복용하고 연 공자를 유혹했을 거라는 거예요?"
" 일견 잔인해 보이지만 우강이 그 녀석은 마음이 아주 여린 녀석이거든."
" 연 공자가 유혹에 넘어갔다는 말씀인가요?"
" 여자가 그렇게 나오면 남자는 백이면 백 넘어가게 돼 있어."
" 좋아요. 연 공자가 두심향의 유혹에 넘어갔다고 하자고요. 그럼 두심향은 연 공자를 제압했다는 말이 되잖아요. 그런데 연 공자는 얼마 후에 양성일 동지 집에 나타났어요. 그건 어떻게 설명하죠?"
" 포로로 잡은 녀석을 살려줄 만큼 그녀석의 밤일이 절륜하다는 뜻이겠지."
" 두심향은 기루의 경영을 배우기 위해 스스로 기녀가 됐던 사람이에요. 밤일을 아무리 잘해도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없어요."
" 너도 참 순진하다. 농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어쩌자는 거야?"
" 그럼 그들 두 사람은 어떻게 된 거죠?"
" 우강이 녀석이 두심향을 살려준 거지. 뭐가 어떻게 돼."
"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 넌 뇌가 없는 거니. 아니면 생각을 안 하는 거니?"
" 소제독!"
봉연은 유설연을 흘겨보며 꽥 소리쳤다.
" 암향에서 금향각까지는 오십 장이 넘어, 이것아. 아무리 머리가 나쁘다고 해도 그 정도 거리라면 자기가 유인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잖아."
" 그럼, 연 공자는 유인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금향각 지하로 갔다는 건가요?"
" 당연히 그렇지."
" 그러면 두 사람은?"
" 잤다니까 그러네. 나중에 여몽 그 계집 만나면 물어봐. 연우강이 떠난 다음 날 두심향의 얼굴이 어땠는지. 아마 뽀얗게 윤기가 흐르고 입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할 거야."
" 그렇다고 해도,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
" 춘약에 중독되면 나이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아. 그리고 두심향의 몸매가 이십대보다 낫다고 한 사람은 너잖아. 그런데...."
유설연은 봉연을 빤히 보았다.
" 왜요?"
" 두심향이 우강이 녀석과 잤다는 말을 듣고도 질투 안해?"
" 질투는 무슨. 다 지난 일인데."
"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보다 잠룡대 대원들의 가족 건은 어떻게 돼가고 있지?"
" 반포사에세 우리 작전을 눈치챈 모양이에요. 북경으로 돌아오지 않고 하남성에 있는 금옥에 수감시키고 있어요."
" 조천신 ㄱ,놈이 생각보다 약은 모양이구나."
" 그런 것 같아요."
" 다른 건 몰라도 그들이 수감돼 있는 금옥의 위치는 정확하게 파악해 둬."
유설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벌써 다 씻은 거예요?"
우성연이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 황제를 때리느라 피곤해서 더 이상은 못하겠어."
" 때려요?"
우성연은 황당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 요즘 맞는 쪽에 눈을 뜬 모양이야. 그 인간 가죽 냄새만 맡아도 짐승으로 변해."
" 언니를 때리진 않아요?"
" 다행히 때리는 쪽은 개발하지 못한 모양이야. 아무튼 좀 잘 테니까 우강이 소식 들어오면 바로 깨워."
유설연은 천으로 몸을 감싸고는 밖으로 나갔다.
" 알았어요."
유설연이 나가자 우성연은 다시 욕조 안으로 몸을 담갔다.
" 힘드신가 봐요."
봉연은 물속 깊이 몸을 담갔다.
" 요즘은 덜하지만 처음엔 많이 토했어요."
" 토해요?"
" 설연 언니는 봉 원주나 나처럼 동성을 좋아하는 취향이 아니었어요."
" 그럼?"
" 양물을 자르고 나서 피부가 부드러워지고 가슴이 나오고 엉덩이가 커지면서 겉모습이 여성으로 바뀌었을 뿐이에요. 이 속은 아직....."
우성연이 머리를 가리켰다.
" 난 여자야, 성연."
바로 그때 안쪽에서 유설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맞아요. 언니. 우린 여자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임인 여자 말이에요."
우성연은 한숨 쉬듯 말하고는 물속으로 머리를 담갔다.
봉연은 멍한 얼굴로 문밖을 보았다.
지금까지 유설연이 겉만 남자일 뿐 속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의 행동을 보면 여자인 자신보다 더 여자답다. 그런데 그 행동은 머릿속이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노력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 당신도 치열하게 사는군요.'
봉연은 내심 중얼거렸다. 봉연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 가려고요?"
우성연은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 연 공자를 찾아봐야지요."
" 객잔을 위주로 뒤져보세요."
" 금의위에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찾고 있는데 객잔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 금밀사 밀사 중 객잔 주인으로 위장하고 있는 자들이 몇 명이나 되죠?"
"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건 총 다섯 명이에요."
" 우리가 파악한 건 금향도 파악하고 있겠죠?"
" 아마도."
" 그럼 그들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연 공자를 찾아보세요."
" 그렇군요."
봉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성연이 똑똑하다는 말을 많이 듣기는 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인지 알지를 못했는데 오늘에서야 알 수 있었다. 우성연은 연우강과 두심향이 잤을 지도 모른다는 유설연의 말만으로 지금 있는 곳을 대충 파악해 낸 것이다.
" 갈게요."
옷을 입은 봉연의 신형이 허공으로 녹아들어 갔다.
" 아무튼 오랜만에 심심하지 않겠어."
우성연은 싱긋 웃으며 몸을 일으켜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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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밀사의 조직은 네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동서남북 각 방향을 담당하는 당주가 있고, 당주 아래로는 세 명의 상주와 여섯 명의 중주 그리고 열두 명의 하주기 있다.
최말단인 하주는 오십 명의 밀사를 거느리기 때문에 한 명의 당주가 거느린 밀사의 수는 육백 명가량이다.
장문지는 금밀사 중 남쪽을 맡고 있는 제일당주 소속 제일 상주로, 임무를 수행할 때 그의 신분은 금환객잔의 주인이다.
작고 길게 찢어진 눈 때문에 사안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장문지의 눈이 감고 있는지 뜨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가늘어졌다. 그가 이런 눈을 할 때는 뭔가를 결정 내리기 위해 심사숙고할 때였다.
장문지의 고민은 이틀 전에 시작됐다.
술시쯤 됐을 때였다.
문이 열리고 궤짝을 걸머진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연우강이 검은 궤짝을 메고 있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궤짝을 걸머진 자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눈이가곤 했다.
그 사내도 그랬다.
그런데 얼굴이 연우강과는 완전히 달랐다.
연우강은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라고 했는데 들어온 자는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래서 관심을 끊었다.
그랬다가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틀 전이다.
사내는 서역에 다녀온 상인이라고 하였고, 북경에 온 건 처음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북경 음식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객잔 주인인 자신조차 모르는 것들을 말하기도 했다. 그러한 것들은 누군가로부터 듣거나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최소한 수년 동안 북경에 머물러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어쩌면 그것뿐이라면 이렇게 고민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백번 양보해서 친척 중 누군가가 북경에서 주방장을 했다면 알 수 있는 내용들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식당의 한편에는 서역에서 만들어진 유리 등잔이 놓여 있다. 그 등잔은 워낙 유명하여 서역을 오가는 상인들은 대부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만 수입해 오는 자들까지 있을 정도다. 그런데 자신을 금벌이라고 소개한 상인은 저런 등잔은 처음 본다면서, 어디서 난 건지 물어왔던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짜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때부터 놈의 행동을 세심하게 살폈다.
하지만 그것 외에 특별한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 일강!]
장문지는 식당 구석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보며 전음을 보냈다.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세 사람은 상주인 장문지를 호위하는 호위무사였다.
[ 말씀하십시오. 상주]
세 명 중 가운데 있던 사내가 술을 마시는 척하면서 전음으로 대답했다. 그는 호위무사의 수장인 하강일이라는 자였다.
[ 삼층에 손님이 몇 명 있느냐?]
[ 열 명이 머물고 있습니다.]
[ 무인으로 보이는 자는?]
[ 동창 밀정으로 보이는 자가 투숙해 있습니다.]
[ 그럼 삼층은 시끄럽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
[ 그렇습니다. 상주. 그런데........]
[ 그놈을 조사해 봐야겠다.]
[ 금벌이라는 자 말입니까?]
장문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연우강이 아니라고 해도 이대로 넘어가면 뒤를 닦지 않고 바지를 입은 것처럼 찜찜할 것 같았다.
[지하시롤 데려와라.]
[ 알겠습니다. 상주.]
하일강은 동료들에게 눈짓으로 지시를 내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잘 마셨습니다. 주인장."
하강일은 자연스럽게 계산대로 와서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객잔 밖으로 나간 세 사람은 곧바로 뒤로 돌아갔다. 객잔 후미에는 이층과 삼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 있었다. 원래는 급한 일이 생겼을 때 탈출하는 비상구로 만든 계단이었지만 지금은 폐쇄된 상태였다.
세 사람은 조용히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금벌이라는 자의 방은 삼층 첫 번째 방이었다.
하일강은 내공을 끌어올려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깊게 잠이 든 듯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시선을 돌려 금벌의 방 창문을 보았다.
' 영약을 처먹은 모양이네.'
하일강은 피식 웃었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 문을 열어놓고 잘 수가 없다. 그런데 녀석은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로 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다.
하일강은 창틀로 올라섰다.
푸우우!
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맺혔다.
창문을 열어놓은 것뿐만이 아니었다. 녀석은 불까지 켜놓은 채로 대자로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바로 옆에 술병이 뒹구는 걸 보면 취해 잠이 든 듯했다.
' 아니네.'
하일강은 연우강이 아니라고 단정을 지었다.
만일 놈이 연우강이라면 저렇듯 풀어진 모습으로 잠을 잘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얼굴이 가려운 듯 긁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그래도 명령을 받았으니까.'
하일강은 마혈과 수혈을 동시에 점혈했다. 얼굴을 긁는 모습 그대로 사내의 동작이 멈췄다. 잠시 안쪽 상황을 살핀 하일강은 두 사람에게 안으로 들어가라는 신호를 했다.
하일강을 따라온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은 금벌을 업고 밖으로 나왔다. 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계단을 타고 내려간 세 사람은, 계단 아래쪽 건물과 붙은 부분을 살짝 밀었다.
그곳에도 문이 있었던 듯,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그들을 맞았다. 먼저 두 사람이 내려가고, 하일강은 잠시 주변을 살피다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계단 끝에도 있었다.
이미 불이 켜진 듯 문틈으로 희미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계단 아래쪽에 도착한 일행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장문지가 나타났다.
" 반항은 없었느냐?"
장문지는 강학두 등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져갔다.
안쪽으로 걸어간 강학두는 업고 있던 사내를 거칠게 내동댕이쳤다.
" 아이고!"
바닥으로 떨어지자마자 사내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 헉!"
강학두를 비롯한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특히 지풍을 쏘아 사내의 마혈과 수혈을 제압했던 하일강은 더욱 놀랐다. 분명 지풍이 사내의 혈도에 격중하는 걸 보았다.
아니 사내는 손으로 얼굴을 긁는 동작 그대로 굳었다. 그런데 이곳에 내려놓자 비명을 질렀을 뿐 아니라, 바닥에 부딪친 곳을 쓰다듬기까지 하고 있다. 창고로 이어져 있습니다."
" 어떻게 된 거냐, 일강."
장문지가 하일강을 보며 물었다.
" 비명을 지른 사람은 난데 그 녀석에게 물으면 어떡해?"
바닥에 부딪친 부분을 슬슬 문지르고 있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뱉었다.
" 넌?"
장문지는 사내를 보았다.
" 맞아."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 뭐가....... 맞다는 거지?"
" 장문지, 네가 생각하는 게 맞다는 말이야."
" 내 이름을 어떻게.... 설마 연우강이란 말이냐?"
" 그걸 확인하려고 날 납치한 거 아니었어?"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장문지를 보았다.
" 빌어먹을!"
말보다 행동이 더 빨랐다. 장문지는 전 내공을 끌어올려 연우강을 향해 지풍을 쏘았다. 마혈을 점혈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장문지의 손끝에서 쏘아져 나간 지풍이 연우강의 마혈에 격중했다.
" 이럴 수가?"
장문지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빈 공간을 향해 지풍을 쏜 것처럼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 금의위 수뇌 중에 친척이 있지?"
연우강은 장문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 그걸 어떻게......?"
장문지는 깜짝 놀랐다.
" 너처럼 머리 나쁜 사람은 든든한 배경이 있지 않고는 상주가 될 수 없거든. 저쪽으로 앉아줄래?"
연우강은 안쪽의 의자를 가리켰다.
장문지는 연우강 뒤에 서 있는 하일강 일행을 보았다.
연우강과 하일강 일행 사이의 거리는 반 장. 일격필살의 공격을 감행하면 피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물론 그 공격으로 연우강을 죽일 수는 없다. 하지만 하일강 일행이 공격을 시작하면 연우강은 방어를 할 수밖에 없고, 비록 그 시간이 짧다고 하지만 자신은 자리를 피할 기회를 얻게 된다.
장문지는 눈빛으로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하일강은 고개를 저었다.
하일강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객잔의 방에서 연우강에게 지풍을 쏘아 수혈과 마혈을 눌렀고, 이곳에서는 상주 장문지가 지풍을 쏘았다. 그런데 연우강을 제압하지 못했다. 자살을 하고 싶다면 모를까 지풍도 먹히지 않는 그런 자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하일강은 좌우측에 서 있는 강학두와 나두곤을 툭 치며 안쪽 의자로 걸음을 옮겼다.
" 난 죽기 싫소. 상주."
장문지 곁을 지나쳐가면 하일강이 말했다.
" 넌 내 명령을 거부했다, 하일강."
장문지는 하일강을
작전을 하달받은 쏘아보며 소리쳤다. " 그만 하고 장문지 너도 가서 앉아, 인마."
연우강은 가볍게 장문지를 향해 암경을 밀어냈다.
암경에 밀린 장문지는 의자 앞까지 밀려갔다.
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 연우강은 의자 하나를 끌어다가 등받이 쪽을 앞쪽으로 돌려놓고 앉았다.
" 지필묵이 필요한데, 있어?"
연우강은 방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 탁자 안 서랍에 있소이다."
하일강이 대답했다.
상부로 보내는 문서를 작성하는 장소가 이곳 지하이기 때문에 지필묵은 항상 준비돼 있었따.
" 그럼 꺼내지 않고 뭐 하고 있어."
" 알았소."
하일강은 서랍을 열고 지필묵을 꺼냈다.
" 너희 셋은 다섯 장씩 갖고 나머지는 장문지 줘."
하일강은 연우강이 시키는 대로 했다.
종이와 붓을 받은 네 사람은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 뭐 하고 있어?"
" 뭘 쓰란 말이오?"
장문지는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아는 걸 전부 써. 시간은 내일 저녁까지야. 그 안에 그걸 다 채우지 못하면......"
연우강은 손으로 잡고 있던 의자 등받이로 시선을 주었다.
푸스스!
그러자 그가 잡고 있던 부분이 가루로 흩어져 내렸다.
네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그들의 귓전으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 왼손잡이면서 도를 사용하는 놈이 양성일 장군과 그의 가족에게 그랬던 것처럼 너희들도 그렇게 만들 거야. 물론 너희들 가족들도 포함될 테고."
네 사람은 급하게 글을 써 내려갔다.
" 참! 장문지!"
" 네!"
" 금의위에 왼손잡이면서 도를 사용하는 놈 있어?"
" 그, 그건......"
장문지는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왼손잡이면서 도를 사용하는 사람.
그는 다름 아닌 척살사 사주 육양이었던 것이다.
" 아냐, 됐어. 하나도 남기지 말고 전부 적어. 금의위 세부조직도부터 시작해서, 수뇌들의 이름과 가족 관계 그리고 재산 정도까지. 그동안 장문지 네가 작성한 비밀 장부를 참고해도 좋아. 단 한가지만 명심하면 돼.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손톱만큼이라도 달라도 너희들과 너희들 가족은 전부 내 손에 죽게 된다는 사실."
" 아, 알았소이다."
장문지는 탁자 맨 아래쪽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그러고는 두툼한 장부를 꺼내 탁자 위로 올렸다. 그것은 그동안 장문지가 출세를 위해 작성해 놓은 것들이었다.
" 종이가 부족하면 더 가져다 써도 돼."
연우강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연우강을 바라보던 장문지는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연우강은 분명 웃고 있었다. 하지만 좌우로 길게 늘어나 있는 건 입술뿐이었다. 그의 눈은 만년설의 가장 깊은 곳에서만 자란다는 빙정보다 더 차가운 한기를 흘리고 있었다.
장문지의 동작이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