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개자식들!
화우봉, 화선봉, 화운봉의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묘봉산은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었다. 하지만 산 곳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날카로운 창처럼 매서웠다.
“ 으이그!”
봉여은 양팔로 가슴을 감싸 안으며 연우강을 노려보았다.
산으로 들어온 뒤로 연우강은 서쪽의 화운봉부터 동쪽의 화우봉까지 쉬지 않고 다니며 지도를 그리고 구덩이를 팠다.
연우강이 그 일을 하는 동안 봉연은 묘봉산 각 지역을 돌며 금의위 위사들의 동향을 파악했다.
“ 추워?”
연우강은 봉연을 빤히 보았다.
“ 이게 얼마나 얇은지 아세요?”
봉연은 자신의 야행복을 가리켰다. 여전히 그녀는 검은색 야행복만 걸치고 있었다.
“ 그래도 넌 모자나 썼잖아.”
연우강은 눈짓으로 봉연의 얼굴을 가린 복면을 가리켰다.
“ 무슨 사내가 배려라곤 요만큼도 없어요. 전 지금 추워서 입이 돌아갈 지경이라고요.”
봉연은 연우강을 흘겨보았다.
“ 이렇게 널 위해 구덩이를 팠는데 배려가 없다는 거야?”
“ 절 위해 팠다고요?”
봉연은 연우강이 파놓은 구덩이를 보았다.
구덩이 안에는 낙엽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 추운 날 땅을 팔 리가 없잖아. 들어가.”
연우강은 구덩이 가장자리에서 뭔가를 잡고 들어올렸다. 그러자 구덩이 안쪽에 채워 넣었떤 풀이 약간 들렸다.
“ 침대를 만든 거예요?”
봉연은 깜짝 놀랐다.
연우강이 들어 올린 그것은 얇은 천이었다.
그녀는 천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풀을 두툼하게 깐 듯 안쪽은 푹신했다.
“ 괜찮아?”
“ 아주 좋아요.”
봉연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입이 풀렸으면 상황을 말해봐.”
“ 금의위는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올라오고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어요.”
“ 동원 인원은 얼마나 되지?”
“ 금밀사는 천육백 명이 동원됐고, 반포사와 척살사에서 천오백 명 정도가 지원을 나왔어요.”
“ 그럼?”
“ 묘봉산으로 들어온 자들은 총 삼천 명가량이에요.”
“ 지휘관은 어떤 자들이지?”
“ 금밀사는 사주 조현이 나와 있고, 반포사에는 우포 금철, 척살사에서는 광통 정대해가 나왔어요.”
“ 어떤 자들이지?”
“ 그들의 성격을 말하는 거예요?”
“ 응!”
“ 그것도 알아야 해요?”
“ 알아서 손해날 건 없으니까.”
“ 우포 금철은.....”
봉연은 우포 금철과 광통 정대해의 성격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해 주었다.
“ 알았어. 쉬어.”
다 듣고 난 연우강은 사망궤를 메고 일어났다.
“ 혼자 가게요?”
“ 피곤하며 춥다며?”
“ 그렇긴 하지만. 혼자 있는 건....”
봉연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 잠잘 게 아니면 천도 챙겨.”
“ 알았어요.”
그녀는 천을 꺼내 풀을 털어내고 사각형 형태로 개켰다. 그런 다음 연우강이 지고 있는 궤짝 뚜껑을 열고 안으로 집어넣었??.
“ 북쪽에 있는 자가 제사당주 우철곤이라고 했지.”
“ 네.”
“ 우철곤은 성격이 상당히 급하다고 했던가?”
“ 네, 그쪽으로 가게요?”
“ 천라지망의 최고 강점이 뭐라고 생각해?”
“ 무공이 약한 무인 다수를 이용해서 무공이 강한 무인을 잡아내는 거 아닌가요?”
“ 그건 맞아.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고수를 잡는지 그것도 알아?”
“ 고수의 내력을 고갈시켜서 잡잖아요.”
“ 고수의 내력을 고갈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 그거야 지금처럼 포위를 하고 줄기차게 공격하는 거죠.”
“ 그럼 금의위는 날 잡을 수 있을까?”
“ 연 공자를 몰랐을 때 같으면 잡는다는 쪽에 걸었을 거예요.”
“ 지금은 아니라고?”
“ 네.”
유설연의 말대로였다. 연우강의 실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다. 금의위 위사들 실력으로 잡는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었다.
“ 그건 봉연 네가 잘못 생각하는 거야.”
“ 제가 뭘 잘못 생각한다는 거죠?”
“ 삼천 명 정도면 나뿐만 아니라 나보다 더 강한 무인도 당할 수밖에 없는 숫자야. 단 천라지망 안에서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조건이라면.”
“ 설마요.”
“ 그게 바로 천라지망의 무서움이야.”
“ 그러니까 포위한 무인들 때문이 아니라 천라지망 때문에 고수가 당한다는 거예요?”
이곳을 포위한 무인들 때문이라면 굳이 천라지망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었다.
“ 맞아. 고수들이 당하는 이유는 무인들이 아니라 천라지망 때문이야.”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천라지망이 어떤 역할을 한다는 말인 것 같은데...”
봉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아는 천라지망은 무공이 약한 다수가 무공이 강한 소수를 포위하여 사냥하듯 몰아가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데 연우강의 말은 전혀 달랐다.
“ 혹시 물속에서 걸어본 적 있어?”
“ 당연히 있죠.”
물속에서 생활하는 건 동창의 훈련 과정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 어땠지?”
“ 처음엔 운치도 있고 괜찮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호흡도 가빠지고 몸도 피곤해졌어요.”
“ 왜 피곤해졌다고 생각해?”
“ 그거야 물 때문이잖아요.”
“ 지금 우리가 있는 여기가 물속과 비슷한 환경이라면 믿겠어?”
“ 여기가 물속과 같다고요?”
봉연은 연우강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곳은 차가운 바람이 부는 묘봉산 산속이다. 물속과는 전혀 다른 상황인 것이다.
“ 물을 살기로 바꾸고, 육체를 정신으로 바꾸면 돼.”
“ 물을 살기로 바꾸고, 육체를 정신으로....아!”
봉연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연우강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지금 묘봉산 전역을 채우고 있는 건 진득한 살기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살기가 도처에 깔려 있어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다만 감각이 아주 예민한 자들은 가벼운 피곤함을 느낀다.
하지만 오감을 넘어 육감까지 발달해 있는 무인들은 다르다.
살기를 감지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내기를 끌어올리게 되는 자들이 무인이다. 물론 짧은 시간 동안 내기를 끌어올리게 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고, 시간이 길어지게 되면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무공 고수들은 살기를 무시할 수 있는 능력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천라지망을 구축한 자들이 살기를 무시하도록 놓아두질 않는다. 그들은 끊임없이 공격을 시도하여 고수의 투쟁 본능을 자극한다.
숨어 있는 적을 찾아내고, 적을 죽이게 되면 살기는 점점 강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무공 고수는 천라지망을 펼친 자들을 전부 없앨 때가지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무공이 강한 고수라도 해도 장시간 물속에서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살기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고수는 지속적으로 살기에 노출됨으로 해서 자신도 모르게 내력을 다 써버리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 더 재미있는 사실은 무공이 강한 자일수록 살기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거야.”
“ 무공이 약한 자보다는 강한 자가 더 빠릴 지치는 곳이 천라지망이란 말이군요.”
이제야 머릿속이 정리된다는 듯이 봉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응.”
“ 그럼 성격이 급한 자를 찾아가는 이유는 뭐죠?”
“ 모든 진식이 그렇듯 천라지망도 진식을 펼치는 자들까리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을 때 최고의 효과가 나오거든.”
“ 그 균형을 깨트리기 위해 우철곤을 노리는 거예요?”
“ 속도를 좀 내볼까?”
연우강의 신형이 빠른 속도로 전방을 향해 쏘아져 갔다.
휙! 휙휙!
앞을 가로막고 있던 나뭇가지들이 마라천력에 의해 구부러지고, 연우강과 봉연은 그 사이를 빠르게 지나쳐 갔다.
쉬지 않고 내달린 두 사람은 반 시진 후 묘봉산 북편에 도착했다. 서쪽이나 동쪽과는 달리 북편은 경사가 가파르고 절벽과 낭떠러지가 많았다.
두 사람의 발길이 향한 곳은 구불구불 이어진 계곡이었다. 계곡은 급격한 경사를 이루며 아래로 향해 있었다.
봉연은 주변을 둘러보며 연우강을 따랐다.
이 계곡은 두 시진 전에 와 보았던 곳이다.
어느새 계곡 끝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앞쪽이 환해지면서 싸늘한 기운이 감지됐다.
봉연은 잔뜩 긴장했다.
싸늘한 기운의 정체는 다름아닌 금의위 위사들일 터였ㄷ.
[ 시작하자.]
연우강의 전음이 들려오자 봉연은 은신술을 펼쳤다. 그녀가 펼친 은신술은 동창 최고 은신슬 중의 하나인 허허무령대법이었다.
[ 전 오른편으로 갈게요.]
[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연우강은 전방을 살폈다.
잠시 전방을 바라보던 연우강의 신형이 빠르게 이동했다.
‘ 응?’
봉연은 깜짝 놀랐다.
방금 연우강이 움직인 거리는 분명 오장이다.
그가 이동하기 전에 한 동작이라고는 오른발을 뻗은 것뿐이었다. 그런데 오 장 건너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마치 땅을 접어서 이동한다는 축지성촌이라 불리는 전설의 신법을 보는 것 같았다.
[ 어떻게 한 거죠?]
그녀는 연우강에게 전음을 보냈다.
[ 그쪾에 열 명이 숨어 있어. 오른편 끝에 있는 커다란 바위 아래쪽에 두 명, 위에 두 명, 뒤에 두 명, 그 옆에 있는 나무 위쪽에 두 명, 뒤에 두 명이야.]
[ 질문엔 대답도 안 해주고.]
[ 펼치지도 못하는 무공인데 알면 공연히 배만 아프잖아.]
[ 피이! 알았어요.]
봉연은 입을 삐죽 내밀고는 연우강이 가리킨 곳으로 몸을 날려 갔다. 그리고 얼마잖아 커다란 바위 아래쪽에 몸을 내렸다.
바위 아래쪽은 안쪽으로 반 자가량 파고 들어가 있었는데 그곳에 두 명이 엎드려 있었다.
소리 없이 두 명 위쪽으로 다가간 그녀는 양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녀의 손끝에서 붉은 광채가 폭사됐다.
그녀의 독문 무공인 십삼탈혼백의 일식 혈루였다. 눈물을 닮았다고 해서 혈루라고 부르는 그것은 극독을 함유하고 있어, 몸속으로 파고드는 순간 주위를 녹여버린다. 당하는 자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엎드려 있던 두 명을 없앤 봉연은 바위로 날아 올라갔다. 바위 위쪽에는 움푹 들어간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도 두 명이 엎드려 있었다.
또다시 봉연의 검지와 중지가 피를 잔뜩 머금은 모기 엉덩이처럼 새빨갛게 변하고, 혈루라 부르는 눈물방울 형태의 붉은 광채가 두 사내의 뒷머리로 파고들어 갔다.
이번에도 역시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두 사내는 엎드린 채 그대로 절명했다.
순식간에 네 명을 없앤 봉연은 다시 몸을 날려 바위 뒤편으로 갔다. 그곳에도 역시 두 명이 숨죽인 채 전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 뒤편으로 돌아간 봉연은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혈루를 쏘았다. 비명도, 쓰러지는 소리도 없이 두 명은 절명했다.
바위 쪽을 정리하고, 나무 위와 아래쪽에 있는 자들까지 없앤 다음 연우강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려갔다.
연우강이 있는 곳에도 많은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대충 헤아려 보니 이십여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연우강은 커다란 나무 위쪽 가지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아직 끝난 게 아니겠죠?]
봉연은 연우강 바로 앞쪽 가지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전음을 보냈다.
두 사람이 무릎을 엇갈려 앉아야 할 정도로 나뭇가지는 가까웠다.
[ 이제 시작인 걸 뭐.]
[ 구멍을 만들 참인가요?]
봉연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주변은 온통 살기로 뒤덮여 있고, 그 속에서 많은 인기척이 감지되고 있다.
[ 일단은.]
[ 그런데 구멍을 만들면 천라지망이 정말로 깨져요?]
이곳으로 오기 전 연우강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분명 그의 말을 이해하기는 했다. 하지만 천라지망의 천라가 인해전술을 사용하는 다수의 무인이 아닌 살기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았다.
[ 조금 전에 물에 대해서 말했지.]
[ 네.]
[ 그럼 물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보자. 물을 가두는 곳을 뭐라고 부르지?]
[ 수조요.]
[ 수조에는 외벽이 다섯 개 있다고 가정해.]
[ 다섯 개의 벽으로 물을 가두고 있다는 뜻인가요?]
[ 응!]
[ 좋아요.]
[ 그 다섯 개의 벽 중에서 네 개의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어. 그럼 물은 어떻게 될까?]
[ 구멍을 통해 흘러 나가겠지요.]
[ 그 흘러 나간 물은 가장 바깥쪽에 있는 외벽을 제외한 나머지 외벽 전부를 삼킬 거야. 그치?]
[ 그렇겠죠.]
[ 자, 그럼, 이제 물을 살기로 바구고 수조 외벽을 금의위 위사들로 바꿔봐.]
[ 그러니까....]
봉연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문득 머릿속이 환해지는 듯했다.
지금 하는 일은 그 구멍을 만드는 작업이다. 커다란 구멍이 뚫리면 묘봉산을 채웠던 살기는 그 구멍을 통해 외벽을 형성한 금의위 위사들에게로 흘러갈 테고, 그들 또한 천라지망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즉 금의위 위사들은 자신들이 뿜어낸 살기에 영향을 받게 되는 셈이다.
[ 이제 이해가 가?]
[ 네.]
봉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지금 우리 주변엔 백오십 명 정도가 숨어 있어. 그들을 전부 없애고 아까 그 계곡으로 와.]
[ 백오십 명이면 너무 많은 거 아닌가요?]
[ 걱정돼?]
[ 연 공자는 걱정 안 돼요?]
[ 난 봉연 너처럼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라면 여기서 죽어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 풋!]
봉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삼천 명이 넘는 적이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농담을 던지는 그의 배포가 참으로 놀라웠다. 아니 대단한 사람이다.
‘ 하긴 그 정도나 되니까 남경왕과 전쟁을 벌이는 거겠지.’
[ 네 생각은 어때?]
연우강은 은근한 눈길을 보내며 물었다.
[ 뭐가요?]
[ 사내로부터 마음에 쏙 드는 말을 들었으면 뭔가 반응이 있어야 하잖아.]
[ 이를 테며?]
[ 숨이 거칠어진다거나, 몽롱힌 눈길을 보내면서 입술을 축인다거나, 아니면 입맞춤을 해주는 등등의 반응 말이야.]
[ 나랑 잘래요?]
봉연은 연우강 앞으로 불쑥 가슴을 내밀었다.
[ 나야 언제나 환영이지. 하지만 봉연 넌 남자보다 여자를 더 좋아하잖아.]
연우강은 봉연의 가슴을 뚫어지듯 보았다.
문득 야행복을 처음 만든 자가 남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아니라면 몸매가 저렇듯 완벽하게 드러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야행복을 걸치고 있다고 하지만 신축성 좋은 얇은 천에 불과할 뿐이다. 몸에 찰싹 달라붙을 분 아니라 그녀는 야행복 안에 속옷도 입지 않은 채다. 저 정도면 거의 알몸이나 다름 없었다.
[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연우강을 따라다닌 내내 그에게 그런 내색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가 알 리가 없었다.
[ 아니라고 발뺌을 해야 하는 거 아냐?]
오히려 놀란 사람은 연우강이었다.
보통 누군가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으면 보통은 절대 아니라고 부정한다. 그런데 그녀는 대번에 인정을 해버린 것이다.
[ 숨길 이유가 없잖아요.]
[ 안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 연 공자가 소문을 낼 사람도 아니고, 또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거든요.]
[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
[ 네.]
[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 없어?]
[ 자기네들도 전부 이상한 사람들이잖아요.]
[ 이상한 사람. 아!]
연우강은 피식 웃었다.
봉연은 동창 무인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는 다시 전음을 보냈다.
[ 수장인 제독 동창부터 물건이 없단 말이지?]
[ 그리고 소제독은 저보다는 조금 작지만 예쁘장한 가슴을 가졌어요.]
[ 그놈이 그놈이란 말이네?]
연우강은 피식 웃었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행태가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유일한 곳. 그곳이 바로 동창이었다.
[ 그래요. 그보다 어떻게 알았어요?]
[ 뭘?]
[ 제가 여자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 말이에요.]
[ 내가 군대 이야기를 할 때 눈에서 광채가 나고 숨이 거칠어졌잖아.]
[ 그랬어요?]
[ 응!]
[ 자세히도 살폈네요.]
[ 거참!]
[ 왜요?]
연우강이 혀를 차자 봉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홀라당 벗고 동경 본 적 있어?]
[ 옷을 입은 채로는 못 자니까 거의 매일 본다고 해야 맞겠죠.]
[ 홀라당 벗고 자?]
[ 끌려요?]
[ 약간. ]
[ 언제든지....]
[ 네 스스로 예쁘다고 생각한 적 없어?]
[ 모든 여자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고 살아요.]
[ 그런데..]
[ 그런데 뭐요?]
[ 설연이나 성연 그 녀석들이야 사는 게 거지같아서 물건을 자르고 계집이 됐다지만, 넌 도대체 왜 여자를 좋아하게 된 거야?]
[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 이유는 모르는데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좋다는 말?]
[ 전 원래 물건을 달고 태어났어야 했는데, 실수로 이걸 가지고 태어난 거예요.]
봉연은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푹 찔렀다.
[ 그러면서 나와 자겠다는 거야?]
[ 늘 같은 밥만 먹으면 물리잖아요. 가끔은 별식이 당기잖아요.]
[ 별식?]
[ 연 공자가 별식이라는 게 아니고, 남자보다 여자를 더 좋아하는 게 함께 자고 싶을 정도로 멋있다는 말이에요.]
[ 꿈보다 해몽이 좋다.]
연우강은 피식 웃었다.
[ 호호호! 아무튼 자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 알았어. 그 말 기억해 둘게.]
[ 좋아요. 이제 말해 주세요.]
[ 뭘?]
[ 이곳에 숨어 있는 위사 놈들이 왜 꼼짝도 하지 않는지 그걸 알고 싶어요.]
천라지망은 단순히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펼치는 진식이 아니다. 사냥감을 몰아가듯 이동해야 하는데 금의위 위사들은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 수조에 물을 채우는 중이라서 그러는 거야?]
[ 물을 채우는 중이라고요?]
[ 살기를 채우는 중이라고.]
[ 아!]
봉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바로 살기가 적게 분포돼 있어서 그랬던 것이다.
[ 이제 다 쉬었으니까 다시 시작하자. 끝나면 조금 전 그 계곡으로 와.]
[ 그런데 구멍난 걸 알면 다시 메우지 않을까요?]
[ 그럼 계속 구멍을 만들면 되잖아.]
[ 쉽네요.]
[ 일은 쉽게 해야 하는 거야.]
[ 알았어요.]
봉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곧이어 소리없는 학살이 어둠 속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금의위 위사들은 동료들이 죽어 가는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했다.
상주 중의 한 명인 나길상 또한 다르지 않았다. 유달리 귀가 밝다고 해서 천이라는 별호로 불린 그마저도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를 비롯한 금의위 위사들은 살기를 뿜어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어, 다른 곳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도 무인의 육감은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경고를 계속해서 보내왔다.
[ 정오!]
결국 나길상은 살기를 쏟아내는 데 모든 힘을 다하라고 하였던 당주의 말을 어기고 수석 중주인 윤정오를 불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윤정오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
‘ 혹시.....’
나길상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슬며시 일어나 몸을 날렸다.
수석 중주인 윤정오는 그가 있는 곳에서 오십 장 떨어진 곳에 은신해 있다.
쭈뼛!
몸을 날려가는데 머리털이 곤두섰다. 나길상은 급하게 걸음을 멈추고는 내공을 끌어올려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하지만 주변은 조용했다.
‘ 젠장! 이젠 간까지 작아진 모양이네.’
나길상은 내심 투덜거리며 다시 몸을 날렸다. 잠시 후 윤정오가 숨어 있는 바위 근처에 당도했다.
윤정오는 바위 아래쪽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 뭐하고 있어.]
나길상은 윤정오의 어깨를 발로 툭 찼다.
그는 엎드린 채로 살기를 뿜어내는 것이 아니라 고개까지 처박고 잠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 헉!”
나길상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가볍게 찼을 뿐인데, 윤정오의 고개가 힘없이 흔들린 것이었다. 고개가 힘을 잃고 흔들리는 경우는 나길상이 알기론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는 급하게 윤정오의 몸을 뒤집었다.
“ 맙소사.”
나길상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목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윤정오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 죽은 사람 처음 봐?”
뒤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차앗!”
누군지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중주인 윤정오가 살해당한 상태고, 주변도 조용하다.ㅏ
그건 곧 뒤에 있는 자가 연우강이란 의미였다.
나길상은 기합을 내지르며 왼손을 뒤로 휘둘렀다. 그의 소매에서 새파란 광채를 뿌리는 비수 한 자루가 튀어나오고 연우강을 향해 쏘아졌다.
비수를 날림과 동시에 나길상은 몸을 돌렸다. 다.
나길상은 금의위 수사 수백 명을 없앤 사람에게 덤빌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가 공격을 시도한 것은 연우강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 젠장!”
나길상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방금 그가 날린 비수는 연우강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얌전히 끼워져 있었다.
“ 연우강이더냐?”
나길상은 내공을 실어 소리를 질렀다. 혹시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부하들에게 알리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달려오는 부하들은 아무도 없었다.
“ 네가 기다리는 부하들은 다 죽었어.”
“ 여기에 몇 명이 있었는지 아느냐?”
나길상은 천리지청술을 끌어올려 주변을 살피며 소리쳤다.
“ 정확한 숫자는 나도 몰라. 하지만 지금까지 죽인 자들의 수가 백오십 명 정도야; 내 동료가 오십 명가량은 죽였을 테고.”
“ 저, 정말 다 죽였단 말이냐?”
나길상의 얼굴이 검게 죽었다.
그가 거느린 위사의 수는 정확하게 이백네 명이다. 그런데 이백여 명을 없앴다면 이곳에 포진해 있던 부하들이 전부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자신은 지금까지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
“ 가급적이면 소리를 크게 질러줘.”
“ 무, 무슨.......”
나길상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네 상관인 우철곤의 성격이 급하다고 하더구나.”
연우강은 안쪽으로 꺾은 손목을 밖으로 튕겼다.
슉!
그러자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비수가 나길상을 향해 날아갔다.
‘ 이 정도로.......’
나길상은 저도 모르게 조소를 머금었다.
날아오는 비수의 속도가 형편없이 느렸던 것이다. 저 정도면 손가락이 아니라 이리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날 무시하지 마라, 연우강.”
나길상은 고함을 내지르며 양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느렸지만, 그렇다고 나길상은 모험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는 전 내공을 양손에 주입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검면에 맞춰 손바닥을 합쳤다.
‘ 욱!’
힘없이 날아오는 겉모습과는 달리 비수는 엄청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나길상은 양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손바닥 안에 잡힌 비수는 살아 있는 것처럼 손바닥 안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위아래로, 좌우로 마구 움직였다. 비수의 움직임에 맞춰 나길상의 손은 좌우 또는 위야래로 흔들렸다.
“ 이익!”
나길상은 단전의 내공을 바닥까지 긁어 양손에 주입했다. 그의 양손에서 뿌연 광채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의 손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고, 이제는 움직인다는 표현보다 흔들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가 됐다.
“ 억!”
나길상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비수의 면이 회전하더니 날카로운 날이 손바닥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손바닥이 베였는지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는 겁에 질린 얼굴로 손바닥을 보았다.
비수는 엄청난 힘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손바닥을 베지 않으려면 양손을 떼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비수는 곧바로 목을 향해 쏘아져 오게 된다. 손을 뗄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러는 사이에 비수는 더욱 세게 밀고 들어왔다.
“ 아악! 으아악!”
나길상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방금 네 비명은 우철곤이 들었을 거야, 그치?”
연우강은 피범벅으로 변해가는 나길상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 사, 살려주시오, 살려........”
나길상은 애원했다.
“ 살려주는 건 반칙이야. 우린 서로 말을 하진 않았지만 어느 한쪽이 완전하게 박멸될 때까지 전쟁을 하기로 약속했잖아.”
“ 난 가족이 있소. 공자. 제발 부탁이오. 살려주시오.”
나길상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 가족이 어디에 사는데?”
“ 내 가족은 남문 근처......”
가족이 사는 곳을 말하려던 나길상은 입을 닫았다.
갑자기 연우강의 몸에서 싸늘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가족이 있는 곳을 말하려고 하는데 살ㄷ기를 흘린다는 것은 그들마저도 없애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 개자식!”
나길상은 욕설을 뱉어내고는 손에 힘을 풀었다.
슉!
힘을 풀자마자 피로 범벅인 비수가 튀어나와 그의 목으로 파고들어 갔다.
“ 으악!”
그의 입이 쩍 벌어지고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 비명이다!”
“ 저쪽이다!”
그러자 멀리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수면처럼 잔잔하게 깔려 있던 살기가 급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 흐르는 건 전부 구멍을 따라 이동하게 돼 있지.”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몸을 날렷다. 잠시 후 그가 몸을 내린 곳은 계곡 안쪽이었다.
계곡 안에는 봉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 이 근처에 무덤이 있지 않아?”
“ 무덤이라고요?”
“ 네가 파두었던 곳을 말하는 거야.”
“ 글쎄요. 여기에서 땅을 팠던가?”
봉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워낙 많은 곳에 땅을 파두었던 터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 자밀원 원주 자리, 몸을 팔아서 얻은 거 아냐?”
“ 이게 나쁘다는 거예요?”
봉연은 제 머리를 가리켰다.
“ 그게 아니면 오늘 작업한 장소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잖아.”
“ 그런 것까지 기억하기엔 날씨가 너무 춥다고요.”
“ 기억력과 추운 건 전혀 상관없어.”
“ 연 공자는 몰라도 전 상관있어요.”
“ 아무리 춥다고 저기를 기억 못한다는 건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거야.”
연우강은 아래쪽을 가리켰다.
“ 저기라고요?”
봉연은 연우강의 손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구덩이는 절벽 아래쪽 움푹 들어간 곳에 만들어져 있었는데 구덩이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주변과 꼭 같았다.
“ 아직도 기억 안나?”
연우강은 뚜껑처럼 덮어두었던 돌을 마라천력으로 동시에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풀로 가득 채워진 공간이 나타났다. 공간은 두 사람이 간신히 누울 정도로 좁았다.
“ 네.”
봉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우강 등에서 사망궤를 내렸다.
“ 뭐가 이리 무거워요?”
허리가 휘청할 정도로 무게가 나가자 봉연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 만년오금철이니까 무거울 수밖에.”
“ 이, 이게 만년오금철이라고요?”
봉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거무튀튀한 이 상자가 만년한철과 더불어 최고의 쇠라고 불린다는 만년오금철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욕심나?”
“ 당연히 욕심나죠. 이걸로 무기를 만들면 전 당장.......”
“ 더 강해지고 싶어?”
“ 강해지고 싶은 건 무인의 본능이니까요.”
“ 무인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이겠지. 그건 머리맡으로 놓고 아까 집어넣었떤 천을 꺼내.”
“ 알았어요.”
봉연은 사망궤를 놓은 다음 뚜겅을 열고 천을 꺼냈다.
연우강은 다시 마라천력으로 구덩이 안을 채운 풀을 절반 가량 들어 올렸다.
“ 예술이네.”
봉연은 배시시 웃으며 천을 깔았다. 그녀가 천을 깔자 들어 올렸던 풀이 아래로 내려와 이불이 됐다.
“ 들어가면 돼요?”
봉연은 곧바로 두 장의 천 사이로 들어가서는 연우강이 들어오기 좋게 천을 들어 올렸다.
연우강은 미끄러지듯 천 속으로 들어갔다.
“ 뭐, 뭐죠?”
봉연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연우강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체온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연우강의 옷에서는 금속의 싸늘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니 그의 옷은 금속을 얇게 펴서 만든 갑옷 같았다.
“ 차가워?”
“ 당연히 차갑죠. 연 공자 옆에 있다가는 얼어 죽겠어요. 어떻게 좀 안 돼요? 전 지금 추워 죽을 지경이란 말이에요.”
“ 그럼 옷을 벗어야 하는데?”
“ 불쌍한 년 살려주는 셈 치고 벗으세요.”
봉연은 연우강을 일으켜 쉐워서는 빠른 동작으로 사망묵의를 벗겨 사망궤 아래쪽에 놓았다. 그런 다음 허공섭물로 자리를 대충 정리하고는 다시 누웠다.
“ 봉연, 옷을 벗긴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야.”
연우강은 음흉한 얼굴로 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 물론이죠. 기대할 게요. 연 공자.”
봉연은 배시시 웃으며 연우강의 팔을 펴서는 베개로 삼았다. 그런 다음 왼다리를 척하니 연우강의 다리 위로 올렸다.
그녀는 연우강의 옆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 전 준비 끝났어요. 연 공자. 언제든지 덮쳐도 돼요.”
“ 끄응!”
연우강은 신음을 뱉고는 마라천력으로 들어올리고 있던 뚜껑을 천천히 내렸다. 금세 어둠이 두 사람을 덮쳤다.
“ 섭섭하지 않으세요?”
봉연은 물끄러미 연우강을 보았다.
“ 뭐가?”
“ 소제독의 친구잖아요.”
“ 설연 그 녀석이 날 도와주지 않는 거에 대해 섭섭하지 않느냐는 말?”
“ 자밀원 대원들만 해도 삼천 명이 넘거든요. 그들 중 일부만 투입해도 연 공자는 지금보다 훨씬 편하게 금의위와 전쟁을 치룰 수 있잖아요.”
“ 설연은 내게 삼천 명을 지원해 줬잖아.”
“ 전 삼천 명 역할을 못 해요. 연 공자.”
“ 물론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주고 있어.”
“ 뭘 해주는데요?”
“ 추운 겨울에 가장 중요한 건 몸을 따뜻하게 하는 거야. 게다가 지금처럼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최적의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해. 그리고 평민이 자밀원 원주를 안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건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야.”
“ 풋!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봉연은 활짝 웃었다. “ 당연히 그렇지. 그리고 넌 정 사품이잖아.”
“ 그런데요?”
“ 난 정천호로 있을 때도 정 오품이었어.”
“ 그러니까 정오품이 정 사품을 안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거죠?”
“ 당연하지.”
“ 그럼 제가 명령하면 따를 거예요?”
“ 그건 상황 봐서.”
“ 좋아요. 그럼 지금부터 명령을 내릴게요. 좀 더 세게 안아줘요.”
“ 추워?”
“ 조금.”
“ 진작 말하지.”
연우강은 팔베게를 해주고 있던 왼팔을 구부려 봉연의 등에 대고 혈잔수를 끌어올렸다.
그의 손에서 따뜻한 기운이 흘러나와서는 봉연의 몸을 쓰다듬는 것처럼 훑고 다녔다.
순식간에 몸이 따뜻해지자 봉연은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 이번엔 좀 더 난이도가 높은 명령인데 할 수 있을까요?”
“ 일단 들어보고.”
“ 옆구리가 추워요.”
“ 가슴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봉연의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물론 그의 손은 혈잔수를 끌어올린 채였다.
ㅇ어ㅘ락!
연우강의 손이 옆구리를 쓰다듬자 봉연은 저도 모르게 연우강의 팔을 힘껏 틀어쥐었다.
“ 왜 그래?”
연우강은 봉연을 살피듯 보았다.
“ 간지러워서 그래요.”
“ 간지러워?”
“ 아주 많이.”
“ 그럼 그만 할까?”
“ 아, 안 돼요. 계속해 줘요. 그리고 왼손으로는....”
그녀는 연우강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 역시 넌 풍류를 아는구나.”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오른손으로는 봉연의 엉덩이를 더듬었다.
야행복이 워낙 얇아서 그런지 맨살을 만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엉덩이에 머물렀던 연우강의 손은 어느새 전신을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잠시 후 봉연의 입에서 달뜬 신음이 흘러나왔다.
‘ 제가 이겼어요. 소제독. 연 공자도 사내였다고요.’
봉연은 연우강의 손길을 음미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오늘따라 유달리 몸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했다.
‘ 아쉽네.’
그녀는 입맛을 다셨다. 장소가 이곳만 아니었다면 좀 더 나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하지만 이고이니까 이런 기회를 잡았겠지.’
봉연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당신 완전 한량이에요.”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연우강을 보았다.
“ 항주의 기녀란 기녀는 전부 나와 잠을 잤는데 당연하지.”
“ 그렇게 살았어요?”
“ 그렇게 사는 게 내 꿈이야.”
“ 그렇게 사는 게 꿈이라고요?”
“ 응!”
“ 멋진 꿈이네요.”
“ 내 생각도 그래.”
“ 저기.... 저 옷 벗을까요?”
“ 여기서?”
“ 단추가 달려 있어서 벗는 건 어렵지 않아요.”
“ 단추가 어디에 달려 있는데?”
“ 단추가 없으면 볼일을 볼 수가 없잖아요.”
“ 아! 그러니까 여기에 단추가 달렸다는 말이구나.”
“ 네, 벗을까요?”
“ 딱히 할 일도 없는데, 먼저 복면부터 벗지 그래.”
“ 맞다. 지금까지 복면을 쓰고 있었네.”
봉연은 싱긋 웃으며 복면을 벗었다. 그러자 둥근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상당히 미인이었다.
가만히 바라보면 조금 앙큼한 눈이 고양이를 연상시키지만 빚어놓은 듯한 이마와 오뚝하면서도 앙증맞은 코와 조화가 딱 들어맞아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 복면은 처음 벗은 거지?”
“ 그런 것 같아요.”
봉연은 씩 웃었다.
그를 따라다닌 지가 닷새가 넘었다. 그런데 그동안 그 앞에서 복면을 한 번도 벗지 않은 것이었다.
“ 얼굴이 이렇게 예쁘고, 몸매도 죽이는 여자가 남자보다 여자를 더 좋아한다는 게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가.”
“ 여자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 난 특별한 별식이라며?”
“ 어쨌든 연 공자의 손길에 달아오른다는 건 남자도 좋아한다는 뜻이잖아요.”
“ 그런 거야?”
“ 그러니까 얼른........”
“ 옷을 벗겨달라고?”
“ 네.”
“ 단추의 위치만 말해.”
“ 여기에 있어요.”
봉연은 연우강의 손을 잡아끌ㄹ어 단추가 있는 곳에 대어주었다. 단추는 단전 부분에서 시작하여 회음부를 따라 꼬리뼈까지 달려 있었?. 그리고 요대가 감기는 부분에도 있었다.
연우강은 단추에 손을 댄 채로 마라천력을 끌어올려 단추를 풀었다. 신축성이 좋은 천이라서 그런지 단추를 풀자마자 엉덩이가 훤히 드러났다. 역시 속옷은 걸치지 않은 채였다.
요대를 따라 이어진 단추까지 풀어내자 그녀의 옷은 위쪽으로 말려 올라가고, 아래로 말려 내려갔다. 즉 위쪽과 아래 쪽은 옷을 입은 상태고 중간은 벗은, 그런 특이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구덩이 안쪽이 너무 좁고 어두워 옷차림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단추가 풀리자마자 봉연은 곧바로 연우강 위로 올라갔다. 그녀가 올라타자 연우강은 자연스럽게 엉덩이를 틀어쥐었다.
“ 입맞춤해도 되죠?”
봉연은 연우강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 그런 건 묻지 말고 그냥 해도 되는데.”
“ 아, 알았어요.”
봉연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입술을 쭉 내민 채 고개를 숙였다. 연우강의 숨결이 바로 코앞에서 느껴지자 봉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봉연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봉연은 눈을 감지 않았다.
입맞춤을 할 때 연우강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 최고의 입맞춤은 뭐니뭐니 해도 설왕설래라고.’
봉연은 혀끝을 오목하게 말았다. 마치 벌침이라도 놓듯이 입술이 마주치는 순간 곧바로 혀로 연우강을 녹여버릴 참이었다.
‘ 드디어!’
연우강의 입술이 바로 앞가지 다가오자 봉연은 슬쩍 입을 벌렸다.
“ 서둘러라! 놈들이 이곳으로 갔다. 발자국이 이쪽으로 이어져 있다.”
바로 그때 밖에서 살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런 개자식들!”
봉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사실 그녀가 연우강을 유혹했던 것은 유설연과의 내기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그녀 자신 때문이었다.
워낙 바쁜 일이 많다 보니 남자고 여자고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한가할 때 같으면 여몽을 찾아가거나 그녀가 시간이 없으면 기녀로 가장하여 손님과 잠자리를 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너무 오랫동안 사람 냄새를 맡지 못했다. 물론 얼마 전에도 임무 때문에 사내와 잠을 잔 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임무의 특성상 온몸을 던질 수가 없었다. 마치 볼일을 보다 만 것처럼 찜찜함이 앙금처럼 남았고 그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곤 했다.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온몸을 던져 사랑하는 것이란 걸 그녀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대상으로 연우강을 택했다.
정성을 다해 그를 유혹했고, 이제 그 결실을 맺으려는 순간 방해군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시선을 내려 연우강을 보았다.
연우강 또한 눈을 뜬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계속하면 안 되겠죠?]
그녀는 전음을 보냈다.
[ 소리나면 금세 알아차릴걸? 그럼 우린 옷을 입고 싸워야 할 거야.]
[ 옷을 입고?]
[ 응!]
[ 연 공자 생각은 어때요?]
[ 뭐가?]
[ 무리를 할까요. 아니면 이대로 있는 게 나을까요?]
“ 샅샅이 훑어라. 분명 놈들이 이곳 어딘가에 있다!]
대답은 계곡에서 들려왔다.
봉연은 연우강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 한숨 자.]
연우강은 나직이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봉연은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와 연우강의 팔을 베고 누웠다. 하지만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그녀는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금의위 위사들의 동정을 살폈다.
“ 너희들은 이곳에 은신해라!”
“ 알겠습니다. 상주.”
‘ 개자식들!’
그녀의 입에서 또다시 욕설이 흘러나왔다.
봉연은 몸을 돌려 연우강의 아랫배 위로 왼 다리를 올렸다.
‘ 개자식들, 연 공자도 준비가 끝났는데.’
그녀는 내심 중얼거리며 욕설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