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210화 (210/232)

제 4장 그래서 더 슬퍼

“ 어떻게 됐소?”

조천성은 막 안으로 들어온 중년인을 보며 물었다.

붉은색 창영이 달린 창을 든 그는 후군도독부 소속 맹호군단의 단주 천수창 갈독기였다.

“ 금밀사 조현이 당한 것 같습니다.”

“ 조현이 죽었단 말이요?”

“ 네.”

갈득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 맙소사.”

조천성은 망연한 얼굴로 갈독기를 보았다.

연우강이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우강의 상대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금의위다. 그 금의위에서 최고 권력 기관의 한 곳인 금밀사 사주를 없앴다는 건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금의위는 어떻게 하고 있소?”

조천성은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 일단은 조현의 죽음은 비밀에 부치는 모양입니다. 조현을 대신해 육양이 묘봉산으로 들어왔답니다.”

“ 처리하고 보고할 모양이군.”

“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명령 내려온 건 없습니까?”

“ 일단은 대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소.”

“ 묘봉산 남쪽에 제 도독이 무인 오백 명을 데리고 주둔하고 있는 사실은 아십니까?”

“ 들었소.”

“ 만일 그가 묘봉산으로 진입하면 그땐......”

“ 그가 진입하면 우리도 진입하게 될 거요.”

“ 그럼 우리가 여기 주둔하고 있는 건 제 도독 때문입니까?”

“ 그건 아니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나와 있을 뿐이오.”

“ 그럴 일은 손톱만큼도 없겟지만 연우강이 승리했을 때를 대비한 포석이라ㅓ고 보면 되오.”

“ 지친 사자를 잡기 위해 나온 거라고 보면 되겠군요.”

갈독기는 얼굴을 슬쩍 찌푸렸다.

아무리 강한 무인이라고 해도 금의위 수천 명과 전투를 치르고 나면, 설사 승리한다고 해도 쓰러지기 직전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 있는 연우강을 잡기 위해 일천 명을 출병시켰다니 어이가 없었다.

“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군요.”

조천성은 갈독기를 빤히 보았다.

“ 난 녹을 먹는 관리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인입니다. 장군.”

“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단주. 하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무인들이 연우강을 무시하다가 죽었소. 난 그들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을 뿐이오.”

“ 연우강 그 자가 그 정도로 대단한 잡니까?”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갈독기는 연우강을 겁내는 조천성을 이해하지 못햇다.

“ 양성일 도독동지는 그 친구를 살아 있는 전설이라고 불렀소.”

“ 그건.....”

“ 조심해서 나쁠 게 없잖소. 아무튼 우린 전투에도 신경을 써야 하지만 남쪽의 제 도독의 경향을 각별히 주시해야 하오.”

“ 알았습니다. 장군.”

갈독기는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갈독기가 처소로 돌아가자 조천성도 방을 나섰다.

방을 나오자 묘봉산이 덮쳐오는 것처럼 다가선다.

그는 묘봉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짙은 어둠과 더불어 진득한 살기가 묘봉산 전역을 감싸고 있다.

“ 무서운 놈!”

조천성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금의위가 묘봉산으로 들어간 지 십 일이 지났다.

일 대 수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도권을 쥔 자는 연우강이다. 대단한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 하지만......”

" 설사 놈이 금의위를 전부 없애고 승자가 된다고 해도 반드시 잡아와야 하네."

떠나올 때 도독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번 전쟁에서는 누가 승리해도 큰 문제가 된다. 수백 명이 죽은 사건은 감출 수 있다지만 북경 최고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번영로에 시체가 뿌려진 사건은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반드시 해명이 필요하고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 금의위가 승리하면 그들이 해명하면 되지만 만에 하나 그들이 연우강에게 당한다면 그 일에 대해 설명할 사람이 없다.

아마도 황제 폐하는 가장 먼저 오군도독부에 그 일을 물을 것이다.

" 황제 폐하께서 물으실 때 놈을 내밀어야 하네."

" 연우강 혼자 금의위를 없앴다고 하면 황제께서는 역정을 내실 겁니다."

그때 자신이 한 말이었다.

누가 보아도 연우강 혼자서 금의위를 없앴다고 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그 말을 황제 앞에서 했다가는 오히려 바보가 되기 십상이다.

" 허허허! 당연히 그렇겠지. 그때 슬쩍 유설연과 연우강이 아주 친한 사이라고 말을 할 생각이네."

" 절친한 사이라면 어떤 뜻입니까?"

" '절친한 사이' 에 대한 해석은 황제 폐하께서 직접 하실거네."

" 그렇군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보통 사람에게는 ‘절친한 사이’ 란 아주 친한 친구를 말하지만, 유설연과 그렇고 그런 관계인 황제는 ‘ 절친한 사이’를 친구 사이가 아니라 연인 사이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건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황제는 유설연을 의심하게 될 테고, 어쩌면 내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내치지 않는다고 해도 전만큼은 못할 게 분명하다. 물론 그 사이에 연우강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도독이 원하는 게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 넌 내 말을 들었어야 했다. 연우강. 그럴 리가 없겟지만, 설사 네가 승리한다고 해도 남은 건 파멸뿐이다.”

조천성은 묘봉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조천성이 묘봉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그 시각, 연우강은 어둠을 뚫고 북쪽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그 옆에는 봉연이 주변을 살피며 따르고 있었다.

[ 지금 어디 가는 거죠?]

봉연은 연우강에게 전음을 보냈다.

[ 기분 나쁜 일 있어?]

[ 아뇨?]

[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래?]

[ 제 목소리가 이상해요?]

[ 싸우고 싶어서 시비를 거는 사람 같아.]

[ 정말요?]

[ 응!]

[ 그럴 생각은 전혀 없는데..... 혹시?]

봉연은 연우강을 보았다.

[ 맞아.]

[ 꾸준히 살기에 노출돼서 그렇다는 거예요?]

[ 정신적 압박에 시달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변하는 거야. 만일 나도 너와 같은 상태였다면 잔뜩 기분 나쁜 얼굴로 널 노려보았을 거야.]

[ 그럼 싸움이 일어나겠군요.]

[ 작전 중이니까 싸움은 쉽게 일어나진 않아.]

[ 하지만 정신적인 압박은 점점 더 심해지겠죠?]

[ 그럴 거야. 아마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거의 미칠 지경이 될 거야.]

[ 그러다가 철수해 버리면 어떻게 해요?]

[ 오늘 우리가 죽인 자가 총 몇 명이지?]

[ 정확하게 백칠십 칠 명이었어요.]

그녀가 죽인 인원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 연우강이 숫자를 세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 처음 접전을 벌일 때 몇 명 죽였지?]

[ 칠십 명을 없앴어요.]

[ 그 다음엔?]

[ 오십 명.]

[ 그 다음에는?]

[ 삼십 명 그리고 그 다음엔 스무 명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일곱 명.]

[ 그들을 없앨 때 걸린 시간은?]

[ 대부분 반 시진 정도 걸렸어요.]

[ 동일한 시간 동안에 같은 일을 하는데, 효율이 떨어진다는 건 어떤 의미가 되지?]

[ 점점 힘이 빠진다는 의미겠죠.]

[ 육양 그놈뿐만이 아니라 머리가 있는 놈은 전부 그렇게 생각할 거야.]

[ 그러니까 그들은 연 공자와 제가 지쳤다고 생각한다는 거죠?]

[ 맞아. 그리고 천라지망을 펼친 목적이 바로 그거야.]

[ 천라지망을 펼친 의도대로 돼가고 있는데 철수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네요?]

[ 이제 알았어?]

[ 아무튼 대단해요.]

봉연은 혀를 내둘렀다.

지금까지 무작정 적을 없애고 다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연우강은 죽여 없애는 위사들의 수마저도 계산을 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건 전력의 고하만이 아냐.]

[ 여러 가지 변수가 있다는 건가요?]

[ 맞아.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고, 그것들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리는 게 전쟁이야. 단순히 인원수가 많다고 이기는 게 아냐.]

[ 그렇군요.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죠?]

[ 빚 갚으러.]

[ 빚 갚으로 간다고요?]

[ 지금까진 우리가 사냥을 당했잖아.]

[ 그러니까 사냥을 하러 간다는 거예요?]

[ 응!]

[ 누굴 사냥하러 가는 거죠?]

[ 누구를 사냥했으면 좋겠어?]

[ 이왕 하는 거라면 육양이 좋을 거 같아요.]

[ 그게 낫겠지?]

[ 네.]

[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연우강은 싱긋 웃었다.

[ 그런데 그자를 어떻게 사냥할 거죠?]

[ 잘해야지.]

[ 잘?]

[ 응!]

연우강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

“ 개자식!”

육양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가 묘봉산으로 들어온 지 육 일이 지났다. 그런데 그 육일 동안 당한 금의위의 수는 천여 명에 달했다.

거의 매일 이백 명 가까이 죽어나갔고, 전날도 사망자는 백칠십여 명에 달했다.

그런데 놈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도통 보이질 않는다. 처음 산에 들어왔을 때는 견비들의 활약으로 놈의 행적을 찾아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정신적인 압박이 너무 심해 냄새를 맡는 기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일시적인 증상이라고 하지만 연우강의 흔적을 쫓는데 전적으로 그들에게 의존해 왔던 금의위로서는 여간 큰 손실이 아니었다.

“ 접니다. 사주.”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정대해가 안으로 들어왔다.

“ 놈은?”

“ 아직 행방이 묘연합니다.”

“ 도망치진 않았겠지?”

“ 아직 나가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그렇겠지. 네 생각을 말해 보거라.”

“ 어떤 생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육 일 동안 놈에게 당한 금의위 위사의 수가 천여 명이다. 광통. 그 말도 안 되는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걸 말해 보라는 거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 철수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 그런데 지금은 아니란 말이냐?”

“ 그렇습니다. 사주.”

“ 그 이유는?”

“ 오늘 우린 놈과 총 다섯 번의 접전을 벌였습니다.”

“ 접전을 벌였다는 건 네 생각이고, 위사들이 일방적으로 당했다.”

“ 아무튼 놈과 다섯 번을 싸웠습니다.”

“ 계속해라!”

“ 그 다섯 번을 싸우는 동안 금의위 위사들은 이백여 명이 달려들었고, 시간은 반 시진 남짓이었습니다.”

“ 그랬는데?”

“ 처음에 칠십 명이 당했고, 그 다음엔 오십 명이, 그 다음에 서른 명이, 그 후엔 이십 명이 그리고 맨 마지막엔 일곱 명이 당했습니다.”

“ 동일한 시간이라고 했느냐?”

“ 동일한 수가 달려들었습니다.”

“ 그렇다면?”

“ 상황이 힘든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놈 또한 점점 지쳐가는 중이었습니다. 아니 우리보다 더 빨리 힘을 잃고 있습니다.”

정대해가 이렇듯 자신 잇게 말하는 것은 사람은 거짓말을 해도 증거는 결코 거짓말을 못한다는 신념 때문이다. 여기서 증거는 죽은 금의위의 숫자였다.

반 시진 동안에 칠십 명을 없앴던 자가 일곱 명밖에 없애지 못했다면 그건 급격하게 힘이 떨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건 육양도 정대해와 같은 생각이었다.

갑작스럽게 기운이 떨어져다는 것은 묘봉산 상황에서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 천라지망이 효과를 보고 있다는 말이구나.”

십여 일 전부터 펼쳐진 천라지망.

그 천라지망으로 인해 묘봉산 전역에 뿌려진 살기는 독처럼 작용하여 무인의 체력과 기력을 갉아먹고 있다.

그의 몸 상태도 마찬가지였다.

묘봉산으로 들어오자마자 이곳에 거치를 정하고 지금껏 움직이지 않았다. 첫 이틀은 어떤 조짐도 없었다.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사흘째부터였다.

감각이 예민해지더니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나고, 그 짜증을 참으면서 점점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심호흡을 하면서 화를 삭였다.

이상 증상의 두 번째는 운기행공에서 나타났다.

보통 운기행공을 하고 나면 날아갈 것처럼 상쾌해지는데 이곳에서는 전혀 그런 기분을 느낄 수가 없었다. 마치 볼일을 보다가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나온 것처럼 찜찜함이 계속 따라다녔다. 문제는 그러한 증상들이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는 것이었다.

“ 이미 묘봉산 전역에 뿌려진 살기는 독으로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주.”

“ 문제는 놈뿐만 아니라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는 우리 대원들까지도 그 독에 당하고 있다는 거다.”

“ 하지만 우린 인원수가 많고, 적은 열 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 서로 기력이 떨어지는 상황이라면 인원수가 많은 우리가 더 유리하단 말이냐?”

“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 금철은 어떻게 됐느냐?]

갑자기 육양의 목소리가 전음으로 바뀌었다.

사실 그가 묘봉산에서 나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우포 금철 때문이었다. 그를 잡아 조천신이 두심향을 잡아둔 이유를 알아내기 전에는 결코 내려갈 수가 없었다.

[ 지금쯤 작전을 시작했을 겁니다.]

정대해 역시 전음으로 대답했다.

[ 접니다.]

바로 그때 정대해의 귓전으로 전음이 날아들었다. 그 전음의 주인은 팔사의 수장인 일사 나염무였다.

[ 어떻게 됐느냐?]

[ 지금 지하에 있습니다.]

[ 수고했다.]

정대해는 육양을 보았다.

“ 무슨 일이냐?”

방금 정대해가 누군가와 전음을 나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육양이 물었다.

“ 이곳으로 데리고 왔답니다. 사주.”

“ 그랬단 말이지.”

육양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 지금 보시겠습니까?”

“ 그래야지.”

육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 모시겠습니다.”

정대해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복면은 준비했느냐?”

육양은 정대해를 따르며 물었다.

“ 준비해 두었습니다.”

“ 아무리 봐도 여긴 너무 잘 고른 것 같아.”

육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가운 동굴 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있는 이곳은 묘봉산 동쪽에 위치해 있는 일출곡이다. 계곡이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어, 일출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듯했다.

일출곡은 특이한 계곡이다.

입구는 동굴처럼 좁고 안쪽은 상당히 넓다. 좌우측은 물론이고 안쪽도 높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햇빛이 있으면 한겨울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따듯하다.

절벽의 높이도 이십여 장으로 아주 높아서 날짐승의 침입도 없다. 게다가 아래쪽에서 십여 장 높이까지는 계곡 안쪽으로 기울어진 구조로 돼 있다.

한 번에 십 장 이상을 날아오르거나 날아 내려갈 능력을 보유하지 못한 무인은 침입이 불가능하다.

바람, 짐승, 무인의 침입을 완벽하게 막아주는 곳.

그곳이 바로 일출곡이었다.

육양의 처소는 계곡 입구에 위치한 동굴 안이었다. 그 동굴 또한 상당히 크고 깊어 전혀 불편함이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 나오십니까?”

동굴을 나서자 도를 쥔 자가 육양 앞으로 다가오더니 고개를 숙였다. 상체가 유난히 발달된 이자는 척살사 최강조직인 참살대의 대주 살도 악기였다.

“ 대원들은?”

육양은 악기를 보며 물었다.

“ 절반은 외부에 배치했고, 절반은 안쪽으로 배치했습니다.”

“ 개미새끼 한 마리 접근해서는 안 된다.”

“ 알고 있습니다. 사주.”

“ 수고해라.”

육양은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악기의 말처럼 계곡 곳곳에서 삼엄한 기운이 감지됐다.

“ 본 사람은 없었느냐?”

중간 정도 왔을 때 육양은 정대해를 돌아보며 물었다.

“ 시체를 운반하는 일로 꾸몄으니까 의심하는 자는 없을 겁니다.”

그늘이 진 계곡 안쪽은 다른 곳보다 더 어두웠다.

금철을 잡아둔 곳은 절벽 아래쪽 동굴 안이었다.

“ 복면 여기 있습니다.”

동굴 앞에 다다르자 정대해는 복면을 내밀었다. 육양은 복면을 쓰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삼 장가량 직진하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가자 폭이 이 장 가량 되는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금철은 그 공간 중앙에 쓰러져 있었다.

“ 깨워라!”

육양의 말이 떨어지자 정대해는 지풍을 쏘았다.

“ 끄응!”

나직한 신음과 함께 금철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 여긴....’

금철은 어리둥절했다.

분명 부하들이 있는 곳을 둘러보다가 처소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런데.....

“ 헉!”

그의 입에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혈도가 제압당한 듯 단전의 내기가 끌어올려지지 않았다. 그는 급하게 동정을 살폈다. 바로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 설마 연우강?’

스악!

“ 크아악!”

발뒤꿈치에서 씀벅한 느낌이 들더니 곧이어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금철은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내기를 끌어올리는 혈도만 제압당했을 뿐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 허억!”

금철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발뒤꿈치가 쩍 갈라져 있고, 그곳으로부터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발뒤꿈치를 잘라낸 자를 보았다.

복면을 쓴 사내 두 명이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 누, 누구요?”

금철은 겁에 지린 얼굴로 물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살아나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누군가를 납치하게 되면 납치한 이유를 먼저 말한 다음에 원하는 걸 얻어내지 못하면 고문을 하고, 고문당한 자의 정신을 완전하게 망가뜨린 다음에 비로소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뒤에 있는 자는 일언반구도 없이 발뒤꿈치 힘줄을 잘라버렸다. 그 힘줄이 잘리면 무인의 생명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전문가들이란 소리였다.

그런 자들에게서 살아남는 방법은 한 가지다.

“ 뭘 원하는지 모르지만 날 죽이는 게 빠를 거요.”

복면인들이 원하는 뭔가를 발설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물론 몸은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저들이 바라는 걸 말하게 되면 남은 건 죽음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그런 식으로 죽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복면을 했다는 것은 얼굴을 아는 자라는 뜻이다. 아니 설사 아는 자라고 해도 여기서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복면을 할 이유가 없다.

원하는 걸 얻어내면 바로 죽이면 되니까.

결국 복면을 했다는 건 만일에 대비한다는 뜻이 되고, 이곳에서 죽이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지만 말하지 않고 버티면 살아날 가능성이 있었다.

“ 그럼 전부 잘리게 돼.”

“ 병신이 된다고 해도 살고 싶소.”

“ 그럼 말을 해라!”

“ 말을 하면 살려줄 거요?”

“ 살려준다고 하면 말을 할 거냐?”

“ 여기선 불가능하오.”

“ 난 머리 굴리는 놈을 싫어해.”

정대해와 금철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육양이 복면을 벗었다.

“ 다, 당신은?”

금철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복면을 한 자가 육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복면을 하고 있는 이상 살아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복면을 벗어버린 것이다. 더 이상은 살아날 가능성은 없었다.

“ 한 가지만 말하면 편하게 해주겠다. 금철.”

육양은 작은 도를 들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 어차피 죽을 거라면 의리를 택하겠소. 사주.”

“ 내가 뭘 원하는지 아는 것 같구나.”

“ 조 사주가 두심향을 납치한 이유를 알고 싶은 거 아니오.”

“ 이유뿐만 아니라 숨겨둔 장소도 알고 싶다.”

“ 한가지만 말해 주겠소. 두심향이 지닌 비밀을 얻으면 진무사들을 뒤로 하고 차기 영반이 될 거요.”

“ 더욱 구미가 당기는 구나. 아무튼 잘 견뎌주길 바란다. 그리고 언제든지 마음이 바뀌면 말하거라. 그럼 고통 없이 저승으로 보내주겠다.”

육양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금철의 왼 다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발뒤꿈치 힘줄을 향해 소도를 가져다 댔다.

“ 전 소리를 차단하겠습니다. 사주.”

정대해는 곧바로 밖으로 나왔다. 동굴 밖에는 나염무를 비롯한 팔사가 주변을 경계하며 서 있었다.

“ 소리를 찬단해 주시오.”

“ 알겠습니다.”

나염무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동굴 주변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정대해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육양이 금철을 고문하는 그 시각, 연우강과 봉연은 일출곡을 이십 장 남겨둔 지점에 도착해 있었다.

“ 저쪽?”

연우강은 오른편을 가리켰다.

“ 얼마나 있는 것 같아요?”

봉연은 천리지청술을 끌어올리며 물었다. 상당히 많은 인기척이 일출곡 주변에서 감지되는데 정확한 숫자는 알 수가 없었다.

“ 최소 이백 명이야.”

“ 그럼 백 명 정도는 없애야 한다는 말이네요?”

“ 응!”

“ 끄응!”

봉연은 신음을 내뱉었다.

자밀원의 주요 임무는 암살, 즉 살인이다. 그동안 많은 임무를 맡았고, 암살을 했지만 이번처럼 사람을 많이 죽인 적은 없었다. 이건 완전히 도살 수준이었다.

“ 힘들어?”

연우강은 봉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 연 공자는 괜찮아요?”

봉연은 되물었다.

“ 뭐가?”

“ 묘봉산으로 들어와서 처음 며칠만 빼고는 쉬지 않고 목을 따고 다녔잖아요.”

“ 그러니까 사람을 그렇게 쳐죽였는데도 멀쩡하냐는 말?”

“ 그렇다고 볼 수 있겠네요.”

“ 그래서 난 슬퍼, 봉연.”

“ 왜 슬퍼요?”

“ 왜냐면....”

연우강은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려갔다.

봉연은 멀어지는 연우강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연우강의 전음이 들려왔다.

[ 아무런 느낌이 없거든.]

텅 빈 널따란 공간에서 들려오는 듯한 공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봉연은 멍한 얼굴로 어둠 속으로 잠겨들어 가는 연우강을 보았다.

자밀원 원주이고 그동안 많은 사람을 없앴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 난 후에는 늘 폭음을 하곤 한다. 그런데 그는 아무런 느낌도 없단다.

[ 봉연 전쟁터에서는 감상에 젖는 순간 죽는다.]

[ 아, 알았어요.]

봉연은 화들짝 놀라며 오른편으로 몸을 날려갔다. 곧 그녀의 신형이 허공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

“ 젠장!”

곽상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투덜댔다.

참살대 최고참 중의 한 명인 곽상길ㄹ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바로 작전 나갔을 때 내리는 비다. 저녁 무렵이면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부는 듯하더니 지금은 비를 뿌려대고 있다.

“ 씨팔! 도대체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 건지.”

바로 그때 옆에서 욕설이 들려왔다.

곽상길은 고개를 돌렸다.

반 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젊은 청년이 볼일을 보고 있었다. 그는 육개월 전에 참살대 대원이 된 우상기였다.

“ 지금 뭐라고 했지?”

곽상길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그가 아는 우상기는 반드시 해야 하는 말 아니면 입을 열지 않는 과묵한 자였다. 그런데 그가 욕설을 뱉어낸 것이다. 그것도 최고참인 자신 앞에서.

“ 선배는 이 짓이 재밌소?”

“ 이런 썅노무...”

“ 지랄하고 있네.”

“ 개자식!”

결국 곽상기른 참지 못하고 우상기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우상기는 이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당장 빌지 않으면 내가 치도곤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의 이를 뽑아버리겠다.”

그는 우상기 앞에 서자마자 곧바로 주먹을 내질렀다.

“ 다쳐 인마.”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고, 우상기의 옆구리로부터 검은색 광채가 튀어나와 곽상길의 목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곽상길의 입이 쩍 벌어졌다.

목 안으로 스며들어간 그것은 다름 아닌 작은 비수였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곽상길은 우상기 뒤편에 서 있는 자를 보았다.

‘ 넌?’

곽상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곳에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내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 사내가 연우강이라는 사실을 곽상길은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몰랏다. 다만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왜 저곳에 서 있는지 그것만 궁금했다.

[ 이름이 뭐지?]

연우강은 전음을 보내며 곽상길 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숨이 끊어진 곽상길은 쓰러지는 중이었다.

연우강은 얼른 곽상길을 부축했다. 그러고는 우상기의 시체와 함께 나무 밑으로 가져다 놓았다.

“ 스무 명!”

그는 차갑게 웃으며 나무 밑을 나와 걸음을 옮겼다. 금의위 위사들은 오 장 간격으로 늘어서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 적당한 때에 비가 와서....’

연우강은 히죽 웃었다.

차가운 기온 때문에 경계를 서는 자들 대부분이 풀숲이나 나무 또는 바위 아래쪽으로 들어가 있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내린 비로 인해 작은 소리는 들려오지도 않는다. 살인을 하기엔 더할 나위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연우강은 커다란 바위가 있는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위 아래쪽에는 금의위 위사 한 명이 팔을 슥슥 비비며 서 있었다.

“ 비를 좋아하는 새끼는 좋겠다.”

“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연우강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맺혔다.

잔뜩 억눌린 뭔가를 표출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욕구불만에 차 있는 자가 내뱉는 듯한 느낌의 목소리였다. 지금껏 만나고 없앴던 자들이 대부분 그랬다. 그것은 바로 묘봉산 전역에 깔린 살기 때문이다.

제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경우라 할 수 있다.

사냥을 하기 위해 뿌린 살기가 지금은 저들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중이고, 저러한 증상은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심해진다.

“ 긴장을 풀지 않으면 넌 자해를 하게 될 거야.”

연우강은 사내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끊이없이 이어지는 긴장 상태의 첫 번째 증상은 짜증이다.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싸움을 하게 되고 그 단계를 지나면 마침내 자해를 하게 된다.

흑랑기에 있을 때도 그랬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살놀이를 시작하게 된다.

“ 하지만 넌 걱정할 필요 없어. 왜냐면 여기서 죽을 테니까?”

“ 무슨 소리야?”

사내는 눈을 치뜨며 물었다.

스악!

바로 그때 사내의 목을 향해 검은 광채가 쏘아져 나갔다 사내는 멍한 얼굴로 그 광채를 바라보았다. 광채가 목 안으로 들어간 듯 숨이 답답해지고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 넌?’

그가 마지막으로 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사내의 목소리는 입을 뚫고 나오지 못했다.

목 안으로 검은 광채가 스며드는 순간 성대가 가루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사내를 없앤 연우강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 겨울밤은 유난히 길지.’

연우강은 서두르지 않았다.

천리지청술을 펼쳐 상대를 확인하고 자연스럽게 다가가서는 금의위 위사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연우강이 환영축골공으로 금의위 위사를 없애고 다닌다면 봉연은 여자를 신분을 적극 활용했다.

철버덕!

봉연은 빗물에 미끄러지면서 소리를 냈다.

‘ 응?’

느닷없이 소리가 들려오자 채낙기는 깜짝 놀랐다. 그는 조심스럽게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헉!’

채낙기는 황망히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를 틀어막으려고 한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뗀 그는 눈을 비볐다.

오 장여 떨어진 곳에 여자가 엎드려 있었는데 상의를 입지 않은 듯 새하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여자 속살을 보자 경계심보다는 욕정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더구나 여자는 쓰러진 채 미동도 없는 상태.

채낙기는 침을 꿀꺼 삼키며 여자 곁으로 걸어갔다.

그는 천리지청술을 펼쳐 동료들이 있는지를 살폈다. 다행히 십여 장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봉연 앞에 선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봉연은 엎드린 자세였는데, 겨드랑이 아래쪽으로 눌린 가슴이 비어져 나와 있는 것이었다. 그 비어져 나온 가슴 위로 빗방울이 세차게 떨어지고 있었다.

채낙기는 저도 모르게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물컹하고 매끈한 가슴이 만져졌다.

채낙기는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봉연을 안고 왼편으로 향했다. 그곳은 경계 지역 밖이라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

채낙기의 하물은 이미 팽창하여 걸음을 걷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봉연의 얼굴로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봉연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채낙기는 손으로 봉연의 얼굴을 받쳐 올렸다.

바로 그때였다.

훅!

봉연의 입에서 튀어나오더니 작은 물체가 쏘아져 나왔다. 그 물체는 정확하게 채낙기의 목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 컥!’

신음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채낙기는 놀란 눈으로 봉연을 보았다.

지금껏 죽은 듯이 있던 그녀가 공격을 해와서 놀란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진 이유는 자신이 봉연을 안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작전을 펼치고 있는 중이고, 금의위 위사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적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난생처음 보는 여자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 섭혼요마신공에 걸려들면 누구나 다 그렇게 되니까.”

‘ 새, 색공.’

채낙기의 정신이 급격하게 흐려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신형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하지만 채낙기가 쓰러지는 소리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봉연이 그보다 먼저 채낙기의 몸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 힘들어 죽겠네.”

그녀는 채낙기를 내려놓으며 쫑알거렸다.

그런데 그곳에는 채낙기의 시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커다란 나무 주변으로 수십 구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 그냥 확 쓸어버렸으면 좋은 텐데.”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옷을 내려 몸을 추슬렀다.

“ 그래도 열심히.. 어?”

몸을 돌리던 그녀의 얼굴이 의아하다는 듯 굳었다.

봉연은 급하게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곧이어 그녀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그녀는 옷을 다시 위로 올려 가슴을 드러내놓고는 조금 전 있던 자리로 몸을 날렸다. 키 낮은 풀이 가득한 곳에 몸을 내린 그녀는 얼른 엎드렸다. 그러고는 가슴을 땅에 잔뜩 짓누르고 엉덩이에 간신히 걸려 있던 바지를 쑥 내렸다.

달덩이처럼 풍만한 엉덩이가 빗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엉덩이를 슬쩍 들어올리며 섭혼요마신공을 한껏 끌어올렸다.

툭!

바로 그때 얼굴 앞으로 뭔가가 떨어졌다.

봉연은 실눈을 뜨고 그것을 보았다.

바로 눈앞에 떨어진 것은 비에 젖은 갈대였다.

“ 머리에 꽂아.”

“ 머리에 꽂으라고요?”

“ 그런 다음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춤을 추면 돼.”

“ 콧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봉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풀어헤친 머리에 꽃을 꽂고 빗속에 춤을 추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바로 저잣거리에 나가면 꼭 한 명씩 있는 미친 사람의 모습이었다.

“ 흥!”

그녀는 발딱 일어났다.

“ 지금껏 그렇게 해서 놈들을 없앤 거야?”

연우강은 봉연 앞으로 쪼그려 앉으며 물었다.

시간이 조금만 있었어도 그녀를 덮쳐버렸을 정도로 그녀의 모습은 선정적이었다.

“ 가진 재주가 그것밖에 없는데 어떡해요?”

“ 여기를 울렁거리게 하는 게 색공이야?”

연우강은 제 가슴을 가리켰다.

“ 섭혼요마신공이라는 색공이에요.”

“ 이름은 괜찮네.”

“ 이름만 거창하면 뭐해요. 사내 하나도 홀리지 못하는데.”

그녀는 샐쭉한 얼굴로 일어났다. 그러고는 바지를 올리고 상의를 내려 단추를 채웠다.

“ 저쪽에 있는 죽어있는 자들은 홀린 거 아냐?”

“ 저것들은 암컷만 보면 물건부터 들이미는 짐승들이지 사내가 아니라고요.”

“ 너처럼 요물 덩어리가 색공을 펼치는 데 가만있으면 그게 사내야? 물건부터 들이밀지 않으면 사내가 아냐, 인마.”

연우강은 어이없는 얼굴로 봉연을 보았다.

그녀에게 죽은 금의위 위사들은 휴식을 취하던 자들도 아니고 작전 중이었다. 긴장한 채로 경계를 서고 있는 자들을 유혹해서 없애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녀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 연 공자는 들이밀지 않았잖아요.”

“ 물건부터 들이민 놈들은 다 죽였잖아.”

“ 헹! 설마 잠까지 잔 연 공자에게 살수를 쓰려고요.”

봉연은 배시시 웃었다.

“ 그렇겠지?”

“ 당연히 그렇죠. 연 공자께 살수를 쓰는 일은 죽어도 없을 테니까 마음껏 안아도 돼요.”

“ 알았어. 다음엔 절대 기회를 놓치지 않을게.”

연우강은 몸을 돌려 일출곡 입구로 걸어갔다.

“ 몇 명이나 죽인 거죠?”

“ 넌?”

“ 칠십 명 정도?”

“ 그럼 밖에 이백 오십 명 정도가 있었나 보다.”

“ 어떻게 죽였어요?”

“ 코앞까지 걸어가서 이걸로 목을 그어버렸지.”

연우강은 허리춤에서 사망마비 하나를 꺼내 봉연의 눈앞으로 가져갔다.

“ 그들이 가만있어요?”

“ 당연히 가만 있을 수밖에 없지.”

“ 왜요?”

“ 동료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 아!”

그제야 봉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그 궤짝은 일을 끝내고 다시 메고 온 건가요?”

“ 그게 있으면 얼굴을 바꿔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연 공자 혼자사 백팔십 명을 없앤 셈이네요?”

“ 동작 빠르지?”

연우강은 봉연을 빤히 보았다.

“ 네, 그런 것 같아요.”

봉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두 사람은 일출곡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 봉연 너는 여기서 입구를 틀어막고 있어.”

연우강은 계곡 안쪽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 혼자 들어가게요?”

“ 누군가 한 명은 도망치는 놈들을 없애야 하잖아.”

“ 알았어요. 이곳은 제가 맡을게요.”

봉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감당하기 힘들다 싶으면 그냥 놔둬도 돼.”

연우강은 들고 있던 철립을 눌러쓰며 말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일출곡 안으로 들어갔다.

‘ 살려서 보내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봉연은 일출곡 안으로 들어가는 연우강의 등을 가만히 보았다. 궤짝을 짊어지고 있는 그의 모습이 무척 힘겹게 보였다.

문득 일을 시작하기 전 그래서 더 슬프다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수백 명을 죽이고 나서 몸에 밴 피 냄새가 사라자기도 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더 슬픈 사람.

그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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