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비사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로 금철은 만신창이었다. 살가죽을 벗겨놓은 것처럼 온 몸은 피에 젖었고, 팔이며 다리는 아무렇게나 꺾여 있었다.
금철은 해체된, 아니 분해된 상태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빛은 아직 살아 있었다.
결코 이렇게 개죽음을 당할 수 없다는 의지 때문인지 아니면 동료에게 당한 자신의 처지가 원통해서인지 그의 눈빛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렬해졌다.
“ 어쩌면 육 사주도 조현 사주와 같은 운명이 될지도 모르겠소.”
밖에서 써우는 소리가 들려오자 금철은 비아냥댔다.
“ 전국옥새 때문에 두심향을 납치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금철.”
천천히 칼질을 하고 있던 육양의 손이 멈췄다.
“ 흐흐흐! 유도심문에 대처하는 법은 금의위에 들어올 때 이미 완벽하게 배웠소. 사주.”
“ 제대로 배운 모양이구나.”
육양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전국옥새 때문이라는 건 단지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정확하게 무엇 때문에 두심향을 납치했는지 그걸 알아야 하는데 금철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다.
“ 난 제대로 배웠는데 사주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 같소.”
“ 내가 뭘 제대로 배우지 못했단 말이냐?”
“ 고문의 기본은 희망인데 그걸 잊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오.”
“ 희망?”
“ 고문을 당하는 당사자는 살아날 희망이 있을 때 머릿속에 있는 걸 꺼내놓는다는 뜻이오. 결코 고통 때문에 꺼내놓지는 않소.”
“ 넌 희망을 잃었단 말이냐?”
“ 당신 같으면 이런 몸으로 살아갈 수 있겠소?”
“ 없겠지.”
“ 크악!”
“ 으아악!”
“ 아악!”
바로 그때 지상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육양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다수의 비명이 들려왔다는 건 팔사가 당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 나가서 함께 싸우는 게 낫지 않겠소? 그래 봐야 전부 죽겠지만.”
“ 우리가 당할 걸로 보는 모양이구나.”
“ 당신에게 고문을 당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인데 말이오.”
“ 어떤 생각이 떠올랐단 말이냐?”
“ 연우강이 조현 사주를 죽인 이유가 떠올랐다는 거요.”
“ 금의위를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죽인 게 아니란 말이냐?”
“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나 조천신 사주를 노리고 조현 사주를 죽인 거였소.”
“ 우리를 노렸다고?”
“ 그렇소. 육 사주. 그런데 재수 없게 당신이 걸려든 거요. 그래도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머잖아 조천신 사주도 이곳으로 올 것 같으니까.”
“ 크악!”
“ 아악!”
또다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육양은 시선을 들어 출구를 보았다.
맨 처음에 한 번 조금 전에 세 번 그리고 지금은 두 번이다. 비명으로 보면 총 여섯 명이 당했다는 말이 된다.
육양은 고개를 돌려 정대해를 보았다.
“ 분석력은 금철이 저보다 더 뛰어납니다.”
“ 그럼 연우강이 조현을 없앤 게 나나 조천신 둘 중 한 명을 노리고 한 짓이란 말이냐?” 부패한 자가 득세하고, 비리를 저지른 자가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장 “ 그런 것 같습니다.”
정대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 가자.”
육양은 지금껏 고문에 사용했던 도에 묻은 피를 금철의 몸에 슥슥 닦아서 갈무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냥 가는 거요?”
금철은 육양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 조천신이 두심향을 잡아간 이유를 아직 말하지 않았으니까.”
육양은 걸음을 옮겼다.
“ 맞소.”
막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금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뭐가 맞다는 말이냐?”
“ 그가 두심향을 납치한 이유는 바로 전국옥새 때문이오.”
“ 정말로 두심향에게 전국옥새가 있단 말이냐?”
“ 조천신 사주에게 전국옥새에 대한 말을 처음 말한 사람은 관무평이오.”
“ 관무평이면 십여 년 전에 두심향에게 접근했던 그자를 말하는 거냐?”
“ 조천신 사주의 친구였소.”
“ 그럼?”
“ 누군가 내기를 하자면 난 두심향에게 전국옥새가 있다는 쪽에 걸겠소.”
“ 있다는 말이구나.”
“ 내 생가이오.”
“ 네 생각이 그렇다면 맞겠지. 그런데.....”
육양은 금철을 가만히 보았다.
“ 왜 지금껏 버티다가 이제 말하냐는 거요?”
“ 그렇다.”
“ 고문은 당신보다 연우강이 더 잘할 것 같아서요.”
“ .......!”
육양은 말없이 금철을 보았다.
연우강이 고문을 더 잘할 것 같다는 말은 싸움이 끝나고 이곳으로 들어올 사람이 연우강이라는 말이다. 즉 자신이 죽는다는 뜻인 것이다.
육양은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 그러니까 내가 연우강에게 죽는다는 말이구나.”
“ 내 얼굴에 발을 얹고 살짝 힘만 가하면 되오. 사주. 당신을 원망하지 않겠소.”
“ 이 안으로 연우강이 들어오는지 내가 들어오는지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라, 금철!”
육양은 차갑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 날 죽여주시오. 사주!”
금철은 멀어지는 육양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육양은 돌아보지 않았다.
“ 날 죽여라. 육양. 날 죽이란 말이다. 이 개자식아!”
금철의 절규를 뒤로하고 육양은 동굴 밖으로 나왔다.
예상대로 동구 밖에는 팔사 중 여섯 명이 죽임을 당했고, 남은 사람은 일사와 이사 두 명뿐이었다. 육양과 정대해는 걸음을 옮겨 두 사람 사이로 들어갔다.
육양은 시선을 들어 연우강을 보았다.
검은 철립을 쓰고, 검은 옷을 걸치고, 검은 궤짝을 멘 그동안 말로 들어왔던 그대로였다.
“ 네가 연우강이구나.”
육양이 먼저 입을 열었다.
“ 난 궁금해, 육양!”
“ 뭐가 궁금하단 말이냐?”
“ 남들이 삼사의 사주를 대단하게 볼지 모르지만 권력자들 틈바구니에 서면 넌 금향도 함무로 출입하지 못하는 최말단에 불과하잖아. 반면에 양성일 장군은 한 푼도 없는 상황에서도 금향으로 들어가 공짜 술을 먹고 나올 수 있는 신분이고.”
“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들도 혈잔수를 펼쳐 가루로 만들었다.
“ 돈을 받고 살인을 하는 살수라면 상관없지만 관인이라는 종자들은 자기보다 직급이 높은 자는 건들지 못해. 왜냐면 자칫 잘못하면 그 일이 출세의 발목을 잡거나, 출세하고 나서 몰락의 길로 유도하기도 하기 때문이지. 따라서 너첯럼 최말단이 쳐다보기도 힘든 상대를 없애기 위해서는, 네 미래를 책임져 줄 누군가로부터 은밀하게 명령을 받아야 한다는 거야. 내가 궁금한 사람은 바로 그 누군가야.”
“ 내가 양성일을 죽였다고 확신하느냐?”
“ 내가 겁나?”
연우강은 육양을 빤히 보며 말을 뱉었다.
“ 네놈이 겁이 났다면 이곳으로 나오지도 않았을 거다.”
육양은 태연한 듯 맞받아쳤다.
“ 겁이 나지 않으면 자신이 한 일을 밝히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 ........ 그렇구나. 그를 죽은 사람은 나다.”
잠시 연우강을 바라보던 육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 양성일 장군 급이면 공오인이 명령을 내린 건 아닐 테고, 남경왕 주진무?”
“ 이젠 남경왕 전하의 이름도 막 부르는구나.”
“ 원래 앞에 없으면 나랏님도 이 새끼 저 새끼 하는 거잖아. 그보다 내 말 맞아?”
“ 그건 네가 직접 알아보거라.”
육양은 도를 뽑아 들며 말했다.
“ 그럼 나중에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잡았다.
“ 참! 이건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절대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 저 뒤에 혈루향이 기다리고 있기도 하지만, 도망치는 놈은 삼족을 멸해 버릴 테니까?”
“ 네가 무슨 수로 삼족을 없앤단 말이냐?”
“ 내게는 유설연이 있잖아. 그 녀석이 황제 앞에서 아양만 조금 떨면 최소한 삼족까지는 일허게 만들 수 있을 거야. 설연 입장에서도 눈엣가시 같았던 놈들의 가족을 없애는 거니까 마다할 이유도 없고.”
“ 정말 그렇게 하겠단 말이냐?”
육양의 얼굴이 굳었다.
“ 그건 좀 심하지? 양성일 장군을 죽였다고 삼족을 멸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좀 심하네. 게다가 삼족을 없애려면 사건도 그럴싸하게 만들어야 하고, 황제의 재가까지 받아내야 하니까.”
“ 황제의 재가를 받아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놈!”
“ 내 생각도 그래, 그래서 가족만 없애는 걸로 하는 게 낫겠어. 봉연.”
연우강이 나직하게 봉연을 불렀다.
“ 육양 저자는 본처로부터 낳은 자식이 다섯 명인데 전부 딸이에요. 그리고 부인 모르게 첩실을 들여서 아들을 봤는데 두 명이 있고요.”
봉양의 말이 끝나자 육양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 육양뿐만이 아냐. 너희들 정부 마찬가지야. 난 누군가가 내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가는 꼴은 죽어도 못 봐. 그래서 일을 할 때는 항상 후환을 남기지 말자는 신조를 가지고 살아.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 자리에서 도망쳐도 너희들 가족을 없앨 테고, 내 손에 죽어도 너희들 가족은 전부 죽여 없애 버릴 거야.”
연우강의 말을 듣고 있언 네 명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설마 연우강이 가족까지 들고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 저, 정말 그렇게 할 생각이냐?”
나염무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 가족을 인질로 잠은 건 너희들이 먼저 시작했잖아. 넌 그런 눈으로 날 보면 안 돼, 나염무.”
“ 그럼 우리가 가족을 지키는 방법은 없다고 봐야겠구나?”
이번엔 육양이 물었다.
“ 아니, 딱 한가지가 있어.”
“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란 말이냐?”
“ 그렇게 어려운 걸 시킬 수는 없잔아.”
“ 하면?”
“ 간단한 방법이 있어. 그건 바로 날 죽이는 거야.”
“ 재미있는 말이구나.”
육양은 차가운 눈으로 연우강을 노려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이동하자 나염무, 범지상, 정대해도 무기를 틀어쥐고 연우강을 향해 걸었다.
“ 아주 마음에 들어, 너희들은 몰라도 너희들 가족을 죽일 때는 고통 없이 죽여줄게.”
“ 비열한 새끼!”
파앗!
먼저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린 사람은 팔사의 둘째 이사 범지상이었다.
범지상은 커라단 붕천혈우도라고 불리는 무거운 도를 사용하는 무인이었다.
순식간에 연우강과 마주한 그는 번쩍 들어 올린 도를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붕천혈우도법의 일초인 단지도였다.
파앙!
강력한 소성이 붕천혈우도에서 흘러나오고 연우강 머리 위쪽 대기가 쩍 갈라졌다.
연우강은 왼손을 들어올렸다. 왼손에는 손괭이가 들려 있었다.
카카캉!
거대한 도와 작은 손괭이가 부딪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파는 엄청났다. 땅이 푹푹 파이고, 폭풍우가 치는 것처럼 바람이 불어 나왔다.
“ 차앗!”
두 무기에서 쏟아져 나온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나염무의 입에서 우렁찬 기합이 흘러나왔다.
나염무는 검을 쓰는 무인이었다. 나염무의 검은 참혼이란 이름을 지녔는데, 그가 익힌 귀령참혼검법을 줄여 부르는 말이라고 했다.
앞으로 쭉 내민 그의 검끝에서 검은 광채가 쏘아져 나간다. 그것은 귀령이라고 부르는 검탄강기였다.
세 개의 검탄강기는 빠른 속도로 연우가을 향해 쏘아져 갔다.
연우강의 오른손에 들린 낫이 번개처럼 휘둘러졌다.
카앙! 카앙! 카앙!
정확하게 세 번의 소리가 흘러나오고, 나염무가 쏜 검탄강기가 와해ㄷ됐다.
“ 차앗!”
검탄강기 세 개를 쳐낸 연우강은 곧바로 왼손을 들어올리면서 범지상의 가슴을 향해 다가들었다.
“ 어림없다. 연우강!”
범지상은 곧바로 손에 힘을 풀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 이번엔 나다!”
범지상이 허공으로 솟구치는 순간 지켜보던 육양이 도와 하나가 돼 쏘아져 왔다. 빠르게 다가오고는 있지만 육양의 공격 또한 도탄강기였다.
연우강의 왼손이 빠르게 움직이고 육양이 쏘아낸 도탄강기 또한 금세 해소됐다. 바로 그때 위로 솟구쳐 올랐던 범지상이 벼락처럼 연우강을 덮쳤다.
붕천혈우도의 이 초인 단천도였다.
오 장여가 넘게 남았는데도 붕천혈우도에서 흘러나온 기운은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 당신이군.”
연우강은 곧바로 바닥을 차고 날아올랐다.
이곳에 있는 네 명중 가장 강자는 일사인 나염무가 아니라 도를 쥔 범지상이었다.
“ 내 검도 있다, 연우강.”
“ 나도 있다.”
“ 내검도 받아야 할 거다.”
나염무의 검에서는 반탄강기가, 육양의 도에서는 도탄강기가, 그리고 정대해는 검을 들고 직접 몸을 날렸다.
정대해가 노리는 곳은 연우강의 등이었다.
빠르게 날아가는 연우강을 노려보았다.
그가 노리는 순간은 범지상과 연우강의 무기가 부딪치는 순간이었다. 비록 찰나라는 말이 딱 어올릴 정도로 짧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에는 아무리 강한 고수라고 해도 무방비 상태가 된다. 그 순간 검을 찔러 넣을 수만 있다면 오늘 승자는 자신들이 될 터였다.
“ 놈!”
콰아앙!
이를 악물고 있는데 바로 앞에서 커다란 폭음이 들려왔다. 정대해는 전 내력을 검에 주입하면서 쭉 내밀었다. 전력을 다한 효과가 있었는지 검 끝에서 뿌연 광채가 생성됐다.
“ 크아악!”
그 순간 바로 앞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리고 검은 신형 하나가 빠르게 다가왔다.
상대가 누군지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전력을 다해 검을 찔러넣었다.
푸욱!
검은 너무나 쉽게 상대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 내가.....!”
희열에 찬 얼굴로 고함을 내지르려고 하는데 일사인 나염무의 얼굴이 느닷없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아니 나염무의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강기를 머금은 검 또한 얼굴과 마찬가지로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 아, 안 .... 크아악!”
정대해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염무의 검이 그대로 그의 미간을 뚫고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 다, 당신.......”
나염무를 노려보던 정대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의 이마에 검을 박아 넣은 나염무의 입마에도 낫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혼자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지은 미소인 듯했다.
“ 빌어먹을 영감.”
정대해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그가 쓰러짐과 동시에 나염무도 고꾸라졌다.
“ 이럴 수가....”
육양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마치 꿈속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연우강이 범지상을 향해 몸을 날릴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한 건 두 사람의 무기가 부딪친 다음부터였다.
강력한 반발력에 의해 뒤로 밀려야 할 연우강이 구렁이가 담을 넘어가는 것처럼 범지장의 몸을 타고 넘더니 그의 단전 뒤쪽에 손괭이를 박아 넣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정대해의 검이 범지상의 단전으로 파고들어갔다.
함께 공격을 하고 있던 나염무의 눈에는 정대해가 범지상을 찌른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그는 정대해가 배신했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연우강은 가족까지 전부 없애겠다고 선언한 상태가 아닌가. 나염무는 떨어지는 정대해의 이마에 검을 찔러 넣었다.
물론 정대해 한 사람만 노리고 검을 찔러 넣은 것은 아니었다. 범지상 뒤쪽에 있는 연우강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둘을 동시에 노린 일검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엄청난 광경이 벌어졌다.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연우강의 신형이 범지상을 뛰어넘고 허리춤에서 뭔가가 쏘아져 나왔다.
푸른 광채를 발하는 그것은 피할 틈도 없이 자신의 단전으로 박혀들고, 그 사이 연우강의 낫은 나염무의 미간에 박혔다.
범지상을 뛰어넘고, 손괭이로 등을 찌르고, 정대해가 배신한 것처럼 꾸미고, 암기를 날리고 낫으로 나염무의 이마를 찍는, 그 일련의 과정은 검법의 초식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임기응변과 실전과 무공의 완벽한 조화. 그것은 곧 연우강이 이미 무초식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이기도 했다.
금의위에서는 놈의 무공 정도도 파악하지 못했고, 어떤 사람인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완벽한 패배였다.
“ 네가 이겼다. 연우강. 하지만 우리는 깃털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명심해라.”
육양은 패배를 시인했다.
“ 몸통은 따로 있다고?”
“ 그 몸통을 없애지 못하면 설사 우리 가족을 전부 없앤다고 해도 넌 영원히 발을 뻗고 잘 수 없다.”
“ 그래서 내 친구에게 아주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 녀석은 내게 참 잘해주었는데, 그 친구 아버지는 지켜주지 못할 것 같아서 말이야.”
“ 그, 그도 죽이겠단 말이냐?”
육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우강이 말한 친구 아버지는 남경왕 주진무를 말하기 때문이었다.
“ 어차피 금의위를 작살냈는데, 한 명 더 추가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잖아. 하지만 아직 결정한 건 아냐. 다만 난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연우강은 허리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사망혈삭이 빠른 속도로 회수됐다.
“ 크윽!”
뇌섬이 단전에서 빠져나가자 육양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 저승에 가거든 그분께 무릎 꿇고 비는 게 좋을 거야.”
“ 내 가족은?”
육양은 간절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죽을 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그냥 죽는 거야. 육양. 죽는 놈이 살아남은 사람들까지 걱정할 필요 없어. 살 놈은 어떻게든 살고 뒈질 놈은 살려고 발악을 해도 죽는 게 인생이야.”
연우강은 오른손을 쭉 내밀었다.
촤르르!
순간 그의 손에서 사망묵환이 풀려나와 육양의 몸을 훑고 다녔다.
툭! 툭!
풀썩!
“ 크아....!”
처절한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육양의 머리가 굴러 떨어졌다.
잠시 육양을 바라보던 연우강은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육양 머리는 조천신에게 선물로 보내야겠죠?”
뒤따라오던 봉연이 물었다.
“ 그래야지.”
“ 그런데 조천신이 들어올까요?”
“ 그건 나도 모르겠어.”
“ 나 같으면 절대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조현도 죽고 육양도 죽었는데....”
“ 그는 들어올 거요, 혈루향.”
대답은 동굴 바닥에서 들려왔다.
“ 아직 살아있네?”
아래로 내려간 연우강은 금철 앞으로 쪼그려 앉았다.
“ 당신을 만나시 싫어서 육양 그에게 죽여달라고 했는데 무시했소.”
“ 이 지경을 하고도 살아 있는 걸 보니 비밀을 말하지 않은 모양이지?”
“ 그랬소.”
“ 내게도 말하지 않을거야?”
“ 알고 싶은 게 뭐요?”
“ 두심향 루주가 감금된 위치.”
“ 그녀가 감금된 곳은.......”
금철은 순순히 대답했다.
“ 이렇게 쉽게 말할 거면서 육양 그자에겐 왜 말하지 않았던 거지?”
“ 그자는 내 목숨을 가지고 흥정을 했지만 당신은 내 가족 목숨을 가지고 흥정을 할 거 아닙니까?”
“ 그러니까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말했다는 거야?”
“ 네.”
“ 만일 내가 가족을 살려주지 않으면 어쩌려고.”
“ 그건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거니까 연 공자를 탓할 수는 없죠.”
“ 내가 살려줄 거라고 확신한다는 말이네?”
“ 배신한 부하의 명예를 지켜주신 분이니까요.”
“ 그걸 알아냈어?”
“ 그 사실을 아는 자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습니다.”
“ 그럼 넌?”
“ 전 그 일을 조사한 자들과는 무관했습니다. 다만 친한 친구가 있었을 뿐이죠.”
“ 그러니까 네 친구가 속한 조직이 무상에 대한 비밀을 밝혀냈다는 말이야?”
“ 그렇습니다. 하지만 보고서를 올리고 나자 며칠 있다가 실종됐습니다.”
“ 제거됐다는 말이구나.”
“ 그런 것 같습니다.”
“ 아무튼 말해 줘서 고마워.”
“ 제 가족은?”
“ 건들지 않겠다고 약속할 게. 하지만 조천신 그놈이 건드리는 건 말리지 않을 거야.”
“ 대신 동창 소제독이 건드는 건 막아주십시오.”
“ 그것도 약속하지.”
“ 고맙습니다. 공자. 그리고 염치없지만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 그렇게 해 줄게. 금철이라고 했던가?”
“ 네.”
“ 넌 운이 좋은 놈이야.”
“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잘 가!”
연우강은 금철의 얼굴에 손다닥을 댔다.
푸스스!
순간 금철의 얼굴이 가루로 변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들도 천천히 가루로 변해갔다.
“ 갈까?”
금철의 모습이 사라지자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입구에 좋은 동굴이 있던데, 좀 쉴래요?”
봉연은 연우강을 걱정스런 눈빛으로 보았다.
연우강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러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 놈들이 들어오면 어떡하려고.”
“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잖아요. 당분간은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 그럼 그렇게 하자.”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일출곡 입구 근처에 있는 동굴로 들어섰다. 그 동굴은 육양이 머물렀던 곳으로 동굴 중앙에 놓인 화로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사망궤를 내려놓은 연우강은 뚜껑을 열고 천을 꺼냈다.
“ 이리 주세요.”
봉연은 천을 받아들고 한편에 놓인 나무 침대에 깔았다.
“ 마라천력을 과도하게 사용하고 나면 정신이 하나도 없거든.”
“ 그러니까 섭혼요마공을 받아줄 여력이 없다는 거죠?”
“ 그건 한숨 지고 나서 원하는 만큼 받아줄게.”
“ 일단 주무세요.”
봉연은 연우강을 침대로 눕혓다.
“ 넌?”
“ 둘 다 잘 수는 없잖아요. 먼저 제가 불침번을 설게요.”
“ 이거 사내 체면이 말이 아니네.”
“ 걱정말고 주무세요.”
“ 알았어.”
연우강은 눈을 감았다.
그는 금세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봉연은 잠든 연우강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야차보다 더 잔인하게 적을 도륙하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의 얼굴은 평온하다.
‘ 그가 배신을 했던 거였군요.’
그녀는 내심 중얼거렸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주무상 사건을 안 것 같았다.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 길이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알 수 있었다. 흑랑기의 전멸은 바로 주무상의 배신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무상을 배신자로 보고하지 않고 영웅으로 만든 것이다.
“ 무상 그녀석 때문이 아냐.”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연우강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네?”
“ 무상을 영웅으로 만든 이유 말이야. 그 녀석이 군왕세자라는 신분 때문도 아니었고, 나와 아주 친했다는 것 때문도 아니었어.”
“ 그럼 이유가 뭐죠?”
“ 흑랑기 대원들. 그들은 전부가 죄수들이었어. 설사 그 전쟁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돌아갈 곳이 없는 그런 녀석들이었지. 그래서 죽을 때까지 전쟁텅서 살아. 녀석들이 가진 거라고는 패배를 모르는 흑랑기 대원이라는 자존심 하나뿐이었어. 그런 녀석들이 전부 죽었어. 대장인 내가 죽은 녀석들을 위하는 길은 뭐였을 것 같아? 단 한 명의 배신자 때문에 천이백 명이나 되는 대원이 전부 죽었다고 보고를 해야 했을까? 그럴 순 없었어. 그렇게 보고를 하면 흑랑기 대원들은 동료 한 명 때문에 전멸을 당한 어리석은 녀석들이 되고 말아. 난 그걸 막고 싶었을 뿐이야.”
“ 그래서 주무상을 영웅으로 만들었던 건가요?”
“ 물론 보국천위장군이 된 무상보다는 못하고, 기억하는 자들도 없지만 그래도 욕은 하지 않잖아.”
“ 단지 그들이 놀림감이 되는 게 싫어서 주무상을 영웅으로 만든 거군요.”
“ 세상이 그런 거니까.”
“ 그랬군요.”
“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건 봉연 네가 설연 그 녀석에게 보고를 할빠 봐서야.”
“ 잊으란 말이에요?”
“ 듣지 않은 걸로 해줘. 그렇게 해줄 수 있지?”
“ 알았어요. 그만 주무세요.”
봉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연우강의 가슴에 고개를 기댔다. 그리고 잠시 그녀의 귓가에 나직하니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봉연은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강기막을 쳤다.
“ 당신이 여자였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봉연은 연우강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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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신이 육양의 죽음에 대한 보고를 받은 건 다음 날이었다. 하지만 조천신은 보고를 받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루 동안 꼼짝도 하지 않던 그의 첫 행선지는 묘봉산이 아니라 구림제독부라고 불리는 구림세가였다. 조천신이 들어서자 이연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 어쩐 일인가?”
이연은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듯 하지만 이연은 요즘 북경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수시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다.
바로 공오인의 부재 때문이었다.
이연이 상대하는 사람은 앞에 있는 삼사의 사주나 진무사가 아니라 영반인 공오인이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 미리 보고를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독.”
조천신은 먼저 사과부터 했다.
“ 무슨 보고를 말하는 건가?”
이연은 냉랭한 얼굴로 물었다.
“ 용서해 주십시오. 제독.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조천신은 고개를 조아렸다.
“ 자네 재미있는 사람이구먼. 다짜고짜 들어와서는 고개를 숙이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독.”
“ 뭘 말인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연은 찻잔에 찻물을 따르며 이야기를 들을 자세를 취했다.
“ 시작은 양성일 도독동지 때문이었습니다.”
“ 양성일 도독동지를 살해한 쪽이 금의위였는가?”
“ 그렇습니다. 공 영반의 언질을 받고 육양 사주가 나섰습니다.”
이연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숨길 수가 없었다.
“ 그랬군.”
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얼마 후에 연우강이 북경으로 들어왔습니다.”
“ 그럼 이번 일을 벌인 자가 연우강이란 말인가?”
설마 연우강이 관련돼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니 일개 양민이 금의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렇습니다.”
조천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 혼자 벌이진 않았을 테고, 동창의 지원을 받고 있는 모양이군.”
“ 정황만 잇을 뿐 아직 동창이 관여됐다는 증거는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 비밀리에 돕고 있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제독.”
“ 그렇겠지. 직접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그럼 자네들도 동창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겠구먼.”
“ 그렇습니다. 조용하게 일을 마무리하려고 했다가 이 지경이 됐습니다.”
“ 연우강에 대해서 제대로 몰랐던 게로군.”
“ 그래서 제독을 찾아왔습니다.”
“ 내게 원하는 게 뭔가?”
“ 금의위에는 놈을 상대할 만한 고수가 없습니다.”
“ 그러니까 고수를 지원해 달라는 건가?”
“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 구림세가엔 고수가 없다는 사실을 자네들이 더 잘 알고 있는 걸로 아는데, 아닌가?”
“ 구림세가에는 없지만 금산에는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금산을 아는가?”
“ 금의우에서 이십 년 넘게 근무했습니다.”
“ 말해 보게.”
“ 금산을 만드신 분은 태조 홍무제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왜 만들었는지도 아는가?”
“ 금산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먼저 구림세가를 알아야 합니다.”
“ 계속하게.”
“ 한족만의 나라를 세우길 원했던 홍무제께서는 힘이 필요함을 느끼고 대야벌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대야별에서는 동맹을 거절했지요. 그들 입장에서는 아직 날개를 펴지 못한 상태였던 홍무제를 믿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한 처사였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무력이 필요했던 홍무제께셔는 은거기인 쪽으로 시야를 돌립니다. 그분이 처음 발견한 자들은 은림이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당나라를 세웠던 이 씨 가문이었죠. 홍무제와 같은 길을 걷기로 한 은림은 다른 세력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끌어들인 자들은 대부분 대야벌과 척을 진 경험이 있는 세력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마림이란 단체가 들어오고 그 다음에는 사림, 귀림, 요림, 환림, 독림, 혈림, 해림 이 순서대로 들어왔는데 가장 먼저 들어왔던 은림까지 합치면 아홉 개의 가문, 즉 구림이 돼 구림세가라고 불렸습니다. 그들은 홍무제를 도와 명제국을 건설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 공으로 건국 초에는 절대 권력을 누렸고요. 하지만 권불십년이라고 구림세가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 그랬지.”
구림세가의 몰락은 구림세가에 권력을 쥐어주었던 홍부제로부터 비롯됐다. 그는 아들이 아닌 손자에게 황권을 물려주기 이해 숙청을 시작했는데 구림세가 또한 피하지 못했다. 홍무제는 금산을 만들고 그곳에 구림세가 무인들을 가두기 시작했다.
구림세가 전력의 절반가량을 가둔 홍무제는 훗날 건문제가 된 손자에게 충성맹세를 요구했고, 구림세가의 나머지 세력은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북경에 있언 연왕 주체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건문제는 황권을 내놓아야 했다.
건문제를 따랐던 구림세가 또한 마찬가지였다. 절반 정도 남았던 세력은 영락제에 의해 금산에 투옥되고, 구림세가 수장 가문이었던 은리만 북경에 남았다.
은림이 북경에 남은 건 살아남은 게 아니라 여덟 세력을 제어하기 위한 볼모 성격이 짙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구림세가는 세인들의 뇌리 속에서 잊혔다.
“ 구림세가 가주가 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뭔지 아는가?”
이연은 조천신을 보며 물었다.
“ 모릅니다.”
“ 황제 앞으로 가서 금산의 문을 열면 어떤 처벌이라도 감수하겠다고 맹세를 한다네. 즉 그 문을 여는 순간 우리 구림세가는 반역 가문으로 몰려 삼족이 멸문하는 처벌을 받게 되네. 그리고 금산의 문을 여는 열쇠는 금의위에 보관돼 있는 걸로 알고 있네.”
“ 저보고 그 문을 열라는 겁니까?”
“ 강요하진 않네. 다만 난 자네가 그 문을 열어주면 조 사주 자네가 원하는 한 가지 부탁들 들어줄 참이네.”
“ 금산의 문은 어명이 아니면 열려지 않습니다. 제독.”
“ 황제 폐하의 옥새만 찍힌 백지 명령서가 금의위에 있는 걸로 아네.”
“ 그, 그걸 사용하란 말입니까?”
조천신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이연이 말한 백지 명령서는 분명 있다. 하지만 그것은 국가의 안위가 달렸을 때,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할 때 사용하는 거지,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영반인 공오인도 백지 명령서를 사용할 때 수십 번도 더 생각하고 검토하곤 한다. 백지 명령서는 자신의 권한 밖에 있는 물건인 것이다.
“ 자네가 연우강을 잡아 그의 배후에 동창이 있다는 걸 증명해 내기만 하면 근신 처분은 받겠지만 그 이상의 처벌은 없을 거네. 게다가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자드이 전부 사라졌으니까 금의위 영반이 되고자 한다면 훨씬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는 거지.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 마무리되면 자네를 기다리는 간 처참한 몰락이네.”
“ 이왕 몰락할 거면 모험을 해보란 말입니까?”
“ 모험이 성공하면 대반전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리고 금산을 여는 건 마음만으로는 되지 않네.”
이연은 탁자 아래에서 붉은색 상자 두 개를 꺼냈다.
“ 그건.....”
조천신은 탁자를 보았다.
상자는 가로 삼 척, 세로 일 척으로 상당히 컸다. 표면에는 용이 조각돼 있었는데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 삼혈시라 부르는 열쇠 중 두 개네.”
“ 금산을 열 수 있는 열쇠란 말입니까?”
“ 열쇠일 뿐만 아니라 금산으로 가는 지도이기도 하네.”
“ 지도라면?”
“ 삼혈시를 담은 상자 표면에 새겨진 그림의 탁본을 떠서 합쳐야만 금산으로 가는 길이 나타나네. 더불어 금산을 열기 위해서는 열쇠가 모여야 하고.”
“ 열쇠는 총 몇 갭니까?”
“ 황제는 금산을 만들고 세 개의 열쇠를 만들었네. 그런 다음 그 중 하나를 우리 가문에 주었다네.”
“ 구림세가에 줬단 말입니까?”
조천신은 의아했다.
금산을 열 수 있는 열쇠를 만들고 그것들 중 하나를 구림세가에 줬다는 게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 그래서 홍무제가 무섭다고 한 거네. 그는 금산을 열고 싶을 때마다 삼혈시를 보며 마음을 다스리라는 의미로 우리 가문에 삼혈시 중 하나를 내린 거라네.”
“ 그랬군요. 그럼 나머지 두 개는?”
“ 하나는 홍무제 그분이 보관하고 마지막 한 개는 동창에 맡겼네.”
“ 그러면 여기 있는 건 누가 가지고 있던 겁니까?”
“ 우리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던 것과 동창에서 보관하고 있던 거였네.”
“ 마지막 하나는 황제 폐하께서 가지고 계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삼혈시는 세 개로 이루어져 있고 설사 두 개를 얻었따고 해도 황제가 가지고 있는 하나를 얻지 못하면 이무런 의미가 없다.
“ 나 또한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알고 있었네.”
“ 하면?”
“ 금의위의 북진무사를 창건하신 분이 누군지 아는가?”
“ 삼 대 황제인 영락제라고 알고 있습니다.”
“ 그럼 북진무사의 권한이 왜 그렇게 강해졌는지 아는가?”
“ 그건......”
“ 그 당시에는 황제와 독대를 했던 사람은 금의위 영반이 아니라 북진무사였네.”
“ 그럼 그 당시 북진무사에게 삼혈시 중 하나를 맡겼단 말입니까?”
“ 그렇네.”
“ 그랬군요.”
조천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이연이 금의위와 친분을 쌓은 이유가 삼혈시라고 부르는 그 열쇠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자네 짐작이 맞네. 내가 금의위 영반과 친분을 쌓았던 것은 바로 혈시를 얻기 위해서였네. 아무튼 난 자네에게 방법을 가르쳐주었네.”
이연은 상자를 조천신 앞으로 밀었다.
“ 정말로 금산을 열면 한 가지 부탁을 들어줍니까?”
조천신은 삼혈시가 들어있다는 상자를 보며 물었다.
“ 그들은 들어가기 전에 분명히 그렇게 말했네. 그들의 목을 달라는 것 같은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면 반드시 들어줄 거네.”
“ 알겠습니다. 제독.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조천신은 상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사용하지 않을 거면 다시 내게 가져다주게.”
“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조천신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조천신을 구림세가 밖으로 안내한 사람은 수신호위의 둘째인 대천무존 구양을이었다.
“ 나 같으면 모험을 하겠소, 사주.”
구양을은 대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 그게 내가 사는 길이란 말입니까?”
“ 금산에 있는 그들이 나온다고 해도 그들이 갈 곳은 구림세가밖에 없소. 하지만 구림세가는 남경왕부와 사돈집이오. 구림세가가 강해지는 건 곧 남경왕부가 강해지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되오.”
“ 참고하겠습니다.”
조천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에 올랐다.
조천신을 태운 마차는 곧 금의위를 향해 달려갔다.
한참 동안 마차를 지켜보던 구양을은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는 이연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 차가 식었습니다. 가주님.”
“ 어떻던가?”
“ 표정으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 그럼 자네 생각은 어떤가?”
“ 그 녀석은 사면초가에 빠졌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험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 그랬으면 좋겠군.”
이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 반드시 될 겁니다. 가주님. 그런데....”
“ 그곳 사정을 아느냐는 말인가?”
“ 가끔 바람이 전해오는 소식을 들을 뿐이네. 아직은 잘 살고 있다고 하더구먼.”
“ 다행이군요.”
“ 그렇지. 아무튼 내년에는 오래보다는 더 나을 것 같은 예감이 드네.”
“ 저도 그렇습니다. 가주님.”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