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213화 (213/232)

제 7장 권력과 싸우는 자

본전과 몰락 사이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니 본전이 아니라 약간의 손해가 난다고 해도 몰락보다는 훨씬 나을 터였다.

조천신은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부관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연에게 들었던 말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금산을 열어야겠다고 했다.

처음 부관들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찬성했다. 반대를 하려면 현 상황을 벗어난 대안이 있어야 하는데, 사방팔방이 꽉 막힌 사면초가의 상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판인데 구세주가 나타났으니 거절을 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그들을 더욱 편하게 해준 것은 구림세가가 남경왕부와 사돈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먼저 비밀 금고 속에 넣어둔 백지 명령서를 꺼내 빈공간을 채워 완벽한 황명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북진무사 건물 가장 깊은 곳에 보관돼 있던 붉은 색 상자를 챙겼다.

그리고 떠날 준비를 햇다.

금산은 북경 북서쪽의 팔달령 너머에 위치해 있어 일이 끝날 때까지는 돌아올 일이 없었다.

조천신은 가장 먼저 최소 인원만 남기고 반포사 대원들을 전부 묘봉산으로 보냈다. 그런 다음 부관들과 만날 약속을 하고는 은밀하게 빠져나와 서쪽에 위치한 백화산으로 향했다. 백화산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산 남쪽에 위치한 백학봉을 향해 몸을 날렸ㄷ. 백학봉은 봉우리 정상이 학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백학봉의 오 부 능선까지 오른 그는 다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바로 앞 절벽에 아담한 암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백학사란 이름의 암자는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세운 암자였다. 하지만 부모님의 극락왕생을 비는 용도보다는 다른 용도로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기초를 닦다가 우연히 발견한 동굴 때문이었다. 그 동굴을 발견하고 나서 이곳을 암자가 아닌 개인 감옥으로 사용하고 있다.

암자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주변 대기가 싸늘해졌다.

“ 나다!”

조천신은 나직하게 말하고는 암자로 향했다.

“ 어서 오십시오.”

안에서 삼십대 초반의 사내가 걸어나왔다.

이름은 조남선.

조천신이 조남선을 처음 본 장소는 금의위 시험장이었다. 조남선을 처음 보는 순간 조천신은 기절하는 줄 알았다. 조남선의 얼굴은 젊은 시절 자신을 빼다 박았던 것이다. 마치 이십 년이 젊어진 듯한 그런 기분을 맛봤다.

조천신은 자연스럽게 조남선에게 접근하여 신상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조남선은 집안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 탓에 신분을 알아보았다.

조남선은 하남성의 성도인 정주 출신이었다.

신분을 적는 칸에 가문도 적지 못하고, 부모님이 어떤 분인지도 적지 못하면 그들의 신분은 뻔하다. 보잘것없는 평민이란 소리다.

과거에는 평민이라고 해도 실력이 출중하면 뽑곤 했지만 지금은 그런 자들은 아예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예상대로 조남선은 일 차에 낙방했다.

어쩌면 너무 닮아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보다는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십 년 전 조천신은 하남성 정주에서 근무를 했고, 젊은 혈기에 많은 기녀를 섭렵했다. 그들 중 누군가 임신을 해서 낳은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혼인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었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아무튼 실의에 빠진 조남선을 데려온 조천신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부하가 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조남선은 기꺼이 수락했다.

그로부터 십년이 지났다.

이번에는 조남선 주변에 서 있는 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원래 금의위에서 잡아들인 죄수들이다. 감옥에 수감해야 할 자들 중 무공 실력이 빼어난 자들을 따로 빼돌려 부하로 삼았다. 그리고 그들을 적절하게 이용해서 정적을 제거하며 사주 자리까지 올랐던 것이다.

“ 별일 없지?”

조천신은 물었다.

“ 네.”

조남선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 계집은?”

“ 조용합니다.”

“ 그랬단 말이지.”

암자는 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서서 마주 보고 있다. 서쪽에 있는 약간 커 보이는 건물은 불전으로, 동쪽의 건물은 침실과 부엌으로 이용하고 있다.

조천신이 들어간 곳은 불전이었다.

불전 안에는 일 장 크기의 거대한 목조 불상이 놓여 있었다.

조천신은 불상을 흘끔 바라보고는 뒤편으로 돌아갔다. 정좌하고 있는 불상의 등에는 손목 두께의 고리가 달려 있었따.

조천신은 그 고리를 잡아당겼다.

덜컹!

나직한 소리와 함께 불상의 등이 열리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조천신은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동굴은 꽤 깊은 곳에 있을 뿐 아니라, 다섯 개가 이어져 있어 비밀 감옥으로 쓰기에는 최고였다.

두심향이 있는 곳은 맨 앞쪽이었다.

유등 아래 두심향은 포대기 같은 걸 덮은 채 앉아 있었다. 며칠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도도했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듯 그녀는 시선을 들었다.

“ 생각해 봤느냐?”

조천신은 두심향을 보며 물었다.

“ 전에도 말했지만 난 전국옥새를 구경한 적도 없어.”

“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이구나. 아무튼 난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두심향. 다음에 올 때도 같은 대답이면 널 저 밖에 있는 녀석들에게 던져줄 거야.”

“ 없는 걸 없다고 할 뿐 나도 할 말 없다. 조천신.”

“ 아무튼 깊이 생각하는 게 좋을거야.”

조천신은 두심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밖으로 나온 조천신은 조남선을 불렀다.

“ 이번엔 시간이 좀 걸릴 거다.”

“ 언제쯤 오실 겁니까?”

“ 이걸 받아라!”

조천신은 가지고 온 상자를 내밀었다.

“ 뭡니까?”

조남선은 상자를 받아들며 조천신을 보았다.

“ 내가 열흘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계집을 죽이고 나서 열어보거라.”

“ 힘든 임무를 맡으신 모양이군요.”

“ 임무라는 게 늘 그렇지 않느냐?”

조천신은 조남선의 어깨를 툭 치고는 몸을 돌렸다.

“ 사주님!”

조남선은 멀어지는 조천신을 불렀다.

“ 말하거라.”

“ 다른 사람은 어떻게 여길지 모르지만 전 늘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고맙구나. 나도 궁금한 점이 있구나.”

“ 말씀하십시오.”

“ 네 아버지는 계시느냐?”

“ 전 사생아였습니다.”

“ 그랬구나. 그럼 아버지 이름도 모르겠구나.”

“ 존함은 알고 있습니다.”

“ 그랬구나.”

조천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 같습니다.”

한참을 걸어가는 데 조남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천신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잠시 그렇게 서 있던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 우연인지 모르지만 사주님과 이름이 같습니다.”

“ 허허허!”

조천신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파앗!

그의 신형이 빠른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잠시 후 조천신의 모습이 숲속으로 사라졌다.

조천신의 모습을 지켜보던 조남선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그는 조천신이 주고 간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를 바라보는 그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 뭐 하는 짓이냐?”

옆으로 다가온 젊은 사내가 물었다. 그는 조남선의 친구 윤철이었다.

“ 뭐가?”

“ 방금 조천신을 보면서 아주 서글픈 표정으로 이름이 같다고 했잖아.”

“ 그런 걸 일컬어 예의라고 하는 거야.”

“ 예의?”

“ 그치가 이걸 줬잖아.”

조남선은 들고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 그게 뭔데?”

“ 아직 감이 안 와?”

“ 무슨 감?”

“ 열흘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아래에 있는 그 계집을 죽이고 떠나라고 했잖아.”

“ 그랬지.”

“ 그건 곧 이번 임무에서 뒈질 확률이 구 할이 넘는다는 말이 되거든.”

“ 그럼 그건?”

“ 아마도 그자 전 재산이 들어 있을 거야.”

“ 그래서 있지도 않은 네 아비 이름을 조천신이라고 한 거냐?”

“ 난 예의 바른 사람이니까.”

조남선은 피식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불당 안으로 들어간 그는 상자를 내려놓고 그 앞에 앉았다.

“ 안 열어봐?”

뒤따라 들어온 윤철이 조남선 앞으로 앉으며 재촉의 눈빛을 보냈다.

“ 열흘 후에 열어보라고 했잖아.”

“ 정말 열흘 후에 열어볼 거야?”

“ 아니?”

“ 그럼?”

“ 열 시진 후에.”

“ 열 시진 동안 기다린다고?”

“ 십 년을 기다렸는데 열 시진도 못 기다려?”

“ 십 년은 기다린 시간이 아니고 숨어 산 기간이잖아. 자식아.”

“ 어찌됐든, 인마.”

조남선은 피식 웃었다.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열 살 때부터 도둑질, 강도, 강간 등 해보지 않은 게 없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집 담을 넘었다가 발각돼 안에 있던 자들을 전부 없애고 말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우발적인 살인이었다.

그런데 재수가 없으려고 그랬는지 죽은 한 명이 꽤나 유명한 자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시시각각 좁혀오는 수사망을 피해 금의위 위사를 선발하는 곳에 지원서를 냈다. 물론 신분은 적당히 가공했다.

그곳에서 만난 자가 바로 조천신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바로 느낌이 왔다.

특별히 작업을 할 것도 없었다.

조천신은 묻기만 했고, 자신은 대답만 했다.

“ 엄청나네.”

윤철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조남선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상자를 열어본 듯 윤철의 손에는 종이 뭉치가 들려 있었다.

“ 뭐냐, 그건?”

“ 우린 평생 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윤철은 종잇장을 흔들며 활짝 웃었다.

“ 그렇게 많아?”

“ 적게 잡아도 삼백만 냥이다.”

“ 그럼 숨겨둔 현금까지 합치면?”

“ 대박 터진거지 뭐.”

“ 십 년을 투자한 것치고 나쁘지 않지?”

조남선도 활짝 웃었다.

지난 십 년 동안 허송세월을 보낸 건 아니었다. 삼류에 불과했던 무공은 일류가 됐고, 머릿속에는 상당한 지식이 쌓였다. 이젠 좀도둑 조남선이 아니라 대인 조남선이 된 것이다.

조남선은 싱긋 웃으며 벌러덩 드러누웠다.

“ 유서도 있어.”

“ 유서?”

“ 삼혈시를 가지고 금산으로 간다고 돼 있는데?”

“ 삼혈시를 알아?”

“ 내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잖아.”

“ 그럼 버려.”

“ 그게 낫겠지?”

윤철은 삼매진화를 일으켜 조천신이 남긴 유서를 태웠다.

“ 서둘러 처리해.”

“ 앞으로도 조씨로 살 거냐?”

땅 문서를 다시 상장 안으로 집어넣으며 윤철이 물었다.

“ 아니.”

“ 그럼?”

“ 두씨로 살 참이야.”

“ 두씨?”

윤철은 불상을 바라보았다.

그 아래쪽에 있는 여자의 이름이 두심향이었던 것이다.

“ 설마 금향을 노리는 건 아니겠지?”

“ 유언장만 잘 만들면 못할 것도 없지.”

“ 진짜 하려고?”

“ 일단 자면서 생각 좀 해보고.”

조남선은 히죽 웃으며 눈을 감았다.

“ 돈을 저렇게 많이 벌었는데 또 그 짓을 하고 싶냐?”

윤철은 조남선 옆으로 누으며 이죽댔다.

“ 직장 다니는 놈들이 돈 많다고 그만두는 거 봤어?”

“ 범죄가 직업이냐?”

“ 다른 놈들에겐 범죄일지 몰라도 너와 내겐 직업이야. 새꺄, 잔말 말고 퍼 자.”

조남선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잠을 청했다.

늘어지게 자고 난 조남선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다음날 저녁 무렵이었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함께 있던 자들에게 주변을 둘러보라고 명령을 내렸다. 혹시 조천신이 돌아오지 않았나 하는 노파심에서.

아무도 없다는 말을 듣고는 불상 아래로 들어갔다. 조천신이 처리하라고 했던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두심향은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조남선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떠나기로 한 모양이지?”

두심향은 조남선을 보며 물었다.

“ 그걸 어떻게 알았지?”

조남선은 들고 온 보자기를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 사내자식들을 많이 대하다 보니 얼굴만 보면 어떤 놈인지 금세 알 수 있거든.”

“ 난 어떤 놈이지?”

“ 넌 생긴 게 살무사 상이야.”

“ 부모를 잡아먹는 상이라는 거야?”

조남선은 보자기를 펼치며 말을 이었다.

“ 부모를 잡아먹는 상일 뿐 아니라 은혜를 원수로 갚기도 하지.”

두심향은 조남선이 펼친 보자기를 보았다.

보자기 안에는 송곳부터 시작해서 작은 끌과 망치, 그리고 크고 작은 칼 수십 개가 나란히 꽂힌 가죽이 들어 있었다. 작고 앙증맞아 보이는 그것들은 다름아닌 고문도구였다.

“ 날 고문하려고?”

“ 알고 싶은 게 있어서.”

“ 조천신의 재산을 팔아먹고 도망칠 거라고 하는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들은 건가?”

“ 그놈하곤 상관없는 것들이야.”

조남선은 작은 칼 하나를 꺼내 두심향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가 덮고 있는 포대기를 걷어내고 앞에 쪼그려 앉았다.

“ 나이가 몇이지?”

조남선은 두심향의 얼굴을 살피듯 보았다.

“ 난 삼십대 초반이라고 생각하는데 남들은 마흔한 살이라고 하더구나.”

“ 얼굴로만 보면 삼십대 초반이라고 해도 믿었을 거야.”

조남선은 두심향의 옷에 칼을 들이대더니 목부터 시작해서 아래까지 잘라냈다. 속옷까지 칼이 미친 듯 풍만한 가슴이 유등 아래 드러났다.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했지만 그녀의 몸은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조남선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옷 속에 저런 엄청난 몸이 숨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가슴을 보고 나자 갑자기 아래쪽도 보고 싶었다. 그는 급하게 손을 놀려 아래를 가린 옷을 잘라 걷어냈다.

“ 으음!”

조남선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몸매였다.

물론 통통 튀는 탄력 있는 몸은 아니었다. 약간 살이 불었다는 느낌이 나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 욕심나는 모양이지?”

“ 솔직히 그래.”

조남선은 칼끝으로 두심향의 가슴을 건드리며 말했다.

“ 지금도 늦지 않은 것 같은데.”

“ 미안해. 난 즐기는 것과 일은 엄격하게 구분하는 사람이라서.”

“ 좋은 습관이구나.”

“ 지금부터 질문을 학도 싶은데 준비됐겠지?”

그의 칼이 두심향의 유실 앞에서 우뚝 멈췄다.

“ 자르려고?”

“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칼끝이 살짝 파고들어 간 듯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 이자는.....’

두심향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사내라는 족속들은 대부분 벗은 여자를 보면 흥분했고, 욕심을 차린 다음에 일을 처리하곤 했다. 그런데 조남선은 숨결이 거칠어지? 했지만 애써 참고 있다.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

문득 운이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하지만 최선을 다해봐야지.’

그녀는 최대한 선정적인 표정을 지었다.

비록 내공을 끌어올릴 수 없어 아무런 효과도 낼 수 없어도 염정환희소와 나찰섭혼공을 펼쳤다. 그러면서 오므리고 있던 다리를 슬쩍 벌렸다.

움찔!

효과가 있었던 걸까.

조남선은 갑자기 아래쪽으로 피가 몰리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두심향의 가슴을 힘껏 틀어쥐었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눈에서 강렬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가슴을 틀어쥐었던 손이 이번에는 아래로 향했다. 두심향의 입이 벌어지면서 뜨거운 숨결과 함께 달뜬 신음이 흘러나왔다. 신음 역시 나찰섭혼공의 한 가지였다.

조남선의 손은 어느새 단전을 지나 그 아래로 들어갔다. 두심향은 신음을 흘리면서 몸을 떨었다.

“ 쿡!”

갑자기 차가운 기운이 동굴 안을 휩쓸고 지나갔다.

두심향의 아래를 더듬던 조남선의 손이 우뚝 멈춘 것이었다. 조남선은 두심향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 만일 물건이 있었다면 난 넘어갔을 거야.”

“ 그럼?”

“ 어렸을 때 남의 집 담을 넘다가 아래로 떨어졌는데 하필이면 그곳에 식칼이 있었지 뭐야. 땅게 꽂혀 있었는데 칼날이 박힌 상태가 아니라 자루가 땅에 박히고 날은 위로 향하고 있었어. 주인 놈이 도둑 잡으려고 그렇게 해놓았던 건데... 내 물건을 잡았지.”

조남선은 자신의 아랫도리를 가리켰다.

“ 내가 괜한 짓을 했군.”

두심향은 실망한 얼굴로 다리를 오므렸다.

“ 그럼 안 되지. 몸은 비록 병신이 됐지만 눈은 누구보다 좋은데.”

조남선은 칼끝으로 두심향의 허벅지를 질러 다리를 벌리게 했다. 이번에는 그녀의 허벅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 그럼 지금부터 질문을 할게.”

두심향의 자세가 마음에 드는 듯 조남선은 빙그레 웃으며 칼끝을 다시 가슴으로 가져갔다.

“ 고향이 어디지?”

“ 그냥 죽이는 게 나을 거야. 조남선.”

“ 나도 그러고 싶은데 금향이 너무 탐이 나서 어쩔 수 없어. 그리고 셋을 셀 동안에 말하지 않으면 이게 잘릴 걸야.”

조남선은 칼끝으로 두심향의 유실을 툭툭 건드렸다.

“ 혹시 그거 알아?”

“ 뭘 말이냐?”

“ 넌 개자식이라는 사실 말이야.”

“ 쿡, 하하하!”

조남선은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한동안 웃음을 터뜨리던 그는 왼손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짜악!

“ 아악!”

내공이 실린 듯 두심향의 신형이 사정없이 처박혔다.

“ 하나.”

조남선이 느리게 수를 셌다.

“ 제법 경험이 많은 척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넌 장비만 잔뜩 가지고 다닐 뿐 고문의 기본도 모르는 초짜야.”

“ 기본?”

“ 고문은 말이야. 고문을 당하는 당사자가 살아날 희망이 있을 때 통하는 수법이야. 살아날 희망이 없으면 아무리 고통을 준다고 해도 입을 열지 않아.”

“ 그러니까 넌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을 거라고?”

“ 네가 살려줄 것도 아닌데 입을 열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

“ 과연 그럴까?”

“ 그럴 거야.”

“ 아냐, 두심향. 나도 처음엔 너처럼 생각했어. 그런데 금의위에서 고문을 해보니까 아니더라고. 정신이 피폐해질 정도의 고통을 끊임없이 가하면, 저기 있는 장비의 절반도 사용하지 않아서 다 불더라고. 우선 이것부터 잘라내고 보자고.”

조남선은 칼을 두심향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 그건 고문을 당하는 놈들도 너처럼 초짜라서 그래.”

앞으로 내밀던 조남선의 손이 우뚝 멈췄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처음듣는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조남선은 재빨리 두심향의 얼굴을 보았다. .

두심향 또한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고 있었다. 활짝 웃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 동굴 입구의 모습이 잡혔다. 검은 철립을 쓴 사내가 이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조남선은 의아했다.

그가 알기론 두심향을 찾아올 사내는 없다. 그런데 두심향은 철립을 쓴 사내를 보더니 살아난 것처럼 활짝 웃고 있다.

‘ 이 장 떨어져 있다는 건데....’

조남선은 머리를 굴렸다.

지금은 철립을 쓴 놈의 정체에 대해 궁금하게 여길 때가 아니었다. 이곳까지 왔다는 건 윤철을 비롯하여 경비들이 전부 죽었다는 뜻이다.

계단 바로 아래쪽에 있으니까 이 장 떨어져 있다고 봐야 한다. 반면에 자신의 손은 두심향의 가슴까지 다섯 치, 두심향을 죽이는 거라면 분명 유리한 상황이다.

하지만 두심향을 죽이는 게 아니라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하는 상황이다.

“ 손 끝 하나라도 움직이면 바로 목을 잘라버릴 거야.”

막 손을 내뻗으려고 하는데 진득한 살기가 목덜미에 와 꽂혔다.

“ 내기할까?”

조남선은 두심향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선은 대화를 토앻 상대의 기세를 누그러뜨린 다음 두심향을 제압할 생각이었다. 그녀의 목에 검을 들이댈 수만 있다면 이곳을 빠져나가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 모험은 안 하는 게 좋아.”

연우강 또한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작지만 조남선의 손에는 무기가 들려 있고, 두심향과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놈이 이판사판으로 나오면 두심향도 위험해질 수 있다.

[ 내가 셋을 세면 자연스럽게 눈을 깜빡이세요.]

연우강은 두심향에게 전음을 보냈다.

[ 하나, 둘, 셋!]

셋이란 말이 떨어지는 것에 맞춰, 두심향은 눈을 깜빡였다. 바로 그 순간 사명혈삭의 뇌섬이 뱀처럼 다리를 타고 아내로 내려갔다. 땅에 도달한 뇌섬은 방향을 틀더니 천천히 조남선을 향해 기어갔다.

“ 밖에 있는 녀석들은 어떻게 됐지?”

조남선은 두심향의 눈을 통해 연우강을 살피면서 말을 걸었다.

“ 뜻밖에 횡재를 했어.”

“ 조천신이 남긴 상자를 주은 모양이군.”

“ 장물로 넘긴다고 해도 최하 오백만 냥 값어치는 나갈 것 같더라고.”

“ 운철 그 친구는 삼백 만 냥이라고 하던데.”

“ 이백만 냥을 거저 먹으려고 그랬을 거야.”

“ 이십 년 친군데......”

“ 원래 그놈을 알려면 친구를 보면 된다고 했거든.”

“ 나도 그런 놈이라고?”

“ 유유상종이라는 말도 있잖아.”

“ 그럶 나도 그런 놈이란 뜻이군.”

[ 눈 깜빡여요. 하나, 둘, 셋!]

연우강은 두심향에게 다시 전음을 보냈다.

두심향은 연우강이 시키는 대로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뇌섬은 조남선의 엉덩이 아래에 자리했다.

“ 죽일 놈이지.”

연우강은 조남선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 이름을 알 수 있을까?”

조남선은 손에 내공을 집중하며 말했다. 두심향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뒤쪽의 놈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 내 이름?”

“ 그래.”

“ 그건 두 루주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 두심향에게 물어보... 헉!”

조남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두심향이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바람에 뒤쪽에 있던 자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가만 서있는 것도 아니고 움직이던 자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당황하여 칼을 쥔 오른손을 내밀었다.

바로 그때였다.

엉덩이 아래쪽에서 고개를 바짝 세우고 있던 뇌섬이 그의 회음혈로 파고들어 얼굴을 뚫고 튀어나왔다.

“ 커억!”

조남선의 입이 쩍 벌어지고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그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붉은색 줄이 뒤쪽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조남선은 고개를 들어 두심향을 보았다. 조금 전 두심향에게 물어보리고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그의 이름은 연우강이야.”

두심향은 잘려나간 옷을 들어 얼굴과 몸으로 쏟아진 조남선의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 연우강이라고? 그가 왜.....”

쿠웅!

조남선은 그 자리에 풀썩 고꾸라졌다.

연우강은 조남선의 몸 안으로 파고들어간 뇌섬을 회수하고는 두심향 곁으로 다가갔다.

두심향은 말없이 연우강을 올려다보았다.

연우강을 바라보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에 나타나 희망을 던져준다.

전에도 그랬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는 순간에 나타나서는 희망을 던져주고 가더니 이번에도 죽음을 각오한 순간에 나타났다.

“ 괜찮아요?”

연우강이 허리를 숙여 두심향을 안았다.

“ 용케 찾아냈네요?”

“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연우강은 그녀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밖에는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연우강은 혈잔수를 끌어올려 두심향의 몸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으면서 막힌 혈도를 풀어주었다.

혈도가 풀리자 두심향은 천천히 내기를 돌렸다. 굳었던 몸이 풀려가며 조금씩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귀에 감각을 집중하자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왔다.

“ 저 씻고 올게요.”

“ 그렇게 하세요.”

두심향을 내려놓은 연우강은 사망묵의를 벗어주었다. 조남선의 몸에서 쏟아진 피 때문에 그녀의 몸은 피투성이었다.

두심향이 사망묵의를 가지고 몸을 날려가자 연우강은 불당 반대편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은 방과 부엌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구조였다.

부엌에는 볼일이 없기에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특이했다. 바위 위에 방을 만든 듯 절반은 돌로 이루어져 있고, 절반은 흙이 덮여 잇었다.

바위 위에 흙을 덮어 푹신하게 만든 듯했다.

바위가 있는 쪽에는 커다란 아궁이가 있고, 아궁이 뒤편에는 장작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동안 불을 땐 듯 아궁이 주변 바위에서는 온기가 감지됐다.

“ 제법 머리를 썼네.”

단순하게 장작을 태우기 위한 구덩이가 아니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연기가 나가는 통로를 통해 바위 전체가 데워져 저절로 난방이 되는 그런 형태였다.

연우강은 아궁이 안에 장작을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혈잔수와 풍뢰를 이용하여 불씨를 살폈다. 잠시 후 장작이 활활 타올랐다. 연기가 잘 빠지지 않는 듯 방 안은 금세 뿌옇게 변했다. 불을 먼저 때고 숯불만 남았을 때 안으로 들어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연우강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풍뢰를 이용해서 아궁이 밖으로 나오는 연기를 전부 외부로 날려보냈다. 그런 상태에서 장작이 새빨간 숯이 될 때까지 나무를 태웠다. 그리고 아궁이 안에 붉은 숯만 남자 장작 넣는 걸 그만두고 흙바닥에 손을 대보았다.

“ 아주 적당하네.”

연우강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맺혔다.

서랍장을 열고 요와 이불을 꺼내 깔았다. 그리고 차를 찾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가 부엌을 뒤지고 있는 사이에 씻으러 갔던 두심향이 들어왔다.

두심향은 부엌에서 달그락거리고 있는 연우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온 게 꿈만 같다. 그가 조금만 늦게 왔더라면 조남선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 추운데 들어가요.”

연우강은 차와 찻잔을 챙겨 들고 나오다가 두심향을 발견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 알았어요.”

두심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간 그녀는 또다시 감동했다. 방 안은 후끈한 열기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는 씻으러 간 사이에 불을 피우고 차를 준비한 것이었다.

“ 신발 벗고 올라가야 해요.”

“ 알았어요.”

두심향은 신발을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따뜻한 기운이 타고 올라오며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근 것처럼 노곤해졌다.

“ 겉옷을 벗는 게 나을 거예요.”

연우강은 차를 따르며 말했다.

“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어요. 그런데 이건 뭐로 만들어진 거죠?”

두심향은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려 사망묵의를 벗어 옆으로 내려놓았다. 옷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무거웠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암기가 달려 있었다.

“ 만녀오금철로 만들어졌어요.”

연우강은 찻잔을 건네주었다.

“ 만년오금철이라고요?”

그녀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사망묵의를 보았다.

범상치 않은 옷이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 만년한철과 버금간다는 만년오금철로 만들어졌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는 만년오금철로 옷을 만들어 낸 사람이 누군지 더 궁금했다.

“ 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누가 만들었죠?”

그녀는 차를 마시며 물었다.

“ 천오백 년 전에 만들어진 물건잉라 그건 나도 몰라요.”

“ 천오백 년 전?”

“ 네.‘

“ 저기에 꽂힌 암기도 전부 천오백 년 전에 만들어진 거예요?”

“ 그래요.”

“ 엄청난 무인이 사용했던 건가 보죠?”

“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 누군데요?”

“ 흑천이라고 알아요?”

“ 영세오천의 한 곳이라는 그 흑천을 말하는 거예요?”

“ 그곳의 천주가 걸쳤던 옷이에요.”

“ 그럼 연 공자가 흑천의 천주에요?”

“ 그렇긴 한데.........”

“ 왜요?”

“ 부하가 없어요.”

“ 킥!”

두심향은 피식 웃었다.

“ 그래서 어디 가서 흑천의 천주라고 하지 않아요.”

“ 그게 나을 것 같아요. 이쪽으로 들어올래요?”

두심향은 웃으며 이불 한 편을 들추었다.

“ 언제 불러주나 했네요.”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이불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이불 안쪽은 훈훈하게 데워져 있었다.

“ 참! 제가 말했던가요?”

연우강이 안으로 들어오자 두심향이 물었다.

“ 무슨 말이요?”

“ 고맙다는 말 말이에요.”

“ 그런 건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잖아요.”

“ 그거야 연 공자는 여자 마음을 잘 헤아리니까 그런 거예요. 보통 사람들은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 그런 거예요?”

“ 네, 고마워요.”

두심향은 그윽한 눈길로 연우강을 바라보았다.

“ 누구라도 저처럼 행동했을 거예요.”

“ 제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 지 아세요?”

두심향은 몸을 움직여 연우강 위로 올라갔다.

“ 머릿속에 있는 원앙음양고가 발광을 하는 것 같은데요?”

“ 느껴져요?”

두심향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연우강의 옷을 벗겨나갔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오랜만에 수컷을 만난 원앙음양고 음고가 최음제 성분이 섞인 배설물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상의를 벗기자마자 그녀는 연우강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최음제 성분이 너무 강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두심향은 부들부들 떨면서 연우강의 하의를 벗겨 나갔다.

연우강 또한 다르지 않았다.

최음제 성분이 급격하게 퍼지며 피가 뜨거워지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는 두심향의 엉덩이를 와락 틀어쥐어 끌어당겼다.

두심향의 입에서 다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상체를 번쩍 들며 연우강의 머리를 가슴으로 끌어들였다. 또다시 가슴으로부터 격렬한 쾌감이 밀려왔다.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신음을 토해냈다.

가슴에서, 엉덩이에서 그 허벅지 안쪽에서 작은 불꽃이 터지며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랐다.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아니 거부할 필요가 없었다.

이곳은 아주 깊은 산속이고, 사람이라고는 둘밖에 없다. 옷과 함께 체면과 가식을 벗어던졌고, 지금 남은 것은 오로지 본능뿐이다. 아니 본능만 있으면 되는 곳이 바로 야생이다.

남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원하는 걸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그가 원하는 걸 해주면 된다.

두심향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녀가 전에 없이 이렇듯 흥분한 것은 이곳이 단순히 숲속이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나오자 온몸에서 뭔가가 분출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스스로를 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랑에 온 몸을 던졌다.

사랑은 전염된다는 게 맞았다. 두심향이 그렇게 나오자 연우강 또한 그녀에게 동화돼 이성을 잃었다.

연우강과 두심향은 온 방안을 헤집고 다니며 서로를 탐닉했다. 평소엔 꿈도 꾸지 못할 자세를 취하고, 생각지도 못한 대담한 행동을 거리낌없이 했다.

두심향은 구름을 타고 산을 넘고, 파도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물론 그 옆에는 늘 연우강이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을 넘었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구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파도에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 연우강의 어깨를 사정없이 틀어쥐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곯아 떨어진 건 새벽녘이었다. 아니 그것도 정확하지 않다. 저녁은 빨리 오고 아침은 늦은 산중에서 때를 정확하게 안다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두 사람에는 밤낮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먼저 눈을 뜬 사람은 두심향이었다.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최근 들어 누군가의 품에서 안겨 깨어난 건 두 번 째고, 품의 주인은 연우강이었다. 문득 그의 품이 광활한 벌판처럼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연우강의 가슴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겨드랑이로 손 하나가 슬금슬금 들어와 가슴을 그러쥐었다. 두심향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간밤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그의 손길이 미치자 아릿한 열기가 밀려왔다. 그녀는 조용히 연우강의 손길을 음미했다.

“ 일어났어요?”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비로소 눈을 떴다.

“ 한 가지만 대답해줘요.”

그녀는 연우강의 눈을 보았다.

“ 말해요.”

“ 제가 어젯밤에....”

두심향은 잠시 망설였다. 혹시 관무평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었다.

“ 원래 그때가 되면 이름을 불러요?”

연우강은 짖궂은 얼굴로 물었다.

“ 그, 그게.....”

두심향은 어쩔 줄 몰랐다. 연우강의 말투로 보건데 또 무평이라는 이름을 부른 게 분명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기억조차 못할 정도로 산을 넘고 파도를 탔다. 그런데 그때마다 관무평의 이름을 불렀다면.......

연우강에게 너무 미안하고 겸연쩍이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 미, 미안해요. 마음은 절대 아닌데.....”

두심향은 연우강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울먹였다.

“ 무슨 소리에요?”

“ 그, 그게....”

“ 그러니까 제 이름을 부른 게 잘못됐다는 거예요?”

“ 네?”

두심향은 고개를 발딱 들고 연우강을 보았다. 그러고는 질문을 던졌다.

“ 지금 뭐라고 했죠?”

“ 제 이름을 부르는 게 싫냐고요.”

“ 정말 연 공자 이름을 불렀어요?”

“ 쉬지 않고 부러대는 데 대답하느라 죽는 줄 알았어요.”

“ 나빠요.”

두심향은 활짝 웃으며 주먹으로 연우강의 가슴을 콩콩 쳤다.

“ 그것뿐만이 아니었어요, 루주.”

“ 또 있어요?”

“ 제 등하고 원수졌어요, 왜 그렇게 긁어대는데요?”

“ 제가 정말 그랬어요?”

“ 그랬다니까요.”

“ 어디 봐요.”

그녀는 벌떡 일어나 연우강의 등을 살폈다.

“ 에이! 괜찮구먼.”

“ 금강불괴지신인데 당연히 괜찮을 수밖에 없잖아요. 하지만 밤에는 진짜 아팠단 말입니다.”

“ 엄살이 너무 심해요.”

두심향은 눈을 흘기고는 다시 연우강의 팔을 베고 누웠다. 다시 연우강의 손이 자연스럽게 두심향의 겨드랑이로 스며 들어갔다.

“ 참! 삼혈시라고 알아요?”

문득 생각난 듯 연우강이 물었다.

“ 삼혈시오?”

“ 네.”

“ 그건 구림세가의 여덟 세력을 가둔 장소인 금산을 여는 열쇠를 말하는 거예요.”

“ 구림세가의 여덟 세력이란 무슨 뜻이죠?”

“ 구림은 아홉 개의 숲이잖아요.”

“ 그럼 구림이 아홉 개의 숲이 모여서 만들어진 이름이에요?”

“ 몰랐어요?”

“ 처음 들어요.”

“ 맞아요. 아홉 개의 세력을 일컫는 말이에요.”

“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 그러니까 구림은......”  두심향은 구림세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 그럼 은림 이 씨는 아홉 번째 숲이면서 구림의 우두머리였군요.”

“ 그래요. 만일 홍무제와 영락제가 구림세가를 격리시키지 않았더라면 지금 북경은 그들 차지가 됐을지도 몰라요.”

“ 황조가 바뀌었을 거라고요?”

“ 명나라도 이제 시작인데 새로운 왕조를 세울 순 없을 거예요.”

“ 그럼 황제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거라는 말이네요.”

“ 그럴 거예요.”

“ 그런데 그들이 아직 살아 있을 거라고 보세요?”

“ 누구요? 구림의 나머지 세력?”

“ 네.”

“ 멸망한 원나라의 후예도 이렇데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요.”

“ 그들도 살아있을 거란 말이네요.”

“ 그럴 거예요.”

두심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서 그 양반이 그렇게 목에 힘을 주었구먼.”

“ 누구요?”

“ 구림제독이라고 불리는 그 양반 말이지 누구겠어요.”

“ 이연?”

“ 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의외로 발이 넓네요?”

“ 좋은 인연이 아닌 경우에는 발이 넓다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 하긴 그렇겠네요. 그런데 삼혈시는 누구에게 들었어요?”

“ 윤철에게 들었어요. 조천신이 삼혈시를 가지고 금산으로 갔다고 하더군요. 하루만 빨리 왔으면 놈을 없앨 수 있었을 텐데......”

“ 금산의 위치를 말하지 않았나 보죠?”

“ 그놈도 모르고 있더라고요.”

“ 그랬군요. 이젠 어떻게 할래요?”

“ 루주가 해줄 일이 있어요.”

“ 말만 하세요.”

“ 이곳을 나가면 삼혈시에 대한 걸 슬쩍 소문을 내주세요.”

“ 누구 귀에 들어가게 할 건데요?”

“ 금의위는 끝장났으니까 남은 곳은 한 곳밖에 없잖아요.”

“ 친구가 있는 동창은 아닐 테니까.... 오군도독부 도독들의 귀에 들어가게 하면 되겠군요.”

두심향은 연우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금의위에 이어 오군도독부까지 정리할 생각인 듯했다.

“ 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은 무서운 사람이에요.”

두심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난 세월 중원이 배출한 수많은 영웅호걸 중에 과연 연우강 같은 사람이 존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혼자서 무림의 세력과 싸운 사람은 있다. 하지만 혼자서 제국 최강 권력과 싸워 이긴 사람은 아직 없다. 그런데 그는 팔 부 능선을 넘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권력을 전쟁터로 끌어들일 생각이다.

오군도독부가 묘봉산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들은 구림세가 무인들과 일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뛰어난 머리와 강한 무력을 동시에 지닌 사람.

그는 싸움의 상대로 가장 피해야 할 장수의 전형이었다.

“ 하지만 같은 편에게는 가장 편안한 사람이기도 하죠.”

연우강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그럼 전 늘그막에 복이 터진 셈이네요?”

두심향은 연우강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 루주를 만난 전 행운아고요.”

“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두심향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 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아직은 시간이 좀 있죠?”

그녀는 연우강의 귓전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 당연하죠.”

“ 저도 그래요.”

두심향은 활짝 웃으며 몸을 일으켜 연우강 위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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