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214화 (214/232)

제 8장 삼혈시

금산이 팔달령 장성 밖에 있다는 것만 알았지 정확한 위치는 조천신도 알지 못했다. 만일 구림제독 이연으로부터 설명을 듣지 못했더라면 금산으로 가는 길은 영원히 찾지 못했을 것이다.

상자 표면에 새겨진 그림의 탁본을 떠서 합치자 금산으로 가는 길이 나왔는데,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숨겨진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 하루 정도를 걷자 안개로 자욱한 계곡이 일행 앞에 나타났다.

안개가 얼마나 짙은지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시계는 일 장 남짓에 불과했다. 탁본상에는 안개가 표시되지 않았지만 그런 길이 대략 십 리 정도였다.

“ 가자!”

조천신은 안개 안으로 들어갔다.

“ 어떻게 생각하느냐?”

안개를 뚫고 한참 동안 걸어가던 조천신이 옆에서 따르는 부관을 보며 물었다. 옆에 있는 자는 무공보다는 진식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진성이었다.

“ 이 안개에 대한 질문이십니까?”

진성은 안개를 움켜쥐며 물었다.

“ 자연적인 안개냐?”

“ 절대 아닙니다.”

진성은 고개를 저었다.

“ 하면?”

“ 진식에 의해 생성된 안갭니다.”

“ 그러면 우린 진식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셈이 되는 거구나.”

“ 그렇습니다. 사주. 아마도 안으로 들어가는 건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

“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냐?”

“ 그럴 겁니다.”

진성의 말은 얼마 가지 않아 사실로 들어났다.

상당수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뼈만 앙상하게 남은 시체들은 짐승에게 물어뜯기거나 무기에 찔린 흔적이 전혀 없었다. 마치 자연사한 것처럼 죽어 있었다.

“ 여긴 시체가 있을 만한 곳도 아니고.....”

“ 무인이 들어올 곳은 더더욱 아닙니다. 아마 이자는 우연히 들어왔다가 나가지 못했거나, 구림세가에서 들여보낸 자일 겁니다.”

“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

“ 금산의 문을 연다는 의미가 진식을 해지하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 그렇겠지.”

조천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무인이 익히는 신법 중에는 하늘을 평지처럼 밟고 날아가는 허공답보가 있다.

허공답보를 펼치기 위해서는 삼 갑자라는 엄청난 내공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론적으로만 본다면 이런 장소에 무인을 가둘 수 없다.

그럼 남는 장소는 한 곳. 지하 공간이다.

하지만 지하에 가둘 바에는 감옥을 집어넣고 말지, 유배지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장소로 보낼 이유가 없다.

숙식은 수감된 자들이 알아서 해결하고, 육체에 금제를 가할 필요도 없는, 하지만 외부로는 나갈 수 없는 그런 장소가 있어야만 하는데, 그런 장소가 있을 리가 없다.

결국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그때 동원되는 기술이 바로 진법인 것이다.

“ 만일 이것들이 진법을 해진하는 열쇠가 아니면 우린 조금 전 보았던 시체들처럼 이곳에서 죽게 될 겁니다.”

진성은 들고 있던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거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걱정이 되는 듯 조천신의 걸음이 빨라졌다. 잠시 후 일행은 거대한 돌기둥 앞에 도착했다.

“ 여기서부터 진식의 중추인 모양입니다.”

진성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지금까지 왔던 곳에 비해 안개가 옅었다. 그런데 옅은 안개 사이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둥들이 보였다.

“ 다 들어온 거냐?”

“ 아닙니다. 아직 이백 장은 더 들어가야 합니다.”

진성은 일행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백 개의 기둥을 지나쳤지만 기둥의 숲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혹시 저것들도 진식에 의한 환영 아닐까?”

조천신은 기둥을 가리키며 물었다.

“ 만져보십시오.”

진성의 말에 조천신은 기둥을 만져보았다.

“ 진짜 돌이네.”

조천신은 피식 웃었다. 그것은 차갑고 딱딱한 질감의 바위가 분명했다.

“ 진짜가 아닙니다. 사주. 차갑고 딱딱한 질감조차 진식에 의해 만들어진 느낌입니다.”

“ 진식이라고?”

조천신은 깜짝 놀라 다시 기둥을 만져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차갑고 딱딱한 질감이 느껴진다. 보통 바위와 다르지 않았다.

“ 소위 절진이라고 부르는 진식은 우리의 눈뿐만 아니라 촉감까지도 속입니다.”

“ 그럼 이것들이 정말로 진식에 의한 환영이라는 거냐?”

“ 제가 그걸 환상이라고 한 것은 표면이 바싹 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 그렇군.”

조천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있는 이곳은 안개가 자욱하게 흐르고 있다. 그런데 눈앞의 기둥은 표면이 뽀송뽀송할 정도로 말라있다. 진짜 바위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이곳은 환상과 실체가 뒤섞여 있을 겁니다.”

진성은 탁본을 보았다. 상자 표면에서 뜬 탁본이 아니면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게 다시 이백여 장을 들어가자 높은 석벽이 일행의 앞을 막아섰다.

조천신은 전면을 바라보았다.

금산

석벽 중앙에 커다란 크기의 글이 적혀 있고, 두 글자 사이에 열쇠 구멍처럼 양쪽으로 홈이 나 있었다.

석벽 앞에 있는 조천신은 부관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부관들이 조천신 앞으로 상자를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은 전부 달랐다.

조천신은 왼편에 있는 물건을 들어 올렸다.

검처럼 손잡이가 달려 있는 그것은 몽둥이 형태였다.

물건을 내려다보던 그는 두 번째 상자에 들어 있는 몽둥이를 꺼내 끼웠다.

몽둥이는 맞춘 듯 들어갔다.

위쪽 구멍을 흘끔 바라보 조천신은 마지막 상자에서 몽둥이를 꺼내 밀어넣었다.

철컥!

몽둥이를 완전하게 밀어 넣는 순간 나직한 금속음이 흘러나오더니 몽둥이 좌우측에서 손가락 두께의 물체가 날개처럼 튀어나왔다.

조천신은 시선을 들어 구멍을 보았다. 삼혈시의 단면이 구멍과 일치했다.

“ 차앗!”

허공을 솟구쳐 오른 조천신은 글자 사이의 구멍에 삼혈시를 꽂아 넣고는 원래 자리로 내려왔다.

일행은 긴장한 얼굴로 삼혈시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어떤 변화도 없었다.

“ 혹시......”

조천신은 고개를 돌려 왔던 길을 보았다.

만일 판단이 잘못됐다면, 이곳까지 오면서 목격한 시체들처럼 뼐르 묻어야 할 터였다.

철컥! 철컥!

바로 그때 뒤편에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조천신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르릉!

지반이 흔들리는 듯하더니 석벽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천신을 비롯한 일행은 경이로운 눈으로 석벽을 바라보았다.

석벽은 높이와 폭이 십 장가량이다. 그런데 그 거대한 석벽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슈우욱!

어디선가 공기가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 드디어!”

조천신은 상기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씩 안개가 걷혀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높이 솟아있던 기둥들 중 어떤 기둥은 모래처럼 스러지고 있었다. 금산을 금지로 만들었던 진식이 해진되는 중이었다.

쿠웅!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지반의 흔들림이 멈췄다. 그리고 주변을 가득 채웠던 안개가 걷히고 햇빛이 들이닥쳤다. 조천신은 눈이 부셔서 잠시 눈을 감았다.

찌르르!

그런데 느닷없이 머릿속으로 차가운 기운이 파고들어왔다.

“ 헉!”

그는 질겁하여 눈을 떴다.

“ 맙소사!”

조천신의 입이 쩍 벌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십여 장 앞에 남루한 옷을 걸친 자들이 서 있었다. 남녀가 뒤섞여 있었는데 팔십 명 남짓이었다.

하지만 조천신을 놀라가 한 건 느닷없이 나타난 사람들이 아니었다. 맨 앞에는 아홉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발은 바닥에서 세치 가량 떠 있었다. 아니 그들 뒤에도 상당수가 땅을 밟지 않고 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삼 갑자가 넘어야만 간신히 흉내를 낼 수 있다는 허공답보 신법이었던 것이다.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도 저렇듯 안정적으로 서 있을 수 있다는 건 허공답보 신법 중에서도 최고의 경지라고 할 수 있었다. 조천신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무공 경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처음 뵙소이다. 금의위 반포사 사주 조천신이라고 하오.”

조천신은 안쪽에 있는 자들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한때 최고의 권력을 행사한 자들이라고 하지만 이미 잊힌자들. 금의위 사주인 자신이 기죽을 이유가 없었다.

“ 난 은림의 가주 은성황 이세연이네.”

한가운데 있는 노인이 예를 차리며 정중하게 말했다.

“ 맙소사!”

실레되는 행동이라는 사실도 잊고 조천신은 신음을 내뱉었다.

은성황 이세연.

그는 다름 아닌 팔림의 수뇌들이 갇힐 때 구림세가 총가주를 역임했던 사람이었다.

즉 현 구림세가의 가주인 이연의 증조부였다.

그가 이곳에 갇힌 건 백 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십대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정정했다. 어쩌면 반로환동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 놀랐는가?”

이세연은 조천신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아십니까?”

“ 정확하게 백십이 년허가도 여섯 달 보름이 지났지.”

“ 으음!”

조천신은 또다시 신음을 내뱉었다.

날짜를 헤아리고 있을 정도면 그만큼 원한이 깊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문득 저들을 공연히 꺼내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내가 아니더라도 이연은 누군가를 시켜서 열었을 거야. 잘한 거야.’

조천신은 자신을 다독였다.

“ 그런데 기록에 보면 은림의 가주이신 어르신은 들어가지 않았던 걸로 돼 있었습니다.”

그랬다.

홍무제는 구림세가 전력의 절반을 수감했지만 은림은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데 은림의 가주인 이세연까지 금산에 수감돼 있는 것이었다.

“ 그가 왜 구림세가 전력의 절반만 집어넣었는지 아는가?”

“ 어르신 때문이란 말입니까?”

문득 비밀 한 자락이 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당시 홍무제는 미친 사람처럼 신하들을 숙청했다.

그랬던 그가 가장 강한 무력을 지녔던 구림세가의 전력을 절반이나 남겨두었다는 건 모순이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바로 구림세가의 총가주였던 이세연이 스스로 이곳으로 걸어 들어갔기 때문에 그 정도에서 그친 것이었다.

“ 황제와 나의 비밀 거래였네. 내 자식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들어왔지. 아마 내 자식을 비롯한 은림 가솔들은 내가 다른 곳에서 죽은 걸로 알고 있을 거네, 그렇지 않은가?”

“ 그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이들도 어르신께서 이곳으로 들어오신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조천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아무튼 반갑네.”

이세연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난 마림의 가주 마천제 단목승이네.”

“ 난 사림의 가주 사제 낙강일이네.”

이세연 오른편에 있던 건장한 체격의 노인과 왜소한 노인이 자신들을 소개했다.

“ 난 구림의 가주 귀마존 청천수네.”

이번에 소개한 사람은 얼굴이 백지처럼 창백한 노인이었다. 노인을 바라보던 조천신은 움찔했다. 노인의 눈에는 흰자가 없었던 것이다.

“ 호호호! 난 환림의 가주 요사 시나울이네. 그런데 저 금의위 애송이에게 우리를 소개하는 이유가 뭐죠?”

여덞 명의 가주 중 유일한 여자인 시나울이 일행을 보며 물었다.

“ 클클클, 그건 우리가 백십이 년 여섯 달 보름 만에 처음 만나는 외부인이기 때문에 그런는 게야. 난 제 오림인 환림의 가주 환야 치백이다, 애송아.”

오른편 끝에 있는 노인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이로써 이세연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 대한 소개는 끝이 났다.

“ 난 제 6림인 독림의 가주 독광야 척발승이다. 알는지 모르겠지만 주체 그놈에게 당해서 이곳으로 들어왔다.”

“ 알고 있소.”

조천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따로 설명할 필요 없겠구나. 난 혈림의 가주 혈룡대군 상관우기다.”

“ 난 해림의 가주 해천왕 서군이다.”

척발승에 이어 혈림과 해림의 가주 두 사람이 자신들을 소개했다.

“ 반갑습니다.”

소개가 끝나자 조천신은 다시한 번 포권을 취했다.

“ 누가 보내서 왔는가?”

조천신을 바라보던 이세연이 물었다.

“ 은림의 현 가주이신 구림제독 이연께서 보냈소이다.”

“ 이연?”

“ 어르신의 증손자 되십니다.”

“ 허허! 내가 오래 살긴 한 모양이군. 얼굴도 모르는 증손자가 다 있고.”

“ 증손자뿐만 아니라 손자도 모르지 않나?”

옆에 있던 단목승울이 물었다.

“ 허허허! 그런 셈이구먼. 아들놈만 알지 손자도 증손자도 얼굴조차 보지 못했구먼.”

이세연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렷다.

그런 그의 얼굴이 뿌옇게 흐려졌다.

백십이 년 여섯 달 보름.

그 세월 동안 가족의 생사도 모르고 살았다.

그른데 이제야 신선한 공기와 제대로 된 햇빛을 쐬게 된 것이다.

“ 구림제독께서 날 이곳으로 보내면서 하신 말이 있습니다.”

“ 말해보게.”

이세연은 시선을 내려 조천신을 보았다.

“ 금산을 열어주면 안에 계신 분들이 한 가지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했습니다.”

“ 우리가 그랬던가?”

이세연은 단목승울을 돌아보며 물었다.

“ 자넨 가만있었고, 나와 동생들이 말했을 거네. 그 자리에 황제도 있었고.”

“ 뭐라고 했는데?”

“ 우릴 꺼내주면, 꺼내주는 자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들어준다고 했네.”

“ 혹시 거기에 황제의 목도 포함되는가?”

“ 그 당시에 말할 땐 포함했네.”

“ 그럼 지금은?”

“ 화가 나면 무슨 말을 못 하겠는가?”

“ 그럼 모른 척할 수 없겠군. 가능한 거라면 해주겠네.”

이세연은 자시 조천신을 보았다.

“ 무인 한 명을 없애고 싶습니다.”

“ 지금 한 명이라고 했는가?”

이세연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 그렇습니다. 어르신. 그놈을 없애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삼혈시를 찾아서 이곳으로 온 겁니다.”

“자네가 없애달라는 그자가 그만큼 대단하단 말인가?”

이세연은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유일하게 갇히지 않았던 가문이 은림이었고, 아들을 비롯한 손자와 증손자는 이곳을 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리지 않았다는 건 이곳을 여는 열쇠가 권력자들, 즉, 금의위나 동창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금의위나 동창이 바보가 아닌 이상 삼혈시를 내놓을 리가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혈시를 내놓으면서 금산을 열었다는 것은 그들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큰일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아울러 금의위에서 큰일이라고 하면 비슷한 수준의 세력이나 단체와 전쟁밖에 없다.

그런데 세력이나 단체를 없애달라는 부탁이 아닌 무인을 없애달라고 하였다.

그것도 단 한 명을.

내심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비록 팔백 명이 들어왔다 남은 인원은 그 십분의 일인 팔십여 명에 불과하지만, 팔림 무인들은 전부가 일당백이다. 조천신 또한 무공을 익혔으니 허공답보 신법을 펼친다???ㄴ 게 어떤 경지라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할 리는 없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황실도 초토화시킬 수 있다. 즉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뭐든지 가능하다는 소리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자가 무인 한 명을 죽여달라고 했다는 건,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대단하다는 의미도 된다.

문득 죽여달라는 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 그자에게 금의위 전력의 삼분이 일이 당했고, 지금도 당하는 중입니다.”

“ 삼분의 일이 당했다고?”

“ 그렇습니다.”

“ 쯧쯧!”

사제 낙일강이 혀를 찼다.

조천신은 낙일강을 보았다. 연우강 때문에 대야벌마저 와해 직전까지 갔다는 ???ㄹ을 하고 싶었지만 궁색한 변명이 될 것 같아서 애써 참았다.

“ 내가 못마땅한가?”

낙일강은 조천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 누군가가 그놈에 대해 언급할 때 저도 처음엔 영감님처럼 혀를 찼습니다.”

“ 그런데 금의위 삼분의 일이 당했단 말인가?”

“ 당한 정도가 아니외다.”

“ 하면?”

“ 놈에게 당한 위사 이천여 명 중 부상자가 한 명도 없소이다.”

“ 전부 사망했단 말인가?”

그제야 낙일강의 얼굴이 슬쩍 굳었다.

싸움을 하다보면 승리할 때도 있고, 패할 때도 있다. 하지만 승리할 때마다 상대를 몽땅 죽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철천지원수라면  다르겠지만 보통은 부상자는 그대로 두곤한다. 그런데 부상조차 용납하지 않는다는 건 씨를 말리려고 작정하고 나섰다는 말이다.

일반 세력도 아니고 금의위 씨를 말리겠다고 나선 자라면 허투루 대할 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낙강일은 고개를 돌려 이세연을 보았다.

“ 재미있는 녀석 같구먼.”

이세연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내 생각도 그렇습니다. 대형.”

“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세연은 조천신을 돌아보며 물었다.

“ 금의위 위사들이 묘봉산에 천라지망을 펼쳐 잡아둔 상태입니다.”

“ 천라지망을 펼치고도 금의위 위사들이 죽어나고 있다면 보통이 아니라는 말이구먼. 아무튼 먹을 것과 옷을 준비하도록 하게. 뜨거운 목욕물도 준비하고.”

“ 이곳을 나가면 바로 갈아입을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조천신은 부관을 향해 눈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부관 세 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날려갔다.

남으로 이동한 일행이 객잔으로 들어간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객잔으로 들어가자마자 이세연 일행은 몸단장부터 했다. 수염과 머리를 자르고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식사가 준비된 일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던 이세연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식당 한 쪽 구석에 중년 사내가 앉아 있었는데, 젊은 시절 자신을 쏙 빼닮았던 것이다.

직감적으로 증손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건 이연 또한 다르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증조부였지만 첫눈에 알아보았다.

이세연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이연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 처음 뵙습니다. 증조부님.”

“ 네가 연이구나.”

이세연은 슬쩍 오른발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한순간에 거리를 단축하더니 이연 앞으로 내려섰다.

“ 그렇습니다. 증조부님. 전 증조부님이 그곳에 계신 줄은 꿈에도 몰랐었습니다.”

정말이었다.

물론 증조부가 있다는 걸 알았다고 해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해온 것보다는 더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지금보다 더 빨리 금산을 열었을지도 모른다.

“ 황제와 약속한 거라 나도 알릴 수가 없었구나. 그래도 이렇게 살아 나왔으니까 됐지 않았느냐. 아무튼 반갑구나. 그만 일어나거라.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이세연은 웃으며 이연을 일으켜 세웠다.

“ 알겠습니다. 증조부님.”

이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식사가 나오고 일행은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면서 시작된 이야기는 식사가 끝나고 술자리가 이어지더니 기어코 밤을 세웠다. 하지만 백 년 세월을 전부 담아내기에는 하룻밤이 너무 짧았다.

다음날, 아침을 먹은 일행은 묘봉산으로 향했다.

“ 꼭 가셔야겠습니까?”

이연은 이세연을 보며 물었다.

이연과 이세연은 일행과 떨어져 걷고 있었다.

“ 연우강이란 녀석이 보통이 아니라고 한 사람도 너다.”

“ 하지만 놈은 혼잡니다. 증조부님.”

“ 혼자가 됐든 둘이 됐든 일을 해주기로 했으면 확실하게 처리를 해주어야 한다. 우린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넌 돌아가 있거라.”

“ 증조부님.”

이연은 굳은 얼굴로 이세연을 불렀다.

“ 허허허! 일 끝내고 돌아갈 테니까 먼저 가 있거라.”

“ 알겠습니다. 증조부님. 그럼 한 가지만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 말하거라.”

“ 제게 유능한 부하가 있습니다.”

“ 데리고 있으란 말이냐?”

“ 데리고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시중 드는 걸 허락해 달라는 겁니다.”

“ 넌 사람을 귀찮게 하는 재주를 지녔구나.”

“ 가족에게만 그렇습니다.”

“ 녀석! 알았다. 네 말대로 하마.”

“감사합니다. 증조부님.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이연은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지면을 박차고 빠르게 멀어졌다.

“ 왜 따라가지 않은 겐가?”

기다리고 있던 마제 단목승울이 물었다.

“ 백십이 년 여섯 달 열엿새가 지났네. 마제!”

“ 중원은 더 이상 우리 자리가 아니란 말인가?”

“ 그렇지. 아무리 피가 섞였다고 하지만 아들은 죽고 얼굴도 모르는 손자와 증손자네. 그들과 함께 살 수 있을 거라고 보는가?”

“ 그러고 보니 우리들 중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네였구먼.”

마제는 안쓰러운 얼굴로 이세연을 보았다.

그래도 다른 이들은 가족의 임종이라도 지켰다. 하지만 이연은 부인은 물론이고 자식들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비록 아직 가문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세연이 돌아갈 수 있는 집은 아니었다.

“ 내가 선택한 삶을 살았을 뿐이네. 그만 가세.”

“ 그렇군.”

파앗!

단목승울은 지면을 박차고 나아갔다. 두 사람은 금세 일행을 따라잡았다.

“ 묘봉산까진 얼마나 걸리는가?”

조천신 곁으로 간 이세연이 물었다.

“ 인원이 너무 많아 관도로는 갈 수가 없고, 산을 타고 가야 합니다.”

“ 시간이 더 걸린다는 말이구먼.”

“ 내일 저녁이나 돼야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굳이 급하게 갈 필요도 없습니다.”

“ 느긋하게 새로운 삶을 즐기란 말인가?”

“ 그러셔도 되고요.”

“ 매 끼니마다 북경 최고 요리와 술을 가져와야 할 거네.”

“ 그건 걱정마십시오. 어르신. 최고의 요리와 술을 대령하도록 하겠습니다.”

“ 기대 하겠네.”

이세연은 빙그레 웃으며 몸을 날렸다.

*******

권력을 가진 세력이 전쟁을 시작하게 되면, 가장 이익을 보는 자들은 방관자, 즉 지켜보는 자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싸움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전력 손실이 많아지고, 설사 승리한다고 해도 상처뿐인 영광밖에는 얻을 게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켜보는 자들은 전쟁이 치열해지기를 바란다.

조현이 죽고, 육양이 시체로 발견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오군도독부 도독들은 겉으로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내심으로는 크게 웃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달랐다.

이른 아침 후군도독부로 모여든 도독들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간밤에 들어온 정보 때문이었다.

“ 사실이라고 보시오?”

후군도독부의 정보력은 동창이나 금의위에 비해 약하고 수집하는 정보의 범위도 좁다. 하지만 범위가 좁은 대신에 정확도는 더 뛰어나다. 그건 금자훈도 인정하는 바다. 그런데 이틀 전에 오군도독부 정보망에 삼혈시가 걸려든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삼혈시에 대해 파고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삼혈시가 발견된 곳은 금의위가 한창 연우강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묘봉산이었던 것이다.

“ 전 그 말을 듣자마자 구림세가를 집중적으로 감시했습니다.”

오른편에 앉은 우군도독부 도독 남천장군 명사군이 입을 열었다.

“ 어떻게 됐소?”

“ 구림제도 이연의 심복인 대천무존 구양을과 광걸십존 육차남 그리고 현의사존 운보가 어젯밤 구림세가를 떠났습니다”

“ 어디로 갔소?”

“ 묘봉산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습니다.”

“ 그럼 삼혈시가 출현했다는 게 사실이란 말이군.”

금자훈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삼혈시의 출현은 구림세가의 힘이 지금보다 몇 배 이상 강해짐을 뜻하고, 그들이 강해진다는 건 곧 금의위 전력 증강으로 이어진다.

아니 금의위의 전력 증강은 크게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구림세가의 부상이다. 힘을 지니게 되면 사람이 모여들게 되고 사람이 모여들면 권력은 저절로 따른다.

허투루 넘길 일이 결코 아니었다.

“ 백 년이 넘었습니다. 장군.”

중군도독부 도독 천승장군 여절령이 말했다.

“ 그들을 가둘 때 총 몇 명이었는지 아시오?”

“ 그건....”

여절령은 말끝을 흐렸다.

“ 일 차로 오백 명이 들어갔고, 이 차로 삼백 명이 들어갔소.”

“ 총 팔백 명이 들어갔군요.”

“ 그렇소.”

금자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산으로 들어간 인원이 팔백 명이란 것은 자료를 찾아보고 난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 그럼 살아 있으 가능성이....”

이번에 입을 연 사람은 전군도독부 도독 차령장군 소정방이었다.

“ 난 구할 이상으로 보오. 문제는 그들이 지난 백 년 동안 무얼 하고 지냈느냐 하는 거요.”

“ 무공이군요.”

소정방은 신음처럼 말했다.

“ 그렇소. 차령장군.”

금자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들이 금산으로 들어갈 때 했던 말이 있다고 하던데 들어본 적 있습니까?”

문득 떠오른 듯 남천장군 명사군이 말했다.

“ 금산에서 배내 준 자에게는 목숨을 달라는 부탁만 빼고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주겠다고 한 맹세 말이오?”

“ 알고 계셨군요.”

“ 그래서 장군들을 부른 거요.”

“ 그 맹세가 사실이란 말입니까?”

천승장군 여절령이 못미더운 얼굴로 물었다.

“ 사실이오. 천승장군. 마제 단목승울을 비롯한 가주들은 팔달령을 넘기 직전 황제 일행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는데 그때 한 말이요.”

“ 만일 우리가 삼혈시를 얻어서 그들을 빼낸다면 요구를 할 수 있는 겁니까?”

여절령은 다시 물었다.

“ 굳이 그럴 필요가 있다고 보시오?”

“ 네?”

여절령은 의아한 얼굴로 금자훈을 보았다.

“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풀어주는 게 아니라 나오지 못하게 하는 거요. 차령장군.”

“ 아!”

여절령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오군도독부 입장에서는 특별한 변수가 생기지 않는 지금 상태가 가장 좋다. 굳이 바꿀 이유가 없는 것이다.

“ 그래서 하는 말인데 삼혈시를 없애야겠소.”

“ 무장을 파견하자는 말입니까?”

남천장군 명사군이 물었다.

“ 삼혈시가 금의위나 구림세가로 들어가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곳은 우리 오군도독부요. 그 일만은 무조건 막아야 하오.”

“ 무장은 어느 정도나 생각하고 계십니까?”

명사군이 다시 물었다.

“ 그곳에 들어가 있는 금의위 수가 삼천 명 가량으로 알고 있소이다.”

“ 우리도 그 정도로 맞추자는 말입니까?”

명사군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금의위와 수준을 맞추려면 오군도독부 무장들 중 무공을 익힌 자들이 전부 나서야 한다. 즉 오군도독부 전력도 전부 투입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 내 작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요?”

“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아니라 장군 말씀대로 하면 우리 또한 이번 일에 전력을 투입하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만일....”  “ 우리 오군도독부와 금의위가 상잔할 수도 있다는 말이구려.”

“ 그렇습니다. 장군. 몰론 삼혈시를 없애야 하지만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 그건.....”

금자훈은 할 말이 없었다.

명사군의 말이 틀리지 않다. 자칫 잘못하면 동창에게 어부지를 안겨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접니다.”

바로 그때 부장인 장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일이냐?”

“ 동창의 소제독 유설연에 대한 정보가 올라왔습니다.”

“ 말하거라.”

“ 그가 팔신장을 데리고 은밀하게 처소를 나서 묘봉산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 확실한 정보더냐?”

금사훈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어렸다.

“ 묘봉산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다고 합니다.”

“ 알았다. 수고했다.”

금자훈은 도독들을 돌아보았다.

“ 그놈도 삼혈시를 노리고 있나 보군요?”

명사군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비쳤다.

“ 그런 것 같소.”

금자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움직이면 꼬리는 자동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 유설연이 묘보안으로 들어갔다면 동창 무인들 또한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을 터였다. 더 이상 동창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남천장군 명사군은 금자훈을 보며 말했다.

“ 남천장군과 천승장군은 동쪽을 맡도록 하시오.”

금자훈은 명사군과 여절령을 보았다

“ 알겠습니다.”

“ 그렇게 하겠습니다.”

명사군과 여절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차령장군은 북쪽을 맡아주시오.”

“ 알겠습니다.”

소정방은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장익!”

혼자남은 금자훈은 밖을 향해 나직하게 소리쳤다.

“ 부르셨습니까?”

곧 부장 장익이 안으로 들어왔다.

“ 조천성이 있는 곳으로 갈 참이다.”

“ 준비하겠습니다. 장군.”

장익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마차에 오른 금자훈은 호위 무장들의 경호를 받으며 후군도독부를 나섰다. 금자훈은 마차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완연한 겨울이 온 듯 하늘은 투명한 얼음처럼 차갑게 보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찌르르 울리며 통증이 찾아든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불안감이었다.

“ 잘될 거야.”

금자훈은 자신을 다독이며 창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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