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수틀리면 황제도
이철상은 얼굴을 찌푸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방바닥에는 검은 선이 어지럽게 그어진 종이가 놓여 있었다. 한참을 내려다보던 그는 세필에 먹물을 찍어 다시 그림을 그렸다.
“ 젠장!”
그림을 그려나가던 그는 욕설을 뱉어내며 종이를 와락 구겼다. 그러고는 한편 구석으로 내던졌다.
그런데 구겨진 종이가 떨어진 곳에는, 방근 던진 것과 같은 구겨진 종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는 새 종이를 가져다 놓고 다시 그림을 그렸다.
종이의 삼분의 이를 채울 때까지 그의 붓은 쉬지 않았다. 그리고 한쪽 귀퉁이가 남았을 때 이철상은 붓을 내려놓았다.
“ 아이고!”
바로 그때 오른편 구석에서 엄살 부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여몽이었다.
“ 어때요?”
이철상은 붓을 내려놓고 여몽을 보았다.
“ 몇 살이죠?”
여몽은 울상을 하며 이철상을 보았다.
그녀가 이철상에게 잡힌 건 연우강의 말을 전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날이었다. 연우강이 보내서 왔다고 하자마자, 그는 인사도 없이 사람을 밀어붙였다. 그에게 떠밀려 이상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 이상한 곳으로 들어가기 전에 특별한 사항이 있으면 반드시 기억하라는 말을 들었다. 들어간 그곳이 진식 안이라는 건 한참 후에 알았다. 그 안에서 얼마나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늪 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은 그곳에서 힘을 탕진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그의 이름을 알았다.
“ 대장은 교랑이라고 부르는 데 이름은 이철상입니다.”
“ 난 여몽이에요. 연 공자가 말하길.....”
하지만 그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다시 진식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무공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했지만 그 역시 연우강처럼 상상을 초월한 고수였다.
그때부터 쉬지 않고 진식을 들락거렸다. 그리고 나올 때는 특이한 점을 말해주고 질문을 했다.
“ 이제 몇 번만 더 들어가면 됩니다. 그리고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됐죠?”
“ 가족은 있어요?”
“ 부모님은 안 계시고 숙부 집에서 얹혀 살았습니다.”
“ 저도 부모님은 안 계세요. 동창에 지원했다가 훈련까지 받았는데, 증조부께서 원나라 공신을 지내는 바람에 마지막 최종 면접에서 탈락했어요. 그러다가 총루주님을 만나 금향으로 들어가게 됐고.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지만 아직 혼자에요. 들어가면 돼요?”
“네.”
“ 다녀와서 봐요.”
여몽은 빙그레 웃으며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방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그녀의 모습이 이철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괜찮은 여자네.”
이철상은 싱긋 웃으며 다시 진식에 몰두했다.
그 후로도 여몽은 수십 번도 더 들락거렸다.
그녀가 진식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시간은 두 시진이었다. 전엔 꼬박 하루가 걸렸던 시간을 진식의 변형을 통해 조절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설치된 진처럼 소규모 진에서만 가능할 뿐 대규모 진에서는 여전히 하루를 꼬박 걸어야 밖으로 나올 수 있다.
“ 더 이상은 못해요.”
밖으로 나온 여몽은 이철상 옆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 이제 더 이상 물을 것도 없습니다.”
이철상은 싱긋 웃으며 남아 있던 부분을 그려넣었다.
“ 이제 합방만 하면 되는 거네?”
이번 질문은 밖에서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연우강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았다.
가족 사항을 묻고, 살아온 삶에 대한 질문을 주고받았던 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제 합방만 남았다니.
“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요?”
한때 기녀생활을 해서 그런지 여몽은 거침없었다.
여몽은 빙그레 웃으며 이철상을 보았다.
“ 여 소저만 괜찮다면 나도 좋아요. 하지만 시간을 좀 늦춰야 할 것 같아요.”
“ 왜요?”
“ 내일부터는 더 바쁘거든요.”
이철상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덜컹!
연우강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어서 오십시오, 대장.”
이철상은 웃으며 연우강을 맞았다.
“ 얼굴이 좋은 걸 보니까 성공한 모양이지?”
“ 다행히 성공했습니다.”
“ 확장한 거야?”
“ 네, 보통 확장도 아니고 수백 배를 확장하려니까 쉽지가 않네요.”
그동안 그의 화두는 확장이었다. 금릉 연씨 세가 규모의 공간에서 팔괘만상미혼대진은 완벽하게 작동했다. 하지만 이곳은 금릉 연씨 세가보다 수백 배나 넓은 곳이었다. 그런 곳을 진식으로 덮는다는 것 자체가 쉽지가 않았다.
“ 쇄구촌만 하는 거 아니었어”
연우강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쇄구촌을 팔괘만상미혼대진의 영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쇄구촌 외각에 팔괘만상미혼대진을 설치하고 묘봉산에 있는 자들을 유인할 참이었다. 그런데 이철상의 표저을 보니 그게 전부가 아닌 듯했다.
“ 그놈들도 머리가 있는데 ‘나 잡아 봐라!’ 한다고 쫓아오지 않을 거 아닙니까?”
“ 그럼?”
“ 묘봉산 전역을 팔괘만상미혼대진으로 틀어막아 버릴 참입니다.”
“ 그게 가능해?”
“ 지난 한 달 동안 묘봉산 주변을 이 잡듯 뒤져서 머릿속에 완벽하게 저장시켰습니다.”
“ 저장만 하면 되는 거냐?”
“ 그걸로 안 된다는 건 대장도 알잖습니까?”
“ 그럼 어떻게 했는데?”
“ 전에 대장이 말한 대로 했습니다.”
“ 내가 뭐라고 했는데?”
“ 크기를 키우는 것보다 연결하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그러니까 여러 개의 진식을 설치해서 연결을 했다는 거야?”
“ 네.”
“ 전부 몇 개의 진식이 들어가는데?”
“ 이십 개의 진식이 들어갑니다.”
“ 그럼 그것들을 설치하려면?”
“ 최소한 한 달입니다.”
“ 열흘로 잘라.”
“ 열흘로는 죽어도 불가능합니다. 잠을 자지 않고 작업을 하면 이십 일가량 걸릴 겁니다.”
“ 그럼 보름으로 타협을 보자.”
“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해보겠습니다.”
“ 굳이 완벽하게 설치할 필욘 없어. 가장 좋은 방법은 놈들이 안에서 죽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 네.”
“ 그건 그거고 잠을 잔 게 언제야?”
연우강은 이철상과 여몽을 번갈아 보았다.
수염은 수북하니 길어 있고, 눈 아래쪽은 검게 그림자가 져 있다.
여몽 또한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의 행색은 최소한 며칠은 밤샘을 한 얼굴이었다.
“ 우린 아직 안 잤습니다. 대장.”
이철상은 정색하며 말했다.
“ 둘이 발가벗고 자는 거 말고 너 혼자 가는 걸 말하는 거야, 휴식을 취하는 잠 말이야.”
“ 그건 한 이삼일 됐을 겁니다.”
이철상은 머쓱한 얼굴로 대답했다.
“ 아니에요. 육일 째에요.”
“ 맞아?”
연우강은 여몽을 보며 물었다.
“ 네.”
“ 우선 푹 자. 일은 이틀 후부터 시작하고.”
“ 전 괜찮습니다. 대장.”
이철상은 고개를 저었다.
“ 다 살자고 하는 짓이야. 자식아. 그 상태로 가면 일이 끝나기도 전에 네가 먼저 죽겠어. 그리고 목욕해.”
“ 목욕요?”
“ 홀아비 냄새가 진동을 해.”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킁! 킁킁!
이철상은 제 어깨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하지만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 냄새 나요?”
그는 여몽을 돌아보며 물었다.
“ 심하게 나, 인마.”
대답은 밖에서 들려왔다.
“ 전 냄새 안 나는 데요?”
여몽은 밖을 향해 소리쳤다.
“ 너도 나거든?”
“ 저도 나요?”
이번에는 여몽이 자신의 어깨에 코를 대고 킁킁 댔다. 하지만 그녀 역시 이철상처럼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했다.
“ 달걀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해. 지금 당장 목욕을 하는 게 좋을 거야. 서로 등을 밀어주면 더 좋고.”
“ 등을 밀어주라고요?”
이철상과 여몽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 이미 알 건 다 알고 합방만 남았다고 했잖아.”
“ 그거야 대장이 한 말이죠. 그보다 어디 가십니까?”
이철상은 멀어지는 연우강을 보며 소리쳐 물었다.
“ 죽이러!”
“ 누굽니까?”
“ 그걸 알면 피곤해져. 교랑.”
“ ......!”
이철상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의 등을 바라보았다.
문득 지금 가장 피곤한 사람은 엿새 동안 한숨도 자지 못했던 자신이 아니라 연우강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진식에 대해 연구만 하면 되지만 연우강은 끊임없이 죽이는 방법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이 나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목을 딴다. 아무리 감정이 메말랐다고 해도 사람을 죽이는 충격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그가 앵속을 복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 물 데워 놓을까요?”
옆에 있던 여몽이 물었다.
“ 그게 나을 것 같아요. 그리고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이 오백 명이라고 했어요?”
“ 네.”
“ 그분들을 좀 빌려야 할 것 같네요.”
“ 우선은 쉬세요. 지금 상태로는 진식을 설치하지도 못할 것 같아요.”
“ 그렇게 하죠.”
이철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남천장군 명사군은 찻잔을 들어올리며 창 너머로 보이는 묘봉산을 보았다.
짙은 어둠이 묘봉산 전역을 감싸고 있다. 북경에 있던 금의위 위사 전부가 들어갔고, 오늘은 오군도독부 무장들이 전부 들어갔다.
아직 연락이 오진 않았지만 동창 무인들 또한 유설연을 따라 저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들까지 들어간다면 묘봉산은 일만 명 이상의 무인을 받아들인 셈이 된다.
오군도독부나 동창은 삼혈시를 찾기 위해 왔기 때문에 삼혈시가 등장했다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자중한 채 은밀하게 행동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가 없다. 묘봉산 어디선가 삼혈시가 발견됐다는 말이 들려오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 많은 피가 흐르겠군.”
그는 혼잣말을 하며 다시 찻잔을 들어 올렸다.
“ 아마도 내년 봄에는 묘봉산 장미가 더욱 붉어질 거야.”
“ .......!”
명사군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이곳에는 부관 이차훈만 들어올 수 있었다. 아울러 말대꾸를 할 수 있는자 또한 이차훈밖에 없다. 그런데 방금 들은 건 이차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갑자기 솜털이 곤두서며 소름이 돋았다.
그는 바로 등 뒤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맹수를 확인한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맹수는 검은 철립을 쓰고 검은 옷을 입었는데, 바로 뒤에 있었다.
“ 여, 연우강!”
명사군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 응!”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사군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 살려다오.”
“ 그럴 수 없다는 건 너도 알잖아. 그리고 여절령에게 금세 널 보내준다고 했어.”
“ 그럼 천승장군도?”
명사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 가족만 살려달라고 애원하더라고.”
연우강은 천천히 명사군의 어깨를 주물렀다.
“ 난 우군도독부 도독이다. 날 죽이면 너도 무사하지 못한다.”
애원이 통하지 않자 이번엔 협박을 했다.
“ 그 말은 귀가 닳도록 들었어. 명사군. 그런데 아주 재미 있는 게 내게 그 말을 했던 놈들 중 구 할은 나보다 먼저 죽었다는 사실이야.”
“ 네, 네가 원하는 걸 전부 주겠다.”
“ 진짜?”
“ 정말이다. 연우강, 약속, 아니 맹세하겠다.”
자신의 말이 통한 걸로 생각한 명사군은 적극적으로 나왔다.
“ 고마워.”
“ 그, 그럼.......”
우두득!
“ 크아악!”
명사군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머리가 한 바퀴 돌아간 그는 비명을 내지름과 동시에 절명했다. 하지만 연우강이 강기막을 펼쳐 주변을 차단하고 있었던 터라 그의 비명은 방 안에서만 맴돌았다.
“ 내가 원하는 건 네 목숨이야.”
연우강은 차갑게 말하며 혈잔수를 끌어올렸다.
그의 손이 붉게 변하고 명사군의 몸이 가루로 변해 흩어졌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연우강은 구석으로 가서 서랍장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깨끗하게 개어진 옷이 들어 있었다. 그것들은 명사군의 옷들이었다. 철립을 벗어 분해한 다음 허리춤 요대 안으로 밀어 넣고 명사군의 옷을 걸쳤다. 그러고는 동경을 바라보며 환영축골공을 펼쳤다. 얼굴 근육이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곧 명사군으로 변했다.
“ 완벽하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방문을 닫고 몸을 돌리는 오른편 방에서 중년 사내가 쪼르르 달려 나왔다. 그는 명사군의 부관인 이차훈이었다.
“ 어디 가십니까?”
이차훈은 명사군을 보며 물었다.
“ 현옥장군 처소에 다녀오겠다.”
“ 마차를 준비하.......”
“ 아니다. 혼자 갈 생각이다.”
연우강은 손을 저었다.
“ 현옥장군은 서쪽에 있습니다. 장군.”
“ 여러 명이 움직이면 금의위나 동창 무인들에게 발각될 염려가 있다. 너는 여기서 동창 무인들이 나타나는지 그거나 잘 감시하고 있거라.”
연우강은 이차훈이 따라붙을 여지를 없애 버렸다.
“ 그렇다고 해도......”
이차훈은 말끝을 흐렸다.
“ 그리고 오늘 밤에 총공격 명령이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출병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거라.”
“ 오늘 밤이란 말입니까?”
“ 그렇다.”
“ 아, 알겠습니다. 장군.”
이차훈은 고개를 숙였다.
“ 혹시 돌아오지 않더라도 현옥장군과 함께 잇을 것이니까 걱정하지 말거라.”
연우강은 그렇게 말하고 집을 나섰다.
“ 다녀오십시오, 장군.”
멀어지는 연우강의 등을 향해 이차훈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연우강은 숙소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가서는 내공을 끌어올려 북쪽으로 몸을 날려갔다. 그의 다음 목적지는 북쪽 차령장군 소정방이 있는 곳이었다.
멀리 금의위 진영이 보이자 연우강은 만화은신사영을 펼쳤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허공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
차령장군 소정방 진영으로 들어간 그가 밖으로 나온 건 반시진 후였다. 나오는 방법은 지금껏 그랬던 것과 같았다. 금자훈에게 가겠다는 말과 공격 명령이 떨어지면 총공격을 감행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금자훈이 머물고 있는 서쪽에는 화전민들이 머물다가 간 움막만 몇 채 있을 뿐 마을이 없었다. 후군도독부 무인들이 움막 주변에 천막을 치고 그곳에서 머물렀다.
백여 개에 달하는 천막이 세워져 있지만 실제 이곳에 기거하는 자는 금자훈의 호위 백여 명이 전부였다.
조천성을 비롯한 일천여 명의 무장들이 묘봉산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금자훈의 처소는 조금 넓게 개조한 움막이었다.
천막들에 둘러싸여 있는 그곳은 원래 조천성이 기거하던 곳인데 지금은 금자훈이 사용하고 있었다.
연우강이 서 있는 곳은 후군도독부 진영 서쪽이었다.
그는 후군도독부 진영을 바라보았다.
움막과 천막이 뒤섞여 있는 후군도독부 진영 곳곳엔 모닥불이 피어 있었고, 모닥불 주위에는 무장들이 삼삼오오 모여 차를 마시고 있었다.
“ 좋은 날이네.”
연우강은 차갑게 웃으며 모닥불을 향해 걸어갔다.
느닷없이 검을 옷을 걸친 자가 다가오자 무장들은 의아한 얼굴로 서소를 바라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안으로 들어오는 연우강의 걸음걸이가, 마치 볼일을 보러 갔던 동료가 돌아오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연우강이 평소처럼 검은 철립을 쓰고 검을 옷을 입었더라면 어쩌면 알아보는 자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복장은 소정방을 없앴던 모습 그대로였다. 한눈에 그를 알아본다는 건 무리였다.
“ 춥지?”
연우강은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 겨, 겨울이니까. 그런데 어디 소속이지?”
사내는 연우강을 빤히 보며 물었다.
“ 저승!”
연우강은 모닥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 어디?”
“ 지옥이라고.”
연우강의 손이 사내의 머리로 향했다.
철컥! 철컥!
나아가던 손끝에서 사망낭조가 모습을 드러내고 곧 그것은 사내의 얼굴로 틀어박혔다.
“ 아아악!”
사내의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우강의 왼손이 허공을 갈랐다. 왼손 손가락을 벗어난 네 개의 사망낭조가 무장들의 얼굴로 틀어박혔다.
“ 으악!”
“ 아악!”
“ 크아악!”
“ 아악!”
모닥불 주변에 있던 무장 네 명은 얼굴을 감싸쥐고는 그 자리에 풀썩풀썩 쓰러졌다.
번쩍!
시체로 변한 네 명이 모닥불 위로 쓰러지는 순간 왼손 약지에서 사망지환이 튀어나갔다. 사망지환은 곧 무장의 목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 컥!”
검을 뽑아 들었던 무장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누구냐고 묻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무장은 끝내 질문을 하지 못했다. 목을 관통한 사망진환이 하필이면 성대를 찢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풀썩!
그의 신형 또한 모닥불 위로 쓰러졌다.
화르르!
사방으로 흩어졌던 모닥불이 시체가 된 무장들의 옷에 옮아 붙으면서 불길이 커졌다.
“ 누구냐?”
“ 웬 놈이냐?”
“ 적이다!”
차앙! 차앙! 창창창!
다른 모닥불 주변에 있던 무장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고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와주면 난 좋고.”
연우강은 무장들응ㄹ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 차앗!”
“ 타앗!”
휙! 쇄액!
가장 먼저 연우강 앞으로 다가온 무장 두 명이 먼너 공격을 시작했다.
어느새 연우강의 손에는 손괭이와 낫이 들려 있었다.
차앙!
연우강은 낫과 손괭이를 부딪쳤다. 그러자 시퍼런 불꽃이 낫과 손괭이가 부딪친 곳에서 튀었다.
양팔을 활짝 벌린 그는 두 명을 향해 뛰어들었다.
막고 자르고, 자르고 찍는다. 가장 간단하고 편한 공격 방법이면서 다수와의 싸움에서는 최고의 효과를 발휘하는 난투박투였다.
차앙! 스악!
“ 으악!”
차앙! 퍼억!
“ 크아악!”
손괭이와 낫이 번갈이 허공을 가르고 검붉은 피와 처절한 비명이 뒤를 이었다.
“ 놈은 혼자다!”
“ 침착하게 대항하라!”
“ 우왕좌왕하지 마라!”
빠른 동작과 화려한 초식을 펼치지 않자 연우강의 실력을 우습게 본 듯 후군도독부 수뇌들은 부하들을 독려했다. 겉으로 드러난 동작 말고는 연우강의 실력을 알아볼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들고 있는 무기는 농사를 지을 때 사용하는 낫과 손괭이.
경계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연우강의 낫과 손괭이를 피하지 못했다.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느렸지만, 손괭이와 낫은 정확하게 적의 공격을 막아냈고, 공격하고 난 다음에 나오는 허점을 찾아 들어갔다.
허점으로 파고들어 갈 때는 파괴적이고 잔인했다.
연우강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전율적인 투기를 감지한 몇몇 무장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하지만 그들은 뒤편에서 밀고 들어오는 동료들에 의해 금세 막혔다.
“ 뭐 하고 있느냐?”
수뇌들은 신경질적인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또다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 빌어먹을!”
호위 무장의 수장인 조규찬은 연신 뒤편을 흘끔거렸다. 상대가 어떤 자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사용하는 무기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를 받았다. 농부들이 사용하는 낫과 특이하게 생긴 손괭이라고 하였다.
무인의 기본을 무기라고 여기고 무공의 고하를 판단할 때도 무기 상태를 보는 조규찬으로서는, 낫과 손괭이를 든 연우강은 제대로 무공을 배운 무인이 아니었다. 그런 자에게 오군도독부 무장들이 당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조 대장!”
바로 그때 금자훈의 움막에서 장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조규찬은 고함을 내지르며 움막을 향해 몸을 날려갔다.
“ 무슨 일이오?”
움막 안으로 들어가자 장익이 물었다.
“ 별일 아닙니다. 이상한 자가 들어와서.....”
“ 으악!”
“ 아악!”
“ 크아악!”
조규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달아 비명이 들려왔다.
“ 별것 아니라면서 저런 비명......”
“ 크악!”
“ 으악!”
“ 악!”
“ 컥!”
세 사람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이번에는 비명이 무더기로,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왔다. 마치 떼거리로 몰살을 당할 때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장익은 급하게 문을 열었다.
“ 저럴 수가.”
그는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아무래도 네 몸에는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나 모닥불이 환하게 밝혀진 가운데 죽음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 장익은 허공에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들이 뭔지 몰랐다.
그것들 중 하나가 모닥불 위로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허공을 가득 채우며 둥실둥실 떠오르고 있는 것들이 전부가 무장들의 머리였다.
“ 가, 감당할 수가 없는 잡니다. 장군. 당장 이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장익은 해쓱한 얼굴로 소리치며 문을 닫았다.
쿠웅!
쐐액!
문닫는 소리에 이어 대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서, 설마......”
퍽!
“ 크악!”
문에 작은 구멍이 뚫리더니 장익의 허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장익은 멍한 얼굴로 배를 보았다. 배를 뚫고 나온 작은 물체는 잔뜩 독이 오른 뱀의 머리처럼 이리저리 움직여 다녔다.
“ 피, 피해야.......”
조규찬이 몸을 날리려는 순간, 푸른 물체, 뇌섬은 곧바로 그의 머리를 향해 쏘아져 갔다. 조규찬은 곧바로 뇌섬을 향해 일장을 쳐냈다.
퍼억!
하지만 뇌섬은 강호상에 등장한 암기 중 서열 일위에 올라 있는 절대 암기. 조규찬의 장력으로 뇌섬을 막을 수가 없었다. 뇌섬은 아무렇지도 않게 조규찬의 장력을 뚫고 들어갔다.
“ 크아악!”
조규찬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동댕이쳐지듯 쓰러진 그의 이마에는 손가락 두께의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 도대체 누가?”
금자훈은 넋을 잃었다.
비록 동창이나 금의위 최정예에 비하면 부족한 감이 없지 않지만 호위 무장들의 무공 또한 상당하다. 게다가 부족한 무공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진식도 익혔다.
그런데 적이 쳐들어왔다는 말을 들은 지 일각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밖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저벅! 저벅! 저벅!
아니 정적을 깨는 소리가 있기는 했다.
그건 다름 아닌 움막을 향해 걸어오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였다.
금자훈은 전면의 벽을 바라보았다.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뚫고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 장익이 도망을 치려고 하다가 이마에 구멍이 뚫렸다. 그건 곧 도망치면 죽이겠다는 경고라는 걸 금자훈은 잘 알고 있었다.
덜컹!
문일 활짝 열렸다.
금자훈은 문밖을 보았다. 온몸을 피로 뒤집어쓴 사내가 이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 누, 누구요?”
금자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흑랑기 대주이자 정천호인 연우강이다.”
연우강은 나직하게 말했다.
“ 여, 연우강이란 말이냐?”
금자훈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그는 연우강이 묘봉산에 있는 줄 알았다. 아니 설사 그곳을 나온다고 해도 오군도독부를 공격할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는데,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 오군도독부 도독들 중 남은 자는 조군도독부의 제승기 밖에 없어.”
사실 제승기가 있는 남쪽에도 이미 다녀왔다. 하지만 제승기는 무장들을 이끌고 묘봉산으로 들어간 후였다.
“ 다 죽었단 말이냐?”
“ 이번 전쟁이 끝나면 오군도독부라는 단체는 당분간 브ㅜ경에서 사라질 거야.”
“ 왜?”
“ 무슨 말이지?”
“ 왜 우릴 공격하는지 그걸 묻는 거다. 연우강. 우린 너와 원수를 진 일도 없고, 악연을 맺은 적도 없다.”
“ 왼손잡이에 도를 쓰는 자라는 말 알아?”
연우강은 금자훈을 빤히 보며 물었다.
“ 그건......”
금자훈은 말끝을 흐렸다. 양성일의 시체를 조사하고 오군도독부에서 내린 결론이다. 왼손잡이면서 도를 쓰는 자는 척살사의 사주 육양밖에 없었다.
“ 양성일 장군이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난 할 수밖에 없어. 금자훈. 왜냐하면 난 그분에게 빚을 졌거든. 물론 그분은 그걸 빚이라고 여기지도 않아. 그런데도 난 그분을 볼 때마다 항상 고마웠어.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절을 하기도 했어. 아마 내가 이 짓을 하는 것도 그분은 바라지 않을 거야. 한두 명도 아니고 수천 명을 전부 없애야 하는데... 그건 차마 못할 짓이거든.”
“ 그런데 왜?”
“ 나도 모르겠어. 다만 너희들을 전부 죽이며 그분에게 덜 미안할 것 같고,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은 것 같고... 아무튼 그래. 그리고 이건 가장 중요한 건데, 오군도독부를 없애고 나면 북경에는 동창만 남는다는 거야.”
“ 그럼 순전히 동창을 위해서.....”
“ 유설연 그놈이 내 친구라는 건 너도 알잖아.”
슉!
조규찬의 뒤통수를 뚫고 나왔던 뇌섬이 다시 고개를 발딱 세우더니 금자훈을 향해 쏘아져 갔다.
“ 살려다오, 연우강.”
“ 쿡!”
연우강은 뇌섬으로 시선을 주며 몸을 돌렸다.
슉!
뇌섬은 빠른 속도로 금자훈을 향해 쏘아져 갔다.
푹!
뇌섬은 한 번에 금자훈의 단전을 뚫고 들어갔다.
“ 커억!”
금자훈은 단전을 감싸 쥐었다. 감싸 쥔 그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 연우강!”
금자훈은 무릎을 꿇으며 연우강을 불렀다.
연우강은 금자훈을 돌아보았다.
“ 네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고 보느냐?”
“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
“ 금의위와 사우고 나면 남경왕 주진무가 기다리고 있다.”
“ 그래서?”
“ 남경왕 주진무는 우리와는 다르다.”
“ 아니 같아.”
“ .....?”
금자훈은 그 말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남경왕이란 칭호나 황제 동생이란 신분이 목숨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말이야. 그도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고, 칼로 찌르면 죽는 사람이란 말이다.”
“ 그도 죽이겠다는 말이냐?”
“ 수틀리면 황제도......”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스아악!
그리고 장익, 조규찬, 금자훈의 몸을 뚫고 들어가 있던 사망혈삭은 빠른 속도로 회수됐다.
“ 미친놈!”
금자훈의 신형이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 미쳤으니까 금의위와 오군도독부를 공격하지 자식아. 제정신인 놈이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어?”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 제 22권 끝>
황금 백수 23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