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216화 (216/232)

제 1장 금상첨화

방 안을 뒤져 비교적 깨끗한 옷을 꺼내 갈아입은 연우강은 죽은 장익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밀가루 반죽처럼 이지러지더니 잠시 후 장익의 얼굴로 바뀌었다.

한편에 놓인 동경으로 얼굴을 확인한 연우강은 후군도독부 진영을 나와 북쪽으로 몸을 날렸다. 출병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북쪽 전군도독부에 당도한 그는 남아 있던 무장들에게 출정 명령을 전달했다. 소정방을 없애고 나서 오늘 밤 출정할지도 모른다는 언질을 해둔 터라 전군도독부 무장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짐을 챙겨 산으로 들어갔다.

“ 어쩐 일이시오?”

안으로 들어서는 연우강을 이차훈이 맞았다.

“ 출정 명령이 떨어졌소.”

“ 이 밤에 말이오?”

이차훈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 나왔다.

물론 출정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기에 대기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밤중에 올라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대기만 하고 아침에 올라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삼경이 지난 지금 올라가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짜증이 밀려왔다.

“ 난 명령만 전할 뿐이오. 그리고 다른 쪽은 이미 출발했소.”

“ 알았소이다.”

이차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부의 명령인데 내키지 않는다고 수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곧바로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로부터 반시진 후.

우군도독부 무인들은 각자 짐을 챙겨 산으로 올라갔다.

연우강은 우군도독부 서쪽 끝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무장들을 바라보았다.

“ 이제 한쪽은 끝났네.”

그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지금 상황은 그가 최종적으로 원했던 그림 중 절반에 가까웠다. 이제 그림에 색을 칠하면서 나머지 절반을 채우면 될 터였다.

“ 아주 붉게 칠해야겠지.”

연우강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고는 남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남쪽의 좌군도독부 진영에 도착한 것은 반 시진 후였다. 좌군도독부 무장들이 머물고 있던 천막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 운이 좋구나. 제승기.”

낮게 중얼거리고는 천막을 돌며 후군도독부 무장들이 남겨놓은 음식을 챙겨 천으로 싸서 걸머졌다. 그리고 산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가 간 곳은 묘봉산에서 유일하게 천라지망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다는 습곡이었다.

습한 대기를 뚫고 올라간 그는 계곡을 벗어나는 지점에서 멈춰 섰다.

계곡은 오른편으로 꺾이면서 벌판으로 나가게 돼 있는데, 전면에는 십여 장 높이의 절벽이 자리해 있었다.

연우강은 천리지청술을 펼쳐 주변을 살폈다.

곧이어 그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그는 절벽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 이쪽으로 오세요.]

곧 봉연의 전음이 들려왔다.

연우강은 절벽 아래쪽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곳은 전에 파두었던 구덩이었다.

마라천력으로 구덩이 위쪽의 뚜껑을 들어올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 얼레?”

원래 구덩이는 폭이 세 자에 깊이는 두 자였다. 그런데 구덩이 위쪽 부분에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계단은 비스듬히 경사를 이루며 일 장가량 이어져 있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자 같은 폭의 입구가 나왔다. 입구는 옷을 걸어 대충 막아두었는데 푸른색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망궤 안에 넣어두고 다니는 야명주 불빛인 듯했다.

연우강은 안으로 들어갔다.

“ 허!”

그는 멍한 얼굴로 봉연을 보았다.

그녀가 있는 곳은 내부의 사방 벽은 물론이고 천장까지 돌로 이루어진 공간이었다. 폭은 가로 일 장, 세로 일 장 다섯 자, 높이는 여덟 자에 달했는데 제법 아늑한 느낌이 났다.

“ 어떻게 된 거야?”

연우강은 봉연의 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 심심해서요.”

“ 이걸 만들었다고?”

“ 조금 넓은 공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땅을 팠는데 이런 곳이 나왔어요.”

봉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찬 기운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망궤 안에 들어 있는 천과 옷가지를 꺼내 깔고 덮자, 위쪽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 지휘 본부가 생긴 셈이네?”

연우강은 지고 있던 자루를 내려놓았다.

“ 그건 뭐죠?”

“ 먹을 것 좀 챙겨왔어.”

“ 와!”

봉연은 활짝 웃으며 연우강 앞으로 다가앉았다.

자루 안에는 닭고기와 소고기, 돼지고기를 물론이고 밑반찬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 어디서 구한 거죠?”

봉연은 닭고기를 집어 들고 삼매진화를 펼쳐 데우며 물었다.

“ 오군도독부 진영에서 가져온 거야.”

“ 그들도 이곳으로 왔어요?”

봉연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 응!”

“ 누가 들어왔는데요?”

“ 전부.”

“ 전부라면... 전, 후, 좌, 우, 중군도독부가 몽땅 들어왔다는 거예요?”

더욱 놀라운 말이었다. 아니 봉연이 생각하기엔 그들이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 무장은 삼천여 명이 들어왔고, 좌군도독부 도독 영락장군 제승기를 제외한 나머지 도독인 이렇게 됐어.”

연우강은 집게손가락을 펴서는 목을 그었다.

“ 주, 죽었다는 거예요?”

봉연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오군도독부 도독들.

그들은 연우강이 없앤 조현이나 육양과는 차원이 다른 자들이었다. 동창 제독 유 공공이나 금의위 영반 공오인과 같은 수준의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 다섯 명 중 네 명이나 없앴다니.

연우강의 말이 밑기지 않았다.

“ 난 기회가 오면 절대 놓치지 않는 사람이거든.”

“ 그 기회도 연 공자가 만들었겠죠?”

“ 그렇다고 볼 수 있지.”

“ 어떻게 만들었는데요?”

닭에서 김이 오르자 봉연은 닭다리를 찢어 연우강에게 건네주었다.

“ 삼혈시라고 알아?”

“ 금산을 여는 열쇠를 말하는 거잖아요.”

“ 알고 있네?”

“ 자밀원 원주가 되면 극비 사안을 따로 분류해 놓은 비서를 볼 자격이 생기거든요.”

“ 조천신 그놈이 삼혈시를 가지고 금산으로 갔다는 정보를 얻었어.”

“ 조천신이 삼혈시를 가지고 금산으로 갔다고요?”

“ 응!”

“ 이상하네.....”

봉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 삼혈시는 전부 세 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세요?”

“ 그런데?”

“ 하나는 동창에서 보관하고 있었고, 하나는 북진무사,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구림세가에서 보관했거든요.”

“ 구림세가에서 보관하고 있었다고?”

“ 네.”

봉연은 연우강의 손에서 술병을 가져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 구림세가에서 삼혈시를 잃어벼렸을 리는 없고, 조천신에게 삼혈시를 준 사람이 구림제독이란 말이 되는 건가?”

“ 구림제독은 구림 중 팔림의 힘을 얻게 되고, 조천신은 연 공자를 없앨 사람들을 얻게 되니까,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 그럼 이곳 묘봉산에는 구림 중 팔림이 기어들어와 있는 셈인가?”

“ 그럴 가능성이 높은 것 같아요.”

봉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점점 재미있어지네.”

연우강은 봉연의 손에서 다시 술병을 빼 와서는 주둥이를 입 안으로 밀어 넣고 꿀꺽꿀꺽 삼켰다. 독한 술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몸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 아마도 그들은 전력을 다해 연 공자를 찾고 있을 거예요.”

“ 그렇겠지.”

연우강이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

팔림의 무인들을 데려온 조천신은 각 지휘관들에게 우선적으로 연우강을 찾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연우강은 찾지 못하고, 새로운 무인들이 묘봉산으로 들어왔다는 소식만 들어왔다. 이번에는 그들의 정체를 캐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정체를 알아낸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 오군도독부 무인이란 말이냐?”

조천신은 의아한 얼굴로 보고를 하러 온 좌포영 전철근을 보았다. 전철군은 우포 금철이 죽은 후 포밀영을 맡고 있는 자였다.

“ 그렇습니다. 사주.”

전철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들이 왜 여기를 들어왔단 말이냐?”

여전히 모를 일이었다.

그동안 오군도독부는 양성일의 죽음에 대해 철저하게 방관자적 입장을 취해왔다. 그랬던 자들이 느닷없이 무장을 파견했다는 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처사였다.

“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철군은 말끝을 흐렸다.

묘봉산에는 너무 제약이 많았다. 입는 것, 먹는 것은 물론이고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눈과 귀가 멀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물론 효시로 서로의 동향을 전하긴 했지만 그건 이동 방향만 알려줄 뿐 현 상황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다. 간혹 전력이 오간다고 해도, 그들의 보고를 받을 때는 상황이 종료된 뒤가 대부분이다.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린 것이다.

오군도독부 무장들이 묘봉산으로 들어온 것도 다르지 않다. 그들이 왜 들어왔는지, 지휘관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 그들도 조현 사주와 육양 사주가 죽은 건 알고 있겠지?”

조천신이 물었다.

“ 그럴 겁니다. 사주.”

“ 전철군 네가 오군도독부 도독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철군은 의아한 얼굴로 조천신을 보았다.

“ 눈엣가시 같은 자들이 위기에 처했다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이다.”

“ 그럼 그들이 우리를 없애기 위해서 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그런 경우 또한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부담이 너무 큽니다.”

“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지 않느냐?”

“ 그렇긴 합니다만.....”

전철군은 또다시 말끝을 흐렸다.

사실 그의 입장은 애매했다. 지금 사주인 조천신도 오군도독부 무장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할 건지 지시를 내리기 앞서 의견을 물어온 것이다. 말 한마디로 인해 오군도독부와 전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는데 신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멍청한 놈!”

조천신은 전철군은 쏘아보았다.

우포 금철이 무척 아쉬운 상황이었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는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조천신의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 전철군!”

“ 말씀하십시오, 사주.”

“ 가급적이면 자제하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공격해도 좋다고 알려라.”

“ 오군도독부와도 전쟁을 치르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전철군의 얼굴이 굳었다.

“ 묘봉산은 우리 금의위 작전구역이다. 남의 작전구역으로 들어온 자들이 잘못한 거다. 내 명령을 당장 전하라!”

“ 알겠습니다. 사주.”

진철군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등을 돌렸다.

진철군이 나가자 곧바로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연우강의 수색을 전담하고 있는 장영이었다.

“ 어떻게 됐느냐?”

“ 남쪽에서 놈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 정말이냐?”

“ 그렇습니다. 사주.”

“ 대기해라.”

조천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그는 계곡 안쪽에 위치한 천막 안에 들어와 있었다.

천막 안에는 이세연과 팔림의 가주들이 앉아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 찾았는가?”

“ 그런 것 같습니다.”

“ 지금 어디에 있는가?”

“ 남쪽에 있다고 합니다.”

“ 가보세.”

이세연을 비롯한 팔림이 가주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곡을 나섰다. 묘봉산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듯 몸을 날려 가는 와중에도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조천신 옆에서 몸을 날려가던 이세연이 물었다.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것 같았다.

“ 오군도독부에서 무장을 파견했답니다.”

“ 자네들은 다른 조직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는데도 끼어들고 그러는가?”

“ 아닙니다. 그렇게 해소도 안 되고, 끼어들었다가 죽임을 당해도 어디에 하소연도 못합니다.”

“ 그걸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자들이 무장을 파견했다는 건 의도적이란 말이군.”

“ 그렇습니다. 그들은 금의위를 없앨 작정인 겁니다.”

“ 지금 묘봉산에서 벌이는 작전은 황실에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는가?”

“ 그렇습니다.”

조천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이곳에서 자네를 비롯한 금의위가 죽는다고 해도 금의위 영반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을 하겠구먼.”

“ 오군도독부 또한 마찬가집니다. 우리 금의위 손에 죽는다고 해도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전쟁이구먼.”

“ 접니다. 사주.”

바로 그때 앞서 나갔던 철포 장영이 다급한 얼굴로 다가왔다.

“ 왜 그러느냐?”

“ 동창의 소제독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 유설연이 나타났다고?”

조천신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혼자 오진 않았겠지?”

“ 그의 심복 팔신장이 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 동창 무인들은?”

“ 동창 무인들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 소제독은 어떤 자인가?”

“ 동창의 실질적인 수장이면서 제가 없애려고 하는 연우강은 친구입니다.”

“ 그렇다면 동창 무인들도 묘봉산 어딘가에 들어와 있겠구먼.”

“ 그럴 겁니다. 머리가 움직였는데 꼬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 이상하구먼.”

“ 뭐가 말입니까?”

“ 지금까진 조용했던 자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묘봉산으로 몰려오고 있네. 그건 그들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봐야 하네.”

“ 누군가의 농간일 수도 있단 말입니까?”

조천신 또한 이세연과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한꺼번에 움직인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 연우강 그 친구의 머리가 뛰어나다고 했는가?”

“ 연우강이 그랬을 거라고 보십니까?”

“ 금의위에서 부르지 않았다면 남는 사람은 연우강밖에 없는 것 아닌가?”

“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오군도독부나 동창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 자네들은 어떤 명분을 가지고 이번 작전을 펼치고 있는가?”

“ 그건....”

조천신은 말끝을 흐렸다.

“ 비밀인가?”

“ 그렇습니다.”

조천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세연은 눈치가 빠른 자였다. 그는 조금 전 유설연이 연우강의 친구라고 하였던 조천신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 연우강을 잡은 다음 동창을 엮을 참이구먼.”

“ 으음!”

조천신은 신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허허허! 원래 나이를 먹으면 느는 건 눈치밖에 없다네.”

“ 맞습니다. 연우강을 사로잡은 다음 유설연과 동창을 엮어 넣어야만 이번 금의위 작전에 대해 해명할 수 있습니다.”

“ 그래야만 자네가 산다는 뜻인가?”

“ 그게 아니라면 삼혈시를 찾아서 금산으로 갈 이유가 없었겠지요.”

“ 허허허! 그럼 우리 꺼내 준 사람은 자네가 아니라 연우강 그자가 되는 셈이구먼.”

“ 그건...”

조천신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 농담으로 한 소리니까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말게. 아무튼 동창 무인들의 출병은 연우강과 유설연의 친분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될 것 같은데, 오군도독부 무장들의 출병에 대해서는 설명할 길이 아직은 없구먼.”

이세연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조만간 밝혀질 겁니다.”

“ 그들과도 전쟁을 할 참인가?”

“ 어쩔 수 없는 상황에만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려두었습니다.”

“ 적을 발견하면 무조건 공격하라는 공격 명령을 내렸구먼.”

“ 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단서를 달았습니다. 어르신.”

“ 금의위 위사들이 어떤 상태인지 아직 모르는가?”

“ 무슨 말씀이십니까?”

“ 자네들이 묘봉산에 펼친 천라지망이 왜곡됐다는 건 알고 있는가?”

“ 왜곡이라고요?”

조천신은 의아한 얼굴로 이세연을 보았다.

사실 조천신은 천라지망에 대해서도, 또 산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위사들의 상태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 천라지망은 약한 자들 수백명이 살기를 뿌려서 강한 자를 잡는 진식이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천라지망을 구축한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뿌린 살기에 노출되지 않아야 한다는 거네. 즉 살기에 노출된 자는 연우강이어야 하고 위사들은 정상적인 상태라야 한다는 거지. 그런데 어디서 구멍이 뚫렸는지 모르지만, 살기는 천라지망 곳곳으로 퍼져 나가서 위사들 또한 연우강처럼 살기에 노출되고 말았네. 살기에 꾸준히 노출되면 사소한 일에도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게 되는 데, 지금 위사들 상태가 그렇다네.”

“ 그러니까 어르신 말씀은 자제하라는 명령은 의미가 없다는 겁니까?”

“ 그럴 거네. 오군도독부 무장들을 보는 순간 위사들은 공격을 시작할 거네.”

“ 쳐라!”

“ 죽여라!”

“ 와-아!”

“ 이야합!”

이세연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멀리서 살기 가득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병기 부딪치는 소리에 이어 처절한 비명도 들려왔다.

“ 그렇다면 지금 묘봉산 곳곳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겠군요.”

“ 그럴 거네.”

“ 그자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옆에 있던 단목숭을이 끼어들었다. 이세연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잔뜩 굳은 채였다.

- 무인 한 명을 없애주시오.

금산을 열어주며 조천신이 한 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한 명이 단순한 한 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천라지망에 구멍을 만들고, 살기로 금의위 위사들을 중독시키고, 사주 둘을 포함한 천여 명 이상의 위사를 없애고, 이젠 동창 무인과 오군도독부 무장들마저 끌어들였다.

연우강은 혼자서 수천 명을 가지고 놀고 있다.

과연 과거에 그런 자가 존재했는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연우강 같은 사람은 없었다. 살아오면서 만났던 자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명나라 황제가 된 주원장이었다. 그런데 연우강 또한 주원장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자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 왜 겁나는가?”

이세연은 웃으며 물었다.

“ 겁이 나는 게 아니라 막무가내로 덤비는 것 같아서 하는 소리네.”

“ 겪으면서 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세연은 조천신을 보았다.

“ 알겠습니다.”

조천신은 앞쪽에 대기하고 있는 장영을 향해 안내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 모시겠습니다.”

장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렇게 한 시진가량을 달렸을까.

“ 크악!”

“ 아악!”

“ 으악!”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차앙!

창!

차앙!

“ 아악!”

“ 으아악!”

“ 커어억!”

“ 응?”

이세연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그가 멈추자 뒤따르던 자들도 일제히 멈춰 섰다.

“ 들었는가?”

이세연은 단목숭을 보았다.

“ 들었네.”

단목숭울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그가 심각한 얼굴을 한 이유는 들려오는 비명 때문이었다. 보통 죽어가면서 지르는 비명에는 두려움이 내포돼 있기는 하지만 그 느낌은 금세 사라진다.

그런데 방금 들려온 비명에서는 진득한 공포가 여운처럼 남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단순하게 목이 잘리고 심장이 찔려 죽으면 저런 비명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굶주린 맹수의 장난감이 됐다가 결국에는 물어뜯겨 죽임을 당한 자가 내지르는 비명과 비슷했다. 그건 곧 상대를 잔인하게 죽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 가보세.”

이세연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소리가 커서 가까운 곳이겠거니 했는데 잘못 생각한 모양이었다 일행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한 식경 후였다.

“ 으음!”

일행의 입에서 일제히 신음이 흘러나왔다.

현장은 지옥을 연상케 할 정도로 처참했다. 시체는 오십여 구였는데 머리가 잘린 것은 기본이고, 팔다리 사지 중 한두개도 반드시 잘려 있다. 한 사람에게 두 번 이상의 무기를 휘둘렀다는 의미였다.

“ 그자가 사용하는 무기가 뭔가?”

시체를 살피던 사제 낙강일이 물었다.

“ 손괭이와 낫을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장영이었다.

“ 손괭이와 낫?”

낙강일은 장영을 돌아보았다.

장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 혹시 그 자가 군 출신인가?”

낙강일은 다시 물었다.

“ 어떻게 아셨습니까?”

“ 전에도 손괭이와 낫을 사용하는 부대가 있었네. 흑랑기라고 하는 죄인들로 이루어진 부대였는데....”

낙강일은 말끝을 흐렸다.

“ 맞습니다. 놈은 흑랑기 대주 출신입니다.”

“ 금릉 연씨 세가의 장자라면서 흑랑기에 들어갔다는 게 말이 되는가?”

“ 군에 들어가서 사고를 쳤습니다.”

“ 군 출신이면서 강력한 무공마저 익히고 있다면....”

낙강일은 고개를 돌려 이세연을 보았다.

“ 상대가 까다로운 자라는 말인가?”

“ 그렇네.”

“ 크악!”

“ 아악!”

“ 으아악!”

낙강일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 가세.”

일행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비명이 들려온 장소는 첫 살인이 벌어진 곳에서 한 식경 떨어져 있었다.

일행이 그곳에 도착했을 땐 다섯 구의 시체만 남겨져 있을 뿐 살인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살인자가 동일인이란 사실은 시체의 형태로 금세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보았던 시체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있는 시체들 또한 목이 잘리고 사지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 으악!”

“ 아아악!”

“ 아악!”

또다시 비명이 들려왔다.

이세연 일행은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이번에도 역시 살인 현장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식경이었고, 시체들 또한 같은 상태였다.

“ 맹랑한 놈이군.”

이세연의 입매가 슬며시 비틀어지며 입에서 ‘놈’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 으악!”

“ 가세!”

기다리고 있었던 듯 첫 번째 비명이 들려오자마자 오십여 명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뒤에 남은 서른 명도 이세연 일행을 따라 나섰다.

“ 아악!”

“ 크악!”

그리고 그들이 달려가는 사이에도 두 번째와 세 번째 비명이 들려왔다. 일행은 더욱 속도를 냈다.

그들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조금 전보다는 훨씬 빨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그들이 발견한 것은 참혹하게 살해된 시체들 뿐이었다.

“ 아악!”

“ 죽일!”

휙!

입에서는 욕설이 흘러나오고, 몸에서는 살기가 흘러나왔다. 은림의 가주로 홍무제 주원장 말고는 아직 고개를 숙여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이세연이었다. 그랬던 그가 새카만 후배인 연우강에게 우롱을 당하고 있으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연우강의 최종 관직은 정천호에 불과하다.

이세연을 비롯한 팔림의 가주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세연을 비롯하여 먼저 도착했던 자들이 거의 동시에 몸을 날렸고, 뒤따라오던 서른 명 중 절반 정도가 앞서 나가고 열다섯 명가량은 뒤쳐졌다.

하지만 누구도 그 상황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팔림의 무인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무공에 자부심이 있었고, 연우강을 만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맨 후미로 처진 다섯 명도 다르지 않았다.

귀곡성랑 야인석, 적환 여인남, 수라쇄명 오일도, 사망도 활벌, 빙천마수 천목인, 그들 다섯 명은 다른 이들에 비해 체구가 클 뿐 아니라 경공도 유달리 약했다.

처음엔 어찌어찌 따라붙었지만 두 번째부터는 뒤처지더니 네 번째 접어들었을 때에는 바로 앞에 간 자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처지고 말았다.

“ 쉬었다가 가세.”

선두에서 몸을 날려가던 귀곡성랑 야인석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땀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 그렇게 하세.”

야인석 옆으로 거구 사내가 무너지듯 풀썩 주저앉았따. 야인석과 마찬가지로 옷이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고 있는 그는 적환 여인남이었다.

비단 여인남뿐만이 아니었다. 뒤따르고 있는 수라쇄명 오일도, 사망도 활벌, 빙천마수 천목인 또한 앞선 두 사람만큼은 아니었지만 상당이 많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물론 이들 다섯 명은 내기를 이용해서 몸을 차갑게 하면 땀을 흘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렇게 할 능력도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땀을 그대로 흘리는 것은 내력 소모를 줄이려는 의도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는 데 땀을 흘리는 것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무인에게 있어 최상의 몸 상태란 최강의 무공을 펼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만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는 건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더울 때 땀을 흘리고, 추울 때 옷을 껴입어 체온을 유지해 주는, 즉 자연에 순응했을 때 최적의 몸 상태를 만들 수 있고, 그 상태에서 최강의 무공이 나온다.

이들 다섯 명은 금산에서 그 사실을 깨달았고, 그러한 삶을 통해 자연지도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때부터 다섯 명은 자연에 역행하는 삶이 아니라 순응하는 삶을 택했다.

“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맨 마지막에 합류한 빙천마수 천목인이 입을 열었다.

“ 놈의 무공에 놀랐단 말인가, 아니면 호기심인가?”

사망도 활벌이 되물었다.

“ 놀란 게 아니고 호기심이네.”

천목인 피식 웃었다.

천목인 그를 비롯한 다섯 명은 칠십여 세의 나이로 금산의 이 세대 무인이다. 칠십여 년 동안 거의 매일 무공을 익혀 왔다. 아니 무공을 익히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는 곳이 바로 금산이었다 그렇게 칠십여 년 동안 살아왔는데 외부인의 무공에 놀랄 이유가 없었다.

다만 바깥세상에서 한가락 한다는 자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그게 궁금했다.

“ 솔직히 금의위 위사들의 무공은 무공이라고 부를 수도 없잖은가.”

활벌은 어깨를 으쓱했다.

“ 그렇지.”

천목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벅! 저벅! 저벅!

바로 그때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다섯 사람은 일제히 서로를 보았다. 본격적인 겨울로 접어 든 지금, 바닥에는 지난 가을 내내 떨어진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다. 누군가가 걸어간다면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려와야 한다.

그런데 지금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는 사방이 꽉 막힌 동굴을 걸어갈 때나 들을 수 있는 그런 소리다. 결코 낙엽이 두텁게 쌓인 산중에 어울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 고수군.”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귀곡성랑 야안석이었다.

야인석은 발자국소리를 듣자마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발자국에 어린 기운이 그만큼 강렬했던 탓이다. 마치 굶주린 맹수 한 마리가 다가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야인석에 이어 여인남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거의 동시에 오일도, 활벌, 천목인이 일어섰다.

다섯 사람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 곳을 응시했다.

저벅! 저벅! 저벅!

마치 무거운 무엇인가로 흙바닥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리고 반 각 후.

다섯 사람의 시야에 발걸음 소리를 낸 자가 잡혔다.

그는 검은 철립을 쓰고, 검은 옷을 입고, 검은 궤짝을 둘러맨 특이한 복장의 사내였다.

“ 네가 연우강이냐?”

야인석은 나직하게 물었다.

“ 응!”

연우강은 야인석 일행과 삼 장가량 떨어진 곳에 멈춰 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 지금 ‘응’이라고 한 게냐?”

상대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경계를 해야 할 정도로 강하면 그 부분에 더 신경을 쓰게 되는데, 야인석은 연우강의 반말이 더 거슬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야인석이 평생을 살았던 금산은 위계질서가 엄격하여, 나이 어린 자가 나이 먹은 어른을 향해 반말을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어른이란 의미는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사람을 말한다. 그런 사회에서 칠십 평생을 살아온 그였기에 연우강의 반말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었다.

다른 네 명 또한 다르지 않았다.

연우강의 입에서 ‘ 응’ 이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싸늘한 기운을 흘려 댔다.

“ ‘응’이라는 말을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시비를 걸려고 그러는 거야?”

“ 시비라고?”

“ 말투 가지고 뭐라 하는 새끼들 열에 아홉은 시비를 걸 의도르를 가진 놈들이거든.”

“ 죽일....”

야인석을 비롯한 다섯 명에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흘러나왔다. ‘응’ 에 이어 ‘새끼’와 ‘놈’까지 나왔다. 이건 거의 모욕 수준이었다.

“ 시비는 네놈이 걸고 있는 것 같구나.”

야인석 옆에 있던 여인남이 입을 열었다. 야인석보다는 덜했지만 그의 얼굴에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 쿡!”

연우강은 비릿하게 웃었다.

“ 그 웃음은 무슨 의미냐?”

여인남은 다시 물었다.

“ 산 속에 쳐박혀 있던 놈들이라 여기가 돌처럼 굳어 있을 줄 알았거든.”

연우강은 여전히 조소를 문 채로 집게손가락으로 철립의 옆을 가볍게 두들겼다.

파앗!

“ 개자식!”

말보다 행동이 더 빨랐다.

야인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갔다. 장거리를 이동하는 신법은 느렸지만 짧은 거리의 이동은 엄청나게 빨랐다. 순식간에 연우강 앞에 선 야인석은 양손을 빠르게 휘둘렀다.

그의 양손은 수십 개의 잔영을 남겼다. 그것은 바로 야인석의 자랑인 분광척영수라는 금나수였다.

연우강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어렸다.

야인석이 펼친 무공은 상대를 죽이기 위한 공격이 아니라 제압하기 위한 금나수이기 때문이었다.

연우강은 곧바로 양손을 내밀었다.

탁! 탁탁탁! 탁탁탁!

손바닥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두 사람 모두 손의 움직임은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로 빨랐다.

‘ 이놈이?’

야인석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분광착영수는 일 초에 서른 여섯 번의 변화를 보이고, 양손을 합치면 총 일흔두 번이 변한다.

게다가 얼마나 빠른지 펼치는 사람의 시선조차도 따르지 못한다. 그런데 연우강은 그 모든 변화를 읽어내고는 정확하게 막아내고 있다.

그제야 비로소 야인석은 연우강이 대단한 실력자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우강이 강자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금사수를 포기하고 단혼맥혈수를 펼쳤다. 단혼맥혈수는 일수에 상대의 모든 혈맥을 끊어 내는 잔인한 수법이었다. 하지만 그가 전개한 단혼맥혈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야인석은 분광착영수에 단혼맥혈수를 섞을 정도로 강자였던 것이다.

퍽! 퍽퍽퍽! 퍽퍽!

또다시 두 사람의 손이 부딪쳤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둔탁한 뭔가를 들고 후려칠 때 흘러나오는 소리 같았다.

여인남 일행은 긴장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다른 소리가 났다는 것은 손바닥에 담긴 위력이 달라졌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여인남 일행은 야인석이 단혼맥혈수를 펼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커억!”

“억!”

여인남은 깜짝 놀라 몸을 날렸다.

놀랍게도 단혼맥혈수를 펼친 야인석이 피를 토하며 비틀비틀 물러나는 것이었다.

여인남은 뒤에서 야인석을 부축했다.

“ 괜찮은 ......”

여인남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부축하고 있는 야인석의 숨결이 가늘어져 갔다.

여인남은 급하게 명문혈에 오른손을 밀착시켰다. 단전이 활짝 열리고 내기가 밀물처럼 야인석의 몸속으로 흘러들어갔다.

“ 아, 안 되네. 노, 놈을....”

더듬더듬 입을 떼는 야인석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바로 앞에 있던 연우강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건 곧 공격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바로 뒤에 있는 여인남은 진기를 불어넣는 중이다. 만일 지금 이 순간에 공격을 해온다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 나도 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촤르르!

여인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쇠가 풀려나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연우강의 오른손에서 풀려난 사망묵환이 야인석의 단전으로 파고들어갔다.

“ 커억!”

“ 으윽!”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연우강의 손목에서 풀려난 사망묵환이 야인석과 여인남을 꼬치 꿰듯 꿰어버린 것이었다.

여인남은 경악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두 번의 부딪침으로 인해 야인석은 죽음의 그림자가 온몸을 덮을 정도로 중상을 입었다. 야인석이 그 정도라면 설사 무공이 더 강하다고 해도 상당한 충격을 받아야 마땅하다.

연우강 또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놈의 손에서 풀려난 연검이 단전을 파괴해 버린 것이었다.

“ 어떻게 ....”

그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내가 더 강하니까.”

“ 그렇다고 해도.....”

“ 난 바빠.”

연우강은 사망묵환의 끝 부분에 의식을 집중했다. 그러자 사망묵환의 끝이 오른편으로 굽어졌다.

“ 차앗!”

바로 그때 머리 위쪽에서 살기 어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야인석에 이어 여인남까지 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오일도와 활벌이 그들의 무기와 한 몸이 돼 공격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두 사람은 연우강과 반 장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 얍!”

짧은 기합과 함께 연우강의 오른손이 두 사람을 가리켰다.

“ 으아악!”

“ 크아악!”

야인석과 여인남의 신형이 동시에 오일도와 활벌을 향해 쏘아져 갔다. 마라천력과 내공을 이용해서 두 사람을 들어올려 던져 버린 탓이었다.

아무리 독한 자라고 해도 동료가 날아오면 움찔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동료가 중상을 입었을 경우에는 움찔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안게 된다.

오일도와 활벌도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야인석과 여인남을 동시에 안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물론 그들의 시선은 연우강에게로 향해 있었다. 조금 전 여인남이 한눈을 팔다가 당했기 때문에 감히 태만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을 공격한 무기는 따로 있었다. 야인석과 여인남이 날아가는 속도가 갑자기 엄청나게 빨라지더니 두 사람의 가슴으로 박혀들어 갔다.

퍼억! 퍽!

휙!

두 사람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순간 연우강의 신형이 공간을 단축했다.

“ 머, 멈춰라!”

빙천마수 천목이 다급하게 소리 지르며 몸을 날렸다.

푹!

그가 공중으로 떠오르는 순간 허공에서 새하얀 비수가 튀어나와 천목의 목을 뚫고 들어갔다.

“ 커억!”

천목인의 입이 쩍 벌어지고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 항상 주변을 경계해야지.”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봉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목인은 멍한 얼굴로 봉연을 보았다. 지금껏 주변에 누군가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 너희들은 저분의 상대가 아니야. 차라리 금산에서 죽는 게 더 나았을 거야.”

봉연은 차갑게 말하며 천목인의 목에 찔러넣었던 검을 뽑았다.

츄악!

천목인의 목에서 핏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 으악!”

“ 아악!”

이어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봉연은 고개를 돌려 연우강을 보았다. 연우강을 공격했던 두 사람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 어?”

일순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 오일도와 활벌의 시체가 뻣뻣하게 굳은 채였던 것이다. 마혈이 점혈당한 상태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껏 연우강은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간 적도 없고, 지풍을 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혈이 됐다는 것은 다른 물체가 두 사람의 마혈을 가격했다는 건데, 두 사람을 가격한 물체는 여인남과 야인석의 머리뿐이다.

“ 제 생각이 맞아요?”

봉연은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시체를 이용해서 저놈들을 점혈한 게 아니냐고?”

연우강은 야인석과 여인남의 시체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네.”

봉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전쟁에서 승리하는 자는 많은 병력을 거느렸거나, 싸움을 잘하는 자가 아니라 환경을 잘 이용하는 자야.”

“ 세상에!”

봉연은 놀란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물론 그가 마라천력인이라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짧은 시간에 시체를 날려 적의 혈도를 제압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대단한 임기응변이 아닐 수 없었다.

“ 일하자.”

연우강은 시체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 일이라고요?”

봉연은 뜨악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적은 이미 시체로 변했고, 이곳에서 할 일은 없다. 그런데 연우강은 다시 뭔가를 하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 놈들이 묘봉산에서 떠나 버리면 그동안 우리 둘이 했던 모든 작업이 허사가 되고 말잖아.”

“ 그들이 장소를 옮길 거라고 보세요?”

“ 지금 당장은 아닐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묘봉산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느끼면 옮길 가능성도 없지 않아.”

“ 희박하긴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있다?”

“ 그렇지.”

“ 연 공자는 그들이 장소를 옮길 수도 있는 여지를 없애 버리려는 거고요.”

“ 그들에게는 금산이라는 멋진 장소가 있으니까.”

“ 결국엔 주도권 싸움이라는 거네요.”

봉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묘봉산을 전장으로 결정한 사람은 연우강이고, 현재까지 주도권을 쥔 사람도 그다. 즉 적은 연우강을 찾는 데 혈안이 돼 있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그런데 만일 적이 묘봉산에서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면 가장 먼저 취할 행동은 전장을 옮기는 것이다.

더불어 새로운 전장을 물색할 때 그들에게 가장 좋은 장소는 백여 년 이상 살아왔던 금산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묘봉산에서 빠져나가면 연우강 또한 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 맞아. 내가 쫓아올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되면 그들은 장소를 옮기려고 할 거야.”

“ 그러니까 연 공자는 그럴 여지를 아예 없애 버린다는 건가요?”

“ 그렇게 해야지.”

“ 어떻게 없앤다는 거죠?”

“ 혈안이 돼서 날 찾게 만들면 되는 거야.”

“ 그렇게 할 방법이 있어요?”

“ 시체를 이용해야지.”

연우강은 쓰러져 있는 네 구의 시체를 턱으로 가리켰다.

제 2 장  그래, 나 계집놈이다. 그래서 어쩔 건데?

두두둑! 우두둑!

강하게 틀어쥔 주먹에서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세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팔과 다리 열 개는 한편에 가지런히 쌓여 있고, 그 앞에는 팔과 다리, 머리가 제거된 몸통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 몸통 앞에는 다섯 개의 머리가 나란히 놓였다.

옷이 전부 벗겨진 채 전시품처럼 놓여 있는 시체들은 마치 정육점 고깃덩이를 연상케 했다.

“ 우욱!”

“ 우엑!”

시체를 바라보던 몇몇 무인들은 부리나케 한편으로 뛰어가더니 고개를 숙이고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평생을 금산에서 살아와썬 그들은 일 세대를 제외하고는 살인의 경험조차 없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팔과 다리 머리가 잘려나간 채로 세워져 있는 동료들의 시체는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 우엑!”

“ 우욱!”

또다시 몇 명이 숲으로 내달렸다.

“ 으음!”

이세연의 입에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지금 숲에서 토악지릉ㄹ 해대는 자들은 최소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을 보유한 자들이다. 그 정도 내공이면 강호 무리멩서는 일류 소리를 듣는다. 그런 그들이 동료의 시체를 보더니 토악질을 해대고 있다.

전혀 생각지 못한 광경이었다.

“ 싸움을 아는 놈이네.”

마천제 단목숭울 또한 이세연과 다르지 않았다.

엎드린 채 토악질을 해대는 무인들을 바라보는 단목숭을의 얼굴은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강한 내공을 지녔다고 해도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시작하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감도 잃게 된다.

연우강이 노린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문득 생각보다 무서운 자와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 녀석이 구림세가에 들른 적이 있다고 했는가?”

이세연은 옆에 서 있는 대천무존 구양을을 보며 물었다.

구양을을 비롯한 수신위 세 사람은 이연의 명령을 받고 묘봉산으로 들어와 조금 전에 합류한 상태였다.

“ 그렇습니다. 어르신.”

구양을은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떻던가?”

“ 아주 건방진 놈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 가문엔 왜 들른 건가?”

“ 빚을 받으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 빚?”

“ 놈은 훈련 기간 동안 잠룡들에게 생필품을 팔아먹었습니다.”

“ 생필품을 팔았다고?”

“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돈이 상당했습니다.”

“ 얼마나 됐는데 집에까지 찾아왔단 말인가?”

“ 칠십만 냥이었습니다.”

“ 치, 칠십만 냥이라고?”

“ 외부에서 물건을 사들여가서는 수십 배의 폭리를 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 또 있단 말인가?”

“ 공주님께서 그놈에게 잠룡패 스무 개를, 개당 이십만 냥씩 주고 샀습니다.”

“ 자, 잠룡패를 샀다고? 그것도 스무개 씩이나?”

더욱 놀라운 말이었다.

이세연 또한 대야벌의 벌주를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적이 있었기에 잠룡쟁패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성공의 문으로 들어가는 징표라고 불렸고, 유수의 가문에만 하나씩 전해졌다. 그리고 그 잠룡쟁패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잠룡쟁투라고 하였다.

하지만 잠룡쟁패의 주인이 된 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뛰어난 무공실력과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 그 두 가지를 모두 지닌 자들만 잠룡쟁패의 주인이 될 수 있었따.

무림에 발을 들여놓은 가문과 젊은이들의 꿈이 바로 잠룡쟁패였다. 그런데 그 잠룡쟁패를 팔아먹다니.

그것도 수십 개 씩이나.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그때만 해도 놈은 무공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 하면 잠룡쟁패를 어떻게 얻었단 말인가?”

“ 내기를 통해 얻었답니다.”

“ 내기라고?”

“ 그러니까.....”

구양을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해주었다. 그가 알고 있는 대부분은 유령신마존 독고철웅으로부터 들은 것들이었다.

“ 허허!”

이세연은 멍한 얼굴로 구양을을 보았다.

비록 대부분의 삶을 금산에서 보냈지만 그런 자가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떤 녀석인지 얼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싸움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우린 엄청난 자를 적으로 삼은 것 같네.”

단목숭을 또한 이세연과 같은 심정인 듯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 멋진 상대를 만났다는 건 행운이라고 할 수 있지.”

귀마존 청천수가 히죽 웃었다.

“ 행운 좋아하네.”

요사 시나울이 툭 쏘아붙였다.

“ 흐흐흐! 청천수의 말이 맞네. 시 가주.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났다는 건 행운이네.”

허공이 일렁이는 듯하더니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환림의 가주 환야 치백이었다.

“ 지금부터는 따로 움직여야겠네. 총 가주.”

독림의 가주 독광야 척발승이 이세연을 보며 말했다.

“ 그렇게 하세.”

이세연은 고개를 돌려 조천신을 보았다.

“ 몇 조로 나눌 생각이십니까?”

조천신은 물었다.

“ 각 가문별로 나눌 참이네.”

“ 안내할 자를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 그렇게 해주게.”

“ 으악!”

“ 아악!”

“ 크아악!”

멀리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일행은 일제히 비명이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묘봉산 서쪽이었다.

“ 사악곡 근처인 것 같습니다.”

철포 장영이 조천신을 보며 말했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천신은 이세연을 보았다.

“ 사악곡 주변을 잘 아는 자가 있는가?”

“ 제가 약간 압니다.”

장영이 손을 들었다.

“ 말해보게.”

“ 뱀이 많을 뿐 아니라 계곡의 형태가 뱀을 닮았다고 해서 사악곡이라고 부릅니다. 계곡의 길이는 이십 리 남짓에 좌우측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높이는 이십 장 정도 됩니다. 계곡 북쪽에는 사두연이라고 부르는 작은 호수가 있고, 그곳에서 시작한 물이 계곡을 따라 흐르고 있습니다.”

“ 험한 곳인가?”

이세연은 다시 물었다.

“ 묘봉산 삼대 금지 중 한 곳입니다.”

“ 삼대 금지라......”

“ 놈이 그곳에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천신이 물었다.

지금껏 연우강은 한자리에 머문 적이 거의 없이 쉬지 않고 움직여 다녔기 때문이었다.

“ 사악곡이 묘봉산 삼대 금지 중의 한 곳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 저도 그 말은 들었습니다.”

“ 뛰어난 장수는 싸울 장소마저 선택할 수 있는 자를 말한다네.”

“ 놈이 사악곡을 샅샅이 파악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 사악곡뿐만이 아니라 묘봉산 전역을 파악하고 있을 거네. 어쩌면 지도를 그려놓았을 지도 모르고.”

“ 그렇다면 사악곡에 함정을 파두었을지도 모르겠군요.”

“ 함정을 파지 않았다면 우리를 부르지도 않았겠지.”

“ 그럼?”

“ 설사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가야 하네.”

“ 하긴 금산 무인들이면 놈이 파놓은 함정 정도는 우습게 ...”

조천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건 아니네. 사주. 연우강이 어떤 함정을 파두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곳에서 빠져나올 확률은 반반일 거네.”

“ 놈을 너무 크게 보시는 거 아닙니까?”

“ 금의위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자를 크게 보지 않으면 누구를 크게 보겠는가?”

“ 끄응!”

조천신은 할 말이 없었다.

금의위가 창설된 이래 누군가로부터 도전을 받아본 적은 연우강이 처음이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금의위가 오히려 밀리고 있다. 연우강은 금의위가 직면한 최강의 적인 것이다.

“ 그리고 놈은 우리에게 정식으로 초대장을 보냈네. 가지 않을 수가 없네.”

“ 초대장이라면?”

“ 저들 말이네.”

이세연은 작은 무덤 다섯 개를 가리켰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나머지 일행이 야인석 일행의 무덤을 만든 것이었다.

“ 저들을 죽인 이유가 어르신들을 부르기 위해서였단 말입니까?”

“ 그렇네.”

이세연은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나머지 일행도 자리를 떴다. 금산 무인들은 이동하면서 본인이 속한 가문의 뒤편으로 자리를 잡았다.

“ 싸우는 방식은 전과 동일하네.”

이세연은 나직하게 말했다.

“ 그럼 우리 해림은 남쪽 입구를 맡아야겠군.”

해천왕 서군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난 북쪽인가?”

마제 단목숭울의 눈이 아득해졌다.

백수십 년 전 원나라 무장들과 싸울 때 그랬다.

해천왕이 이끄는 해림은 남쪽을, 자신이 이끄는 마림은 북쪽을, 사림과 귀림은 동쪽을 맡았고, 독림과 혈림은 서쪽을 맡았다. 그리고 환림은 적진으로 파고들어 정보를 수집했으며 요림과 은림은 지원을 맡았다.

아홉 가문의 연합세력이었던 구림세가는 명나라가 건국을 할 때까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 놈이 이끌었던 흑랑기도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했던가?”

단목숭을은 조천신을 돌아보며 물었다.

“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 모순의 대결이군.”

뚫지 못하는 물체가 없다는 창과 막지 못하는 무기가 없다는 방패의 대결이란 고사가 떠올랐다.

상황 또한 비슷하다.

전성기 때 만여 명이 넘었던 구림세가 무인은 팔십여 명만 남았고, 흑랑기 또한 천이백 명 중 여섯 명만 살아남았다고 하였다. 한때 전설이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두 세력이 이곳 묘봉산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 흐흡!”

단목숭을은 숨을 들이켜 폐 속 깊숙이 밀어넣었다. 그러자 머릿속이 맑아졌다.

“ 긴장되는가?”

이세연은 단목숭울을 돌아보며 물었다.

“ 호승지심이 동하는 모양이네.”

단목숭울은 내심을 숨기지 않았다.

갑자기 심장이 거칠게 뛰며 몸에서 열이 올랐다. 그건 필생의 상대를 만났을 때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 백 년 만인가?”

“ 정확하게는 백십이 년 일곱 달 닷새 만이지.”

“ 그렇군.”

이세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며칠 전에 비가 쏟아졌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직 부족한 듯 하늘은 또다시 잔뜩 흐려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조천신을 보았다.

“ 금의위 또한 사악곡 주변으로 모일고 연락을 했습니다.”

“ 그럴 필요 없네. 사악곡에서부터는 우리끼리 해결하도록 하겠네.”

이세연은 고개를 저었다.

“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천신은 고개를 숙였다.

“ 크아악!”

“ 으아악!”

“ 아악!”

“ 크아악!”

바로 그때 아주 먼 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 우-! 하!”

“ 우-! 하!”

쿵쿵! 쿵쿵! 쿵쿵! 쿵쿵!

곧이어 특이한 구호와 함께 바닥을 다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 살!”

“ 사알!”

“ 퇴!”

“ 추!”

“ 와아아!”

“ 와아아!”

“ 크악!”

“ 아악!”

“ 으아악!”

특이한 외침에 이어 처절한 비명이 줄을 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비명이 아니었다. 수십 명이 동시에 죽어가며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 여긴 진짜 전쟁터군.”

이세연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 아무도 믿지 않을 거네.”

“ 뭘 말인가?”

이세연은 단목숭을을 보았다.

“ 금의위, 동창, 오군도독부, 구림세가 전 전력이 한 자리에 모여 싸우게 만든 자가 단 한 명이라는 사실을 말이네.”

“ 그렇겠지.”

이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우-! 하!”

“ 우-! 하!”

쿵쿵! 쿵쿵! 쿵쿵! 쿵쿵!

“ 크악!”

“ 아악!”

메아리처럼 특이한 기합과 함께 비명이 들려왔다.

“ 군부에 저런 식으로 기합을 넣는 자들이 있는가?”

이세연은 조천신을 보며 물었다.

“ 왜 그러십니까?”

조천신은 되물었다.

“ 기합에 어린 힘이 느껴지지 않는가?”

“ 힘이라면?”

조천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단지 특이한 기합이라고 생각했을 뿐 별다른 느낌은 받지 못했던 것이다.

“ 그만 가세.”

이세연은 걸음을 옮겼다.

기합에는 반드시 적을 없애고 말겠다는 굳건한 의지와, 진득한 살기 그리고 하늘을 뚫을 듯한 자신감이 어려 있다. 과거에 많은 부대를 보았지만 기합만으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자들은 없었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대단한 자들이 들어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세연이 대단하다고 여긴 자들은 빙마후 수여설을 단장으로 하는 광랑수호단, 즉 과거 잠룡 십 조 대원들이었다.

그들은 중앙의 수여설을 중심으로 방사형 형태로 늘어서 있었는데, 대원들 주변에는 거무튀튀한 기운이 안개처럼 흐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진식에 의해 나타나는 기운이었다.

수여설은 주변을 둘러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지금 대원들은 일백마혼참살진이라는 합격진을 펼치고 있다. 일행에게 진식을 가르쳐준 사람은 일백마의 수장이었던 무불 백강이었다. 더불어 지금 대원들이 펼치는 진식은 천오백 년 전 일백마가 펼쳤던 진식의 변형이기도 했다. 그동안 꾸준히 익혀 왔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실전을 했는데,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 전진하라!”

수여설은 대원들을 향해 나직이 소리쳤다.

“ 우-하!”

“ 우- 하!”

쿵쿵! 쿵쿵! 쿵쿵!

광랑수호단 대원들은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광랑수호단 대원들이 있는 곳은 묘봉산 북쪽의 작은 계곡 안이었다.

그들의 십여 장 앞에는 이백여 명의 무인들이 서 있었따. 청색 무복을 걸친 그들은 전군도독부 소속 무장들이었다.

전군도독부 소속 무장들 선두에 있는 자는 도독동지 일성장군 광흠이었다.

광랑수호단을 바라보는 광흠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광음을 비롯한 전군도독부 무장들이 광랑수호단을 만난 건 한 식경 전.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광랑수호단을 금의위 위사들로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계곡 안쪽으로 들어온 자들의 복장이 금의위 위사들과 같았던 것이다. 전군도독부 무장들에 비하면 인원수가 형편없어 가벼운 마음으로 나섰다. 그런데 그로부터 이백오십여 명이 죽는 동안 단 한 명의 적도 없애지 못했던 것이다.

일방적으로 도살을 당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뒤쪽이 막힌 계곡이라 피할 곳도 없었다.

“ 누구냐?”

광흠은 겁먹은 얼굴로 말을 뱉었다.

금의위 위사들이라면 저렇게 강할 리가 없을 터였다. 저들은 금의위 위사들의 옷을 입은 자들일 뿐이었다.

“ 이걸 보면 알잖아.”

염왕수 장사덕이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 당신들은 금의위 위사들이 아니오.”

“ 이곳 묘봉산에는 동창 무인과, 금의위 위사 그리고 오군도독부 무장들만 들어와 있다는 건 너도 알잖아. 우린 금의위 위사들이야.”

장사덕은 차가운 미소를 베어 물었다.

“ 준비하라!”

바로 그때 수여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척! 척척척! 척척! 척!

그러자 광랑수호단 대원들은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방패가 채워진 왼팔을 약간 구부린 채 내밀었다. 그러고는 기마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몸을 약간 낮추고 무기를 든 오른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 우-하!”

쿵쿵! 쿵쿵!

“ 우- 하!”

쿵쿵! 쿵쿵!

광랑수호단 대원들은 기합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땅을 다졌다. 그들이 내지르는 기합은 갈수록 커지고, 구축한 일백마혼참살진은 검은 살기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 너희들이 금의위 위사가 아니라면 우린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

광흠은 광랑수호단 대원들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 오 보 전진!”

뾰족한 외침이 대답을 대신했다.

“ 우- 하!”

쿵쿵! 쿵쿵! 쿵쿵! 쿵쿵!

광랑수호단 대원들은 기합을 내지르며 전군도독부 무장들을 향해 나아갔다.

그들은 빠르게 나아가지도 않았다. 보통 걸음보다 다소 빠르게 나아갈 뿐이었다. 그런데 일백마혼참살진에서 흘러나온 기운은 전력으로 내달릴 때보다 더욱 강했다.

“ 빌어먹을!”

광흠은 무기를 불끈 틀어쥐었다.

말이 통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아니 금의위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싸울 목적으로 왔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 준비하라!”

광흠은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전군도독부 무장들은 일제히 무기를 들었다.

“ 십 보 전진!”

“ 우우-!”

쿵쿵! 쿵쿵! 쿵쿵! 쿵쿵!

수여설의 입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오고, 광랑수호단 대원들은 진득한 살기를 흘리며 전군도독부 무장들을 압박해 들어갔다.

“ 무장들은 공격하라!”

광흠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공격 명령을 내리고는 광랑수호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우와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함성밖에 없었다. 무장들은 목이 터져라 함성을 내지르며 내달렸다.

“ 사알!”

차가운 목소리가 계곡을 강타했다.

콰앙!

광랑수호단 대원들의 왼발이 발등까지 땅속으로 박혀들어갔다.

“ 하아!”

그리고 우렁찬 기합이 터져 나오고, 왼손 방패가 쭉 내밀어졌다.

차앙! 차앙! 창창창! 창창!

“ 사알!”

광랑수호단 대원들은 참았던 숨을 토해 내듯 고함을 내지르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검이, 도가, 비수가, 강기가 전군도독부 무장들의 몸으로 박혀들어갔다.

푸욱! 퍽! 쩌억! 스악!

“ 크악!”

“ 아악!”

“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계곡을 가득 채웠다.

“ 흑랑, 사안!”

“ 사아아안! 우-!”

수여설의 외침을 복창하며 광랑수호단 대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 하아!”

순식간에 적 무장들과 마주한 광랑수호단 대원들은 방패와 무기를 이용해서 전군도독부 무장들을 도륙했다.

“ 아악!”

“ 으아악!”

“ 크아악!”

사방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퇴!”

한 번의 공격이 끝나자 수여설은 지체 없이 후퇴를 명했다. 일백마혼참살진의 위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각 이상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 퇴에!”

광랑수호단 대원들은 일제히 고함을 내지르며 자리로 돌아왔다.

“ 흑랑! 오 보 우진!”

대원들이 돌아오자 수여설은 명령을 내렸다.

“ 우-하! 우-하!”

쿵쿵! 쿵쿵! 쿵!

“ 사알!”

“ 우-하!”

창! 창창창! 창창창!

스악! 퍼억! 푸욱!

“ 아악!”

“ 으아악!”

“ 크아악!”

“ 흑랑, 산! 확살! 종!”

“ 우-!”

광랑수호단 대원들은 살기 가득한 기합을 내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산은 흩어지라는 명령이고, 확살은 한 명도 남기지 말라는 명령이며, 종은 도망치는 자들을 쫓아서 없애라는 몰살 명령이었다.

대도살이었다.

광랑수호단은 사방으로 흩어져 전군도독부 무장들을 도륙했고, 미약하게 숨을 쉬고 있는 자들은 물론이고 죽은 자들의 머리를 깨뜨려 확인사살을 하고 있었다.

“ 이건......”

광흠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강해도 너무 강한 자들이었다.

조금 전 공격 명령을 내렸지만 그건 정말로 공격하라는 명령이 아니었다. 적당히 기회를 봐서 이곳을 빠져나가라는 명령이었다. 그런데 단 한 명도 이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어떻게......”

“ 당신네들은 산으로 들어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차가운 목소리에 광흠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시선을 들어 삼 장 앞으로 다가온 여자를 보았다. 지금껏 적을 지휘했던 여자였다. 가까이서 보니 여자는 상당한 미인이고 젊었다. 게다가 하얀 피부에 푸른 눈을 가진 색목인이었다.

“ 나만 남고 다 죽었으니까 이젠 말해 줄 수 있겠군.”

그는 수여설을 보며 입을 열었다.

“ 우리 정체는 조금 전에 밝혔어요.”

“ 밝혔다고?”

“ 저들을 흑랑이라고 불렀잖아요.”

“ 흑랑이라면.... 혹시?”

광흠의 눈이 커졌다.

“ 맞아요. 우린 연 공자를 도우러 왔어요.”

수여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 평민이 오군도독부 무장이나 금의위 위사를 공격하게 되면 반역죄로 다스린다는 걸 아느냐?”

“ 당신네들은 이미 우리 흑랑들의 가족을 잡아 가두기 시작했어요. 우릴 막다른 곳으로 밀어붙인 사람은 당신들이죠. 흑랑들의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는 당신네들을 전부 없애는 수밖에 없어요.”

수여설은 오른손을 쭉 내밀었다.

쩌엉!

단지 손을 내밀었을 뿐인데, 광흠의 가슴에서 얼음이 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광흠은 시선을 내렸다.

한순간에 몸이 얼어 버린 듯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쩌어엉!

새하얀 기운은 상체와 하체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는 시선을 들어 수여설을 보았다.

“ 묘봉산으로 들어온 자는 전부 죽게 될 거에요. 한 명도 남김없이 전부.”

“ 그렇......”

어느새 입이 얼어 버린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광흠은 말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쩌어억! 와르르!

그러자 그의 몸 곳곳에 금이 가더니 쌓아놓은 돌탑이 한순간에 무너지듯 부서져 내렸다.

수여설이 얼음 조각으로 변한 광흠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이 장사덕이 달려왔다.

“ 끝났습니다. 단장!”

“ 전부 없앴나요?”

“ 그렇습니다. 사아간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계곡 입구 쪽에서 장사덕의 말을 부정하는 모곳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일행 앞에 전군도독부 무장의 머리를 그러쥔 소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다름아닌 남궁운화였다.

“ 남궁 가주가 웬일이에요?”

수여설은 놀란 얼굴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금의위와 오군도독부 무인을 공격한다는 건 목숨을 건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공론화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연우강이 처한 상황을 알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과거 잠룡십조에 속했던 대원들에게만 은미랗게 전했다.

그런 다음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는 사람이나 이름난 가문의 후손은 제외하고, 설사 발각이 된다고 해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자들로만 구성해서 이곳으로 왔다.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운화가 빠지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그녀가 이곳에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어서요.”

남궁운화는 들고 왔던 머리를 던지며 대답했다.

“ 그러다가 무넺가 생기면 어쩌려고요.”

“ 나올 때 이 검을 가지고 왔어요.”

남궁운화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 검은 평범한 청강검이다.

“ 가주 자리를 내놓고 왔다는 거예요?”

가주지검이라고 할 수 있는 창궁검 대신 청강검을 들고 있기에 묻는 말이었다.

“ 할아버지가 있잖아요.”

“ 그럼?”

“ 지금 전 남궁세가의 가주가 아니라 잠룡대의 창랑일 뿐이에요.”

“ 풋!”

수여설은 짧게 웃었다.

자신이 남궁운화 입장이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우강이 관련된 일이다. 발을 뻗고 잔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설사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이곳에 있어야 마음이 편할 터였다.

휙!

바로 그때 계곡 밖에서 검은 동체가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검은 그림자는 빠르게 수여설 앞으로 날아내렸다.

야행복을 걸치고 있는 그녀는 사향의 일 조 조장인 무향이었다.

“ 어서 와요.”

수여설은 무향을 보며 방긋 웃었다.

“ 여긴......끝났네요.”

주변을 둘러보았던 무향은 할 말을 잃었다.

이곳에 후군도독부 무장 사백여 명이 있다는 정보를 준 사람이 그녀였다. 그런데 다른 곳을 돌아보고 온 사이에 사백 명에 달했던 전군도독부 무장 전원이 몰살을 당한 것이다. 가공할 무력을 보유한 자들이 아닐 수 없었다.

“ 덕분에 쉽게 끝낼 수 있었어요. 이 주변엔 더 없어요?”

“ 십 리 떨어진 곳에 금밀사 대원 오백여 명이 은신해 있어요.”

“ 금의위 위사들인가요?”

“ 네.”

무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 잡랑!”

수여설은 장사덕을 불렀다.

“ 알겠습니다. 단주.”

장사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원들을 보았다. 그러자 대원들이 일제히 상의와 하의를 뒤집었다. 옷 안쪽은 청색이었다.

“ 철저하네요.”

무향은 혀를 내둘렀다.

조금 전엔 금의위 위사들의 무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뒤집자 오군도독부 무장들의 무복이 된 것이다.

“ 자칫 잘못하면 삼족이 몰살을 당하는데 신중해야지요. 안내해 줄래요?”

수여설은 옷을 뒤집어 입으며 말했다.

“ 알았어요.”

무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잡았다.

계곡을 나서자마자 광랑수호단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물론 서로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간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전음이 미치는 범위 안쪽에 자리하였고, 소리 없이 이동했다. 물론 이동 도중에 적을 만나면 숨통을 끊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행이 금밀사 대원 오백여 명이 은신해 있는 곳에 도착한 것은 반 시진 후였다. 조금 전 없앴던 전군도독부 무인들과 마찬가지로 금밀사 대원들은 계곡 안쪽에 숨어 있었다.

“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남궁운화는 수여설을 돌아보며 물었다.

천라지망을 펼치는 상태라면 계곡 안쪽이 아니라 밖으로 나와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 오군도독부와 동창 무인들이 들어오면서 상황이 바뀌었어요.”

남구운화의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무향이었다.

“ 동창 무인도 들어와 있나요?”

“ 지금은 유설연 소제독과 팔신장만 들어와 있는데 조만간 동창 무인들이 들어올 거라고 하네요.”

“ 유설연 소제독과 오군도독부 무장들 중 누가 먼저 출발 했죠?”

듣고 있던 수여설이 물었다.

“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 유설연 소제독이 먼저예요.”

“ 그러니까 소제독이 들어오고 난 다음에 오군도독부가 출병했다는 거군요.”

“ 네.”

무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 동창 무인은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 그게 무슨 말이죠?”

무향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남궁운화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 또한 의아한 얼굴로 수여설을 보았다.

“ 그가 묘봉산으로 들어온 건 오군도독부를 끌어들이기 위해서였어요.”

수여설은 빙그레 웃었다.

사실 그녀는 그동안 연우강 혼자서 한 일치고는 너무 엄청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연우강이 대단하다고 해도 금의위와 오군도독부 전부를 묘봉산으로 끌어들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런데 묘봉산에는 오군도독부 최정예가 들어와 있었따. 그들을 끌어들인 사람은 다름아닌 동창의 소제독 유설연이었던 것이다.

“ 제 말이 맞죠?”

수여설은 뒤편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 연 오라버니는 무공도 뛰어나지만, 여자 후리는 재주는 무공보다 더 뛰어나요. 아무튼 타고난 것 같아요.”

쫑알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봇짐을 둘러멘 우성연 일행이 곁으로 몸을 날려왔다.

“ 어? 안녕하세요?”

남궁우노하가 우성연을 보며 알은체를 했다.

“ 어머, 남궁 동생도 왔네?”

우성연은 활짝 웃으며 자루를 내려놓았다.

“ 그동안 잘 지냈어요?”

“ 나야 늘 안녕하지 뭐.”

“ 그런데 이건 뭐죠?”

남궁운화는 우성연이 내려놓은 자루를 가리키며 물었다.

“ 내시 옷.”

“ 내시 옷이라면........”

“ 남궁 동생을 비롯한 광랑수호단 대원들이 금의위 위사나 오군도독부 무인들을 없애도 책임을 묻지 않는 살인패 같은 거야.”

“ 동창 무복이란 말이에요?”

“ 호호호! 맞아. 동생. 동생도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가네. 그런데 이분은......?”

우성연은 수여설을 보았다.

“ 북해빙궁의 궁주인 빙마후 수여설 소저예요.”

남궁운화는 수여설을 소개시켜 주었다.

“ 처음 뵙습니다. 수여설입니다.”

“ 난 우성연이에요. 그런데 몇 살이죠?”

수여설과 우성연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 삼십대 초반입니다.”

“ 그럼 나보다 언니네요. 앞으로 수 언니라 부를게요.”

우성연은 생긋 미소를 지었다.

“ ......!”

수여설은 멍한 얼굴로 우성연을 보았다.

그동안 많은 미인을 보았지만 단연코 앞에 있는 우성연보다 나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다. 아니 정확하게는 물건이 없는 남자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했다.

“ 처음엔 좀 어색하겠지만 금세 익숙해질 거예요.”

“ 그, 그렇겠죠.”

“ 뭐하고 있어요?”

일행이 멍한 얼굴로 바라보자 우성연은 자루를 가리켰다.

“ 알았어요, 잡랑.”

수여설은 장사덕을 불렀다.

장사덕은 곧바로 자루 주둥이를 묶은 줄을 풀고 옷을 꺼냈다.

“ 옷은 대, 중, 소 세 가지로만 구분했어요. 알아서 입도록 하세요.”

“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장사덕은 소 자와 중 자를 골라 내어 수여설과 남궁운화에게 내밀었다.

옷을 받아 든 두 사람은 걸치고 있던 옷을 벗고 동창 무복을 걸쳤다.

“ 수 언니는 원래 그렇게 컸어요?”

수여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우성연이 물었다.

“ 뭐가요?”

수여설은 영문 모를 얼굴을 했다.

“ 그거요.”

우성연은 턱으로 수여설의 가슴을 가리켰다.

“ 그건.......”

수여설은 곤혹스런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설마 그런 질문을 해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 끄응!”

남궁운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그녀는 이미 경험이 있었다.

그녀가 우성연의 질문 공세를 받은 건 동전ㅇ호 지하에서 빠져나왔을 때였다. 옷이 물에 푹 젖으면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게 됐는데, 우성연이 가슴을 보더니,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어떤 옷을 입는지, 가슴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등등 같은 여자라도 하기 힘든 그런 질문 공세를 해왔던 것이다.

진땀을 흘리면서 대답해 주었는데, 이번에는 수여설에게 질문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남궁운화는 장사덕을 바라보았다.

장사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옷 자루를 들고 자리를 떴다.

[ 언니, 저분 가슴을 보세요.]

장사덕 일행이 자리를 옮기자, 남궁운화는 수여설에게 전음을 보냈다.

수여설은 우성연의 가슴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 응?’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랍게도 우성연의 가슴이 불쑥 튀어나와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운동을 통해 키운 남자들의 가슴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옷 위로 드러난 형태라 정확한 모양을 짐작하는 건 쉽지가 않지만 여자의 가슴이 분명했다.

“ 물건을 잘라 버린 자들 중 일부 운 좋은 사람은 이렇게 되기도 해요.”

우성연은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 마음에 들어요?”

수여설은 우성연의 가슴을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 없는 것보다는 여러 측면에서 유리해요.”

“ 그렇군요. 전 음식이나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색목인의 피가 섞여서 그래요.”

“ 그랬군요. 아무튼 몸매를 관리하는 특별한 방법 있으면 말해 주세요.”

“ 아직은 관리를 해야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수여설은 우성연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특별히 군살도 보이지 않고 좀 마른 듯하지만 보기에는 딱 좋았다.

“ 언제까지 이 몸매를 유지하진 못할 거 아니에요. 더 늦기 전에 시작해야죠. 그런데 수 언니는 몸매 관리 안 해요?”

“ 서른이 넘었잖아요.”

“ 한다는 말?”

“ 당연히 하죠.”

“ 호호호! 역시 언닌 나와 통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아세요? 나올 덴 확실하게 나오고 들어갈 데 사정없이 들어간 것들이 ‘전 몸매에 투자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선천적으로 타고난 거예요.’라고 떠벌리는 거예요.”

우성연은 남궁운화를 흘겨보았다.

“ 저, 정말이에요. 전 운동 같은 건 한 적이 없단 말이에요.”

남궁운화는 당황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 흥! 설사 그렇다고 해도 엸김히 운동했다고 하면 안 돼? 나 같은 사람 생각해서 그렇게 말해주면 좋잖아.”

“ 진지하게 물으니까 진지하게 대답한 건데.....”

남궁운화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 흥! 큰 년은 좋겠다, 이것아.”

우성연은 남궁운화를 보며 혀를 쑥 내밀었다.

“ 자자! 그만하고 공격 준비나 하죠.”

“ 알았어요.”

이네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간 우성연은 등으로 손을 돌렸다. 그가 등에서 빼낸 것은 쇠막대기 세 개였다. 그 쇠막대기를 연결하자 창으로 변했다.

“ 여의신창이네요?”

창을 알아본 남궁운화가 말했다.

“ 아직 기억하고 있네?”

우성연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범천조화신공은 다 익힌 거예요?”

“ 흉내 낼 정도는 돼.”

우성연은 여의신창을 가볍게 돌렸다.

부웅!

그러자 창간에서 거친 바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성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 흑랑은 진식을 구축하세요.”

수여설은 주변에 대기하고 있는 광랑수호단 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광랑수호단 대원들은 일제히 몸을 날려 수여설 주변으로 늘어섰다.

“ 우 소저와 남궁 가주는 진식 밖으로 나가는 게 나을 것 같네요.”

“ 지금 우 소저라고 했어요?”

“ 듣기 거북해요?”

“ 아뇨. 아주 좋아요, 언니.”

우성연은 활짝 웃으며 남궁운화를 데리고 진식 밖으로 나갔다.

“ 언니 난......”

남궁운화는 수여설을 보았다.

일백마흔참살진은 그녀도 펼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내가 심심할까 봐 함께 나가 있으라고 한 거잖아, 인마.”

우성연은 남궁운화의 어깨를 툭 쳤다.

“ 오백 명이나 숨어 있다는데 심심할 틈이 어딨어요?”

남궁운화는 우성연을 흘겨보았다.

“ 어쭈! 지금 째리는 거야?”

“ 언니 막내죠?”

“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 막내처럼 굴잖아요.”

“ 그러니까 내가 철이 없다는 말?”

“ 알아 다행이네요.”

“ 야! 인마. 내게 철없다고 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 다른 사람이야 아부하느라 바빴겠지 말이나 제대로 했겠어요?”

“ 너어......?”

“ 헹!”

남궁우화는 혀를 쑥 내밀었다.

“ 우-하! 우-하!”

쿵쿵! 쿵쿵! 쿵쿵! 쿵쿵!

어느새 계곡 입구에 당도한 대원들은 우렁찬 기합을 내지르며 안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 제 말이 틀려요?”

“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니무란다는 말 알아?”

“ 제가 어때서요?”

“ 넌 가슴만 무식하게 크잖아. 그리고 막내고.”

우성연은 손가락으로 남궁운화의 가슴을 푹 찔렀다.

“ 지, 지금 무식하다고 했어요?”

남궁운화는 우성연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 그랬다. 어쩔래!”

“ 우-하! 우-하!”

쿠웅! 쿠웅! 쿠웅!

“ 적이다!”

“ 동창 계집놈들이다!”

안쪽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 저런 개 호로자식이!”

안쪽에서 계집 놈이란 말이 들려오기가 무섭게 우성연은 지면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 세상에!”

남궁운화는 멍한 얼굴로 우성연을 보았다.

단지 바닥을 찬 걸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는 어느새 십장 건너편으로 날아가 있었다.

가공할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 함께 가요, 언니.”

이내 남궁운화도 바닥을 찼다.

휙!

그녀의 빠르기 또한 우성연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다. 푸른 기운이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고 느껴지는 순간, 어느새 우성연 곁에 내려서 있었다.

절정에 이른 창궁무영신이었다.

“ 너도 한가락 하네?”

우성연은 남궁운화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 이게 크다고 다 무식한 건 아니라고요.”

남궁운화는 눈으로 제 가슴을 가리켰다.

“ 난 네가 무식하다고 한 적 없는데?”

“ 조금 전에 그랬잖아요.”

“ 무식하게 크다고 했을 뿐이야.”

“ 그게 그 말이잖아요.”

“ 어떻게 그게 그 말이야. 무식하게 크다는 건 순수하게 가슴데 대해서만 말한 거라고, 머리하곤 상관없단 말이야.”

“ 계집놈들이 들어왔다. 공격하라!”

휙!

“ 저 썅노무새끼가 계집놈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욕보다 행동이 더 빨랐다.

우성연의 신형은 어느새 조금 전 계집놈이라고 하였던 자의 목에 여의신창을 찔러 넣고 있었다.

“ 크아악!”

두 번째 전투를 알리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 그래, 나 계집놈이다. 이 개자식들아. 그래서 어쩔 건데? 어쩔 거냐고, 썅노무새키들아.”

우르릉!

여의신창이 진득한 살기를 사방으로 부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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