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목숨을 달라고 해도 기꺼이.
“ 이렇게 한가하게 있어도 돼요?”
봉연은 연우강의 등을 밀며 물었다.
그녀와 연우강이 사악곡으로 들어온 건 반시진 전이다. 그런데 연우강은 계곡으로 들어오자마자 북쪽 끝으로 와서는 옷을 벗고 사두연에 몸을 담그는 것이었다.
연우강을 따라 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언제 적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공연히 뒤통수가 따끔따끔했다.
“ 난 생각할 게 있어서 들어왔지만 넌 왜 옷을 벗은 거야?”
“ 그거야 연 공자가 벗었으니까요.”
“ 내가 벗으면 너도 따라 벗는 거야?”
“ 누군 옷을 벗고 누군 입고 있으면 벗고 있는 사람이 어색하잖아요.”
“ 그러니까 내가 어색할까 봐 너도 벗었다고?”
“ 함께 벗고 있으면 덜 어색하지 않나요?”
“ 그런 거야?”
“ 전 그렇게 생각해요.”
“ 그럼 그 녀석들도 어색했을까?”
“ 누굴 말하는 거죠?”
“ 특이하게 기합을 내질렀던 그들.”
“ 아는 사람들이에요?”
“ 그 기합은 흑랑기 대원들이 적진을 향해 진격할 때 내지르는 기합이야. 왼팔 팔목에는 양쪽 끝에 창날처럼 생긴 무기가 달린 방패를 끼우고 손에는 손괭이를 들어, 그 상태에서 왼다리를 앞으로 내밀고 왼팔을 구부정하게 내밀지. 오른손에는 낫을 드는데 번쩍 들어올려. 그 상태에서 기마자세를 취하고 시선은 왼손 쪽을 보는 거야.”
“ 그러고는... ‘우-하’ 하면서 전진하는 건가요?”
“ 응!”
“ 그걸 누구에게 가르쳤는데요?”
“ 잠룡십조 대원들.”
“ 그들에게는 이곳에 온다고 말하지 않았던 거예요?”
“ 싸워야 할 대상이 금의위잖아.”
“ 자칫 잘못하면 그들을 역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데려오지 않았다는 거군요.”
“ 네 생각은 어때?”
“ 제가 잠룡이라면 어떤 기분일지 그걸 묻는 거예요?”
“ 난 대장이야. 아무리 그들을 이해하려고 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거든.”
“ 함께 사선을 넘었던 사이 아닌가요?”
“ 대야벌을 사선이라고 한다면 그렇겠지.”
“ 만일 제가 잠룡십조라면 어색할 거예요?”
“ 그럼 내가 잘못한 거네?”
“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간단하잖아요. 부하 중 한 명이 여기에서 금의위와 싸우는 중이고 연공자가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았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 상관은 부모와 같은 존재야. 부모는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에게 손을 내밀지 않아.”
“ 그건 자식이 어렸을 때 이야기죠.”
“ 대가리가 여물어도 자식은 자식일 뿐이야. 부모가 바라보는 자식은 절대 어른이 될 수 없어.”
“ 아무튼 연 공자가 잘못한 게 맞아요. 최소한 그들에게 설명은 했어야 했어요.”
“ 설명이 쉬운건 아닌데, 앞으로 와.”
연우강은 등 뒤에 앉아 있는 봉연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 설마 지금......”
봉연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에 금의위 위사들을 없애는 것으로 금산 무인들에게 두 번째 초대장을 보냈다. 그런데 느닷없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잡아끈 것이다.
“ 원래 사내들은 다 짐승이야.”
연우강은 봉연의 허리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 거, 거길 만지면........”
봉연은 금세 헐떡였다. 연우강의 손길이 스치자마자 급격하게 몸이 달아오른 것이었다.
그녀는 연우강의 어깨에 양팔을 걸쳤다.
이미 봉연은 이곳이 전쟁터란 사실도 잊고 말았다. 그녀는 몸이 번쩍 들어 올려지자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그를 느끼는 순간 신음과 함께 한꺼번에 토해낼 참이었다.
그녀는 잔뜩 기대 어린 얼굴로 눈을 감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들어 올려졌던 몸이 사정없이 아래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화끈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오르더니 머릿속을 점령했다.
봉연은 참았던 숨과 신음을 토하며 연우강의 어깨를 강하게 틀어쥐며 끌어당겼다.
상체가 앞으로 쏠린 연우강은 봉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봉연은 뒤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물속에서 뒤로 넘어지면 그 다음 상황은 뻔했다.
철벅!
차가운 물속에 얼굴이 잠기며 봉연은 번쩍 눈을 떴다. 바로 그때 그녀는 연우강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물줄기를 보았다. 그것은 단순히 튀어오른 물줄기가 아니었다. 암가에 가까운 정도로 강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 헉!’
봉연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연우강이 공사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런 행동에 너무 흥분하여 주변 경계를 게을리한 듯했다. 주변은 이미 강력한 역장이 형상돼 있어 빠져나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 밀어!]
바로 그때 연우강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더불어 엉덩이로부터 연우강의 악력이 감지됐다. 그녀는 두 발을 뻗어 호수 벽을 강하게 밀었다.
두 사람은 빠르게 물속으로 들어갔다.
“ 눈치 챘다. 공격하라!”
뒤편 허공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악! 스윽!
곧이어 주변 대기가 요동쳤다.
퍽! 퍽퍽퍽! 퍼억! 퍽!
사방에서 쏟아진 암경에 의해 연우강과 봉연이 있던 자리가 초토화됐다.
“ 놓쳤습니다.”
공격을 하던 자들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츄악!
바로 그때였다.
물이 살아 있는 것처럼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것들은 곧 작은 덩어리로 분리되더니 비수 형태로 변했다.
슈아악!
그리고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 암기다! 피하라!”
나직한 외침과 함께 호수 주변을 장악했던 기운들이 요동쳤다.
츄악!
바로 그 순간, 호수 중앙에서 커다란 물체가 솟구쳐 올랐다. 물살과 함께 솟아 오른 그것은 연우강과 봉연이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밀착된 상태였다.
연우강의 시선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그와 봉연이 솟구쳐 오르면서 튀어올랐던 물방울들이 그의 마라천력에 잡혀 허공에 멈췄다.
연우강의 시건이 다시 사방을 훑었고, 물방울들은 가공한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 헉!”
“ 억!”
“ 윽!”
나직한 경호성이 사방에서 흘러나왔다.
“ 앞에 보낸 두 개는 장난이었어. 진짜는 이번 거야.”
연우강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히고, 나아가던 물방울들이 모습을 감췄다.
“ 저건 뭐죠?”
봉연은 허공으로 녹아들어 가는 것처럼 모습을 감추는 물방울을 바라보며 물었다.
“ 마라천력 제일류인 수천류야. 이름은 어뢰고.”
“ 크아악!”
“ 아아악!”
“ 으아악!”
사방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피가 번지는 것처럼 허공이 붉게 변하더니 시체들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시체들을 지켜보던 연우강은 몸의 힘을 풀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물속으로 뚝 떨어졌다.
풍덩!
봉연과 그가 떨어지면서 물줄기가 솟구쳐 오르고 그것들은 곧 어뢰로 변해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 크악!”
“ 으악!”
“ 으아악!”
비명이 연이어 들려오고 극고한 환술로 허공에 숨어 있던 자들이 피를 쏟아내며 뚝뚝 떨어져 내렸다.고 대부분이 반항한 흔적이 거의 없습니다.”
“ 몇 명이지?”
연우강은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 아홉 명이에요.”
연우강이 무공을 펼치면 그녀는 자동적으로 숫자를 셌다.
“ 한 명 남은 것 같아.”
연우강은 봉연을 살짝 밀어냈다.
봉연은 연우강의 품을 벗어나자마자 은신술을 펼쳐 허공으로 녹아들어갔다.
“ 그만 나오지.”
연우강은 수면 위로 내려서며 말했다.
“ 대단하구나.”
모습을 드러낸 자는 환림의 림주 환야 치백이었다.
그의 시선은 연우강의 하체로 향해 있었다.
사실 조금 전 연우강은 조금도 여유가 없었다.
환림 무인들의 목표는 연우강이 아니라 그의 등에 붙어 있던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연우강이 조금만 경계를 해도 여자는 갈가리 찢겨나갔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연우강은 육체적인 관계를 가질 것처럼 여자를 앞으로 끌어갔다.
이번에는 여자가 아니라 그의 등이 완전하게 노출된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공격을 시도했더라면 어쩌면 성공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가솔들의 피해를 최고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좀 더 완벽한 기회. 즉 연우강이 내기를 끌어올리는 순간을 기다렸다.
내기를 끌어올리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지만, 무인이 무방비 상태에 놓이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순간을 포착해 낼 수만 있다면 아무리 강자라고 해도 없앨 수 있고, 환림 무인들은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연우강으로서는 최고의 위기에 봉착한 셈이었다.
그런데 연우강은 육체적 교접을 통해 위기에서 탈출해 버린 것이었다. 만일 여자가 거짓으로 흥분한 것처럼 했다면 환림 무인들은 무리를 해서라도 공격을 시도했을 테고, 한두 명이 희생됐겠지만 연우강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선물로 주었을 것이다.
과거 전쟁 때도 그랬지만 환림의 임무는 적의 섬멸에 있지 않다. 적에게 적당한 혼란만 심어주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럼 나머지는 외부에 있는 각 림에서 해결하게 된다. 그런데 여자가 정말로 흥분하여 육체적인 교접을 갖는 바람에 기다리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그게 연우강이 노리는 점이었다.
놀랍게도 녀석은 그 급박한 순간에 정말로 교접을 하면서 위기를 돌파한 것이었다.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자연스럽게 물로 쓰러지고, 튀어오른 물방울로 공격을 하는, 그야말로 임기응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 욕심이 과했어, 영감. 하긴 내가 그 상황이라도 시도해 봤을 거야. 발가벗고 있으면서 등까지 보이고 있었으니까.”
“ 혹시....”
치백은 연우강이 서 있는 호수를 보았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조금 전 연우강이 앉아 있던 자세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사악곡은 입구가 남쪽에 있다. 그 사실을 연우강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목욕을 한다는 것도 우습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목욕을 해야 한다면 남쪽을 바라보면서 하는 게 맞다. 그런데 연우강은 남쪽으로 등을 돌리고 절벽을 바라보며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건 곧 안으로 들어오는 누군가를 유인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을 비롯한 환림 무인이었던 것이다.
“ 우릴 노렸던 거냐?”
“ 정찰은 정찰로 끝내야 해.”
연우강은 양손을 어깨너비로 벌렸다. 그러자 수면으로부터 물이 솟구쳐 올라 그의 양손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 인정한다 연우강. 머리싸움에서는 완벽하게 졌다.”
연우강이 말이 맞다. 정찰은 정찰로 끝냈더라면 가솔들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사악곡의 현 상태와 연우강의 동정만 살피고 빠져나갔어야 했다. 그런데 등을 보이고 있는 녀석을 보자 갑자기 욕심이 치밀었다.
하지만.
“ 가주인 나 치백이 죽지 않는 이상 환림이 패한 것은 아니다.
치백은 단언하듯 말했다.
‘ 맙소사!’
허공에 숨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봉연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가 놀란 것은 치백이란 말 때문이었다.
환야 치백.
바로 백십여 년 전에 금산에 갇혔던 환림의 가주 이름이었다.
[ 연 공자, 저자는 백육십 년 전에 금산에 갇혔던 환림의 가주에요.]
[ 진짜 가주?]
연우강은 혜광심어로 물었다.
[ 네!]
[ 그럼 몇 살이지?]
[ 아무리 적게 잡아도 백오십 살은 넘었어요.]
[ 봉연 너와 비슷한 부류네?]
[ 저자와 네가 어떤 면에서 비슷하다는 거죠?]
[ 요물이란 뜻이야.]
[ 그 말 칭찬이죠?]
[ 받아들이는 사람이 알아서 판단하면 되잖아.]
혜광심어를 보내고 난 연우강은 다시 치백을 보았다.
“ 아냐, 영감. 당신이 조천신 그놈의 꼭두각시가 되는 순간 환림은 이미 끝장났어.”
“ 꼭두각시가 아니라 정당한 거래일 뿐이다.”
“ 아무튼!”
“ 그나저나 그것 좀 어떻게 할 수 없느냐?”
치백은 연우강의 하체를 가리켰다.
그가 화제를 돌린 건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세등등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것을 시선이 가 거북하기도 했다.
“ 젊다는 건 마음대로 안되는 거잖아. 이놈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것 중의 하나고.”
연우강은 태연하게 아래를 가리켰다.
“ 그리고 봤는지 모르지만 조금 전 함께 있던 여자가 너무 아름다웠어. 금세 사그라지는 건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모욕이야.”
‘풋!’
허공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던 봉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팔림의 가주인 치백 앞에서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연우강 말고는 없을 듯했다. 그는 여자들이 반할 수밖에 없는 사내였다.
“ 다른 건 몰라도, 네 녀석의 젊은이 부럽기는 하구나.”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듯 치백은 양발을 어깨너비로 벌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내기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전신에서 태양의 광휘와 같은 붉은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환림의 가주 무공이자 천하 십대 호신강기 중의 하나인 적강마벽이었다.
전신이 붉게 변하자 이번엔 검붉은 기운들이 치백의 양손으로 모여들었다. 그것은 치백의 무기인 적강륜이었다.
“ 선택을 잘한 건지 모르겠네.”
연우강은 양손 중앙에 모여 있는 물로 시선을 주었다.
“ 강기로 만든 불은 물로 꺼트릴 수 없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구나.”
파앗!
치백의 신형이 연우강을 향해 내달렸다.
순식간에 십여 장을 날아간 그는 바닥을 박차고 날아오르며 양손을 저었다.
휘리릭! 휘익!
붉은 광채를 뿜어내는 혈륜 두 개가 무서운 속도로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 갔다.
“ 그럼 나도!”
연우가은 양 주먹을 지그시 말아 쥐었다. 그러자 그의 주먹을 중심으로 물로 만들어진 백색의 륜이 생겨났다. 그 상태에서 륜에 백옥수의 기운을 주입했다.
쩌엉!
륜 형태를 하고 있던 물은 순식간에 얼음으로 변했다. 연우강은 날아오는 붉은 륜을 보며 양손을 사정없이 뿌렸다.
“ 차앗!”
연우강의 손에서 새하얀 륜이 쏘아져 나가는 순간 치백은 두 번째 륜을 날렸다.
“ 자신감을 가질 만하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두 개의 륜을 날린 상태에서도 의념을 끊지 않고 새로운 륜을 날리는 건 보통 무인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고절한 수법이었다.
이번 한 수로 치백이 이기어검술을 펼치는 고수라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었다.
“ 승자는 나다, 연우강.”
치백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양손에 내기를 집중했다. 그러자 세 번째 륜이 생겨났다.
그는 지금 맨 처음 날린 륜과 두 번째 날린 륜 그리고 이번에 생성한 륜까지 여섯 개의 륜을 동시에 조정하고 있는 셈이었다. 륜을 다루는 그만의 기술이었다.
콰콰쾅! 쾅쾅!
광포한 폭음과 함께 물줄기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 음!”
치백은 한 걸음 물러나면서 세 번째 륜을 던졌다.
“ 아냐, 영감. 이번 싸움의 승자는 나야, 왜냐면........”
연우강은 양손을 활짝 벌렸다. ㄱ러자 아래쪽에서 물줄기가 솟구쳐 올랐고 그것은 곧 륜으로 번했다.
이번에 그가 만든 륜은 말 그대로 마차 바퀴만 했다.
백옥수의 기운으로 륜을 채운 그는 전방을 향해 내던졌다. 그리고 곧바로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륜을 만들어 치백을 향해 던졌다.
그가 만든 륜은 갈수록 커졌고, 마지막에 던진 륜의 지름은 거의 일 장에 달했다.
“ 내가 만들 륜이 훨씬 크고, 단단하고, 빠르니까.”
연우강은 열 개의 륜 중 여섯 개로는 치백이 던진 붉은 륜을 방어하고 나머지 네 개는 치백을 향해 날아가도록 조정했다.
치백은 깜짝 놀랐다.
설마 연우강이 그와 같은 수법을 사용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섯 개의 륜을 동시에 조정하는 것은 륜법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치백 또한 이기어검술을 펼치는 강자였다.
하지만 륜을 다뤘던 그는 하나의 무기를 날려 적을 살상하는 이기어검술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륜법을 계속 연구하다가 여섯 개의 륜을 동시에 조절하는 방법을 창안해 냈다.
그러나 조절하는 무기의 수가 늘어나면서 이기어검술의 최고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속도는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속도를 포기하는 대신 여섯 개의 강력한 무기를 얻었고, 이기어검술보다 훨씬 강하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연우강이 같은 수법을, 아니 녀석의 말처럼 훨씬 크고, 단단하고, 더 많은 수의 륜을 생성하여 날려보내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차앗!”
치백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새하얀 륜을 향해 양손을 휘둘렀다.
까앙! 깡! 깡깡깡!
그의 손이 움직이는 곳에서 새하얀 얼음 가루가 날렸다.
“ 억!”
치백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새하얀 륜을 쳐낼 때마다 온몸을 얼릴 듯한 냉기가 몸 안으로 스며들어 온 것이었다. 그는 몸 안으로 들어온 냉기를 몰아내기 위해 내기를 분산했다.
“ 여기도 신경을 좀 써줘, 영감.”
‘ 빌어먹을!’
치백은 내심 욕설을 내뱉었다.
몸 안으로 들어온 냉기를 몰아내려고 하자 적강륜이 약해지면서 광채가 희미해진 것이었다.
그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적강륜으로부터 강한 광채가 흘러나오며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 이 상태로는 내가 당하고 만다.’
여섯 개의 적강륜을 조정하고, 백색의 륜을 쳐내고, 몸 안으로 유입해 들어온 냉기를 몰아내는,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 기회를 잡아야.......’
치백은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문득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물렸다. 위기를 모면할 방법을 찾아낸 것이었다.
“ 차앗!”
그의 입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슈아악! 사아악!
그러자 연우강을 공격하던 적강륜 두 개가 방향을 틀더니 오른편 허공을 향해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갔다. 치백이 노린 대상은 다름아닌 봉연이었다.
“ 학!”
허공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봉연은 빠르게 내공을 끌어올려 양손을 휘둘렀다. 그녀의 십삼탈혼백의 칠식인 마흑이었다.
그녀의 양손에서 새카만 광채가 날아오는 적광륜을 향해 폭사돼 갔다. 하지만 부지불시간에 무공을 펼치느라 마흑에 모든 힘을 싣지 못했다.
콰쾅! 쾅쾅!
“ 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봉연은 뒤편으로 날아갔다. 힘없이 날아가는 그녀의 입에서 피가 벌컥벌컥 흘러나오고 있었다.
휙!
연우강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봉연을 좇아 날았다. 그가 움직이자 새하얀 광채를 뿜어내던 백색의 륜들이 힘없이 스러지며 물이 돼 떨어져 내렸다.
“ 기다렸다, 연우강!”
치백은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며 양손으로 강하게 후려쳤다. 그러자 여섯 개의 적강륜이 가공할 속도로 허공을 단축하고는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때 연우강은 호수 가장자리에 가 있었다.
츄악!
그가 호수 가장자리를 지나치는 순간 아래쪽에서 물줄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위로 솟구친 물줄기가 방패처럼 연우강의 등쪽에 자리했다.
퍼억! 퍼억!
바로 그때 치백의 적강륜이 물의 장벽을 강타했다.
“ 억!”
치백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빠르게 나아가던 적강륜이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물의 벽에 막혀 버린 것이엇다.
그는 전 내공을 의념에 실었다. 하지만 적강륜은 물의 벽을 뚫지 못했다.
그 순간 연우강은 봉연 곁으로 갔다.
심각한 내상을 당한 듯 봉연은 피를 꾸역꾸역 토해내고 있었다.
연우강은 봉연을 안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명문혈에 양손을 밀착하고는 내기를 주입했다. 단전에서 뛰쳐나온 흑룡이 봉연의 몸 내부로 들어갔다.
“ 당신 곁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
봉연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 왜?”
연우강은 몸을 돌렸다. 여섯 개의 적강륜이 쉬지 않고 물의 벽을 두들기고 있었다.
“ 전 남자와 여자를 다 좋아하는 양성이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을 해야 한다면 당연히 여자거든요.”
“ 그런데?”
연우강은 전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호수 안으로 들어가자 아래쪽으로부터 물이 솟구쳐 올라와 물의 방패에 합쳐졌다. 물의 방태는 더욱 두터워지고 견고해졌다.
전면을 감싼 물의 벽은 측면으로 퍼져 나갔고, 이윽고 머리 위까지 완벽하게 감쌌다.
“ 당신과 함께 있으면 자꾸만 여자가 되고 싶어져요.”
“ 여자가 되는 게 싫어?”
“ 여자가 되는 게 싫은 게 아니라 나약해지는 게 싫어요. 지금만 해도 그래요. 만일 당신이 없었다면 전 결코 저자의 암습에 당하지 않았을 거예요.”
“ 그러니까 나와 함께 있으면 자꾸만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거지?”
“ 네.”
봉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기대면 되잖아.”
“ 그게 쉽지 않다는 건 연 공자도 잘 알잖아요.”
“ 기대는 거에 익숙하지 않다는 거야?”
“ 기대고 살았더라면 자밀원 원주가 되지 못했을 거예요.”
“ 그렇겠지. 그럼 나와 함께 있을 때만 기대.”
“ 풋! 당신은 모든 걸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 복잡한 건 질색이거든.”
어느새 연우강은 호수 반대편 가장자리에 발을 딛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들어 치백을 보았다.
전 내공을 끌어올려 적강륜을 주입하고 있는 듯 치백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 어떻게?’
치백은 기절할 지경이었다.
금산으로 들어간 백여 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무공을 연마했다. 그것 말고는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 노력 덕분이었는지, 내공은 삼 갑자를 넘어섰다.
삼 갑자. 이론적으로는 백팔십 년 동안 쉬지 않고 축기를 해야 얻을 수 있는 공력을 말한다.
그런데 그 내공을 몽땅 쏟아내고 있는데도 연우강에게는 조금도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다. 어미 뱃속에서부터 내공을 익혔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일 터인데, 그 불가능한 일을 연우강은 해내고 있었다.
“ 그렇게 놀랄 것 없어. 영감. 영감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백오십 살은 넘었잔아.”
“ 그, 그게 어쨌단 말이냐?”
“ 보통 사람은 육십 년을 살면 많이 산다는 뜻이야.”
“ ....!”
치백은 연우강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 내 내공이 오 갑자가 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말이야.”
“ 오, 오갑자가 넘는단 말이냐?”
“ 정말 오갑자가 넘어요?”
치백과 봉연이 동시에 물었다.
“ 글쎄 지금부터 계산을 해볼까?”
“ 영약을 복용한 거예요?”
봉연이 물었다.
“ 맨 처음 복용한 게 사부가 남긴 내단이었어.”
“ 내, 내단을 남겼다고요?”
“ 내공이 육 갑자를 넘어서면 내단이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팔 갑자에 이르면 내단은 새알만 해지고, 십 갑자를 넘어서면 달걀만 해진다고 해.”
“ 연 공자가 복용한 것의 크기는 어느 정도였는데요?”
“ 달걀만 했어.”
“ 달걀만 하면 몇 갑자나 얻을 수 있죠?”
“ 최소한 절반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 그러니까 그걸 다 녹이면 최소한 오 갑자의 내공을 얻는단 말이죠?”
“ 그 내공은 아마도 선천지기일 거야.”
“ 서, 선천지기라고요?”
봉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같은 양의 내공이라도 선천지기로 만든 내공은 한 배 반 또는 두 배의 위력을 낸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 응!”
“ 다 녹인 거예요?”
“ 그걸 얻은 게 열여섯 살 때였으니까.”
“ 그럼 최소한 오갑자의 내공이네요?”
“ 그 다음엔 풍천영수하고 만년지극화령실을 복용했어. 그걸 내게 준 사람은 대야벌 낙일마검 장만보 영감과 창궁무제 남궁우문 영감이었어. 그것들을 복용하게 되면 일 갑자의 내공을 얻을 수 있을 거야.”
“ 대야벌 전대 벌주와 전대 무궐 궐주군요.”
“ 응! 그리고 천마삼경을 우연히 얻게 됐는데, 그 안에서 여의선천신단이라는 영약을 얻었어. 여의선천신단은 이 갑자의 선천지기를 얻게 해줘.”
“ 지금까지 팔 갑자의 내공이에요.”
“ 그게 전부야.”
“ 운기행공을 통해서도 내공을 축기했겠죠?”
“ 그랬을 거야. 수백 번 이상의 주화입마를 겪었으니까.”
“ 그럼 도대체 내공이 어느 정도죠?”
“ 그건 나도 몰라.”
연우강은 고개를 저었다.
“ 어찌됐든 천하제일, 아니 고금제일이네요.”
그녀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자!”
연우강은 왼손을 봉연 앞으로 내밀었다.
파앗!
그녀가 쳐다보는 순간 연우강의 손목에 상처가 나며 피가 흘러내렸다.
“ 뭐, 뭐죠?”
봉연은 깜짝 놀란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지금까지 설명했잖아.”
“ 그, 그러니까 당신의 피를 마시라는 건가요?”
“ 그건 피가 아니고 영약이야.”
“ 모, 못해요.”
봉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봉연 네 몸 속에는 수십 군데에 구멍이 났어.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는데 지혈이 되지 않아. 지금 상태가 지속되면 넌 한 시진을 넘기지 못해.”
“ 운기행공을 해볼게요.”
“ 운기행공을 할 시간이 없어서 그런 거야.”
“ 그래도....”
“ 그냥 붉은색 약이라고 생각해.”
“ 왜 제게 이렇게 잘해주는 거죠?”
봉연은 복잡한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와 육체적인 관계를 가졋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성숙한 육체와 육체의 만남일 뿐이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 객잔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임무를 위해 사내를 유혹하여 자는 것처럼, 정신적인 영역이 철저하게 배제된 단순한 육체적인 영역의 만남, 즉 쾌락을 동반한 교접일 뿐이다.
물론 임무를 앞세워 자는 것과 완전하게 같은 건 아니었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최고의 쾌락을 얻었고, 사내의 품에 안겨 아침을 맞는 안락함 또한 누렸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번 임무가 끝나고 헤어지면 다시 그를 볼 일도 없거니와 설사 우연히 만난다고 해도 그냥 지나치기가 쉽다. 아니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자기 피를 기꺼이 내줄 이유가 없는 사이다.
“ 으헝!”
바로 그때 전면에서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연우강은 고개를 돌려 치백을 보았다. 치백의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 인사치레, 즉 입에 발린 말을 듣고 싶어, 아니면 속마음을 듣고 싶어?”
연우강은 방패처럼 서 있는 물로 시선을 주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물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더니 사망마비처럼 변해 전면에 늘어섰다.
그 수는 오십여 개에 달했다.
“ 입에 발린 말을 먼저 듣고 싶어요.”
“ 내가 지금껏 경험했던 모든 여자들 중 네가 최고였어. 네가 원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그래서 이 피를 주는 거야.”
“ 이 년 동안 매일 밤 기녀와 함께 잤다고 했나요?”
“ 응!”
“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이네요. 그럼 이제 속마음을 듣고 싶어요.”
“ 듣고 나면 화날 거야.”
“ 그래도 상관없으니까 말해 주세요.”
“ 너와 나의 관계를 설연에게 비밀로 하고 싶어.”
“ 비밀로 하고 싶다는 건?”
봉연의 얼굴이 슬쯕 굳었다.
“ 일종의 안전장치라고 보면 될 거야.”
“ 그러니까 이제부터 연 공자를 주인으로 모시라는 건가요?”
“ 주인이란 말은 좀 그렇고 등을 밀어줄 수 있는 부하가 더 나을 것 같아.”
“ 연 공자의 분류 방법에 의하면 가족 다음으로 친한 쪽이군요.”
“ 난 봉연 네게 등을 맡겼어.”
“ 그렇게 되면 소제독과 연 공자의 의견이 상충될 때는 연 공자으 의견을 따라야 하겠죠?”
“ 그래주면 난 좋지.”
“ 그러다가 자밀원 원주 자리를 박탈당하면 어떻게 할 거죠?”
“ 책임질 거냐는 질문?”
“ 네.”
“ 그것도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어.”
“ 입에 발린 말과 속마음?”
“ 어떤 걸 먼저 듣고 싶어.”
“ 이번에는 속마음만 들을래요.”
“ 바로 도망칠 거야.”
“ 풋!”
봉연은 웃고 말았다.
그녀는 잠시 연우강을 흘기고는 팔목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천천히 연우강의 피를 마셨다.
그녀를 지켜보던 연우강은 시선을 들어 치백을 보았다.
치백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머리는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고, 눈에서는 광채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화입마 조짐이었다.
“ 공격해라, 연우강!”
치백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조금 전 연우강의 내공이 팔 갑자에 이를 거라고 하였던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오백 년에 가까운 내공을 쌓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긴 탓이다.
거짓말이라고 확신하고 쉬지 않고 공격을 가했다. 물방울이 단단한 바위를 뚫는 것처럼 물의 벽 또한 언젠가는 열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무리 두들겨도 물의 벽에는 자그마한 흠집도 나지 않았다. 물의 벽은 완전한 철옹성이었다.
“ 안 그래도 그럴 참이야.”
연우강은 만들어두었던 물의 비수로 시선을 주었다.
슉! 슉슉슉! 슉슉!
그의 시선을 받은 물의 비수가 빠른 속도로 치백을 향해 날아갔다.
치백은 양손을 번갈아 내밀었다.
퍽! 퍽퍽퍽! 퍼퍽!
그의 손은 쉬지 않고 물의 비수를 쳐냈다. 그런데 물의 비수는 생각만큼 강하지 않았다.
“ 기껏 이정도로 ... 커억!”
비릿한 조소를 머금는 순간, 손에서 극렬한 고통이 밀려왔다. 내뻗은 주먹에 부서진 물의 비수가 손등을 타고 오르면서 살갗으로 파고들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 크아악!”
치백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의 양팔은 물을 잔뜩 머금은 것처럼 부풀어올랐다. 그러고는 살아 있는 것처럼 어깨를 향해 밀려갔다.
퍽! 퍽퍽!
그가 만들었던 적강륜이 사그러졌다.
철벅!
그러자 연우강을 감싸고 있던 물의 벽이 통째로 치백을 향해 날아갔다.
치백은 멍한 얼굴로 날아오는 물 덩어리를 보았다.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가을 한 날 보았던 해일. 그것은 엄청난 힘으로 밀고 들어와서는 마을을 초토화시켜 버렸다.
그런데 지금 다가오는 저 물이 그 해일 같았다.
치백은 눈을 질끈 감았다.
철벅!
“ 크아악!”
치백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해일처럼 나아가던 물은 한순간에 십여 개의 창으로 변해 치백의 온몸으로 파고들어 간 것이었다. 화끈한 고통이 밀려오자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이 번쩍 떠졌다.
“ 그건.......”
치백은 연우강을 보았다.
“ 어뢰라고 마라천력으로 펼친 무공이야.”
“ 마, 마라천력이었단 말이냐?”
“ 응!”
“ 빌어먹을!”
치백의 신형이 앞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그때까지도 봉연은 열심히 연우강의 손목을 빨고 있었다.
“ 언제까지 마실 거야?”
연우강은 봉연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 이왕이면 강한 노예가 되고 싶어서요.”
“ 내 피를 마시면 강해져?”
“ 벌써 내부의 상처가 아물고 있어요.”
봉연은 깜짝 놀라는 중이었다. 연우강이 피를 마시라고 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효과가 좋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피를 복용하자마자 시원한 느낌과 함께 상처가 빠르게 치유된 것이었다.
연우강은 피까지도 최고였다.
“ 영약이라고?”
“ 네.”
“ 그런데 강한 노예라는 건 무슨 말이지?”
연우강은 옷을 벗어놓은 곳으로 가며 말을 이었다.
“ 갈등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는 부하보다는 노예가 더 나을 것 같아서요.”
“ 어떤 갈등?”
“ 연 공자와 소제독의 명령이 상충될 때 생기는 갈등을 말하는 거예요.”
“ 그런 거라면 굳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 왜요?”
“ 내가 네게 명령을 내려야 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 소제독과 연 공자의 의견이 상충될 때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한 사람은 연 공자에요.”
“ 물론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어. 하지만 봉연 네게 선택을 강요할 일은 없을 거야.”
“ 절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건가요?”
“ 아니!”
“ 그럼요?”
“ 그땐 내가 직접 나서는 게 낫거든.”
“ 소제독을 직접 처리하겠다는 건가요?”
“ 빠르고 정확하니까.”
“ 그럴 거면 이건 뭐죠?”
봉연은 제 입가에 묻은 피를 가리켰다.
“ 부담 없이 잘 먹었잖아. 몸도 많이 치료됐고.”
어느새 두 사람은 옷이 있는 자리에 가 있었다.
“ 그러니까 제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그 말을 한 거예요?”
봉연은 울 듯한 얼굴을 했다.
“ 감동한 거야?”
“ 네.”
봉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내가 명령하면 망설이지 않고 듣겠네?”
“ 제 목숨을 달라고 해도 기꺼이.”
봉연은 연우강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녀는 훌쩍 뛰어올라 연우강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그러고는 입을 맞췄다.
‘ 모두 줄게요. 당신이 원하는 건 전부....’
봉연은 눈을 감았다.
목숨이 아니라 그보다 더 한 걸 달라고 해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가 달라는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내놓을 것이다.
“ 난 좋은 부하를 얻은 거네.”
“ 당신은 좋은 부하가 아니라 좋은 노예를 얻은 거예요.”
입술을 뗀 봉연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그럼 난 성공한 건가?”
“ 당신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에요.”
봉연은 다시 입을 맞췄다.
무서운 사람, 그러면서도 미워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사람, 그는 그런 사람이다.
아마 그가 떠나면 한동안 가슴앓이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 난 아주 착한 사람이야.”
“ 착한 사람이라고요?”
“ 다들 그렇게 이야기해.”
“ 그럼 착한 일 좀 해볼래요?”
“ 어떤 착한 일?”
“ 지금 시간 좀 있어요?”
“ 나야 늘 시간이 넘치지. 하지만 여긴....”
“ 전 그런 걸 따지며 살아오지 않았어요. 마음이 원하고 몸이 준비되면 그걸로 충분해요.”
봉연은 싱긋 웃으며 연우강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섭혼요마신공을 끌어올렸다.
“ 지금부터 내가 읊어주는 걸 잘 들어.”
연우강은 봉연을 안으며 전음으로 운우지정공의 구결을 읊었다.
[ 뭐, 뭐죠?]
[ 네가 예뻐서 전수해 주는 거야. 시간 없으니까 무조건 암기해.]
머릿속으로 운우지정공의 구결이 흘러들어 오자 봉연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집중했다.
[ 음양대법이에요?]
구결을 듣고 난 봉연은 화들짝 놀랐다.
음양대법은 육체적인 교접을 통해 내상을 치유하는 요상대법을 말한다.
그런데 연우강이 불러주는 구결이 그랬다.
[ 펼치는 건 내가 할 거야. 지금부터 넌 몸을 치료하는 데 집중해.]
연우강은 그 자리에 가부좌를 하며 말했다.
[ 고마워요, 연 공자.]
[ 네가 내상을 입은 채로 있으면 내가 힘들어서 그런 거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어. 그리고 운우지정공은 좀 요상해. 그러니까 네가 이해해.]
[ 어떻게 요상하다는 거죠?]
[ 잠시 후면 알게 될 거야.]
연우강은 곧바로 운우지정공을 펼쳤다.
봉연이 요상하다는 의미를 알아차린 건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요상하다는 것은 다름 아닌 쾌감이었던 것이다.
“ 난 좋기만 한데.”
그녀는 활짝 웃으며 치료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