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딱 한 달만
이세연은 사악곡을 바라보았다.
환림의 림주 치백이 가솔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간 건 반 시진 전이다.
미리 출발하여 정탐을 해놓겠다고 했으니 지금쯤은 나왔어야 한다.
그런데 치백은 물론이고 가솔들조차 나오지 않았다.
“ 설마 공격을 감행했다는.....”
확인만 하고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는 건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그는 옆을 보았다.
해천왕 서군을 비롯하여 십여 명이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서군은 안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금산에 갇히기 전 원나라 잔당들과도 많은 전투를 치렀다. 하지만 정찰을 나갔던 치백이 돌아오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첫 단추를 제대로 꿰어야 모든 일이 쉽게 풀린다고 했는데 정찰을 나갔던 치백이 돌아오지 않자 공연히 불안했다.
“ 별 일 없을 거네. 시작하세.”
이세연은 서군을 보며 말했다.
“ 알겠네. 끝나고 보세.”
서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솔을 데리고 계곡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이세연은 안으로 들어가는 해림 일행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들이 어둠 속으로 잠겨들어 가자 몸을 날렸다.
한 식경 후 그가 몸을 내린 곳은 사악곡에서 가장 높은 화사봉이었다. 화사봉에는 구양을을 비롯한 구림세가 무인과 요림 무인들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 어서 오십시오.”
이세연이 다가오자 구양을 일행은 고개를 숙이며 맞았다.
“ 어떻게 됐는가?”
“ 보시다시피 여기선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구양을은 아래를 가리켰다.
이세연은 구양을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왜 이곳을 사악곡이라고 부르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계곡은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데, 먹물을 채워 놓은 것처럼 검었다. 이곳에서 바닥을 확인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남쪽에서 북쪽까지 거리가 이십 리나 된다고 했다.
동쪽과 서쪽에 각각 두 세력이 늘어선다고 해도 칠 리 간격이다. 칠리 간격이면 천리전음으로도 연락이 불가능하다. 공격을 시작하긴 했지만 현재로선 딱히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 시 가주!”
이세영는 시나울을 불렀다.
“ 말씀하세요.”
“ 각 림이 진격하고 있는 장소에 연락을 담당할 무인을 배치해 주시오.”
“ 배치한다고 해도 큰 효과를 기대하긴 힘들어요. 총가주. 현장 소식이 우리에게 들어올 즈음이면 상황은 이미 종료되고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거예요.”
“ 그래도 아주 모르는 것보다는 낫지 않소.”
“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시나울은 가솔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곧 열명의 가솔이 남쪽과 북쪽으로 흩어졌다.
“ 치 가주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나 보죠?”
가솔들을 보낸 시나울이 이세연 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각 림 간 연락을 맡았던 자들이 환림 무인들이기 때문이었다.
“ 그렇소.”
“ 당했을 거라고 보세요?”
“ 그건 나도 모르오. 다만 내가 아는 건, 환림십가가 전력을 다하면 나도 장담하지 못한다는 것뿐이오.”
“ 그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 그럴 거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있지만 이세연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살아 있다면 부하를 보내서라도 소식을 보내올 사람이 치백이기 때문이었다.
‘ 난 네가 환림십기의 공격을 막아낼 정도로 강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우강.’
이세연은 어둠 속을 노려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워낙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 무공이 초극에 올라있는 이세연조차도 누군가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두 명은 검을, 한 명은 도,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창처럼 생긴 기다란 무기를 든 이들은 군무옥 일행이었다.
네 사람 앞에는 커다란 덩어리 하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늦여름 초가집 지붕에서 떨어진 굼벵이처럼 꿈틀거리는 그것은 조천신과 함께 금산에 다녀왔던 진성이었다.
“ 그러니까 저기 보이는 저 영감 자식이 은성황 이세연이란 말이지?”
군무옥은 육참낭아곤으로 진성을 툭 치며 물었다.
사실 그가 있는 곳에서는 이세연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희미한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
“ 그, 그러스니다.”
진성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이 조금만 늦어도 신체 중 한 곳이 부러진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경험으로 파악한 탓이었다.
“ 작전에 대해 다시 한번 읊어봐.”
군무옥은 진성 앞으로 쪼그려 앉았다.
“ 이고 리미 가 바햐에서 사아고으로 지나하기로 해쓰니다. 부쪽은 마리미, 나쪼은 해리미, 도쪼은 사리가 기리미, 서쪼는 도기와 혀리미 드가니다. 가 리의 수는 여 며시미다.”
“ 그러니까 일곱 림이 각 방향에서 사악곡으로 진입하기로 했고, 북쪽은 마림, 남쪽은 해림, 동쪽은 사림과 귀림, 서쪽은 독림과 혈림이 들어간다는 거지? 각 림의 인원수는 열 명내외고.”
“ 그, 그러스니다. 사, 살려 주시시오.”
“ 그러게 자식아, 왜 우리 식구들에게 찝쩍거려, 가만 뒀으면 서로가 좋잖아.”
군무옥은 자리에서 일어섬과 동시에 진성의 머리를 사정없이 밟았다.
와삭!
진성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이런 젠장, 한 가지 물어볼 게 남았는데, 야! 벌써 죽인거냐?”
군무옥은 박살난 진성의 머리를 툭 쳤다. 하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진성이 대답할 리가 없었다.
“ 아무튼 요즘 자식들은 너무 약해 빠져서는...”
“ 뭘 묻고 싶었는데?”
사마윤이 군무옥을 빤히 보며 물었다.
“ 제일 약한 놈들이 누군지 그것 좀 알아보려고 그랬지.”
“ 약한 놈들부터 없애게?”
사마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금산에 처박혀 살았으니까 세상이 적자생존이란 사실을 잊었을 거 아냐.”
“ 그래서 그걸 알려주려고?”
“ 남의 일에 함부로 나서는 게 아니라는 걸 가르쳐 주려고.”
“ 오지랖도 넓다.”
사마윤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 그런데 그 자식들 몇 살이나 됐을까?”
뒤따르던 마장승이 물었다.
“ 금산에 갇힐 때 가주였었다고 했지?”
백을상은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그 당시 나이가 최소한 오십 살은 됐을 테니까.”
“ 최소 백육십 살이네.”
계산을 하고도 기가 막힌 듯 백을상은 어이없게 웃었다.
“ 요물들이네.”
마장승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어이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전에 만났던 제천강보다 한 술 더 뜨는 자들이 바로 팔림의 가주들이었던 것이다.
한가롭게 이야기를 하면서 가는 것 같지만 네 사람은 모든 감각을 주변으로 풀어놓은 채 은밀하게 이동하는 중이었다.
내딛는 발에서는 발걸음 소리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네 사람이 전부 초상비 경공을 펼치며 걷고 있었던 것이다.
“ 대장은 자밀원 원주하고 있다고 그랬지?”
사마윤이 일행을 보며 말했다.
궁금해서가 아니라 말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꺼냈을 뿐이었다.
“ 가슴과 엉덩이가 빵빵한 여자라고 하더라.”
마장승이 거들었다.
“ 난 다섯 냥이다.”
군무옥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 나도!”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백을상이 돈을 꺼내 군무옥 손바닥 위에 놓았다.
“ 넌?”
군무옥은 마장승을 보았다.
“ 난 저 녀석과 함께 가야지.”
마장승은 사마윤을 가리켰다.
“ 저 자식은 안 잤다는 쪽에 걸 건데?”
군무옥은 사마윤을 가리키며 말했다.
“ 내 생각도 그래.”
마장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 정말 안 잤다는 쪽이라고?”
“ 응!”
마장승은 돈을 꺼내 사마윤에게 건넸다.
“ 확신해?”
“ 난 확신해.”
“ 너도?”
군무옥은 마장승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마윤을 보았다.
“ 자밀원 원주에 대해서 알아봤는데, 남자보다 여자를 더 좋아한데.”
사마윤은 군무옥 손바닥에 있는 돈을 채가며 빙긋 웃었다.
“ 일단 맡아둬.”
군무옥은 피식 웃었다.
“ 자신 있는 모양이지?”
사마윤은 돈을 주머니 안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 원래 대장이 겉모습은 모성 본능을 자극하게 생겼잖아. 나이가 어린 여자라면 모를까 많다면 백이면 백 잘 수밖에 없어. 그리고 대장은 앵속처럼 강한 중독성이 있어서 한 번 자고 나면 계속 자게 되는 사람이거든.”
“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 흑랑과 미랑 기억나?”
“ 검둥이 자식하고 계집 녀석?”
“ 그 녀석들이 좋아했던 여자가 돈황의 유곽에 있었거든. 아마 이름이 요나와 요하였을 거야.”
“ 그런데?”
“ 대장이 총각딱지를 뗐던 곳도 그곳이었어.”
“ 요나와 요하는 아니었겠지?”
“ 요나와 요하가 언니라고 불렀던 기녀였는데, 명사였던가 그랬을 거야.”
“ 명사면 나도 기억하고 있어. 아마 그곳에서 가장 미녀였을걸?”
사마윤은 기억을 더듬으며 하늘을 보았다.
미인박명이란 말을 처음으로 실감한 게 그때였다. 돈황 유곽 거리에서 가장 미인이 그녀였는데 우연히 군장들의 사고에 휘말려 죽임을 당학 말았다.
“ 대장의 동정을 가져간 사람이 바로 명사야.”
“ 진짜?”
사마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 그랬다니까. 아무튼 그녀는 대장하고 하룻밤을 자고 나더니 다음 날부터 손님을 받지 않았어. 오직 대장만 받은 거지.”
“ 그때만 해도 대장은 대장이 아니었잖아.”
“ 그랬지. 아무튼 그렇게 되는 바람에 그동안 명사의 단골이었던 자들은 난리가 났고, 한 달인가 있다가 사고가 나서 명사가 죽었지. 그리고 지휘관급 다섯 명이 살해당하는 살인 사건이 일어났고.”
“ 설마.....”
“ 미결로 마무리됐지만 유곽 거리에 사는 대부분의 창기들은 그들을 없앤 사람이 대장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녀들은 거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
“ 그랬구나. 그런데 그거하고 앵속하고 무슨 상관이지?”
“ 나와 친했던 여자가 명사와 언니 동생 했던 운목이었거든.”
“ 운목도 명사와 함께 죽지 않았나?”
“ 술 한 병 빨아줬지. 뭐.”
“ 그런데?
“ 대장은 여자를 미치게 하는 사람이래.”
“ 잠자리 기술을 말하는 거냐?”
“ 이제 막 총각딱지를 뗀 사람이 잠자리 기술이 좋으면 얼마나 좋았겠냐? 그리고 운목이 말하길 잠자리 기술이 좋다고 여자가 푹 빠지는 건 절대 아니라고 하더라.”
“ 그럼?”
“ 잠자리부터 시작해 하는 행동 전부자 여자를 미치게 만든대.”
“ 그 정도야?”
“ 운목 그년하고 엄청나게 싸웠다.”
“ 왜?”
“ 대장 같은 남자를 만나는 건 십 대에 걸쳐 복을 쌓아야 가능한 거라면서 꼬리를 치려고 해서 그런 거지 왜 그랬겠냐?”
“ 십대에 걸쳐 복을 쌓아야 한다고?”
사마윤은 어이없는 얼굴로 군무옥을 보았다.
“ 기녀들 사이엔 그런 말이 있나 봐.”
“ 그러니까 자밀원 원주 봉연도 그럴 거라고.”
“ 다섯 냥 더 걸어도 좋아.”
군무옥은 주머니에서 돈을 더 꺼내 내밀었다.
“ 그렇게 하지 뭐.”
사마윤은 싱긋 웃으며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 다녀오마.”
그때 백을상이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오 장여를 날아가던 백을상의 신형이 허공으로 녹아들어갔다.
그것은 백을상을 귀랑으로 부르게 했던 귀영무무술이었다.
“ 야행술도 오랜만에 보네.”
남은 세 사람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사실 백을상의 귀영무무술은 그리 뛰어난 무공이 아니었다. 그 이유로 도둑질할 때나 써먹을 수 있는 무공이라면 야행술이라고 불렀다. 그 무공을 다시 보게 되자 마치 사막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 깨끗하다.]
백을상의 전음이 들려오자 세 사람은 조용히 몸을 날렸다. 그들이 진입하는 곳은 사악곡 서쪽이었다.
사마윤을 비롯한 네 명이 사악곡 서쪽에서 진입을 시도하는 그 시각.
남쪽에서도 사악곡으로 들어오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남색 무복을 걸치고, 내시가 쓰는 관을 쓴 자들이었다. 가마를 메고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이들은 유덕을 비롯한 팔신장이었다.
“ 어디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주변을 살피던 밀사신장 유덕이 유설연을 돌아보며 물었다.
“ 사두연에서 봉연하고 목욕하고 있을 거야.”
“ 목욕을 하기엔 너무 춥습니다.”
“ 물건이 없는 우리야 춥겠지만 물건 달린 것들은 하나도 안 추워.”
“ 물건에서 열이라도 난답니까?”
“ 따로 있으면 안 나는데 두 개가 가까워지면 그때부터 열이 나잖아.”
“ 클!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유덕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 왜? 겁나?”
“ 저희들이야 겁날 게 없지요. 하지만 소제독은 우리 동창의 전붑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 지금은 하늘이 준 기회야. 밀사. 내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오군도독부도 그렇게 쉽게 이곳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야. 비록 모험이 되겠지만 성공을 한다면 북경은 우리 동창, 아니 내 차지가 돼. 나오지 않을 수 없어.”
“ 그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 하자고. 우린 이미 묘봉산으로 들어왔고, 죽든 살든 이곳에서 승부를 내야 해.”
“ 알겠습니다. 소제독.”
유덕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밀사!”
유설연은 유덕을 불렀다.
“ 말씀하십시오.”
“ 우강이 그 녀석 어때?”
“ 무얼 알고 싶으신 겁니까?”
“ 사내보다 여자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푹 빠질 정도로 매력 있냐는 거야.”
유서설연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은 봉연 때문이었다.
봉연은 임무 때문에 사내와 잠을 자기도 했지만, 본인 입으로 물건을 잘못 달고 나왔다고 할 만큼 여자를 더 좋아한다.
그런데 이틀 전 만난 그녀는 사내가 아닌 여자가 돼 있었다.
봉연이 여자가 된 것은 연우강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 물건이 없지만 전 남잡니다. 소제독.”
“ 남자들은 모른다는 말이야?”
“ 그런 것 같습니다.”
“ 그럼 나도 아직 남자란 말이네?”
“ 소제독도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까?”
“ 그 자식과는 자고 싶다는 생각이 절대로 안 들어.”
“ 그건 아마도 친구로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 그럴까?”
“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 난 자신없어. 밀사.”
“ 무슨 말씀이십니까?”
“ 그를 배신하지 않을 자신.”
“ 그를 버리실 작정입니까?”
“ 버린다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됐을 때를 가정해 보는 거야.”
“ 그래도 안 됩니다. 소제독. 제가 비록 오래 살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겪은 인연 중에는 내게 도움이 되는 인연이 있는 가 하면 해를 끼치는 인연도 있었습니다. 연 공자는 소제독에게 도움을 주는 인연입니다. 물론 소제독의 노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를 만난 다음부터 소제독은 승승장구 했습니다. 그런 친구는 버리는 게 아닙니다.”
“ 나도 그럴 생각이야.”
유설연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 하지만.....”
유설연은 다음 말을 꿀꺽 삼켰다.
- 연우강을 아느냐?
- 금릉 연씨 세가의 장자라고 알고 있어요.
-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는 것 같구나.
- 조심할게요.
며칠 전 황제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지나가는 듯한 투로 묻는 것 같았지만 황제의 눈에는 질투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날에도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일부러 피했다.
‘ 그 방법을 써먹어야 하나?’
봉연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연우강이 그랬다면서 기절하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라고 했다. 차마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다음에 들어가면 눈 딱 감고 해야 할 것 같았다.
“ 씨팔! 개 잡는 셈 치지 뭐.”
유설연은 오른손을 강하게 휘둘렀다.
휙!
“ 왜 그러십니까?”
공기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유덕이 물었다.
“ 아냐, 혼자 해본 소리야. 어서 가.”
“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유덕은 일행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유설연을 태운 가마가 빠르게 전방으로 쏘아져갔다.
한편.
군무옥 일행과 유설연 일행이 사악곡으로 들어온 사실을 알지 못하는 연우강은 치료를 마치고 옷을 입는 중이었다.
봉연은 옷을 입으면서 연우강을 흘끔거렸다.
아직 조금 전 여운이 남아 있는 듯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다. 현실이란 사실을 증명하듯 고통이 밀려왔다.
조금 전 분명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죽어도 좋다는 것 그 하나뿐이다. 그렇게 몸과 마음으로 완벽하게 몰두해 본 적은 남자를 알고 나서 처음이었다.
영원히 그를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는 확신을 굳히게 된 관계였다.
그녀는 단전에 손바닥을 댔다.
머릿속에는 헤어날 수 없는 쾌락의 기운이 남았다면 단전에는 그가 주입해 준 음양쌍극기가 살아 숨쉬고 있다.
그 음양쌍극기는 내상을 치료하더니 내공마저 엄청나게 높여 놓았다. 단 한 번의 관계로 반 갑자의 내공을 얻은 것이다. 이건 기연이 아니라 천연이었다.
“ 내가 고맙지?”
연우강은 사망궤를 둘러메며 입을 열었다.
“ 당신에게 시잡가고 싶을 정도로 고마워요.”
“ 끔찍한 소리 하고 있다. 그런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 게 좋아. 네가 그렇게 마음을 먹는 순간, 난 바로 도망쳐 버릴 거야.”
“ 헹! 해본 말이네요.”
봉연은 혀를 쑥 내밀었다.
“ 어디로 먼저 가고 싶어?”
연우강은 남쪽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길은 저기밖에 없잖아요.”
봉연은 남쪽을 가리켰다.
“ 그럼 가 볼까?”
연우강은 걸음을 옮겼다.
“ 전 그만 사라질게요.”
봉연은 은신술을 펼쳐 허공으로 녹아들어 갔다.
“ 맙소사!”
은신술을 펼치던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내기를 끌어올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자마자 전신에 내기가 충만해지면서 무공을 펼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음양쌍극기를 얻기 전과 비교하면 몇 배 이상 빨라진 셈이었다. 만일 치백이 암습을 했을 때 지금과 같은 상태였다면 결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 왜?”
연우강은 봉연을 돌아보았다.
“ 저와 자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만 하세요.”
몸은 대부분 사라지고 얼굴만 남은 모습으로 봉연은 말했다.
“ 음양쌍극기가 마음에 들어?”
“ 최고의 선물이에요.”
그녀는 활짝 웃으며 얼굴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막 안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모습을 감췄다.
“ 양성의 성격이라서 그래.”
“ 그게 무슨 말이죠?”
다시 봉연의 얼굴이 나타났다.
“ 네 체질이 음양쌍극기와 가장 잘 어울린다는 뜻이야.”
사실 음양쌍극기에 가장 어울리는 체질은 잠마 희수연 같은 음양인이다.
하지만 그러한 체질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고, 음양인 다음으로 잘 맞는 사람은 여성이면서 남성적인 성격을 지닌 봉연 같은 사람이나 남성이면서 여성 같은 성격을 지닌 우성연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음양쌍극기는 임자를 만난 셈이었다.
“ 체질 때문에 이렇듯 엄청나게 강해졌다는 거예요?”
“ 같은 약이라도 체질에 따라 보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잖아.”
“ 그럼 음양쌍극기는 제게 보약이란 말이네요?”
“ 그런 것 같아.”
“ 아무튼 자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세요. 만사를 제쳐두고 뛰어갈 테니까.”
봉연은 다시 얼굴을 끌어들였다. 그러자 그녀의 기척은 어둠에 묻혔다.
“ 한 바퀴 돌아보고 와!”
“ 알았어요.”
봉연은 활기차게 말하고는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려 갔다.
음양쌍극기의 효과는 은신술에서만 나타는 것이 아니었다. 경공 또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연우강 근처를 벗어났다.
남쪽으로 내달린 봉연이 적을 발견한 건 사두연에서 사리가량 떨어진 장소에서였다.
허공에 숨은 봉연은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봉연이 발견한 자는 사림의 가주 사제 낙강일과 그의 가솔 열한 명이었다. 사제 낙강일을 비롯한 사림 무인들은 동편의 천장애를 통해 진입하여 북쪽으로 훑어가는 중이었다.
“ 멈춰라!”
낙강일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사림의 가주답게 그의 무공은 강했다. 가솔들 중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봉연의 기척을 감지해 내고는 손을 들어 올린 것이었다.
봉연은 숨을 참는 것은 물론이고 심장의 박동까지도 차단하며 천천히 물러났다.
“ 출발하라!”
더 이상의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낙강일은 다시 출발 명령을 내렸다.
“ 어느 쪽으로 갈까요?”
그렇게 일각 정도 걸었을까. 앞에서 길을 잡던 자가 낙강일을 보며 물었다.
낙강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위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리 계곡의 폭은 상당히 넓었다. 폭이 삼십여 장에 달하는 바닥에는 커다란 바위가 곳곳에 널려 있고, 바위 주변으로는 키가 큰 소나무들이 서있다. 그리고 계곡 중앙을 관통하는 개울이 있는데 목욕을 해도 충분할 정도로 물의 양이 많았다.
“ 북쪽으로 간다.”
낙일강이 명령이 떨어지자 사림의 무인들은 일렬로 늘어선 채 북으로 길을 잡았다. 하지만 계곡이 워낙 넓어 열한 명의 인원으로 좌우측 전부를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그들은 속도를 늦추고 좀 더 세밀한 탐색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 억!”
계곡을 수색하며 나아가던 무인들 사이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렀다.
“ 왜 그러느냐?”
천리지청술을 펼치고 있던 낙일강이 물었다.
“ 아, 아닙니다. 벌레에 물린 모양입니다.”
“ 벌레에 물린 것 정도로.....”
“ 죄송합니다. 가주님.”
“ 한 곳도 놓치지 말고 철저하게 수색해라!”
“ 알겠습니다.”
사림 무인들은 계곡을 훑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후로도 벌레에 물린 자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계속해서 흘러나왔지만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게 일각 정도를 걸어갔을 때였다.
쉭!
낙일강이 커다란 소나무 아래를 지나가는데 느닷없이 머리 위쪽에서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낙일강은 깜짝 놀라 오른손을 내뻗었다.
“ 억!”
뭔가에 찔린 듯한 느낌이 팔목에서 느껴짐과 동시에 손이 저렸다.
낙일강은 직감적으로 팔목을 찌른 그것이 뱀의 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그는 다시 손을 뻗어 조금 전 동맥을 물었던 뱀을 잡아챘다.
“ 맙소사!”
낙일강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가 잡아챈 뱀은 머리에서 시작해서 꼬리가지 길게 줄이 나 있었다.
그런 모양을 가진 뱀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물리면 한 식경 안에 숨이 끊어진다느 치명적인 독을 간직한 적선혈사였다.
적선혈사의 무서움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적선혈사는 시각이 형편없는 반면에 청각은 비약적으로 발달해 있는데, 그러다 보니 적선혈사의 공격 부위는 빠르게 뛰는 맥에 집중돼 있다.
즉 적선혈사의 독은 동맹의 피를 통해 빠른 속도로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는 것이다.
낙강일은 오른팔에서 심장으로 들어가는 피를 차단했다.
“ 가만.....”
문득 조금 전에 가솔들이 신음을 내뱉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 혹시 뱀에 물리지 않았느냐?”
그는 가솔을 향해 소리쳐 물었다.
“ 맞을거야.”
대답은 계곡 중앙의 개울 쪽에서 들려왔다.
“ 억!”
낙강일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방금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오십여 장 밖이다. 그런데 천리지청술을 펼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다.
갑자기 등줄기로 차가운 얼음 덩어리가 흘러 내려갔다.
철벅! 철벅! 철벅!
어둠을 헤치고 수면을 밟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 그거 알아?”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뭘 말이냐?”
낙강일은 암암리에 공력을 일으켜 뱀독을 몰아내고 있었다.
“ 뱀독은 가을에 가장 강하다는 사실 말이야.”
“ 지금은 겨울이다.”
“ 물론 겨울이지. 하지만 가을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지금 뱀이 지닌 독은 거의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어.”
“ 뱀을 풀어놓은 사람이 너였더냐?”
“ 사악곡은 뱀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야. 난 다만 겨울 잠을 자는 뱀들을 깨워서 침입자들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려 줬을 뿐이야.”
철벅! 철벅! 철벅! 철벅!
연우강은 계속 발걸음 소리를 내며 사림 무인들을 향해 걸어갔다.
“ 뱀독 정도로는 우리를 어찌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구나.”
“ 물론 평소라면 그렇겠지. 너희들은 뱀독을 몰아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라.”
“ 어떻게 다르단 말이냐?”
“ 뱀독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하고 행공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무방비 상태가 되잖아. 내 입장에서는 그보다 좋은 기회가 없지.”
“ 으음!”
낙강일은 신음을 내뱉었다.
연우강의 말이 틀리지 않다.
적선혈사의 독은 오른팔을 완전하게 장악하였고, 내기를 이용하여 심장으로 가는 혈관을 간신히 막아놓은 상태다.
혈관을 막고 있는 내기를 제거하는 순간 적선혈사의 독은 심장으로 스며들어갈 것이다.
행공을 통해 독을 몰아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데,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완전히 사면초가에 빠진 상태였다.
“ 뱀에 물리지 않은 사람 있느냐?”
낙강일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 전 물리지 않았습니다.”
“ 저도 물리지 않았습니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다섯 명이 앞으로 나왔다.
“ 일각만 놈을 붙잡고 있거라.”
낙강일은 곧바로 그 자리에 가부좌를 하며 말했다.
선택의 여지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독을 없애야만 내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 싸움도 할 수 있다. 낙강일이 가부좌를 하자, 뱀에 물린 자들도 일제히 그 자리에 가부좌를 하며 독을 몰아내는 작업을 했다.
“ 그럼 내가 섭섭하지.”
츄악!
연우강은 수면을 강하게 차며 사림 무인들을 향해 쏘아져 갔다.
“ 효운은 나를 따르라!”
선두에 있던 낙상은 달려오는 연우강을 향해 마주 달려가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가 있는 곳은 뒤편에 앉아 행공을 하는 낙강일과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탓이었다.
낙상과 효운이 먼저 달려가고, 나머지 세 사람도 곧바로 몸을 날렸다.
“ 차앗!”
오 장 거리를 남겨둔 지점에서 낙상은 우렁차게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스악!
그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푸르스름한 광채가 튀어나와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갔다.
“ 타하!”
이어 효운의 손에서 검은 물체가 쏘아져 나가고, 뒤따르던 세 명이 낙상과 효운의 머리를 넘어 몸을 날려갔다.
철벅!
연우강이 수면을 강하게 찍었다. 그러자 물이 튀어올랐다. 연우강은 가슴 앞까지 튀어오른 물을 오른손으로 후려쳤다.
츄악!
뺨을 때리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슈아악!
그리고 그가 후려친 물이 작은 물방울로 변해 낙상 일행을 향해 쏘아져 갔다.
콰앙! 퍼억!
가장 먼저 낙상이 쏘아 낸 검탄강기가 와해되고, 효운이 던진 암기가 물방울에 막혀 뚝 떨어졌다.
그리고 낙상과 효운의 머리를 넘었던 세 사람을 향해 물방울들이 쏘아져 갔다.
“ 헉!”
“ 억!”
“ 헛!”
세 사람은 경호성을 발하며 무기를 빠르게 휘둘렀다. 그들의 무기가 둥글게 원을 그리자 바로 앞쪽에 방패 형태의 강기막이 생겨났다.
퍽퍽퍽! 퍽!
암기처럼 날아오던 물방울들이 강기 벽에 막혀 스러졌다.
츄악!
바로 그때 개울에서 물장구치는 듯한 소리가 또 들려왔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많은 물방울들이 암기가 돼 쏘아졌다. 그리고 암기에 이어 연우강이 몸을 날렸다.
“ 놈이 온다.”
낙상은 빠르게 검탄강기를 쏘아내며 소리를 내질렀다.
“ 알고 있습니다.”
효운의 양손이 번개처럼 움직였고, 그의 몸에서 손가락 절반 크기의 암기가 벼락처럼 쏘아져 나갔다.
촤르르!
“ 저건?”
세 명의 가솔 앞에 선 연우강의 손에서 연검으로 보이는 것이 풀려 나와 강기막을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 피, 피해....”
“ 컥!”
낙상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직한 비명이 들려왔다. 연우강의 손에서 풀려나온 사망묵환이 사림의 무인의 목을 뚫고 들어간 것이었다.
픽!
사내의 숨이 끊어짐과 동시에 강기막이 사그라졌다.
사내의 목에서 빠져나온 사망묵환은 강하고 빠르게 옆 사내를 향해 날아갔다.
사내는 급하게 무기를 들어 올렸다.
차앙!
날카로운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로 그 순간 빳빳하게 서 있던 사망묵환의 앞쪽이 휙 구부러지더니 사내의 목으로 파고들어 갔다.
“ 컥!”
사내는 자신의 목을 뚫고 들어간 무기를 보았다.
자유자재로 휘어지는 연검 종류를 가진 자와 싸울 때는 절대 무기를 부딪쳐서는 안 된다는 걸 수없이 들었고,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들어 있다. 그런데 실제 연검을 마주하자 자신도 모르게 무기를 들어 올려 막고 만 것이다.
분명 실수였다. 그런데 그 한 번의 실수가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스악!
사내의 목에서 빠져나간 사망묵환의 궤적을 좇았다.
촤르르!
‘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또다시 늘어나는 사망묵환을 보며 사내는 중얼거렸다. 반장이 조금 넘은 것처럼 보이던 연검은 더 늘어나 지금은 거의 일 장에 달햇다. 그리고 그 끝은 동료의 심장을 무자비하게 헤집는 중이다.
사내는 눈을 감았다.
풀썩!
사내가 쓰러지는 순간, 뒤쪽 행공을 하고 있는 무리 중에서도 소리 없이 쓰러지는 자가 있었다.
얼굴을 땅바닥에 처박고 쓰러진 사내의 뒷목에는 손가락 두께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가 작은 굴에서 토기가 고개를 내밀고 좌우를 살피는 것처럼 허공이 열리더니 하얀 얼굴이 나타나 주변을 살폈다.
그녀는 봉연이었다.
‘ 쉽네.’
그녀는 혀를 내밀어 가볍게 입술을 핥았다.
주위를 돌아보는 그녀의 눈에 일 장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자의 모습이 잡혔다.
“ 크악!”
비명이 들려오자 사내는 움찔 몸을 떨었다.
‘ 풋! 초보들!’
봉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연우강으로부터 음양쌍극기를 주입받기 전이라면 승리한다고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강자들이다. 하지만 저들은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초보들이기도 했다.
독에 중독되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혈관을 차단하여 독이 퍼지는 걸 막아야 한다. 그것까지는 저들도 잘했다.
그리고 두 번째 조치로는 지금처럼 행공을 하든지 중독된 부분을 잘라내야 한다.
그런데 팔이나 다리를 잘라 낸 자는 한 명도 없고, 전부 행공을 한다고 앉았는데 그 또한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저런 식이라면 일각 아니라 한 식경이 지나도 독을 몰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만일 실전이 풍부한 자들이었다면 독을 몰아내다가 죽임을 당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전력을 다해 행공을 했을 것이다.
‘ 그래 너희들은 전부 죽는 거야.’
그녀는 방금 보았던 사내 뒤편으로 몸을 날려갔다.
사내는 눈을 감을 채였지만 계속 움찔거렸다.
연우강이 신경 쓰여 행공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봉연은 사내의 뒷목을 향해 지풍을 쏘았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검은 광채가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흑루였다.
비명도 없었다. 검은 광채는 사내의 목으로 파고들어 갔고, 손가락 두께의 구멍이 뚫렸다.
그녀는 쓰러지는 사내를 허공섭물로 잡아서는 소리가 나지 않게 놓았다.
“ 크윽!”
바로 그때 전방에서 나직한 비명이 들려왔다.
봉연은 비명이 들려온 곳을 보았다. 네 번째 사내가 연우강의 손에 죽어가고 있었다.
‘ 아무튼 당신은...’
그녀는 싱긋 웃으며 몸을 날렸다.
동창에 들어온 이후 명장이라는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자칭 타칭 천재라고 하는 자들까지 다양한 군상들을 만났고, 많은 사내들과 잠도 잣다. 하지만 연우강 같은 사내는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아직까지 부족한 면을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사내였다. 보통 머리가 좋으면 체력이 약하고, 체력이 강하면 머리 쓰는 걸 싫어하기 마련인데, 연우강은 예외였다.
전쟁에 임하면 사소한 것 하나도 계산에 의해 이루어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행동도 나중엔 하나로 귀결된다. 일에 있어서는 전혀 허점이 없는 사내였다.
하지만 연인의 입장이되면 달라진다.
수많은 약점에, 보듬어 안아 주지 않으면 곧바로 바스러져버릴 것처럼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 상대방을 빨아들여 헤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많이도 말고 딱 한 달만 함께 살았으면 원이 없겠다.’
봉연은 혀를 쑥 내밀고는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오른손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가볍게 튕겼다. 검은 광채가 그녀의 손가락에서 쏘아져 나가고 앞에 있던 사내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이 들려오자 그녀의 움직임은 빨라졌다.
방금 비명은 연우강 앞을 가로막았던 자들 중 마지막 남은 사내가 내지르는 비명이었던 것이다.
“ 억!”
“ 컥!”
그녀의 양손이 번갈아 움직이고 나직한 비명이 연이어 들랴왔다.
이제는 소리에도 신경쓰지 않았다. 순식간에 나믄 자들을 없애 버린 그녀는 연우강 곁으로 날아갔다.
“ 끝났어?”
연우강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 딱 한 달만 함께 살면 안돼요?”
봉연은 얼굴을 내밀고 물었다.
“ 무슨 소리야?”
연우강은 의아한 얼굴로 되묻는다.
“ 아네요. 그냥 해본 소리에요.”
봉연은 입을 삐죽 내밀고는 다시 허공으로 잠겨들어갔다.
“ 싱겁긴.”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낙강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 몰아내지 못한 모양이지?”
연우강은 낙강일의 오른팔을 보았다.
피가 통하지 않은 까닭인 듯 낙강일의 오른팔은 마비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쉽지가 않더구나.”
낙강일은 연우강을 향해 걸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휘관 노릇이 어렵다고 하는 거잖아. 부하들이 죽어나가면 마음이 편치 않거든. 마음이 편치 않으면 집중이 안 되고, 당연히 독을 몰아내는 건 불가능할 수밖에 없지.”
“ 내가 독을 몰아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느냐?”
“ 내가 당신 입장이었다면 팔을 잘랐을 거야.”
“ .......!”
낙강일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어려운 자를 상대로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에게 독을 푸는 건 누구나 할 수있다. 하지만 독을 푼 이후가지 정확하게 예측하여 작전을 세우는 자는 그렇게 만지 않다.
그런데 연우강은 그런 것까지 전부 계산을 한 상태에서 움직이고 있다.
어쩌면 다른 자들 또한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본인 소개도 안할 참이야?”
“ 난 사림의 가주 사제 낙강일이다.”
“ 당신네들은 큰 실수를 했어.”
“ 우리가 무슨 실수를 했다는 거냐?”
“ 흩어지지 말았어야 했다는 거야.”
“ 개인의 능력으로는 널 잡을 수 없단 말이냐?”
“ 개인이 아니라 이곳에 온 열 명이 합공을 한다고 해도 날 잡지 못해.”
“ 오만하구나.”
“ 오만한게 아니라 사실이 그래.”
“ 그렇게 자신 있는 놈이 독을 썼단 말이냐?”
“ 쉬운 길을 두고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갈 이유가 없잖아.”
“ 최강의 무공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한다?”
“ 난 뒤끝이 남는 걸 싫어하거든.”
“ 으음!”
낙강일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빠져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는 확신으로 굳어지고 있다. 연우강을 잡겠다고 이곳으로 온 것이 실수였던 것이다.
그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여기서 싸울 게 아니라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란 생각을 했다.
“ 일 초를 피하면 살려줄 거니가 도망칠 궁리를 할 필요는 없어.”
“ 사, 살려준다고?”
낙강일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사림의 가주로 백수십 년을 살아왔지만 누군가로부터 살려 준다는 말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연우강을 바라보는 낙강일의 눈동자에 불길이 활활 일었다.
“ 이젠 도망칠 일 없겠지?”
우두둑!
낙강일은 이를 갈았다.
‘ 풋!’
두 사람을 지켜보던 봉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단 몇 마디로 낙강일을 도망조차 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그의 화술은 무공만큼이나 놀라웠다.
‘ 한 달만 살았으면.....’
“ 크아아.”
바로 그때 짐승처럼 포효하는 소리와 함께 낙강일이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려갔다.
그녀는 연우강을 보았다.
연우강은 오른발을 번쩍 들어 올리고 가슴을 활짝 펴고 있었다. 그리고 시를 읊조리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옥의 입구는 활짝 문을 열었다!”
콰앙!
“ 지옥탄!”
푸아악!
그의 전신에서 백팔 개의 사망정주가 쏘아져 나갔다.
“ 이건?”
낙강일은 멍한 얼굴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연우강이 공격을 해올 거라고는 예상했다. 하지만 그가 예상한 연우강의 공격은 저런 암기가 아니었다.
암기는 자칭 천하제일인이라고 하는 자가 쓸 만한 무기가 절대 아니었다.
최소한 그럴싸한 이름을 지닌 검이라야 했다. 그래서 검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무기가 날아온 것이다.
“ 암기로는 천하제일인이....”
낙강일은 말끝을 흐렸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암기에 어린 힘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 힘은 단순하지 않았다.
그것은.....
“ 이기어검술!”
낙강일은 눈을 감았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백여 개 이상으로 보이는 암기는 전부가 이기어검술의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다.
퍽! 퍽퍽퍽! 퍽퍽! 퍽!
“ 크어억!”
낙강일의 신형이 가랑잎처럼 뒤편으로 날렸다.
퍼억!
오 장여를 날아가던 그의 신형이 커다란 소나무에 막혀 멈췄다. 그의 가슴에는 부러진 소나무 가지가 튀어나와 있었다.
“ 으으!”
수십 개의 사망정주에 당해 온몸에 구멍이 뚫렸음에도 불구하고 낙강일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는 시선을 들어 연우강을 보았다.
“ 왜 금의위와 전쟁을 하는 거냐?”
문득 연우강이 금의위와 전쟁을 치르는 이유를 아직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 금의위가 내 가족을 노리고 있어서 어쩔 수 없어.”
“ 가, 가족이라고?”
“ 응!”
휘리릭!
턱턱턱! 턱턱턱!
날아갔던 사망정주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장착됐다.
“ 우린 잘못 끼어들었군.”
“ 맞아. 영감들이 잘못 끼어들었어. 난 우리 가족에게 해를 끼칠 만한 소지가 있는 건 과거, 현재, 미래까지 전부 지워버리는 데 내 머리를 걸었거든.”
연우강은 무심하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 허허허!”
낙강일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백십이 년 일곱 달.
이제 묻어야 할 때였다.
연우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낙일강은 고개를 푹 숙였다.
“ 딱 한 달만 함께 살면 안 돼요?”
봉연은 연우강을 따르며 물었다.
“ 밥 할 줄 알아?”
“ 자밀원 원주가 밥을 할 줄 안다면 욕먹어요.”
“ 그럼 뭘 먹고 살 건데?”
“ 밥은 연 공자가 잘하잖아요.”
“ 함께 살자고 한 사람이 밥을 해야 하는 거잖아.”
“ 그럼 객잔이 가까운 곳에서 살면 되겠네요.”
“ 시켜 먹으려고?”
“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를 전부 그렇게 해결할 땐 시켜 먹는다고 하지 않고 대 먹는다고 해요.”
“ 그러니까 대 먹자고?”
“ 객잔은 반찬이 매일 달라지니까 집에서 해 먹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요. 딱 한 달만 어때요?”
“ 글쎄 그건 이번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 생각해 보자.”
“ 약속했어요?”
“ 난 생각해 본다고 했어.”
“ 그게 약속한다는 뜻이잖아요.”
“ 봉연 넌 북경의 모든 벼슬아치들을 없애도 죄를 묻지 않는 자밀원의 원주야.”
“ 그 자밀원 원주가 한 달을 원해요. 많이도 말고 딱 한 달.”
“ 좋아. 나중에 한 달 휴가 내.”
“ 알았어요.”
봉연은 그제야 환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