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그들의 자리
혈림의 가주 상관우기는 황당한 얼굴로 앞을 막아선 자들을 보았다.
저들을 만난 건 반각 전. 행공으로 뱀독을 몰아내고 난 다음이었다. 느닷없이 나타나서는 가진 전부를 내놓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해대는 것이었다.
두 명은 검을 들었고, 한 명은 도를 그리고 키가 작은 자는 창도 아니고 그렇다고 낫도 아닌 특이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 산적이더냐?”
상관우기는 키가 작은 사내를 향해 물었다.
사내는 뱀으로 보이는 것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 그걸 꼭 말로 해야 해?”
군무옥은 상관우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 허허허!”
상관우기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까지는 금산을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산적을 보자 비로소 금산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 얼마가 필요하느냐?”
상관우기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 가진 돈 전부와 무기를 내려놓고 왔던 길로 돌아가면 살려주겠다.”
군움옥은 육참낭아곤으로 바닥을 갑벼게 찍으며 말했다.
“ 가진 돈도 없고 이건 쓸 곳이 있는데, 어떡하지?”
상관우기가 검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 그럼 죽이고 빼앗아야지.”
“ 허허허! 맹랑한 놈일세! 감히 산적 나부랭이가?”
상관우기는 바로 옆에 서 있는 사니에게 눈짓을 했다.
그 사내는 그의 손자인 상관남생이었다.
“ 제거할까요?”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
손자의 물음에 상관우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상관남생은 곧바로 군무옥 일행을 향해 몸을 날려 갔다.
사실 상관남생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산적을 보지 못했다. 다만 어른들로부터 산적에 대해 들은 적은 있었다.
도와 어울리는 곰 같은 사내와 작은 키를 극복하기 위해 낫도 아니고 그렇다고 창도 아닌 어정쩡한 무기를 든 자, 그리고 보통의 무인처럼 검을 든 저런 조합은 어른들로부터 들어왔던 산적의 모습과 거의 일치했다. 그리고 그가 들은 산적은 삼류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자들이라고 하였다.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 날 원망하지 말거라.”
상관남생은 나직하게 말하고는 검을 들어 올렸다.
“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인마.”
군무옥은 앞으로 달려나가며 육참낭아곤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산적이었다.
“ 이야압!”
군무옥의 입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오고 들어 올렸던 육참낭아곤을 힘차게 내리찍었다.
“ 네 운이 없음을 탓하거라.”
상관남생은 검을 들어 올렸다. 위에서 떨어지는 무기를 막아 밀어 올림과 동시에 검의 방향을 틀어 목을 잘라 버릴 참이었다.
카앙!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려오자 상관남생은 검에 힘을 주었다.
“ 헉!”
그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힘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처럼 생긴 무기는 계속해서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검을 힘껏 틀어쥐었다.
“ 킬!”
바로 그때 비웃는 듯한 웃음이 들려왔다.
상관남생은 군무옥을 보았다.
“ 설마.......”
상관남생은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녀석의 입가에 어린 건 분명 비웃음이었다.
푸욱!
“ 크아악!”
상관남생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침내 육참낭아곤의 날이 상관남생의 머리로 파고든 것이었다. 상관남생의 손에서 검이 떨어져 나갔다.
장애물이 제거되자 군무옥은 육참낭아곤을 힘차게 내리그었다.
스악!
육참낭아곤은 상관남생의 머리와 몸통을 잘라내고는 사타구니 사이로 빠져나왔다.
두 조각으로 잘려 나간 상관남생의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웅!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관우기 일행은 멍한 얼굴로 군무옥을 보았다.
그들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했다.
상관남생은 가주인 상관우기 다음으로 강한 무공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그가 산적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것도 단 일 초만에.
이이 있어도 말할 상황이 아니었다.
“ 별 것도 아닌 새끼가.”
군무옥은 피식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 너희들은 누구냐?”
상관우기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변했다.
산적이라고 여겼고, 비록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해도 손자인 상관남생은 산적이 없앨 수 있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이미 십 년 전에 검탄강기를 생성해 낸 고수다. 그런 그를 일초 만에 없앤다는 건 놈 또한 엄청난 고수라는 의미였다.
“ 돈과 무기를 놓고 가라고 했잖아. 이젠 돌아가고 싶어도 못 돌아가게 됐잖아.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자식아.”
군무옥은 육참낭아곤으로 상관우기를 가리키며 이죽댔다.
“ 그러니까 저 아이를 죽인 사람이 이 상관우기란 말이냐?”
“ 상관우기? 그러니까 영감이 혈림의 가주 혈룡대군 상관우기였어?”
“ 죽일놈!”
상관우기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제야 군무옥 일행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금산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걸 알고 있는 자들 또한 거의 없다.
그런데 느닷없이 나타난 자들이 혈림을 알고 있다면, 금산으로 왔던 금의위 중 누군가로부터 들었다는 말이 된다.
금의위가 그냥 말해 줄 리는 없고, 고문을 통해 알아냈을 테니, 저들은 적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 놈들이 이곳에서 산적처럼 위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 백십이 년 하고도 일곱 달을 금산에서 썩더니 머리가 돌이 된 모양이네. 산적이라는 것들은 하늘이 무너져도 무인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도 몰라?”
푹!
상관우기의 두 발이 땅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자신에 대한 자책이었다.
놈의 말이 맞다.
산적이 무인을 공격하지 않는 것은 불문율이었다.
혈림 가솔들 또한 무기를 들고 있었으니까 무인이란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런 자신들의 앞을 막아섰다는 건 산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자신은 물론이고 손자인 남생까지 놈들을 산적으로 치부해 버린 것이다.
“ 단 한 번의 실수는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곳이 무림이잖아. 그러니까 저 새끼가 죽은 건 잊어버려. 아직 열 명이나 남았잖아.”
“ 개자식!”
“ 썅!”
“ 죽일 놈!”
휙! 휙휙! 휙!
진득한 살기가 담긴 욕설을 뱉어 내며 네 명이 군무옥 일행을 향해 몸을 날려갔다. 그들은 혈림오군 중 네 명으로, 군무옥에게 죽임을 당한 상관남생이 대형이었던 것이다.
“ 성격이 마음에 드는 자식들이네.”
휙!
군무옥은 싱긋 웃으며 몸을 날렸다.
“ 맞아. 사람은 항상 저렇게 적극적이어야 해.”
군무옥에 이어 사마윤이 몸을 날리고, 마장승과 백을상이 연달아 몸을 날렸다. 달려가는 그들의 몸에서 광포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머, 멈춰라!”
상관우기는 질겁하여 소리쳤다. 저렇듯 막무가내로 덤빌 자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명령은 한발 늦고 말았다.
“ 이얍!”
“ 타앗!”
“ 차앗!”
“ 하아!”
군무옥을 비롯한 네 명의 입에서 차가운 외침이 터져 나오고 그들의 무기가 허공을 갈랐다.
쓰쓰쓰! 쓰쓰쓰!
먼저 마장승의 곤오신도가 거북살스러운 소성을 흘렸다. 이어 사마윤의 무기에서 푸른 광채가 쏘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백을상의 검에서는 백무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맨 먼저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맨 마지막에 도착한 군무옥의 육참낭아곤이 파도처럼 춤을 췄다.
구유잔백일천도, 우주일만검결, 백무탈혼유마검, 광풍파랑십삼절.
천오백 년 전 천하를 장악했던 영세오천 중에서도 가장 강한 무공이라 불린 무공 중 네 가지가 재림한 것이다.
아니 네 명이 펼치는 신법이 일천독행신이기 때문에 다섯 가지 무공이 재림했다고 봐야 했다.
콰콰쾅! 쾅쾅!
“ 으악!”
“ 크악!”
“ 아악!”
“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혈림오군의 네 명은 달려나갔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튕겨졌다. 뒤편으로 날아가는 그들의 육체는 더 이상 사람 모습이 아니었다. 머리가 잘려나간 자, 갈가리 찢겨나간 자, 허리에서 잘려 나간 자 등 난자된 채로 날아가고 있었다.
철벅! 철벅! 철벅!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시체들이 정육점 고기처럼 사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상관우기 일행은 너무나 참혹한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혈림오군은 가주인 상관우기 다음으로 강자였다. 그런 그들을 단 일초 만에 없앨 수 있는 무인이 무림에 존재할 거라고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다.
“ 너희들은 금산에서 나오지 말았어야 했어.”
군무옥은 상관우기 일행을 향해 걸어가며 나직하게 말했다.
“ 아니, 나오는 것까지는 좋아. 네놈들도 인간처럼 살 권리가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 대장만큼은 절대 건들지 말았어야 했어.” “ 너희들 대장이라면.......”
이어지는 군무옥의 말에 상관우기의 눈빛이 흔들렸다.
“ 영감을 비롯한 구림세가 나부랭이들이 죽이려 혈안이 돼 있는 연우강이 바로 우리 대장이야.”
“ 그럼 너희들이 흑랑기 출신?”
“ 맞아. 영감. 우린 흑랑기의 유일한 생존자들이야.”
고개를 끄덕인 군무옥은 상관우기의 삼 장 앞에 멈춰 섰다.
“ 날 상대하겠단 말이냐?”
“ 남아 있는 놈들 중에서 영감 키가 제일 크잖아.”
“ 순전히 키 때문에 날 택한 거라고?”
상관우기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보통 상대를 결정할 때는 무공의 고하를 따져 결정한다. 적군 중 강자를 상대할 때는 이쪽 또한 강자를 내보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놈이 앞에 선 이유가 키 때문이라는 황당한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 항상 그랬어. 키가 제일 큰 놈은 실력에 상관없이 내 차지야. 준비해. 영감.”
군무옥은 육참낭아곤을 수평으로 눕혀 상관우기를 겨냥했다.
“ 자신이 있다는 말이구나.”
상관우기는 검을 뽑았다.
스르릉!
검신이 드러나면서 붉은 광채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상관우기는 검을 얼굴 높이로 들어 올려 검면을 바라보았다. 용 한 마리가 구름을 뚫고 비상하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혈룡검.
혈림의 가주를 나타내고 혈룡대군이라는 네 자의 별호를 대표했던 검이다. 그 당시만 해도 혈룡검으로 펼치는 혈해검혼삼식은 천하에 적수가 없었다. 하지만 혈룡검은 지난 백여년 동안 단 한 번도 검집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랬던 검을 이제야 뽑게 된 것이다. 그는 군무옥처럼 혈룡검을 수평으로 눕혀 내밀었다.
“ 백십이 년 만에 처음 뽑은 듯한 얼굴인데?”
군무옥은 서서히 내공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 그렇다.”
“ 안 됐네. 백십이 년 만에 뽑은 검인데 이번이 마지막이라서 말이야.”
“ 자신 있는 모양이구나.”
“ 난 전랑이야. 저승에 가면 전랑을 아느냐고 물어봐. 그럼 최소한 만 명 이상은 나올 거야. 내게 죽었다고 하면 그놈들이 잘해줄거야.”
“ 살귀였구나.”
상관우기의 얼굴에 처음으로 긴장한 빛이 어렸다.
일만 명 이상을 없앴다면 실전의 달인이란 말이고, 내공의 고하와 상관없이 초특급으로 분류해야 하기 때문이다.
“ 일만 명 가지고 긴장하는 놈이 나보다 두 배 이상 강한 살인 경험이 많은 대장을 없애겠다는 거야? 지나가던 개가 웃어, 인마.”
파앗!
군무옥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갔다.
순식간에 상관우기 앞에 선 그는 육참낭아곤을 천천히 내밀었다.
휘이익!
내민 육참낭아곤에서 서늘한 바람이 흘러나왔다.
그 바람은 곧 맹렬하게 돌아가며 상관우기를 향해 쏘아져 갔다.
상관우기는 자신 앞으로 다가온 검은 바람을 향해 혈룡검을 내리찍었다.
파앙!
기운을 향해 후려쳤을 뿐이데 광포한 소성이 터져 나왔다.
“ 쯧! 멍청하기는.”
군무옥은 혀를 차며 광풍파랑십삼절의 두 번째 초식인 사풍류를 펼쳤다. 육참낭아곤이 둥글게 호선을 그리자 조금 전보다 더 강한 기운이 상관우기를 향해 쏘아져 갔다.
상관우기의 대응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는 같은 동작으로 혈룡검을 휘둘러 사풍류의 기운을 해소했다.
‘ 강해졌군.’
가볍게 처리한 것과는 달리 상관우기의 얼굴엔 긴장감이 어렸다. 두 번째 기운이 첫 번째 기운보다 훨씬 강했던 것이다.
아니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정확하게 내기를 한 번 돌릴 시간이 흐르고 나자 세 번째 기운이 밀려왔다.
그 기운은 조금전부다 더 강해 보였다.
이번에도 역시 같은 초식을 펼쳐 기운을 쳐냈다.
“ 으음!”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충격을 받았다고 하기보다는 파도처럼 쉬지 않고 미렬오는 무공에 놀라 내지른 신음이었다.
그때 군무옥은 다섯 번째 초식인 회수류를 펼치고 있었다. 전사식이 바람을 이용하는 초식이라면 중사식은 물의 기운을 이용하는 초식이다.
당연 초식에 어린 기운은 더 무겁고 강하다.
퍼억!
“ 헉!”
검은 기운을 쳐냈던 상관우기의 입에서 경악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놀란 눈으로 군무옥을 보았다.
군무옥의 행동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계속 강해지더니, 지금은 거의 늪을 후려치는 듯한 기분이 든다.
‘ 공격을 해야 해. 공격을 하지 않으면......’
공격을 하지 않으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공 자체가 그랬다.
상관우기는 공격할 기회를 잡기 위해 군무옥의 무기를 살폈다.
‘ 맙소사!’
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군무옥이 펼치는 무공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모든 초식은 전부 이어져 있고, 힘 또한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끊어지는 부분이 있어야 그 순간을 노려 파고들어 갈 터인데, 지금 상태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 차앗!”
군무옥이 사수류를 펼칠 때 상관우기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퍼억!
조금 전보다 더 강한 소성이 터져 나왔다.
상관우기의 얼굴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손바닥이 짜르르 울릴 정도로 강한 충격이 느껴진 것이었다.
‘ 혼자 힘으로 안되면 가솔이라도.’
그는 곁눈질로 가솔들이 있는 곳을 보았다.
“ 크아악!”
바로 그때 처절한 비명과 함께 가솔 한 명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는 자질이 뛰어나 장차 혈림을 맡기려고 했던 화청운이었다.
화청운의 목을 잘라 낸 건 도를 든 자였다.
“ 그놈은 사랑이라고 해. 그리고 영감 부하의 목을 자른 무공은 구유잔백일천도니까 너무 아쉽게 생각하지 마.”
“ 구유잔백일천도?”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관우기는 다시 도법의 이름을 되뇌었다.
부르르!
한순간 그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 서, 설마 그 무공이란 말이냐?”
그는 저도 모르게 고함을 내질렀다.
“ 아무리 흥분했다고 해도 내 무기는 봐야지.”
스악!
“ 크억!”
상관우기의 입에서 고통스런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화청운의 죽음과 구유잔백일천도에 너무 놀라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광수류 기운이 옆구리를 훑고 지나간 것이었다. 한 웅큼 살이 떨어져 나가며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 맞아, 영감. 전랑이 익힌 무공은 영세오천 중 지천의 지존 무공인 구유잔백일천도고, 저기 검을 들고 있는 적랑이 펼치는 무공은 밀천의 무공인 우주일만검결이야.”
“ 크아악!”
군무옥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사마윤과 싸우던 자가 온몸이 걸레처럼 찢기며 죽임을 당했다.
“ 그리고 저기 백무를 뿜어 내는 놈은 귀랑인데, 백무탈혼유마검이야.”
“ 아악!”
이번에도 역시 군무옥의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백을상의 검이 상대의 머리를 날렸다.
“ 그럼 네가 익힌 것은?”
상관우기는 전 내공을 동원하여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한 발 늦은 듯 조금 전 허락했던 곳으로 또다시 싸늘한 기운이 파고 들었다.
까앙!
“ 커억!”
내장이 흘러나올 정도로 깊은 상처가 생겨났다. 상관우기는 침중한 얼굴로 군무옥을 보았다.
“ 방금 전 펼친 게 광풍파랑십삼절의 십절인 사풍사수류였어.”
“ 너는 광풍파랑십삼절을 익혔단 말이냐?”
“ 광풍파랑십삼절의 요체는 바람처럼 파도처럼 끊어지지 않아야 해. 쉬운 건 아닌데 그렇게 해서 십삼 초식을 펼칠 수 있다면 나보다 두 배 강한 놈도 없앨 수 있어. 아주 멋진 무공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군무옥은 육참낭아곤을 천천히 찔러 넣었다.
처얼썩!
상관우기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어디선가 새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전방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파도가 이편을 향해 덮쳐오고 있었다.
‘ 너무 신중했어.’
그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위험을 무릅쓰고 공격을 했더라면, 어쩌면 기회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허점을 찾아 헤매다가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말았다.
“ 늦었지만 그냥 죽을 순 없으니까.”
상관우기는 혈룡검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의 검 끝에서 붉은 기운이 뭉클뭉클 피어올렀다.
그 기운은 곧 붉은 혈룡의 형상을 하더니 높게 솟구쳐 올랐다. 순식간에 십여 장 높이로 올라가 혈룡은 아래를 노려보았다.
“ 혈룡이 천하를 향해 울부짖는다. 혈룡진천하!”
그의 입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상관우기는 전 내공을 검으로 쏟아 넣었다.
꾸아악!
허공에 떠 있는 혈룡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입을 쩍 벌린 혈룡이 무서운 속도로 군무옥을 향해 쏘아져 갔다.
“ 젠장!”
군무옥은 욕설을 뱉어 내며 육참낭아곤을 강하게 찔러 넣었다. 그의 육참낭아곤 끝에서 검은 기운이 쏘아져 나와 상관우기를 향해 밀려갔다
그것은 광풍파랑십삼절 후사식의 마지막 초식인 광풍광수류였다.
슈아악! 휘이익!
검은 기운이 풀어지면서 주변은 폭풍의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변했다 그러나 상관우기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이자식 제법 싸울 줄 아네?”
군무옥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상관우기의 첫 공경은 다름 아닌 함께 죽자는 동귀어진 수법이었던 것이다.
“ 동귀어진은 우리 전공이야, 영감.”
군무옥은 육참낭아곤의 손잡이 튀어나온 것을 왼손으로 잡았다.
“ 네 머리 바로 위에 혈룡이 있다. 군무옥, 설사 날 죽인다고 해도 너도 죽는다.”
“ 지랄하고 있네.”
철컥!
뭔가 풀리는 듯한 소리가 육참낭아곤에서 흘러나왔다.
푸악!
그리고 육참낭아곤 끝에 달려 있던 낫 형태의 무기가 공간을 단축하며 상관우기를 향해 날아갔다.
푸욱!
낫은 단숨에 상관우기의 단전을 뚫었다.
“ 커억!”
상관우기의 입이 쩍 벌어지고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상관우기는 고개를 들어 군무옥을 보았다.
혈룡은 녀석의 머리에서 반 자 떨어진 곳까지 다가가 있었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막거나 피하지 않고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 내가 그랬잖아. 동귀어진은 우리 전공이라고.”
군무옥은 육참낭아곤을 어깨에 걸치고 상관우기 곁으로 다가갔다.
“ 내가 졌다. 군무옥.”
“ 너뿐만 아냐. 우리 대장을 공격한 놈은 전부 죽어. 한 놈도 남김없이 전부.”
군무옥은 육참낭아곤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퍼억!
“ 크아악!”
상관우기의 머리가 완전하게 함몰되면서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단 한 방에 상관우기를 없애 버린 군무옥은 그의 단전에 박힌 낫을 뽑아 육참낭아곤에 장착했다.
“ 다리는 안 자르냐?”
마장승이 군무옥을 보며 물었다.
“ 육참낭아곤 날을 끼웠으니까 이제 잘라야지.”
군무옥은 육참낭아곤을 번쩍 들어 올려 상관우기의 무릎을 향해 휘둘렀다.
번쩍!
육참낭아곤이 푸른 광채를 남기자, 상관우기의 무릎이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 가자!”
상관우기의 다리를 잘라낸 군무옥은 동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사마윤과 마장승 그리고 백을상이 몸을 날렸다.
잠시 후 일행이 멈춘 곳은 동쪽 절벽이었다.
흘끔 위를 올려다본 네 사람은 절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 대장이 정말 나올까?”
위로 올라가던 마장승이 사마윤을 돌아보며 물었다.
“ 그 인간을 하루이틀 겪어? 이곳에서 보름은 죽치고 있어야 하는데 화악곡 말고는 딱히 갈 곳이 없잖아.”
“ 갈 곳 없는 게 아니라 사람 죽이기에 가장 좋은 장소가 화악곡이잖아, 자식아.”
군무옥이 툭 쏘아붙였다.
“ 화악고에 있는 독은 어때?”
이번에는 백을상이 사마윤을 향해 물었다.
네 사람이 묘봉산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삼대 금지라고 불리는 사악곡, 화악곡, 암악곡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구림세가 무이늘 때문이 아니라 금의위 위사들을 유인하기 위해 살폈다. 그런데 지금은 금의위 위사가 아닌 구림세가 무인들을 상대로 삼대금지를 써먹고 있는 것이다.
“ 화악곡에 있은 독은 별것 아냐.”
“ 그럼?”
“ 여기 있는 적선혈사의 독 기운과 섞였을 때 엄청난 극독으로 변해.”
묘봉산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화악곡은 특이한 장소였다. 상당히 넓은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짙은 꽃향기와 안개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래서 그곳을 안개의 땅이라는 의미의 무지와 향기의 땅이라는 의미의 향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화악곡의 비밀은 바로 그 꽃향기에 있었다.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한 꽃향기 안에는 독이 숨겨져 있는데, 아무리 오래 머무른다고 해도 크게 해가 되지 않는다. 밖으로 나가면 공기에 의해 바로 해독되는 탓에 독이라고 부르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곳 사악곡을 지나쳐 화악곡으로 들어가면 달라진다. 이곳에 퍼져 있는 뱀독의 기운과 합쳐져 이틀이 지나면 화악곡의 장독은 인체에 치명적인 극독으로 변하고 만다.
그 이유를 알리 없는 사람들은 자꾸만 사람이 죽어나가는 화악곡을 금지로 지정하였고, 발길을 끊엇다. 물론 내기로 독 기운을 태워 버리는 무인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문제는 적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이다.
“ 자연이 만들어낸 불가사의네.”
백을상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 자연이 아니야.”
사마윤은 고개를 저었다.
“ 아니라고?”
백을상은 사마윤을 보았다.
“ 응!”
“ 그러고 보니 너....”
문득 사마윤이 사악곡과 화악곡에 대해 너무 자세하게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봉산으로 들어와 삼대금지로 안내한 사람도 그였고, 사악곡에 적선혈사가 많다고 한 사람도 사마윤이었다.
“ 사악곡과 화악곡을 만든 건 하북 사마세가였어.”
“ 너희가문에서 만들었다고?”
“ 우리 사마세가는 송나라 최고 가문이었어. 원나라와 전쟁을 시작하기 직전 정국을 장악하고 있었데. 그때 정적을 없애기 위해 만든 장소가 바로 사악곡과 화악곡이야. 사악곡에는 적선혈사를 풀어놓고, 온 산에 장미를 심고 화악곡을 만들어 화독을 뿌려놓은거야. 적선혈사의 독과 화독이 섞이면 치명적인 극독으로 변하거든.”
“ 그래서 써먹었어?”
“ 써먹었으니까 송나라가 망했지.”
“ 써먹었으니까 송나라가 망했다고?”
“ 응!”
“ 너희 가문은 송나라 최고 가문이라고 하지 않았냐?”
“ 이왕 망할 거 화끈하게 배신을 한 모양이지, 뭐.”
“ 원나라 쪽으로 줄을 섰다는 말이구나.”
“ 그런 셈이야. 아무튼 그 후루도 이곳은 우리 가문을 지켜주는 방패 역할을 했어.”
“ 명 나라가 들어서면서 발길을 끊은 거냐?”
“ 권력암투를 할 일이 없었으니까.”
“ 백여 년 이상 묵혀두었던 곳을 이번에 다시 써먹는 거네?”
“ 그런 셈이지.”
사마윤은 피식 웃으며 절벽 위로 올라갔다.
어느새 이십여 장에 달하는 절벽을 전부 올라온 것이었다.
일행은 사악곡을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살기가 사악곡 곳곳에서 맴돌고 있었다.
“ 크아악!”
그때 남쪽 어딘가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 누구지?”
사마윤은 군무옥을 돌아보았다.
그는 들려오는 비명만 듣고도 죽인 자가 연우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우리 말고 또 들어온 자가 있는 모양인데?”
사마윤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는 방금 비명이 연우강의 작품이 아니라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그들이 비명만으로 연우강의 작품인지 아닌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바로 비명에 내포된 감정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내지르는 짧은 비명이지만 그 안에는 절망, 두려움, 아쉬움, 서러움, 고통, 놀람 등 많은 정보가 담긴다. 그런데 연우강에게 죽은 자들은 한결같이 공포와 고통을 내포하고 있다.
바로 그가 사용하는 무기 때문이다.
날이 제대로 서 있지 않은 암기가 몸 속으로 파고들어 가기 때문에 당하는 자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연우강이 자주 애용하는 낫이나 손괭이도 마찬가지다.
내공을 쓰는 무인들은 낫이나 손괭이를 사용하더라도 한 방에 베어 낸다. 검기나 강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날이 없는 무기를 들었다고 해도 한 번에 잘라낸다.
즉 무기를 쥔 손의 궤적이 직선이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연우강은 낫질이나 손괭이질을 할 때 손의 움직임이 직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안쪽으로 호선을 그린다. 당기면서 베어 낸다는 뜻이다.
당연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한순간에 잘리는 것보다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연우강에게 죽임을 당한 자들은 한결같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방금 들어온 비명은 죽음에 대한 공포만 있을 뿐 고통스러운 감정은 그다지 내포돼 있지 않았다.
연우강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 유설연일까?”
백을상이 물었다.
“ 그럴 가능성이 높을 거야. 광랑수호다는 금의위 사냥에 열을 올리고 있을 테니까.”
사마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 시간이 좀 남을 것 같은데 우리도 사냥이나 할까?”
마장승이 일행을 보며 말했다.
“ 일인당 백 어때?”
“ 귀로 할까, 아니면 코로 할까?”
“ 이번엔 코로 하자.”
“ 사흘 후 화악곡 앞 어때?”
“ 좋아.”
네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제히 몸을 날렸다. 곧 네 사람의 신형은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 크악!”
“ 아악!”
그들이 떠난 그 시각, 남쪽 어딘가에서 또다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백을상의 예상처럼 해림 무인들을 공격하고 있는 이들은 유설연을 비롯한 팔신장들이었다. 양측 사이에는 다섯 명이 쓰러져 있었는데 세 명은 해림 무인들이고 두 명은 팔신장의 막내와 일곱째였다.
다섯 명은 전부 죽은 듯 미동이 없었다.
“ 아무튼 내가 아니면 아무것도 안돼.”
가마 안에 앉아 있던 유설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해천왕 서군은 가마 밖으로 나오는 유설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실 그는 자신들의 뒤를 공격해 온 자들의 정체를 알지 못한 상태였다. 다만 행색과 말투로 동창에서 나온 자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네가 두목이야?”
유설연은 서군을 보며 물었다.
“ .......”
서군은 황당한 얼굴로 유설연을 보았다.
도통 성별을 알 수 없다. 가슴이 약간 튀어나온걸 보면 여자가 분명했다. 그런데 느낌은 여자가 아니라고 하고 있었다.
“ 밀사!”
유설연은 유덕을 불렀다.
“ 말씀하십시오, 소제독.”
“ 의자 옆에 보면 상자가 하나 있어, 그거 내와.”
“ 알겠습니다. 소제독.”
‘ 소제독이라....’
서군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맺혔다.
소제독이란 호칭 때문이었다. 현 관직에서 제독 호칭을 쓰는 곳은 동창뿐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제독이 아니고 소제독이라고 했으니, 제독과 관련된 자일 뿐 실제 제독은 아니라는 소리다. 그런 자라면 죽인다고 해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터였다.
“ 사내냐 계집이냐?”
정식 관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자 한결 여유가 생겼다. 서군은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유설연은 대답 없이 서군을 빤히 바라보았다.
“ 가져왔습니다.”
바로 그때 유덕에 가마에서꺼내온 상자를 내밀었다.
“ 꺼내 줘.”
유설연의 말에 유덕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특이하게 생긴 무기가 들어 있었다. 검보다 약간 크고, 절반 가량이 손잡이로 이루어진 그것은 다름 아닌 작두날이었다.
“ 여기 있습니다. 소제독.”
유덕은 작두날을 내밀었다.
작두날을 받아 든 유설연은 손잡이를 잡고 가볍게 휘둘렀다.
“ 거령, 읊어.”
작두날을 어개에 걸치며 유설연이 거령신장 장제남에게 말했다.
“ 한때 해천왕이란 별호로 불린 서군이란 잡니다. 구림세가의 아홉 가주들 중 이세연, 단목숭을 다음으로 강한 자였고, 무공은 백팔일검필사류입니다.”
“ 백팔일검필사류는 어느 정도지?”
“ 대야벌 백대고수의 말단에도 끼지 못한 하륩니다.”
“ 죽일......”
서군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넘실댔다.
“ 아직 안 끝났어, 새꺄. 가만히 처들어.”
“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계집놈.”
“ ..... 저 새끼 가족은?”
잠시 서군을 쏘아보던 유설연은 짓씹듯 말을 뱉었다.
“ 금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자식 두 놈을 숨겨 두었습니다. 한 놈은 서철영이고 다른 한 명은 서장영이었는데, 그들 두 명이 각각 다섯 명씩의 자식을 낳았고, 그 자식들이 다시...”
“ 총 명 명이야?”
“ 총 오십이 명입니다.”
“ 구족까지 따진거야?”
“ 삼족까지만 따졌습니다.”
“ 구족까지 따져서 다시 작성해.”
“ 알겠습니다. 소제독.”
“ 삼족만 따져도 오십 명이래, 서군.”
유설연은 서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때 서군의 얼굴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얼굴이 이렇듯 노을처럼 시뻘겋게 물든 이유는 조금 전 장제남이 말한 서철영과 서장영이란 이름 때문이었다.
그 당시 해림의 가솔들은 전부 금산으로 들어갔고, 대부분이 대가 끊겼다. 서군 또한 모든 가솔을 데리고 들어왔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며 다녔다. 더불어 후대가 없으니까 서씨 가문은 끝났다고도 했다. 그런데 두 명의 자식을 남겨두고 갔다는 사실이 백이십 년 만에 밝혀진 것이다.
“ 거짓말 마라, 놈!”
서군은 장제남의 말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장제남의 말을 인정하는 순간, 가주로서의 직위를 상실하고 말 터였다. 자기 가족은 살려 두고, 가솔들의 가족만 데리고 들어간 가주를, 백여 년 동안 그 사실을 속여 온 가주를, 누가 따르려고 할 것인가.
구족 아니라 십족을 멸한다고 해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 난 동창의 실질적인 수장이야. 서군. 네놈뿐만 아니라 단목숭을 그놈의 신상까지도 전부 파악해 낼 능력이 있어. 넌 아주 치사한 놈이고, 더러운 놈이었어.”
“ 거짓말 마라. 놈! 난 자식을 남겨둔 적 없다. 난 내 가족을 전부 데리고 금산으로 들어갔다.”
휙!
서군은 고함을 내지르며 유설연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순식간에 유설연 앞으로 다가든 그는 전 내공을 주입하여 검을 내리찍었다.
기세로만 본다면 일검에 유설연을 없애버릴 정도였다.
차앙!
하지만 유설연 또한 보통 강자가 아니었다.
소제독이 되어서 철이 바뀔 때마다 먹는 보약처럼 영약을 복용했다. 정확한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그 스스로도 파악하지 못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가 익힌 무공은 또 얼마나 많은지.
황실 비고에서 얻은 무공부터 시작해서 범천조화신기에 적혀 있던 범천조화신공까지. 무공 또한 수많은 종류를 익혔고 지금은 그것들을 잊어 가는 중이다.
익힌 무공을 잊는다는 건 곧 초식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걸 뜻하고, 초인을 향해 달려간다고 봐야 한다.
유설연은 오른손을 강하게 밀어 올렸다.
슈캉!
“ 억!”
서군은 질겁했다.
유설연의 손목은 꽉 쥐기만 해도 부러질 것처럼 얇다. 그런데 그 얇은 팔에서 산악 같은 힘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서군은 급하게 내공을 끌어올려 검에 주입했다.
“ 네놈 가족 십족을 전부 없애 버릴 거야. 이 개자식아, 이게 뭔지 알아?”
카앙!
마침내 서군의 검이 오른편으로 넘어갔다. 유설연은 밀어붙인 작두날을 횡으로 죽 그었다.
서군은 훌쩍 몸을 날려 뒤로 물러났다.
스악!
“ 크윽!”
피하는 게 한발 늦었던 듯 서군의 가슴이 벌겋게 물들었다.
“ 개작두야! 내 별명인 개작두라고, 썅노무 새끼!”
유설연의 신형이 벼락처럼 물러나는 서군을 향해 쏘아져 갔다. 한 걸음에 서군 앞으로 간 그는 작두날을 들어 올려 힘껏 내리찍었다.
하지만 서군 또한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쩍 벌어진 가슴에서 피가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고 막았다.
까앙!
불똥이 튀며 두 무기가 부딪친 여력이 주변을 강타했다.
퍽! 퍽퍽퍽! 퍽퍽!
커다란 절구로 내리찍은 듯한 흔적이 곳곳에 남았다.
슈캉!
무기를 빼는 두 사람은 상대방의 약점을 향해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서군의 검은 유설연의 왼편 목으로 향했고, 유설연의 작두날은 서군의 왼편 목으로 향했다. 멈추지 않으면 서로의 목을 칠 판이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 막아라!”
서군은 나직하게 소리쳤다.
“ 조까, 씨팔놈아!”
유설연의 얇은 손목에 파란 힘줄이 불거졌다.
“ 개자식!”
서군은 검의 방향을 틀었다.
차앙!
두 무기가 부딪치는 순간 유설연의 입에서 뭔가 휙 튀어나왔다.
“ 헉!”
서군은 질겁하여 고개를 숙였다.
유설연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것을 암기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암기가 아니라 유설연의 침이었다.
아무런 힘도 내포하지 않은 침이었지만, 그것이 가져온 효과는 엄청났다.
서군이 고개를 돌림으로써 팽팽하게 유지되던 힘의 균형이 무너졌을 뿐 아니라, 고개를 돌려 버린 서군은 유설연의 위치를 놓치고 말았다.
근접해 있는 상태에서 상대를 놓친다는 것은 치명적인 허점을 드러낸 것과 다르지 않았다.
서군은 갑자기 허전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밀어 붙이고 있는 유설연의 작두날이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서군은 아무 생각 없이 곧바로 전방으로 몸을 날렸다. 재주를 넘을 생각이었다.
훌쩍 날아오르며 머리를 숙이고 재주를 넘으려는 순간 다리를 향해 차가운 기운이 밀려왔다.
스악!
“ 커억!”
서군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자리에 멈출 수는 없었다. 서군은 부상 정도를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몇 바퀴를 계속 굴렀다.
그런 다음 유설연과 상당한 거리를 뒀다는 느낌이 들자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 으윽!”
그의 입에서 고통스런 비명이 터져나왔다. 갑자기 오른편이 쑥 꺼지며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서군은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른편 다리 무플 아래가 보이지 않았다.
휘익
바로 그때 전방에서 뭔가가 빠르게 날아왔다. 서군은 한 발로 중심을 잡으며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스악!
물체는 깔끔하게 절반으로 잘려 나갔다.
툭! 툭!
“ 이건!”
바닥으로 떨어진 물체를 본 서군의 얼굴이 검게 죽었다. 가죽 신발이 신겨져 있는 그것은 자신의 발이었던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유설연을 보았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바로 옆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지만 서군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며 유설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 십족이 아니라 십일족으로 늘었어. 아니 너희 서씨를 아는 놈은 전부 없애버릴 거야. 씨를 말려 버릴 거라고.”
유설연은 다시 서군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죽인다, 유설연! 죽여 버리겠다!”
서군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하지만 오르편 다리가 잘려나간 그는 더 이상 전과 같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유설연의 공격에 조금씩 밀리더니 결국엔 팔다리가 하나씩 잘려나갔다.
“ 할 말 있어?”
마침내 머리와 몸통만 남았을 때 유설연은 손을 멈추며 물었다.
“ 사, 살려다오.”
“ 그 상황에서도 살고 싶어?”
“ 나 말고 내 가족을 말하는 거다. 제발 그들을 살려다오. 부탁이다.”
“ 그건 안 되겠어. 대신 널 살려 줄게.”
유설연은 비웃는 얼굴로 서군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 밀사!”
그는 가마에 오르면서 유덕을 불렀다.
“ 말씀하십시오. 소제독.”
“ 동생들의 시체는?”
“ 이미 챙겼습니다.”
“ 그럼 가.”
“ 알겠습니다.”
밀사신장 유덕을 비롯한 여섯 명의 신장들은 가마를 들고 사악곡 입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 유설연, 살려다오!”
서군은 멀어지는 유설연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유설연은 대답이 없었다.
“ 날 죽이고 그들을 살려 달란 말이다!”
서군은 재차 고함을 내질렀다.
“ 당신을 죽일 사람은 따로 있소, 가주.”
뒤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군은 고개를 돌렸다.
“ 창익.....”
서군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렸다.
뒤에 서 있는 자는 해림의 이인자 가문이었던 창가의 가주 창익이었다. 그는 금산으로 들어갈 때 모든 가족을 데리고 들어갔는데 지난 세월 동안 대를 잇지 못하고 혼자만 남은 상태였다.
“ 차, 창제!”
서군은 창익을 불렀다.
“ 난 당신이 자식을 둘이나 두고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 하지 않소. 자식을 살리고 싶은 건 부모의 마음이니까. 내가 당신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가증스러운 위선이오. 적어도 자식을 두고 왔다면 대가 끊긴 우리들 앞에서 동병상련이니 뭐니 하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소. 과부 마음은 홀아비가 안다는 그런 말은 절대 하지 말았어야 했소.”
창익은 커다란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 차, 창제!”
“ 적어도 술에 취해서 대가 끊겼다며 질질 짜지는 말았어야 했단 말이오.”
창익은 들어올린 돌을 힘껏 내리찍었다.
퍼억!
“ 크아악!”
서군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비명에도 불구하고 창익은 다시 돌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다시 창익의 머리를 향해 내리 찍었다.
퍼억!
이번에는 아무런 비명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서군은 이미 시체로 변한 뒤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창익은 계속해서 돌로 창익의 머리를 찍었다.
“ 우린 나오지 말았어야 했소. 가주. 우리 자리는 그곳이었단 말이오.”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던 창익은 서군의 머리를 짓이겼던 피와 뇌수가 잔뜩 묻은 그 돌을 향해 자신의 머리를 힘껏 찍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창익의 동체가 천천히 무너졌다. 쓰러진 그의 얼굴엔 회한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