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222화 (222/232)

제 8장 외침

일생 일대의 기회를 잡았다는 느낌은 머릿속 계산보다 몸이 먼저 감지하는 사람이 있는데 공오인이 그랬다.

그는 자기 입에서 침이 떨어진다는 사실도 모르고 조천신으로부터 온 보고서에 집중했다. 보고서의 분량은 책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공오인은 지겹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탁!

무려 반 시진에 걸쳐 보고서를 읽은 그는 한편에 두었던 찻잔을 들고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둥둥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 첫째, 오군도독부의 수장 네 명이 죽었다. 둘째, 동창의 실질적인 수뇌인 유설연은 소수의 정예를 데리고 묘봉산으로 들어와 있다. 셋째, 금산이 열리고 팔림의 수장들이 나왔다. 백십여 년 전에 들어갔던 가주들은 대부분 살아 있고, 그들 중에는 이세연도 있다. 총 인원은 팔십 명가량이다. 그들은 지금 연우강을 쫓고 있다.”

공오인은 보고서 내용을 대충 요약해 보았다.

금의위 위사 수천 명이 죽고 사주 두 명이 죽었다는 말도 있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북경의 정국에 영향을 끼칠 만한 사건과 연우강에 대한 것만 있으면 충분했다.

“ 그러니까 유설연과, 제승기만 없으면 북경의 일인자는 내가 된다는 소리네.”

공오인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그는 보고서를 챙겨 들고 방을 나섰다.

잠시 후 그가 들어선 곳은 남경왕 주진무의 거처였다. 주진무는 소림사의 고조 요료대사와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 어쩐 일인가?”

주진무는 공오인을 보며 물었다.

“ 북경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공오인은 북경에서 온 보고서를 주진무 앞으로 내밀고는 자리에 앉았다.

“ 일이 커지고 있는 모양이군.”

주진무는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보고서를 읽어 나가던 주진무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지더니, 조금 전 공오인과 마찬가지로 반시진 동안 쉬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탁!

주진무는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방금 읽은 내용을 정리하는 듯 그는 한 곳을 응시하고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차는 마시지 않고 들고만 있었다.

“ 남천장군 명사군, 천승장군 여절령, 차령장군 소정방, 현옥장군 금자훈이 죽고 오군도독부 전 병력은 묘봉산에 들어가 있다고 돼 있던데 맞는가?”

공오인 또한 보고서 내용 이상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물었다.

“ 그렇게 돼 있었습니다.”

“ 금의위는 사주 두 명이 죽고, 위사는 이천여 명가량이 죽었다고 하던데 맞는가?”

“ 그런 것 같습니다.”

‘ 아미타불!’

듣고 있던 요료대사는 내심 불호를 읊었다.

만일 방금 들은 내용이 금의위 보고서가 아니거나, 공오인이 금의위 영반이 아니었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먼저 언급한 네 명은 주진무가 등장하기 전까지 북경에서 최고 권력을 행사하던 오군도독부 도독들이고, 뒤의 두 명은 금의위 삼인자라고 할 수 있는 사주들이며 마지막 사망자 이천명은 금의위 위사들이었다.

과연 전쟁 상태가 아닌 상황에 황제가 기거하는 북경에서 그렇게 많은 권력자들이 죽어나간 일이 있었는지.

역사상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였을 뿐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이라고 한다.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 금의위 위사들을 없앤 사람이 연우강이라고 하면 오군도독부 도독은 누가 없앴을 것 같은가?”

주진무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보고서에는 오군도독부 도독 네 명을 없앤 자에 대해서는 언급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가장 가능성이 높은 자는 유설연입니다.”

“ 그놈이 동창의 특수부대를 데리고 도독들을 없앴단 말인가?”

“ 후군도독부는 금자훈을 비롯한 호위무장까지 전부 살해됐다고 합니다. 그건 개인이 아니라 다수의 짓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 그렇겠군. 그건 그렇고 구림세가 무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그들을 꺼낸 건 큰 실책입니다. 저하.”

“ 회유는 불가능하단 말인가?”

“ 그들은 건국 공신들입니다. 구룡천군과 한 울타리에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자들이 아닙니다.”

“ 그건 내 생각과 같군.”

“ 그럼 지금부터 정리를 해보세. 자네 생각은 어떤가?”

“ 최고의 기횝니다.”

“ 일생일대의 기회란 말인가?”

주진무는 빙그레 웃었다.

그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묘봉산에 들어간 자들 중 영락장군 제승기, 화화호 유설연, 화랑 우성연, 팔신장, 동창의 특수부대, 연우강 그리고 구림세가 잔당만 없애면, 북경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그렇습니다. 저하. 저하께서는 자금성을 제외한 북경의 주인이 되십니다.”

“ 그 기회를 놓칠 수가 없지.”

주진무는 고개를 돌려 요료대사를 보았다.

“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출병해야 한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요료대사가 물었다.

“ 연우강의 실력은 대사가 잘 알 테고, 그놈 말고도 금의위 위사를 괴롭히는 동창의 특수부대가 있다고 하오.”

“ 몇 명이나 된답니까?”

“ 오십여 명 정도인데 특급인 모양이오.”

“ 그럼?”

“ 그들을 전부 정리해야 할 것 같소이다.”

“ 누굴 보낼 참입니까?”

“ 묘봉산 전투의 결과에 따라 북경의 권력 지도가 바뀌게 될 거요. 묘봉산에서 우리만 나오면 앞으로 오십 년 동안 북경은 내 소유가 될 거고, 유설연이 살아 나가게 되면 우린 구룡천문에 만족해야 하오.”

“ 저하께서 원하는 건 어떤 겁니까?”

“ 난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소. 대사. 하지만 황제가 누리는 권력은 누리고 싶소.”

주진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물론 그가 가장 되고 싶은 건 황제다. 하지만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고, 그 희생을 치른다고 해도 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차선을 선택했다. 황제 직위는 그대로 드고 권력만 가질 참이었다.

“ 자금성을 제외한 북경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겁니까?”

“ 그렇소이다.”

주진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 누가 가기를 원하는지 정확하게 말을 해주십시오. 저하.”

“ 자발적으로 나서는 건 싫단 말이오?”

“ 싫다는 게 아니라 열 개 문파에서 골라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고 싶을 뿐입니다.”

“ 내가 골라 주면 따르겠소?”

“ 구룡천군의 군주시니까요.”

“ 소림, 무당, 화산에서 각각 삼십 명씩 뽑아서 데리고 가시오. 지휘는 요료대사가 해주시오.”

“ ...... 알겠습니다. 출발은 언젭니까?”

잠시 주진무를 바라보던 요료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으로 모시기로 했으면, 설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명령을 따라야 할 것이다.

“ 놈들이 묘봉산에서 나가기 전에 해치워야 하오.”

“ 오늘 출발해야겠군요.”

“ 공 영반도 묘봉산으로 갈 테니까 함께 출발하도록 하시오.”

“ 아미타불! 알겠습니다. 군주. 그럼 창천진인과 자하검신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요료대사는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응로 나온 요료대사는 처소로 향했다.

그의 초소는 개방 총단 북쪽 구룡각이었다. 구룡각의 일층은 식당 겸 휴게실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구룡천군 몇 명이 모여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 무슨 일이 있는 겐가?”

개방의 용왕개가 요료대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차를 마시러 간다고 했던 사람이 잔뜩 굳은 얼굴로 들어와서 하는 말이었다.

“ 북경으로 가게 됐네.”

“ 북경엔 왜?”

“ 창천과 자하 자네들도 준비하게.”

용왕개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창천진인과 자하검신을 돌아보며 말했다.

“ 우리도 가야 하는 건가?”

찻잔을 들어올리던 두 사람이 깜짝 놀라 물었다.

“ 각각 서른 명씩 차출하도록 하게.”

“ 허허! 요료! 답답하이!”

듣고 있던 용왕개의 목소리가 커졌다.

“ 나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네. 다만.......”

요료대사는 조금 전 안에서 오간 이야기를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 ........!”

일행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너무 엄청난 말이었던 탓이다. 오군도독부 도독 네 명이 죽고 금의위 위사 이천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는 건 거의 전쟁에 준하는 사태다. 이곳에서 구룡천문 개파에 정신을 쏟고 있는 사이에 북경에서는 실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 그, 그 일은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 연우강이란 말인가?”

용왕개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

“ 단초를 제공한 사람은 연우강이 아니고 군주와 공 영반이었네.”

“ 군주와 공영반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 연우강의 부모를 납치하고 양성일 도독동지를 없앤 사람이 그들이란 말이네. 우리는 방조자였고,”

“ 으음!”

용왕개는 신음을 내뱉었다.

그랬다.

부모를 납치하지 않았다면 연우강이 북경으로 올 리가 없었을 테고, 지금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가만있는 사람을 건들고, 그 사람이 화를 내자,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하며 떼거리로 덤비는 꼴이다.

“ 그래서 우리가 직접 그놈을 없애러 가는 건가?”

듣고 있던 화산파 고조 자하검신 노담승이 물었다.

연우강에게 제자인 오악제일검 나관과 제검 양정일을 잃어서인듯 그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짙게 배여 있었다.

“ 그뿐만 아니라 화화호 유설연과 그를 따르는 자들 오십 여 명, 그리고 좌군도독부의 제승기까지 전부 없애야 하네.”

“ 준비하겠네.”

노담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나도 준비해야겠구먼.”

곧이어 무당파의 고조 창천진인이 일어났다.

요료대사는 소림의 전대 방장인 해천대사를 보았다. 해천 대사의 얼굴이 잔뜩 상기돼 있었따.

“ 각선의 복수를 하고 싶은 게냐?”

“ 소림사를 너무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조.”

해천대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가사 장삼보다는 비단 옷이 더 좋은 모양이구나.”

“ 복수의 달콤함도 느껴보고 싶습니다.”

“ 지금 우리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 몽산으로 들어갈 때부터 전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 하면?”

“ 제 신념과 일치하는지 일치하지 않는지 그것만 따졌습니다. 그래서 신념과 일치하는 일은 정의고, 일치하지 않는 일은 악으로 간주했습니다.”

“ 이번에도 마찬가지란 말이냐?”

“ 그렇습니다. 연우강은 제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놈입니다.”

해천대사는 ‘놈’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 서른 명을 데려갈 참이다.”

“ 사숙님들게도 말하겠습니다.”

“ 알아서 하거라.”

요료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천대사가 사숙님이라고 하는 자들은 연우강에게 죽임을 당한 각선의 동문 사형제를 말하는 것이었다.

“ 그럼 정문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해천대사는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요료대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로부터 두 시진 후.

개방의 개봉 총단 정문 앞에는 소림사, 무당파, 화산파 전대 무인 백여 명이 집결했다. 그들은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방갓을 눌러쓴 채였다.

“ 가세!”

요료대사는 맨 앞에 서 있는 공오인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 나도 같이 가세.”

그때 뒤편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료대사는 고개를 돌렸다.

검은 장포를 걸치고 방갓을 쓴 자가 이편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개방의 고조 용왕개였다.

“ 굳이 가야 할 필요가 있는가?”

요료대사가 물었다.

“ 더 늦기 전에 확인하고 싶네.”

“ 확인해서 맞으면?”

요료대사는 다시 물었다.

“ 그 후는 생각해 보지 않았네.”

“ 조금 전에 구룡각에서 해천이 한 말 들었는가?”

“ 정의보다는 신념이 우선한다는 말 말인가?”

“ 우린 정의가 아닌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살아왔네.”

“ 그렇겠지. 아무튼 가세.”

용왕개는 공오인을 보았다.

“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공오인은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대문을 나선 용왕개는 고개를 돌려 대문을 보았다.

그곳에는 구룡천문이란 글귀가 적힌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현판을 바라보았다.

구룡천군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저걸 얻었다.

과연 저 현판이 일생과 바꿀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만일 저 현판을 포기하고 가족을 선택했다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는지.

“ 휴-우!”

용왕개는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

전면을 바라보는 이세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곳에는 크지 않은 호수가 있었는데, 호수 주변엔 시체들이 너부러져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은 환림의 림주 치백이었다.

사악곡 입구에서부터 이곳까지 오면서 수십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가장 먼저 발견한 시체는 해림의 가주 해천왕 서림과 그의 가솔들이었고, 그 다음에 발견한 자들은 혈룡대군 상관우기를 비롯한 그의 가솔들, 그리고 이곳으로 오기 전에는 사제 낙강일과 그의 가솔들의 시체를 보았다.

“ 시체의 상태는 어떻던가?”

마천제 단목숭을이 치백의 시체를 보며 물었다.

치백의 시체는 수십 개의 무기에 관통당한 상태였다.

“ 해천왕은 도의 형태의 특이한 무기에 당했고, 혈룡대군은 암기에 당했네.”

“ 연우강에게 방수가 있다는 말인가?”

“ 화화호라는 자가 안으로 들어왔다고 하지 않던가?”

“ 그자가 해천왕을 없앨 정도로 강하단 말인가?”

“ 그건 알 수 없네. 하지만 바닥에 누운 사람은 그자가 아니라 해천왕이란 사실이네.”

“ 하면 혈룡대군은 어떻게 된 건가?”

“ 그 역시 알 수가 없네. 죽은 상태로 봐서는 전력을 다한 것 같은데.......”

“ 그러니까 우리 앞에는 엄청난 강자가 있다는 말이구먼. 그것도 세명씩이나.”

“ 그런 셈이네.”

이세연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고 하더니.....”

단목숭을이 나직하게 혀를 찼다.

“ 가장 큰 패인은 놈이 뱀을 깨워놓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몰랐다는 거네.”

시체를 조사하면서 알아낸 것들이었다.

대부분의 무인들은 적선혈사에 중독된 상태였고, 심지어 어떤 자들은 독을 몰아내기 위해 행공을 하다가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겨울이란 생각만 했지. 연우강이 겨울잠에 들어간 뱀을 깨워 놓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점이 가장 큰 패인이었다.

“ 놈은 지금 어디로 갔는가?”

단목숭울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 요사가 뒤쫓아갔으니까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네.”

휘리릭!

바로 그때 멀리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세연 일행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일행의 시야에 치마를 입은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연우강의 흔적을 쫓아갔던 시나울이었다.

“ 알아냈는가?”

“ 놈이 간 곳은 화악곡이예요,”

“ 그곳도 금지군.”

이세연의 얼굴이 굳었다.

사악곡 또한 금지 중의 한 곳이었는데 뱀에 대해 파악하지 못한 것이 많은 희생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번에도 금지로 들어갔다고 하니 공연히 불안했다.

“ 그래요.”

시나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이번엔 그곳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피고 들어가도록 하세.”

단목숭을 또한 이세연과 같은 생각인 듯 굳은 얼굴로 말했다.

“ 일단 시체를 정리하도록 하세.”

이세연은 절벽 아래쪽으로 가서는 바닥에 대고 가볍게 오른 주먹을 내밀었다. 그의 주먹에서 황금빛 광채가 전면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은림의 가주 무공인 황룡파천신권의 이식인 파천황이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고 반 장 깊이의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이세연이 판 구덩이는 환림 무인들의 무덤이었다. 이세연이 무덤을 만들고 있는 사이에 다른 이들은 시체를 가져와 구덩이 안에 넣고 흙을 덮었다.

무덤을 만들고 간단하게 묵념으로 작별인사를 한 일행은 곧바로 자리를 떴다.

그들이 연우강을 쫓아 몸을 날려 가는 화악곡은 사악곡에서 남쪽으로 삼백 장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북쪽 절벽으로 올라서서 오십여 장 나아가자 아래로 내려가는 경사지가 나타났다.

시나울은 그곳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숲은 울창해지고, 주변은 어두컴컴해졌다. 그리고 어디선가 은은한 향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척!

이세연이 긴장한 얼굴로 그 자리에 멈췄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보아도 놀란다고 적선혈사 독 때문에 곤욕을 치른 그는 느닷없이 흘러나오는 향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세연은 재빨리 호흡을 멈추고 독림의 가주 독광야 척발승을 보았다. 독을 다루는 무인들은 독을 판단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 독은 아닌 것 같네.”

척발승 또한 다르지 않았다.

척발승이 독의 유무를 판단하는 방법은 재채기였다.

독 기운이 약간이라도 포함돼 있으면 재치기를 하곤 했는데 방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향기에 독이 포함돼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독이 없다는 말을 들은 이세연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향기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욱 짙어졌다.

그렇게 오십여 장가량을 더 나아갔을 때 안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안개 속으로 거무튀튀한 거대한 덩어리들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 덩어리는 반구 형태였는데 높이는 이 장 가량이고 지름은 일 장가량이었다.

“ 무엇일 것 같은가?”

이세연은 거대한 덩어리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 덩굴장미에요.”

이세연의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시나울이었다.

“ 저게 전부 장미란 말인가?”

이세연은 시나울을 돌아보았다.

“ 묘봉산에는 장미가 많아요. 저런 형태를 하고 있는 건 전부 장미나무라고 보면 돼요.”

“ 들어가세.”

이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악곡 안으로 들어갔다. 화악곡 안쪽에는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장미 잎들이 많이 쌓여 있었다. 후각의 마비는 계속되고 있는 듯 이세연 일행은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했다.

“ 공동묘지구먼.”

안으로 들어가던 단목숭을이 중얼거렸다.

이세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대가 낮고 안개가 자욱한 화악곡은 다른 곳에 비해 훨씬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 우뚝우뚝 솟아 있는 덩굴 장미는 무덤을 연상시켰다.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 난 오른편으로 가보겠네.”

단목숭을은 이세연을 보며 말했다.

“ 놈에게 치백과 낙강일이 당했다는 걸 명심하게.”

“ 난 마천제 단목숭울이네.”

여간해서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 단목숭울이 자존심이 상한 듯 이세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 못 믿어서가 아니라 조심하라는 말이네.”

“ 걱정 말게. 놈이 나타나면 큰 소리로 자네를 부르도록 하겠네.”

단목숭을은 피식 웃으며 가솔을 데리고 오른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 난 왼편으로 가겠네.”

단목숭울이 오른편으로 걸음을 옮기자 귀마존 청천수가 가솔들을 이끌고 왼편으로 이동했다.

“ 설사 공을 세운다고 해도 상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청 가주.”

“ 알고 있네. 총가주. 그럼 이곳을 한 바퀴 돈 다음에 만나도록 하세.”

청천수는 손을 흔들어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 우리도 가지.”

“ 저희들이 길을 잡겠습니다.”

구양을을 비롯한 세 명이 앞으로 나섰다.

일행은 좌우를 살피며 전진해 나아갔다. 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낙엽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이세연의 얼굴이 슬쩍 찌푸려졌다.

발걸음 소리가 너무 커 금세 들킬 것 같았다.

“ 초상비를 펼쳐라!”

“ 초상비를 펼쳐라!”

척발승과 시나울도 같은 생각이었던 듯 가솔들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초상비는 풀끝을 밟고 나아가는 신법으로 눈 위를 걸어갈 때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는 무답설후믛노가 비슷하고, 허공을 자유자재로 걸어가는 허공답보보다는 한 단계 낮은 신법이다.

보통 일 갑자가 넘어야 간신히 흉내를 낼 수가 있는데 능숙하게 펼치기 위해서는 내공이 일 갑자 반은 돼야만 한다.

초상비를 펼치라는 말이 떨어지자 독림과 요림의 가솔들은 일제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가랑비도 계속 맞으면 옷이 젖는다.’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다만 화악곡 어딘가에 숨어 있을 연우강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본래 신법이나 보법은 초식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내공 소모를 적게 하는 측면으로 창안된다. 그래서 뛰어난 신법이나 보법이라고 해도 펼치는 데 내공 소모가 극심하다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한 신법들의 예가 바로 답설무흔이나 초상비였다. 눈 위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법이나 바람에 하늘거리는 풀 끝을 밟고 달리는 그런 신법은 겉보기는 화려하다. 하지만 실전에 사용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목숨이 오락라가하는 상황에서 눈 위에 흔적을 남기지 않거나, 풀 위를 걷는 방법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완전히 불필요한 신법은 아니다.

지금처럼 어딘가를 향해 은밀하게 다가가야 할 경우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도망쳐야 할 경우에는 이보다 좋은 신법이 없다.

문제는 두 신법이 일반적인 신법보다 엄청나게 많은 내공을 잡아먹는다는 사실이다.

이제 막 펼쳤기 때문에 아직은 초상비 경공이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독림과 요림 무인들은 예리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나아갔다.

“ 상당히 넓군.”

이세연은 중얼거렸다.

비록 천천히 나아갔다고 하지만 한 시진 정도를 걸었는데 화악곡의 끝이 나오지 않고 여전히 덩굴장미와 안개가 무덤처럼 엉켜 있는 전경이 이어지고 있었다.

“ 여기서 좀 쉬지.”

이세연은 바로 앞쪽을 가리켰다.

그가 쉴 생각을 한 것은 독림과 요림의 무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거친 숨소리 때문이었다. 한 식경 전부터 간혹 흘러나오는 거친 숨소리가 지금은 꽤나 자주 들려왔던 것이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독림과 요림 무인들은 내공을 풀고 자리에 앉았다.

“ 간단하게 행공을 하도록 해.”

독림의 가주 척발승은 가솔들을 향해 말했다.

잠시 내기를 돌려 몸의 피로를 푸는 행공은 정식 운기행공과는 달리 가부좌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가능했다.

독림 가솔들은 물론이고 요림 가솔들도 일제히 내공을 끌어올려 행공을 시작했다.

그렇게 일다경 정도가 흐르자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 자리에 앉을 때와는 달리 그들의 몸에서는 활력이 넘쳤다.

그들은 다시 초상비 신법을 펼치며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지나가고 반각 후, 나뭇잎이 들썩이는 듯하더니 두 사람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먼저 화악곡으로 들어와 있던 연우강과 봉연이었다.

“ 정말 그래?”

연우강은 미덥지 못한 얼굴로 봉연을 보았다.

그가 두 번째 싸움 장소로 화악곡을 택한 것은 순전히 봉연 때문이었다. 적선혈사가 뿜어내는 독 기운과 화악곡의 꽃 향기가 합쳐지면 가공할 독으로 변한다고 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 제가 독공을 익힌 장소가 바로 이곳이에요.”

“ 정말?”

“ 그렇다니까요.”

“ 적선혈사의 독과 화악곡의 향기가 섞이면 치명적인 독이 된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는데?”

“ 화악곡을 가득 채운 향기 때문에 알게 됐어요.”

“ 이 향기 때문이라고?”

“ 소제독 같은 분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뭘 것 같아요?”

“ 설연에게 필요한 것?”

“ 네.”

“ 여자가 돼야 했으니까... 여성의 향기?”

“ 맞아요. 그분뿐만이 아니라 육체를 이용해서 권력을 잡고자 했던 모든 환관들은 여성의 향기를 필요로 했어요. 하지만 여성의 향기는 하늘이 부여한 거잖아요.”

“ 그래서 장미향을 이용해서 인위적인 향기를 만들어내려고 했다는 거야?”

“ 많은 환관들이 이곳에 있는 향기를 흡수해, 호흡을 통해 자연스럽게 발출되기를 바랐고, 이곳에서 생활을 했어요. 그런데 그들 중 일부 환관이 운기해공을 하다가 독에 중독돼 숨을 거두는 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처음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몰랐어요. 그러다가 죽은 자들에게서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대요.”

“ 사악곡을 지나쳐서 화악곡으로 들어왔다는 거야?”

“ 네, 사악곡에서 서식하는 적선혈사의 독과 화악곡의 장미향이 합쳐지면 청살마독이라는 치명적인 독으로 변하는 거예요.”

“ 저절로 만들어진 장소야?”

“ 저희들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는데, 조사를 해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 누군가가 만들어낸 장소라고?”

“ 하북 사마세가 아세요?”

“ 하북 사마세가라면 적랑 가문인데?”

“ 적랑이라면 사마윤?”

“ 응.”

“ 그 가문에서 삼백 년 전에 조성한 곳이 바로 사악곡과 화악곡이에요.”

“ 장미도 그들이 심은 거야?”

“ 그랬을 거예요. 장미를 심어서 사람이 찾을 수 있는 장소로 만들고 그 다음에 적선혈사를 이용한 사악곡을 만든 것 같아요.”

“ 정적 제거용이었구나.”

“ 그들이 무슨 이유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사악곡과 화악곡의 비밀을 알아낸 동창에서는 소문을 이용해서 그 두 곳과 암악곡을 금지로 만들었어요.”

“ 그럼 화악곡에 대해서는 설연 그 녀석도 알고 있겠네?”

“ 네.”

“ 이틀 걸린다고 했어?”

적선혈사 독과 장미향이 섞여 청살마라독을 만들어내는 시간을 묻는 말이었다.

“ 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청살마라독이 생성되면 가장 먼저 어떤 증상이 나타나지?”

“ 졸려요.”

“ 졸린다..... 딱 좋네.”

연우강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보통의 겨웅, 즉 잠을 푹 자고 난 상황에서 졸린다면 이상하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틀 동안 잠을 자지 못한 상황에서 졸음이 쏟아진다면 그 현상을 이상하게 받아들일 자는 없을 것이다.

“ 뭐가 좋다는 거죠?”

“ 피곤한 사람은 졸리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야.”

연우강은 만화은신사영을 펼쳤다.

연우강의 신형이 조금씩 녹아들어 가자 봉연은 재빨리 사망궤 위로 올라갔다. 연우강이 완벽하게 은신술을 펼치게 되면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 준비됐어?”

연우강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 네.”

은신술을 펼쳐 허공으로 녹아들어 간 봉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강은 허리춤에서 사망혈궁을 빼 들며 몸을 날렸다.

바다를 가르고 산을 무너뜨리는 무공을 보유한 무인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본능이다. 식욕에 대한 욕구나 생리적인 욕구는 참는다고 해서 참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특히 생리적인 욕구는 바로바로 해결해야만 한다.

‘ 끄응!’

가옥선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가 요의를 느낀 건 반 시진 전이었다. 휴식 시간을 기다리며 참고 있는데 도무지 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쉬자고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슬쩍 일행을 보았다.

이 정도 속도라면 볼일을 마치고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속도를 슬며시 늦췄다. 일행이 멀어지자 가옥선은 빠르게 움직였다. 덩굴장미 옆으로 다가간 그녀는 다시 좌우를 살피고는 옷을 내리며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곧 그녀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연우강이 사망혈궁의 시위를 늘이자 봉연은 질겁한 얼굴로 물었다.

[ 놈들을 바쁘게 해준다고 했잖아.]

[ 그렇다고 볼일을 보고 있는 여자를 활로 쏴요?]

[ 이건 빈 활이야.]

연우강은 사망혈궁을 들어 보였다.

[ 조금 있다가 화살을 만들어 채울 거잖아요.]

[ 그래서 지금 쏘지 말라는 거야?]

[ 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비겁하다는 거죠. 저렇게 행복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쏘고 싶어요?]

봉연은 가옥선을 가리켰다.

상당히 오래 참은 듯 그녀의 얼굴에서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 나이를 먹어서 무기를 들 힘이 자꾸만 줄어드는 병사가 가장 원하는 게 뭔지 알아?]

[ 뭔데요?]

[ 아침에 못 일어나는 거야.]

[ 아침에 못 일어나요?]

봉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연우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 저녁에는 잠을 자러 들어갔는데, 아침에 못일어난다는 게 무슨 뜻이겠어?]

[ 혹시 밤새 안녕?]

[ 맞아. 잠을 자는 것처럼 편안한 최후를 맞는 걸 가장 원해. 아파서 죽는 것처럼 처량한 게 없거든.]

[ 저 여자도 그럴 거란 말인가요?]

[ 그럴 거란 말이 아니라 나이를 먹었다는 뜻이야.]

[ 행복한 죽음이란 뜻인가요?]

[ 내가 저 여자 입장이 아니니까 행복한 죽음인지 억울한 죽음인지는 알 수가 없어.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어.]

[ 그게 뭔데요?]

[ 옷을 채 추켜올리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한 그 시체를 보게 되면, 시체의 상관이나 동료들은 돌아버릴 정도로 화가 난다는 거야.]

연우강은 차갑게 말하며 사망혈궁을 당겼다.

그러자 내기를 만들어진 검은 화살이 생겨났다.

그는 곧바로 화살을 놓았다. 다른 때완 달리 이번에는 그의 사망혈궁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 이젠 반나절 정도는 견딜 수......’

흡족한 얼굴로 옷을 끌어올리려던 가옥선의 얼굴이 해쓱해졋다. 전면에서 싸늘한 기운이 가공할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 여, 연우강?”

퍼억!

“ 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가옥선의 신형이 장미 덩굴로 처박혔다. 숨이 끊어진 그녀의 얼굴에는 손가락 두께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 그냥 금산에 처박혀 살지 왜 나와서는......’

봉연은 가옥선의 시체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는 옷을 다 올리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비참한 최후가 아닐 수 없었다.

봉연은 머리를 앞으로 내밀어 연우강의 옆얼굴을 보았다. 관계를 가진 여자가 흘리는 땀을 닦아 줄 정도로 자상하면서도, 볼일을 보는 여자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시위를 당겨버리는 냉혹한 사람, 그는 밝음과 어둠을 동시에 간직한 사람이었다.

휙! 휙휙! 휙!

멀리서 이편으로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우강은 몸을 날려 자리를 피했다.

가옥선이 죽은 자리에 당도한 자들은 이세연 일행이었다.

“ 으음!”

이세연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가옥선의 민망한 자세 때문이었다.

이세연을 비롯한 남자들이 고개를 돌린 사이에 요림 무인 한 명이 가옥선을 살폈다. 그러고는 입다 만 옷을 입혀주었다.

“ 강기에 당했어요.”

가옥선의 시체를 살피던 시나울이 말했다.

그제야 이세연은 가옥선의 시체에 눈을 맞췄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가옥선의 이마였다. 그곳에는 손가락 두께의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 깔끔하구먼.”

“ 놈이 상당한 실력자라는 증거네요.”

시나울은 허리를 굽혀 상처를 자세히 살폈다.

“ 그렇구먼. 그런데 왜 대열에서 이탈한 건가?”

“ 볼일 때문이지 왜겠어요?”

시나울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볼일 보다가 이마에 화살을 맞았을 생각을 하니까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올랐다.

푹! 푹!

그녀의 두 발이 발목까지 땅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하지만 그녀는 목구멍까지 솟구친 노화를 꾹꾹 눌러 참았다.

“ 지금부터 세 명씩 조를 짜서 볼일을 보도록 해라.”

시나울은 가솔들에게 말했다.

“ 알겠습니다.”

요림 가솔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 크악!”

“ 아악!”

바로 그때 왼편과 오른편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 동창 놈을 잡았다! 놈들을 없앴다.”

곧이어 멀리서 희열에 찬 외침에 들려왔다.

“ 잡은 모양이군.”

이세연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이세연은 초조하고 있었다.

가솔들의 반응 때문이었다.

얼굴조차 보지 못했는데 네 가문이 몰살을 당하자, 각 가문의 가솔들은 불안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자칫 잘못하면 연우강을 잡는 일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며 우려를 하던 참에 동창 무인을 잡았다는 외침이 들려온 것이었다. 그것은 잃었던 원기를 북돋워주는 외침이었다.

“ 묻어주고 출발하세.”

“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시나울은 구덩이를 파고 가옥선의 시체를 묻었다. 그리고 가솔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멀리 물러나 있던 연우강과 봉연은 이세연 일행이 걸음을 옮기자 다시 움직였다.

[ 정말 동창 무인일 거라고 보세요?]

봉연이 물었다.

[ 방금 고함을 내지른 녀석은 적랑이야.]

[ 사마윤?]

[ 응!]

[ 그가 왜 동창 무인을 없앴다고 고함을 지른 거죠?]

[ 조금 전 이세연 그자 봤어?]

[ 네.]

[ 어땠어?]

[ 연 공자가 죽인 시체를 볼 때만 해도 잔뜩 위축돼 있었는데,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했어요.]

[ 이세연 그 자만 그랬어?]

[ 아뇨. 다른 자들에게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가만.....!]

봉연은 연우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어느 한쪽이 계속해서 이기는 일방적인 전투는 오래 지속할 수가 없는데 왠지 알아?]

[ 당하는 쪽이 항복을 하거나 도망쳐 버리기 때문이잖아요.]

[ 자존심이 있으니까 금산 무인들을 절대 항복은 하지 않을거야. 그치?]

[ 그렇겠죠.]

[ 그때 가장 많이 쓰이는 용어가 작전상 후퇴라는 말이야.]

[ 이세연도 그럴 거라고 보세요?]

[ 갈 곳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북경으로 돌아가면 구림세가가 있잖아.]

[ 작전상 후퇴라는 말고 함께 구림세가로 들어가 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 맞아. 그럼 난 구림세가까지 쫓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구림세가의 가주 이연까지 죽여야 하거든]

[ 이미 오군도독부 도독들을 없앴고, 이번엔 금의위 영반까지 죽인다면서요.]

[ 이연이 추가된다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고?]

[ 아닌가요?]

[ 그 양반을 없앨 수가 없어.]

[ 왜요?]

[ 그녀가 슬퍼하는 걸 지켜볼 자신이 없거든.]

[ 그녀? 혹시 이지약 소저를 말하는 거예요?]

봉연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 난 한 번 맺은 인연은 여간해서는 내 손으로 자르진 않아.]

[ 잤군요.]

[ 아무튼 그녀를 없앨 수 없으니까 이곳에서 해결을 봐야 해!]

[ 대체 몇 명이나 되는 거죠?]

[ 그게 중요해?]

[ 중요한 건 아니지만.]

[ 난 아직 장가도 안 간 총각이야, 인마.]

[ 피이! 총각이면 이년 저년 다 건들고 다녀도 되는건가?]

[ 무슨 소리야?]

[ 상황이 그렇잖아요.]

[ 상황?]

[ 네.]

[ 그런 상황을 만든 건 내가 아니고 너희들이잖아.]

[ 우리라고요?]

[ 내가 너보고 자자고 한 적 있어?]

[ 그런 말이 어딨어요?]

[ 우리 둘 중 덮친 사람은 내가 아니고 너였어.]

[ 거절도 하지 않았잖아요.]

[ 선녀보다 더 예쁜 여자가 자자고 덤비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더구나 혼인한 유부녀들도 아니고.]

[ 선녀보다 더 예쁜 여자?]

[ 내가 말을 잘 못한 거야?]

[ 아뇨, 당신은 최고에요.]

봉연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어디까지 이야기하다가 옆으로 샌 거지?]

[ 이연을 죽일 수 없다는 말까지 하다가 이지약을 꿀꺽했다는 쪽으로 샜어요.]

[ 아무튼 그 양반을 비롯한 금산 무인들은 이곳에서 정리를 해야 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곳에 잡아둬야 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나게 되면 떠날 수가 없거든.]

“ 아악!”

“ 으아악!”

“ 내가 동창 무인을 잡았다. 잡았다!”

이번에 고함을 내지른 자는 군무옥이었다.

[ 그럼 저 외침은 금산 무인들의 사기를 북돋워주는 외침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 맞아. 지옥으로 들어가게 할 힘을 주는 외침이지.]

연우강의 입가에 싱긋 미소가 맺혔다.

[ 그런데 적을 속일 수 있을 거라고 보세요?]

[ 그게 문젠데, 놈들이 삼 개 조로 나뉘어 있고, 상당히 떨어져 있으니까 충분히 속일 수 있을거야. 뭐 속지 않아도 상관없고.]

[ 이제 어디로 갈 거죠?]

[ 신발을 던져 봐.]

[ 신발은 왜요?]

[ 일단 던져.]

휙!

봉연은 허공으로 신발을 던져 올렸다.

높이 솟구쳐 올랐던 신발이 아래로 떨어졌다.

[ 서쪽으로 가면 되겠다.]

연우강은 왼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 이세연은 맨 마지막?]

[ 맨 마지막이 아니라 그는 사악곡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이틀 후에도 독에 중독되지 않잖아. 반면에 왼편으로 간 귀림 무인과 오른편으로 간 마림 무인들은 적선혈사의 독에 노출된 상태지.]

[ 이틀 후면 중독된다는 뜻인가요?]

[ 그렇게 되지 않을까?]

연우강은 되물었다.

[ 그렇게 될 거예요.]

[ 그럼 우린 지금부터 이틀 동안 푹 자면 되는 거네?]

[ 자고 싶어요?]

[ 딱히 할 일도 없잖아.]

[ 신체 건강한 젊은 남녀가 함께 있는데 할 일이 없다는 건 들끓는 젊음에 대한 모욕이에요, 연 공자.]

[ 정말 그렇게 생각해?]

[ 전 늘 그렇게 생각해요.]

봉연은 활짝 웃으며 연우강의 목을 끌어안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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