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가늘고 길게
청천수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가솔을 보았다.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자는 사악곡에서 적선혈사에 목을 물렸지만 서둘러 응급조치를 해서 간신히 목숨을 구한 우창일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우창일이 잠에 취해 깨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독에 당한 것 같지도 않은데 도무지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짝!
가솔 중 한 명인 나석영이 우창일의 뺨을 후려쳤다.
하지만 우창일은 깨어나지 못했다.
“ 가주님!”
나석영은 청천수를 돌아보았다.
“ 뭐라고 보느냐?”
“ 이런 증상은 저도 처음입니다.”
나석영은 고개를 저었다.
우창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독일 거라고 생각지 않느냐?”
“ 우창일은 잠에 취했을 뿐입니다. 독이라면 저런.....”
“ 독 맞아.”
느닷없이 나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 헉!”
“ 억!”
청천수 일행은 질겁한 얼굴로 경계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자세를 풀었다. 방금 말을 건넸던 자는 이십여장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자 목소리도, 그렇다고 남자 목소리도 아닌 중성적인 목소리를 지닌 자가 가마에 타고 있었다.
“ 누구냐?”
청천수는 가마 안으로 시선을 집중하며 물었다.
가마는 앞창이 열려 있었는데, 창 너머에서는 누에 확 뜨일 정도의 미녀가 앉아 있었다.
“ 동창 소제독.”
유설연은 나직하게 말했다.
“ 동창 소제독이 이곳엔 웬 일이냐?”
청천수는 서서히 내기를 끌어올리며 말을 뱉었다.
“ 백 년 동안 금산에 처박혀 살아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를 거야. 그래서 간단하게 알려 줄 참이니까 귀 씻고 잘 들어.”
꿈틀.
청천수의 눈 초리가 사정없이 치켜 올라갔다. 더불어 그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요동쳤다.
하지만 유설연은 그런 청천수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 동창의 소제독인 화호화 유설연이 떴다는 말이 들리면 걸어가던 인간은 물론이고 짐승들 그리고 날아가던 새들까지도 아래로 내려와서 가마 앞에 오체투지를 해.”
“ 대단한 권력을 지닌 모양이구나.”
“ 대단한 정도가 아니라 네가 일을 해주고 있는 금의위 정도는 발톱에 낀 때 정도로 밖에 생각지 않아.”
“ 그런 엄청난 권력을 지닌 놈이 부하를 시키지 않고 이곳까지 직접 온 이유가 뭐냐?”
청천수의 얼굴에 조소가 번졌다.
그가 알기론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엄청난 권력을 지녔다면, 명령만으로 일 처리를 하지 몸으로 직접 뛰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곳까지 직접 쫓아온 자가 스스로 최고 권력자라고 칭하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내가 움직여야 오군도독부 늙은이들이 움직이거든.”
“ 그럼 그들을 유인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단 말이냐?”
“ 응! 다행스럽게도 놈들은 묘봉산으로 들어왔어.”
“ 성공했으면 돌아갈 일이지 왜 이곳에 남아 죽음을 재촉하는 거냐?”
“ 그 녀석 때문이지.”
“ 그 녀석?”
청천수는 의아한 눈으로 유설연을 보았다.
“ 너희들에게 독을 먹인 그 녀석 말이야.”
“ 연우강을 말하는 거냐?”
“ 저기 있잖아.”
유설연은 오른쪽 덩굴장미 위를 가리켰다.
휙!
나직한 바람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연우강이 유설연 곁으로 날아 내렸다.
“ 너무한 거 아냐?”
유설연은 연우강을 빤히 바라보았다.
“ 뭐가?”
“ 북경에 온 지 한 달이 넘었잖아.”
“ 한 달이 넘었는데 이제야 나타났다고?”
“ 아냐?”
“ 그동안 바빴어, 자식아.”
“ 쟤와 할 시간은 잇고 나와 만날 시간은 없었다는 거야?”
유설연은 연우강 곁에 서 있는 봉연을 턱으로 가리켰다.
“ 무슨 소리야?”
“ 그 동안 쉴 새 없이 했다는 게 쟤 얼굴에 씌어 있는데?”
“ 겨울밤은 혈기왕성한 젊은 남녀 둘이 보내기에는 너무 길어.”
“ 그래서 쟤 얼굴에 꽃이 만발할 때까지 해댄 거야?”
“ 봉연의 얼굴에 꽃이 피었어?”
“ 꽃만 핀 게 아니라 온몸에서 요기가 넘치다 못해 흐른다, 인마.”
“ 그 정도야?”
연우강은 봉연을 빤히 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보아도 봉연에게서 요기가 흐른다는 걸 느낄 수 없었다. 다만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활기차게 변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 뭘 어떻게 했기에 애를 저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거냐?”
“ 난 늘 최선을 다하잖아.”
“ 설마 그 짓에도 목숨을 거는 것은 아니겠지”
“ 걸면 안 돼?”
“ ......!”
유설연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건다는 게 아니고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야. 그리고 내가 최선을 다하면 상대방에게 좋은 거니까 그렇게 심각한 얼굴할 필욘 없다.”
“ 최선을 다하는 건 좋은데 제발 목은 걸지 마라!”
“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거기에 앉아 있을 거냐?”
“ 저 자식이 화를 낼 때까지.”
유설연은 턱으로 청천수를 가리켰다.
“ 이익!”
청천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비록 지금은 잊혀졌다고 하지만 한때 귀림의 가주였고, 명 제국을 건국했던 주원장 앞에서도 당당했었다. 그런데 이제 서른도 돼 보이지 않는 연우강과 유설연으로부터 철저하게 무시를 당하자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잠에 취한 우창일의 상태가 독 때문이란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진작 공격을 시작했을 것이다.
독에 대한 말을 듣기 위해 둘의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는데, 지금까지 음담패설을 늘어놓은 이유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 때문이었던 것이다.
“ 이제 화가 좀 난 모양이네?”
유설연은 피식 웃으며 작두날을 들고 훌쩍 몸을 날려 연우강 곁으로 섰다.
“ 뭐냐 그건?”
연우강은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 이거?”
유설연은 작두날을 들어 올렸다.
“ 응!”
“ 개작두날!”
“ 개작둔 네 별명이잖아.”
“ 이놈 때문에 개적두란 별명을 얻은 거야.”
유설연은 작두날을 빙빙 돌렸다. 그러자 섬뜩한 소리가 작두날에서 흘러나왔다.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기자 봉연은 허공으로 녹아들어 갔고, 유덕 일행은 가마를 내려놓고 연우강과 유설연을 따라 앞으로 나왔다.
“ 계속 들고 다니는 거야?”
“ 이놈이 나거든.”
“ 너라고?”
“ 개작두 옥면이라고.”
“ 옥면이 본명이야?”
“ 아니!” .
“ 그럼?”
“ 상판이 그럴싸하다고 지어준 이름일 거야.”
“ 원래 이름이 없었단 말이구나.”
“ 넌 있었냐?”
“ 난 이름뿐만 아니라 성도 있었어. 인마.”
“ 그런데 왜 그 성을 안 쓰는 건데?”
“ 원래 성보다는 연 씨가 더 좋아서.”
“ 그런 거였냐?”
“ 응!”
“ 개자식들! 공격해!”
또다시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청천수는 가솔들을 향해 공격 명령을 내렸다.
휙! 휙휙! 휙휙휙!
귀림 무인들은 일제히 몸을 날렸다.
“ 제법인데?”
연우강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어렸다.
바닥을 박차고 날아오른 귀림 무인들의 신형이 허공으로 녹아들어 간 것이었다. 그것은 귀림 무인이면 누구나 익히고 있는 귀령허환술이었다.
“ 환술은 아니지만 은신술은 나도 자신 있지.”
연우강은 허리춤을 더듬어 손괭이와 낫을 뽑아 들고는 만사은신사영을 펼쳤다. 그의 신형 또한 허공으로 천천히 녹아들어 갔다.
“ 커억!”
마지막 남은 얼굴이 사라지려는 순간 허공에서 피가 콸콸 쏟아져 내렸다. 봉연에게 당한 귀림 무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놈은 상당한 강자다. 조심해라!”
청천수는 가솔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 남 걱정하지 말고 당신 걱정이나 하셔.”
유설연은 작두날을 어깨에 걸치며 청천수를 향해 나아갔다.
“ 네가 날 상대하겠단 말이냐?”
“ 그놈은 독에 중독돼서 너부러졌다고 했잖아.”
“ 거짓말 마라, 놈.. 내 몸은 아무런 이상 없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바로 그때 허공에서 처절한 비명과 함께 잘려 나간 머리가 떨어져 내렸다.
“ 그건 네놈의 내공이 저것들보다 약간 강해서 그런 거야. 반 시진 정도만 지나면 너도 저놈들처럼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가 될거야.”
“ 아악!”
철벅!
또다시 처절한 외침과 함께 머리 하나가 허공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머리 없는 몸통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 차앗!”
청천수는 고함을 내지르며 득달같이 유설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유설연을 향해 달려가는 청천수는 양손을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린 채였는데, 먹물처러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그의 성명절조인 폭뢰수라혈마조였다. 그리고 갈고리처럼 생긴 강기 수십 개가 유설연의 전신 요혈을 노리고 쏘아져 갔다.
“ 천조!”
유설연의 입에서 나직한 외침이 흘러나오고 그의 손에 들린 작두날이 커다란 원을 그렸다. 그러자 그의 앞에 커다란 구가 만들어지면서 청천수가 쏘아낸 조들을 감쌌다.
“ 이야합!”
쩌렁쩌렁한 외침이 청천수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 조금 전보다 더 많은 수의 조가 허공을 가득 채웠다.
“ 천조!”
하지만 유설연의 방어 동작은 조금 전 일초와 같았다. 그의 작두날이 둥글게 원을 그리고 커다란 구가 생겨나더니 청천수가 펼친 갈고리 형태의 조를 삼켜 버렸다.
찌익! 찌익! 찌익!
갈고리 형태의 조는 구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거북살스러운 소성을 남기고 스러졌다.
청천수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방금 그가 펼친 무공은 폭뢰수라혈마조 중 폭뢰와 수라였다. 과거에는 그 두 초식이면 승부의 윤곽이 드러나곤 했는데 유설연은 간단한 동작으로 두 초식을 해소시켜 버리고 있다.
그는 유설연의 무기를 자세히 보았다.
“ 범천조화신공이 이렇게 대단하 무공인 줄은 나도 몰랐어.”
“ 그 무공이 버, 범천조화신공이란 말이냐?”
청천수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 설마 유설연이 펼치는 무공이 오백 년 전 조화신옹 이장천이 남긴 범천조화신공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견참보다는 못하지만 나름 쓸 만해.”
“ 견참이라고?”
견참은 말 그대로 개를 참한다는 뜻이었다.
“ 조금 후에 직접 경험하게 될 거야. 다 놀았으면 시작하자고. 그리고 내공을 소모하면 할수록 독이 활동하는 시간이 빨라진다는 건 알지?”
유설연은 작두날을 수평으로 눕혀 청천수를 겨냥했다.
“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더냐?”
청천수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사실 그는 유설연이 이렇게까지 강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범천조화신공을 익혔다면 초식에 있어서는 자신이 따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공에서만큼은 자신이 있어다. 그런데 유설연은 내공에 있어서도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 네가 금산에서 불알이 빠지도록 운기행공 할 때 난 영약을 보약처럼 주워 먹었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삼 초도 버티지 못해.”
“ 죽일! 차아앗!”
청천수는 바닥을 박차고 솟구쳐 올랐다.
그의 양손이 앞으로 쭉 내밀어지고, 붉은 기운이 그의 전신을 감싸고 돌았다.
“ 흐흡!”
청천수는 양손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그의 전신을 타고 돌던 붉은 기운이 그의 손으로 모여들고 곧 허공에 거대한 크기의 조가 생겨났다. 그것은 폭뢰수라혈마조의 마지막 초식인 혈마였다.
앞 두 초식과 달리 혈마는 단순하게 뿌려대는 공격이 아니었다. 세 자 크기의 커다란 조는 줄이 달린 것처럼 청천수가 원하는 곳으로 날아간다.
이기이검술의 일종이라 할 수 있었다.
“ 타앗!”
청천수는 우렁차게 고함을 내지르며 유설연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가 나아가는 곳 세 자 앞에는 붉은 기운을 흘리는 조가 자리해 있었다.
“ 천화!”
유설연의 입에서도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앞으로 내밀었던 작두날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번쩍 들어올린 작두날에서 빙정보다 더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원래는 무공 명칭처럼 불의 기운이 흘러나와야 하는데 냉한 체질로 변한 바람에 바뀐 것이었다. 완전한 여자처럼은 아니었지만 유설연이 쏟아낸 냉기도 주변을 꽁꽁 얼려 버릴 정도로 강했다.
쩌엉!
대기가 얼어붙는 차가운 소성과 함께 유설연의 천화와 청천수의 혈마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끼이익! 끼익!
금속끼리 마찰할 때나 나올 수 있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두 거력이 부딪친 여력으로 유설연 주변이 깊게 파였다.
푸욱! 푸욱!
유설연의 몸 또한 무릎께까지 땅속으로 파고들어가고, 청천수의 신형은 처음 머물렀던 곳보다 더 높은 곳까지 튕겨 올라갔다.
“ 차앗!”
유설연은 무릎을 잔뜩 구부렸다가 힘차게 튕겼다.
“ 으악!”
“ 으악!”
[ 나도 거들까?]
처절한 비명에 이어 연우강의 전음이 들려왔다.
“ 그걸 말이라고 해?”
유설연은 버럭 소리쳤다.
[ 무공을 익힌 무인들은 남의 도움을 받는 걸 수치스럽게 여기잖아.]
“ 그건 자식아. 물건 달린 놈들 이야기고, 난 물건이 없는 내시잖아.”
[ 상관없다고?]
“ 당연히 상관없지. 얼른 저 새끼를 공격해!”
유설연은 작두날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작두날로 가공할 기운이 모여들었다. 그것은 범천조화신공의 마지막 초식인 천멸이었다.
‘ 빌어먹을!’
청천수는 내심 욕설을 흘렸다.
지금은 유설연 한 명으로도 벅찬 상황이다. 그런데 유설연은 연우강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
만일 연우강마저 공격을 해온다면 막아낼 방법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고 멍청하게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허공에 숨은 연우강을 찾았다.
연우강을 찾는 건 쉬웠다. 연우강은 아래쪽에서 몸을 날려 오는 유설연보다 더 강한 기운을 뿌려대고 있었다.
‘ 젠장!’
다시 욕설이 흘러나왔다.
여기서 싸울 게 아니라 총가주가 있는 곳으로 갔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훨씬 편하게 싸울 수 있었을 터인데 독에 대해 알려고 하다가 이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 일단 힘을 분산하는 수밖에.’
청천수는 연우강에게 육 할, 유설연에게 삼 할, 그리고 일할은 이 자리를 빠져나가는 데 사용하기로 했다.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 타아앗!”
청천수는 전력을 다하는 것처럼 기합을 내지르고는 오른손으로 먼저 허공을 할퀴고, 왼손으로도 허공을 할퀴었다. 약간의 시간을 두고 붉은 조가 연우강이 기운을 뿌리고 있는 빈 공간과 유설연을 향해 쏘아져 갔다.
청천수는 감각을 조에 집중했다.
연우강과 유설연이 조를 향해 공격을 하는 순간 발생하는 반발력을 이용해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작된 이야기는 식사가 끝나고 술자리가 이어지더니 기 “ 헉!”
막 몸을 빼려고 하던 청천수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연우강을 향해 날아갔던 조가 함정에 빠진 것처럼 쑥 꺼지며 몸의 균형이 무너져 저린 것이었다.
줄로 연결한 것처럼 팽팽한 상태가 유지되던 중에 한편이 끊어지면 다른 쪽도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청천수는 시선을 돌려 유설연을 보았다.
“ 크악!”
“ 으악!”
왼편 허공에서 마지막 남은 가솔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리고 나석영과 추필모의 머리가 지면으로 추락하는 모습이 보였다.
청천수는 멍한 얼굴로 혈마를 피하며 바로 앞까지 다가온 유설연을 보았다.
“ 이게 바로 견참이야!”
유설연은 작두날을 거꾸러 쥐었다. 그런 다음 청천수의 머리를 향해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내기를 싣지 않은 순수한 힘만으로 휘두른 작두 등은 청천수의 머리를 부수며 코가 있는 부분까지 파고들었다.
“ 크아악!”
아직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청천수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비명은 금세 잦아졌다. 작두 등이 그의 입마저도 부숴 버렸기 때문이었다.
유설연은 청천수의 머리에 작두 등을 꽂은 채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는 오른발로 청천수의 몸을 힘껏 밀며 작두날을 뽑았다.
쿵!
시체로 변한 청천수의 동체가 넘어졌다.
“ 그럴 땐 한쪽만 택하는 거야. 청천수, 양쪽을 다 막으려고 하면 살아날 확률이 전혀 없지만, 한쪽만 택해 동귀어진을 펼치면 살아날 확률은 커져, 왜냐면 네가 동귀어진으로 나오면 우강이 저 녀석은 날 구하기 위해 힘을 쓸 수밖에 없거든.”
유설연은 나직하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가 가마에 오르자 연우강이 몸을 날려와 옆에 앉았다.
“ 어디로 가지?”
유설연은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봉연!” 연우강은 봉연을 불렀다.
“ 단목숭울을 비롯한 마림 무인들이 서쪽에 있어요.”
봉연은 가마 지붕으로 자리를 잡으며 대답했다.
“ 그들을 먼저 없앨 거야?”
유설연은 밀사신장 유덕에게 눈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명령을 받은 유덕은 동생들에게 지시를 내렸고 가마는 곧바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 적랑 그 녀석들이 강해지긴 했지만 단목숭울 또한 만만치 않은 자잖아. 이세연과 단목숭을이 합치며 우리가 힘들어지고 둘 중 한 명을 없애야 한다면 독에 중독된 단목숭울을 먼저 업애야지. 그리고 이세연은 이곳을 항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을거야.”
연우강은 휙휙 지나가는 전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 이 길로 가면 이세연을 피해 갈 수 있어?”
유설연은 전방으로 시선을 주었다. 가마는 화악곡 입구 쪽으로 빠르게 나아가는 중이었다.
“ 이세연은 화악곡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있거든, 그와 마주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 입구야.”
“ 아이고, 나쁜 자식.”
유설연은 손가락으로 연우강의 볼을 잡고 좌우로 흔들었다.
“ 공오인까지 없앤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건지 그 계획부터 세워둬.”
“ 정말 공오인까지 없앨 생각이냐?”
“ 난 항상 목숨을 건다고 했잖아. 이왕 시작했는데, 그 자식까지 제거해야지.”
“ 그러다가 난 네게 엉덩이를 들이밀어야 하는 거 아냐?”
“ 냄새나는 네 엉덩이를 왜 내 앞으로 내미는데?”
“ 네가 황제가 되면 그래야 하잖아.”
“ 미친놈. 황제는 아무나 하는 건지 알아?”
“ 씨팔! 황제라고 씨를 타고난 건 아니잖아.”
“ 씨를 타고나진 않았지만, 그 작자들은 철이 들면서부터 군림천하에 대한 교육을 받아, 인마. 평생 동안 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제대로 못하는 자리가 황제 자린데, 글도 제대로 깨치지 못한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설사 성공해서 그 자리에 앉는다고 해도 일 년을 못 넘겨. 행여 꿈속에서라도 그런 생각은 하지 마.”
“ 내가 그런 생각을 할까 봐 그런 거야?” 런데 오늘 아침은 달랐다.
“ 모든 권력을 다 쥐고 있으면 그런 욕심을 부릴 수도 있잖아. 한계 이상은 절대 넘뵈 마라. 설연. 그게 얇고 길게 사는 길이다.”
“ 굵고 짧게 말고 얇고 길게 살라고?”
“ 우리 같은 놈은 그렇게 사는 게 좋아. 굵고 짧게 살아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면 뭐할 건데? 역사에 이름을 남기면 밥이 나와, 돈이 나와, 아무것도 없잖아, 안 그래?”
“ 킬킬킬! 씨팔, 난 그래서 네 녀석이 좋아. 이 세상에서 가장 속물인 나보다 더 속물 같은 놈이거든.”
뭐가 그리 좋은지 유설연은 키들키들 웃었다.
“ 나도 그래요, 연 공자의 저런 모습이 진짜 좋아요.”
“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하라고 했어. 이년아. 넌 우강이 녀석의 속물근성이 좋은 게 아니라 아래쪽이 미치도록 좋은 거잖아.”
“ 속물근성이 아니었으면 연 공자가 나 같은 년하고 잘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그거라고요.”
“ 풋!”
유설연은 피식 웃었다.
유덕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연우강을 만나고 난 다음부터는 모든 일이 술술, 아니 겁이 날 정도로 잘 풀리고 있다. 이러다가 복에 겨워 뒈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는 연우강을 돌아보았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자 연우강은 고개를 돌렸다.
“ 왜?”
연우강은 유설연을 바라보았다.
“ 나랑 자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내가 살과 뼈가 녹아내리도록......”
슥!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수 하나가 유설연의 목 앞에 와 닿았다.
“ 내가 싫어?”
“ 난 남자하곤 절대 안 자.”
“ 하고 싶으면 말하라고 했지 누가 자재?”
“ 아무튼 한 번만 더 그런 소릴 하면 이걸로 항문을 뽑아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 개새끼. 하기 싫으면 그만이지. 남의 살림 밑천을 뽑아버린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하냐?”
유설연은 엉덩이를 손으로 가린 채 연우강에게서 멀어졌다.
“ 밀사, 서둘러!”
연우강은 사망마비를 다시 원래 자리에 집어넣고 밀사 유덕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 알겠습니다. 공자.”
유덕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가마는 나아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청천수를 비롯한 구림 무인들이 죽은 자리로 이세연 일행이 들이닥친 것은 연우강 일행이 떠나고 한 식경이 지난 후였다.
“ 으음!”
이세연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 시진 전에 비명을 듣고 연우강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는 걸 알았지만 이렇듯 신속하게 처리할 줄은 몰랐다. 누군가 표적이 되더라도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는 버텨줄 줄 알았다. 그런데 청천수를 비롯한 귀림 무인들은 큰 접전의 흔적도 없이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었다.
“ 독이네.”
시체를 살피던 척발승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 무슨 소린가?”
이세연은 깜짝 놀랐다.
“ 독에 중독된 상태로 싸우다가 당했다는 말이네.”
“ 사흘 전에는.......”
이세연은 멍한 얼굴로 척발승을 보았다.
사흘 전 이곳으로 들어올 때 독이 없다고 했다는 사람이 바로 척발승이 아니었던가.
“ 이곳에 있는 장미향에는 인체에 해가 될만한 독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네.”
“ 하면?”
“ 사악곡의 적선혈사가 뿜어내는 독 기운과 합쳐져 반응을 거치면 그때서야 비로소 독으로 변하네.”
척발승은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세연 앞으로 내민 척발승의 손바닥이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 하면 사악곡에 들어간 자들만 중독이 된단 말인가?”
“ 그렇네.”
척발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독.
따로따로 있을 땐 전혀 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한곳에 모여 반응을 일으키면 치명적인 독으로 변하는 것들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설마 사악곡의 적선혈사 독과 화악곡의 장미향이 생독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그럼 마천제는?”
이세연의 시선이 서쪽을 향했다.
요림 무인들은 사악곡에서 들어가지 않았고, 독을 다루는 독림 무인들은 크게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남은 자들은 마천제를 비롯한 마림 무인들뿐이다.
“ 크아아아!”
화악곡이 우르르 떨릴 정도로 엄청난 외침이 서쪽으로부터 들려왔다.
“ 가자!”
이세연은 급하게 몸을 날렸다.
‘ 제발 부탁이네. 숭울. 자네만은 살아남아야 하네. 자네마저 죽으면 난 살아갈 수 없다네.’
서쪽 하늘을 바라보는 이세연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 제 23권 끝>
황금 백수 24 권